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밀양 도호부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양산군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울산군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청도군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흥해군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대구군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경산현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동래현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창녕현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언양현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기장현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장기현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영산현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현풍현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영일현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청하현
⊙ 경주부(慶州府)
부윤(府尹)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바로 신라의 옛 서울이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원년(元年)206) 갑자에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세워서 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 하였다. 【혹은 사라(斯羅), 혹은 사로(斯盧), 혹은 신라(新羅)라고 이른다. 】 탈해왕(脫解王) 9년 을축에 【바로 한나라 명제(明帝) 영년(永年) 8년. 】 시림(始林)에서 닭의 괴이한 일이 있어서,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인하여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가, 기림왕(基臨王) 10년 정묘에 【바로 서진(西晉) 회제(懷帝) 영가(永嘉) 원년. 】 다시 이름을 신라(新羅)로 하였다. 고려 태조 18년 을미에 【바로 후당(後唐) 폐제(廢帝) 청태(淸泰) 2년. 】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가 고려에 항복하자 낮추어 경주로 하였으며, 【신라 박혁거세로부터 김부까지 56왕 9백 92년이다. 】 23년 경자에 【후진(後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4년. 】 올려서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삼고, 성종(成宗) 6년 정해에 【 바로 송(宋) 태조(太祖) 옹희(雍熙) 4년. 】 동경 유수(東京留守)로 고쳤다가, 현종(顯宗) 3년 임자에 【바로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 】 유수관(留守官)을 폐하고 경주 방어사(慶州防禦使)로 낮추었다. 5년 갑인에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고쳤다가 21년 경오에 【바로 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 】 다시 동경 유수(東京留守)로 하였는데, 신종(神宗) 5년 임술에 【바로 송나라 영종(寧宗) 가태(嘉泰) 2년. 】 동경(東京) 야별초(夜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주군(州郡)을 쳐서 겁탈하매, 군사를 보내어 이를 토평(討平)하고, 7년 갑자에 낮추어 지경주사(知慶州事)로 삼았다가, 고종(高宗) 6년 기묘에 【송나라 영종(寧宗) 가정(嘉定) 12년. 】 다시 유수(留守)로 삼았고,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 【바로 원(元)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 고쳐서 계림부(鷄林府)로 일컬었는데, 본조(本朝) 태종 15년을 을미에 【바로 명나라 태종(太宗) 영락(永樂) 12년. 】 경주부(慶州府)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낙랑(樂浪)이다.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 속현(屬縣)이 넷이니, 안강현(安康縣)은 본래 신라 비화현(比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관할[所領]을 정하매 경주부(慶州府)의 임내(任內)로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 경오에 【바로 명나라 태조 황제 홍무(洪武) 23년. 】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본조 태조 3년 갑술에 【바로 홍무 27년. 】 다시 본부(本府)의 임내(任內)로 하였다.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음집벌국(音汁伐國)을 취(取)하여 음집화현(音汁火縣)을 두었는데, 뒤에 그 땅을 안강현(安康縣)에 합속(合屬)시켰다. 】 기계현(杞溪縣)은 본디 모혜현(芼兮縣)이고, 【혹은 화계(化鷄)라고도 한다. 】 신광현(神光縣)은 본디 동잉음현(東仍音縣)인데, 위의 두 현(縣)은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모두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자인현(慈仁縣)은 본디 노사화현(奴斯火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위의 세 고을은 고려 현종(顯宗) 무오에 모두 본부(本府)의 임내(任內)에 붙였는데,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부곡(部曲)이 넷이니, 구사(仇史)는 본디 마진량현(麻珍良縣)인데, 경덕왕이 여량(餘良)으로 이름을 고쳐서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죽장(竹長)은 본디 장진현(長鎭縣)인데, 임고군(林皐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위의 두 고을은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부곡(部曲)을 만들어 모두 본부(本府)의 임내(任內)에 붙였다. 그리고, 북안곡(北安谷)과 성법이(省法伊)이다. 【예전에는 성잉이(省仍伊)라 하였다. 】
금오산(金鰲山) 【본부(本府)의 남서쪽에 있다. 신라 시조의 궁전(宮殿) 유기(遺基)가 있는데, 후인(後人)이 그 터에 창림사(昌林寺)를 세웠다. 지금은 없어졌다. 】 형산(兄山) 【부 북쪽에 있는데,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감포(甘浦)에 이르기 59리, 서쪽으로 경산(慶山)에 이르기 89리, 남쪽으로 언양(彦陽)에 이르기 49리, 북쪽으로 청송(靑松)에 이르기 92리이다.
본부(本府)의 호수는 1천 5백 52호, 인구가 5천 8백 94명이며, 안강(安康)의 호수는 2백 70단(單) 1호, 인구가 1천 4백 50명이요, 기계(杞溪)의 호수는 1백 77호, 인구가 4백 90단(單) 1명이며, 신광(神光)의 호수는 95호, 인구가 4백 48명이요, 자인(慈仁)의 호수는 2백 37호, 인구가 1천 6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66명, 진군(鎭軍)이 2백 9명, 선군(船軍)이 9백 40단(單) 1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이다.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조선(朝鮮) 유민(遺民)이 산골짜기에 나누어 살아서 여섯 마을이 되었으니,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세째는 취산(觜山) 우진촌(于珍村), 네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서, 이것이 진한 육부(辰韓六部)가 되었다. 육부 사람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높여서 임금으로 세웠으니, 이가 신라 시조가 되었다. 세째 임금 유리왕(儒理王) 8년에 이르러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인해 성(姓)을 주었으니, 양산은 양부(梁部)로, 성(姓)은 이(李)로 하고, 고허는 사량부(沙梁部), 성은 최(崔)로, 우진은 본피부(本被部), 성은 정(鄭)으로, 대수는 점량부(漸梁部), 성은 손(孫)으로, 가리는 한지부(漢祗部), 성은 배(裵)로, 명활은 비습부(比習部), 성은 설(薛)로 하였다."고 하였다. 】 삼가 선원(璿源)207) 을 상고하건대, 본디 나온 곳은 바로 경주 이씨이다. 하늘에서 내린 성이 3이니, 박(朴)·석(昔)·김(金)이다. 【박씨는 김부식이 이르기를, "고허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록나정(楊麓蘿井) 곁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가서 본즉, 말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와서 거두어 길렀더니, 10여 살에 미쳐,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숙성하였다. 육부의 사람들이, 그 나온 것이 신이(神異)함으로써 함께 높여서 이를 임금으로 삼아 세우니, 이가 바로 박혁거세이다. 진인(辰人)이 호(瓠)를 ‘박(朴)’이라고 하는데, 당초의 큰 알이 박과 같기 때문에 ‘박’으로 성을 삼았다."고 하고, 석씨는 김부식이 말하기를, "다파야국(多婆耶國)은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 거리에 있었는데, 처음 그 나라 임금이 여국(女國)의 왕녀에게 장가들어, 애기를 밴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으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음은 상서롭지 못하니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였다. 그 여자가 차마 버리지 못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아울러서 궤(樻)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내었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니, 사람들이 괴이히 여겨 취하지 아니하였다. 또 진한(辰韓) 아진 포구(阿珍浦口)에 이르니, 곧 박혁거세 39년이다. 바닷가의 노모가 노끈으로 궤를 끌어당겨 해안에 매어놓고, 궤를 열어 보니, 어린아이가 있었다. 드디어 가져다 길렀더니, 장성함에 미쳐, 신장이 9척이요, 풍채가 빼어나고 밝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지 못하니, 처음 궤가 떠 올 때에 한 마리의 까치가 지저귀며 따랐으니 마땅히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는 없애고 석(昔)으로 성씨를 할 것이며, 궤 속에 간직한 것을 벗고 나왔으니 탈해(脫解)로 이름함이 마땅하다. ’고 하였다. 처음에는 고기잡이로 업을 삼으매, 어멈이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골상(骨相)이 남과 다르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움이 마땅하다. ’고 하였다. 이에 오로지 학문에 정신을 다하고, 겸하여 지리(地理)에 통하니, 남해왕(南解王)이 그 어짊을 듣고, 그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다. 장차 죽을 적에 그 아들 유리(儒理)에게 이르기를, ‘너의 박(朴)·석(昔) 두 성은 아들과 사위를 논하지 말고, 나이가 많은 자로써 서로 왕위를 잇도록 하라. ’고 하였다. 유리가 장차 죽을 때에 미쳐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탈해는 선왕(先王)의 고명(顧命)이 있고, 또 어짊이 왕위를 이음이 마땅하다. ’고 하여 탈해가 이에 임금 자리에 서니, 이가 신라 네째 임금이다."고 하였다. 김씨는 김부식이 이르기를, "탈해왕 9년에,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나무 사이에서 닭의 우는 소리가 있음을 듣고, 날이 밝자 대보(大輔) 호공(瓠公)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가 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임금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와서 열어 보게 하니, 어린아이가 그 안에 있는데, 용자(容姿)가 기위(奇偉)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이는 하늘이 내게 아들을 줌이 아닐까 보냐.’ 하고, 거두어 길러서 이름을 김알지(金閼智)라고 하였는데, 장성함에 미쳐 총명하고 지략(智略)이 많았다. 금궤에서 나온 까닭으로 성을 김으로 하였다. 김알지의 7세손 김미추(金味雛)가 신라 조분왕(助賁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조분왕이 아들이 없어서, 그의 동생 첨해왕(沾解王)으로써 왕위를 잇게 하였더니, 첨해왕도 또한 아들이 없으므로, 국인(國人)이 김미추를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가진 시초이다." 하였다. 】 내성(來姓)이 1이니, 강(康)이요, 【동주(洞州)에서 왔다. 】 사성(賜姓)이 1이니, 설(偰)이며, 【원(元)나라 숭문감 승(崇文監丞) 설손(偰遜)은 고창국(高昌國) 사람인데, 원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동방으로 와서, 그 맏아들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관향(貫鄕)을 주기를 청하니, 태조가 계림(鷄林)으로 본관을 삼기를 명하였다. 】 속성(續姓)이 1이니, 양(楊)이다. 【기계(杞溪)에서 왔는데, 이때에 향리(鄕吏)가 되었다. 】 안강현(安康縣)의 성이 5이니, 안(安)·노(盧)·김(金)·황(黃)·염(廉)이요, 중국에서 온 성[唐來姓]이 2이니, 소(邵)·변(邊)이며, 속성(續姓)이 3이니, 윤(尹) 【송생(松生)에서 왔다. 】 ·최(崔)·이(李) 【본부(本府)에서 왔다. 모두 향리(鄕吏)가 되었다. 】 이다. 기계(杞溪)의 성이 4이니, 유(兪)·양(楊)·익(益)·윤(尹)이며,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김해에서 왔는데,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 신광(神光)의 성이 4이니, 서(徐)·진(陳)·윤(尹)·신(申)이요, 자인(慈仁)의 성이 4이니, 박(朴)·한(韓)·정(鄭)·주(周)이며, 속성(續姓)이 2이니, 임(任) 【진도(珍島)에서 왔다. 】 ·변(邊) 【가은(加恩)에서 왔는데, 모두 향리가 되었다. 】 이다. 구사(仇史)의 성이 3이니, 정(鄭)·석(石)·조(曺)이요, 내성(來姓)이 1이니, 전(全)이다. 【장산(獐山)에서 왔다. 】 북안곡(北安谷)의 성이 3이니, 이(李)·송(宋)·갈(葛)이며, 속성(續姓)이 2이니, 홍(洪) 【근본은 알 수 없다. 】 ·김(金)이다. 【본부에서 왔는데, 모두 장역(長役)이 되었다. 】 죽장(竹長)의 속성이 4이니, 갈(葛) 【화원(花園)에서 왔다. 】 ·김(金)·이(李) 【본부에서 왔다. 】 ·송(宋)이며, 【합천에서 왔는데, 모두 장역(長役)이 되었다. 】 성법이(省法伊)의 속성이 2이니, 김(金)·최(崔)이다. 【본부에서 왔는데, 모두 장역(長役)이 되었다. 】 인물(人物)은 대대각간 증 흥무 대왕(大大角干贈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 【신라 태종 때 사람. 】 ·한림 학사(翰林學士)·설총(薛聰) 【신문왕(神文王) 때 사람인데, 고려에서 홍유후(弘儒侯)를 증직(贈職)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 ·한림 학사 최치원(崔致遠) 【신라 말기에 벼슬하였다. 고려에서 문창후(文昌侯)를 증직(贈職)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 ·문하 시중(門下侍中) 낙랑후(樂浪侯) 문렬공(文烈公) 김부식(金富軾) 【고려 인종(仁宗) 때 사람. 】 ·문하 시중(門下侍中)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 【공민왕 때 사람. 】 이다.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이고, 기후는 따뜻하며, 풍속은 질박(質朴)하여 신라의 유풍(遺風)이 있다. 간전(墾田)은 1만 9천 7백 33결(結)이다. 【논이 8분의 3이 못된다. 】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粟]이며,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잣·호도·석이[石茸]·지초(芝草)·칠(漆)·종이[紙]·여우가죽·삵가죽[狸皮]·노루가죽·사슴가죽·건합(乾蛤)·대구·전포(全鮑)·모래무지[沙魚]이요, 약재(藥材)는 백복령(白茯苓)·오수유(烏茱萸)·산수유(山茱萸)·호라비좆뿌리[天門冬]·하수오(何首烏)·복신(茯神)이다. 토산(土産)은 사철(沙鐵)이 부(府)의 동쪽 감은포(感恩浦)에서 난다. 【철장(鐵場)이 있는데, 세공(歲貢)이 정철(正鐵) 6천 5백 33근이다. 】 어량(魚梁)이 1곳이요, 【안강현의 동쪽 수방동(輸方洞) 큰내에 있는데, 연어(年魚)가 난다. 】 염소(鹽所)가 1이니, 부(府) 동쪽에 있다. 자기소(磁器所)가 2이니, 하나는 부(府)의 서쪽 대곡촌(大谷村)에 있고, 하나는 부의 북쪽 물이촌(勿伊村)에 있다. 【모두 하품이다. 】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부의 동쪽 수길곡촌(水吉谷村)에 있고, 하나는 안강현의 서쪽 초곡촌(草谷村)에 있다. 【모두 중품이다. 】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6백 79보이며, 안에 우물 80개가 있다. 】 부산 석성(夫山石城) 【부의 서쪽 32리에 있는데, 둘레가 2천 7백 65보 3척이며, 안에는 내가 넷, 못이 하나, 우물과 샘이 아홉이 있다. 또 군창(軍倉)이 있어, 영천(永川)·영일(迎日) 군창을 아울러 들여다 둔다. 】 하서지 목책(下西知木柵) 【부의 동쪽 60리에 있는데, 둘레가 7백 30척이며, 안에 작은 못 하나, 우물 둘이 있다. 】 태조 강헌 대왕 영전(影殿) 【부성(府城) 안의 동쪽 모퉁이에 있다. 태종 14년 갑오에 시위 품관(侍衛品官) 10인을 두어, 두 번(番)으로 나누고, 또 노비 10명을 붙였다. 】 신라 시조 혁거세왕 능(陵) 【운암사(雲岩寺) 북쪽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남쪽으로 4리이다. 】 사(祠) 【부의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금상(今上) 11년 기유 7월에 세웠는데, 춘추(春秋)로 향축(香祝)을 전하고 제사를 행한다. 】 신라의 대대각간(大大角干) 김유신(金庾信) 묘(墓) 【모지사(毛只寺) 북봉(北峰)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서쪽으로 4리이다. 】 첨성대(瞻星臺) 【부성(府城)의 남쪽 모퉁이에 있다. 당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에 신라 선덕 여왕(善德女王)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圓形)으로 높이가 19척 5촌, 위의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 황학루(黃鶴樓) 【객사(客舍) 동쪽에 있다. 】 의풍루(倚風樓) 【객사 서쪽에 있다. 】 금송정(琴松亭) 【금오산의 꼭대기에 있으니,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를 타면서 놀고 즐기던 곳이다. 보고는 신라의 사찬(沙湌) 옥공영(玉恭永)의 아들로서 경덕왕 때 사람이다.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워 스스로 새 곡조 30곡을 지어서 전하니,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른다. 또는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옥보고가 선도(仙道)를 얻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 역(驛)이 11이니, 구어조역(仇於朝驛)·노노곡(路奴谷)·모량(毛良) 【예전에는 모량(牟良)이라 하였다. 】 ·아화(阿火) 【예전에는 아불(阿弗)이라 하였다. 】 ·사리(沙里) 【예전에는 활리(活里)라 하였다. 】 ·잉보(仍甫) 【예전에는 잉파(仍巴)라 하였다. 】 ·의곡(義谷) 【예전에는 지리(知里)라 하였다. 이상은 본부의 경내에 있다. 】 ·경역(鏡驛) 【안강(安康)에 있다. 】 ·인비(仁庇) 【기계(杞溪)에 있다. 】 ·육역(六驛) 【신광(神光)에 있다. 】 이다. 감포(甘浦) 【부의 동쪽에 있는데,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있어 수어(戍禦)한다. 】 봉화(烽火)가 9곳이니, 안산(顔山)은 부 동쪽에 있다. 【남쪽으로 울산(蔚山)의 유포(柳浦) 봉화에, 북쪽으로 본부(本府)의 하서지(下西知)에 응한다. 】 하서지(下西知) 【북쪽으로 본부의 독촌(禿村)에 응한다. 】 독촌(禿村) 【북쪽으로 장기현(長鬐縣)의 복길(卜吉) 봉화에 응한다. 】 대점(大岾)은 부의 동쪽에 있다. 【남쪽으로 울산 유포에, 북쪽으로 본부의 동악(東岳)에 응한다. 】 동악(東岳) 【서쪽으로 본부의 황복(皇福)에 응한다. 】 황복(皇福) 【서쪽으로 본부의 내포점(乃布岾)에 응한다. 】 내포점(乃布岾) 【서쪽으로 본부의 주사(朱砂)에 응한다. 】 주사(朱砂) 【서쪽으로 영천군(永川郡)의 방산(方山)에 응한다. 】 북형산(北兄山)은 안강현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영일(迎日) 사화랑(沙火郞)에, 북쪽으로 영천의 소산(所山)에 응한다. 】 지림사(祗林寺) 【부의 동쪽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1백 30결을 주었다. 】 영묘사(靈妙寺) 【당 태종 정관 6년에 신라 선덕 여왕이 창건한 것이다. 전우(殿宇)가 삼층인데, 웅장하고 화려함이 보통에 뛰어났다. 신라 시대의 탑묘(塔廟)는 지금 모두 허물어졌으나, 이 전(殿)만은 완연하게 예전과 같다. 】 봉덕사(奉德寺) 【지금은 없어졌다. 큰 종이 있는데, 당나라 대종(代宗) 대력(大曆) 6년 신해에 신라 혜공왕(惠恭王)이 만든 것이다. 무게는 구리[銅] 12만 근인데, 치면 소리가 백여 리까지 들린다. 】 이견대(利見臺) 【동해(東海) 바닷가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왜국이 자주 신라를 침범하므로, 문무왕(文武王)이 이를 근심하여 맹세하기를, ‘죽어서 용(龍)이 되어 나라를 보호하고 도적을 방어하겠다. ’고 하더니, 장차 죽을 적에 유명(遺命)하기를, ‘나를 동해 바닷가의 물 가운데에 장사하라. ’고 하였다. 아들 신왕(神王)이 그대로 좇아 장사지낸 뒤에 추모(追慕)하여 대(臺)를 쌓고 바라보니, 큰 용이 바다 가운데에 나타나 있었다. 그러므로 ‘이견대’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대왕바위[大王岩]"라고 일컫는다. 대(臺) 밑으로 70보 가량 거리의 바다 가운데에, 돌이 사각(四角)으로 있어, 높이 솟아 사문(四門)과 같으니, 이것이 장사(葬事)한 곳이라고 한다. 김부식이 이르기를, "문무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유명(遺命)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돌 위에다 장사지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화하고, 인하여 그 돌을 가리켜 대왕바위라고 한다." 하였다. 】
관할[所領]은 도호부가 1이니, 밀양(密陽)이요, 군(郡)이 5이니, 양산(梁山)·울산(蔚山)·청도(淸道)·흥해(興海)·대구(大丘)이며, 현(縣)이 10이니, 경산(慶山)·동래(東萊)·창녕(昌寧)·언양(彦陽)·기장(機張)·장기(長鬐)·영산(靈山)·현풍(玄風)·영일(迎日)·청하(淸河)이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150권 3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37면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密陽都護府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梁山郡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蔚山郡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淸道郡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興海郡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大丘郡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慶山縣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東萊縣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昌寧縣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彦陽縣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機張縣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長鬐縣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靈山縣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玄風縣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迎日縣
- 地理志 / 慶尙道 / 慶州府 / 淸河縣
⊙ 慶州: 府尹一人, 判官一人, 儒學敎授官一人。 卽新羅故都, 漢 宣帝 五鳳元年甲子, 始祖赫居世開國建都, 國號徐耶伐。 【或云斯羅, 或云斯盧, 或云新羅。】 脫解王九年乙丑, 【卽漢 明帝 永年八年。】 始林有雞怪, 更名鷄林, 因以爲國號。 基臨王十年丁卯, 【卽西晋 懷帝 永嘉元年。】 復號新羅。 高麗 太祖十八年乙未, 【卽後唐 廢帝 淸泰二年。】 敬順王 金傅降于高麗, 國除爲慶州。 【新羅自稱赫居世至金傅, 傳五十六王, 九百九十二年。】 二十三年庚子, 【後晋 高祖 天福四年。】 陞爲大都督府, 成宗六年丁亥, 【卽宋 太宗 雍熙四年。】 改爲東京留守。 顯宗三年壬子, 【卽宋 眞宗 大中祥符五年。】 廢留守官, 降爲慶州防禦使。 五年甲寅, 改安東大都護府。 二十一年庚午, 【宋 仁宗 天聖八年。】 復爲東京留守。 神宗五年壬戌, 【卽宋 寧宗 嘉泰二年。】 東京夜別抄作亂, 攻刦州郡, 遣師討平之。 七年甲子, 降爲知慶州事, 高宗六年己卯, 【宋 寧宗 嘉定十二年。】 復爲留守。 忠烈王三十四年戊申, 【卽元 武宗 至大元年。】 改稱雞林府。 本朝太宗十五年乙未, 【卽大明 太宗 永樂十三年。】 改爲慶州府, 別號樂浪。 【淳化所定。】 屬縣四。 安康縣, 本新羅 比火縣, 景德王改今名, 爲義昌郡領縣。 高麗 顯宗九年戊午, 定州府郡縣所領, 屬慶州府任內。 恭讓王二年庚午, 【卽大明 太祖皇帝 洪武二十三年。】 始置監務。 本朝太祖三年甲戌, 【卽洪武二十七年。】 復爲府任內。 【新羅 婆娑王 取音汁伐國, 置音汁火縣, 後其地合屬安康縣。】 杞溪縣, 本芼兮縣; 【一云化鷄。】 神光縣, 本東仍音縣。 右二縣, 景德王改今名, 皆爲義昌郡領縣。 慈仁縣, 本奴斯火縣, 景德王改今名, 爲獐山郡領縣。 右三縣, 高麗 顯宗戊午, 皆屬府任內, 本朝因之。 部曲四。 仇史, 本麻珍良縣, 景德王改名餘良, 爲獐山郡領縣。 竹長, 本長鎭縣, 爲林皋郡領縣。 右二縣, 高麗改今名, 爲部曲, 皆屬府任內。 北安谷、省法伊、 【古作省仍伊。】 金鰲山、 【在付南, 西有新羅始祖宮殿遺基。 後人卽其地建昌林寺, 今亡。】 兄山。 【在府北, 令所在官行祭。】 四境, 東距甘浦五十九里, 西距慶山八十九里, 南距彦陽四十九里, 北距靑松九十二里。 本府戶一千五百五十二, 口五千八百九十四。 安康戶二百七十單一, 口一千四百五十。 杞溪戶一百七十七, 口四百九十單一。 神光戶九十五, 口四百四十八。 慈仁戶二百三十七, 口一千六。 軍丁, 侍衛軍六十六, 鎭軍二百九, 船軍九百四十單一。 本府土姓六, 李、崔、鄭、孫、裵、薛。 【金富軾曰: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 楊山村, 二曰突山 高墟村, 三曰觜山 于珍村, 四曰茂山 大樹村, 五曰金山 加利村, 六曰明活山 高耶村, 是爲辰韓六部。 六部人尊立赫居世爲君, 是爲新羅始祖。 至第三儒理王八年,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爲梁部姓李, 高墟爲沙梁部姓崔, 于珍爲本被部姓鄭, 大樹爲漸梁部姓孫, 加利爲漢祗部姓裵, 明活爲比習部姓薛。】 謹按璿源所自, 卽慶州 李氏。 天降姓三, 朴、昔、金。 【朴氏: 金富軾曰: "高墟村長蘇伐公望楊麓蘿井旁林間, 有馬跪而嘶, 往視之則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嶷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共推尊之, 立以爲君, 卽赫居世也。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昔氏: 金富軾曰: "多婆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娶女國王女有娠, 七年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祥,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裹卵, 幷寶物置之櫃中, 浮之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人怪之, 不取。 又至辰韓 阿珍浦口, 是赫居世之三十九年也。 海邊老母以繩引繫海岸, 開櫃見之, 有一小兒焉, 遂取養之。 及長, 身長九尺, 風神秀朗, 智識過人。 或曰: ‘此兒, 不知姓氏。' 初櫃來時有一鵲飛鳴而隨之, 宜省鳥字, 以昔爲氏。 又解韞櫝而出, 宜名脫解。 始以漁釣爲業, 母曰: ‘汝非常人, 骨相殊異, 宜從學以立功名。' 於是專精學問, 兼通地理。 南解王聞其賢, 以女妻之。 將死, 謂其子儒理曰: ‘汝朴昔三姓, 無論子壻, 以年長相嗣。' 及儒理將死, 謂群臣曰: ‘脫解有先王之顧命, 且賢, 宜嗣位。' 旣解乃立, 是爲新羅第四君。" 金氏: 金富軾曰: "脫解王九年, 夜聞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遣大輔瓠公視之, 有金色少櫃掛樹枝, 白鷄鳴於其下。 王使人取櫃開之, 有小兒在其中, 姿容奇偉。 王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 名之曰閼智, 及長, 聰明多智略。 以其出於金櫃, 故姓金氏。 閼智七世孫味雛娶新羅 助賁王之女, 助賁王無子, 以其弟沾解王嗣, 沾解王又無子, 國人立味雛, 此金氏有國之始也。】 來姓一, 康; 【洞州來。】 賜姓一, 偰; 【元崇文監丞偰遜, 高昌國人, 元季避兵東來, 其長子判三司事長壽請賜鄕貫, 太祖命以鷄林爲本貫。】 續姓一, 楊。 【杞溪來時, 爲鄕吏。】 安康姓五, 安、盧、金、黃、廉、唐; 來姓二, 邵、邊; 續姓三, 尹、 【松生來。】 崔、李。 【本府來, 皆爲鄕吏。】 杞溪姓四, 兪、楊、益、尹; 續姓一, 金。 【金海來, 今爲鄕吏。】 神光姓四, 徐、陳、尹、申。 慈仁姓四, 朴、韓、鄭、周; 續姓二, 任 【珍島來。】 邊。 【加恩來, 皆爲鄕吏。】 仇史姓三, 鄭、石、曺; 來姓一, 全。 【獐山來。】 北安谷姓三, 李、宋、葛, 續姓二, 洪, 【本未詳。】 金。 【本府來, 皆爲長役。】 竹長續姓四, 葛、 【花園來。】 金、李、 【本府來。】 宋。 【陜川來, 皆爲長役。】 省法伊續姓二, 金、崔。 【本府來, 皆爲長役。】 人物, 大大角干贈興武大王 金庾信、 【新羅 太宗時人。】 翰林學士薛聰、 【神文王時人, 高麗贈弘儒侯, 從祀文廟。】 翰林學士崔致遠、 【仕新羅之季, 高麗贈文昌侯, 從祀文廟。】 門下侍中樂浪侯 文烈公 金富軾、 【高麗 仁宗時人。】 門下侍中文忠公 李齊賢。 【恭愍王時人。】 厥土肥塉相半, 風氣暖。 民俗質朴, 有羅氏之遺風焉。 墾田一萬九千七百三十三結。 【水田八分之三少。】 土宜五穀, 粟。 土貢, 蜂蜜、黃蠟、松子、胡桃、石茸、芝草、漆、紙、狐皮、狸皮、獐皮、鹿皮、乾蛤、大口魚、全鮑、沙魚。 藥材, 白茯苓、烏茱萸、山茱萸、天門冬、何首烏、茯神。 土産, 沙鐵産府東感恩浦。 【有鐵場, 歲貢正鐵六千五百三十三斤。】 魚梁一所, 【在安康縣東輸方洞, 大川産年魚。】 鹽所一, 在府東。 磁哭所二, 一在府西大谷村, 一在府北勿伊村。 【皆下品。】 陶器所二, 一在府東水吉谷村, 一在安康縣 西草谷村。 【皆中品。】 邑石城。 【周回六百七十九步, 內有井八十。】 夫山石城。 【在府西三十二里, 周回二千七百六十五步三尺, 內有川四池一井泉九。 又有軍倉, 永川、迎日軍倉倂入置。】 下西知木柵。 【在府東六十里, 周回七百三十尺, 內有小池一井二。】 太祖康憲大王影殿。 【在府城內東隅, 太宗十四年甲午, 置侍衛品官十人, 分爲二番, 又屬奴婢十名。】 新羅始祖赫居世王陵。 【在雲岩寺北, 距府南四里。】 祠。 【在府南月南里, 今上十一年己酉七月始立, 春秋傳香祝行祭。】 新羅大大角干金庾信墓。 【在毛只寺北峯, 距府西四里】 瞻星臺。 【在府城南隅, 唐 太宗 貞觀七年癸巳, 新羅 善德女王所築。 累石爲之, 上方下圓, 高十九尺五寸, 上周圓二十一尺六寸, 下周圍三十五尺七寸。 通其中, 人由中而上。】 黃鶴樓、 【在客舍東】 倚風樓、 【在客舍西。】 琴松亭。 【在金鰲山頂, 玉寶高彈琴遊樂之處。 寶高, 新羅沙飡恭永子, 景德王時人。 入智異山 雲上院, 學琴五十年, 自製新調三十曲傳之, 謂之玄鶴琴, 又云玄琴。 世傳寶高得仙道乘天。】 驛十一, 仇於朝驛、路奴谷、毛良 【古作牟良。】 、阿火 【古作阿弗。】 、沙里 【作古活里。】 、仍甫 【古作仍巴。】 、義谷 【古作知里。 已上在本府境內。】 、鏡驛 【在安康。】 、仁庇 【在杞溪。】 、六驛 【在神光。】 、甘浦。 【在府東, 有水軍萬戶戍禦。】 烽火九處, 顔山在府東, 【南準蔚山 柳浦, 北準本府下西知。】 下西知、 【北準本府禿村。】 禿村。 【北準長鬐縣 卜吉。】 大岾在府東, 【南準蔚山 柳浦, 北準本府東岳。】 東岳、 【西準本府皇福。】 皇福、 【西準本府乃布岾。】 乃布岾 【西準本府朱砂。】 、朱砂 【西準永川郡 方山。】 、北兄山在安康縣東。 【東準迎日 沙火郞, 西準永川 所山】 、袛林寺 【在府? 饢 屬禪宗, 給田一百三十結。】 、靈妙寺 【唐 太宗 貞觀六年, 新羅 善德女主所創也。 殿宇三層, 壯麗異常。 羅代塔廟, 今皆頹毁, 獨此殿宛然如昨。】 奉德寺、 【今已有大鍾。 唐 代宗 大曆六年辛亥, 新羅 惠恭王所鑄, 重銅一十二萬斤, 撞之則聲聞百餘里。】 利見臺。 【在東海濱, 世傳倭國數侵新羅, 文武王患之, 誓死爲龍, 護邦國而禦寇盜。 將薨, 遺命葬我于東海濱水中, 子神王從之。 葬後追慕, 築臺望之, 有大龍見于海中, 因名之曰利見臺。 鄕人至今稱爲大王岩。 臺下七十步許。 海中, 有石四角聳出如四門, 是其葬處。 金富軾云: "文武王薨, 群臣以遺命葬東海口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石爲大王石。"】 所領都護府一, 密陽; 郡五梁山、蔚山、淸道、興海、大丘; 縣十, 慶山、東萊、昌寧、彦陽、機張、長鬐、靈山、玄風、迎日、淸河。
- 【태백산사고본】 54책 150권 3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3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