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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73권, 선조 29년 3월 3일 경오 3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병조 판서 이덕형이 중흥동 산성을 둘러보고 주위의 형세를 그림으로 올리다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신이 1일에 나아가 중흥동(中興洞)에 못 미쳐 촌막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동구(洞口)에 이르러 서북쪽의 외성(外城)을 살펴보았습니다. 삼각봉(三角峰)이 높이 솟아 있고 그 곁에 두 봉우리가 차례로 나열해 섰으며, 성자(城子)는 끝봉우리의 허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시내의 어구 언덕에 이르러서 끝났습니다. 남쪽 외성은 시내의 암벽에서부터 시작되어 위로 서남쪽 최고봉에 이르러서 끝났습니다. 성(城)에 석문(石門)의 옛터가 있는데 이는 이른바 서문(西門)으로서 중간에 한 가닥의 길이 있어 곧바로 중흥사(中興寺)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길은 산비탈로 나 있는데 계곡은 굴곡이 졌으며, 길가에 운암사(雲巖寺)의 옛터가 있었습니다. 오솔길로 나뉘어져 벽하동(碧霞洞)으로 들어가는데, 벽하동중흥사가 있는 산 뒤에 있고 길은 백운봉(白雲峯)에 이르러 끊어졌습니다. 내성(內城)으로 들어가니 성에는 석문이 있는데 절과의 거리는 수백 보 가량 되었습니다. 사문(寺門)을 지나 동남으로 가다가 길이 셋으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동문(東門)으로 통하여 왕래하는 길로 성 밖에 수도암(修道菴)·도성암(道成菴) 등의 암자가 있고 그 밑은 곧 우이동(牛耳洞)이며, 하나는 동남문(東南門) 석가현(釋伽峴)으로 통하여 사을한리(沙乙閑里)로 내려가는 길이며, 하나는 문수봉(文殊峯)을 넘어 창의문(彰義門)으로 통하는 탕춘대(蕩春臺)의 앞들이 내려다 보이는 길입니다. 석가현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뻗다가 서쪽으로 향해 산세가 높이 일어나 문수봉이 되고, 문수봉으로부터 세 봉우리가 서쪽으로 뻗어내려 동구의 외성에 일어난 곳, 즉 앞에 이른바 서남쪽의 최고봉과 서로 접하게 되는데 형세가 극히 험악합니다. 문수(文殊)·승가(僧伽)·향림(香林) 등의 절이 산 허리에 나열해 있는데, 우이동·사을한리와 경성의 사현(沙峴)·홍제원(弘濟院)의 좌우 도로가 역력히 한 눈에 들어옵니다. 성자(城子)가 또 미로봉(彌老峯)의 허리로부터 시작되어 도성암의 상령(上嶺) 및 석가현을 거쳐서 위로 문수봉에 이르러 그쳤으니, 이것이 그 대세인 것입니다. 모든 봉우리는 아래로 뻗어내려 산록(山麓)이 되고 골짜기의 양편은 견아(犬牙)처럼 얽히었으며, 각처의 시내는 폭포를 이루어 흘러서 모두 동구로 나가는데 지세가 몹시 급하고 비좁아 넓지 못하므로 사람이 살기에는 불편합니다. 그러나 오직 중흥사(中興寺) 상단의 좌우 골짜기만은 토지에 육기(肉氣)가 있어 그런대로 의지해 살 만합니다. 삼각봉의 후면은 절벽이 깎아 세운 듯하고 그 밖은 곧 서산으로 통행하는 길인데 미륵원(彌勒院)으로부터 우이동(牛耳洞)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성암의 상령(上嶺)과 석가현·문수봉에 지름길이 있기는 하나 사면의 산세가 높고 험절하니, 진실로 10여 인이 지키게 되면 적의 무리 수만 명이 있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며, 또 중첩된 산봉우리가 원근을 가리고 있어 적이 성을 에워싸고자 하여도 그 형세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산허리 요해처에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망보게 하고 그 속에 곡식을 비축해 두며, 하동구(下洞口) 및 도성령(道成嶺)·석가현(釋伽峴) 등 몇몇 곳을 굳건히 지키면 천험(天險) 만전의 형세가 있을 것입니다. 설사 적병이 그 속으로 들어온다 하더라도 두 마리의 쥐가 굴을 다투는 형세가 있어 아군의 다소를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도성(都城) 근처에 이와 같이 유리한 지세를 두고도 방치하였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흠이라면 도로가 매우 험하여 출입할 일이 있을 때 인력이 배나 수고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 안의 약간 평평한 곳에는 사람들도 머물러 있기에 해롭지 않다고 여길 것입니다. 성첩이 무너진 것은 10분의 7∼8이 되는데, 수축을 한다 해도 높은 봉우리의 정상은 인력의 소비가 커서 용이하게 해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혹시 각도의 승도(僧徒)를 소집하여 요해처에 집을 짓게 하고서 지역을 나누어 역(役)을 맡겨 주어 성자를 수축하게 하면, 민심도 의뢰하는 곳이 있게 되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주회(周回)의 지세를 그림으로 그려 아룁니다."

하니, 상이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이뢰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73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65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예술-미술(美術)

○兵曹判書李德馨啓曰: "臣於初一日出去, 未及中興洞, 而宿村幕。 翌朝, (經)〔徑〕 抵洞口, 觀西北邊外城, 則三角峯屹立, 傍邊二峯, 鱗次列立, 城子自第終峯腰始起, 下到溪口傍岸止焉; 南邊外城, 又自溪巖始起, 上到西南最高峯止焉。 城有石門舊址, 卽所謂西門, 中有一條路, 直抵于中興寺, 而路從山崖澗谷屈曲, 道傍有雲巖寺舊基。 微徑分入於碧霞洞, 洞在中興寺立山後, 路到白雲峯而斷焉。 進入內城, 城有石門, 距寺可數百步。 歷寺門東南行, 路分爲三。 一, 由東門往來, 而城外有修道道成等菴子, 其下卽牛耳洞也; 一, 由東南門釋伽峴, 而下抵沙乙閑里; 一, 踰文殊峰, 達于彰義門, 俯瞰蕩春臺前野。 從釋伽峴, 迤南而向西, 山勢漸斗起, 爲文殊峯, 自文殊而三峯西走連亘, 與洞口外城所起, 向所謂西南最高峯者相接, 勢極險惡。 文殊僧伽香林諸寺, 羅列于山腰, 而牛耳洞沙乙閑里、京城沙峴弘濟院左右道路, 歷歷在目前。 城子, 又自彌老峯腰始起, 循道成菴上嶺及釋伽峴, 而上到文殊峯止焉, 此其大勢也。 諸峯下走而爲山麓, 兩邊參錯如犬牙, 各處澗瀑匯流, 而俱出于洞口, 地甚急狹而不寬敞, 人居不便, 惟中興寺上端左右洞壑, 土地有肉氣, 稍可依接也。 三角峯後面, 鐵壁如削, 其外, 卽爲西山通行之路, 從彌勒院, 而回于牛耳洞道成菴上嶺釋伽峴文殊峯, 雖有徑路, 而四面山勢斗絶, 苟有十餘人防守, 則賊衆累萬, 無奈我何。 且重巒複嶺, 遮擁遠近, 賊雖欲圍城, 其勢實難。 若於峯腰要害, 置(墽)〔墩〕 哨瞭, 而積粟其中, 堅守下洞口及道成嶺釋伽峴數處, 則有天險萬全之形勢。 設令賊兵入其中, 又有兩鼠鬪穴之勢, 莫測我兵所藏多少。 都城近處, 有如此形勢, 而棄置可惜。 所欠者, 道路極險, 出入有事, 倍勞人力。 城內小平衍之處, 人情亦不害住着。 至於城子頹圯, 十分之七八, 而修築之擧, 於高峯頂上, 用力闊大, 恐難容易辦得。 如或招集各道僧徒, 草創屋宇於要害處, 而分方援役, 修繕城子, 則人心有所依賴, 而事易成矣。 其周回形勢, 圖畫以啓。" 上曰: "令備邊司議啓。"


  • 【태백산사고본】 44책 73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65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예술-미술(美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