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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실록부록 12권, 순종 14년 2월 16일 陽曆 3번째기사 1921년 일본 대정(大正) 10년

이왕직 장관 이재극이 종묘의 방의 개수와 의식 절차에 대해 문의하다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남작(男爵) 이재극(李載克)이 아뢰기를,

"종묘(宗廟)의 실수(室數)와 의절(儀節)에 관해 의견을 모아들이라고 명하셨습니다. 회의를 하는 제원(諸員)에게 문의하니, 자작(子爵) 민영규(閔泳奎)는 병이 나서 헌의(獻議)하지 않았습니다. 후작(侯爵) 이재완(李載完)은 헌의하기를, ‘종묘(宗廟)의 예(禮)는 지극히 삼가하고 또 진중해야 합니다. 생각건대 상주(商周)의 군신은 모두 성인으로 그 일언(一言)이 만세의 법정(法程)이 되었는데, 한(漢) 이하 명(明)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논의는 수없이 많아 서로 뒤섞여 버리니 족히 의거할 바가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아조(我朝)의 빛나는 예교(禮敎)는 50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삼대(三代)의 유제(遺制)를 받들어 열성조(列聖朝)가 계승하여 금석(金石)같이 어김이 없었습니다. 정조(正祖) 즉위 초에 하교하시기를, 「종통(宗統) 대계(大系)는 차서(次序)가 중하여 비록 손(孫)으로 조(祖)를 잇고, 제(弟)로써 형(兄)을 계승하더라도 조(祖)와 형(兄)은 마땅히 〖아버지 사당인〗 예(禰)가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크디크신 왕의 말씀을 후세에 전하여 자손들에게 커다란 덕을 베푸신다는 뜻으로, 오늘날 사왕(嗣王)과 유신(遺臣)이 감히 공경스럽게 받들어 준수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말고 바라건대 널리 물어서 처결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자작 민영휘(閔泳徽)는 헌의하기를, ‘현종(顯宗) 2년 이미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계통이 확연하게 섰고 논의가 정해져 더 이상 거론치 못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작 민병석(閔丙奭)은 헌의하기를, ‘칠묘지제(七廟之制)는 선왕(先王)의 정례(正禮)가 있어 계통이 중하고 이미 선현들의 정론이 있어 다른 의견을 용납함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자작 윤덕영(尹德榮)은 헌의하기를, ‘칠묘지제는 이미 정례가 있으니 우매한 학식으로 어찌 다시 감히 망녕된 논의를 하겠습니까? 오직 원컨대 널리 물어 처결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전 찬정(贊政) 이용직(李容稙)은 헌의하기를, ‘제왕(帝王)의 가묘(家廟)에 관한 제도는 마땅히 정례를 따라야 합니다. 윤통(倫統)의 논의는 결코 준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자작 이재곤(李載崐)은 헌의하기를, ‘칠묘지제는 상주 이래 정례입니다. 계통을 잇는 차례가 엄중하여 종통(宗統)이 크고 바른 것은 이미 선현(先賢)과 선유(先儒)들의 정론이 되어 왔으니 지금 고종(高宗)을 태실(太室)에 승부(升祔)할 때 장조 의황제(莊祖懿皇帝)를 영녕전(永寧殿)에 천부(遷祔)한 예법이 고제(古制)에 잘 맞으니 다른 의견은 받아들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윤용구(尹用求)는 헌의하기를, ‘태조(太祖) 이하 삼소(三昭) 삼목(三穆)으로 칠묘(七廟)가 되었으니 삼대(三代) 이래 이미 정해진 예법입니다. 제왕가(帝王家)의 계통(系統)은 지극히 중하므로 묘수(廟數)가 이미 차면 마땅히 조천(祧遷)해야 하니 장조 황제(莊祖皇帝)를 조천하는 것이 예법에 맞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후작(侯爵) 이재각(李載覺)은 헌의하기를, ‘친진(親盡)이 되면 조천하는 것은 옛 성인의 남긴 예법입니다. 계통을 잇는 것의 엄중함은 아조(我朝)의 전례(典禮)입니다. 성인의 교훈을 따르고 조상의 종통을 본받는 것 외에는 어떠한 논의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작(伯爵) 이지용(李址鎔)은 헌의하기를, ‘지금의 전례(典禮)는 진종 소황제(眞宗昭皇帝)를 조천할 때 이미 행해진 예법이고, 또한 선현들의 정론(定論)이니 다른 의견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남작(男爵) 이종건(李鍾健)은 헌의하기를, ‘제왕가의 묘제(廟制)는 이미 정해진 예법이니 다른 의견을 진달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남작 민영기(閔泳綺)는 헌의하기를, ‘이미 선유(先儒)들의 정론이 있고 지금 또 모두 하나의 의견을 말하니 다른 의견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남작 이윤용(李允用)은 헌의하기를, ‘모든 의견이 같으니 다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 장례경(掌禮卿) 이우면(李愚冕)은 헌의하기를, ‘종묘에 관한 예법은 지극히 신중하고 엄중합니다. 이미 선성(先聖)과 선유(先儒)의 정론이 있으니 널리 물어 처결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전 참정(參政) 한규설(韓圭卨)은 헌의하기를, ‘묘제(廟制)는 신중해야 하고 선현들이 정해놓은 예법이 있으니 다른 의견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남작 박용대(朴容大)는 헌의하기를, ‘종묘의 전례는 반드시 선유(先儒)의 정론을 원용(援用)해야 하며, 또한 역대 시행되어온 전례가 근거가 될 수 있으니 원컨대 널리 물어 채택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남작 조동윤(趙東潤)은 헌의하기를, ‘제왕가의 묘제는 지극히 중하고 또 크니 마땅히 정례(正禮)를 따라야 합니다. 더구나 선유(先儒)의 정론이 있으므로 다른 의견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작 권중현(權重顯)은 헌의하기를, ‘친진이 되어 묘(廟)를 조천하는 것은 국가의 예법으로서 이미 정해져 있으니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남작 성기운(成岐運)은 헌의하기를, ‘예학에 어두우니 어찌 감히 함부로 의론을 하겠습니까? 다만 원컨대 널리 물어 잘 분별하여 택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자작(子爵) 조민희(趙民熙)는 헌의하기를, ‘제왕가의 묘제는 지극히 중하고 또 신중하니 감히 다른 의견을 갖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작 송병준(宋秉畯)은 헌의하기를, ‘묘제가 이미 세워져 있어 함께 의논한 바 상의한 것이 같으니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작 이병무(李秉武)는 헌의하기를, ‘이미 선왕(先王)의 고제(古制)가 있으니 감히 함부로 다시 논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남작 박기양(朴箕陽)은 헌의하기를, ‘지금 이 같은 전례는 진종 소황제를 조천할 때 이미 행해진 예법이 있습니다. 앞의 것을 따르던 것은 아마도 갑자기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남작 김춘희(金春熙)는 헌의하기를, ‘황가(皇家)의 전례는 가장 중요한 것이 계통(系統)입니다. 선유들의 정론(正論)이 있기에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 정2품 민영찬(閔泳瓚)은 헌의하기를, ‘진종 소황제를 조천할 때 국가의 예법은 이미 정해져 있고, 또한 선유의 정론이 있기에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남작 민철훈(閔哲勳)은 헌의하기를, ‘삼가 제왕가의 종묘 제도를 살피건대 계통이 윤통(倫統)보다 중합니다. 즉 삼대(三代)의 정례(正禮)는 역시 선유(先儒)들이 정해놓은 것으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 특진관(特進官) 강우형(姜友馨)은 헌의하기를, ‘함께 논의한 것이 모두 같으니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사(典祀) 정만조(鄭萬朝)는 헌의하기를, ‘윤통(倫統)과 왕통(王統)의 경중(輕重)은 진종 소황제를 조천할 때 이미 국가의 예법으로 행한 것입니다. 아마 지금 갑자기 변경하는 것은 어려우며, 또한 하물며 선유(先儒)의 정론이 있으니,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전(前) 전제관(典製官) 윤희구(尹喜求)는 헌의하기를, ‘만일 삼소(三昭) 삼목(三穆)과 형제(兄弟) 동실(同室)의 제도로 논하면 묘수(廟數)가 비록 차더라도 조천하지 않으나, 형제 동실의 제도는, 본래 선유들의 정론이 있으므로 바른 예법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잘 분별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명하기를,

"모든 의견이 이와 같으니 장조 의황제(莊祖懿皇帝)를 조천하는 의절(儀節)을 전례에 비추어 행하라."

하였다. 또 명성 태황후(明成太皇后) 추상(追上) 휘호(徽號) 망단자를 제휘 열목(齊徽烈穆)으로 의논하여 정해서 입계(入啓)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고, 또 태묘(太廟) 고종실(高宗室) 배향 공신을 회권(會圈)하여 우의정(右議政) 문익공(文翼公) 박규수(朴珪壽), 우의정 문경공(文敬公) 신응조(申應朝), 좌찬성(左贊成) 문정공(文貞公) 이돈우(李敦宇), 참정(參政)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을 뽑아 입계(入啓)하였다.


  • 【원본】 8책 12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책 620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本職長官男爵李載克啓: "宗廟室數儀節, 會議以入事, 命下矣。 問議于會議諸員。 則子爵閔泳奎, 病不獻議。 侯爵李載完以爲: ‘宗廟之禮, 至愼至重。 竊謂君臣, 皆聖人也, 一言爲萬世法程。 以下至世, 議論擧多駁雜, 無足依據。 況我朝禮敎休明, 五百有餘年, 一遵三代遺制, 列聖繼承, 金石莫違。 正祖卽位之初, 敎曰: 「宗統大繼序重, 雖以孫繼祖、以弟繼兄, 祖與兄, 當爲禰。」 大哉王言! 卽垂裕燕翼之意也。 在今日嗣王遺臣, 敢不敬奉遵守乎? 無容他見, 伏願博詢而裁處焉。’ 子爵閔泳徽以爲: ‘顯宗二年, 已有先正臣宋時烈疏奏, 繼統確然定論, 無容更陳矣。’ 子爵閔丙奭以爲: ‘七廟之制, 自有先王正禮; 繼統之重, 已有先賢定論。 無容他見矣。’ 子爵尹德榮以爲: ‘七廟之制, 旣有正禮矣。 素昧學識, 更何敢妄議哉? 惟願博詢而處之。’ 前贊政李容植以爲: ‘帝王家廟制, 當從正禮。 至於倫統之論, 決不可遵矣。’ 子爵李載崐以爲: ‘七廟之制, 以來正禮也。 繼序爲重, 宗統斯正, 已有先賢、先儒定論, 則今此高宗升祔太室時, 莊祖懿皇帝遷祔永寧殿之禮, 允合古制, 無容他見。’ 前判敦寧尹用求以爲: ‘太祖以下三昭三穆而爲七廟, 三代以來已定之禮也。 帝王家系統至重, 故廟數已滿, 則自當祧遷, 莊祖皇帝祧遷, 於禮當然矣。’ 侯爵李載覺以爲: ‘親盡祧遷, 古聖遺禮也; 繼統重嚴, 我朝典禮也。 遵聖訓、法祖宗之外, 無容他議矣。’ 伯爵李址鎔以爲: ‘今此典禮, 眞宗昭皇帝祧遷時, 已有行禮, 且有先賢之定論, 無容更陳矣。’ 男爵李鍾健以爲: ‘帝王家廟制, 已有定禮, 無容更達矣。’ 男爵閔泳綺以爲: ‘旣有先儒定論, 今又僉議同一, 無容更達矣。’ 男爵李允用以爲: ‘僉議同一, 無容更達。’ 前掌禮卿李愚冕以爲: ‘宗廟之禮, 至愼至重。 旣有先聖、先儒定論, 博詢而處之。’ 前參政韓圭卨以爲: ‘廟制愼重, 自有先賢定禮, 無容他見。’ 男爵朴容大以爲: ‘宗廟典禮, 必有先儒定論之可援, 亦有歷代行典之可據。 惟願博詢而採擇焉。’ 男爵趙東潤以爲: ‘帝王家廟制, 至重且大, 當從正禮矣。 況有先儒正論, 則無容他見矣。’ 子爵權重顯以爲: ‘親盡廟祧遷, 邦禮已定, 無容他見矣。’ 男爵成岐運以爲: ‘素昧禮學, 何敢妄議? 惟願廣詢而裁擇焉。’ 子爵趙民熙以爲: ‘帝王家廟制, 至重至愼, 無敢他見矣。’ 子爵宋秉畯以爲: ‘廟制已立, 僉議詢同, 無容他見矣。’ 子爵李秉武以爲: ‘已有先王古制, 毋敢更議矣。’ 男爵朴箕陽以爲: ‘今此典禮, 眞宗昭皇帝祧遷時, 有已行之禮, 從先之義, 恐不可以遽變矣。’ 男爵金春熙以爲: ‘皇家典禮, 最重系統。 自有先儒正論, 無容更議矣。’ 前正二品閔泳瓚以爲: ‘眞宗昭皇帝祧遷時, 邦禮已定, 且有先儒之正論, 無容他見。’ 男爵閔哲勳以爲: ‘謹按帝王家宗廟之制, 繼統重於倫統, 卽三代之正禮, 亦先儒之定論, 無容更議矣。’ 前特進官姜友馨以爲: ‘僉議同一, 無容他見矣。’ 典祀鄭萬朝以爲: ‘倫統王統之輕重, 眞宗昭皇帝祧遷時, 已有邦禮之行矣, 恐今不可遽變。 且況有先儒之正論, 無容他見矣。’ 前典製官尹喜求以爲: ‘若以三昭三穆兄弟同室之制論之, 則廟數雖滿, 在所不祧。 然兄弟同室之制, 自有先儒定論, 已謂非禮之正’云矣。 上裁何如?" 命曰: "僉議旣如此, 莊祖懿皇帝祧遷之節, 照例擧行。" 又以明成太皇后追上徽號望, ‘齊徽烈穆’議定以入啓。 敬依。 又以太廟 高宗室配享功臣會圈, 以右議政文翼公 朴珪壽、右議政文敬公 申應朝、左贊成文貞公 李敦宇、參政忠正公 閔泳煥抄入啓。


  • 【원본】 8책 12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책 620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