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35권, 정조 16년 5월 24일 辛酉 1/1 기사 / 1792년 청 건륭(乾隆) 57년
우의정 박종악이 유성한의 일로 재차 상소를 올리니, 그를 파직시키다
국역
우의정 박종악을 파직하고, 전 우의정 김종수(金鍾秀)를 돈유(敦諭)하였다. 박종악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윤4월 27일 연본(筵本) 하교를 읽어보니 글자마다 정미하고 말씀마다 측달(惻怛)하여 족히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울릴 만하였으니, 오늘날 신하 된 자가 이 연교를 받들면 그 누군들 마음이 찢어지고 애가 끊어져 실성 통곡(失聲痛哭)하지 않겠습니까. 아, 우리 성상께서 임금 노릇하는 즐거움이 없이 외롭게 상중에 계셨으며 슬픔을 머금고 아픔을 참으며 30년 세월을 하루처럼 지내셨습니다. 먹을 때나 쉴 때, 잠잘 때나 깨는 사이에 백성에 대한 근심으로 눈썹이 펴지지 않았고 마음속에서는 번뇌와 울적함이 맺혀셔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다하지 않으셨으니, 어찌 형법을 크게 행하고 정사(情事)를 쾌히 펴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만, 다만 일이 더없이 중대하고 엄격한 자리에 관계되기 때문에 높고 두터운 천지를 부앙(俯仰)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참아오셨으니, 전하의 마음은 이처럼 궁하고 괴로우셨습니다. 연교(筵敎)에서 ‘세월이 오래되어 의리가 더욱 어두워져 근래 여러 신하들의 장주(章奏)에서 말을 하지 못하게 할 수가 없다.’라고 하셨으니, 아, 그 훌륭하심은 비록 요(堯)·순(舜)이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집안에서 듣고 본 것으로 눈물을 흘리며 다 진달하겠습니다. 신의 계부(季父) 박명원(朴明源)에게는 천지에 사무치는 슬픔이 있었는데 끝내 한 번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신이 만약 말을 하지 않는다면 비록 해와 달처럼 밝으심으로도 무엇을 말미암아서 모조리 밝히겠습니까. 옛날 망극한 일이 있던 처음에 여러 도위(都尉)가 등대하였는데, 신의 계부는 피눈물이 얼굴을 덮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선대왕의 앞자리에 한참 동안 계셨는데, 옥색(玉色)이 처창(凄愴)하시어 군신 상하가 차마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다가 이어 물러가기를 명하셨습니다. 그후에 매양 밀실(密室)에 들어가 경모궁(景慕宮)의 유필(遺筆)을 받들어 구경하고는 기어이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신이 일찍이 조용히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울먹이며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경모궁께서는 예용(禮容)이 장숙(莊肅)하여 천인(天人)의 기상이 있었으며, 예도(睿度)가 넓어서 성신(聖神)의 자품(資稟)이 계셨다. 우리 임금의 아들로 세자의 지위에 계시어 전궁(殿宮) 사이에 지극한 즐거움이 피어오르는 듯하고 화기(和氣)가 가득 넘쳐흘렀다. 우리 영고(英考)께서 매양 예용(睿容)을 대하실 때마다 기쁨이 천안(天顔)에 넘치셨으니 비록 문왕(文王)의 지극한 자애와 주공(周公)의 뛰어난 효도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었겠는가. 대리(代理)의 명을 받자 팔도가 목을 빼고 기다렸는데 불행하게도 무인년·기묘년 이후에 한 종류의 군흉(群凶)이 안팎에서 결탁하여 미혹시켜 어지럽히고 선동하였는데 우리 두 성모(聖母)께서 돌보아 주고 보살펴 주심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저 군흉이 조짐은 이루었으나 그래도 성공하지는 못하였었다. 승하하신 후 무인년·기묘년 이후에 이르러서는 군흉이 술잔을 들고 서로 축하하면서 난리를 선동함이 더욱 심해지고 무핍(誣逼)함은 더욱 급해져, 안에서는 유언 비어를 퍼뜨리고 밖에서는 상소하여 겉모습만 바꾸어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미 안금장(安金藏)078) 처럼 한 번 죽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평민으로 자처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모든 세상일에 더는 마음을 쓰지 않고 마치 궁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 자처럼 지낸 것이 30년이었습니다.
아, 흉역의 무리가 나와 의리가 날로 어두워지니 신이 계부의 말을 생각할 때마다 서성거리며 기가 막혀 스스로 생각하기를 ‘말을 하고자 하니 분의(分義)와 도리(道理)에 감히 쉽게 입에서 꺼낼 수 없는 것이 있고, 말하지 않으려니 위로 우리 성상께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신의 계부의 유충(遺忠)을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즈음에 영남 유생의 만인소(萬人疏)가 나왔고 중신(重臣) 이병모(李秉模)가 이어서 또 성토하였습니다. 이 의리는 전하께서 잠시도 잊지 못하고 밤낮으로 강구하시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애통한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팔방에 크게 고하기를 ‘우리 선대왕의 하교가 이미 이처럼 정령하고 간절하셨으니 선대왕의 성의(聖意)가 있는 바를 우러러 헤아릴 수 있고, 우리 소조(小朝) 저하께서 일찍이 주연(胄筵)에서 하명하시기를 「홍계희(洪繼禧)는 강충(江充)이다.」라고 하셨다. 예교(睿敎)가 또 이렇게 해와 별처럼 밝으니 김상로(金尙魯)와 홍계희의 하늘에 닿는 죄가 여기에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하소서. 이밖의 여러 역적에 이르러서는 죄악이 극도로 찬 자에게도 빨리 분명한 명을 내려 어서 천토(天討)를 행하고 아울러서 한 통의 문서를 만들어 금석(金石)에 새겨야 합니다. 연교(筵敎)에서 말씀하기를 ‘혹 주토(誅討)를 크게 행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선대왕의 영혼은 비록 어두운 가운데서 기뻐하시겠으나 밝게 오르내리는 경모궁(景慕宮)의 영혼이야 어찌 슬퍼하고 불안해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대저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은 본디 멀지 않아서 인정이 있는 곳에 의리가 부쳐져 있고, 의리가 부쳐져 있는 곳에 신리 역시 통하게 됩니다. 전하의 지극한 정을 이미 펴면 의리가 밝아지며, 의리가 이미 밝아지면 신리 역시 통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선대왕께서 어찌 기뻐하지 않겠으며, 경모궁 역시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중신(重臣) 서유린(徐有隣)의 소비(疏批)를 보건대 경서(經書)를 인용하고 의리를 근거해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는데, 신은 반복하여 아뢰겠습니다. 《명의록(明義錄)》 한 부(部)는 옛날의 《춘추》이며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은 그 법도가 하나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근본을 따지자면 무인년·기묘년은 근본이고 을미년과 병신년은 말엽입니다. 《명의록》 가운데서 단지 을미년·병신년만 들고 무인년·기묘년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본말(本末)의 뜻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신의 좁은 소견으로는 《명의록》 상편(上篇)을 편찬하되 첫머리에 상이 펼친 대고(大誥)의 글을 싣고 여러 흉적이 무인년·기묘년과 을미년·병신년이 원류(源流)와 맥락(脈絡)임을 두루 열거하며, 부록(附錄)에다가 재한(載翰)의 무리가 흉악한 환관(宦官)에게 뇌물을 써서 스스로 천주(天誅)를 범한 것을 실어서 간행된 《명의록》과 합쳐 한 질(帙)을 만든다면 어찌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루는 하나의 큰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아, 유성한(柳星漢)과 윤구종(尹九宗) 두 역적의 지극한 요악(妖惡)은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고 고금에 없던 바입니다. 하잘것없이 천박한 그들에게 처음부터 조무래기들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그가 어찌 감히 마음을 연결하여 전후에서 맞장구를 치며 밝은 해 아래에서 날뛰었겠습니까. 연교에서 말씀하시기를 ‘성한이 임금의 원수고 나라의 역적이 된 것은 한결같이 홍인한과 구선복과 같으나 끝내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은 법을 쓰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만일 그가 참으로 무인년 연간의 일을 몰랐다고 한다면 흉소(凶疏) 가운데서 일문 일답(一問一答)으로 반복하여 억양(抑揚)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가 익히 알고 익히 들은 것이 불을 보듯 환하니, 흉역(凶逆)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며,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신은 우선 그 지엽(枝葉)은 버려두고 곧바로 그 근저(根柢)만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김종수(金鍾秀)는 천성이 험악하고 처신이 간특하여 뱃속에 가득찬 것은 모두 여기(戾氣)뿐이요 발언과 행사가 모두 화심(禍心)뿐인데 자칭 사류(士類)라 하여 마음을 속이고 세상을 속였습니다. 만년에는 역척(逆戚)에게로 돌아가 벼슬을 얻고 잃는 것에 대한 염려만 하였습니다. 홍국영(洪國榮)이 정권을 잡자 노예처럼 굽실거리고 파리나 개처럼 아첨하며, 심지어는 그의 형 김종후(金鍾厚)에게 권하여 글을 올려 국영을 유임시키기를 청하면서 천고의 기남자(奇男子)라고 하였으니, 이런 일은 거간꾼만도 못한 짓인데 어찌 사대부의 소행이라 하겠습니까. 아주 작은 원한으로 반드시 남의 가족을 멸망시키고자 하고 성세(聲勢)를 떨치게 되면 반드시 자기가 위복(威福)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권세를 부리기를 오직 미치지 못할 듯이 하고 같은 무리는 옹호하고 다른 당(黨)은 공격해 부딪치기만 하면 반드시 부수어버립니다. 이는 그에게 있어 오히려 하찮은 일에 속합니다. 오늘날 스스로 도망한 도적을 숨겨주는 숲과 참새를 몰아넣는 숲이 되는 자는 누구입니까. 일찍이 후익(後翼)을 심복으로 삼아 후익이 역적질을 하였고, 지금 구종이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일은 바로 김종수의 창귀(倀鬼) 노릇을 한 것이며, 성한의 부도(不道)한 말 역시 종수가 효시가 됩니다. 아, 종수는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치우치게 은우(恩遇)를 입어 이도(泥塗) 가운데서 발탁하여 보필하는 반열에 두었으니 예대(禮待)의 후함과 위임의 두터움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그 역시 사람일 뿐인데 조금이라도 은덕을 갚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채우기 어려운 큰 욕심을 두어 성한과 구종 같은 자를 애지중지하여 길러서 긴밀하게 모의하고 난만(爛漫)하게 관통(關通)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무리들이 이목(耳目)에 물들고 문견이 익숙해져 그 말과 의논을 시귀(蓍龜)처럼 보고 그의 일을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본받았습니다. 그러니 두 역적은 종수의 괴뢰가 되고, 종수는 두 역적의 두뇌가 되어 죄악이 두 역적보다 더 극심하고 큽니다.
또 연전의 선희궁(宣禧宮)의 개호(改號)하는 일로 말하더라도 신의 계부가 글을 진달하여 청한 것은 오로지 고심과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우리 성상께서 크게 감동하시어 그 글을 묘당과 관각(館閣)에 내려 궁호 고치기를 의논하였는데, 종수는 소본(疏本)을 보고서 까닭없이 부름을 어기고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임금을 이기려 하고 의리를 저버린 것은 이미 하나의 기량(伎倆)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이런 의리에 관계된 것은 일체 죽도록 모피한 것이니, 아, 역시 흉패(凶悖)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우선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고 성한과 구종 두 역적은 한결같이 대신과 여러 신하의 청을 따르시어 백대 아래에 의리를 밝히고 반석과 같은 기반 위에 국가를 두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밤낮으로 염려하고 힘쓰는 것은 오직 세신(世臣)을 보호하고 세도(世道)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거기다가 겹쳐서 근래 날마다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듣고 날마다 차마 볼 수 없는 글을 보는데, 비단 감히 하지 못할 뿐더러 모두 차마 하지 못할 일들이었다. 한 달 넘게 수응(酬應)하던 나머지에 9일 동안 재계(齋戒)하다가 병이 생겨 기운이 지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제께 이후부터 의리가 크게 정해져서 우부(愚夫)들도 모두 알게 되어 조정의 기상이 편안해지고 심신(心神) 역시 분발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어제 늦게 우상의 상소를 보았는데 한 번 보고 놀라고 다시 보고 놀랐으며 보고 또 보고 놀라서 오랫동안 꼼짝할 수가 없었으니, 고금에 어찌 일찍이 대신이 대신을 논함이 그처럼 위험하게 한 경우가 있었겠는가. 내가 전 우상을 임용한 것이 어찌 그전 우상에게 사정을 두어서 그랬겠는가. 이 우상을 임용한 것 역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인데 우상의 이번 거조는 어째서 하게 된 것인가. 비단 한때의 공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천고(千古)의 소인(小人)을 지목(指目)한 말을 모아서 두루 그의 평일을 일일이 들면서 구종(九宗)과 유성한(柳星漢)의 근저가 된다고 귀결지었다. 심지어 연전 선희궁의 개호 때 위패(違牌)한 한 가지 일을 바로 감히 말해서는 안 될 의리에 잇대어 놓았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때의 곡절은 일찍이 익히 알아서 고(故) 정승 이성원(李性源)을 연석에서 배척해 논죄(論罪)할 때 역시 다소 하교한 바가 있었다. ‘의열(義烈)’이란 두 자로 개칭하는 것이 적합한 지의 여부는 전 우상이 스스로 와서 의논하였는데 그 사이에 무슨 딴 말이 있었겠는가. 이는 중이 고기를 먹는다고 꾸짖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많은 말로 변명할 것도 없다. 성한과 구종의 일에 이르러서는 천만 이치에 가깝지 않다. 가사 전 우상이 참으로 친밀한 자취가 있었다면 능침(陵寢)에서 하마(下馬)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 책망하고 가르쳐 다시는 범하지 못하도록 하였겠는가. 전 우상은 또 매우 일을 보는 것이 민첩하니, 설혹 남의 이름을 이루는 데 그의 힘을 도와주기로 했다면 마땅히 반드시 이름을 이루는 일로써 가르쳐 주었을 것이지 어찌 분명하게 우러러 본받았고 자신이 한 방 안의 가까운 사이에서도 일찍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차마 제기하지 못했던 것을 떠들어대도록 권하여 함께 붙잡고 만 길 구덩이로 빠지는 것을 달게 여기겠는가. 이밖의 여러 조항은 모두 그만두더라도 ‘홍국영에게 노예처럼 굽실거렸다.’는 것 역시 어찌 국영을 두려워해서 그랬겠는가. 사분(私憤)을 겸하여 임금의 원수를 갚는 데 솔선해서 앞장설 자는 조정에 가득한 잠신(簪紳) 가운데 단지 그의 집안이 있을 뿐이었으니, 국영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일을 구제하기 바빠던 것이다. 그의 형을 산림(山林)에서 상소하여 머물게 하기를 청한 것 역시 후의 범죄가 나타나지 않음을 말미암아서였다. 전 우상은 바로 나라쪽 사람인데 어찌 도적이 도망해 숨는 숲이라 말할 수 있겠으며, 전 우상은 새매라고 할 수 있는데 어찌 혹시라도 새가 모여드는 숲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말을 이미 남김없이 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넣었고 멀리 찬축하는 율(律)까지 비의(比擬)하였으니 전 우상이 우상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이처럼 악착하는 일을 하는가. 대저 우상은 누구의 집안이며 누구의 조카인가. 매복(枚卜)079) 하는 날에 정성껏 신신 당부하면서 면려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우상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 우상이 나를 등진 것인가, 내가 우상을 등진 것인가. 말하는 자야 어렵지 않겠지만 듣는 자가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비록 10 명의 우상이나 1백 명의 우상이 있다 하더라도 전의 우상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내가 전 우상을 주연(胄筵) 때부터 여항(閭巷)에서 만나 지위가 암랑(巖廊)에 이르기까지 이미 돕고 또 도왔으니, 우상은 전의 우상에게 어떤가. 내가 우상에게 비록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려함이 많았는데 이제 이렇게 하니 다시 더 머뭇거리겠는가. 그 역시 대신이요 이 역시 대신이니 예(禮)는 치우치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 이는 크게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이런 것에 만약 분명한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세신(世臣)을 보호할 수 있겠으며 세도(世道)를 안정시킬 수 있겠는가.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에게 우선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내가 어찌 경을 잊어버리겠으며, 내가 어찌 경을 버리겠는가. 저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비록 1백 사람이 외쳐 대더라도 마땅히 한결같은 예로 귀기울여 믿을 이치가 없다. 더구나 경은 이전에 몇 번이나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경우를 당했던가. 내가 이미 당일에 심력(心力)을 다 썼으며 결코 동료 정승의 말에 경중을 두어 한 번도 치우치게 의지하지 않았으니 경은 모름지기 나를 용문(龍門)의 지주(砥柱)처럼 굳게 믿으라. 원소(原疏) 1 본(本)을 또 사관(史官)에게 베껴 주고 이번의 이 전교에 만일 모조리 변석(卞釋)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역시 모름지기 낱낱이 부주(附奏)에 신폭(申暴)해서 전 우상에게 전유(傳諭)하라."
하고, 마침내 박종악의 상소에 비답을 내리기를,
"대신의 상소에 이미 처분함이 있었다 하여 비답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부득이 대략 몇 줄에 본의(本意)를 선포하니, 전교 가운데 있다. 위 조항에 운운(云云)한 것은 구전 하교를 보지 못한 듯한데, 이는 우선 생략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14면
원문
○辛酉/罷右議政朴宗岳職, 敦諭于前右議政金鍾秀。 宗岳上疏曰:
臣伏讀閏四月二十七日筵本下敎, 字字精微, 言言惻怛, 有足以動天地而泣鬼神。 爲今日臣子, 承此筵敎, 孰不心折而腸摧, 失聲而痛泣也哉? 嗚呼! 我聖上無樂乎南面, 煢煢然在疚, 含恤茹痛, 凡易三十霜而如一日。 食息寤寐之間, 而堯眉不展, 煩鬱蟠結于中, 而舜慕不匱, 寧不欲刑法之大行, 情事之夬伸也, 特以事關莫重莫大至嚴至敬之地, 故俯仰乎天地高厚, 隱忍乎多少歲月, 殿下之方寸, 若是之窮且苦矣。 筵敎若曰: "歲月浸遠, 義理愈晦, 近於諸臣章奏, 不能使之勿言。" 猗歟, 大哉! 雖使堯、舜復起, 不易之矣。 臣請以家庭聞見, 流涕而悉陳之。 臣季父明源, 有窮天極地之痛, 而終不能一暴, 臣若不言, 則雖以日月之明, 而何由盡燭也? 昔年罔極之初, 與諸都尉登對也, 臣季父血淚被面, 不能成聲。 我先大王前席良久, 玉色凄愴, 君臣上下, 不忍有片言酬酢, 仍命退。 伊後每入密室, 奉玩景慕宮遺筆, 必澘然流涕。 臣嘗從(頌)〔容〕 叩問, 則掩抑良久曰: "景慕宮禮容莊肅, 有天人氣像, 睿度弘毅, 有聖神姿稟。 以吾君之子, 居貳極之位, 殿宮之間, 至樂洩洩如也, 和氣瀜瀜如也。 我英考, 每對睿容, 喜溢天顔。 雖以文王之至慈, 周公之達孝, 何以加焉? 受命代理, 八域延頸, 不幸戊、己以後, 一種群凶, 內外締結, 疑亂煽動, 而賴我兩聖母顧之復之, 左之右之, 故惟彼群凶, 履霜有漸, 而猶未堅氷矣。 及夫禮陟之後, 戊寅、己卯以來, 群凶酌酒相賀, 煽亂益甚, 誣逼益急, 內而飛語, 外而投匭, 改頭換面, 神鬼莫測, 尙忍言哉! 吾豈不能爲安金藏拚得一死, 何敢以平人自居乎?" 一切世況, 不復留心, 若窮人之無歸者, 凡三十年所矣。 嗚呼! 凶逆輩出, 義理日晦, 臣每念季父之言, 徊徨抑塞, 心口自語曰: "欲言則分義也道理也, 有不敢容易出口也, 不言則是上以負我聖上之再造也, 下以負臣季父之遺忠也。" 此際嶺儒萬人之疏出, 重臣李秉模繼又聲討。 此箇義理, 殿下之所以跬步不忘, 日夕講究者。 伏願殿下, 特下哀痛之音, 誕告八方曰: "我先大王下敎旣如是丁寧懇惻, 則先大王聖意所在, 可以仰度, 我小朝邸下, 嘗下令于冑筵曰: ‘禧爲江充。’ 睿敎又如彼, 皎于日星, 則魯、禧通天之罪, 於是益彰矣。" 至若外此諸賊, 罪盈惡極者, 亟下明命, 亟行天討, 竝爲一通文字, 刊之金石。 筵敎若曰: "若或大行誅討, 明言不諱, 則先大王在天之靈, 雖悅豫於冥冥之中, 景慕宮於昭陟降, 豈無怵惕不安之心乎?" 夫神理、人情, 本自不遠, 人情所在, 義理寓焉, 義理所寓, 神理亦通。 殿下之至情旣伸, 則義理可明也, 義理旣明, 則神理亦通也。 然則先大王豈不悅豫乎, 景慕宮亦豈不悅豫乎? 臣伏見重臣徐有隣疏批, 引經據義, 不賜允兪, 臣請有以仰復之。 一部《明義》, 卽古之《麟經》, 前聖、後聖, 其揆一也。 然苟求其本, 則戊、己本也, 乙、丙末也。 《明義錄》中, 只擧乙、丙, 不及戊、己, 其於本末之義, 果何如也? 以臣管見, 撰成《明義》上篇, 弁之以上所陳大誥之文, 歷擧群凶爲戊、己爲乙、丙之源流脈絡, 附之以載翰輩行貨凶宦, 自干天誅之罪, 與刊行《明義》, 合爲一帙, 則豈非明天理、正人心之一大關鍵乎? 噫嘻! 星、九兩賊之至妖至慝, 覆載之所不容, 古今之所未有也。 苟使渠, 只是蟣蝨之賤, 而初無蚍蜉蟻子之援, 則渠何敢連腸結肚, 前唱後和, 跳踉於白日之下也? 筵敎若曰: "星漢之爲君讎國賊, 一如麟、復, 終未的定, 故姑不用法", 臣愚竊以爲不然。 使渠眞箇不知戊寅年間事, 凶疏中一問一答, 反復抑揚, 此何故也? 渠所稔知而稔聞, 明若觀火, 非凶肚逆腸而何, 非君讎國賊而何? 臣姑捨其枝葉, 直就其根柢而論之。 金鍾秀之賦性凶險, 行已奰慝, 撑腸拄腹, 都是戾氣, 發言行事, 無非禍心, 自稱士類, 欺心而欺世。 晩歸逆戚, 患得而患失。 國榮之當路也, 奴顔婢膝, 蠅營狗苟, 至勸其兄鍾厚, 上章請留, 稱之以千古奇男子, 此駔儈之不若, 豈士夫之所爲? 睚眦之怨, 必欲滅人家族, 聲勢所張, 必欲作己威福。 市權賣勢, 惟恐不及, 黨同伐異, 觸之必碎。 此在渠猶屬薄物細故。 今之自作逋盜之藪, 敺雀之叢者誰也? 嘗以後翼爲心腹, 而後翼作賊。 今焉九宗不臣之節, 卽鍾秀之倀鬼也, 星漢不道之言, 亦鍾秀之嚆矢也。 噫! 鍾秀粤自春坊, 偏被恩遇, 拔之泥塗之中, 置之承弼之列, 禮待之厚、委畀之篤, 何如也, 而渠亦人耳, 全無涓埃圖報之念, 只有谿壑難充之慾, 如星、九者, 愛之重之, (卯)〔卵〕 之育之, 綢繆焉謀議, 爛漫焉關通, 故此輩耳目濡染, 聞見習熟, 視其言議如蓍龜, 效其事爲如山斗。 然則二賊爲鍾秀之傀儡, 鍾秀爲二賊之頭腦, 惡極於二賊, 罪浮於二賊, 而且以年前宣禧宮改號事言之, 臣季父之陳章請改, 亶出於苦心血忱, 而我聖上油然而感, 下其章于廟堂館閣, 議改宮號, 則鍾秀見疏本, 而無端違牌不參。 其角勝君父, 背馳義理, 已成一副當伎倆, 故凡係此等義理, 一切抵死謀避, 吁亦凶且悖矣! 伏乞爲先施以遠竄之典, 星、九二賊, 一從大臣、諸臣之請, 明義理於百代之下, 奠國家於磐泰之上。
敎曰: "惟今予一念, 夙夜所耿耿勉勉者, 卽惟曰保世臣靖世道。 重之以近日, 日聞所不聞之說, 日見不敢見之言, 不惟不敢, 無非不忍。 閱月酬應之餘, 九日齋居, 病隨以侵尋, 氣不能枝梧。 然自再昨以後, 義理大定, 愚夫皆知, 竊幸其朝象得以寧息, 心神庶亦抖撽, 昨晩見右相疏, 一見駭再見愕, 見之又見, 且愕且駭之不足, 久而不覺無吪。 往古來今, 曷嘗有以大臣論大臣, 如彼其危險哉? 予之用前右相者, 豈私於前右相? 用此右相, 亦有深意存焉, 而右相此擧, 何爲而作也? 不可但以一時駁擊言, 集千古小人之目, 歷論其平日, 歸之於九宗、柳星漢之根柢, 甚至年前宣禧宮改號時違牌一事, 直接之以不敢言之義理, 此何說也? 其時委折, 曾以稔悉, 故相李性源筵斥論罪也, 亦有所多少下敎。 義烈二字之改稱當否, 以前右相之自來言議, 寧有他說於其間, 則何異責僧啗肉? 不須爲之多辨。 至於星、九事, 尤萬萬不近理。 假使前右相, 眞有親密之跡, 則聞不下馬於陵寢, 其可不以責以誨, 期於不更犯乎? 前右相, 且甚慧於見事。 設或成人之名, 而助其臂力, 當以必可成名之事敎之, 豈可以分明仰體, 而自家之曾所不敢道不忍提於一堂密勿之際者, 其可勸令叫嚷, 甘與之携持胥溺於萬仞之坑乎? 外此諸條, 竝置之, 奴顔婢膝於國榮云者, 亦豈畏國榮而然? 兼私憤而討君讎, 挺身當頭者, 滿朝簪紳, 只有其家, 則非畏國榮, 急於濟事也。 乃兄山林之上章請留, 亦由於後犯之未彰。 前右相, 卽國邊人, 何可謂之逋盜藪, 前右相可以爲鷹鸇也, 豈或擬於鳥雀叢乎? 言旣無餘, 驅之罔測, 至擬以遠竄之律者, 前右相何負於右相, 而有此齷齪之擧乎? 大抵右相, 是誰之家, 是誰之姪, 而枚卜之日, 其所眷眷而申申, 策勵勉勸者, 果何如也, 則以右相有此擧? 右相負予乎? 予負右相乎? 言之者固無難, 聽之者其可堪乎? 然雖有十右相、百右相, 何損於前右相? 予於前右相, 自冑筵遇巷, 至于位躋巖廊, 旣拯之又拯之, 右相其於前右相何? 予於右相, 雖不索言, 憂慮則多端, 而乃今爲此, 此而其更顧藉乎? 莫曰彼亦大臣, 此亦大臣, 禮不可偏施。 此則有大不然者。 此等處, 若不明賜處分, 世臣可保, 世道可靖乎? 右議政朴宗岳, 爲先施以不敍之典。 予豈忘卿, 予豈捨卿? 市虎之至, 雖百人咻之, 當一例無傾信之理。 況卿前此幾殊而蘇者, 凡幾遭? 予旣費盡心力於當日, 決不爲僚相言所輕重, 而一有偏倚, 卿須恃予, 如龍門之砥柱。 原疏一本, 亦爲謄付於史官, 今此傳敎, 如有未盡卞釋者, 亦須一一申暴於附奏, 傳諭于前右相。" 遂賜宗岳疏批曰: "大臣疏, 不可以已有處分, 無批, 故不得不略宣數行, 本意在傳敎中矣。 上款云云, 似未見口傳下敎, 此姑略之。"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14면
정조 16년 (1792) 5월 24일
국역
우의정 박종악을 파직하고, 전 우의정 김종수(金鍾秀)를 돈유(敦諭)하였다. 박종악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윤4월 27일 연본(筵本) 하교를 읽어보니 글자마다 정미하고 말씀마다 측달(惻怛)하여 족히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울릴 만하였으니, 오늘날 신하 된 자가 이 연교를 받들면 그 누군들 마음이 찢어지고 애가 끊어져 실성 통곡(失聲痛哭)하지 않겠습니까. 아, 우리 성상께서 임금 노릇하는 즐거움이 없이 외롭게 상중에 계셨으며 슬픔을 머금고 아픔을 참으며 30년 세월을 하루처럼 지내셨습니다. 먹을 때나 쉴 때, 잠잘 때나 깨는 사이에 백성에 대한 근심으로 눈썹이 펴지지 않았고 마음속에서는 번뇌와 울적함이 맺혀셔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다하지 않으셨으니, 어찌 형법을 크게 행하고 정사(情事)를 쾌히 펴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만, 다만 일이 더없이 중대하고 엄격한 자리에 관계되기 때문에 높고 두터운 천지를 부앙(俯仰)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참아오셨으니, 전하의 마음은 이처럼 궁하고 괴로우셨습니다. 연교(筵敎)에서 ‘세월이 오래되어 의리가 더욱 어두워져 근래 여러 신하들의 장주(章奏)에서 말을 하지 못하게 할 수가 없다.’라고 하셨으니, 아, 그 훌륭하심은 비록 요(堯)·순(舜)이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집안에서 듣고 본 것으로 눈물을 흘리며 다 진달하겠습니다. 신의 계부(季父) 박명원(朴明源)에게는 천지에 사무치는 슬픔이 있었는데 끝내 한 번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신이 만약 말을 하지 않는다면 비록 해와 달처럼 밝으심으로도 무엇을 말미암아서 모조리 밝히겠습니까. 옛날 망극한 일이 있던 처음에 여러 도위(都尉)가 등대하였는데, 신의 계부는 피눈물이 얼굴을 덮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선대왕의 앞자리에 한참 동안 계셨는데, 옥색(玉色)이 처창(凄愴)하시어 군신 상하가 차마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다가 이어 물러가기를 명하셨습니다. 그후에 매양 밀실(密室)에 들어가 경모궁(景慕宮)의 유필(遺筆)을 받들어 구경하고는 기어이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신이 일찍이 조용히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울먹이며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경모궁께서는 예용(禮容)이 장숙(莊肅)하여 천인(天人)의 기상이 있었으며, 예도(睿度)가 넓어서 성신(聖神)의 자품(資稟)이 계셨다. 우리 임금의 아들로 세자의 지위에 계시어 전궁(殿宮) 사이에 지극한 즐거움이 피어오르는 듯하고 화기(和氣)가 가득 넘쳐흘렀다. 우리 영고(英考)께서 매양 예용(睿容)을 대하실 때마다 기쁨이 천안(天顔)에 넘치셨으니 비록 문왕(文王)의 지극한 자애와 주공(周公)의 뛰어난 효도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었겠는가. 대리(代理)의 명을 받자 팔도가 목을 빼고 기다렸는데 불행하게도 무인년·기묘년 이후에 한 종류의 군흉(群凶)이 안팎에서 결탁하여 미혹시켜 어지럽히고 선동하였는데 우리 두 성모(聖母)께서 돌보아 주고 보살펴 주심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저 군흉이 조짐은 이루었으나 그래도 성공하지는 못하였었다. 승하하신 후 무인년·기묘년 이후에 이르러서는 군흉이 술잔을 들고 서로 축하하면서 난리를 선동함이 더욱 심해지고 무핍(誣逼)함은 더욱 급해져, 안에서는 유언 비어를 퍼뜨리고 밖에서는 상소하여 겉모습만 바꾸어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미 안금장(安金藏)078) 처럼 한 번 죽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평민으로 자처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모든 세상일에 더는 마음을 쓰지 않고 마치 궁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 자처럼 지낸 것이 30년이었습니다.
아, 흉역의 무리가 나와 의리가 날로 어두워지니 신이 계부의 말을 생각할 때마다 서성거리며 기가 막혀 스스로 생각하기를 ‘말을 하고자 하니 분의(分義)와 도리(道理)에 감히 쉽게 입에서 꺼낼 수 없는 것이 있고, 말하지 않으려니 위로 우리 성상께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신의 계부의 유충(遺忠)을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즈음에 영남 유생의 만인소(萬人疏)가 나왔고 중신(重臣) 이병모(李秉模)가 이어서 또 성토하였습니다. 이 의리는 전하께서 잠시도 잊지 못하고 밤낮으로 강구하시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애통한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팔방에 크게 고하기를 ‘우리 선대왕의 하교가 이미 이처럼 정령하고 간절하셨으니 선대왕의 성의(聖意)가 있는 바를 우러러 헤아릴 수 있고, 우리 소조(小朝) 저하께서 일찍이 주연(胄筵)에서 하명하시기를 「홍계희(洪繼禧)는 강충(江充)이다.」라고 하셨다. 예교(睿敎)가 또 이렇게 해와 별처럼 밝으니 김상로(金尙魯)와 홍계희의 하늘에 닿는 죄가 여기에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하소서. 이밖의 여러 역적에 이르러서는 죄악이 극도로 찬 자에게도 빨리 분명한 명을 내려 어서 천토(天討)를 행하고 아울러서 한 통의 문서를 만들어 금석(金石)에 새겨야 합니다. 연교(筵敎)에서 말씀하기를 ‘혹 주토(誅討)를 크게 행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선대왕의 영혼은 비록 어두운 가운데서 기뻐하시겠으나 밝게 오르내리는 경모궁(景慕宮)의 영혼이야 어찌 슬퍼하고 불안해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대저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은 본디 멀지 않아서 인정이 있는 곳에 의리가 부쳐져 있고, 의리가 부쳐져 있는 곳에 신리 역시 통하게 됩니다. 전하의 지극한 정을 이미 펴면 의리가 밝아지며, 의리가 이미 밝아지면 신리 역시 통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선대왕께서 어찌 기뻐하지 않겠으며, 경모궁 역시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중신(重臣) 서유린(徐有隣)의 소비(疏批)를 보건대 경서(經書)를 인용하고 의리를 근거해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는데, 신은 반복하여 아뢰겠습니다. 《명의록(明義錄)》 한 부(部)는 옛날의 《춘추》이며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은 그 법도가 하나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근본을 따지자면 무인년·기묘년은 근본이고 을미년과 병신년은 말엽입니다. 《명의록》 가운데서 단지 을미년·병신년만 들고 무인년·기묘년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본말(本末)의 뜻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신의 좁은 소견으로는 《명의록》 상편(上篇)을 편찬하되 첫머리에 상이 펼친 대고(大誥)의 글을 싣고 여러 흉적이 무인년·기묘년과 을미년·병신년이 원류(源流)와 맥락(脈絡)임을 두루 열거하며, 부록(附錄)에다가 재한(載翰)의 무리가 흉악한 환관(宦官)에게 뇌물을 써서 스스로 천주(天誅)를 범한 것을 실어서 간행된 《명의록》과 합쳐 한 질(帙)을 만든다면 어찌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루는 하나의 큰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아, 유성한(柳星漢)과 윤구종(尹九宗) 두 역적의 지극한 요악(妖惡)은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고 고금에 없던 바입니다. 하잘것없이 천박한 그들에게 처음부터 조무래기들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그가 어찌 감히 마음을 연결하여 전후에서 맞장구를 치며 밝은 해 아래에서 날뛰었겠습니까. 연교에서 말씀하시기를 ‘성한이 임금의 원수고 나라의 역적이 된 것은 한결같이 홍인한과 구선복과 같으나 끝내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은 법을 쓰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만일 그가 참으로 무인년 연간의 일을 몰랐다고 한다면 흉소(凶疏) 가운데서 일문 일답(一問一答)으로 반복하여 억양(抑揚)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가 익히 알고 익히 들은 것이 불을 보듯 환하니, 흉역(凶逆)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며,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신은 우선 그 지엽(枝葉)은 버려두고 곧바로 그 근저(根柢)만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김종수(金鍾秀)는 천성이 험악하고 처신이 간특하여 뱃속에 가득찬 것은 모두 여기(戾氣)뿐이요 발언과 행사가 모두 화심(禍心)뿐인데 자칭 사류(士類)라 하여 마음을 속이고 세상을 속였습니다. 만년에는 역척(逆戚)에게로 돌아가 벼슬을 얻고 잃는 것에 대한 염려만 하였습니다. 홍국영(洪國榮)이 정권을 잡자 노예처럼 굽실거리고 파리나 개처럼 아첨하며, 심지어는 그의 형 김종후(金鍾厚)에게 권하여 글을 올려 국영을 유임시키기를 청하면서 천고의 기남자(奇男子)라고 하였으니, 이런 일은 거간꾼만도 못한 짓인데 어찌 사대부의 소행이라 하겠습니까. 아주 작은 원한으로 반드시 남의 가족을 멸망시키고자 하고 성세(聲勢)를 떨치게 되면 반드시 자기가 위복(威福)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권세를 부리기를 오직 미치지 못할 듯이 하고 같은 무리는 옹호하고 다른 당(黨)은 공격해 부딪치기만 하면 반드시 부수어버립니다. 이는 그에게 있어 오히려 하찮은 일에 속합니다. 오늘날 스스로 도망한 도적을 숨겨주는 숲과 참새를 몰아넣는 숲이 되는 자는 누구입니까. 일찍이 후익(後翼)을 심복으로 삼아 후익이 역적질을 하였고, 지금 구종이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일은 바로 김종수의 창귀(倀鬼) 노릇을 한 것이며, 성한의 부도(不道)한 말 역시 종수가 효시가 됩니다. 아, 종수는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치우치게 은우(恩遇)를 입어 이도(泥塗) 가운데서 발탁하여 보필하는 반열에 두었으니 예대(禮待)의 후함과 위임의 두터움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그 역시 사람일 뿐인데 조금이라도 은덕을 갚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채우기 어려운 큰 욕심을 두어 성한과 구종 같은 자를 애지중지하여 길러서 긴밀하게 모의하고 난만(爛漫)하게 관통(關通)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무리들이 이목(耳目)에 물들고 문견이 익숙해져 그 말과 의논을 시귀(蓍龜)처럼 보고 그의 일을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본받았습니다. 그러니 두 역적은 종수의 괴뢰가 되고, 종수는 두 역적의 두뇌가 되어 죄악이 두 역적보다 더 극심하고 큽니다.
또 연전의 선희궁(宣禧宮)의 개호(改號)하는 일로 말하더라도 신의 계부가 글을 진달하여 청한 것은 오로지 고심과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우리 성상께서 크게 감동하시어 그 글을 묘당과 관각(館閣)에 내려 궁호 고치기를 의논하였는데, 종수는 소본(疏本)을 보고서 까닭없이 부름을 어기고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임금을 이기려 하고 의리를 저버린 것은 이미 하나의 기량(伎倆)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이런 의리에 관계된 것은 일체 죽도록 모피한 것이니, 아, 역시 흉패(凶悖)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우선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고 성한과 구종 두 역적은 한결같이 대신과 여러 신하의 청을 따르시어 백대 아래에 의리를 밝히고 반석과 같은 기반 위에 국가를 두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밤낮으로 염려하고 힘쓰는 것은 오직 세신(世臣)을 보호하고 세도(世道)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거기다가 겹쳐서 근래 날마다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듣고 날마다 차마 볼 수 없는 글을 보는데, 비단 감히 하지 못할 뿐더러 모두 차마 하지 못할 일들이었다. 한 달 넘게 수응(酬應)하던 나머지에 9일 동안 재계(齋戒)하다가 병이 생겨 기운이 지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제께 이후부터 의리가 크게 정해져서 우부(愚夫)들도 모두 알게 되어 조정의 기상이 편안해지고 심신(心神) 역시 분발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어제 늦게 우상의 상소를 보았는데 한 번 보고 놀라고 다시 보고 놀랐으며 보고 또 보고 놀라서 오랫동안 꼼짝할 수가 없었으니, 고금에 어찌 일찍이 대신이 대신을 논함이 그처럼 위험하게 한 경우가 있었겠는가. 내가 전 우상을 임용한 것이 어찌 그전 우상에게 사정을 두어서 그랬겠는가. 이 우상을 임용한 것 역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인데 우상의 이번 거조는 어째서 하게 된 것인가. 비단 한때의 공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천고(千古)의 소인(小人)을 지목(指目)한 말을 모아서 두루 그의 평일을 일일이 들면서 구종(九宗)과 유성한(柳星漢)의 근저가 된다고 귀결지었다. 심지어 연전 선희궁의 개호 때 위패(違牌)한 한 가지 일을 바로 감히 말해서는 안 될 의리에 잇대어 놓았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때의 곡절은 일찍이 익히 알아서 고(故) 정승 이성원(李性源)을 연석에서 배척해 논죄(論罪)할 때 역시 다소 하교한 바가 있었다. ‘의열(義烈)’이란 두 자로 개칭하는 것이 적합한 지의 여부는 전 우상이 스스로 와서 의논하였는데 그 사이에 무슨 딴 말이 있었겠는가. 이는 중이 고기를 먹는다고 꾸짖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많은 말로 변명할 것도 없다. 성한과 구종의 일에 이르러서는 천만 이치에 가깝지 않다. 가사 전 우상이 참으로 친밀한 자취가 있었다면 능침(陵寢)에서 하마(下馬)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 책망하고 가르쳐 다시는 범하지 못하도록 하였겠는가. 전 우상은 또 매우 일을 보는 것이 민첩하니, 설혹 남의 이름을 이루는 데 그의 힘을 도와주기로 했다면 마땅히 반드시 이름을 이루는 일로써 가르쳐 주었을 것이지 어찌 분명하게 우러러 본받았고 자신이 한 방 안의 가까운 사이에서도 일찍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차마 제기하지 못했던 것을 떠들어대도록 권하여 함께 붙잡고 만 길 구덩이로 빠지는 것을 달게 여기겠는가. 이밖의 여러 조항은 모두 그만두더라도 ‘홍국영에게 노예처럼 굽실거렸다.’는 것 역시 어찌 국영을 두려워해서 그랬겠는가. 사분(私憤)을 겸하여 임금의 원수를 갚는 데 솔선해서 앞장설 자는 조정에 가득한 잠신(簪紳) 가운데 단지 그의 집안이 있을 뿐이었으니, 국영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일을 구제하기 바빠던 것이다. 그의 형을 산림(山林)에서 상소하여 머물게 하기를 청한 것 역시 후의 범죄가 나타나지 않음을 말미암아서였다. 전 우상은 바로 나라쪽 사람인데 어찌 도적이 도망해 숨는 숲이라 말할 수 있겠으며, 전 우상은 새매라고 할 수 있는데 어찌 혹시라도 새가 모여드는 숲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말을 이미 남김없이 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넣었고 멀리 찬축하는 율(律)까지 비의(比擬)하였으니 전 우상이 우상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이처럼 악착하는 일을 하는가. 대저 우상은 누구의 집안이며 누구의 조카인가. 매복(枚卜)079) 하는 날에 정성껏 신신 당부하면서 면려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우상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 우상이 나를 등진 것인가, 내가 우상을 등진 것인가. 말하는 자야 어렵지 않겠지만 듣는 자가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비록 10 명의 우상이나 1백 명의 우상이 있다 하더라도 전의 우상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내가 전 우상을 주연(胄筵) 때부터 여항(閭巷)에서 만나 지위가 암랑(巖廊)에 이르기까지 이미 돕고 또 도왔으니, 우상은 전의 우상에게 어떤가. 내가 우상에게 비록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려함이 많았는데 이제 이렇게 하니 다시 더 머뭇거리겠는가. 그 역시 대신이요 이 역시 대신이니 예(禮)는 치우치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 이는 크게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이런 것에 만약 분명한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세신(世臣)을 보호할 수 있겠으며 세도(世道)를 안정시킬 수 있겠는가.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에게 우선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내가 어찌 경을 잊어버리겠으며, 내가 어찌 경을 버리겠는가. 저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비록 1백 사람이 외쳐 대더라도 마땅히 한결같은 예로 귀기울여 믿을 이치가 없다. 더구나 경은 이전에 몇 번이나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경우를 당했던가. 내가 이미 당일에 심력(心力)을 다 썼으며 결코 동료 정승의 말에 경중을 두어 한 번도 치우치게 의지하지 않았으니 경은 모름지기 나를 용문(龍門)의 지주(砥柱)처럼 굳게 믿으라. 원소(原疏) 1 본(本)을 또 사관(史官)에게 베껴 주고 이번의 이 전교에 만일 모조리 변석(卞釋)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역시 모름지기 낱낱이 부주(附奏)에 신폭(申暴)해서 전 우상에게 전유(傳諭)하라."
하고, 마침내 박종악의 상소에 비답을 내리기를,
"대신의 상소에 이미 처분함이 있었다 하여 비답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부득이 대략 몇 줄에 본의(本意)를 선포하니, 전교 가운데 있다. 위 조항에 운운(云云)한 것은 구전 하교를 보지 못한 듯한데, 이는 우선 생략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14면
원문
○辛酉/罷右議政朴宗岳職, 敦諭于前右議政金鍾秀。 宗岳上疏曰:
臣伏讀閏四月二十七日筵本下敎, 字字精微, 言言惻怛, 有足以動天地而泣鬼神。 爲今日臣子, 承此筵敎, 孰不心折而腸摧, 失聲而痛泣也哉? 嗚呼! 我聖上無樂乎南面, 煢煢然在疚, 含恤茹痛, 凡易三十霜而如一日。 食息寤寐之間, 而堯眉不展, 煩鬱蟠結于中, 而舜慕不匱, 寧不欲刑法之大行, 情事之夬伸也, 特以事關莫重莫大至嚴至敬之地, 故俯仰乎天地高厚, 隱忍乎多少歲月, 殿下之方寸, 若是之窮且苦矣。 筵敎若曰: "歲月浸遠, 義理愈晦, 近於諸臣章奏, 不能使之勿言。" 猗歟, 大哉! 雖使堯、舜復起, 不易之矣。 臣請以家庭聞見, 流涕而悉陳之。 臣季父明源, 有窮天極地之痛, 而終不能一暴, 臣若不言, 則雖以日月之明, 而何由盡燭也? 昔年罔極之初, 與諸都尉登對也, 臣季父血淚被面, 不能成聲。 我先大王前席良久, 玉色凄愴, 君臣上下, 不忍有片言酬酢, 仍命退。 伊後每入密室, 奉玩景慕宮遺筆, 必澘然流涕。 臣嘗從(頌)〔容〕 叩問, 則掩抑良久曰: "景慕宮禮容莊肅, 有天人氣像, 睿度弘毅, 有聖神姿稟。 以吾君之子, 居貳極之位, 殿宮之間, 至樂洩洩如也, 和氣瀜瀜如也。 我英考, 每對睿容, 喜溢天顔。 雖以文王之至慈, 周公之達孝, 何以加焉? 受命代理, 八域延頸, 不幸戊、己以後, 一種群凶, 內外締結, 疑亂煽動, 而賴我兩聖母顧之復之, 左之右之, 故惟彼群凶, 履霜有漸, 而猶未堅氷矣。 及夫禮陟之後, 戊寅、己卯以來, 群凶酌酒相賀, 煽亂益甚, 誣逼益急, 內而飛語, 外而投匭, 改頭換面, 神鬼莫測, 尙忍言哉! 吾豈不能爲安金藏拚得一死, 何敢以平人自居乎?" 一切世況, 不復留心, 若窮人之無歸者, 凡三十年所矣。 嗚呼! 凶逆輩出, 義理日晦, 臣每念季父之言, 徊徨抑塞, 心口自語曰: "欲言則分義也道理也, 有不敢容易出口也, 不言則是上以負我聖上之再造也, 下以負臣季父之遺忠也。" 此際嶺儒萬人之疏出, 重臣李秉模繼又聲討。 此箇義理, 殿下之所以跬步不忘, 日夕講究者。 伏願殿下, 特下哀痛之音, 誕告八方曰: "我先大王下敎旣如是丁寧懇惻, 則先大王聖意所在, 可以仰度, 我小朝邸下, 嘗下令于冑筵曰: ‘禧爲江充。’ 睿敎又如彼, 皎于日星, 則魯、禧通天之罪, 於是益彰矣。" 至若外此諸賊, 罪盈惡極者, 亟下明命, 亟行天討, 竝爲一通文字, 刊之金石。 筵敎若曰: "若或大行誅討, 明言不諱, 則先大王在天之靈, 雖悅豫於冥冥之中, 景慕宮於昭陟降, 豈無怵惕不安之心乎?" 夫神理、人情, 本自不遠, 人情所在, 義理寓焉, 義理所寓, 神理亦通。 殿下之至情旣伸, 則義理可明也, 義理旣明, 則神理亦通也。 然則先大王豈不悅豫乎, 景慕宮亦豈不悅豫乎? 臣伏見重臣徐有隣疏批, 引經據義, 不賜允兪, 臣請有以仰復之。 一部《明義》, 卽古之《麟經》, 前聖、後聖, 其揆一也。 然苟求其本, 則戊、己本也, 乙、丙末也。 《明義錄》中, 只擧乙、丙, 不及戊、己, 其於本末之義, 果何如也? 以臣管見, 撰成《明義》上篇, 弁之以上所陳大誥之文, 歷擧群凶爲戊、己爲乙、丙之源流脈絡, 附之以載翰輩行貨凶宦, 自干天誅之罪, 與刊行《明義》, 合爲一帙, 則豈非明天理、正人心之一大關鍵乎? 噫嘻! 星、九兩賊之至妖至慝, 覆載之所不容, 古今之所未有也。 苟使渠, 只是蟣蝨之賤, 而初無蚍蜉蟻子之援, 則渠何敢連腸結肚, 前唱後和, 跳踉於白日之下也? 筵敎若曰: "星漢之爲君讎國賊, 一如麟、復, 終未的定, 故姑不用法", 臣愚竊以爲不然。 使渠眞箇不知戊寅年間事, 凶疏中一問一答, 反復抑揚, 此何故也? 渠所稔知而稔聞, 明若觀火, 非凶肚逆腸而何, 非君讎國賊而何? 臣姑捨其枝葉, 直就其根柢而論之。 金鍾秀之賦性凶險, 行已奰慝, 撑腸拄腹, 都是戾氣, 發言行事, 無非禍心, 自稱士類, 欺心而欺世。 晩歸逆戚, 患得而患失。 國榮之當路也, 奴顔婢膝, 蠅營狗苟, 至勸其兄鍾厚, 上章請留, 稱之以千古奇男子, 此駔儈之不若, 豈士夫之所爲? 睚眦之怨, 必欲滅人家族, 聲勢所張, 必欲作己威福。 市權賣勢, 惟恐不及, 黨同伐異, 觸之必碎。 此在渠猶屬薄物細故。 今之自作逋盜之藪, 敺雀之叢者誰也? 嘗以後翼爲心腹, 而後翼作賊。 今焉九宗不臣之節, 卽鍾秀之倀鬼也, 星漢不道之言, 亦鍾秀之嚆矢也。 噫! 鍾秀粤自春坊, 偏被恩遇, 拔之泥塗之中, 置之承弼之列, 禮待之厚、委畀之篤, 何如也, 而渠亦人耳, 全無涓埃圖報之念, 只有谿壑難充之慾, 如星、九者, 愛之重之, (卯)〔卵〕 之育之, 綢繆焉謀議, 爛漫焉關通, 故此輩耳目濡染, 聞見習熟, 視其言議如蓍龜, 效其事爲如山斗。 然則二賊爲鍾秀之傀儡, 鍾秀爲二賊之頭腦, 惡極於二賊, 罪浮於二賊, 而且以年前宣禧宮改號事言之, 臣季父之陳章請改, 亶出於苦心血忱, 而我聖上油然而感, 下其章于廟堂館閣, 議改宮號, 則鍾秀見疏本, 而無端違牌不參。 其角勝君父, 背馳義理, 已成一副當伎倆, 故凡係此等義理, 一切抵死謀避, 吁亦凶且悖矣! 伏乞爲先施以遠竄之典, 星、九二賊, 一從大臣、諸臣之請, 明義理於百代之下, 奠國家於磐泰之上。
敎曰: "惟今予一念, 夙夜所耿耿勉勉者, 卽惟曰保世臣靖世道。 重之以近日, 日聞所不聞之說, 日見不敢見之言, 不惟不敢, 無非不忍。 閱月酬應之餘, 九日齋居, 病隨以侵尋, 氣不能枝梧。 然自再昨以後, 義理大定, 愚夫皆知, 竊幸其朝象得以寧息, 心神庶亦抖撽, 昨晩見右相疏, 一見駭再見愕, 見之又見, 且愕且駭之不足, 久而不覺無吪。 往古來今, 曷嘗有以大臣論大臣, 如彼其危險哉? 予之用前右相者, 豈私於前右相? 用此右相, 亦有深意存焉, 而右相此擧, 何爲而作也? 不可但以一時駁擊言, 集千古小人之目, 歷論其平日, 歸之於九宗、柳星漢之根柢, 甚至年前宣禧宮改號時違牌一事, 直接之以不敢言之義理, 此何說也? 其時委折, 曾以稔悉, 故相李性源筵斥論罪也, 亦有所多少下敎。 義烈二字之改稱當否, 以前右相之自來言議, 寧有他說於其間, 則何異責僧啗肉? 不須爲之多辨。 至於星、九事, 尤萬萬不近理。 假使前右相, 眞有親密之跡, 則聞不下馬於陵寢, 其可不以責以誨, 期於不更犯乎? 前右相, 且甚慧於見事。 設或成人之名, 而助其臂力, 當以必可成名之事敎之, 豈可以分明仰體, 而自家之曾所不敢道不忍提於一堂密勿之際者, 其可勸令叫嚷, 甘與之携持胥溺於萬仞之坑乎? 外此諸條, 竝置之, 奴顔婢膝於國榮云者, 亦豈畏國榮而然? 兼私憤而討君讎, 挺身當頭者, 滿朝簪紳, 只有其家, 則非畏國榮, 急於濟事也。 乃兄山林之上章請留, 亦由於後犯之未彰。 前右相, 卽國邊人, 何可謂之逋盜藪, 前右相可以爲鷹鸇也, 豈或擬於鳥雀叢乎? 言旣無餘, 驅之罔測, 至擬以遠竄之律者, 前右相何負於右相, 而有此齷齪之擧乎? 大抵右相, 是誰之家, 是誰之姪, 而枚卜之日, 其所眷眷而申申, 策勵勉勸者, 果何如也, 則以右相有此擧? 右相負予乎? 予負右相乎? 言之者固無難, 聽之者其可堪乎? 然雖有十右相、百右相, 何損於前右相? 予於前右相, 自冑筵遇巷, 至于位躋巖廊, 旣拯之又拯之, 右相其於前右相何? 予於右相, 雖不索言, 憂慮則多端, 而乃今爲此, 此而其更顧藉乎? 莫曰彼亦大臣, 此亦大臣, 禮不可偏施。 此則有大不然者。 此等處, 若不明賜處分, 世臣可保, 世道可靖乎? 右議政朴宗岳, 爲先施以不敍之典。 予豈忘卿, 予豈捨卿? 市虎之至, 雖百人咻之, 當一例無傾信之理。 況卿前此幾殊而蘇者, 凡幾遭? 予旣費盡心力於當日, 決不爲僚相言所輕重, 而一有偏倚, 卿須恃予, 如龍門之砥柱。 原疏一本, 亦爲謄付於史官, 今此傳敎, 如有未盡卞釋者, 亦須一一申暴於附奏, 傳諭于前右相。" 遂賜宗岳疏批曰: "大臣疏, 不可以已有處分, 無批, 故不得不略宣數行, 本意在傳敎中矣。 上款云云, 似未見口傳下敎, 此姑略之。"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14면
원본
정조 16년 (1792) 5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