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 4월 9일 甲寅 6/8 기사 / 1734년 청 옹정(雍正) 12년
관학 재생의 경의에 밝지 못한 폐단 등에 대한 수찬 조상명의 상소
국역
수찬(修撰) 조상명(趙尙命)이 상소하여 관학(館學) 재생(齋生)의 경의(經義)에 밝지 못한 폐단을 논하고 모두 시강(試講)한 이후에 비로소 입재(入齋)를 허락할 것을 청하였다. 또 평안 도사(平安都事) 김징경(金徵慶)의 구차하게 전차(塡差)됨을 논하여 전조(銓曹)의 당상관을 추고(推考)하고 김징경을 체차(遞差)할 것을 청하였다. 또 먼 지방에 있는 문관(文官)들의 오래 근무하는 폐단을 논하여 말하기를,
"이번 대정(大政)에서 수령의 자리에 문사(文士)는 전연 참여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전조에 신칙하여 빈자리에 따라 견용(甄用)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수령을 택차(擇差)할 때에 문·무(文武)에 구애하지 않으니, 혹 많기도 하고 혹 적기도 한 것은 사세가 본디 그러한 것이다."
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홍계유(洪啓裕)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건기(兪健基)의 일은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주 목사(定州牧使) 황응수(黃應洙)는 일찍이 남읍(南邑)에 부임하였을 때 사람들의 비평이 많이 있었는데, 외람되게 본직(本職)을 제수하니 여론이 시끄러웠습니다. 대계(臺啓)를 정지한 것은 성급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에 스스로 처신(處身)할 바를 생각하지 않고 서둘러 몰염치하게 부임하였으니, 황응수를 마땅히 파직시켜 서용(敍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계(臺啓)는 체모가 중대하여 수쇄(收殺)하기 이전에는 비록 조령(朝令)일지라도 거행할 수가 없는데, 평안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황응수는 이미 정계(停啓)하였으니 재촉해 발송(發送)하라.’고 청한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대각(臺閣)을 경시하고 사체(事體)를 손상한 것은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박사수를 마땅히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부승지(右副承旨) 조진희(趙鎭禧)는 몸가짐이 비루하고 패려(悖戾)하여 전연 사대부(士大夫)의 규모(規模)가 없습니다. 때를 따라 부앙(俯仰)하며 여러 형태로 몸을 변화시켜 공의(公議)에 버림을 받은 지 오래인데, 이 직임을 제수하게 되자 여론이 시끄러웠으니, 조진희를 마땅히 개정(改正)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박사수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고, 황응수와 조진희의 일은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조진희는 젊었을 때부터 언행(言行)이 비루하고 패려하였으며 창루(娼樓)에 출입하였다. 등제(登第)한 초기에 ‘청루(靑樓)의 남은 꿈이 용문(龍門)에 올랐다[靑樓餘夢登龍門]’는 민요(民謠)가 있었는데, 언론(言論)을 변환(變幻)하며 동서(東西)에 분주하였다. 노론(老論)이 당국(當局)하였을 때는 홍계적(洪啓迪)과 교분을 맺었고 군흉(群凶)이 용사(用事)할 때는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무리에게 들러붙어 그들의 응견(膺犬)이 되었다. 을사년239) 이후에는 또 다시 노론에게 정성을 바치다가 도 무신년240) 부터는 조문명(趙文命)의 무리에게 이[蝨]처럼 들러붙어 만윤(灣尹)241) 에 발탁하기까지 하였는데, 대계(臺啓)가 한번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3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사학(史學) /
원문
○修撰趙尙命上疏, 論館學齋生不能明經之弊, 請皆試講而後, 始許入齋。 又論平安都事金徵慶之苟然塡差, 請推銓堂, 遞徵慶。 又論遐方文官積仕之弊曰:
今番大政, 守令之窠, 文士絶未參錯。 請飭銓曹, 隨窠甄用。
批曰: "守令擇差之時, 勿拘文武, 或多或少, 事勢固然。" 餘皆從之。 諫院 【正言洪啓裕。】 申前啓, 不允。 兪健基事依啓。 又啓曰: "定州牧使黃應洙曾莅南邑, 多有人言, 濫授本職, 物情譁然。 臺啓之停, 不免徑先。 渠乃不思自處, 汲汲冒赴, 應洙宜罷職不敍。" 又啓曰: "臺啓體重, 未收殺之前, 雖朝令不得擧行, 而平安監司朴師洙以黃應洙已停啓, 則催促發送爲請者, 前所未有。 輕臺閣而損事體, 不可無警, 師洙宜重推。" 又啓曰: "右副承旨趙鎭禧行己鄙悖, 全無士夫規模。 隨時俯仰, 千億化身, 見棄於公議久矣。 及授是任, 物議譁然, 鎭禧宜改正。" 答曰: "朴師洙事依啓, 黃應洙、趙鎭禧事不允。"
【史臣曰: 鎭禧自少言行鄙悖, 出入娼樓。 登第之初, 有靑樓餘夢登龍門之謠, 而變幻言論, 東西奔走, 老論當局則納交於洪啓迪, 群凶用事則附麗於鏡、夢輩, 爲其鷹犬。 乙巳以後, 又復納款於老論, 又自戊申, 蝨附於趙文命輩, 至擢灣尹, 臺啓一出, 人皆快之。】
-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3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사학(史學) /
영조 10년 (1734) 4월 9일
- 밀창군 이직을 잡아다 문초하라는 분부를 환수하고 단지 그 관직만을 삭제하다
- 경상 감사 권업이 이전에 영남의 유생들을 죄준 일로 그곳에 부임할 수 없음을 아뢰다
- 지금부터 제관은 모두 경국대전에 의해서 옥을 차고 행사할 것을 명하다
- 호조 판서 송인명이 덕원에 은점을 설치할 것을 말하다
- 장령 조정이 신축년 등의 죄인에 대한 자신의 논핵을 비판한 이현망의 일을 상소하다
- 관학 재생의 경의에 밝지 못한 폐단 등에 대한 수찬 조상명의 상소
- 삭녕의 유학 이석보 등이 본군의 백지에 세금을 징수하는 폐단을 상소하다
- 전라 감사 조현명이 현감 이형곤·서종진·권상직 등의 장물을 탐한 죄를 논하다
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 4월 9일 甲寅 6/8 기사 / 1734년 청 옹정(雍正) 12년
관학 재생의 경의에 밝지 못한 폐단 등에 대한 수찬 조상명의 상소
국역
수찬(修撰) 조상명(趙尙命)이 상소하여 관학(館學) 재생(齋生)의 경의(經義)에 밝지 못한 폐단을 논하고 모두 시강(試講)한 이후에 비로소 입재(入齋)를 허락할 것을 청하였다. 또 평안 도사(平安都事) 김징경(金徵慶)의 구차하게 전차(塡差)됨을 논하여 전조(銓曹)의 당상관을 추고(推考)하고 김징경을 체차(遞差)할 것을 청하였다. 또 먼 지방에 있는 문관(文官)들의 오래 근무하는 폐단을 논하여 말하기를,
"이번 대정(大政)에서 수령의 자리에 문사(文士)는 전연 참여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전조에 신칙하여 빈자리에 따라 견용(甄用)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수령을 택차(擇差)할 때에 문·무(文武)에 구애하지 않으니, 혹 많기도 하고 혹 적기도 한 것은 사세가 본디 그러한 것이다."
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홍계유(洪啓裕)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건기(兪健基)의 일은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주 목사(定州牧使) 황응수(黃應洙)는 일찍이 남읍(南邑)에 부임하였을 때 사람들의 비평이 많이 있었는데, 외람되게 본직(本職)을 제수하니 여론이 시끄러웠습니다. 대계(臺啓)를 정지한 것은 성급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에 스스로 처신(處身)할 바를 생각하지 않고 서둘러 몰염치하게 부임하였으니, 황응수를 마땅히 파직시켜 서용(敍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계(臺啓)는 체모가 중대하여 수쇄(收殺)하기 이전에는 비록 조령(朝令)일지라도 거행할 수가 없는데, 평안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황응수는 이미 정계(停啓)하였으니 재촉해 발송(發送)하라.’고 청한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대각(臺閣)을 경시하고 사체(事體)를 손상한 것은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박사수를 마땅히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부승지(右副承旨) 조진희(趙鎭禧)는 몸가짐이 비루하고 패려(悖戾)하여 전연 사대부(士大夫)의 규모(規模)가 없습니다. 때를 따라 부앙(俯仰)하며 여러 형태로 몸을 변화시켜 공의(公議)에 버림을 받은 지 오래인데, 이 직임을 제수하게 되자 여론이 시끄러웠으니, 조진희를 마땅히 개정(改正)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박사수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고, 황응수와 조진희의 일은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조진희는 젊었을 때부터 언행(言行)이 비루하고 패려하였으며 창루(娼樓)에 출입하였다. 등제(登第)한 초기에 ‘청루(靑樓)의 남은 꿈이 용문(龍門)에 올랐다[靑樓餘夢登龍門]’는 민요(民謠)가 있었는데, 언론(言論)을 변환(變幻)하며 동서(東西)에 분주하였다. 노론(老論)이 당국(當局)하였을 때는 홍계적(洪啓迪)과 교분을 맺었고 군흉(群凶)이 용사(用事)할 때는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무리에게 들러붙어 그들의 응견(膺犬)이 되었다. 을사년239) 이후에는 또 다시 노론에게 정성을 바치다가 도 무신년240) 부터는 조문명(趙文命)의 무리에게 이[蝨]처럼 들러붙어 만윤(灣尹)241) 에 발탁하기까지 하였는데, 대계(臺啓)가 한번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3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사학(史學) /
원문
○修撰趙尙命上疏, 論館學齋生不能明經之弊, 請皆試講而後, 始許入齋。 又論平安都事金徵慶之苟然塡差, 請推銓堂, 遞徵慶。 又論遐方文官積仕之弊曰:
今番大政, 守令之窠, 文士絶未參錯。 請飭銓曹, 隨窠甄用。
批曰: "守令擇差之時, 勿拘文武, 或多或少, 事勢固然。" 餘皆從之。 諫院 【正言洪啓裕。】 申前啓, 不允。 兪健基事依啓。 又啓曰: "定州牧使黃應洙曾莅南邑, 多有人言, 濫授本職, 物情譁然。 臺啓之停, 不免徑先。 渠乃不思自處, 汲汲冒赴, 應洙宜罷職不敍。" 又啓曰: "臺啓體重, 未收殺之前, 雖朝令不得擧行, 而平安監司朴師洙以黃應洙已停啓, 則催促發送爲請者, 前所未有。 輕臺閣而損事體, 不可無警, 師洙宜重推。" 又啓曰: "右副承旨趙鎭禧行己鄙悖, 全無士夫規模。 隨時俯仰, 千億化身, 見棄於公議久矣。 及授是任, 物議譁然, 鎭禧宜改正。" 答曰: "朴師洙事依啓, 黃應洙、趙鎭禧事不允。"
【史臣曰: 鎭禧自少言行鄙悖, 出入娼樓。 登第之初, 有靑樓餘夢登龍門之謠, 而變幻言論, 東西奔走, 老論當局則納交於洪啓迪, 群凶用事則附麗於鏡、夢輩, 爲其鷹犬。 乙巳以後, 又復納款於老論, 又自戊申, 蝨附於趙文命輩, 至擢灣尹, 臺啓一出, 人皆快之。】
- 【태백산사고본】 29책 3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3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사학(史學) /
원본
영조 10년 (1734) 4월 9일
- 밀창군 이직을 잡아다 문초하라는 분부를 환수하고 단지 그 관직만을 삭제하다
- 경상 감사 권업이 이전에 영남의 유생들을 죄준 일로 그곳에 부임할 수 없음을 아뢰다
- 지금부터 제관은 모두 경국대전에 의해서 옥을 차고 행사할 것을 명하다
- 호조 판서 송인명이 덕원에 은점을 설치할 것을 말하다
- 장령 조정이 신축년 등의 죄인에 대한 자신의 논핵을 비판한 이현망의 일을 상소하다
- 관학 재생의 경의에 밝지 못한 폐단 등에 대한 수찬 조상명의 상소
- 삭녕의 유학 이석보 등이 본군의 백지에 세금을 징수하는 폐단을 상소하다
- 전라 감사 조현명이 현감 이형곤·서종진·권상직 등의 장물을 탐한 죄를 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