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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3권, 숙종 1년 4월 1일 己丑 1/5 기사 /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이정·이연의 치죄에 자성이 간여한 것의 잘못을 간하는 부제학 홍우원의 상소

국역

부제학(副提學) 홍우원(洪宇遠)이 상소(上疏)하기를,

"신이 든건대 《역경(易經)》의 가인괘(家人卦) 단사(彖辭)에 이르기를 ‘여자가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고 남자가 바깥에서 위치를 바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남자의 자리는 바깥에 있고 여자의 자리는 안에 있기 때문에, 부인(婦人)은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여 바깥의 일을 간섭하지 않아서 전제(傳制)하는 뜻이 없고 삼종(三從)265) 의 도리가 있습니다. 진실로 이 도리를 어기면 《역경》의 여자가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고 남자가 바깥에서 위치를 바르게 한다는 뜻에 어그러짐이 있겠습니다.

지금 이정(李楨)과 이연(李㮒) 등의 더러운 행위는 참으로 근고(近古)에 없었던 변고(變故)였습니다. 그를 치죄(治罪)하는 데 진실로 법률을 잘못 쓴 점이 있으면 대신(大臣)들은 마땅히 진달해야 할 것이고, 대관(臺官)들은 반드시 쟁집(爭執)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성(慈聖)께서 갑자기 전실(殿室)에 납시어서 친히 창문을 사이에 두고 계시니 신하들이 전도(顚倒)되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먼 지방에서 보고 들으면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무릇 어버이에게 과실이 있음에도 이를 간(諫)하여 중지시키기 못하고서 마침내 의리(義理)에 어긋난 데에 귀착(歸着)하게 하는 것은 자식의 허물이라 하겠습니다. 《역경》의 고괘(蠱卦)의 구이효(九二爻)에 이르기를 ‘어머니의 일[蠱]을 주관[幹]함이니 고집[貞]해서는 안된다.’ 하였는데, 정이(程頤)의 전(傳)에 이르기를, ‘자식은 어머니에게 마땅히 유순함으로써 보좌 인도하여 의리에 맞게 하여야 하는데, 순히 하지 못하여 패고(敗蠱)를 초래하는 것은 자식의 죄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옳은 말이므로 어버이를 섬기는 자들이 마땅히 가슴에 새겨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殿下)께서는 ‘어머니의 일을 주관함이니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일이 의리에 맞고 이치에 해로움이 없도록 처리하시면, 자성(慈聖)께서 허물을 두 번 저지르지 않으시는 덕(德)이 장차 태임(太姙)·태사(太姒)의 아름다운 덕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신이 김우명(金佑明)의 상소(上疏)를 보니 맹자(孟子) 어머니의 가르침에 ‘이간(離間)하는 말을 막으라.’는 등의 말이 있기에 신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전하의 모자(母子) 사이는 자애(慈愛)뿐이고 효성(孝誠)뿐이니 혐의(嫌疑)하고 이간하는 것이 어디로부터 생기겠습니까? 설사 참소하고 적해(賊害)하는 사람이 있어 맑은 풍화(風化)를 교란(交亂)하려 한다면, 마땅히 전하에게 들어와 고하여 엄하게 국문(鞫問)하여 교란을 만들어낸 죄를 바로잡게 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문자(文字)에 표시하고 소장(疏章)에 나타내어 사람들의 귀에 들리고 눈에 뜨이게 하여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까지 전파(傳播)함으로써 양궁(兩宮) 사이에 참으로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해야 하겠습니까? 가만히 국구(國舅)를 위하여 그가 깊이 생각지 못했음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내가 아직 어린 나이로 자성께 성의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깊이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은 젊을 때 조행(操行)으로 이름이 났었고, 효종조(孝宗朝)에 바른 말을 올려서 죄를 받았는데, 그것이 청의(淸議)에 높이 인정(認定)되었기에 송시열(宋時烈) 등이 전조(銓曹)의 장(長)으로 있을 적에 옥당(玉堂)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조경(趙絅)이 상소(上疏)를 올리자 홍우원이 잇달아 일어나서 윤선도(尹善道)를 편들어 당시의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윤휴(尹鑴)가 당(唐)나라 장간지(張柬之)에게 비하여 급히 등용(登用)하기를 주청(奏請)하였다. 홍우원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적에 사람들은 그가 본래 바른말 하기로 이름이 있었기에 논의(論議)함이 응당 기울어지고 위험한 데는 이르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이르게 되자 쌓인 분한(忿恨)이 마음속에 있었기에 허목(許穆)·윤휴 등과 어울려서 자기들끼리의 참혹한 의론을 내세워 주장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제 이 상소(上疏)를 올림에 이르러서는 이수경(李壽慶) 등의 선창(先倡)이 되었다. 서인(西人)들이 벼슬에서 물러간 이가 많았던 일로써 말하기를,

"서인들이 계해년266) 의 일을 보았던 까닭으로 이같이 하지만 어찌 매양 그렇게 되겠는가?"

하였으니, 그의 아주 잔인(殘忍)한 것이 이와 같았다. 전에 현종(顯宗)께서는 천성(天性)이 우애(友愛)가 돈독하였는데 다른 친척이 없어서 삼복(三福)267) 을 친애하고 사랑하여 어느 때든 드나들게 하여 혹은 활쏘는 데 데려가고 혹은 곡연(曲宴)268) 에 모시도록 하여 아침 저녁으로 옆에 있게 하였기에 말년(末年)에는 조용한 틈을 타서는 시사(時事)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연(㮒)은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소행이 없을 뿐이지만, 정(楨)과 남(柟)은 몰래 좋지 못한 마음을 품고 후한 뇌물을 가지고 가만히 내궁(內宮)에게 잘 보이려 하였다. 그러기에 궁내에서 약간이나마 일을 맡은 자들은 복창궁(福昌宮)이나 복선궁(福善宮)의 비단옷을 입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또는 재화(財貨)를 가지고 자주 임금의 측근(側近)에게 뇌물을 바쳐 마음을 기울여 받들고 대접했으며 초당(貂璫)269) 과 나인(內人)은 그 뇌물을 좋아하여 염탐해 주는 이가 많았다. 그러기에 비록 집에 있는 날이라도 임금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쏜살같이 보고해 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의 외삼촌 오정창(吳挺昌) 등도 밤마다 모여서 모의(謀議)를 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기에 간사하고 더러운 무리들이 그 문(門)에 쫓아가 아부하게 되니, 외간(外間)에서는 대부분 이를 매우 근심하였다. 임금이 춘궁(春宮)에 있었을 적에 정(楨) 등이 매양 모시고 지냈다. 내시(內侍) 김현(金鉉) 등이 춘궁 안에 있는 강석(講席)에 참예하기를 권하였기에 정 등이 김현과도 서로 깊은 관계를 맺었다. 임금이 즉위(即位)함에 이르러는 민간(民間)에서 뜬소문이 많았다. 김현이 그의 무리 조희맹(趙希孟)과 더불어 임금의 측근에 함께 모시어서 추기(樞機)를 맡았고, 남(柟)은 대전관(代奠官)으로서 항상 빈전(殯殿)에 있었기에 매양 날이 어두워진 뒤에는 임금이 계신 곳에 들어가서 임금과 더불어 함께 눕고 일어나고 하다가 새벽녘에야 궁에서 나왔다. 그래서 김현·조희맹 두 내시와 결합(結合)하였다. 김현과 조희맹은 모두 음흉(陰凶)하고 간사한 꾀가 있었으며 더욱이 김현은 자못 문자를 알았다. 또 아보(阿保) 윤상궁(尹尙宮)이 있었으니 그는 인조(仁祖)의 궁인(宮人)이었으나 조적(趙賊)270) 의 참소[讒]를 받고서 내침을 당해 인평궁(麟坪宮)에 살았다. 효종(孝宗)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일찍이 인조에게 수라를 올렸다. 그때에 조적이 은으로 된 첨자(籤子)를 뽑아서 생선탕[魚湯]에 꽂으면서 말하기를,

"은이 탕(湯)에 들어가자 빛깔이 변하니 매우 괴이(怪異)하다."

하였다. 이때 화란이 생길 조짐이 아주 급박하였는데 윤씨가 마침 궁에 들어왔다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열(熱)을 받은 생선탕에 담그면 은의 빛깔이 죽어서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생선탕으로 앞에서 시험하여 보십시오."

하였다. 인조가 곧 그대로 시험하게 하였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에 인조께서 깨달았기에 동궁(東宮)이 무사(無事)하게 되었다. 효종은 이러한 윤씨를 충직(忠直)한 자로 여겼기에 즉위(即位)한 뒤에 궁내로 불러들였으며, 일찍이 명(命)하기를,

"만일 원손(元孫)을 낳게 되면 반드시 보모(保母)로 삼을 것이다."

하였다. 윤씨는 민첩하고 슬기로와서 서사(書史)를 널리 통달하였으나 성품이 음험(陰險)하였다. 선왕(先王)께서는 진어(進御)하시던 양고기를 공주(公主)에게 많이 나누어 주고 임금에게는 조금만 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임금이 그때 아직 천연두(天然痘)를 앓기 전이라서 열이 무척 많은 양고기는 혹 해로움이 있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고, 공주는 비록 사랑스럽지마는 중하지는 않았던 까닭으로 많이 준 것이다. 그런데 윤씨가 뒤에서 말하여 주어 양고기를 얻어 먹은 것이 있었다. 선왕께서 이러한 짓을 듣고 성내에 자성(慈聖)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훗날에 반드시 임금의 어머니와 자식 사이를 이간(離間)질할 것이오."

하여, 중한 죄를 주려 하였으나 자성께서 구해 주어서 처벌을 그만두었다. 윤씨가 오랫동안 인평궁(麟坪宮)에 있었기에 정(楨) 등 삼형제는 모두 그가 어루만져 키웠으므로 정 등은 윤씨를 지성껏 섬겼고, 그러기에 정(情)과 사랑이 매우 두터웠다. 이때에 이르러 윤씨는 임금이 믿고 중하게 여기자 내정(內政)을 오로지 총관(摠管)하였다. 그래서 남(柟)과 윤씨는 한마음이 되었고, 김현(金鉉) 등과는 서로 안팎이 되어서 조정(朝廷)의 정체(政體)를 바꾸기를 모의하여 옛 중신(重臣)들을 모두 제거하고 남인(南人)을 끌어들여서 그 세력(勢力)을 이루려고 밤낮으로 남인(南人)을 칭찬하고 서인(西人)을 참소하였으며, 심지어는,

"아무개는 아무 벼슬을 시켜야 하고 아무개는 아무 죄를 주어야 한다."

고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자성(慈聖)이 이 일을 알까 두려워서 매양 속이고 숨기었다. 남(柟)은 침착하고 슬기가 있었고 임금은 어린 나이므로 그에게 현혹(眩惑)되었다. 처음에 민유중(閔維重)이 척리(戚里)의 수도(隧道)에 대한 일을 논하였을 적에 효종께서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 산인(山人)271) 이 화(禍)를 당할까 깊이 염려하시어 일찍이 자성(慈聖)에게 교시(敎示)하기를,

"너의 숙부(叔父)는 총명하니 염려될 것이 없을 듯하지만, 【김좌명(金佐明)을 가리킨다.】 너의 아버지는 반드시 보복(報復)할 마음을 가질 것이니 너는 이를 알아야 한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자성께서는 효종의 교시를 생각하시고 또 효종께서 송시열을 성심과 예절로써 대우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항상 송시열을 구하여 보살피려 하였다. 남(柟) 등이 이를 근심하여 온갖 모의(謀議)로 죄를 얽으려 하였다. 선왕(先王)께서 병으로 누웠을 때 임금이 어리고 약한 것을 근심하여 여러 공주(公主)들에게 부탁하기를,

"세자의 나이 어리니 오직 너희 자매(姊妹)들만 믿는다. 너희들이 잘 도와 주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이때를 당하여 두 공주는 화(禍)가 미칠 것이 두려워서 감히 간절히 이야기를 하지 못하였는데 유독 인평 공주(寅平公主)만은 남편의 집이 연루(連累)될 근심이 없었다. 그래서 임금을 붙들고 체읍(涕泣)하면서 극력(極力) 간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남(柟) 등이 이 말을 듣고 크게 성내어 꾸짖고 욕하였다. 이 뒤로부터 여러 공주들은 겁을 먹고 몸조심을 하여 감히 대궐에 드나들지 못하였다. 남 등이 임금께 아뢰기를,

"선왕(先王)께서 송시열에게 죄를 주려고 했습니다."

하니, 자성(慈聖)이 그렇지 않았음을 밝히려고 했으나 하지 못했다. 자성이 어느날 꿈에 보니 선왕(先王)께서 진노(震怒)하시어 임금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내년 2월에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놀라 깨어서는 크게 더욱 근심하였다. 인산(因山)을 마친 뒤에 남(柟) 등이 비로소 나와서 대장(大將) 유혁연(柳赫然)과 더불어 어두운 밤을 타 서로 만나서 어영 대장(御營大將) 신여철(申汝哲)을 풍유(諷喩)하여 빨리 병권(兵權)을 해면(解免)하게 하는 등 밤낮으로 분주(奔走)하여 조금 조급히 서둘기를 마치 미친 것 같았으며, 종적(蹤跡)이 속임수가 많고 비밀스러워서 형세가 크게 떨치기에, 사람들은 그의 하는 짓을 헤아려 알 수가 없었지만 여러 불량(不良)한 무리들은 가만히 남(柟)에게 마음으로 붙좇는 자가 많았다. 숭선군(崇善君) 이징(李瀓)이 자성에게 밀계(密啓)하여 올리는 수라[水剌]를 조심하기를 청하니, 자성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반드시 먼저 맛을 본 뒤에 그제야 임금께 올렸다. 남(柟)은 자성(慈聖)이 위에 있으면 모든 것이 자기의 계책(計策)대로 되지 못할 것을 미워하여 가만히 점장이를 시켜 궁(宮)에 들어와서 말하게 하기를,

"자성(慈聖)의 성이 김(金)이니 쇠는 나무를 이긴다[金克木]. 그러므로 자성(慈聖)이 임금과 함께 한 궁에 사는 것은 길(吉)하지 못하다."

하는 말을 퍼뜨려서 자성을 다른 궁으로 옮기게 할 것을 도모(圖謀)하였다. 그때의 궁중에서는 다만 남(柟)과 윤상궁의 존재만 알았을 뿐, 임금과 자성(慈聖)의 존재는 알지 못하였다. 환관(䆠官) 서후행(徐後行)이 그의 무리 두서너 사람과 약속하기를.

"어찌 환관(宦官)들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는 말을 후세(後世)에 전하게 하겠는가?"

하고, 이들은 함께 김현(金鉉) 등이 남(柟) 등과 더불어 서로 통하는 자취를 살펴서 그들과 함께 왔다갔다 하니, 이에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흉흉(洶洶)하여 조석(朝夕) 사이에 변고(變故)가 일어날 것으로 여겼다. 김우명(金佑明)은 처음에는 남(柟) 등과 더불어 함께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남(柟) 등의 마음 먹음이 상도(常道)에 벗어나 안팎으로 당파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보고는 비로소 놀라고 뉘어쳐서 체읍(涕泣)하였다. 정(楨)이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압록강을 건너오면서 중로(中路)에서 남(柟)에게 보낸 편지가 김우명의 집으로 잘못 전하여졌다. 그 편지의 내용에 ‘한 가지 일은 도모(圖謀)하였지만 두 가지 일은 아직 도모하지 못하였기에 모름지기 들어와야만 한다.’는 말이 있었다. 김우명이 이를 보고 몹시 의아하였는데, 잇달아 들리는 소식에는 남(柟)이 김현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신을 차출할 것을 주청(奏請)하게 하자, 김현이 임금께 아뢰어서 오정위(吳挺緯)를 차정하였다는 것이다. 또 빨리 병권(兵權)을 모아 잡으려고 김우명(金佑明)을 달래어 말하기를,

"대감(大監)의 조카는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적임(適任)이고, 나와 같이 풍채가 좋은 사람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시켜야 한다."

하였다. 윤휴(尹鑴)도 왕궁의 숙위(宿衛)를 바꾸려 하였다. 이에 김우명은 일마다 모두 놀라고 의심스러워 남(柟) 등을 제거(除去)할 생각을 가졌으나, 임금이 너무나 사랑하고 있음을 보고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정(楨)은 곧 김우명(金佑明)의 조카 사위이고 김우명의 아들은 정(楨)의 조카 사위가 되지만, 정(楨)·연(㮒)의 음란한 일을 고발(告發)하였다. 정(楨) 등의 집안에는 미인(美人)이 많았는데도 반드시 궁녀들과 더불어 서로 간통하였다. 김우명은 그들이 음흉한 계책을 품고서 곽현(霍顯)이 배작(杯勺)에 꾀하던 일272) 을 행할까 두려워하여 자전(慈殿)에 아뢰어 임금에게 말하여 물리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이를 듣지 아니하니 김우명이 근심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이에 장소(章疏)에 드러내 말하였다. 그 글에 이간하는 말을 막아야 한다고 한 것은 대개 윤상궁을 가리킨 것이다. 처음에 정(楨) 등이 옥에 갇혔을 적에 남(柟)이 옥에 들어가서 두 형에게 말하기를,

"누가 시켜서 이따위 치우친 논소(論疏)를 올렸는가?"

하였고, 윤상궁은 임금의 앞에서 크게 부르짖어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 애매(曖昧)한 사람들을 죽이려 합니까?"

하였다. 임금이 정(楨) 등을 석방(釋放)한 판부(判付)는 곧 남(柟)이 초(草)를 잡아 비밀히 임금께 올린 것이다. 허목(許睦)·윤휴(尹鑴)·이하진(李夏鎭)·권유(權愈) 등은 임금이 김우명(金佑明)을 싫어하는 줄을 알고 청대(請對)하였는데, 이는 김우명이 임금을 속였다는 죄로써 뒤집어 씌우려 한 것이다. 그때에 김우명은 크게 몰락하게 되고 남(柟) 등은 더욱 강성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에 자전(慈殿)께서 통곡(慟哭)하면서 여러 신하들을 깨우쳤으니, 궁안의 일이 매우 급박(急迫)하여졌기 때문이다. 이에 정(楨)과 연(㮒)은 귀양을 가게되고 남인(南人)의 세력이 조금 꺾여져서 남(柟) 등의 모의(謀議)가 조금 해이(解弛)해졌다. 이에 윤휴가 분하게 여겨 임금에게 아뢰기를,

"자성(慈聖)의 동정(動靜)을 마땅히 관속(管束)하여 이와 같은 거조(擧措)가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홍우원(洪宇遠)도 또한 윤휴의 당파인 까닭으로 자성(慈聖)을 비난 배척하고 김우명을 매우 미워했으니, 이는 참으로 정(楨)과 연(㮒)이 죄를 얻은 것을 원망하였기 때문이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모후(母后)가 나라일에 간섭을 하고는 국가에 화(禍)를 끼치지 않음이 드물기 때문에 《춘추(春秋)》의 뜻이 매우 엄중하였다. 여치(呂雉)와 무조(武曌)의 일273) 은 차마 말할 수 없으나, 왕후(王后)가 위(魏)나라를 구제하고 부씨(傅氏)가 풍희(馮姬)를 살해한 것은 또한 참혹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 고집해 말할 수도 없으니, 송(宋)나라 조후(曹后)·고후(高后) 등의 여러 후비(后妃)의 어진 덕은 칭송(稱頌)이 자자하여 진실로 지적하여 비난할 수가 없었고, 군왕후(君王后)가 고리를 풀었으므로[解環]274) 전씨(田氏)275) 가 나라를 보전하였고, 오 부인(吳夫人)이 우물에 기대서서 기다리므로[倚井] 손랑(孫郞)276) 이 왕업(王業)을 정하였음은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아! 예나 이제나 집과 나라의 사변(事變)은 한(限)이 없으므로, 혹 상도(常道)를 가지고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만약 불행(不幸)하게 위기(危機)를 만났을 때에 다만 부인으로서 상행(常行)만을 행하여 궁중에 깊이 파묻혀서 팔짱 끼고서 이를 구원하지 않는다면 사직(社稷)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원후(元后)가 옥새(玉璽)를 잡은 것을 후세(後世)에서 찬탄한 바이고, 목영(穆嬴)이 조정에서 통곡한 것277) 을 군자(君子)들이 헐뜯지 아니하였다. 이제 자성(慈聖)께서 조정에 친히 임(臨)하여 여러 신하들을 개유(開諭)한 것은 참으로 전대(前代)에서는 드문 일이지마는, 또한 마땅히 처치(處置)한 일이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만일 정(楨)과 연(㮒)의 사건을 밝힘으로써 김우명(金佑明)을 위하려고 이러한 하루아침의 허둥지둥한 거조(擧措)를 행했다면 이는 진실로 너무 지나친 짓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러 소인(小人)들이 김우명을 몰아세워 임금을 속인 죄를 뒤집어 씌우려 한다면 자성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였겠는가? 더구나 이 일뿐만이 아니다. 임금께서 나이 어린데 왕손(王孫)들이 발호(跋扈)하여 안으로는 환관(宦官)과 궁인(宮人)들을 결탁하고, 밖으로 당여(黨與)를 만들어서 양궁(兩宮)의 사이를 흘겨보면서 장차 무슨 짓이든지 못할 것이 없는데도, 전계(殿階)에는 칼을 비껴든 무신(武臣)이 없고 우수(盂水)에는 먹을 뿌리는 문신 재상이 없어서 뭇사람의 마음이 근심되고 두려워 그 끝가는 데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 진실로 시변(時變)에 대처(對處)하는 권도(權道)가 없었다면 나랏일이 마침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니, 대개 부득이(不得已)한 데서 나온 일이지만 어찌 큰 불행(不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윤휴가 도리어 자성의 동정(動靜)을 관속(管束)하라고 청(請)한 것은 그 말이 패역(悖逆)한 것은 많이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리고 정(楨)과 연(㮒)이 내침을 당하였을 적에 온 조정이 벙어리처럼 한 마디의 말도 없었는데 이제 홍우원(洪宇遠)이 곧 말하기를, ‘대신들은 마땅히 진달해야 하고 대관(臺官)들은 반드시 쟁집(爭執)해야 한다.’ 하였으며, 또 이 일로써 자성(慈聖)에게 허물을 돌렸으니, 어찌 그 무망(誣罔)함이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김우명(金佑明)이 말한 것은 국가를 위하여 깊이 염려(念慮)한 것이므로 지극한 성의로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한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홍우원은 이러한 실상(實狀)을 전혀 숨기고는 교묘한 말을 늘어 놓았으니, 이것은 아마 정(楨)과 연(㮒)을 위하여 원한(怨恨)을 갚으려는 데 있는 듯하다. 그가 말한 것 중에, ‘자성(慈聖)은 전하에게 말하고 전하께선 신하들에게 물으라.’ 한 것과 또 김우명을 꾸짖기를, ‘임금께서 들어와 고하지 않고 참소와 간사한 짓으로 바깥에 좇았다.’고 한 말은 더욱 거짓을 꾸민 것이다. 만약 이러한 형세(形勢)가 있었다면 김우명이 어찌 이간하는 말을 막으라고 하였겠는가? 그리고 홍우원의 상소에 인용한 가인괘(家人卦)는 지난 세상의 여후(女后)들이 마음대로 권세부리던 때에 끌어다 비유하는 것은 옳겠지만, 오늘의 자성에게 끌어다 쓴 것은 아주 패란하고 그릇된 것이므로, 이는 다만 한때에 경서(經書)의 뜻을 잘못 본 것에 비길 것만이 아니다. 대저 남자는 바깥이고, 여자는 안이라고 하였지만, 만약 한 집안에 나아가서 말한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짝이 되고 지아비와 지어미가 짝이 되는 것인데 어찌 어머니와 아들을 안팎으로 대치해서 남자 여자로 일컫는 도리가 있는가? 《역경(易經)》에 ‘여자가 바른 것이 이(利)하니라.’ 한 것을 공자의 단사(彖辭)에 ‘가인(家人)은 여자가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고 남자가 바깥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하늘과 땅의 뜻이다.’ 하였고, 또 ‘가인에 엄군(嚴君)이 있으니 부모(父母)를 말한다.’ 하였는데, 이를 정전(程傳)에서 ‘가인의 도는 반드시 존엄(尊嚴)한 군장(君長)이 있는 것이니 부모를 말한다.’ 하였다. 공자의 단사(彖辭)와 정씨(程氏)의 전(傳)에 모두 남자와 여자로 부부(夫婦)를 삼았고, 부모(父母)로 엄군(嚴君)을 삼아서 그 뜻이 분명하였으니, 그 명분(名分)을 문란(紊亂)시킬 수 없음이 이와 같았다. 《사기(史記)》에 ‘태후(太后)가 위에 계신다.’고 한 데 대하여 호인(胡寅)이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밖을 다스리고 후비는 안을 다스려서 각각 그 위치를 바르게 한다.’ 하였다. 그러니 고금(古今)에 누군들 모후(母后)를 내위(內位)의 여자라고 일컬어서 바르니 바르지 못하니를 따졌는가? 공자가 부인(婦人)의 삼종(三從)의 도리를 말씀하기를, ‘여자는 사람에게 복종(伏從)하는 자이다. 그러기에 교령(敎令)이 규문(閨門)에서 나가지 않는다.’ 하였다. 이 말씀은 여자로서 평상시의 행할 일을 말한 것이다. 그러기에 만일 남(柟) 등이 임금을 속이고 업신여기는 근심이 없었는데도 자성(慈聖)께서 조금이라도 참람하고 핍박하는 뜻이 있었다면, 신하된 의리로서는 마땅히 노종도(魯宗道)처럼 간하였음이 옳았을 것이다. 아! 자성(慈聖)은 깊은 궁(宮)에 계시는 한 부인으로서 어찌 초초(草草)한 모습으로 바깥 신하들을 대하고 싶었겠는가마는, 형세가 급박(急迫)함이 있었기 때문이니 그 뜻 또한 근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홍우원은 이 일에 대하여 조금도 자중(自重)하는 뜻이 없고 분하고 사나운 기상만 현저히 있었으니 이를 어찌 참고 있을 것인가? 대저 윤휴의 의논은 항상 ‘아들이 어머니도 신하로 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기에 그가 ‘자전을 관속하라.’고 말한 것은 그가 주장한 복제(服制)의 뜻과 같은 것이요, 단시일에 내세운 주장이 아니다. 그런데 훙우원이 또 괴상하게 경서(經書)의 말을 올려서 ‘자성(慈聖)이 그 위치를 바르게 하지 못했다.’고 배척하였으니, 그 종말의 폐단이 모두 천륜(天倫)을 거스르고 지유(地維)를 무너뜨려 어머니와 자식의 도리를 상하게 하지 않겠는가?"

  • [註 265] 삼종(三從) :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것.
  • [註 266] 계해년 : 1623 인조 원년.
  • [註 267] 삼복(三福) :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을 가리킴.
  • [註 268] 곡연(曲宴) : 궁중에서 베푸는 작은 규모의 잔치.
  • [註 269] 초당(貂璫) : 환관(宦官).
  • [註 270] 조적(趙賊) : 인조 후궁 조귀인(趙貴人)을 가리킴.
  • [註 271] 산인(山人) :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킴.
  • [註 272] 곽현(霍顯)이 배작(杯勺)에 꾀하던 일 : 곽현(霍顯)은 한나라 선제(宣帝) 때 곽광(霍光)의 처(妻)임. 선제의 황후가 출산할 때에 곽현이 유위(乳醫)를 시켜 독약을 타서 황후를 시해한 일을 말함.
  • [註 273] 여치(呂雉)와 무조(武曌)의 일 : 여치는 한 고조(漢高祖)의 황후인 여후(呂后)이고 무조(武曌)는 당 고종(唐高宗)의 황후인 무후(武后)이니, 두 여인이 모두 황제가 되어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행사한 자임.
  • [註 274] 고리를 풀었으므로[解環] : 전국 시대 진 소왕(秦昭王)이 사자를 제(齊)나라에 보내어 군왕후에게 옥련환(玉連環)을 주면서 ‘제(齊)나라는 지혜있는 사람이 많으니 이 고리를 풀 수가 있는가?’ 하자, 군왕후가 망치를 가지고 부수고는 진나라 사자에게 풀었다고 말한 고사(故事).
  • [註 275] 전씨(田氏) : 전국 시대 전제(田齊)를 일컬음.
  • [註 276] 손랑(孫郞) : 삼국 시대 손책(孫策)을 일컬음.
  • [註 277] 목영(穆嬴)이 조정에서 통곡한 것 : 춘추 시대 진 헌공(晉獻公)의 딸로서 진목공(秦穆公)의 부인이 된 목희(穆姬)를 이름.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싸워서 진 혜공(晉惠公)을 사로잡아 돌아오니 목희가 울면서 진목공에게 고하기를, ‘진(晉)나라 임금이 아침에 들어오면 저는 저녁에 죽겠으니 임금님은 이를 도모하시오.’ 하니, 목공이 두려워 하여 진 혜공(晉惠公)을 잘 대접하여 보낸 고사(故事).

원문

○朔己丑/副提學洪宇遠上疏曰:

臣聞《易》之《家人》之彖曰: "女正位乎內, 男正位乎外。" 夫男位在外, 女位在內。 是以婦人正位乎內, 不預外事, 無專制之義, 有三從之道。 苟違是道, 有違於《大易》內外之義矣。 楨、㮒等汚衊之行, 實近古所未有之變。 治之苟失其律, 大臣當陳之, 臺官必執之。 而慈聖猝御殿室, 親自隔窓, 臣隣顚倒, 竝失所措, 遠外瞻聆, 安得不駭也? 凡親有過擧, 不能諫止, 而終爲非義之歸, 則子之過也。 在《易》蠱之九二曰: "幹母之蠱, 不可貞。" 程頤傳之曰: "子之於母, 當以柔巽輔導, 使得於義, 不順而致敗蠱, 則子之罪也。" 至哉, 言乎! 斯實事親者之所當服膺而勿失者也。 願殿下深惟幹蠱不可貞之義, 使事合於義, 無害於理, 則慈聖不貳過之德, 將與姙、姒匹休矣。 臣見金佑明之疏, 有孟母之敎, 格於間言等語, 臣不勝駭然。 殿下母子之間, 止慈止孝, 嫌間何自而生? 設有讒賊之人, 欲爲交亂, 淸風所當入告殿下, 嚴加鞫問, 以正交構之罪, 斯乃可矣。 何爲形諸文字, 著之章疏, 播於耳目, 傳於遠近, 有若兩宮之間眞有是事者也? 竊爲國舅, 惜其不深思也。

答曰: "予以沖年, 誠意不盡之致, 深加慙恧焉。" 宇遠少以操行名, 孝宗朝以直言獲罪, 大爲淸議所許。 宋時烈等長銓, 引入玉堂, 及趙絅上疏, 宇遠繼起, 右善道, 見斥於時。 至是, 尹鑴比之張柬之, 請急用。 宇遠未至, 人以其素有直名, 謂論議不應, 至傾險。 及至, 積忿在中, 與穆、鑴等, 合自中慘刻之論, 無不主張, 至上此疏。 爲壽慶等之先倡, 以西人多退去, 常曰: "西人見癸亥年, 故如是, 而豈每每然乎?" 其狠毒如此。 初, 顯廟天性篤友, 無他貴介, 親愛三福, 出入非時, 或令射的、或侍曲宴, 朝夕在側, 末年乘間浸及時事。 㮒嗜酒無行而已, 楨、柟陰懷禍心, 潛以厚賂行媚于內宮人。 稍任事者, 無非衣福昌、福善宮錦衣者。 又以貨財, 數遺近習, 傾心承接, 貂璫與內人悅其餉, 多爲中詗。 雖其在家之日, 君上一動一靜, 無不飛報。 舅挺昌等, 昏夜聚謀伺隙, 而邪人穢夫, 趨附其門, 外間多深憂之。 上在春宮, 楨等每娛侍, 閹人金鉉等, 勸講於內, 楨等又深相締結。 及上卽位, 民間喧言, 鉉與其黨趙希孟, 共侍左右, 典樞機。 柟以代奠官, 常在殯殿, 每於昏後, 入至御次, 與上共臥起, 侵曉乃出, 與二閹合。 鉉、希孟竝陰賊巧慧, 而鉉頗解文字。 又有阿保尹尙宮, 仁廟宮人也。 爲趙賊所讒, 黜居麟坪宮。 孝廟爲世子時, 嘗進膳於仁廟, 趙賊抽銀籤子, 揷魚湯曰: "銀入湯, 色變異甚矣。" 是時, 禍機甚急, 尹氏適入宮進曰: "魚湯乘熱淬銀, 色無不變。 請以他魚試之於前。" 仁廟卽令試之, 果然。 於是仁廟覺悟, 東宮得無事。 孝廟以尹氏爲忠直, 卽位後, 卽召入內。 嘗命元孫生, 必以爲保母。 尹氏敏慧, 博洽書史, 然性陰險。 先王嘗進御羊肉, 多與公主, 而少與上。 以上未經痘, 羊肉甚熱, 慮其有傷, 而公主雖愛, 而不重, 故多與之。 尹氏從後言: "羊肉亦有得食者矣。" 先王聞而怒, 語慈聖曰: "此人, 他日必離間君母子, 欲重罪之。" 慈聖救解而止。 尹氏久在麟坪宮, 楨等兄弟皆其所撫育, 而楨等事尹氏盡誠, 故情愛甚篤。 至是, 尹氏爲上所信重, 專摠內政。 柟及尹氏一心, 與鉉等相爲表裏, 謀易朝政, 盡去舊臣, 引用南人, 以成其勢。 日夜譽南讒西, 至曰: "某可爲某官, 某可置某罪。" 恐慈聖知之, 每爲欺隱。 柟深沈有智數, 上在沖年, 爲其所眩惑。 始, 閔維重論戚里隧道事, 孝宗深慮易世之後, 爲山人禍階, 嘗敎慈聖曰: "爾叔明似無可憂, 【指金佐明。】 爾父必有報復之心, 汝須知之。" 至是, 慈聖思孝廟之敎, 且知孝廟待宋時烈誠禮, 故常救時烈, 柟等患之, 協謀交構。 先王寢疾, 憂上沖弱, 託於諸公主曰: "世子年幼, 惟恃姊妹, 善爲指導。" 及是, 二公主畏禍, 不敢深言, 獨寅平公主無夫家連累之憂, 扶上涕泣極諫, 上不納。 柟等聞之, 大怒詈喝。 自後, 諸公主惴慄, 不敢出入。 柟等進言: "先王欲罪時烈。" 慈聖明其不然, 而不能得。 慈聖一日夢見先王, 震怒責上曰: "明年二月, 士禍大起。" 驚悟, 益憂之。 至因山後, 柟始出, 與大將柳赫然, 乘昏相從, 諷御營大將申汝哲速令解兵權, 晝夜奔走, 汲汲如狂, 蹤跡詭秘, 形勢大張, 人莫測其所爲, 而群不逞之徒, 多陰屬心於柟者。 崇善君 瀓等密啓慈聖, 請謹上水剌, 慈聖與中宮, 必先嘗而後乃進。 柟惡慈聖在上, 不得盡如其計, 陰敎卜者入宮言: "慈聖姓金, 金克木, 與上同居一宮不吉。" 謀欲遷之他宮, 宮中只知有柟及尹尙宮, 而不知有上及慈聖也。 宦官徐後行與其徒數人約曰: "何可以由宦者亡國之語, 遺後世乎?" 共伺鉉等與柟等相通之跡, 而與共上下。 於是朝野洶洶, 以爲朝夕必有變。 金佑明始與柟等, 共斥宋時烈, 已而, 見柟等意趣非常, 內外黨與已成, 始驚悔涕泣。 楨使燕, 還渡江, 中路遺柟書, 誤傳于佑明家, 其書有一事圖之, 二事未圖, 今須入來之語, 佑明見之甚訝。 繼聞柟與鉉書, 請差使臣, 鉉白上, 差定吳挺緯。 又急欲收攬兵權, 說右明曰: "大監之姪, 可合吏判, 如我形貌好者, 可合爲兵判。" 尹鑴又欲變易宿衛。 於是佑明事事驚疑, 謀欲去柟等, 見上溺愛, 無可奈何。 楨卽佑明姪女壻, 佑明子爲楨姪壻, 而乃發楨、㮒淫亂事。 楨等家中多美人, 而必與內人相奸。 佑明畏其陰懷兇計, 欲行霍顯之謀於杯勺也, 白慈殿, 言于上, 請斥退之, 上不聽。 佑明憂懼不知所爲, 乃露章言之, 其所謂格於間言者, 蓋指尹尙宮也。 始, 楨等下獄, 柟入獄謂二兄曰: "誰敎爲偏論乎?" 尹尙宮大呼於上前曰: "何爲殺此曖昧之人乎?" 上之放釋楨等判付, 卽柟所草而密上者也。 穆、鑴、夏鎭、愈等, 知上惡佑明請對, 將構陷佑明以誣上之罪。 時, 佑明將大敗, 柟等將益盛, 國事將不測。 慈殿之慟哭諭群臣, 以內間事至急故也。 於是楨、㮒被竄, 南人稍沮, 柟等謀少解。 鑴忿忿言于上曰: "宜管束慈聖動靜, 愼無如此擧措。" 宇遠亦鑴黨, 故譏斥慈聖, 深咎佑明, 實憾楨、㮒之得罪也。

【史臣曰: "母后與國事, 鮮不禍人國家, 故《春秋》之義甚嚴。 雉 曌之事, 已不忍言, 而如王后之救魏, 其傅氏之害馮姬, 其亦慘矣, 然亦不可執一而論者。 宋之曺 高, 諸后賢德著稱, 固無間然, 至如君王后之解環, 田氏保邦; 吳夫人之倚井, 孫郞定業, 豈不善哉? 嗚呼! 古今家國之事變無窮, 或有不可以常道處之者。 若不幸遭危機之時, 只爲婦人之常行, 深居拱手而不之救, 則社稷卽隕矣。 是故, 元后握璽, 後世所歎; 穆嬴啼朝, 君子無譏。 今此慈聖, 臨諭群臣, 實前世之所罕, 而然亦當觀處置之事如何也。 若是只欲明楨、㮒事、爲佑明地, 爲此一朝倉卒之擧, 則誠亦太過。 然群小必欲迫問佑明, 加以誣上之罪, 則慈聖之心, 其能安乎? 況非但此也。 主上幼沖, 王孫跋扈, 內結宦妾, 外植黨與, 辟睨兩宮間, 將無所不至, 殿階無橫劍之人, 盂水無攪墨之相, 衆情憂懼, 不測其端倪。 于斯時也, 苟不有處變之權, 國事未知終如何也。 蓋出於不得已, 而豈非大不幸也哉? 尹鑴乃請管束動靜, 其言之悖逆, 不須多辨。 而當楨、㮒之放也, 擧朝喑無一言, 而今宇遠乃曰: ‘大臣當陳, 臺官必執。’ 又以此過慈聖, 何其誣罔之甚也? 至於佑明之言, 爲國家深慮, 出於至誠憂愛, 而宇遠全沒實狀, 巧爲言辭, 意在於爲楨、㮒報怨。 其曰: ‘慈聖諭之殿下, 殿下下詢臣隣。’ 且責佑明: ‘不爲入告, 將讒邪付外。’ 云者, 尤極飾詐。 若有如許形勢, 佑明又安有格於間言之言乎? 且其所引《家人》卦, 引喩於前世女后用事之時, 則可矣, 而用之於今日慈聖, 則大是悖謬, 不但一時錯看經義之比也。 夫男固外也, 女固內也, 而若就一家內而言, 則父與母爲耦, 夫與婦爲耦, 豈有以母子內外對峙, 稱爲男女之理乎? 經曰: ‘利女正。’ 孔子彖之曰: ‘家人, 女正位乎內, 男正位乎外, 天地之義也。’ 又曰: ‘家人有嚴君焉, 父母之謂也。’ 傳曰: ‘家人必有所尊嚴, 而君長謂父母也。’ 孔子之彖、程氏之傳, 皆以男女爲夫婦, 父母爲嚴君, 其義截然, 則其名之不可紊也如此。 《史記》曰: ‘太后在上。’ 胡氏 寅曰: ‘天子治外, 后治內, 各正其位。’ 古今孰有以母后稱爲內位之女, 而責其正不正乎? 孔子言婦人三從之道曰: ‘女子伏於人者也。 敎令不出於閨門。’ 此喩女子之常節。 如使無柟等欺凌之患, 而慈聖有一毫僭逼之意, 則人臣之義, 當如魯宗道之諫爭可也。 噫! 慈聖以深宮一婦人, 豈欲草草對外臣? 而勢有迫急故也, 其意亦慼矣。 宇遠於此少無顧藉之意, 顯有忿厲之氣, 是可忍歟? 蓋尹鑴之論, 常以爲 ‘子可臣母。’ 其言管束, 與其所議服制意同, 非一夕之故。 而宇遠又進詭經之說, 斥慈聖以不正其位, 其流之弊, 俱豈不斁天倫, 圮地維, 傷母子之義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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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3권, 숙종 1년 4월 1일 己丑 1/5 기사 /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이정·이연의 치죄에 자성이 간여한 것의 잘못을 간하는 부제학 홍우원의 상소

국역

부제학(副提學) 홍우원(洪宇遠)이 상소(上疏)하기를,

"신이 든건대 《역경(易經)》의 가인괘(家人卦) 단사(彖辭)에 이르기를 ‘여자가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고 남자가 바깥에서 위치를 바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남자의 자리는 바깥에 있고 여자의 자리는 안에 있기 때문에, 부인(婦人)은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여 바깥의 일을 간섭하지 않아서 전제(傳制)하는 뜻이 없고 삼종(三從)265) 의 도리가 있습니다. 진실로 이 도리를 어기면 《역경》의 여자가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고 남자가 바깥에서 위치를 바르게 한다는 뜻에 어그러짐이 있겠습니다.

지금 이정(李楨)과 이연(李㮒) 등의 더러운 행위는 참으로 근고(近古)에 없었던 변고(變故)였습니다. 그를 치죄(治罪)하는 데 진실로 법률을 잘못 쓴 점이 있으면 대신(大臣)들은 마땅히 진달해야 할 것이고, 대관(臺官)들은 반드시 쟁집(爭執)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성(慈聖)께서 갑자기 전실(殿室)에 납시어서 친히 창문을 사이에 두고 계시니 신하들이 전도(顚倒)되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먼 지방에서 보고 들으면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무릇 어버이에게 과실이 있음에도 이를 간(諫)하여 중지시키기 못하고서 마침내 의리(義理)에 어긋난 데에 귀착(歸着)하게 하는 것은 자식의 허물이라 하겠습니다. 《역경》의 고괘(蠱卦)의 구이효(九二爻)에 이르기를 ‘어머니의 일[蠱]을 주관[幹]함이니 고집[貞]해서는 안된다.’ 하였는데, 정이(程頤)의 전(傳)에 이르기를, ‘자식은 어머니에게 마땅히 유순함으로써 보좌 인도하여 의리에 맞게 하여야 하는데, 순히 하지 못하여 패고(敗蠱)를 초래하는 것은 자식의 죄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옳은 말이므로 어버이를 섬기는 자들이 마땅히 가슴에 새겨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殿下)께서는 ‘어머니의 일을 주관함이니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일이 의리에 맞고 이치에 해로움이 없도록 처리하시면, 자성(慈聖)께서 허물을 두 번 저지르지 않으시는 덕(德)이 장차 태임(太姙)·태사(太姒)의 아름다운 덕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신이 김우명(金佑明)의 상소(上疏)를 보니 맹자(孟子) 어머니의 가르침에 ‘이간(離間)하는 말을 막으라.’는 등의 말이 있기에 신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전하의 모자(母子) 사이는 자애(慈愛)뿐이고 효성(孝誠)뿐이니 혐의(嫌疑)하고 이간하는 것이 어디로부터 생기겠습니까? 설사 참소하고 적해(賊害)하는 사람이 있어 맑은 풍화(風化)를 교란(交亂)하려 한다면, 마땅히 전하에게 들어와 고하여 엄하게 국문(鞫問)하여 교란을 만들어낸 죄를 바로잡게 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문자(文字)에 표시하고 소장(疏章)에 나타내어 사람들의 귀에 들리고 눈에 뜨이게 하여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까지 전파(傳播)함으로써 양궁(兩宮) 사이에 참으로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해야 하겠습니까? 가만히 국구(國舅)를 위하여 그가 깊이 생각지 못했음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내가 아직 어린 나이로 자성께 성의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깊이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은 젊을 때 조행(操行)으로 이름이 났었고, 효종조(孝宗朝)에 바른 말을 올려서 죄를 받았는데, 그것이 청의(淸議)에 높이 인정(認定)되었기에 송시열(宋時烈) 등이 전조(銓曹)의 장(長)으로 있을 적에 옥당(玉堂)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조경(趙絅)이 상소(上疏)를 올리자 홍우원이 잇달아 일어나서 윤선도(尹善道)를 편들어 당시의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윤휴(尹鑴)가 당(唐)나라 장간지(張柬之)에게 비하여 급히 등용(登用)하기를 주청(奏請)하였다. 홍우원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적에 사람들은 그가 본래 바른말 하기로 이름이 있었기에 논의(論議)함이 응당 기울어지고 위험한 데는 이르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이르게 되자 쌓인 분한(忿恨)이 마음속에 있었기에 허목(許穆)·윤휴 등과 어울려서 자기들끼리의 참혹한 의론을 내세워 주장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제 이 상소(上疏)를 올림에 이르러서는 이수경(李壽慶) 등의 선창(先倡)이 되었다. 서인(西人)들이 벼슬에서 물러간 이가 많았던 일로써 말하기를,

"서인들이 계해년266) 의 일을 보았던 까닭으로 이같이 하지만 어찌 매양 그렇게 되겠는가?"

하였으니, 그의 아주 잔인(殘忍)한 것이 이와 같았다. 전에 현종(顯宗)께서는 천성(天性)이 우애(友愛)가 돈독하였는데 다른 친척이 없어서 삼복(三福)267) 을 친애하고 사랑하여 어느 때든 드나들게 하여 혹은 활쏘는 데 데려가고 혹은 곡연(曲宴)268) 에 모시도록 하여 아침 저녁으로 옆에 있게 하였기에 말년(末年)에는 조용한 틈을 타서는 시사(時事)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연(㮒)은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소행이 없을 뿐이지만, 정(楨)과 남(柟)은 몰래 좋지 못한 마음을 품고 후한 뇌물을 가지고 가만히 내궁(內宮)에게 잘 보이려 하였다. 그러기에 궁내에서 약간이나마 일을 맡은 자들은 복창궁(福昌宮)이나 복선궁(福善宮)의 비단옷을 입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또는 재화(財貨)를 가지고 자주 임금의 측근(側近)에게 뇌물을 바쳐 마음을 기울여 받들고 대접했으며 초당(貂璫)269) 과 나인(內人)은 그 뇌물을 좋아하여 염탐해 주는 이가 많았다. 그러기에 비록 집에 있는 날이라도 임금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쏜살같이 보고해 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의 외삼촌 오정창(吳挺昌) 등도 밤마다 모여서 모의(謀議)를 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기에 간사하고 더러운 무리들이 그 문(門)에 쫓아가 아부하게 되니, 외간(外間)에서는 대부분 이를 매우 근심하였다. 임금이 춘궁(春宮)에 있었을 적에 정(楨) 등이 매양 모시고 지냈다. 내시(內侍) 김현(金鉉) 등이 춘궁 안에 있는 강석(講席)에 참예하기를 권하였기에 정 등이 김현과도 서로 깊은 관계를 맺었다. 임금이 즉위(即位)함에 이르러는 민간(民間)에서 뜬소문이 많았다. 김현이 그의 무리 조희맹(趙希孟)과 더불어 임금의 측근에 함께 모시어서 추기(樞機)를 맡았고, 남(柟)은 대전관(代奠官)으로서 항상 빈전(殯殿)에 있었기에 매양 날이 어두워진 뒤에는 임금이 계신 곳에 들어가서 임금과 더불어 함께 눕고 일어나고 하다가 새벽녘에야 궁에서 나왔다. 그래서 김현·조희맹 두 내시와 결합(結合)하였다. 김현과 조희맹은 모두 음흉(陰凶)하고 간사한 꾀가 있었으며 더욱이 김현은 자못 문자를 알았다. 또 아보(阿保) 윤상궁(尹尙宮)이 있었으니 그는 인조(仁祖)의 궁인(宮人)이었으나 조적(趙賊)270) 의 참소[讒]를 받고서 내침을 당해 인평궁(麟坪宮)에 살았다. 효종(孝宗)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일찍이 인조에게 수라를 올렸다. 그때에 조적이 은으로 된 첨자(籤子)를 뽑아서 생선탕[魚湯]에 꽂으면서 말하기를,

"은이 탕(湯)에 들어가자 빛깔이 변하니 매우 괴이(怪異)하다."

하였다. 이때 화란이 생길 조짐이 아주 급박하였는데 윤씨가 마침 궁에 들어왔다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열(熱)을 받은 생선탕에 담그면 은의 빛깔이 죽어서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생선탕으로 앞에서 시험하여 보십시오."

하였다. 인조가 곧 그대로 시험하게 하였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에 인조께서 깨달았기에 동궁(東宮)이 무사(無事)하게 되었다. 효종은 이러한 윤씨를 충직(忠直)한 자로 여겼기에 즉위(即位)한 뒤에 궁내로 불러들였으며, 일찍이 명(命)하기를,

"만일 원손(元孫)을 낳게 되면 반드시 보모(保母)로 삼을 것이다."

하였다. 윤씨는 민첩하고 슬기로와서 서사(書史)를 널리 통달하였으나 성품이 음험(陰險)하였다. 선왕(先王)께서는 진어(進御)하시던 양고기를 공주(公主)에게 많이 나누어 주고 임금에게는 조금만 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임금이 그때 아직 천연두(天然痘)를 앓기 전이라서 열이 무척 많은 양고기는 혹 해로움이 있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고, 공주는 비록 사랑스럽지마는 중하지는 않았던 까닭으로 많이 준 것이다. 그런데 윤씨가 뒤에서 말하여 주어 양고기를 얻어 먹은 것이 있었다. 선왕께서 이러한 짓을 듣고 성내에 자성(慈聖)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훗날에 반드시 임금의 어머니와 자식 사이를 이간(離間)질할 것이오."

하여, 중한 죄를 주려 하였으나 자성께서 구해 주어서 처벌을 그만두었다. 윤씨가 오랫동안 인평궁(麟坪宮)에 있었기에 정(楨) 등 삼형제는 모두 그가 어루만져 키웠으므로 정 등은 윤씨를 지성껏 섬겼고, 그러기에 정(情)과 사랑이 매우 두터웠다. 이때에 이르러 윤씨는 임금이 믿고 중하게 여기자 내정(內政)을 오로지 총관(摠管)하였다. 그래서 남(柟)과 윤씨는 한마음이 되었고, 김현(金鉉) 등과는 서로 안팎이 되어서 조정(朝廷)의 정체(政體)를 바꾸기를 모의하여 옛 중신(重臣)들을 모두 제거하고 남인(南人)을 끌어들여서 그 세력(勢力)을 이루려고 밤낮으로 남인(南人)을 칭찬하고 서인(西人)을 참소하였으며, 심지어는,

"아무개는 아무 벼슬을 시켜야 하고 아무개는 아무 죄를 주어야 한다."

고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자성(慈聖)이 이 일을 알까 두려워서 매양 속이고 숨기었다. 남(柟)은 침착하고 슬기가 있었고 임금은 어린 나이므로 그에게 현혹(眩惑)되었다. 처음에 민유중(閔維重)이 척리(戚里)의 수도(隧道)에 대한 일을 논하였을 적에 효종께서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 산인(山人)271) 이 화(禍)를 당할까 깊이 염려하시어 일찍이 자성(慈聖)에게 교시(敎示)하기를,

"너의 숙부(叔父)는 총명하니 염려될 것이 없을 듯하지만, 【김좌명(金佐明)을 가리킨다.】 너의 아버지는 반드시 보복(報復)할 마음을 가질 것이니 너는 이를 알아야 한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자성께서는 효종의 교시를 생각하시고 또 효종께서 송시열을 성심과 예절로써 대우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항상 송시열을 구하여 보살피려 하였다. 남(柟) 등이 이를 근심하여 온갖 모의(謀議)로 죄를 얽으려 하였다. 선왕(先王)께서 병으로 누웠을 때 임금이 어리고 약한 것을 근심하여 여러 공주(公主)들에게 부탁하기를,

"세자의 나이 어리니 오직 너희 자매(姊妹)들만 믿는다. 너희들이 잘 도와 주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이때를 당하여 두 공주는 화(禍)가 미칠 것이 두려워서 감히 간절히 이야기를 하지 못하였는데 유독 인평 공주(寅平公主)만은 남편의 집이 연루(連累)될 근심이 없었다. 그래서 임금을 붙들고 체읍(涕泣)하면서 극력(極力) 간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남(柟) 등이 이 말을 듣고 크게 성내어 꾸짖고 욕하였다. 이 뒤로부터 여러 공주들은 겁을 먹고 몸조심을 하여 감히 대궐에 드나들지 못하였다. 남 등이 임금께 아뢰기를,

"선왕(先王)께서 송시열에게 죄를 주려고 했습니다."

하니, 자성(慈聖)이 그렇지 않았음을 밝히려고 했으나 하지 못했다. 자성이 어느날 꿈에 보니 선왕(先王)께서 진노(震怒)하시어 임금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내년 2월에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놀라 깨어서는 크게 더욱 근심하였다. 인산(因山)을 마친 뒤에 남(柟) 등이 비로소 나와서 대장(大將) 유혁연(柳赫然)과 더불어 어두운 밤을 타 서로 만나서 어영 대장(御營大將) 신여철(申汝哲)을 풍유(諷喩)하여 빨리 병권(兵權)을 해면(解免)하게 하는 등 밤낮으로 분주(奔走)하여 조금 조급히 서둘기를 마치 미친 것 같았으며, 종적(蹤跡)이 속임수가 많고 비밀스러워서 형세가 크게 떨치기에, 사람들은 그의 하는 짓을 헤아려 알 수가 없었지만 여러 불량(不良)한 무리들은 가만히 남(柟)에게 마음으로 붙좇는 자가 많았다. 숭선군(崇善君) 이징(李瀓)이 자성에게 밀계(密啓)하여 올리는 수라[水剌]를 조심하기를 청하니, 자성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반드시 먼저 맛을 본 뒤에 그제야 임금께 올렸다. 남(柟)은 자성(慈聖)이 위에 있으면 모든 것이 자기의 계책(計策)대로 되지 못할 것을 미워하여 가만히 점장이를 시켜 궁(宮)에 들어와서 말하게 하기를,

"자성(慈聖)의 성이 김(金)이니 쇠는 나무를 이긴다[金克木]. 그러므로 자성(慈聖)이 임금과 함께 한 궁에 사는 것은 길(吉)하지 못하다."

하는 말을 퍼뜨려서 자성을 다른 궁으로 옮기게 할 것을 도모(圖謀)하였다. 그때의 궁중에서는 다만 남(柟)과 윤상궁의 존재만 알았을 뿐, 임금과 자성(慈聖)의 존재는 알지 못하였다. 환관(䆠官) 서후행(徐後行)이 그의 무리 두서너 사람과 약속하기를.

"어찌 환관(宦官)들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는 말을 후세(後世)에 전하게 하겠는가?"

하고, 이들은 함께 김현(金鉉) 등이 남(柟) 등과 더불어 서로 통하는 자취를 살펴서 그들과 함께 왔다갔다 하니, 이에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흉흉(洶洶)하여 조석(朝夕) 사이에 변고(變故)가 일어날 것으로 여겼다. 김우명(金佑明)은 처음에는 남(柟) 등과 더불어 함께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남(柟) 등의 마음 먹음이 상도(常道)에 벗어나 안팎으로 당파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보고는 비로소 놀라고 뉘어쳐서 체읍(涕泣)하였다. 정(楨)이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압록강을 건너오면서 중로(中路)에서 남(柟)에게 보낸 편지가 김우명의 집으로 잘못 전하여졌다. 그 편지의 내용에 ‘한 가지 일은 도모(圖謀)하였지만 두 가지 일은 아직 도모하지 못하였기에 모름지기 들어와야만 한다.’는 말이 있었다. 김우명이 이를 보고 몹시 의아하였는데, 잇달아 들리는 소식에는 남(柟)이 김현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신을 차출할 것을 주청(奏請)하게 하자, 김현이 임금께 아뢰어서 오정위(吳挺緯)를 차정하였다는 것이다. 또 빨리 병권(兵權)을 모아 잡으려고 김우명(金佑明)을 달래어 말하기를,

"대감(大監)의 조카는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적임(適任)이고, 나와 같이 풍채가 좋은 사람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시켜야 한다."

하였다. 윤휴(尹鑴)도 왕궁의 숙위(宿衛)를 바꾸려 하였다. 이에 김우명은 일마다 모두 놀라고 의심스러워 남(柟) 등을 제거(除去)할 생각을 가졌으나, 임금이 너무나 사랑하고 있음을 보고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정(楨)은 곧 김우명(金佑明)의 조카 사위이고 김우명의 아들은 정(楨)의 조카 사위가 되지만, 정(楨)·연(㮒)의 음란한 일을 고발(告發)하였다. 정(楨) 등의 집안에는 미인(美人)이 많았는데도 반드시 궁녀들과 더불어 서로 간통하였다. 김우명은 그들이 음흉한 계책을 품고서 곽현(霍顯)이 배작(杯勺)에 꾀하던 일272) 을 행할까 두려워하여 자전(慈殿)에 아뢰어 임금에게 말하여 물리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이를 듣지 아니하니 김우명이 근심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이에 장소(章疏)에 드러내 말하였다. 그 글에 이간하는 말을 막아야 한다고 한 것은 대개 윤상궁을 가리킨 것이다. 처음에 정(楨) 등이 옥에 갇혔을 적에 남(柟)이 옥에 들어가서 두 형에게 말하기를,

"누가 시켜서 이따위 치우친 논소(論疏)를 올렸는가?"

하였고, 윤상궁은 임금의 앞에서 크게 부르짖어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 애매(曖昧)한 사람들을 죽이려 합니까?"

하였다. 임금이 정(楨) 등을 석방(釋放)한 판부(判付)는 곧 남(柟)이 초(草)를 잡아 비밀히 임금께 올린 것이다. 허목(許睦)·윤휴(尹鑴)·이하진(李夏鎭)·권유(權愈) 등은 임금이 김우명(金佑明)을 싫어하는 줄을 알고 청대(請對)하였는데, 이는 김우명이 임금을 속였다는 죄로써 뒤집어 씌우려 한 것이다. 그때에 김우명은 크게 몰락하게 되고 남(柟) 등은 더욱 강성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에 자전(慈殿)께서 통곡(慟哭)하면서 여러 신하들을 깨우쳤으니, 궁안의 일이 매우 급박(急迫)하여졌기 때문이다. 이에 정(楨)과 연(㮒)은 귀양을 가게되고 남인(南人)의 세력이 조금 꺾여져서 남(柟) 등의 모의(謀議)가 조금 해이(解弛)해졌다. 이에 윤휴가 분하게 여겨 임금에게 아뢰기를,

"자성(慈聖)의 동정(動靜)을 마땅히 관속(管束)하여 이와 같은 거조(擧措)가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홍우원(洪宇遠)도 또한 윤휴의 당파인 까닭으로 자성(慈聖)을 비난 배척하고 김우명을 매우 미워했으니, 이는 참으로 정(楨)과 연(㮒)이 죄를 얻은 것을 원망하였기 때문이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모후(母后)가 나라일에 간섭을 하고는 국가에 화(禍)를 끼치지 않음이 드물기 때문에 《춘추(春秋)》의 뜻이 매우 엄중하였다. 여치(呂雉)와 무조(武曌)의 일273) 은 차마 말할 수 없으나, 왕후(王后)가 위(魏)나라를 구제하고 부씨(傅氏)가 풍희(馮姬)를 살해한 것은 또한 참혹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 고집해 말할 수도 없으니, 송(宋)나라 조후(曹后)·고후(高后) 등의 여러 후비(后妃)의 어진 덕은 칭송(稱頌)이 자자하여 진실로 지적하여 비난할 수가 없었고, 군왕후(君王后)가 고리를 풀었으므로[解環]274) 전씨(田氏)275) 가 나라를 보전하였고, 오 부인(吳夫人)이 우물에 기대서서 기다리므로[倚井] 손랑(孫郞)276) 이 왕업(王業)을 정하였음은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아! 예나 이제나 집과 나라의 사변(事變)은 한(限)이 없으므로, 혹 상도(常道)를 가지고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만약 불행(不幸)하게 위기(危機)를 만났을 때에 다만 부인으로서 상행(常行)만을 행하여 궁중에 깊이 파묻혀서 팔짱 끼고서 이를 구원하지 않는다면 사직(社稷)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원후(元后)가 옥새(玉璽)를 잡은 것을 후세(後世)에서 찬탄한 바이고, 목영(穆嬴)이 조정에서 통곡한 것277) 을 군자(君子)들이 헐뜯지 아니하였다. 이제 자성(慈聖)께서 조정에 친히 임(臨)하여 여러 신하들을 개유(開諭)한 것은 참으로 전대(前代)에서는 드문 일이지마는, 또한 마땅히 처치(處置)한 일이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만일 정(楨)과 연(㮒)의 사건을 밝힘으로써 김우명(金佑明)을 위하려고 이러한 하루아침의 허둥지둥한 거조(擧措)를 행했다면 이는 진실로 너무 지나친 짓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러 소인(小人)들이 김우명을 몰아세워 임금을 속인 죄를 뒤집어 씌우려 한다면 자성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였겠는가? 더구나 이 일뿐만이 아니다. 임금께서 나이 어린데 왕손(王孫)들이 발호(跋扈)하여 안으로는 환관(宦官)과 궁인(宮人)들을 결탁하고, 밖으로 당여(黨與)를 만들어서 양궁(兩宮)의 사이를 흘겨보면서 장차 무슨 짓이든지 못할 것이 없는데도, 전계(殿階)에는 칼을 비껴든 무신(武臣)이 없고 우수(盂水)에는 먹을 뿌리는 문신 재상이 없어서 뭇사람의 마음이 근심되고 두려워 그 끝가는 데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 진실로 시변(時變)에 대처(對處)하는 권도(權道)가 없었다면 나랏일이 마침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니, 대개 부득이(不得已)한 데서 나온 일이지만 어찌 큰 불행(不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윤휴가 도리어 자성의 동정(動靜)을 관속(管束)하라고 청(請)한 것은 그 말이 패역(悖逆)한 것은 많이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리고 정(楨)과 연(㮒)이 내침을 당하였을 적에 온 조정이 벙어리처럼 한 마디의 말도 없었는데 이제 홍우원(洪宇遠)이 곧 말하기를, ‘대신들은 마땅히 진달해야 하고 대관(臺官)들은 반드시 쟁집(爭執)해야 한다.’ 하였으며, 또 이 일로써 자성(慈聖)에게 허물을 돌렸으니, 어찌 그 무망(誣罔)함이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김우명(金佑明)이 말한 것은 국가를 위하여 깊이 염려(念慮)한 것이므로 지극한 성의로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한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홍우원은 이러한 실상(實狀)을 전혀 숨기고는 교묘한 말을 늘어 놓았으니, 이것은 아마 정(楨)과 연(㮒)을 위하여 원한(怨恨)을 갚으려는 데 있는 듯하다. 그가 말한 것 중에, ‘자성(慈聖)은 전하에게 말하고 전하께선 신하들에게 물으라.’ 한 것과 또 김우명을 꾸짖기를, ‘임금께서 들어와 고하지 않고 참소와 간사한 짓으로 바깥에 좇았다.’고 한 말은 더욱 거짓을 꾸민 것이다. 만약 이러한 형세(形勢)가 있었다면 김우명이 어찌 이간하는 말을 막으라고 하였겠는가? 그리고 홍우원의 상소에 인용한 가인괘(家人卦)는 지난 세상의 여후(女后)들이 마음대로 권세부리던 때에 끌어다 비유하는 것은 옳겠지만, 오늘의 자성에게 끌어다 쓴 것은 아주 패란하고 그릇된 것이므로, 이는 다만 한때에 경서(經書)의 뜻을 잘못 본 것에 비길 것만이 아니다. 대저 남자는 바깥이고, 여자는 안이라고 하였지만, 만약 한 집안에 나아가서 말한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짝이 되고 지아비와 지어미가 짝이 되는 것인데 어찌 어머니와 아들을 안팎으로 대치해서 남자 여자로 일컫는 도리가 있는가? 《역경(易經)》에 ‘여자가 바른 것이 이(利)하니라.’ 한 것을 공자의 단사(彖辭)에 ‘가인(家人)은 여자가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고 남자가 바깥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하늘과 땅의 뜻이다.’ 하였고, 또 ‘가인에 엄군(嚴君)이 있으니 부모(父母)를 말한다.’ 하였는데, 이를 정전(程傳)에서 ‘가인의 도는 반드시 존엄(尊嚴)한 군장(君長)이 있는 것이니 부모를 말한다.’ 하였다. 공자의 단사(彖辭)와 정씨(程氏)의 전(傳)에 모두 남자와 여자로 부부(夫婦)를 삼았고, 부모(父母)로 엄군(嚴君)을 삼아서 그 뜻이 분명하였으니, 그 명분(名分)을 문란(紊亂)시킬 수 없음이 이와 같았다. 《사기(史記)》에 ‘태후(太后)가 위에 계신다.’고 한 데 대하여 호인(胡寅)이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밖을 다스리고 후비는 안을 다스려서 각각 그 위치를 바르게 한다.’ 하였다. 그러니 고금(古今)에 누군들 모후(母后)를 내위(內位)의 여자라고 일컬어서 바르니 바르지 못하니를 따졌는가? 공자가 부인(婦人)의 삼종(三從)의 도리를 말씀하기를, ‘여자는 사람에게 복종(伏從)하는 자이다. 그러기에 교령(敎令)이 규문(閨門)에서 나가지 않는다.’ 하였다. 이 말씀은 여자로서 평상시의 행할 일을 말한 것이다. 그러기에 만일 남(柟) 등이 임금을 속이고 업신여기는 근심이 없었는데도 자성(慈聖)께서 조금이라도 참람하고 핍박하는 뜻이 있었다면, 신하된 의리로서는 마땅히 노종도(魯宗道)처럼 간하였음이 옳았을 것이다. 아! 자성(慈聖)은 깊은 궁(宮)에 계시는 한 부인으로서 어찌 초초(草草)한 모습으로 바깥 신하들을 대하고 싶었겠는가마는, 형세가 급박(急迫)함이 있었기 때문이니 그 뜻 또한 근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홍우원은 이 일에 대하여 조금도 자중(自重)하는 뜻이 없고 분하고 사나운 기상만 현저히 있었으니 이를 어찌 참고 있을 것인가? 대저 윤휴의 의논은 항상 ‘아들이 어머니도 신하로 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기에 그가 ‘자전을 관속하라.’고 말한 것은 그가 주장한 복제(服制)의 뜻과 같은 것이요, 단시일에 내세운 주장이 아니다. 그런데 훙우원이 또 괴상하게 경서(經書)의 말을 올려서 ‘자성(慈聖)이 그 위치를 바르게 하지 못했다.’고 배척하였으니, 그 종말의 폐단이 모두 천륜(天倫)을 거스르고 지유(地維)를 무너뜨려 어머니와 자식의 도리를 상하게 하지 않겠는가?"

  • [註 265] 삼종(三從) :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것.
  • [註 266] 계해년 : 1623 인조 원년.
  • [註 267] 삼복(三福) :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을 가리킴.
  • [註 268] 곡연(曲宴) : 궁중에서 베푸는 작은 규모의 잔치.
  • [註 269] 초당(貂璫) : 환관(宦官).
  • [註 270] 조적(趙賊) : 인조 후궁 조귀인(趙貴人)을 가리킴.
  • [註 271] 산인(山人) :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킴.
  • [註 272] 곽현(霍顯)이 배작(杯勺)에 꾀하던 일 : 곽현(霍顯)은 한나라 선제(宣帝) 때 곽광(霍光)의 처(妻)임. 선제의 황후가 출산할 때에 곽현이 유위(乳醫)를 시켜 독약을 타서 황후를 시해한 일을 말함.
  • [註 273] 여치(呂雉)와 무조(武曌)의 일 : 여치는 한 고조(漢高祖)의 황후인 여후(呂后)이고 무조(武曌)는 당 고종(唐高宗)의 황후인 무후(武后)이니, 두 여인이 모두 황제가 되어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행사한 자임.
  • [註 274] 고리를 풀었으므로[解環] : 전국 시대 진 소왕(秦昭王)이 사자를 제(齊)나라에 보내어 군왕후에게 옥련환(玉連環)을 주면서 ‘제(齊)나라는 지혜있는 사람이 많으니 이 고리를 풀 수가 있는가?’ 하자, 군왕후가 망치를 가지고 부수고는 진나라 사자에게 풀었다고 말한 고사(故事).
  • [註 275] 전씨(田氏) : 전국 시대 전제(田齊)를 일컬음.
  • [註 276] 손랑(孫郞) : 삼국 시대 손책(孫策)을 일컬음.
  • [註 277] 목영(穆嬴)이 조정에서 통곡한 것 : 춘추 시대 진 헌공(晉獻公)의 딸로서 진목공(秦穆公)의 부인이 된 목희(穆姬)를 이름.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싸워서 진 혜공(晉惠公)을 사로잡아 돌아오니 목희가 울면서 진목공에게 고하기를, ‘진(晉)나라 임금이 아침에 들어오면 저는 저녁에 죽겠으니 임금님은 이를 도모하시오.’ 하니, 목공이 두려워 하여 진 혜공(晉惠公)을 잘 대접하여 보낸 고사(故事).

원문

○朔己丑/副提學洪宇遠上疏曰:

臣聞《易》之《家人》之彖曰: "女正位乎內, 男正位乎外。" 夫男位在外, 女位在內。 是以婦人正位乎內, 不預外事, 無專制之義, 有三從之道。 苟違是道, 有違於《大易》內外之義矣。 楨、㮒等汚衊之行, 實近古所未有之變。 治之苟失其律, 大臣當陳之, 臺官必執之。 而慈聖猝御殿室, 親自隔窓, 臣隣顚倒, 竝失所措, 遠外瞻聆, 安得不駭也? 凡親有過擧, 不能諫止, 而終爲非義之歸, 則子之過也。 在《易》蠱之九二曰: "幹母之蠱, 不可貞。" 程頤傳之曰: "子之於母, 當以柔巽輔導, 使得於義, 不順而致敗蠱, 則子之罪也。" 至哉, 言乎! 斯實事親者之所當服膺而勿失者也。 願殿下深惟幹蠱不可貞之義, 使事合於義, 無害於理, 則慈聖不貳過之德, 將與姙、姒匹休矣。 臣見金佑明之疏, 有孟母之敎, 格於間言等語, 臣不勝駭然。 殿下母子之間, 止慈止孝, 嫌間何自而生? 設有讒賊之人, 欲爲交亂, 淸風所當入告殿下, 嚴加鞫問, 以正交構之罪, 斯乃可矣。 何爲形諸文字, 著之章疏, 播於耳目, 傳於遠近, 有若兩宮之間眞有是事者也? 竊爲國舅, 惜其不深思也。

答曰: "予以沖年, 誠意不盡之致, 深加慙恧焉。" 宇遠少以操行名, 孝宗朝以直言獲罪, 大爲淸議所許。 宋時烈等長銓, 引入玉堂, 及趙絅上疏, 宇遠繼起, 右善道, 見斥於時。 至是, 尹鑴比之張柬之, 請急用。 宇遠未至, 人以其素有直名, 謂論議不應, 至傾險。 及至, 積忿在中, 與穆、鑴等, 合自中慘刻之論, 無不主張, 至上此疏。 爲壽慶等之先倡, 以西人多退去, 常曰: "西人見癸亥年, 故如是, 而豈每每然乎?" 其狠毒如此。 初, 顯廟天性篤友, 無他貴介, 親愛三福, 出入非時, 或令射的、或侍曲宴, 朝夕在側, 末年乘間浸及時事。 㮒嗜酒無行而已, 楨、柟陰懷禍心, 潛以厚賂行媚于內宮人。 稍任事者, 無非衣福昌、福善宮錦衣者。 又以貨財, 數遺近習, 傾心承接, 貂璫與內人悅其餉, 多爲中詗。 雖其在家之日, 君上一動一靜, 無不飛報。 舅挺昌等, 昏夜聚謀伺隙, 而邪人穢夫, 趨附其門, 外間多深憂之。 上在春宮, 楨等每娛侍, 閹人金鉉等, 勸講於內, 楨等又深相締結。 及上卽位, 民間喧言, 鉉與其黨趙希孟, 共侍左右, 典樞機。 柟以代奠官, 常在殯殿, 每於昏後, 入至御次, 與上共臥起, 侵曉乃出, 與二閹合。 鉉、希孟竝陰賊巧慧, 而鉉頗解文字。 又有阿保尹尙宮, 仁廟宮人也。 爲趙賊所讒, 黜居麟坪宮。 孝廟爲世子時, 嘗進膳於仁廟, 趙賊抽銀籤子, 揷魚湯曰: "銀入湯, 色變異甚矣。" 是時, 禍機甚急, 尹氏適入宮進曰: "魚湯乘熱淬銀, 色無不變。 請以他魚試之於前。" 仁廟卽令試之, 果然。 於是仁廟覺悟, 東宮得無事。 孝廟以尹氏爲忠直, 卽位後, 卽召入內。 嘗命元孫生, 必以爲保母。 尹氏敏慧, 博洽書史, 然性陰險。 先王嘗進御羊肉, 多與公主, 而少與上。 以上未經痘, 羊肉甚熱, 慮其有傷, 而公主雖愛, 而不重, 故多與之。 尹氏從後言: "羊肉亦有得食者矣。" 先王聞而怒, 語慈聖曰: "此人, 他日必離間君母子, 欲重罪之。" 慈聖救解而止。 尹氏久在麟坪宮, 楨等兄弟皆其所撫育, 而楨等事尹氏盡誠, 故情愛甚篤。 至是, 尹氏爲上所信重, 專摠內政。 柟及尹氏一心, 與鉉等相爲表裏, 謀易朝政, 盡去舊臣, 引用南人, 以成其勢。 日夜譽南讒西, 至曰: "某可爲某官, 某可置某罪。" 恐慈聖知之, 每爲欺隱。 柟深沈有智數, 上在沖年, 爲其所眩惑。 始, 閔維重論戚里隧道事, 孝宗深慮易世之後, 爲山人禍階, 嘗敎慈聖曰: "爾叔明似無可憂, 【指金佐明。】 爾父必有報復之心, 汝須知之。" 至是, 慈聖思孝廟之敎, 且知孝廟待宋時烈誠禮, 故常救時烈, 柟等患之, 協謀交構。 先王寢疾, 憂上沖弱, 託於諸公主曰: "世子年幼, 惟恃姊妹, 善爲指導。" 及是, 二公主畏禍, 不敢深言, 獨寅平公主無夫家連累之憂, 扶上涕泣極諫, 上不納。 柟等聞之, 大怒詈喝。 自後, 諸公主惴慄, 不敢出入。 柟等進言: "先王欲罪時烈。" 慈聖明其不然, 而不能得。 慈聖一日夢見先王, 震怒責上曰: "明年二月, 士禍大起。" 驚悟, 益憂之。 至因山後, 柟始出, 與大將柳赫然, 乘昏相從, 諷御營大將申汝哲速令解兵權, 晝夜奔走, 汲汲如狂, 蹤跡詭秘, 形勢大張, 人莫測其所爲, 而群不逞之徒, 多陰屬心於柟者。 崇善君 瀓等密啓慈聖, 請謹上水剌, 慈聖與中宮, 必先嘗而後乃進。 柟惡慈聖在上, 不得盡如其計, 陰敎卜者入宮言: "慈聖姓金, 金克木, 與上同居一宮不吉。" 謀欲遷之他宮, 宮中只知有柟及尹尙宮, 而不知有上及慈聖也。 宦官徐後行與其徒數人約曰: "何可以由宦者亡國之語, 遺後世乎?" 共伺鉉等與柟等相通之跡, 而與共上下。 於是朝野洶洶, 以爲朝夕必有變。 金佑明始與柟等, 共斥宋時烈, 已而, 見柟等意趣非常, 內外黨與已成, 始驚悔涕泣。 楨使燕, 還渡江, 中路遺柟書, 誤傳于佑明家, 其書有一事圖之, 二事未圖, 今須入來之語, 佑明見之甚訝。 繼聞柟與鉉書, 請差使臣, 鉉白上, 差定吳挺緯。 又急欲收攬兵權, 說右明曰: "大監之姪, 可合吏判, 如我形貌好者, 可合爲兵判。" 尹鑴又欲變易宿衛。 於是佑明事事驚疑, 謀欲去柟等, 見上溺愛, 無可奈何。 楨卽佑明姪女壻, 佑明子爲楨姪壻, 而乃發楨、㮒淫亂事。 楨等家中多美人, 而必與內人相奸。 佑明畏其陰懷兇計, 欲行霍顯之謀於杯勺也, 白慈殿, 言于上, 請斥退之, 上不聽。 佑明憂懼不知所爲, 乃露章言之, 其所謂格於間言者, 蓋指尹尙宮也。 始, 楨等下獄, 柟入獄謂二兄曰: "誰敎爲偏論乎?" 尹尙宮大呼於上前曰: "何爲殺此曖昧之人乎?" 上之放釋楨等判付, 卽柟所草而密上者也。 穆、鑴、夏鎭、愈等, 知上惡佑明請對, 將構陷佑明以誣上之罪。 時, 佑明將大敗, 柟等將益盛, 國事將不測。 慈殿之慟哭諭群臣, 以內間事至急故也。 於是楨、㮒被竄, 南人稍沮, 柟等謀少解。 鑴忿忿言于上曰: "宜管束慈聖動靜, 愼無如此擧措。" 宇遠亦鑴黨, 故譏斥慈聖, 深咎佑明, 實憾楨、㮒之得罪也。

【史臣曰: "母后與國事, 鮮不禍人國家, 故《春秋》之義甚嚴。 雉 曌之事, 已不忍言, 而如王后之救魏, 其傅氏之害馮姬, 其亦慘矣, 然亦不可執一而論者。 宋之曺 高, 諸后賢德著稱, 固無間然, 至如君王后之解環, 田氏保邦; 吳夫人之倚井, 孫郞定業, 豈不善哉? 嗚呼! 古今家國之事變無窮, 或有不可以常道處之者。 若不幸遭危機之時, 只爲婦人之常行, 深居拱手而不之救, 則社稷卽隕矣。 是故, 元后握璽, 後世所歎; 穆嬴啼朝, 君子無譏。 今此慈聖, 臨諭群臣, 實前世之所罕, 而然亦當觀處置之事如何也。 若是只欲明楨、㮒事、爲佑明地, 爲此一朝倉卒之擧, 則誠亦太過。 然群小必欲迫問佑明, 加以誣上之罪, 則慈聖之心, 其能安乎? 況非但此也。 主上幼沖, 王孫跋扈, 內結宦妾, 外植黨與, 辟睨兩宮間, 將無所不至, 殿階無橫劍之人, 盂水無攪墨之相, 衆情憂懼, 不測其端倪。 于斯時也, 苟不有處變之權, 國事未知終如何也。 蓋出於不得已, 而豈非大不幸也哉? 尹鑴乃請管束動靜, 其言之悖逆, 不須多辨。 而當楨、㮒之放也, 擧朝喑無一言, 而今宇遠乃曰: ‘大臣當陳, 臺官必執。’ 又以此過慈聖, 何其誣罔之甚也? 至於佑明之言, 爲國家深慮, 出於至誠憂愛, 而宇遠全沒實狀, 巧爲言辭, 意在於爲楨、㮒報怨。 其曰: ‘慈聖諭之殿下, 殿下下詢臣隣。’ 且責佑明: ‘不爲入告, 將讒邪付外。’ 云者, 尤極飾詐。 若有如許形勢, 佑明又安有格於間言之言乎? 且其所引《家人》卦, 引喩於前世女后用事之時, 則可矣, 而用之於今日慈聖, 則大是悖謬, 不但一時錯看經義之比也。 夫男固外也, 女固內也, 而若就一家內而言, 則父與母爲耦, 夫與婦爲耦, 豈有以母子內外對峙, 稱爲男女之理乎? 經曰: ‘利女正。’ 孔子彖之曰: ‘家人, 女正位乎內, 男正位乎外, 天地之義也。’ 又曰: ‘家人有嚴君焉, 父母之謂也。’ 傳曰: ‘家人必有所尊嚴, 而君長謂父母也。’ 孔子之彖、程氏之傳, 皆以男女爲夫婦, 父母爲嚴君, 其義截然, 則其名之不可紊也如此。 《史記》曰: ‘太后在上。’ 胡氏 寅曰: ‘天子治外, 后治內, 各正其位。’ 古今孰有以母后稱爲內位之女, 而責其正不正乎? 孔子言婦人三從之道曰: ‘女子伏於人者也。 敎令不出於閨門。’ 此喩女子之常節。 如使無柟等欺凌之患, 而慈聖有一毫僭逼之意, 則人臣之義, 當如魯宗道之諫爭可也。 噫! 慈聖以深宮一婦人, 豈欲草草對外臣? 而勢有迫急故也, 其意亦慼矣。 宇遠於此少無顧藉之意, 顯有忿厲之氣, 是可忍歟? 蓋尹鑴之論, 常以爲 ‘子可臣母。’ 其言管束, 與其所議服制意同, 非一夕之故。 而宇遠又進詭經之說, 斥慈聖以不正其位, 其流之弊, 俱豈不斁天倫, 圮地維, 傷母子之義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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