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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25권, 현종 12년 11월 30일 丁丑 2/5 기사 / 1671년 청 강희(康熙) 10년

우의정 송시열이 우레의 변고로 상소하다

국역

우의정 송시열이 우레의 변고로 인하여 상소하였다. 병을 진달하여 사직하고 또 녹봉을 환수하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 경술년031) 에 병 때문에 부르심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돌이켜 생각건대, 무신·기유 두 해의 달포 사이에 국사를 망령되이 논하여 위로 공가에 끼친 피해와 아래로 신의 몸에 이르게 한 비방이 적지 않습니다. 비록 후회하고자 한들 미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죄를 따지는 상소를 삼가 갖추어 면류관 앞에 올리고자 하였으나, 마침 이세직(李世直)의 변을 만나 두려움에 떨며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두 가지 일은 나라 계획의 득실과 관련되는 것이 있어 끝내 성상께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이 병 때문에 극도로 혼미하여 글씨를 정사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단지 당시의 초본을 올릴 뿐이니, 여가에 한번 살펴보아 주신다면 재량하여 따를 바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이 두 조정의 은혜를 입다가 늙어 병들어 죽으니, 신음하고 쑤시는 가운데에서도 위로 나랏일을 생각하느라 걱정이 만 갈래입니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때로는 일어나 앉기도 하였습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한번 지척에서 어리석은 마음을 다 쏟아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 또 매우 놀랐습니다. 신은 아뜩히 놀라고 두려워 살고 싶지가 않았지만,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서둘러 벼루 먹을 가져다가 삼가 다음과 같이 어리석은 견해를 갖추어 이것으로 성은의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하고 지하에 가서 성고(聖考)를 뵙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말에 아뢰기를,

"금년 농사는 곡식이 된 곳은 되었지만 땅을 묵혀 폐농된 곳이 실로 많고 밭의 경우는 전혀 수확이 없습니다. 대개 자연 조건이 자못 순조로웠어도 사람의 힘이 부쳤으므로 빈민들은 대개가 농사를 폐하고 부자들은 혹 농사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곡식이 된 곳은 모두가 가난한 자의 논이 아니어서 곡식이 익는 이 시기에 먹을 것이 부족한 가난한 자들의 상황은 봄 여름과 다르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반드시 서둘러 처리하여 진구할 계책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보존할 가망이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백성이 근심 걱정 없이 자기 전리(田里)에 안주함은 재실(災實)에 대한 판정이 억울하지 않은 데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구실아치들의 농간은 더욱 심해지는데, 답사하여 검사하는 관리들은 두루 돌아다니지 못합니다. 또한 국법에 재해를 입었다는 판정이 사실과 다른 경우 그 수령을 파직하는 예가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세력이 있는 수령에 대해서는 답사하여 검사하는 관리들이 조사해 아뢸 마음을 감히 먹지 않습니다. 또한 고을을 잘 다스린 자에게는 이로 인해 파직되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역시 전혀 캐묻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구실아치들의 농간에 맡기는 것입니다. 뇌물로 모면하는 자는 모두가 세력있고 부유한 백성들이고 억울하게 당하는 자는 모두가 못살고 잔약한 백성들입니다. 옛 현인들의 이른바 ‘우리 나라가 필시 서리들에 의해 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여기에서 더욱 징험할 수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선 수령을 파직하는 법을 바꾸고, 또 답사하여 검사하는 관리를 많이 내보내어 그 구역을 줄여주고,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한 구실아치가 주관하는 곳에 대하여 반드시 한두 곳을 추생하여 그 작간하는 것을 일체 무겁게 따지도록 한다면 아마도 꺼리는 바가 있어서 속이고 숨기는 짓을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가만히 듣건대, 조정에서 금년 부세는 기유년032) 의 전결(田結)을 기준으로 사용한다 하니, 이는 비록 예년에 비추어 보아 당연한 것이지만 올해는 보통 해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토착민의 전결이 많이 묵고 재해를 입은데다 그 묵고 재해를 입은 것이 또한 모두 가난한 하호(下戶)들입니다. 만약 기유년의 조금 잘된 결수를 금년 재해를 입은 백성에게 적용하여 세금을 거둔다면 그 부르짖고 원망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해 경술년에는 기유년의 기준[年分]을 사용함이 마땅했었는데 전 충청 감사 신 이홍연(李弘淵)이 이유를 갖추어 계청하여 그해 결수(結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고 지금까지 성덕을 칭송합니다. 만약 금년의 부역을 또 금년의 결수를 기준으로 하되 기유년에 채 받지 못한 결수는 임시로 보류하고 조금 풍작이 되기를 기다려 추가로 징수한다면 아마도 잔민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금년에 여러 가지 군보(軍保) 중 죽은 자가 매우 많습니다. 만약 보통 때와 같이 반드시 대신 정하기를 기다린 후에야 그 징포(徵布)를 면제한다면, 이웃과 족속이 결코 지탱하여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덕음을 빨리 내리시어 뭇 고을로 하여금 대신 정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그 징포를 면제하고 단지 살아남는 자에게만 징수한다면, 잔민들이 실제로 깊은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 산 자의 허실을 조사해 내는 것도 전적으로 구실아치들이 조정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흩어져 다니다 죽은 자가 매우 많아 그 허실을 조사함이 진실로 마땅하지만, 집에서 죽은 자라 하더라도 또한 검시하여 증서를 만든 조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실아치들의 속임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어사를 별도로 보내어 자세히 조사하여 만약 죽은 자를 살았다고 하거나 산 자를 죽었다고 하는 자에 대해 일체 군율로 처리한다면, 관리들은 두려워 꺼리는 바가 혹 있을 것이고 백성들은 부르짖어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도적들이 가득 차서 죽이고 빼앗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관리들은 한결같이 덮어두어서 제몸 보호만을 일삼고 어쩌다가 알리기라도 하면 좋아하지 않는 얼굴을 보입니다. 오직 자기 경내에 도적이 없다는 소리만 듣고 싶어합니다. 이 때문에 사나운 무리들은 마치 믿는 바가 있는 것처럼 눈을 부라리고 힐난조로 말을 하여 양민들이 감히 누구냐고 묻지도 못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어찌 키울 수 있겠습니까.

옛날 한 무제(漢武帝) 말년에 도적들이 부쩍 일어나 금할 수 없자 드디어 ‘침명법(沈命法)’033) 을 만들었는데, 도적이 일어나도 발각되지 않고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감추어 주어 도적들이 점점 많아졌으니, 망한 진 나라의 전철을 거의 밟을 뻔하였습니다. 대저 담을 넘거나 뚫는 좀도둑들은 도적을 다스리는 율로 본디 다스릴 수 없는 법이지만, 인물을 살상하는 경우야 어찌 내버려 두고 묻지 않겠습니까. 주자(朱子)는 일찍이 ‘환자(還上)를 중지하는 자는 유배하고 벼를 털어가는 자는 참한다.[閉糴者配 劫禾者斬]’는 여덟 자로 구황의 최선책으로 삼았습니다. 대개 부자들이 감히 환자를 중지하지 않는다면 이웃 사람들이 의지할 바가 있게 되는데도, 오히려 벼를 털어간다면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의지할 만한 부자가 없고 단지 관가에서 죽을 마련한 곳이 있을 뿐이니, 벼를 겁탈해가는 걱정은 진실로 막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체를 하는대로 맡기고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 만연되는 형세가 심히 두렵습니다.

지금 금산(錦山)의 도적들은 단지 보통 사내들이 아니고 보면 그 형세가 단순히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잡힌 자가 매우 많은데도 오히려 놀라 흩어지지 않고 감히 백주에 고발한 자를 쳐죽였습니다. 또 그 뒤에 도적떼를 만들어 사람에게 잔인한 짓을 예전처럼 하니 무슨 수를 써보기 어려운 형세를 이미 알 수 있습니다. 공초한 말에 이르기를 ‘호남·영남 사이의 큰 산 긴 계곡에다 관아의 곡식을 약탈하여 쌓아두고 산으로 다니는 포수와 승려 무리를 많아 모아 그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와 같다면 그 뜻이 작은 데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 중에 황소(黃巢)034) 나 방납(方臘)035) 같이 흉포 괴려한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옛날 인조 말년에 유탁(柳濯)의 무리가 호서에서 일어나036) 수령 감사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고, 고 상신 이시백(李時白)이 금병(禁兵)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가는 지경에 이르자 다행히 그 무리들이 수가 적고 힘이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 곧 해산하였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또 지난날과 다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백성이 배불리 먹고 편안히 거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찌 저자거리에 몰리듯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서둘러서 어루만져 안집시키고,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흔연히 소문을 듣고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체포와 주벌을 엄히 행하여 그 싹을 끊는다면 국가가 아마 유지되고 편안해질 것입니다. 또 지금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자가 무수한데도 수령과 장령들은 잡거나 쫓을 마음이 없으니 또한 상벌을 밝히시어 이러한 우환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어루만지고 안집시키는 책임은 전적으로 수령 감사에게 달려 있으니 반드시 충직하고 동정심이 많으면서 일을 소신있게 처리하며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자애로운 자여야 효과를 볼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전에 치적이 드러났던 자는 연한과 품계, 추감과 견책에 구애되지 말고 일체로 뽑아 파견하여 그가 주청하는 여러 일들을 안에서 막거나 물리치지 말도록 하고, 만약 일을 게을리하고 자기를 살찌우는 자가 있으면 일일이 엄히 따지고, 감사가 일을 제대로 살펴 수행하지 못하면 함께 죄를 받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아마도 느껴 격려되고 두려워하여 일과 공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송 효종(宋孝宗)이 일찍이 이르기를 ‘진휼의 정사는 실상을 파악하여 일찍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께서 성인의 말씀이라고 매우 칭송하였습니다. 지난번 진휼 정사는 그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한이 없고 늦어져 일에 대지 못한 것이 또 많았습니다.

몇 가지를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죽을 진설할 때 작은 고을은 수령이 직접 살펴 보았기 때문에 남발하거나 속이는 일이 혹 적었지만, 큰 읍에서 먼 외방에 나누어 진설한 경우는 그 감색(監色)이 주린 백성의 수를 허위로 불리고 그 수대로 쌀을 받아내어 자기를 살찌웠습니다. 그래서 진설한 죽은 낱알이 매우 드물었고, 게다가 양이 부족하면 물을 보탰는데, 그 죽을 먹고 오히려 죽는 것은 여기에 연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폐해입니다. 또 감사 수령이 청하는 일을 조정은 으레 늦추어 그 가부간의 결정을 모두 제때에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부를 결정해서는 이미 상황이 바뀌어 일을 맞추어낼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일찍 행하지 못한 폐해입니다. 반드시 허위로 기재하는 외방의 폐단을 통징하고 외방의 소청을 조정에서는 신속히 응해 주어야 도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린 백성이 비록 죽을 먹는다 하더라도 땅에서 노숙을 하므로 열흘이 못되어 쓰러지고 마니, 반드시 흙집을 미리 짓고 땔감을 갖추어 추위에 떠는 폐단이 없게 하여야 온전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올해는 가난한 집의 전역(田役)과 신역(身役)을 결코 전례대로 다 받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전액을 임시 감하여 나라의 쓰임이 부족하더라도 곧 여러 각사(各司)와 각아문(各衙門)에 비축된 것을 가져다 써야 합니다. 이것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은 것을 합하면 많은 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반 쓸데없는 비용을 일체 제거하고 오직 근근히 버텨간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살아 남은 백성에게 내려주는 것이 있고 나라의 쓰임도 또한 뚝 끊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단지 위로는 성상과 아래로는 여러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검약한 데 처하여 마음을 간직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이것을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옛날에는 재변을 만나면 반드시 내탕의 재물을 풀었습니다. 무릇 내탕의 재물이란 그것으로 두루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백성이 이로써 군상(君上)의 덕의(德意)를 우러러 느끼게 된다면 구덩이에 굴러 죽어도 원한이 없게 됩니다. 한번 흉년의 험한 경험을 겪고 나면 풍속이 문득 바뀝니다. 부모가 죽어도 덤덤히 곡읍할 줄을 모르며 혹 시신을 전혀 수습하지 않는 자도 있고, 혹은 끌어다 은밀한 곳에 버려두면서 술과 고기를 먹고 마시기는 흐드러지게 합니다. 혹은 부모 형제가 어떤 사람에게 피살되었는지 뻔히 알면서 그 당사자와 웃고 이야기하며 상대합니다. 부모 형제가 피살된 데에 약간의 곡절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제된 자가 어찌 차마 이러합니까. 이는 비록 흉년에 본성을 잃어 그런 것이지만, 또한 정교(政敎)가 시행되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거듭 밝혀 타이르고 뭇 읍에 반포하여 미처 장사지내지 못한 자는 장사지내고 복을 입지 못한 자는 뒤미처 복을 입게 하여 함께 다시금 시작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장사지내지 않고 복을 입지 않으면서 술과 고기를 마시고 먹는 자는 형법을 엄히 행하여 두려워할 바를 알게 합니다. 그런 뒤에야 거의 인륜이 밝혀지고 국가가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유탁(柳濯)의 변으로 보건대, 숙위(宿衛)는 결코 단촐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가 정초군(精抄軍)의 상번(上番)하는 군졸을 파하고자 한다고 신은 들었습니다. 이는 군사로써 군사를 기르는 것이어서 경비와 관계가 없으니, 의논하는 자의 말을 좇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지난해에 추수가 없었고 올 여름에 보리가 없었으니 실로 국가가 기울어져 엎어질 운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겨울 우레가 일어나니 이어지는 해가 걱정입니다. 전하께서 이전의 옛일을 죽 살펴 보시건대 오늘날과 같으면서 나라가 멸망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오늘의 형세는 흡사 큰 난리 끝에 상채기가 아물지 않고 신음이 가라앉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보호하는 방도는 반드시 숨이 끊어지려는 사람이 한 숨을 겨우 이어가는 경우처럼 해야 합니다. 베게와 자리로 편안하게 만들고 자양분으로 보양하며, 집사람들을 금하여 떠들거나 놀래키지 않도록 하며, 내외가 안정되어 그가 소생하는 것을 주시하여야 그 만분의 일의 희망을 바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하와 조신들이 급급황황하게 조석으로 강구하여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전해지는 말을 듣건대, 그렇지 못한 바가 크게 있으니 어떻게 된 까닭입니까. 해이해지거나 마구 즐기는 것은 인군에게 지극한 경계인데, 신이 듣기로는 전하께서 여느 공사(公事)에서 늘 시일을 끄는 것이 보통이고, 인명이 관계된 형옥(刑獄) 같은 일에서도 오히려 한 달이 넘도록 시일을 끌고 그 죄가 매우 경미한데 수 개월을 갇혀 있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로써 보면 그 나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성상의 몸이 편찮으시어 수작하기가 피곤하시다면, 편전에 누우시어 해당 관리를 자주 부르거나 혹은 비변사·승정원과 어찌 처결을 상의하시지 않으십니까. 궁궐에 깊이 거하면서 군신들을 접견하지 않는 것은 조고(趙高)가 이세(二世)를 그르치게 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세 때에는 비록 베개를 높이 베고 뜻을 멋대로 부리는 것을 일삼아도 조고가 오히려 아뢰기를 ‘폐하가 신 및 법을 익힌 시중과 함께 일을 기다리다가 일이 닥치면 헤아리도록 하자.’037)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뢰는 일이 오히려 오늘과 같이 적체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일은 어느 시대와 비교해야 합니까. 이런 까닭에 대소 관료가 서로 본받고 중외에서 관직을 게을리 수행합니다. 단지 고상한 이야기와 술을 즐기면서 나라의 근심과 백성의 고통은 망각의 영역에 내버려두는데, 전하께서는 비록 부지런하지 않아도 심히 해될 것이 없다고 여기시기에 금일의 해가 이와 같은 데 이르렀습니다. 경계하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신이 먼 옛날을 끌어들일 것도 없습니다. 우리 조정의 성조(聖祖)께서는 무척 추운 밤에 죄수들이 불쌍하여, 와내(臥內)로 승지를 자주 불러 그 숫자를 물으셨습니다. 승지 가 일일이 꼽아 아뢰니 내전(內殿)을 돌아보고 ‘이는 나의 보배스러운 신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열성조께서 정사를 부지런히 하시느라 처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당시 신하가 이와 같이 직임을 맡은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은 실로 사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듣기로는 일전 가례(嘉禮) 때에 헛된 비용이 엄청나 탁지(度支)에서 쓴 은화가 여러 만 냥에 이른다고 합니다. 기억하건대 예전 성고(聖考)께서 전하의 가례 때 그 절약한 것을 등록(謄錄)에 갖추어 놓았으니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나라의 빈부가 지금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농사의 흉년 풍년이 지금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시사의 안위가 또한 지금과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전하께서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도 당시의 절약은 오히려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외에서 서로 바라보며 이르기를 ‘오늘날은 반드시 감하고 또 감하여 의례만을 이룰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전하께서는 성고(聖考)께서 감하신 것 말고는 더이상 다시 감한 것이 없어서 그 소비한 양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들 합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나머지를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생령(生靈)의 기름을 짜서 궁액(宮掖)의 한때 보고 들을 거리를 공급하시지만, 자손에게 계책을 전해주어 편안케 하는 방법으로는 또 이처럼 좋지 못하였으니, 신은 남몰래 개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입과 배를 보양함이란 더욱 말단의 일이라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도 없지만, 근래에 간신이 아뢰기를 ‘인척의 신하가 생복어[生鰒]를 변방 절도사에게 사사로이 징수하여 대궐에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인척의 신하는 이 일을 두고 법석대며 스스로를 옳다고 하였지만 듣는 자들은 전혀 옳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뒤 이 일이 그쳤는지 그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듣기로는 올여름 통영(統營)에서 다시 인척의 분부로 사사로이 헌상한 것이 두 차례 있었다 합니다. 신이 들은 것이 이와 같다면 듣지 못한 것이 또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뭇 읍에 해를 끼치는 것은 놓아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그 체통을 손상시키는 것은 또 어찌하겠습니까. 옛날 성종 대왕께서 병환이 나셨을 때 의원이 ‘붕어로 고칠 수 있다.’ 하였는데, 상께서 측근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지금 바야흐로 장마가 졌으니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 염려가 있다. 어찌 먹는 것 때문에 남에게 누를 끼치겠는가.’ 하셨습니다. 또 신이 기억하건대, 옛날 무술년038) 가을에 성고(聖考)께서 편찮으실 때 조신들이 주사(廚司)에 별미가 없다고 민망해하며 경기도 읍에 웃돈[行下]을 주어 메추리를 바치게 하였고, 또 해서 지방에 웃돈을 주어 생선알을 바치게 하였더니, 성고께서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하시며 그치도록 서둘러 명하시었습니다. 이것들은 성명께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인척 신하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 충성을 행한 방법이 실로 아낙과 심부름꾼에 가까우며 진짜 충성은 아닙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임금 섬기기를 좌우에서 하고 보양하기를 일정한 방도가 있게 한다.’ 하고, 고인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부족함이 어찌 이 물건 때문이겠는가. 구체(口體)를 봉양하니 얼마나 비루한 것인가.’ 하였으니, 이는 신하된 자들이 거울로 삼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무릇 인척의 신하가 바친 것이 실제로 진어(進御)에 쓰기 위한 것은 반드시 아닐 것이고 단지 사치한 습관을 없애지 못해 굳이 먼 지방의 진기한 것을 숭상하였기 때문일 뿐이니, 신이 남몰래 한탄하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상황은 바로 크게 엎어지고 크게 무너져 어찌해 볼 수 없는 때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크게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크게 떨쳐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 거처와 음식, 부지런함과 공경 절약함을 바로 선조(宣祖)의 용만(龍灣), 인조(仁祖)의 남한(南漢) 시절과 같이 해야 합니다. 조그만한 일이라도 화합하고 민간에서 감히 소요를 일으키지 않으며 신공(臣工)을 책려하여 감히 일을 폐하지 못하게 하되, 자기 죄를 따지는 말을 자주 내리며 기왕의 잘못을 깊이 진술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백성들이 덕의(德意)의 실상을 알고, 원망 저주하여 멋대로 배반하는 마음을 감히 지니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또 인군의 직임 중 정승을 논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승을 논하여 적임자를 얻으면 어지러움을 다스릴 수 있고 망할 것을 보존시킬 수 있지만, 진실로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안정이 필시 위험해지고 융성이 필시 쇠퇴해질 것입니다. 전하와 같은 명성(明聖)으로 어찌 이것을 모르시겠습니까마는, 또한 신 같은 자를 그 사이에 충당하셨습니다. 신은 그 적임자가 결코 아니며 또 조석간에 쓰러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진용할 기회가 없고 나라 상황은 불 속에서 구하고 물 속에서 건지듯 급해질 것입니다. 모름지기 신의 직을 빨리 갈고 그 적임자를 빨리 구하여 그 지위에 놓는다면 나라의 상황이 가망있게 될 것입니다. 주자께서 일찍이 인군논상(人君論相)의 설을 가지고 그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승을 논해야 할 사람이 자기에게 맞는 자를 구할 뿐 자기를 바루는 자를 구하지 않으며, 사랑할 만한 자를 취할 뿐 두려워 할 만한 자를 취하지 않는다면, 임금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임금을 바루어야할 사람이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는 것으로 일을 삼지 않고 부합하여 뜻을 받드는 것으로 능사를 삼으며, 세상을 경영하며 사물을 주관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지 않고 자신을 용납받고 총애를 굳히는 것으로 기술을 삼는다면, 재상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자기를 바루고 두려워할 만한 자를 뽑는다면 반드시 자중하는 사람을 얻게 될 것이고, 내가 그에게 맡기는 것도 부득불 무겁게 될 것이다. 맡기는 것이 무거우면 그가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려는 뜻을 다할 것이며, 세상을 경영하고 사물을 주관하려는 그 마음을 행할 것이다. 또 곧고 우직하며 과감히 말하는 천하의 선비를 공정히 뽑아 대간을 삼고 관사를 주어 의론에 참여케 할 것이다. 내 복심이목(腹心耳目)의 임무 부여가 항상 어진 사대부에게 있고 군소배들에게 있지 않게 하며, 옳고 그름을 상벌하는 권한이 항상 낭묘(廊廟)에 있게 하고 사문(私門)에서 나오지 않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 설은 실로 인군이 정승을 논하는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이렇게 정승을 구하신다면 반드시 그 적임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또 신이 듣건대, 근일 대간이 죄가 두려워 구차히 용납되기를 일삼고 있다 합니다. 이는 전하께서 거슬려 꺾어버리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윤개(尹堦)와 윤가적(尹嘉績)이 대신을 언급하였고 그래서 대신이 불안해하였기 때문에 두 신하가 감히 재직하지 못하였으니,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옛날 제갈량(諸葛亮)이 그 참모에게 이르기를 ‘조그만 혐의를 멀리하느라 서로들 거슬려 말해주기를 어려워 한다면 손해이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나라에 충성하고 걱정하는 자들이 나의 잘못을 부지런히 공격한다면 적을 멸할 수 있고 공을 이룰 수 있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위급한 상황이 결단난 촉(蜀)나라보다 심하니, 더욱 제갈량 같은 마음을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두 신하의 말에 대해 유감이 있습니다. 주공(周公)이 노공(魯公)에게 이르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원망하게 하지 않았는가?’ 하였는데, 주자(朱子)께서 해석하기를 ‘대신이 그 적임자가 아니면 떠나보내고 그 지위에 있다면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중용(中庸)》의 ‘구경(九經)’ 중에 대신을 공경하라는[敬大臣] 훈계가 있는데, 혹자가 묻기를 ‘만약 대신으로서 현명하다면 괜찮겠지만, 혹 불행하여 어진 이를 시기하고 능력자를 질시하며 아래를 막고 위를 가로막아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루되 임금이 깨닫지 못할 경우에도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주자께서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어진 이를 높이는 것으로 우선을 삼았다면 대신의 자리에 둔 자 중에 반드시 이같은 사람이 섞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행하게 혹 실수를 하였다면 또한 빨리 그 적임자를 구하여 바꿀 뿐이다. 필시 간사한 짓을 행하여 나라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대신의 지위에 두고 우선 문서를 바치는 것으로 직임을 삼게 하는 경우가 어찌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주공의 말씀과 《중용》의 훈계를 가지고 주자께서 해석하신 글을 살펴보며, 또 주자께서 그 임금에게 아뢴 것을 가지고 살펴 보건대, 오직 인군에게 걱정할 것은 재상의 임명이 신중치 못하고 재상의 자임함이 혹 가벼운 경우입니다. 그러나 뭇 관리를 진퇴시키는 것이 재상의 직책이니, 어진 이나 재주있는 자를 버려두었으면 정관(政官)을 불러다 그 버려둔 것을 책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무슨 병통으로 여길 것이 있어 말을 하겠습니까. 만약 임금의 맡긴 것이 무거운데 대신의 책임진 것이 사사롭고 정관을 불러다 말하는 것이 또한 어진 이와 재주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 재상은 그 적임자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분명히 말하여 지척하고 그 적임자로 바꾸라고 청하지 않고 다만 아교칠을 한 듯 입을 다물고 마치 사흘된 새색시의 모습처럼 말을 할 듯하다 말을 하지 않습니까. 저들이 구차하게 용납되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논할 것도 못되지만, 능히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도 또한 이와 같으니 신은 남몰래 애석히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완벽한 것을 따져 말한 일반론입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재상과 대간이 또 다시 불안해 한다면 신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또 한 책자를 바쳤는데, 그 가운데에 있는 10여 조는 다 스스로를 탓한 것이었다. 거기에 아뢰기를,

"원로 대신을 함부로 저촉하였으며, 부마(駙馬)의 저택을 옮기고, 정초(精抄)를 설치하고, 추직(騶直)을 폐지하고, 안민창(安民倉)을 설치하고, 공상(供上)을 변통하고, 서얼(庶孽)의 벼슬길을 열어 주고, 중들을 몰아내어 환속(還俗)시키고, 동성(同性) 사이에 혼인하지 말게 하고, 사민(士民)에게서 베를 거두는 등등의 일을 청하였는데, 이는 모두 함부로 말한 잘못을 스스로 뉘우쳐도 소용이 없는 것들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정릉(貞陵)을 부묘(祔廟)할 때에 눈썹을 치켜 올리고 팔을 휘두르며 탑전에서 크게 배척하려 한 자까지 있었는데 신이 그 일을 논하는 말석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처럼 심하게 굴기까지 하였겠습니까. 또 김징(金澄)의 옥사 때에 신이 장편의 소를 지어 구하려고 하였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은 본디 흠이 많아서 여전히 비방의 꼬투리가 있는데 영남 선비들의 비방을 받은 뒤로부터 황인(黃壖)·이석복(李碩馥)·이태양(李泰陽)의 소가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천 사람이 손가락질하면 병을 앓지 않아도 죽는다고 한 말과 거의 같은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아, 오늘날의 나라 형편이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러 천지 산천의 변고와 인물의 요괴가 거듭 보이고 일어나니, 매우 놀라고 경악할 만한 것이 아닌 게 없다. 기근과 여역의 경우에는 이전에 없던 것이어서 사망한 백성이 몇천 몇만 명인지 알 수 없으니, 걱정과 두려움이 지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난번에 또 겨울 우레의 변고 때문에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사관을 곧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전유하였다. 지금 상소의 글을 보건대 나라를 위하는 은근한 뜻과 경계시키는 애틋한 정성이 글 밖에 넘친다. 나를 사랑함이 성실하고 충성스러우니 내 심히 감탄하여 마지 않는다. 또 책자를 보건대 더욱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경이 지난해 서울에 왔을 때, 생각한 것을 모두 진달하였던 것은 공연한 뜻이 아니었는데 근일에 운운한 것이 혹 이와 같다면 매우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소책(疏冊) 중에 의논하여 처리할 만한 일은 즉시 의논해 처리할 것이고 과인에게 책려한 일은 깊이 기억해 둘 것이다.

아아, 지금과 같은 시기에 내 재상을 임명함은 실로 괜한 것이 아니다. 전날에는 질병이 한창 심하여 내 굳이 청하지 못하였지만 지금은 옛 병이 나았을 법하다. 나랏일의 위태로움이 하루하루 더해가니, 경이 한결같이 고사하여 나랏일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놓아 두고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마음이 남몰래 한탄스럽다. 소위 운운한 말은 모두가 근거없는 말이니 경은 어찌 개의하는가.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되도록 속히 마음을 바꾸어 올라와서 위태로운 나라의 상황을 건지고 곤고한 생령들을 구제하여 과인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상이 뒷날 연중(筵中)에서 그 책자를 대신에게 내어 보였는데,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모두 스스로를 탓한 것입니다. 동성과 혼인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 대하여 사대부로서 누가 감히 비방하겠습니까. 아마도 그가 잘못 들은 성싶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정릉에 대한 의논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말하여 이의가 없었습니다. 연중에서 배척하려 하였다는 말은 더욱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징의 일의 경우, 상소가 도착하기 전에야 장차 구원하려고 한다는 그 사실을 누가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는 것은 본디 이이(李珥)가 주장한 의논으로서 송시열이 제창한 일이 아니었으니, 또한 어찌 욕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개 그때 의논한 일에 대해 다 비방받았다고 여겨 스스로를 탓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원소(原疏) 가운데에 정승을 논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불안하게 여겨 오랫동안 의논해 처리하지 못하다가, 이듬해 정월에 상이 비로소 그 소에 대해 대신에게 명하여 어전에서 품정(稟定)하게 하였는데 실행한 것도 있고 시행하지 않은 것도 있다.

  • [註 031] 경술년 : 1670 현종 11년.
  • [註 032]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 [註 033] 침명법(沈命法)’ : 도적이 일어났는데 발각하지 못하거나 발각하고도 잡지 못한 경우 관리들을 죽이도록 정한 법. 《사기(史記)》 권122(卷百二十二) 왕온서전(王溫舒傳).
  • [註 034] 황소(黃巢) : 당(唐)나라 말년의 반역자. 산동(山東) 조주(曹州) 사람. 한때 낙양(洛陽)을 격파하고 장안(長安)에 입성하여 대제(大齊) 정권을 수립하기까지 하였다. 《신·구당서(新舊唐書)》 황소전(黃巢傳).
  • [註 035] 방납(方臘) : 북송(北宋) 말년의 농민반란군의 우두머리. 모니교(牟尼敎)를 조직하여 군중을 모으고 성공(聖公)이라 칭하였다. 전후에 목주(睦州) 항주(杭州) 등 7주 48현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송사(宋史)》 권468(卷四百六十八) 동관전(童貫傳) 부(附) 방납(方臘).
  • [註 036] 옛날 인조 말년에 유탁(柳濯)의 무리가 호서에서 일어나 : 인조 24년(1646) 4월 유탁(柳濯)·서창(徐昌) 등이 은진(恩津)·연산(連山)·니산(尼山)에서 반역하였다가 복주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32(卷二百三十二) 직관고(職官考) 십구(十九).
  • [註 037] ‘폐하가 신 및 법을 익힌 시중과 함께 일을 기다리다가 일이 닥치면 헤아리도록 하자.’ : 《사기(史記)》 권87(卷八十七) 이사전(李斯傳)에 나오는 말이다. 환관 출신인 조고가 대신들이 조정에 들어와 바른 소리를 할까 두려워, 이세에게 말하기를 천자란 궁궐 깊이 거처하여야 존귀하게 된다고 설득하면서 둘러댄 말이다.
  • [註 038] 무술년 : 1658 효종 9년.

원문

○右議政宋時烈, 因雷變上疏, 陳病辭職, 且請還收祿俸。 且曰:

臣於去年庚戌, 病不能赴召, 而追念戊己兩年旬月之間, 妄論國事, 而其上貽公家之弊, 下致臣身之謗者, 不貲。 雖欲追悔, 其道末由, 謹具自訟之疏, 將徹冕旒之下, 適値李世直之變, 惶怖震灼, 不敢以進矣。 然其中一二事, 有關國計之得失者, 終不可不達於睿聰, 而臣病昏此極, 無計淨寫, 只以當時草本呈上, 伏乞試賜乙覽, 有所財幸焉。 抑臣受恩兩朝, 老病且死, 呻吟痛楚之中, 上念國事, 憂虞萬端, 終夜無寐, 有時起坐, 誠願一至咫尺之地, 以罄愚衷, 而不可得矣。 昨日雷霆之作, 又甚駭愕, 臣蹶然驚怖, 如不欲生。 力疾强起, 亟取筆硯, 謹具陋見如左, 以爲庶幾以此報聖恩之萬一, 而歸見聖考於地下矣。

其言曰:

今年農事, 稔處雖稔, 而陳廢處實多, 至如旱田, 則全無所收。 蓋天時頗順, 而人力甚屈, 貧民擧皆廢農, 而富者則或能穡故也。 然則其稔處, 皆非貧者之田, 故貧者則當此秋登之日, 而其乏食之狀, 無異春夏。 朝廷必須汲汲料理, 以爲賑救之策, 然後孑遺之民, 庶有保活之望矣。

又曰:

民之所以無愁怨而安其田里者, 全在於災實之不冤也。 今日吏人之弄奸, 於此尤甚, 而踏檢之官, 不能遍歷。 又國法有災傷失實, 罷其守令之例, 故其守令之稍有形勢者, 則踏檢官不敢生審覆之意。 又其善治者, 則惜其因此而罷去, 亦全然不問, 故一任吏之操弄, 其以賂免者, 皆是豪强富民, 而其冤枉者, 皆是下戶殘氓。 昔賢所謂, 我國必亡於胥吏者, 於此益可驗矣。 臣愚以爲, 姑變罷守令之法, 而又多出踏檢之官, 亦寬其限, 必使於一吏所主處, 抽覈一二栍, 其所作奸, 一切重究, 則庶幾有所忌憚, 而不敢肆其欺隱矣。

又曰:

臣竊聞朝廷今年賦稅, 俾用己酉田結。 此雖揆以年例所當然者, 然今歲則有異常年, 土田之陳災旣多, 而其所陳災者, 亦皆貧民下戶也。 如以己酉稍豐結數, 移徵賦稅於今歲被災之民, 則其所呼冤, 當如何哉? 去年庚戌, 當用己酉年分, 而前忠淸監司臣李弘淵, 具由啓請, 得用當年結數, 故民蒙實惠, 至今稱頌聖德矣。 若使今年賦役, 又用今年之結, 而己酉未輸之結, 權行倚閣, 以待稍豐, 然後追徵, 則庶幾殘民得以保存矣。

又曰:

今年諸色軍保之物故者甚多, 若如常時之必待其代定, 然後免其徵布, 則其隣族決不可支保。 必須亟下德音, 使列邑不待代定, 而除其徵布, 只徵於其見存者, 則殘民之蒙惠實深矣。 然査出死生虛實, 亦全在吏之操縱, 而今年則其流離而死者甚多, 誠宜究核其虛實, 而雖其在家死者, 亦無檢屍立案之擧, 則其吏之欺瞞, 何可勝數? 必須別遣御史, 明加詳覈, 如有以死爲生、以生爲死者, 一以軍律從事, 則官吏或有所畏忌, 而民不呼冤矣。

又曰:

盜賊遍滿, 殺掠甚衆, 而官吏一以掩護爲事, 一或告之, 則示以不悅之色, 惟欲使稱其境內無盜。 以故, 豪悍之徒, 若有所恃, 皆瞋目語難, 使良民莫敢誰何, 此習何可長哉? 昔漢 武末年, 盜賊滋起, 而不能禁, 遂作沈命法, 盜起不發覺, 上下相匿, 而盜賊寢多, 幾蹈亡秦之轍。 夫穿窬鼠狗之徒, 固不可以治盜之律治之, 至於殺傷人物者, 則何可置而不問耶? 朱夫子嘗以 "閉糶者配, 刼禾者斬" 八字, 爲救荒之善策。 蓋富人不敢閉糶, 則隣里得有所資, 而猶且刼禾, 則其罪當死故也。 今日未有富人之相資者, 而只有官家設粥之所, 則其刼禾之患, 誠有所難防。 然一切任他而不爲之所, 則其蔓延之勢, 甚可畏也。 今錦山之賊, 不但常漢而已, 則其勢不但已也。 至其就捕者甚多, 而猶不駭散, 敢於白晝, 斫殺其告者。 又於其後, 作賊殘人如舊, 其勢之難圖, 已可知矣。 其所供之言曰: "將據湖、嶺之間大山長谷, 掠奪官穀, 積於其間。" 而多引山行砲手及僧徒, 以張其勢云。 若果如此則其志不在小矣。 其中豈無桀驁如黃巢、方臘者耶? 昔在仁祖末年, 柳濯之徒, 起於湖西, 守令、監司, 蒼黃罔措, 至於故相臣李時白, 將率禁兵南下, 幸而其徒自知寡弱, 旋爲解散, 故得至無事, 不然則殆矣。 今日則又與曩時不同, 其無食將死之民, 聞其飽食而安居, 豈不從之如歸市乎? 此必急急撫綏安集, 毋使我民, 欣然有望風歆艶之心, 然後嚴行捕誅, 絶其萌芽, 則國家庶幾支安矣。 今爲虎噉殺者無數, 而守令、將領, 無意捕逐, 亦須明示賞罰, 使此患少紓矣。

又曰:

撫綏安集之責, 專在守令、監司, 必須忠恕、剛明、惻怛、慈愛者, 然後可見其成效矣。 臣愚以爲, 已前如有治績顯然者, 則勿拘其年限、品秩及推勘、眚譴, 一切差遣, 而其所奏請諸事, 勿爲從中沮却, 如有怠事肥己者, 則一一重究, 監司不能察擧者, 則與同其罪, 然後庶幾有感激嚴畏, 而趨事赴功矣。 宋 孝宗嘗謂: "賑政莫如得實, 而早爲。" 朱子極稱以爲聖人之言。 日者賑政不得其實者何限, 而緩不及事者又多。 試以少者言之, 則設粥之際, 小邑則守令親自檢看, 故濫僞或少, 而至如大邑之分設於遠外者, 則其監色虛張飢民之數, 而準受其米, 以肥其己, 而其所設之粥, 粒米甚稀, 而又不足, 則添以新水, 其食粥而猶死者, 皆坐此也。 此則不能得實之害也。 又監司、守令所請之事, 朝廷例皆稽緩, 其所可否, 皆不以時, 故及得可否, 則事機已變, 無所及矣。 此則不能早爲之害也。 必須痛懲外方虛僞之弊, 而外方所請, 朝廷又疾速應赴, 然後可以有補矣。 飢民雖或喫粥, 而露宿土處, 故不十日, 必致隕斃。 必須豫作土宇, 且具柴燎, 使無寒凍之弊, 然後可以全活矣。

又曰:

今年貧戶田役及身役, 決不可依例準徵, 雖十分權減, 而國用不足, 則當取諸各司、各衙門所儲而用之。 此等雖曰零星, 合少則可以成多, 而諸般冗費, 一切除去, 惟以僅僅支過爲心, 則殘民受賜, 而國用亦不至頓絶矣。 此則只在上自聖明, 下至庶僚, 皆以處約存心, 然後可以議此。 又古者, 遇災必發內帑之財。 夫內帑之財, 非可以遍及者, 然民以此而仰認君上之德意, 則雖顚丘壑而無所怨恨矣。 一經凶險, 風俗頓變, 其父母死而恬不知哭泣, 或有全不收屍者, 或曳而委之於隱處, 而飮酒食肉, 極其爛漫。 或明知其父母兄弟, 被殺於某人, 而與其人笑語相對。 雖其父母兄弟之被殺, 有些曲折, 然爲其子弟者, 何忍如此? 此雖出於凶歲喪性而然, 亦由政敎不擧而然也。 臣愚以爲, 自朝廷申明曉喩, 頒示列邑, 使未葬者葬之, 不服者追服, 與之更始。 然而猶有不葬、不服, 飮酒、食肉者, 則嚴行刑法, 使知所畏, 然後庶幾人倫明, 而國家有賴矣。

又曰:

以柳濯之變觀之, 則宿衛決不可單弱。 而臣竊聞, 議者欲罷精抄上番之卒云。 此則以兵養兵者, 不關經費, 議者之言, 似不可從也。

又曰:

臣竊伏念, 前歲之無秋、今夏之無麥, 實國家傾覆之運, 而今又冬雷之作, 憂在嗣歲。 殿下歷觀前古事, 豈有如今日, 而國不滅亡者乎? 今日之勢, 恰似大亂之後, 瘡痍未起、呻吟未定, 其保護之道, 必須如氣絶之人, 一息僅延者, 安之以枕席, 養之以滋味, 禁戒家人, 勿爲喧譁驚動, 而內外寧靜, 以聽其蘇完, 然後庶幾其萬一矣。 此在殿下與朝臣, 汲汲遑遑, 朝夕講究, 不容他念。 而臣竊聞於傳說, 則大有所不然者, 何也? 怠惰逸豫, 是人君之至戒, 而臣竊聞, 殿下於尋常公事, 一以淹滯爲常。 至於刑獄之事, 人命所關, 而猶且彌月留時, 或至其罪甚微, 而數月在囚云。 以此推之, 其餘可知。 若以聖體違豫, 疲於酬酢, 則胡不坐臥便殿, 頻召該官, 或與籌司、喉司, 商議處決耶? 深居禁中, 不見群臣, 此趙高之所以誤二世也。 然二世之時, 雖以高枕肆志爲事, 而趙高猶曰: "陛下與臣及侍中習法者待事, 事來有以揆之。" 云, 則其所奏之事, 尙不如今日之積滯也。 然則今日之事, 當比於何代耶? 以故, 大小相師, 中外怠官, 只以淸談啫酒爲事, 國憂民隱, 置之相忘之域。 殿下以爲, 雖不克勤, 不甚害事, 而今日之害, 至於如此, 可不戒哉? 臣不暇遠引古昔, 我朝聖祖, 於寒甚之夜, 愍念囚徒, 亟引承旨於臥內, 問其數, 承旨歷數以對, 則顧內殿曰: "此吾寶臣也。" 此則列聖之勤政, 不拘於處所與昏暮, 故當時臣下, 任職如此也。 且今日痼弊, 實在奢靡, 而臣竊聞, 日者嘉禮之時, 浮費浩大, 度支所費銀貨, 至於累萬兩。 記昔聖考於殿下嘉禮之時, 其所節省, 具在《謄錄》, 可考而知也。 殿下試思其時, 國之貧富, 與今何如; 歲之豐凶, 與今何如; 時事安危, 又與今何如, 而當時之節省, 猶且如此。 故中外之想望以爲, 今日必減之又減, 只成禮儀而已。 乃聞殿下於聖考所減之外, 復無所減, 故其所費之多, 至於如此。 以此推之, 則餘皆可知也。 殿下竭生靈之膏澤, 以供一時宮掖之耳目, 而所以貽謀燕翼者, 又如此其未善也, 臣竊慨然也。 況且口腹之養, 尤甚末節, 而不足以貽民害者。 頃者諫臣嘗言, 戚里之臣, 私徵生鰒於閫帥, 進供內庭, 則戚里之臣, 謂有是事, 而呶呶然自以爲是, 聞者殊不韙之。 然未知其後, 此事止與不止也。 竊聞, 今夏統營復因戚里分付, 私有所獻者再次云。 臣之所聞者如此, 則其所不聞, 當復有之矣。 其貽害列邑, 姑置不論, 而其傷損體統者, 當復如何也? 昔成宗大王嘗有疾, 醫云鮒魚可治。 上謂近侍曰: "今方雨潦, 捕採之人, 恐罹沒溺之患。 豈可以口腹, 累人乎?" 又臣記昔戊戌之秋, 聖考違豫, 朝臣以廚司乏味爲悶, 行下畿邑, 俾進鸙鶉, 又下海西, 俾進魚卵。 聖考以爲厲民, 而亟命止之。 此非聖明之所當法者乎? 雖以戚里言之, 其所以爲忠者, 實近於婦寺, 而非眞忠也。 《記》曰: "事君左右, 就養有方。" 古人有言: "吾君所乏, 豈此物? 致養口體, 何陋耶?" 此豈非人臣之所當監戒者乎? 夫戚里所獻, 未必眞爲進御之用, 而只緣侈習未除, 必以遠方珍異爲尙, 臣竊歎焉。 臣之愚意, 今日之勢, 正是大傾覆、大壓墜, 無可奈何之時。 殿下必須大警懼、大振作, 其居處服御, 勤勞恭儉, 正如宣祖 龍灣之歲; 仁祖 南漢之日, 而絲毫籥合, 不敢擾於民間, 策勵臣工, 罔敢廢事。 而又頻下罪己之言, 深陳旣往之失, 然後民知德意之實, 而不敢有怨咀橫叛之心矣。 臣又惟人君之職, 莫大於論相, 論相得其人, 則亂可治而亡可存, 苟不得其人, 則安必危而隆必替。 以殿下之明聖, 豈不知此, 而亦以如臣者, 苟以充之於其間, 臣決非其人。 而又將朝夕就盡, 則更無進用之日, 而國勢之急, 當如捄焚拯溺矣。 須亟遞臣職, 亟求其人, 以置其位, 則國勢其庶幾矣。 朱子嘗以人君論相之說, 進於其君曰: "當論相者, 求其適己, 而不求其正己; 取其可愛, 而不取其可畏, 則人君失其職矣。 當正君者, 不以獻可替否爲事, 而以趨和承意爲能; 不以經世宰物爲心, 而以容身固寵爲術, 則宰相失其職矣。 選之以其能正己而可畏, 則必有以得自重之人, 而吾所以任之, 不得不重。 任之旣重, 則彼得以盡其獻可替否之志, 而行其經世宰物之心。 而又公選天下直諒敢言之士, 使爲臺諫給舍, 以參議論。 使吾腹心耳目之寄, 常在於賢士大夫, 而不在於群小; 陟罰臧否之柄, 常在於廊廟, 而不出於私門。" 蓋此一說, 實人君論相之要道。 殿下試以此求之, 則必得其人矣。

又曰:

且臣竊聞, 近日臺諫畏罪, 苟容爲事, 此由於殿下咈戾摧折而然也。 尹堦、尹嘉績言及大臣, 而大臣不自安, 故二臣不敢在職, 臣竊惑焉。 昔諸葛亮謂其參佐曰: "若遠小嫌, 而難相違復, 則闕損矣。" 又曰: "諸有忠慮於國者, 勤攻吾闕, 則賊可滅, 功可成。" 今日危急之勢, 甚於弊蜀, 則尤豈可不以亮心爲心乎? 然而臣於二臣之說, 亦有憾焉。 周公謂魯公曰: "無使大臣怨乎不?" 以朱子釋之曰: "大臣非其人, 則去之; 在其位, 則不可不用。" 又《中庸》九經有敬大臣之訓, 或問: "使大臣而賢也則可, 其或不幸而有妬賢嫉能, 銜下蔽上, 以成其私, 而主不覺悟者, 亦安得以不慮耶?" 朱子曰: "不然。 能以尊賢爲先, 則其所置以爲大臣者, 必不雜以如是之人矣。 不幸而或失之, 則亦亟求其人, 易之而已, 豈有知其必能爲奸而敗國, 顧猶置之大臣之位, 姑以奉文書爲職業哉?" 今以周公之語、《中庸》之訓, 而觀朱子所釋之辭, 又以朱子所進於其君者而觀之, 則惟患人君任宰相之不重, 而宰相自任之或輕也。 然則進退百官, 乃宰相之職也。 如有遺賢滯才, 則招致政官, 而責其遺滯者, 乃其職也。 有何所病而以爲言也? 若乃君所以任之者重, 而大臣所以責任者私也, 而招致政官, 而語之者又非賢才, 則是宰相非其人也。 胡不明言直斥, 請易其人, 而顧勿口含膠漆, 似說不說, 如三日新婦貌樣也? 彼苟容而不言者, 固不足道, 所以能言之者, 乃復如此, 臣竊惜之。 然是皆責備之言, 若因此而宰相、臺諫又復不安, 則非臣之所望也。

又進一冊子, 其中十餘條, 皆引咎之言也。 有曰:

妄觸元老大臣、請移駙馬第宅, 設精抄、罷騶直, 置安民倉、變通供上, 庶孽通仕、驅僧還俗, 不娶同姓、士民收布等事, 此皆自悔妄言之失, 而無所及者。

又曰:

貞陵祔廟時, 至有揚眉奮臂, 欲大斥於榻前者, 臣若不與於其事末議, 則何至若是之甚乎? 且於金澄之獄, 謂臣將作大疏而伸之者, 臣本自多釁, 尙在謗囮之中, 而自遭嶺詆, 黃壖、李碩馥、李泰陽之疏, 相繼而起, 殆古人所謂, 千人所指, 不病而斃者也。

上答曰: "嗚呼! 今日國勢, 一至於此, 天地山川之變、人妖物怪之作, 疊見層出, 無非可駭可愕之甚者。 而至於飢饉癘疫, 前古所無, 赤子死亡, 未知其幾千萬人, 憂懼驚慘之極, 罔知攸措。 頃者又因冬雷之變, 惶怖震惕, 纔遣史官, 諭予至意矣。 今觀疏辭, 爲國懃懇之意、戒誨眷眷之誠, 溢於辭表。 愛我誠忠, 予甚感歎不已也。 又觀冊子, 尤不勝嘅嘆。 卿之往歲來在京中也, 有懷必陳者, 意非偶然。 近日云云, 如或若是, 豈非可駭之甚乎? 疏冊中可以議處事, 卽當議處, 而責勵寡躬事, 當書紳佩服焉。 噫! 當今之時, 予之拜相, 實非偶然。 前者疾患方劇, 予不固請矣。 今則昔疾宜瘳, 國事之汲汲, 日甚一日, 卿不可以一向固辭, 置國事於無可奈何之地, 而莫之顧恤也, 心竊恨歎。 所謂云云之說, 盡是無據之言, 卿何介懷? 須體至意, 從速幡然上來, 以濟岌嶪之國勢, 以救生民之顚連, 無孤寡昧之望。" 仍遣史官諭之。 上於後日筵中, 以其冊子, 出示大臣, 鄭太和曰: "此皆引咎之辭也。 不娶同姓之議, 爲士夫者, 誰敢造謗? 恐其誤聞也。" 許積曰: "貞陵之議, 萬口同辭, 無有異論。 筵中欲斥之說, 尤所未聞也。" 太和曰: "金澄事, 則上疏未到之前, 誰能臆料其將欲救解耶? 且庶孽許通, 此固李珥之論, 旣非時烈所創之事, 則亦安有罵之者乎?" 上曰: "蓋以其時所議之事, 皆謂之取謗, 而引而自咎矣。" 許積以原疏論相一款, 有所不安, 久未議處。 翌年正月, 上始以其疏, 命大臣稟定于前, 而或施或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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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25권, 현종 12년 11월 30일 丁丑 2/5 기사 / 1671년 청 강희(康熙) 10년

우의정 송시열이 우레의 변고로 상소하다

국역

우의정 송시열이 우레의 변고로 인하여 상소하였다. 병을 진달하여 사직하고 또 녹봉을 환수하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 경술년031) 에 병 때문에 부르심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돌이켜 생각건대, 무신·기유 두 해의 달포 사이에 국사를 망령되이 논하여 위로 공가에 끼친 피해와 아래로 신의 몸에 이르게 한 비방이 적지 않습니다. 비록 후회하고자 한들 미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죄를 따지는 상소를 삼가 갖추어 면류관 앞에 올리고자 하였으나, 마침 이세직(李世直)의 변을 만나 두려움에 떨며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두 가지 일은 나라 계획의 득실과 관련되는 것이 있어 끝내 성상께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이 병 때문에 극도로 혼미하여 글씨를 정사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단지 당시의 초본을 올릴 뿐이니, 여가에 한번 살펴보아 주신다면 재량하여 따를 바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이 두 조정의 은혜를 입다가 늙어 병들어 죽으니, 신음하고 쑤시는 가운데에서도 위로 나랏일을 생각하느라 걱정이 만 갈래입니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때로는 일어나 앉기도 하였습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한번 지척에서 어리석은 마음을 다 쏟아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 또 매우 놀랐습니다. 신은 아뜩히 놀라고 두려워 살고 싶지가 않았지만,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서둘러 벼루 먹을 가져다가 삼가 다음과 같이 어리석은 견해를 갖추어 이것으로 성은의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하고 지하에 가서 성고(聖考)를 뵙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말에 아뢰기를,

"금년 농사는 곡식이 된 곳은 되었지만 땅을 묵혀 폐농된 곳이 실로 많고 밭의 경우는 전혀 수확이 없습니다. 대개 자연 조건이 자못 순조로웠어도 사람의 힘이 부쳤으므로 빈민들은 대개가 농사를 폐하고 부자들은 혹 농사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곡식이 된 곳은 모두가 가난한 자의 논이 아니어서 곡식이 익는 이 시기에 먹을 것이 부족한 가난한 자들의 상황은 봄 여름과 다르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반드시 서둘러 처리하여 진구할 계책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보존할 가망이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백성이 근심 걱정 없이 자기 전리(田里)에 안주함은 재실(災實)에 대한 판정이 억울하지 않은 데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구실아치들의 농간은 더욱 심해지는데, 답사하여 검사하는 관리들은 두루 돌아다니지 못합니다. 또한 국법에 재해를 입었다는 판정이 사실과 다른 경우 그 수령을 파직하는 예가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세력이 있는 수령에 대해서는 답사하여 검사하는 관리들이 조사해 아뢸 마음을 감히 먹지 않습니다. 또한 고을을 잘 다스린 자에게는 이로 인해 파직되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역시 전혀 캐묻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구실아치들의 농간에 맡기는 것입니다. 뇌물로 모면하는 자는 모두가 세력있고 부유한 백성들이고 억울하게 당하는 자는 모두가 못살고 잔약한 백성들입니다. 옛 현인들의 이른바 ‘우리 나라가 필시 서리들에 의해 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여기에서 더욱 징험할 수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선 수령을 파직하는 법을 바꾸고, 또 답사하여 검사하는 관리를 많이 내보내어 그 구역을 줄여주고,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한 구실아치가 주관하는 곳에 대하여 반드시 한두 곳을 추생하여 그 작간하는 것을 일체 무겁게 따지도록 한다면 아마도 꺼리는 바가 있어서 속이고 숨기는 짓을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가만히 듣건대, 조정에서 금년 부세는 기유년032) 의 전결(田結)을 기준으로 사용한다 하니, 이는 비록 예년에 비추어 보아 당연한 것이지만 올해는 보통 해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토착민의 전결이 많이 묵고 재해를 입은데다 그 묵고 재해를 입은 것이 또한 모두 가난한 하호(下戶)들입니다. 만약 기유년의 조금 잘된 결수를 금년 재해를 입은 백성에게 적용하여 세금을 거둔다면 그 부르짖고 원망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해 경술년에는 기유년의 기준[年分]을 사용함이 마땅했었는데 전 충청 감사 신 이홍연(李弘淵)이 이유를 갖추어 계청하여 그해 결수(結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고 지금까지 성덕을 칭송합니다. 만약 금년의 부역을 또 금년의 결수를 기준으로 하되 기유년에 채 받지 못한 결수는 임시로 보류하고 조금 풍작이 되기를 기다려 추가로 징수한다면 아마도 잔민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금년에 여러 가지 군보(軍保) 중 죽은 자가 매우 많습니다. 만약 보통 때와 같이 반드시 대신 정하기를 기다린 후에야 그 징포(徵布)를 면제한다면, 이웃과 족속이 결코 지탱하여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덕음을 빨리 내리시어 뭇 고을로 하여금 대신 정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그 징포를 면제하고 단지 살아남는 자에게만 징수한다면, 잔민들이 실제로 깊은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 산 자의 허실을 조사해 내는 것도 전적으로 구실아치들이 조정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흩어져 다니다 죽은 자가 매우 많아 그 허실을 조사함이 진실로 마땅하지만, 집에서 죽은 자라 하더라도 또한 검시하여 증서를 만든 조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실아치들의 속임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어사를 별도로 보내어 자세히 조사하여 만약 죽은 자를 살았다고 하거나 산 자를 죽었다고 하는 자에 대해 일체 군율로 처리한다면, 관리들은 두려워 꺼리는 바가 혹 있을 것이고 백성들은 부르짖어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도적들이 가득 차서 죽이고 빼앗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관리들은 한결같이 덮어두어서 제몸 보호만을 일삼고 어쩌다가 알리기라도 하면 좋아하지 않는 얼굴을 보입니다. 오직 자기 경내에 도적이 없다는 소리만 듣고 싶어합니다. 이 때문에 사나운 무리들은 마치 믿는 바가 있는 것처럼 눈을 부라리고 힐난조로 말을 하여 양민들이 감히 누구냐고 묻지도 못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어찌 키울 수 있겠습니까.

옛날 한 무제(漢武帝) 말년에 도적들이 부쩍 일어나 금할 수 없자 드디어 ‘침명법(沈命法)’033) 을 만들었는데, 도적이 일어나도 발각되지 않고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감추어 주어 도적들이 점점 많아졌으니, 망한 진 나라의 전철을 거의 밟을 뻔하였습니다. 대저 담을 넘거나 뚫는 좀도둑들은 도적을 다스리는 율로 본디 다스릴 수 없는 법이지만, 인물을 살상하는 경우야 어찌 내버려 두고 묻지 않겠습니까. 주자(朱子)는 일찍이 ‘환자(還上)를 중지하는 자는 유배하고 벼를 털어가는 자는 참한다.[閉糴者配 劫禾者斬]’는 여덟 자로 구황의 최선책으로 삼았습니다. 대개 부자들이 감히 환자를 중지하지 않는다면 이웃 사람들이 의지할 바가 있게 되는데도, 오히려 벼를 털어간다면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의지할 만한 부자가 없고 단지 관가에서 죽을 마련한 곳이 있을 뿐이니, 벼를 겁탈해가는 걱정은 진실로 막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체를 하는대로 맡기고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 만연되는 형세가 심히 두렵습니다.

지금 금산(錦山)의 도적들은 단지 보통 사내들이 아니고 보면 그 형세가 단순히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잡힌 자가 매우 많은데도 오히려 놀라 흩어지지 않고 감히 백주에 고발한 자를 쳐죽였습니다. 또 그 뒤에 도적떼를 만들어 사람에게 잔인한 짓을 예전처럼 하니 무슨 수를 써보기 어려운 형세를 이미 알 수 있습니다. 공초한 말에 이르기를 ‘호남·영남 사이의 큰 산 긴 계곡에다 관아의 곡식을 약탈하여 쌓아두고 산으로 다니는 포수와 승려 무리를 많아 모아 그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와 같다면 그 뜻이 작은 데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 중에 황소(黃巢)034) 나 방납(方臘)035) 같이 흉포 괴려한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옛날 인조 말년에 유탁(柳濯)의 무리가 호서에서 일어나036) 수령 감사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고, 고 상신 이시백(李時白)이 금병(禁兵)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가는 지경에 이르자 다행히 그 무리들이 수가 적고 힘이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 곧 해산하였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또 지난날과 다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백성이 배불리 먹고 편안히 거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찌 저자거리에 몰리듯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서둘러서 어루만져 안집시키고,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흔연히 소문을 듣고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체포와 주벌을 엄히 행하여 그 싹을 끊는다면 국가가 아마 유지되고 편안해질 것입니다. 또 지금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자가 무수한데도 수령과 장령들은 잡거나 쫓을 마음이 없으니 또한 상벌을 밝히시어 이러한 우환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어루만지고 안집시키는 책임은 전적으로 수령 감사에게 달려 있으니 반드시 충직하고 동정심이 많으면서 일을 소신있게 처리하며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자애로운 자여야 효과를 볼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전에 치적이 드러났던 자는 연한과 품계, 추감과 견책에 구애되지 말고 일체로 뽑아 파견하여 그가 주청하는 여러 일들을 안에서 막거나 물리치지 말도록 하고, 만약 일을 게을리하고 자기를 살찌우는 자가 있으면 일일이 엄히 따지고, 감사가 일을 제대로 살펴 수행하지 못하면 함께 죄를 받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아마도 느껴 격려되고 두려워하여 일과 공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송 효종(宋孝宗)이 일찍이 이르기를 ‘진휼의 정사는 실상을 파악하여 일찍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께서 성인의 말씀이라고 매우 칭송하였습니다. 지난번 진휼 정사는 그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한이 없고 늦어져 일에 대지 못한 것이 또 많았습니다.

몇 가지를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죽을 진설할 때 작은 고을은 수령이 직접 살펴 보았기 때문에 남발하거나 속이는 일이 혹 적었지만, 큰 읍에서 먼 외방에 나누어 진설한 경우는 그 감색(監色)이 주린 백성의 수를 허위로 불리고 그 수대로 쌀을 받아내어 자기를 살찌웠습니다. 그래서 진설한 죽은 낱알이 매우 드물었고, 게다가 양이 부족하면 물을 보탰는데, 그 죽을 먹고 오히려 죽는 것은 여기에 연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폐해입니다. 또 감사 수령이 청하는 일을 조정은 으레 늦추어 그 가부간의 결정을 모두 제때에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부를 결정해서는 이미 상황이 바뀌어 일을 맞추어낼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일찍 행하지 못한 폐해입니다. 반드시 허위로 기재하는 외방의 폐단을 통징하고 외방의 소청을 조정에서는 신속히 응해 주어야 도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린 백성이 비록 죽을 먹는다 하더라도 땅에서 노숙을 하므로 열흘이 못되어 쓰러지고 마니, 반드시 흙집을 미리 짓고 땔감을 갖추어 추위에 떠는 폐단이 없게 하여야 온전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올해는 가난한 집의 전역(田役)과 신역(身役)을 결코 전례대로 다 받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전액을 임시 감하여 나라의 쓰임이 부족하더라도 곧 여러 각사(各司)와 각아문(各衙門)에 비축된 것을 가져다 써야 합니다. 이것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은 것을 합하면 많은 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반 쓸데없는 비용을 일체 제거하고 오직 근근히 버텨간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살아 남은 백성에게 내려주는 것이 있고 나라의 쓰임도 또한 뚝 끊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단지 위로는 성상과 아래로는 여러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검약한 데 처하여 마음을 간직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이것을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옛날에는 재변을 만나면 반드시 내탕의 재물을 풀었습니다. 무릇 내탕의 재물이란 그것으로 두루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백성이 이로써 군상(君上)의 덕의(德意)를 우러러 느끼게 된다면 구덩이에 굴러 죽어도 원한이 없게 됩니다. 한번 흉년의 험한 경험을 겪고 나면 풍속이 문득 바뀝니다. 부모가 죽어도 덤덤히 곡읍할 줄을 모르며 혹 시신을 전혀 수습하지 않는 자도 있고, 혹은 끌어다 은밀한 곳에 버려두면서 술과 고기를 먹고 마시기는 흐드러지게 합니다. 혹은 부모 형제가 어떤 사람에게 피살되었는지 뻔히 알면서 그 당사자와 웃고 이야기하며 상대합니다. 부모 형제가 피살된 데에 약간의 곡절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제된 자가 어찌 차마 이러합니까. 이는 비록 흉년에 본성을 잃어 그런 것이지만, 또한 정교(政敎)가 시행되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거듭 밝혀 타이르고 뭇 읍에 반포하여 미처 장사지내지 못한 자는 장사지내고 복을 입지 못한 자는 뒤미처 복을 입게 하여 함께 다시금 시작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장사지내지 않고 복을 입지 않으면서 술과 고기를 마시고 먹는 자는 형법을 엄히 행하여 두려워할 바를 알게 합니다. 그런 뒤에야 거의 인륜이 밝혀지고 국가가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유탁(柳濯)의 변으로 보건대, 숙위(宿衛)는 결코 단촐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가 정초군(精抄軍)의 상번(上番)하는 군졸을 파하고자 한다고 신은 들었습니다. 이는 군사로써 군사를 기르는 것이어서 경비와 관계가 없으니, 의논하는 자의 말을 좇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지난해에 추수가 없었고 올 여름에 보리가 없었으니 실로 국가가 기울어져 엎어질 운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겨울 우레가 일어나니 이어지는 해가 걱정입니다. 전하께서 이전의 옛일을 죽 살펴 보시건대 오늘날과 같으면서 나라가 멸망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오늘의 형세는 흡사 큰 난리 끝에 상채기가 아물지 않고 신음이 가라앉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보호하는 방도는 반드시 숨이 끊어지려는 사람이 한 숨을 겨우 이어가는 경우처럼 해야 합니다. 베게와 자리로 편안하게 만들고 자양분으로 보양하며, 집사람들을 금하여 떠들거나 놀래키지 않도록 하며, 내외가 안정되어 그가 소생하는 것을 주시하여야 그 만분의 일의 희망을 바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하와 조신들이 급급황황하게 조석으로 강구하여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전해지는 말을 듣건대, 그렇지 못한 바가 크게 있으니 어떻게 된 까닭입니까. 해이해지거나 마구 즐기는 것은 인군에게 지극한 경계인데, 신이 듣기로는 전하께서 여느 공사(公事)에서 늘 시일을 끄는 것이 보통이고, 인명이 관계된 형옥(刑獄) 같은 일에서도 오히려 한 달이 넘도록 시일을 끌고 그 죄가 매우 경미한데 수 개월을 갇혀 있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로써 보면 그 나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성상의 몸이 편찮으시어 수작하기가 피곤하시다면, 편전에 누우시어 해당 관리를 자주 부르거나 혹은 비변사·승정원과 어찌 처결을 상의하시지 않으십니까. 궁궐에 깊이 거하면서 군신들을 접견하지 않는 것은 조고(趙高)가 이세(二世)를 그르치게 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세 때에는 비록 베개를 높이 베고 뜻을 멋대로 부리는 것을 일삼아도 조고가 오히려 아뢰기를 ‘폐하가 신 및 법을 익힌 시중과 함께 일을 기다리다가 일이 닥치면 헤아리도록 하자.’037)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뢰는 일이 오히려 오늘과 같이 적체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일은 어느 시대와 비교해야 합니까. 이런 까닭에 대소 관료가 서로 본받고 중외에서 관직을 게을리 수행합니다. 단지 고상한 이야기와 술을 즐기면서 나라의 근심과 백성의 고통은 망각의 영역에 내버려두는데, 전하께서는 비록 부지런하지 않아도 심히 해될 것이 없다고 여기시기에 금일의 해가 이와 같은 데 이르렀습니다. 경계하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신이 먼 옛날을 끌어들일 것도 없습니다. 우리 조정의 성조(聖祖)께서는 무척 추운 밤에 죄수들이 불쌍하여, 와내(臥內)로 승지를 자주 불러 그 숫자를 물으셨습니다. 승지 가 일일이 꼽아 아뢰니 내전(內殿)을 돌아보고 ‘이는 나의 보배스러운 신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열성조께서 정사를 부지런히 하시느라 처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당시 신하가 이와 같이 직임을 맡은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은 실로 사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듣기로는 일전 가례(嘉禮) 때에 헛된 비용이 엄청나 탁지(度支)에서 쓴 은화가 여러 만 냥에 이른다고 합니다. 기억하건대 예전 성고(聖考)께서 전하의 가례 때 그 절약한 것을 등록(謄錄)에 갖추어 놓았으니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나라의 빈부가 지금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농사의 흉년 풍년이 지금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시사의 안위가 또한 지금과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전하께서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도 당시의 절약은 오히려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외에서 서로 바라보며 이르기를 ‘오늘날은 반드시 감하고 또 감하여 의례만을 이룰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전하께서는 성고(聖考)께서 감하신 것 말고는 더이상 다시 감한 것이 없어서 그 소비한 양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들 합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나머지를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생령(生靈)의 기름을 짜서 궁액(宮掖)의 한때 보고 들을 거리를 공급하시지만, 자손에게 계책을 전해주어 편안케 하는 방법으로는 또 이처럼 좋지 못하였으니, 신은 남몰래 개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입과 배를 보양함이란 더욱 말단의 일이라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도 없지만, 근래에 간신이 아뢰기를 ‘인척의 신하가 생복어[生鰒]를 변방 절도사에게 사사로이 징수하여 대궐에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인척의 신하는 이 일을 두고 법석대며 스스로를 옳다고 하였지만 듣는 자들은 전혀 옳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뒤 이 일이 그쳤는지 그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듣기로는 올여름 통영(統營)에서 다시 인척의 분부로 사사로이 헌상한 것이 두 차례 있었다 합니다. 신이 들은 것이 이와 같다면 듣지 못한 것이 또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뭇 읍에 해를 끼치는 것은 놓아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그 체통을 손상시키는 것은 또 어찌하겠습니까. 옛날 성종 대왕께서 병환이 나셨을 때 의원이 ‘붕어로 고칠 수 있다.’ 하였는데, 상께서 측근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지금 바야흐로 장마가 졌으니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 염려가 있다. 어찌 먹는 것 때문에 남에게 누를 끼치겠는가.’ 하셨습니다. 또 신이 기억하건대, 옛날 무술년038) 가을에 성고(聖考)께서 편찮으실 때 조신들이 주사(廚司)에 별미가 없다고 민망해하며 경기도 읍에 웃돈[行下]을 주어 메추리를 바치게 하였고, 또 해서 지방에 웃돈을 주어 생선알을 바치게 하였더니, 성고께서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하시며 그치도록 서둘러 명하시었습니다. 이것들은 성명께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인척 신하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 충성을 행한 방법이 실로 아낙과 심부름꾼에 가까우며 진짜 충성은 아닙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임금 섬기기를 좌우에서 하고 보양하기를 일정한 방도가 있게 한다.’ 하고, 고인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부족함이 어찌 이 물건 때문이겠는가. 구체(口體)를 봉양하니 얼마나 비루한 것인가.’ 하였으니, 이는 신하된 자들이 거울로 삼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무릇 인척의 신하가 바친 것이 실제로 진어(進御)에 쓰기 위한 것은 반드시 아닐 것이고 단지 사치한 습관을 없애지 못해 굳이 먼 지방의 진기한 것을 숭상하였기 때문일 뿐이니, 신이 남몰래 한탄하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상황은 바로 크게 엎어지고 크게 무너져 어찌해 볼 수 없는 때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크게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크게 떨쳐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 거처와 음식, 부지런함과 공경 절약함을 바로 선조(宣祖)의 용만(龍灣), 인조(仁祖)의 남한(南漢) 시절과 같이 해야 합니다. 조그만한 일이라도 화합하고 민간에서 감히 소요를 일으키지 않으며 신공(臣工)을 책려하여 감히 일을 폐하지 못하게 하되, 자기 죄를 따지는 말을 자주 내리며 기왕의 잘못을 깊이 진술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백성들이 덕의(德意)의 실상을 알고, 원망 저주하여 멋대로 배반하는 마음을 감히 지니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또 인군의 직임 중 정승을 논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승을 논하여 적임자를 얻으면 어지러움을 다스릴 수 있고 망할 것을 보존시킬 수 있지만, 진실로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안정이 필시 위험해지고 융성이 필시 쇠퇴해질 것입니다. 전하와 같은 명성(明聖)으로 어찌 이것을 모르시겠습니까마는, 또한 신 같은 자를 그 사이에 충당하셨습니다. 신은 그 적임자가 결코 아니며 또 조석간에 쓰러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진용할 기회가 없고 나라 상황은 불 속에서 구하고 물 속에서 건지듯 급해질 것입니다. 모름지기 신의 직을 빨리 갈고 그 적임자를 빨리 구하여 그 지위에 놓는다면 나라의 상황이 가망있게 될 것입니다. 주자께서 일찍이 인군논상(人君論相)의 설을 가지고 그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승을 논해야 할 사람이 자기에게 맞는 자를 구할 뿐 자기를 바루는 자를 구하지 않으며, 사랑할 만한 자를 취할 뿐 두려워 할 만한 자를 취하지 않는다면, 임금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임금을 바루어야할 사람이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는 것으로 일을 삼지 않고 부합하여 뜻을 받드는 것으로 능사를 삼으며, 세상을 경영하며 사물을 주관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지 않고 자신을 용납받고 총애를 굳히는 것으로 기술을 삼는다면, 재상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자기를 바루고 두려워할 만한 자를 뽑는다면 반드시 자중하는 사람을 얻게 될 것이고, 내가 그에게 맡기는 것도 부득불 무겁게 될 것이다. 맡기는 것이 무거우면 그가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려는 뜻을 다할 것이며, 세상을 경영하고 사물을 주관하려는 그 마음을 행할 것이다. 또 곧고 우직하며 과감히 말하는 천하의 선비를 공정히 뽑아 대간을 삼고 관사를 주어 의론에 참여케 할 것이다. 내 복심이목(腹心耳目)의 임무 부여가 항상 어진 사대부에게 있고 군소배들에게 있지 않게 하며, 옳고 그름을 상벌하는 권한이 항상 낭묘(廊廟)에 있게 하고 사문(私門)에서 나오지 않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 설은 실로 인군이 정승을 논하는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이렇게 정승을 구하신다면 반드시 그 적임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또 신이 듣건대, 근일 대간이 죄가 두려워 구차히 용납되기를 일삼고 있다 합니다. 이는 전하께서 거슬려 꺾어버리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윤개(尹堦)와 윤가적(尹嘉績)이 대신을 언급하였고 그래서 대신이 불안해하였기 때문에 두 신하가 감히 재직하지 못하였으니,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옛날 제갈량(諸葛亮)이 그 참모에게 이르기를 ‘조그만 혐의를 멀리하느라 서로들 거슬려 말해주기를 어려워 한다면 손해이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나라에 충성하고 걱정하는 자들이 나의 잘못을 부지런히 공격한다면 적을 멸할 수 있고 공을 이룰 수 있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위급한 상황이 결단난 촉(蜀)나라보다 심하니, 더욱 제갈량 같은 마음을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두 신하의 말에 대해 유감이 있습니다. 주공(周公)이 노공(魯公)에게 이르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원망하게 하지 않았는가?’ 하였는데, 주자(朱子)께서 해석하기를 ‘대신이 그 적임자가 아니면 떠나보내고 그 지위에 있다면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중용(中庸)》의 ‘구경(九經)’ 중에 대신을 공경하라는[敬大臣] 훈계가 있는데, 혹자가 묻기를 ‘만약 대신으로서 현명하다면 괜찮겠지만, 혹 불행하여 어진 이를 시기하고 능력자를 질시하며 아래를 막고 위를 가로막아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루되 임금이 깨닫지 못할 경우에도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주자께서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어진 이를 높이는 것으로 우선을 삼았다면 대신의 자리에 둔 자 중에 반드시 이같은 사람이 섞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행하게 혹 실수를 하였다면 또한 빨리 그 적임자를 구하여 바꿀 뿐이다. 필시 간사한 짓을 행하여 나라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대신의 지위에 두고 우선 문서를 바치는 것으로 직임을 삼게 하는 경우가 어찌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주공의 말씀과 《중용》의 훈계를 가지고 주자께서 해석하신 글을 살펴보며, 또 주자께서 그 임금에게 아뢴 것을 가지고 살펴 보건대, 오직 인군에게 걱정할 것은 재상의 임명이 신중치 못하고 재상의 자임함이 혹 가벼운 경우입니다. 그러나 뭇 관리를 진퇴시키는 것이 재상의 직책이니, 어진 이나 재주있는 자를 버려두었으면 정관(政官)을 불러다 그 버려둔 것을 책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무슨 병통으로 여길 것이 있어 말을 하겠습니까. 만약 임금의 맡긴 것이 무거운데 대신의 책임진 것이 사사롭고 정관을 불러다 말하는 것이 또한 어진 이와 재주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 재상은 그 적임자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분명히 말하여 지척하고 그 적임자로 바꾸라고 청하지 않고 다만 아교칠을 한 듯 입을 다물고 마치 사흘된 새색시의 모습처럼 말을 할 듯하다 말을 하지 않습니까. 저들이 구차하게 용납되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논할 것도 못되지만, 능히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도 또한 이와 같으니 신은 남몰래 애석히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완벽한 것을 따져 말한 일반론입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재상과 대간이 또 다시 불안해 한다면 신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또 한 책자를 바쳤는데, 그 가운데에 있는 10여 조는 다 스스로를 탓한 것이었다. 거기에 아뢰기를,

"원로 대신을 함부로 저촉하였으며, 부마(駙馬)의 저택을 옮기고, 정초(精抄)를 설치하고, 추직(騶直)을 폐지하고, 안민창(安民倉)을 설치하고, 공상(供上)을 변통하고, 서얼(庶孽)의 벼슬길을 열어 주고, 중들을 몰아내어 환속(還俗)시키고, 동성(同性) 사이에 혼인하지 말게 하고, 사민(士民)에게서 베를 거두는 등등의 일을 청하였는데, 이는 모두 함부로 말한 잘못을 스스로 뉘우쳐도 소용이 없는 것들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정릉(貞陵)을 부묘(祔廟)할 때에 눈썹을 치켜 올리고 팔을 휘두르며 탑전에서 크게 배척하려 한 자까지 있었는데 신이 그 일을 논하는 말석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처럼 심하게 굴기까지 하였겠습니까. 또 김징(金澄)의 옥사 때에 신이 장편의 소를 지어 구하려고 하였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은 본디 흠이 많아서 여전히 비방의 꼬투리가 있는데 영남 선비들의 비방을 받은 뒤로부터 황인(黃壖)·이석복(李碩馥)·이태양(李泰陽)의 소가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천 사람이 손가락질하면 병을 앓지 않아도 죽는다고 한 말과 거의 같은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아, 오늘날의 나라 형편이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러 천지 산천의 변고와 인물의 요괴가 거듭 보이고 일어나니, 매우 놀라고 경악할 만한 것이 아닌 게 없다. 기근과 여역의 경우에는 이전에 없던 것이어서 사망한 백성이 몇천 몇만 명인지 알 수 없으니, 걱정과 두려움이 지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난번에 또 겨울 우레의 변고 때문에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사관을 곧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전유하였다. 지금 상소의 글을 보건대 나라를 위하는 은근한 뜻과 경계시키는 애틋한 정성이 글 밖에 넘친다. 나를 사랑함이 성실하고 충성스러우니 내 심히 감탄하여 마지 않는다. 또 책자를 보건대 더욱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경이 지난해 서울에 왔을 때, 생각한 것을 모두 진달하였던 것은 공연한 뜻이 아니었는데 근일에 운운한 것이 혹 이와 같다면 매우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소책(疏冊) 중에 의논하여 처리할 만한 일은 즉시 의논해 처리할 것이고 과인에게 책려한 일은 깊이 기억해 둘 것이다.

아아, 지금과 같은 시기에 내 재상을 임명함은 실로 괜한 것이 아니다. 전날에는 질병이 한창 심하여 내 굳이 청하지 못하였지만 지금은 옛 병이 나았을 법하다. 나랏일의 위태로움이 하루하루 더해가니, 경이 한결같이 고사하여 나랏일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놓아 두고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마음이 남몰래 한탄스럽다. 소위 운운한 말은 모두가 근거없는 말이니 경은 어찌 개의하는가.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되도록 속히 마음을 바꾸어 올라와서 위태로운 나라의 상황을 건지고 곤고한 생령들을 구제하여 과인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상이 뒷날 연중(筵中)에서 그 책자를 대신에게 내어 보였는데,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모두 스스로를 탓한 것입니다. 동성과 혼인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 대하여 사대부로서 누가 감히 비방하겠습니까. 아마도 그가 잘못 들은 성싶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정릉에 대한 의논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말하여 이의가 없었습니다. 연중에서 배척하려 하였다는 말은 더욱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징의 일의 경우, 상소가 도착하기 전에야 장차 구원하려고 한다는 그 사실을 누가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는 것은 본디 이이(李珥)가 주장한 의논으로서 송시열이 제창한 일이 아니었으니, 또한 어찌 욕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개 그때 의논한 일에 대해 다 비방받았다고 여겨 스스로를 탓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원소(原疏) 가운데에 정승을 논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불안하게 여겨 오랫동안 의논해 처리하지 못하다가, 이듬해 정월에 상이 비로소 그 소에 대해 대신에게 명하여 어전에서 품정(稟定)하게 하였는데 실행한 것도 있고 시행하지 않은 것도 있다.

  • [註 031] 경술년 : 1670 현종 11년.
  • [註 032]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 [註 033] 침명법(沈命法)’ : 도적이 일어났는데 발각하지 못하거나 발각하고도 잡지 못한 경우 관리들을 죽이도록 정한 법. 《사기(史記)》 권122(卷百二十二) 왕온서전(王溫舒傳).
  • [註 034] 황소(黃巢) : 당(唐)나라 말년의 반역자. 산동(山東) 조주(曹州) 사람. 한때 낙양(洛陽)을 격파하고 장안(長安)에 입성하여 대제(大齊) 정권을 수립하기까지 하였다. 《신·구당서(新舊唐書)》 황소전(黃巢傳).
  • [註 035] 방납(方臘) : 북송(北宋) 말년의 농민반란군의 우두머리. 모니교(牟尼敎)를 조직하여 군중을 모으고 성공(聖公)이라 칭하였다. 전후에 목주(睦州) 항주(杭州) 등 7주 48현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송사(宋史)》 권468(卷四百六十八) 동관전(童貫傳) 부(附) 방납(方臘).
  • [註 036] 옛날 인조 말년에 유탁(柳濯)의 무리가 호서에서 일어나 : 인조 24년(1646) 4월 유탁(柳濯)·서창(徐昌) 등이 은진(恩津)·연산(連山)·니산(尼山)에서 반역하였다가 복주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32(卷二百三十二) 직관고(職官考) 십구(十九).
  • [註 037] ‘폐하가 신 및 법을 익힌 시중과 함께 일을 기다리다가 일이 닥치면 헤아리도록 하자.’ : 《사기(史記)》 권87(卷八十七) 이사전(李斯傳)에 나오는 말이다. 환관 출신인 조고가 대신들이 조정에 들어와 바른 소리를 할까 두려워, 이세에게 말하기를 천자란 궁궐 깊이 거처하여야 존귀하게 된다고 설득하면서 둘러댄 말이다.
  • [註 038] 무술년 : 1658 효종 9년.

원문

○右議政宋時烈, 因雷變上疏, 陳病辭職, 且請還收祿俸。 且曰:

臣於去年庚戌, 病不能赴召, 而追念戊己兩年旬月之間, 妄論國事, 而其上貽公家之弊, 下致臣身之謗者, 不貲。 雖欲追悔, 其道末由, 謹具自訟之疏, 將徹冕旒之下, 適値李世直之變, 惶怖震灼, 不敢以進矣。 然其中一二事, 有關國計之得失者, 終不可不達於睿聰, 而臣病昏此極, 無計淨寫, 只以當時草本呈上, 伏乞試賜乙覽, 有所財幸焉。 抑臣受恩兩朝, 老病且死, 呻吟痛楚之中, 上念國事, 憂虞萬端, 終夜無寐, 有時起坐, 誠願一至咫尺之地, 以罄愚衷, 而不可得矣。 昨日雷霆之作, 又甚駭愕, 臣蹶然驚怖, 如不欲生。 力疾强起, 亟取筆硯, 謹具陋見如左, 以爲庶幾以此報聖恩之萬一, 而歸見聖考於地下矣。

其言曰:

今年農事, 稔處雖稔, 而陳廢處實多, 至如旱田, 則全無所收。 蓋天時頗順, 而人力甚屈, 貧民擧皆廢農, 而富者則或能穡故也。 然則其稔處, 皆非貧者之田, 故貧者則當此秋登之日, 而其乏食之狀, 無異春夏。 朝廷必須汲汲料理, 以爲賑救之策, 然後孑遺之民, 庶有保活之望矣。

又曰:

民之所以無愁怨而安其田里者, 全在於災實之不冤也。 今日吏人之弄奸, 於此尤甚, 而踏檢之官, 不能遍歷。 又國法有災傷失實, 罷其守令之例, 故其守令之稍有形勢者, 則踏檢官不敢生審覆之意。 又其善治者, 則惜其因此而罷去, 亦全然不問, 故一任吏之操弄, 其以賂免者, 皆是豪强富民, 而其冤枉者, 皆是下戶殘氓。 昔賢所謂, 我國必亡於胥吏者, 於此益可驗矣。 臣愚以爲, 姑變罷守令之法, 而又多出踏檢之官, 亦寬其限, 必使於一吏所主處, 抽覈一二栍, 其所作奸, 一切重究, 則庶幾有所忌憚, 而不敢肆其欺隱矣。

又曰:

臣竊聞朝廷今年賦稅, 俾用己酉田結。 此雖揆以年例所當然者, 然今歲則有異常年, 土田之陳災旣多, 而其所陳災者, 亦皆貧民下戶也。 如以己酉稍豐結數, 移徵賦稅於今歲被災之民, 則其所呼冤, 當如何哉? 去年庚戌, 當用己酉年分, 而前忠淸監司臣李弘淵, 具由啓請, 得用當年結數, 故民蒙實惠, 至今稱頌聖德矣。 若使今年賦役, 又用今年之結, 而己酉未輸之結, 權行倚閣, 以待稍豐, 然後追徵, 則庶幾殘民得以保存矣。

又曰:

今年諸色軍保之物故者甚多, 若如常時之必待其代定, 然後免其徵布, 則其隣族決不可支保。 必須亟下德音, 使列邑不待代定, 而除其徵布, 只徵於其見存者, 則殘民之蒙惠實深矣。 然査出死生虛實, 亦全在吏之操縱, 而今年則其流離而死者甚多, 誠宜究核其虛實, 而雖其在家死者, 亦無檢屍立案之擧, 則其吏之欺瞞, 何可勝數? 必須別遣御史, 明加詳覈, 如有以死爲生、以生爲死者, 一以軍律從事, 則官吏或有所畏忌, 而民不呼冤矣。

又曰:

盜賊遍滿, 殺掠甚衆, 而官吏一以掩護爲事, 一或告之, 則示以不悅之色, 惟欲使稱其境內無盜。 以故, 豪悍之徒, 若有所恃, 皆瞋目語難, 使良民莫敢誰何, 此習何可長哉? 昔漢 武末年, 盜賊滋起, 而不能禁, 遂作沈命法, 盜起不發覺, 上下相匿, 而盜賊寢多, 幾蹈亡秦之轍。 夫穿窬鼠狗之徒, 固不可以治盜之律治之, 至於殺傷人物者, 則何可置而不問耶? 朱夫子嘗以 "閉糶者配, 刼禾者斬" 八字, 爲救荒之善策。 蓋富人不敢閉糶, 則隣里得有所資, 而猶且刼禾, 則其罪當死故也。 今日未有富人之相資者, 而只有官家設粥之所, 則其刼禾之患, 誠有所難防。 然一切任他而不爲之所, 則其蔓延之勢, 甚可畏也。 今錦山之賊, 不但常漢而已, 則其勢不但已也。 至其就捕者甚多, 而猶不駭散, 敢於白晝, 斫殺其告者。 又於其後, 作賊殘人如舊, 其勢之難圖, 已可知矣。 其所供之言曰: "將據湖、嶺之間大山長谷, 掠奪官穀, 積於其間。" 而多引山行砲手及僧徒, 以張其勢云。 若果如此則其志不在小矣。 其中豈無桀驁如黃巢、方臘者耶? 昔在仁祖末年, 柳濯之徒, 起於湖西, 守令、監司, 蒼黃罔措, 至於故相臣李時白, 將率禁兵南下, 幸而其徒自知寡弱, 旋爲解散, 故得至無事, 不然則殆矣。 今日則又與曩時不同, 其無食將死之民, 聞其飽食而安居, 豈不從之如歸市乎? 此必急急撫綏安集, 毋使我民, 欣然有望風歆艶之心, 然後嚴行捕誅, 絶其萌芽, 則國家庶幾支安矣。 今爲虎噉殺者無數, 而守令、將領, 無意捕逐, 亦須明示賞罰, 使此患少紓矣。

又曰:

撫綏安集之責, 專在守令、監司, 必須忠恕、剛明、惻怛、慈愛者, 然後可見其成效矣。 臣愚以爲, 已前如有治績顯然者, 則勿拘其年限、品秩及推勘、眚譴, 一切差遣, 而其所奏請諸事, 勿爲從中沮却, 如有怠事肥己者, 則一一重究, 監司不能察擧者, 則與同其罪, 然後庶幾有感激嚴畏, 而趨事赴功矣。 宋 孝宗嘗謂: "賑政莫如得實, 而早爲。" 朱子極稱以爲聖人之言。 日者賑政不得其實者何限, 而緩不及事者又多。 試以少者言之, 則設粥之際, 小邑則守令親自檢看, 故濫僞或少, 而至如大邑之分設於遠外者, 則其監色虛張飢民之數, 而準受其米, 以肥其己, 而其所設之粥, 粒米甚稀, 而又不足, 則添以新水, 其食粥而猶死者, 皆坐此也。 此則不能得實之害也。 又監司、守令所請之事, 朝廷例皆稽緩, 其所可否, 皆不以時, 故及得可否, 則事機已變, 無所及矣。 此則不能早爲之害也。 必須痛懲外方虛僞之弊, 而外方所請, 朝廷又疾速應赴, 然後可以有補矣。 飢民雖或喫粥, 而露宿土處, 故不十日, 必致隕斃。 必須豫作土宇, 且具柴燎, 使無寒凍之弊, 然後可以全活矣。

又曰:

今年貧戶田役及身役, 決不可依例準徵, 雖十分權減, 而國用不足, 則當取諸各司、各衙門所儲而用之。 此等雖曰零星, 合少則可以成多, 而諸般冗費, 一切除去, 惟以僅僅支過爲心, 則殘民受賜, 而國用亦不至頓絶矣。 此則只在上自聖明, 下至庶僚, 皆以處約存心, 然後可以議此。 又古者, 遇災必發內帑之財。 夫內帑之財, 非可以遍及者, 然民以此而仰認君上之德意, 則雖顚丘壑而無所怨恨矣。 一經凶險, 風俗頓變, 其父母死而恬不知哭泣, 或有全不收屍者, 或曳而委之於隱處, 而飮酒食肉, 極其爛漫。 或明知其父母兄弟, 被殺於某人, 而與其人笑語相對。 雖其父母兄弟之被殺, 有些曲折, 然爲其子弟者, 何忍如此? 此雖出於凶歲喪性而然, 亦由政敎不擧而然也。 臣愚以爲, 自朝廷申明曉喩, 頒示列邑, 使未葬者葬之, 不服者追服, 與之更始。 然而猶有不葬、不服, 飮酒、食肉者, 則嚴行刑法, 使知所畏, 然後庶幾人倫明, 而國家有賴矣。

又曰:

以柳濯之變觀之, 則宿衛決不可單弱。 而臣竊聞, 議者欲罷精抄上番之卒云。 此則以兵養兵者, 不關經費, 議者之言, 似不可從也。

又曰:

臣竊伏念, 前歲之無秋、今夏之無麥, 實國家傾覆之運, 而今又冬雷之作, 憂在嗣歲。 殿下歷觀前古事, 豈有如今日, 而國不滅亡者乎? 今日之勢, 恰似大亂之後, 瘡痍未起、呻吟未定, 其保護之道, 必須如氣絶之人, 一息僅延者, 安之以枕席, 養之以滋味, 禁戒家人, 勿爲喧譁驚動, 而內外寧靜, 以聽其蘇完, 然後庶幾其萬一矣。 此在殿下與朝臣, 汲汲遑遑, 朝夕講究, 不容他念。 而臣竊聞於傳說, 則大有所不然者, 何也? 怠惰逸豫, 是人君之至戒, 而臣竊聞, 殿下於尋常公事, 一以淹滯爲常。 至於刑獄之事, 人命所關, 而猶且彌月留時, 或至其罪甚微, 而數月在囚云。 以此推之, 其餘可知。 若以聖體違豫, 疲於酬酢, 則胡不坐臥便殿, 頻召該官, 或與籌司、喉司, 商議處決耶? 深居禁中, 不見群臣, 此趙高之所以誤二世也。 然二世之時, 雖以高枕肆志爲事, 而趙高猶曰: "陛下與臣及侍中習法者待事, 事來有以揆之。" 云, 則其所奏之事, 尙不如今日之積滯也。 然則今日之事, 當比於何代耶? 以故, 大小相師, 中外怠官, 只以淸談啫酒爲事, 國憂民隱, 置之相忘之域。 殿下以爲, 雖不克勤, 不甚害事, 而今日之害, 至於如此, 可不戒哉? 臣不暇遠引古昔, 我朝聖祖, 於寒甚之夜, 愍念囚徒, 亟引承旨於臥內, 問其數, 承旨歷數以對, 則顧內殿曰: "此吾寶臣也。" 此則列聖之勤政, 不拘於處所與昏暮, 故當時臣下, 任職如此也。 且今日痼弊, 實在奢靡, 而臣竊聞, 日者嘉禮之時, 浮費浩大, 度支所費銀貨, 至於累萬兩。 記昔聖考於殿下嘉禮之時, 其所節省, 具在《謄錄》, 可考而知也。 殿下試思其時, 國之貧富, 與今何如; 歲之豐凶, 與今何如; 時事安危, 又與今何如, 而當時之節省, 猶且如此。 故中外之想望以爲, 今日必減之又減, 只成禮儀而已。 乃聞殿下於聖考所減之外, 復無所減, 故其所費之多, 至於如此。 以此推之, 則餘皆可知也。 殿下竭生靈之膏澤, 以供一時宮掖之耳目, 而所以貽謀燕翼者, 又如此其未善也, 臣竊慨然也。 況且口腹之養, 尤甚末節, 而不足以貽民害者。 頃者諫臣嘗言, 戚里之臣, 私徵生鰒於閫帥, 進供內庭, 則戚里之臣, 謂有是事, 而呶呶然自以爲是, 聞者殊不韙之。 然未知其後, 此事止與不止也。 竊聞, 今夏統營復因戚里分付, 私有所獻者再次云。 臣之所聞者如此, 則其所不聞, 當復有之矣。 其貽害列邑, 姑置不論, 而其傷損體統者, 當復如何也? 昔成宗大王嘗有疾, 醫云鮒魚可治。 上謂近侍曰: "今方雨潦, 捕採之人, 恐罹沒溺之患。 豈可以口腹, 累人乎?" 又臣記昔戊戌之秋, 聖考違豫, 朝臣以廚司乏味爲悶, 行下畿邑, 俾進鸙鶉, 又下海西, 俾進魚卵。 聖考以爲厲民, 而亟命止之。 此非聖明之所當法者乎? 雖以戚里言之, 其所以爲忠者, 實近於婦寺, 而非眞忠也。 《記》曰: "事君左右, 就養有方。" 古人有言: "吾君所乏, 豈此物? 致養口體, 何陋耶?" 此豈非人臣之所當監戒者乎? 夫戚里所獻, 未必眞爲進御之用, 而只緣侈習未除, 必以遠方珍異爲尙, 臣竊歎焉。 臣之愚意, 今日之勢, 正是大傾覆、大壓墜, 無可奈何之時。 殿下必須大警懼、大振作, 其居處服御, 勤勞恭儉, 正如宣祖 龍灣之歲; 仁祖 南漢之日, 而絲毫籥合, 不敢擾於民間, 策勵臣工, 罔敢廢事。 而又頻下罪己之言, 深陳旣往之失, 然後民知德意之實, 而不敢有怨咀橫叛之心矣。 臣又惟人君之職, 莫大於論相, 論相得其人, 則亂可治而亡可存, 苟不得其人, 則安必危而隆必替。 以殿下之明聖, 豈不知此, 而亦以如臣者, 苟以充之於其間, 臣決非其人。 而又將朝夕就盡, 則更無進用之日, 而國勢之急, 當如捄焚拯溺矣。 須亟遞臣職, 亟求其人, 以置其位, 則國勢其庶幾矣。 朱子嘗以人君論相之說, 進於其君曰: "當論相者, 求其適己, 而不求其正己; 取其可愛, 而不取其可畏, 則人君失其職矣。 當正君者, 不以獻可替否爲事, 而以趨和承意爲能; 不以經世宰物爲心, 而以容身固寵爲術, 則宰相失其職矣。 選之以其能正己而可畏, 則必有以得自重之人, 而吾所以任之, 不得不重。 任之旣重, 則彼得以盡其獻可替否之志, 而行其經世宰物之心。 而又公選天下直諒敢言之士, 使爲臺諫給舍, 以參議論。 使吾腹心耳目之寄, 常在於賢士大夫, 而不在於群小; 陟罰臧否之柄, 常在於廊廟, 而不出於私門。" 蓋此一說, 實人君論相之要道。 殿下試以此求之, 則必得其人矣。

又曰:

且臣竊聞, 近日臺諫畏罪, 苟容爲事, 此由於殿下咈戾摧折而然也。 尹堦、尹嘉績言及大臣, 而大臣不自安, 故二臣不敢在職, 臣竊惑焉。 昔諸葛亮謂其參佐曰: "若遠小嫌, 而難相違復, 則闕損矣。" 又曰: "諸有忠慮於國者, 勤攻吾闕, 則賊可滅, 功可成。" 今日危急之勢, 甚於弊蜀, 則尤豈可不以亮心爲心乎? 然而臣於二臣之說, 亦有憾焉。 周公謂魯公曰: "無使大臣怨乎不?" 以朱子釋之曰: "大臣非其人, 則去之; 在其位, 則不可不用。" 又《中庸》九經有敬大臣之訓, 或問: "使大臣而賢也則可, 其或不幸而有妬賢嫉能, 銜下蔽上, 以成其私, 而主不覺悟者, 亦安得以不慮耶?" 朱子曰: "不然。 能以尊賢爲先, 則其所置以爲大臣者, 必不雜以如是之人矣。 不幸而或失之, 則亦亟求其人, 易之而已, 豈有知其必能爲奸而敗國, 顧猶置之大臣之位, 姑以奉文書爲職業哉?" 今以周公之語、《中庸》之訓, 而觀朱子所釋之辭, 又以朱子所進於其君者而觀之, 則惟患人君任宰相之不重, 而宰相自任之或輕也。 然則進退百官, 乃宰相之職也。 如有遺賢滯才, 則招致政官, 而責其遺滯者, 乃其職也。 有何所病而以爲言也? 若乃君所以任之者重, 而大臣所以責任者私也, 而招致政官, 而語之者又非賢才, 則是宰相非其人也。 胡不明言直斥, 請易其人, 而顧勿口含膠漆, 似說不說, 如三日新婦貌樣也? 彼苟容而不言者, 固不足道, 所以能言之者, 乃復如此, 臣竊惜之。 然是皆責備之言, 若因此而宰相、臺諫又復不安, 則非臣之所望也。

又進一冊子, 其中十餘條, 皆引咎之言也。 有曰:

妄觸元老大臣、請移駙馬第宅, 設精抄、罷騶直, 置安民倉、變通供上, 庶孽通仕、驅僧還俗, 不娶同姓、士民收布等事, 此皆自悔妄言之失, 而無所及者。

又曰:

貞陵祔廟時, 至有揚眉奮臂, 欲大斥於榻前者, 臣若不與於其事末議, 則何至若是之甚乎? 且於金澄之獄, 謂臣將作大疏而伸之者, 臣本自多釁, 尙在謗囮之中, 而自遭嶺詆, 黃壖、李碩馥、李泰陽之疏, 相繼而起, 殆古人所謂, 千人所指, 不病而斃者也。

上答曰: "嗚呼! 今日國勢, 一至於此, 天地山川之變、人妖物怪之作, 疊見層出, 無非可駭可愕之甚者。 而至於飢饉癘疫, 前古所無, 赤子死亡, 未知其幾千萬人, 憂懼驚慘之極, 罔知攸措。 頃者又因冬雷之變, 惶怖震惕, 纔遣史官, 諭予至意矣。 今觀疏辭, 爲國懃懇之意、戒誨眷眷之誠, 溢於辭表。 愛我誠忠, 予甚感歎不已也。 又觀冊子, 尤不勝嘅嘆。 卿之往歲來在京中也, 有懷必陳者, 意非偶然。 近日云云, 如或若是, 豈非可駭之甚乎? 疏冊中可以議處事, 卽當議處, 而責勵寡躬事, 當書紳佩服焉。 噫! 當今之時, 予之拜相, 實非偶然。 前者疾患方劇, 予不固請矣。 今則昔疾宜瘳, 國事之汲汲, 日甚一日, 卿不可以一向固辭, 置國事於無可奈何之地, 而莫之顧恤也, 心竊恨歎。 所謂云云之說, 盡是無據之言, 卿何介懷? 須體至意, 從速幡然上來, 以濟岌嶪之國勢, 以救生民之顚連, 無孤寡昧之望。" 仍遣史官諭之。 上於後日筵中, 以其冊子, 出示大臣, 鄭太和曰: "此皆引咎之辭也。 不娶同姓之議, 爲士夫者, 誰敢造謗? 恐其誤聞也。" 許積曰: "貞陵之議, 萬口同辭, 無有異論。 筵中欲斥之說, 尤所未聞也。" 太和曰: "金澄事, 則上疏未到之前, 誰能臆料其將欲救解耶? 且庶孽許通, 此固李珥之論, 旣非時烈所創之事, 則亦安有罵之者乎?" 上曰: "蓋以其時所議之事, 皆謂之取謗, 而引而自咎矣。" 許積以原疏論相一款, 有所不安, 久未議處。 翌年正月, 上始以其疏, 命大臣稟定于前, 而或施或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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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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