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86권, 선조 30년 3월 25일 乙卯 5/5 기사 /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주문사 정기원의 서장
국역
주문사(奏聞使) 정기원(鄭期遠)의 서장(書狀)에,
"신은 이달 13일에 무사히 돌아와 강을 건넜습니다. 신이 지난달 19일 칠가령(七家嶺)에 도착하여 서반(序班) 허홍(許洪)을 통하여 들으니, 정왜 대장(征倭大將)에 마귀(麻貴)가 이미 점하(點下)079) 되었고, 석성(石星)은 이미 병부 상서(兵部尙書)에서 체직(遞職)되었으며, 그 후임으로 다섯 사람의 이름을 적어 의천(擬薦)하였으나 아직 점하되지 않았기 때문에 호부 상서(戶部尙書) 양준민(楊俊民)이 병부의 일을 임시 대행(代行)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24일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하여 주사(主事) 양시현(楊時顯)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임(原任)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이 요동(遼東) 병마(兵馬) 3천을 거느리고서 먼저 출발하고, 오유충(吳惟忠)이 남병(南兵) 3천 8백 명을 거느리고 나올 것이며, 대병(大兵)도 계속 조발(調發)될 것이고, 등주(登州)·내주(萊州)의 수병(水兵)도 현재 배를 만들고 있으니 뒤따라 나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27일 신이 연산(連山)의 도중(途中)에 유격(遊擊) 섭상(葉鱨)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광녕순무(廣寧巡撫) 이화룡(李化龍)에게 들으니, 양원이 요동병(遼東兵) 3천을 거느리고서 먼저 출발하고 오유충이 절병(浙兵)080) 4천을 거느리고서 뒤이어 출발하며, 참장(參將) 계금(季金)이 배마다 군사 30명씩을 태운 2백 척(隻)의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4월 초에 조선 평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에 대해 모두 이미 성지(聖旨)를 받들었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달 9일에 신이 요동에 도착하여 들으니, 양원이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신들은 우려를 금할 수 없어 10일 이른 아침에 양원을 만나보려고 하였는데, 양원이 무학(武學)의 지과루(止戈樓) 밑에 가서 점병(點兵)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신들이 가서 성명(姓名)을 통하자 양원은 신들을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보니 양원은 군사들로 하여금 일일이 2백 보(步) 밖에서 말을 달리게 하여 치돌(馳突)을 잘하는지의 여부를 사열(査閱)하고 또 활을 당기게 하여 그 비력(臂力)을 시험한 뒤에 선발(選拔)하고, 능력이 없는 자는 물리쳤습니다.
신들이 오랫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양원이 또 그 하인을 시켜 신들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조용하지가 못하니 나의 집에서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오후 늦게서야 양원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기에 신들이 그의 집으로 갔더니 양원이 나와서 접견하였습니다. 신들이 이해룡(李海龍)·황윤공(黃允恭)을 시켜 ‘우리 나라가 오늘이 있도록 보존된 것은 모두 노야(老爺)의 공이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노야께서 또 우리 나라를 구원하러 가신다 하니 실로 천행(天幸)이다.’고 말을 전하게 하였더니, 양원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들 나라에 가서 평양을 공격할 때 공이 있었던 것은 그대 나라에서도 아는 바일 것이다. 풍찬 노숙(風餐露宿)하고 기갈(飢渴)을 참아 가며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워 구사 일생하였으나, 끝내 사람들의 기해(忌害)를 받아 벼슬이 떨어져서 집에 있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의식이 넉넉하여 편안히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금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다시 그대 나라로 가라 하니 매우 마음이 괴롭다.’고 하는 말을 이해룡 등이 신들에게 말했습니다.
신들이 이해룡 등을 시켜 답하기를 ‘노야의 성대한 공을 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감대(感戴)하고 있다. 노야께서 우리 나라의 일로 인하여 허다한 고생을 하신 것을 우리 나라가 어찌 모르겠는가. 지금 노야께서 다시 우리 나라를 구원한다 하니 이는 우리 나라 인민(人民)이 재생(再生)하는 날이다.’ 하였더니, 양원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서는 이 제독(李提督)이 있는 줄만 알고 내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 한 말을 이해룡 등이 통역해주기에 신 등이 이해룡을 시켜 답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노야의 공을 잊지 못하여 평양에 노야의 생사(生祠)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하고, 또 신 등이 이해룡 등을 시켜 말하기를 ‘왜적이 바야흐로 준동하여 우리 나라의 위망(危亡)이 조석에 박두하였는데 노야께서 언제 출발하실지를 알 수 없으니 매우 걱정이 된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양원이 말하기를 ‘지금 병마를 조선(調選)하고 있으니 열흘 안으로 출발하여 4월 5∼6일 사이에 평양에 당도할 것이다.’ 하기에 신들이 또 청하기를 ‘왜적이 이미 오래 전부터 국경(國境)을 압박(壓迫)하고 있으면서 시살(厮殺)을 감행하려고 하니, 만약 노야의 행차(行次)가 하루라도 늦어진다면 우리 나라의 패망을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노야께서 속히 행차하시어 성세(聲勢)를 펼친다면 우리 나라의 잔병(殘兵)들도 격려될 것이다.’고 하였더니, 양원이 말하기를 ‘군마(軍馬)의 조선이 끝나는 대로 즉시 출발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내가 먼저 출발하고 오유충(吳惟忠)도 뒤따라 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또 묻기를 ‘오 유격(吳遊擊)이 거느린 군사는 몇 명이나 되는가?’ 하였더니, 양원이 답하기를 ‘오 유격이 거느린 군사는 남병(南兵) 3천 8백 명이고 내가 거느린 군사는 요병(遼兵) 3천 3백여 명이다. 그대 나라에는 도강(渡江)할 곳이 많으니 선척(船隻)과 부교(浮橋)를 미리 준비하도록 하라. 양 포정(楊布政)도 그대 나라에 갈 것인데 아마도 오 유격과 동시에 갈 것 같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배사(拜謝)하고 물러나와서 양 총병(楊總兵)의 하인을 통하여 들으니, 총병이 이달 28일 출발한다고 하였습니다. 11일 정왜 군량(征倭軍糧)의 은자(銀子) 4수레가 요동성 안으로 수송되어 왔다는 것을 신들이 들어 알았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양 총병이 요병을 거느리고 먼저 출발하여 오고 오 유격의 절병(浙兵)과 계금(季金)의 주사(舟師)도 뒤이어 출발하여 온다 하니, 일로(一路)의 양추(糧芻)를 이미 준비하도록 하기는 하였지만 다시 신칙하고, 도강할 곳에 선척을 만들어 배치해 두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원문
○奏聞使鄭期遠書狀:
臣本月十三日, 無事還越江。 臣於前月十九日到七家嶺, 因序班許洪先聞, 征倭大將麻貴, 已爲點下, 石星已遞兵部尙書, 其代五員名擬薦, 而時未點下, 戶部尙書楊俊民, 權行兵部事云云。 二十四日到山海關, 見主事楊時顯, 則言: "原任副總兵楊元, 率遼東兵馬三千, 爲先發行, 吳惟忠領南兵三千八百出來, 大兵亦陸續調發, 登、萊水兵, 時方造船, 當隨後出來云云。" 二十七日, 臣於連山途中, 逢遊擊葉鱨, 則言: "因廣寧巡撫李化龍聞, 楊元領遼東兵三千先發, 吳惟忠領浙兵四千繼發, 參將季金領舟師二百隻, 每船載軍三十, 四月初, 約會于朝鮮 平壤地, 皆已奉聖旨云云。" 本月初九日, 臣到遼東, 聞楊元時未發行云, 臣等不勝悶慮。 初十日早朝, 將往見楊元, 聞楊元方往武學止戈樓下點兵, 臣等進往通名, 則楊元令待候于外, 臣等見楊元, 令軍士一一於二百步外馳馬, 閱其善馳突, 又令彎弓, 試其臂力簡選, 不能者退之。 臣等久待于外, 楊元又令其下人, 言于臣等曰: "此處似不從容, 可於俺家相見" 云。 日晩, 楊元始爲還家, 臣等進往其家, 則楊元出接臣等, 令李海龍、黃允恭傳語曰: "小邦保有今日, 都是老爺之功。 今聞老爺領兵, 又往救小邦, 實是天幸。" 楊元曰: "我往爾國, 攻平壤之時, 我之有功, 爾國之所知也。 風霜雨露, 多受飢渴, 親冒矢石, 十生九死, 畢竟爲人所忌害, 落職在家。 衣食饒足, 度日安穩, 今朝廷敎我再往, 爾國十分煩惱。" 海龍等復于臣等, 臣等令海龍等答曰: "老爺之盛功, 小邦至今感戴。 老爺以小邦之故, 許多辛苦之狀, 小邦豈不知之? 今逢老爺, 再救小邦, 是小邦人民再生之日也。" 楊元曰: "爾國只知有李提督, 不知有我。" 李海龍復于臣等, 臣等令海龍答曰: "寧有是理? 老爺之功, 刻骨難忘, 至設老爺生祠於平壤矣。" 臣等又令李海龍等言曰: "倭賊方動, 小邦之危亡, 迫在朝夕。 不審老爺何時發行? 不勝悶迫。" 楊元曰: "時方調選兵馬, 不出旬日發行, 四月初五六日間, 當過平壤。" 臣等又請曰: "倭賊壓境已久, 將行厮殺, 老爺之行, 若緩一日, 則小邦之亡, 恐未及救也。 必須老爺速行, 聲勢可張, 小邦殘兵, 亦可激厲。" 楊元曰: "軍馬調畢, 卽當發行, 不須憂慮。 我先發行, 吳惟忠亦當繼往。" 臣等又問曰: "吳遊擊所領幾何?" 楊元曰: "遊擊所領南兵三千八百餘名, 我所領遼兵三千三百餘名。 爾國地方, 多有渡江處, 船隻浮橋, 宜令預備。 楊布政亦當往爾國, 此行, 想與吳遊擊同時云云。’ 臣等拜謝而退。 因楊總兵下人聞之, 總兵欲於是月二十八日發行云云。 十一日征倭軍糧銀子四車子, 輸來遼東城內, 臣等聞知事。
啓下備邊司。 回啓: "楊總兵領遼兵, 先爲發行, 吳惟忠領浙兵, 季金領舟師繼發, 一路糧芻, 已令措備, 更爲申飭, 渡江處船隻, 預爲造排爲當。" 啓依允。
선조 30년 (1597) 3월 25일
선조실록86권, 선조 30년 3월 25일 乙卯 5/5 기사 /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주문사 정기원의 서장
국역
주문사(奏聞使) 정기원(鄭期遠)의 서장(書狀)에,
"신은 이달 13일에 무사히 돌아와 강을 건넜습니다. 신이 지난달 19일 칠가령(七家嶺)에 도착하여 서반(序班) 허홍(許洪)을 통하여 들으니, 정왜 대장(征倭大將)에 마귀(麻貴)가 이미 점하(點下)079) 되었고, 석성(石星)은 이미 병부 상서(兵部尙書)에서 체직(遞職)되었으며, 그 후임으로 다섯 사람의 이름을 적어 의천(擬薦)하였으나 아직 점하되지 않았기 때문에 호부 상서(戶部尙書) 양준민(楊俊民)이 병부의 일을 임시 대행(代行)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24일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하여 주사(主事) 양시현(楊時顯)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임(原任)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이 요동(遼東) 병마(兵馬) 3천을 거느리고서 먼저 출발하고, 오유충(吳惟忠)이 남병(南兵) 3천 8백 명을 거느리고 나올 것이며, 대병(大兵)도 계속 조발(調發)될 것이고, 등주(登州)·내주(萊州)의 수병(水兵)도 현재 배를 만들고 있으니 뒤따라 나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27일 신이 연산(連山)의 도중(途中)에 유격(遊擊) 섭상(葉鱨)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광녕순무(廣寧巡撫) 이화룡(李化龍)에게 들으니, 양원이 요동병(遼東兵) 3천을 거느리고서 먼저 출발하고 오유충이 절병(浙兵)080) 4천을 거느리고서 뒤이어 출발하며, 참장(參將) 계금(季金)이 배마다 군사 30명씩을 태운 2백 척(隻)의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4월 초에 조선 평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에 대해 모두 이미 성지(聖旨)를 받들었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달 9일에 신이 요동에 도착하여 들으니, 양원이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신들은 우려를 금할 수 없어 10일 이른 아침에 양원을 만나보려고 하였는데, 양원이 무학(武學)의 지과루(止戈樓) 밑에 가서 점병(點兵)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신들이 가서 성명(姓名)을 통하자 양원은 신들을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보니 양원은 군사들로 하여금 일일이 2백 보(步) 밖에서 말을 달리게 하여 치돌(馳突)을 잘하는지의 여부를 사열(査閱)하고 또 활을 당기게 하여 그 비력(臂力)을 시험한 뒤에 선발(選拔)하고, 능력이 없는 자는 물리쳤습니다.
신들이 오랫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양원이 또 그 하인을 시켜 신들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조용하지가 못하니 나의 집에서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오후 늦게서야 양원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기에 신들이 그의 집으로 갔더니 양원이 나와서 접견하였습니다. 신들이 이해룡(李海龍)·황윤공(黃允恭)을 시켜 ‘우리 나라가 오늘이 있도록 보존된 것은 모두 노야(老爺)의 공이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노야께서 또 우리 나라를 구원하러 가신다 하니 실로 천행(天幸)이다.’고 말을 전하게 하였더니, 양원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들 나라에 가서 평양을 공격할 때 공이 있었던 것은 그대 나라에서도 아는 바일 것이다. 풍찬 노숙(風餐露宿)하고 기갈(飢渴)을 참아 가며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워 구사 일생하였으나, 끝내 사람들의 기해(忌害)를 받아 벼슬이 떨어져서 집에 있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의식이 넉넉하여 편안히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금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다시 그대 나라로 가라 하니 매우 마음이 괴롭다.’고 하는 말을 이해룡 등이 신들에게 말했습니다.
신들이 이해룡 등을 시켜 답하기를 ‘노야의 성대한 공을 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감대(感戴)하고 있다. 노야께서 우리 나라의 일로 인하여 허다한 고생을 하신 것을 우리 나라가 어찌 모르겠는가. 지금 노야께서 다시 우리 나라를 구원한다 하니 이는 우리 나라 인민(人民)이 재생(再生)하는 날이다.’ 하였더니, 양원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서는 이 제독(李提督)이 있는 줄만 알고 내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 한 말을 이해룡 등이 통역해주기에 신 등이 이해룡을 시켜 답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노야의 공을 잊지 못하여 평양에 노야의 생사(生祠)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하고, 또 신 등이 이해룡 등을 시켜 말하기를 ‘왜적이 바야흐로 준동하여 우리 나라의 위망(危亡)이 조석에 박두하였는데 노야께서 언제 출발하실지를 알 수 없으니 매우 걱정이 된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양원이 말하기를 ‘지금 병마를 조선(調選)하고 있으니 열흘 안으로 출발하여 4월 5∼6일 사이에 평양에 당도할 것이다.’ 하기에 신들이 또 청하기를 ‘왜적이 이미 오래 전부터 국경(國境)을 압박(壓迫)하고 있으면서 시살(厮殺)을 감행하려고 하니, 만약 노야의 행차(行次)가 하루라도 늦어진다면 우리 나라의 패망을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노야께서 속히 행차하시어 성세(聲勢)를 펼친다면 우리 나라의 잔병(殘兵)들도 격려될 것이다.’고 하였더니, 양원이 말하기를 ‘군마(軍馬)의 조선이 끝나는 대로 즉시 출발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내가 먼저 출발하고 오유충(吳惟忠)도 뒤따라 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또 묻기를 ‘오 유격(吳遊擊)이 거느린 군사는 몇 명이나 되는가?’ 하였더니, 양원이 답하기를 ‘오 유격이 거느린 군사는 남병(南兵) 3천 8백 명이고 내가 거느린 군사는 요병(遼兵) 3천 3백여 명이다. 그대 나라에는 도강(渡江)할 곳이 많으니 선척(船隻)과 부교(浮橋)를 미리 준비하도록 하라. 양 포정(楊布政)도 그대 나라에 갈 것인데 아마도 오 유격과 동시에 갈 것 같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배사(拜謝)하고 물러나와서 양 총병(楊總兵)의 하인을 통하여 들으니, 총병이 이달 28일 출발한다고 하였습니다. 11일 정왜 군량(征倭軍糧)의 은자(銀子) 4수레가 요동성 안으로 수송되어 왔다는 것을 신들이 들어 알았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양 총병이 요병을 거느리고 먼저 출발하여 오고 오 유격의 절병(浙兵)과 계금(季金)의 주사(舟師)도 뒤이어 출발하여 온다 하니, 일로(一路)의 양추(糧芻)를 이미 준비하도록 하기는 하였지만 다시 신칙하고, 도강할 곳에 선척을 만들어 배치해 두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원문
○奏聞使鄭期遠書狀:
臣本月十三日, 無事還越江。 臣於前月十九日到七家嶺, 因序班許洪先聞, 征倭大將麻貴, 已爲點下, 石星已遞兵部尙書, 其代五員名擬薦, 而時未點下, 戶部尙書楊俊民, 權行兵部事云云。 二十四日到山海關, 見主事楊時顯, 則言: "原任副總兵楊元, 率遼東兵馬三千, 爲先發行, 吳惟忠領南兵三千八百出來, 大兵亦陸續調發, 登、萊水兵, 時方造船, 當隨後出來云云。" 二十七日, 臣於連山途中, 逢遊擊葉鱨, 則言: "因廣寧巡撫李化龍聞, 楊元領遼東兵三千先發, 吳惟忠領浙兵四千繼發, 參將季金領舟師二百隻, 每船載軍三十, 四月初, 約會于朝鮮 平壤地, 皆已奉聖旨云云。" 本月初九日, 臣到遼東, 聞楊元時未發行云, 臣等不勝悶慮。 初十日早朝, 將往見楊元, 聞楊元方往武學止戈樓下點兵, 臣等進往通名, 則楊元令待候于外, 臣等見楊元, 令軍士一一於二百步外馳馬, 閱其善馳突, 又令彎弓, 試其臂力簡選, 不能者退之。 臣等久待于外, 楊元又令其下人, 言于臣等曰: "此處似不從容, 可於俺家相見" 云。 日晩, 楊元始爲還家, 臣等進往其家, 則楊元出接臣等, 令李海龍、黃允恭傳語曰: "小邦保有今日, 都是老爺之功。 今聞老爺領兵, 又往救小邦, 實是天幸。" 楊元曰: "我往爾國, 攻平壤之時, 我之有功, 爾國之所知也。 風霜雨露, 多受飢渴, 親冒矢石, 十生九死, 畢竟爲人所忌害, 落職在家。 衣食饒足, 度日安穩, 今朝廷敎我再往, 爾國十分煩惱。" 海龍等復于臣等, 臣等令海龍等答曰: "老爺之盛功, 小邦至今感戴。 老爺以小邦之故, 許多辛苦之狀, 小邦豈不知之? 今逢老爺, 再救小邦, 是小邦人民再生之日也。" 楊元曰: "爾國只知有李提督, 不知有我。" 李海龍復于臣等, 臣等令海龍答曰: "寧有是理? 老爺之功, 刻骨難忘, 至設老爺生祠於平壤矣。" 臣等又令李海龍等言曰: "倭賊方動, 小邦之危亡, 迫在朝夕。 不審老爺何時發行? 不勝悶迫。" 楊元曰: "時方調選兵馬, 不出旬日發行, 四月初五六日間, 當過平壤。" 臣等又請曰: "倭賊壓境已久, 將行厮殺, 老爺之行, 若緩一日, 則小邦之亡, 恐未及救也。 必須老爺速行, 聲勢可張, 小邦殘兵, 亦可激厲。" 楊元曰: "軍馬調畢, 卽當發行, 不須憂慮。 我先發行, 吳惟忠亦當繼往。" 臣等又問曰: "吳遊擊所領幾何?" 楊元曰: "遊擊所領南兵三千八百餘名, 我所領遼兵三千三百餘名。 爾國地方, 多有渡江處, 船隻浮橋, 宜令預備。 楊布政亦當往爾國, 此行, 想與吳遊擊同時云云。’ 臣等拜謝而退。 因楊總兵下人聞之, 總兵欲於是月二十八日發行云云。 十一日征倭軍糧銀子四車子, 輸來遼東城內, 臣等聞知事。
啓下備邊司。 回啓: "楊總兵領遼兵, 先爲發行, 吳惟忠領浙兵, 季金領舟師繼發, 一路糧芻, 已令措備, 更爲申飭, 渡江處船隻, 預爲造排爲當。" 啓依允。
원본
선조 30년 (1597) 3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