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35권, 선조 26년 2월 5일 庚寅 1/8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접대 도감이 남병 오유산이 중국군이 왜군의 복병에 당했다고 하는 말을 전하다
국역
접대 도감(接待都監)이 아뢰었다.
"이날 남병(南兵)의 천호(千戶) 오유산(吳惟珊)이 조병(調兵)의 일로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지난달 27일 정오에 관군(官軍)이 귀국 초병(哨兵)의 거짓 보고에 넘어가 「왜적은 이미 물러가고 경기는 텅 비었다. 」고 하며 전진하다가 미리 매복하고 있던 왜적에게 중간이 끊겨 포위되었다. 참수(斬首)한 왜적은 겨우 1백 20여 명인데 중국군의 사상자는 1천 5백여 명이나 되었다. 제독은 지금 임진강 가에 머물고 있는데 눈이 저처럼 오는데도 기어이 개성으로 후퇴하여 진치겠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유산은 바로 원 주사(袁主事)가 뽑아 보낸 정탐인입니다. 남병이 제독과 틈이 있으니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믿기는 어려우나 말한 바는 이와 같습니다. 또 장관(將官)으로 죽은 자가 14명인데 성명은 미처 알 수가 없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원문
선조 26년 (1593) 2월 5일
선조실록35권, 선조 26년 2월 5일 庚寅 1/8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접대 도감이 남병 오유산이 중국군이 왜군의 복병에 당했다고 하는 말을 전하다
국역
접대 도감(接待都監)이 아뢰었다.
"이날 남병(南兵)의 천호(千戶) 오유산(吳惟珊)이 조병(調兵)의 일로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지난달 27일 정오에 관군(官軍)이 귀국 초병(哨兵)의 거짓 보고에 넘어가 「왜적은 이미 물러가고 경기는 텅 비었다. 」고 하며 전진하다가 미리 매복하고 있던 왜적에게 중간이 끊겨 포위되었다. 참수(斬首)한 왜적은 겨우 1백 20여 명인데 중국군의 사상자는 1천 5백여 명이나 되었다. 제독은 지금 임진강 가에 머물고 있는데 눈이 저처럼 오는데도 기어이 개성으로 후퇴하여 진치겠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유산은 바로 원 주사(袁主事)가 뽑아 보낸 정탐인입니다. 남병이 제독과 틈이 있으니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믿기는 어려우나 말한 바는 이와 같습니다. 또 장관(將官)으로 죽은 자가 14명인데 성명은 미처 알 수가 없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원문
원본
선조 26년 (1593)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