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실록29권, 명종 18년 10월 24일 己巳 2/2 기사 / 1563년 명 가정(嘉靖) 42년
심통원이 순회 세자의 발인에 관하여 의견을 아뢰다
국역
심통원이 의논드리기를,
"종루의 어간을 통행하는 것이 과연 미안하기 때문에 도감(都監)에서 다시 역대의 의궤(儀軌)를 상고하여 본즉, 장순 빈(章順嬪)083) 때에 종루의 서쪽 허로(虛路)를 경유하여 나온 전례가 있었습니다. 다만 종루의 서쪽 처마 밑은 계단은 높고 도로는 낮아서 부득이 도로에 흙을 메워 계단과 서로 평평하게 만든 뒤에야 편안히 통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막 의계(議啓)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간원이 아뢴 것은 분명히 예에 부합됩니다. 숭례문을 경유하지 않고 돈의문을 경유하는 것이 매우 합당하나 그래도 미안한 뜻은 남게 됩니다. 삼간 병문(三間屛門)의 정간(正間)도 역시 어로(御路)이고 좌우간(左右間)은 한쪽으로 치우지고 굴곡이 있어 통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정간과 석교(石橋)는 곧게 통하고 있어서 만약 이 병문(屛門)을 경유한다면 종루의 정간을 경유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의경 세자는 태상동(太常洞) 본궁(本宮)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돈의문(敦義門)을 경유하였고, 장순 빈은 동궁(東宮)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숭례문(崇禮門)을 경유하였던 것이니, 이 또한 당연히 통행하여야 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건춘문에서 돈의문까지의 큰 길은 상관이 없겠지만 동영고(東營庫)의 성 아래와 방천동(防川洞) 석교(石橋)의 모퉁이와 돈의문 밖의 입구같이 매우 좁은 곳은 부득이 조그만 상여로 모시고 가야 하고, 경영고(京營庫) 앞 사거리 큰 길에 이르러서야 큰 상여로 모시고 갈 수 있습니다. 조그만 상여로 온 도성 안을 지나가는 것도 미안한 것이니, 소신의 생각으로는 건춘문에서는 조그만 상여로 모시고 가다가 의정부 앞 길에 이르러서 큰 상여로 바꾸어 모시고 종루의 서로(西路)를 경유하여 숭례문으로 나가는 것이 예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의논을 보니 모두 타당하나 우상의 의논이 더욱 합당하니, 종루의 서쪽 길을 경유하는 것이 좋겠다. 숭례문·돈의문은 모두 임금이 출입하는 문이니, 또한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29권 83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67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註 083] 장순 빈(章順嬪) : 예종 비(睿宗妃) 장순 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올리고 인성 대군(仁城大君)을 낳은 뒤 17세로 요절했다. 뒤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원문
○沈通源議: "鍾樓御間通行, 果爲未安, 故自都監更考歷年儀軌, 則章順嬪時, 由鍾樓西邊虛路而出, 有前例矣。 但以鍾樓西簷, 階高路低, 不得已塡土於路, 與階級相齊, 然後可以安行, 故方欲議啓, 而未及矣。 今者諫院所啓, 正合於禮。 除崇禮門, 由敦義門甚宜, 但亦有未安之意存焉。 三間屛門正間, 亦是御路, 左右間則偏曲難行。 正間與石橋通直, 若由此屛門, 則與鍾樓正間無異。 懿敬世子卒於大常洞本宮, 故由敦義門, 章順嬪卒於東宮, 故由崇禮門, 此亦有當行之路也。 且自建春門至于敦義門大路則已矣, 如東(庫)〔營〕 (營)〔庫〕 城底防川洞石橋回曲處, 敦義門外口極挾, 不得已以小轝奉行, 至于京營庫前四岐大路, 然後乘大轝而行。 以小轝盡過都中, 亦爲未安, 小臣之意, 自建春門乘小轝, 而至于議政府前路, 改乘大轝, 由鍾樓西路, 出崇禮門, 似爲得中。" 答曰: "觀此議俱當, 而右相之議尤當。 由鍾樓西邊可也。 門則崇禮、敦義, 皆是人君出入之門, 亦無異也。"
- 【태백산사고본】 18책 29권 83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67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명종 18년 (1563) 10월 24일
명종실록29권, 명종 18년 10월 24일 己巳 2/2 기사 / 1563년 명 가정(嘉靖) 42년
심통원이 순회 세자의 발인에 관하여 의견을 아뢰다
국역
심통원이 의논드리기를,
"종루의 어간을 통행하는 것이 과연 미안하기 때문에 도감(都監)에서 다시 역대의 의궤(儀軌)를 상고하여 본즉, 장순 빈(章順嬪)083) 때에 종루의 서쪽 허로(虛路)를 경유하여 나온 전례가 있었습니다. 다만 종루의 서쪽 처마 밑은 계단은 높고 도로는 낮아서 부득이 도로에 흙을 메워 계단과 서로 평평하게 만든 뒤에야 편안히 통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막 의계(議啓)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간원이 아뢴 것은 분명히 예에 부합됩니다. 숭례문을 경유하지 않고 돈의문을 경유하는 것이 매우 합당하나 그래도 미안한 뜻은 남게 됩니다. 삼간 병문(三間屛門)의 정간(正間)도 역시 어로(御路)이고 좌우간(左右間)은 한쪽으로 치우지고 굴곡이 있어 통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정간과 석교(石橋)는 곧게 통하고 있어서 만약 이 병문(屛門)을 경유한다면 종루의 정간을 경유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의경 세자는 태상동(太常洞) 본궁(本宮)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돈의문(敦義門)을 경유하였고, 장순 빈은 동궁(東宮)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숭례문(崇禮門)을 경유하였던 것이니, 이 또한 당연히 통행하여야 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건춘문에서 돈의문까지의 큰 길은 상관이 없겠지만 동영고(東營庫)의 성 아래와 방천동(防川洞) 석교(石橋)의 모퉁이와 돈의문 밖의 입구같이 매우 좁은 곳은 부득이 조그만 상여로 모시고 가야 하고, 경영고(京營庫) 앞 사거리 큰 길에 이르러서야 큰 상여로 모시고 갈 수 있습니다. 조그만 상여로 온 도성 안을 지나가는 것도 미안한 것이니, 소신의 생각으로는 건춘문에서는 조그만 상여로 모시고 가다가 의정부 앞 길에 이르러서 큰 상여로 바꾸어 모시고 종루의 서로(西路)를 경유하여 숭례문으로 나가는 것이 예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의논을 보니 모두 타당하나 우상의 의논이 더욱 합당하니, 종루의 서쪽 길을 경유하는 것이 좋겠다. 숭례문·돈의문은 모두 임금이 출입하는 문이니, 또한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29권 83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67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註 083] 장순 빈(章順嬪) : 예종 비(睿宗妃) 장순 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올리고 인성 대군(仁城大君)을 낳은 뒤 17세로 요절했다. 뒤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원문
○沈通源議: "鍾樓御間通行, 果爲未安, 故自都監更考歷年儀軌, 則章順嬪時, 由鍾樓西邊虛路而出, 有前例矣。 但以鍾樓西簷, 階高路低, 不得已塡土於路, 與階級相齊, 然後可以安行, 故方欲議啓, 而未及矣。 今者諫院所啓, 正合於禮。 除崇禮門, 由敦義門甚宜, 但亦有未安之意存焉。 三間屛門正間, 亦是御路, 左右間則偏曲難行。 正間與石橋通直, 若由此屛門, 則與鍾樓正間無異。 懿敬世子卒於大常洞本宮, 故由敦義門, 章順嬪卒於東宮, 故由崇禮門, 此亦有當行之路也。 且自建春門至于敦義門大路則已矣, 如東(庫)〔營〕 (營)〔庫〕 城底防川洞石橋回曲處, 敦義門外口極挾, 不得已以小轝奉行, 至于京營庫前四岐大路, 然後乘大轝而行。 以小轝盡過都中, 亦爲未安, 小臣之意, 自建春門乘小轝, 而至于議政府前路, 改乘大轝, 由鍾樓西路, 出崇禮門, 似爲得中。" 答曰: "觀此議俱當, 而右相之議尤當。 由鍾樓西邊可也。 門則崇禮、敦義, 皆是人君出入之門, 亦無異也。"
- 【태백산사고본】 18책 29권 83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67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원본
명종 18년 (1563) 10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