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181권, 성종 16년 7월 4일 壬子 3/8 기사 / 1485년 명 성화(成化) 21년
홍문관 부제학 안처량이 봉선사 주지 학조에게 죄주기를 아뢰다
국역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안처량(安處良) 등이 와서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봉선사(奉先寺) 주지승(住持僧) 학조(學祖)가 승정원(承政院)에 나아가 절의 곡식을 동원하지 말기를 청하였다고 하는데, 신 등은 불가하다고 여깁니다. 승정원은 재상(宰相)이 아니면 들어가서 일을 아뢸 수 없는 곳인데, 학조는 한낱 머리깎은 중으로서 어찌 감히 승정원에 들어가 일을 아뢴단 말입니까? 만약 말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해사(該司)에 고할 것이고, 그리고도 뜻을 펴지 못할 것 같으면 상언(上言)함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 중은 감히 승정원에 들어갔고 또 버젓이 빈청(賓廳)에 앉아 음식을 먹었으니, 국문(鞫問)하여 죄주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 곡식은 그대로 봉(封)하여 백성을 진휼(賑恤)하도록 하소서. 또 승지(承旨)들이 중을 접대하며 영외(楹外)에 앉게 한 것도 옳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승지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여 접대함이 잘못되었습니다. 대죄(待罪)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중은 본래 사족(士族)의 자손으로, 고금(古今)의 사리(事理)를 대강 알고 있으니, 범상한 중이 아니므로 낮추어 대우하여서는 안된다. 세조(世祖)께서 항상 승정원으로 하여금 접대하게 하셨고 은총이 매우 두터웠었다. 선왕(先王)이 기르던 것은 비록 견마(犬馬)라 하더라도 오히려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인데, 더구나 이 중은 선왕께서 지극히 공경한 자가 아니던가? 중도 내 백성인데 곡식을 주어 구황(救荒)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봉선사는 선왕의 진전(眞殿)이 있는 곳으로서 항상 화기(火氣)를 금하고 소제(掃除)하는 일이 긴요(緊要)하므로 거처하는 중이 적어서는 안된다. 만약 먹을 곡식이 없다면 절이 장차 비게 될 것이니, 두 분 대비(大妃)께서 어찌 진념(軫念)하지 않으시며 나 또한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더구나 이 곡식은 정희 왕후(貞熹王后)게서 내리신 것이니, 빼앗을 수 없다."
하고, 이어 승지 등에게 명하여 대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안처량(安處良)·김흔(金訢)·이창신(李昌臣) 등이 아뢰기를,
"비록 선왕께서 행하신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이 만일 그릇된 것이면 따를 수 없습니다. 진전(眞殿)은 비록 승도(僧徒)가 없더라도 참봉(參奉)과 수호군(守護軍)으로 지키기에 족합니다. 그리고 중과 백성은 또한 크게 경중(輕重)이 있습니다. 백성은 공부(貢賦)786) 를 바쳐서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고, 변경(邊境)에 일이 있으면 창을 잡고 이를 막습니다. 옛글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아니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무엇으로 지키겠습니까? 이것이 백성을 중히 여기는 까닭입니다. 중은 인륜(人倫)을 멸시(蔑視)하여 버리고 공부(貢賦)를 피하여 놀고 먹으니, 천지 사이에 한낱 좀벌레와 같을 뿐입니다. 비록 죽게 하여서는 안되겠지만, 그 진제(賑濟)함에 있어서 먼저 베풀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도(僧徒)는 곡식을 많이 쌓아 놓고서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고 있는데, 우리 백성은 술지게미나 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여 장차 굶어죽게 될 형편이니, 신 등은 중의 곡식을 빼앗아 백성의 굶주림을 구제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들의 말은 어찌 그렇게도 편벽된가? 임금은 백성에 대하여 죽는 자를 살리려 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려고 한다. 중도 사람인데, 장차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른다면 이들만을 구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나를 보필(輔弼)하는 말이 아니다."
하였다. 안처량 등이 아뢰기를,
"왕자(王者)의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중도 인명(人命)이니 진실로 진휼(賑䘏)함이 마땅하지만, 나라의 정사를 가지고 말한다면 백성이 중하고 중은 경(輕)한 쪽이 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들의 말을 어찌 임금의 덕이 부족함을 돕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옛날에 왕이 못을 파다가 나온 썩은 뼈를 묻어 주었는데, 사람들이 이르기를, ‘은택이 썩은 뼈에도 미쳤다.’고 하였다. 더구나 이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가? 만약 그대들을 진제사(賑濟使)로 삼는다면 반드시 중들의 굶어 죽는 것은 그냥 보아 넘기고 다만 기민(飢民)만을 구제할 것이다."
하였다. 안처량이 또 아뢰기를,
"신 등이 편벽되게 중을 미워하여 죽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경중(輕重)과 선후(先後)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마땅히 대신(大臣)에게 그 가부(可否)를 의논하여 행하겠다."
하였으나, 마침내 머물러 두고 행하지 아니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승지(承旨)는 옛날의 납언(納言)787) 이니, 부주(敷奏)788) 하고 복역(復逆)789) 함에 반드시 자세히 살펴 도리(道理)에 합당한 뒤에 이를 출납하여야 하는 것이다. 머리 깎은 자가 감히 사사로운 일을 가지고 무리하게 계달하였는데도 권건(權健)의 무리가 이를 맞아 자리에 앉히고 머리를 숙여 그 말에 따라 입계(入啓)하였으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다 하겠는가? 물론(物論)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학조(學祖)는 세조 때에, 신미(信眉)·학열(學悅)과 더불어 간특(奸慝)함을 일삼아 백성에게 해를 끼쳤으며, 또 그 음험(陰險)한 계교를 마음대로 하여 그 아우 영전(永銓) 등을 모두 현관(顯官)이 되게 하였고, 어미의 집이 안동(安東)에 있었는데 그 곳 양가(良家)의 딸에게 장가들어 첩으로 삼아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금산(金山) 직지사(直指寺)를 자기 개인 소유의 절로 만들어 축적(蓄積)이 거만(鉅萬)에 이르렀고, 도당을 많이 모아 스스로 봉양하기를 매우 사치스럽게 하였다." 하였다.
- [註 786] 공부(貢賦) : 공물과 부세.
- [註 787] 납언(納言) : 중국 순임금 때의 벼슬 이름.
- [註 788] 부주(敷奏) : 진언하는 것.
- [註 789] 복역(復逆) : 복은 신하의 주상(奏上)이고, 역은 임금의 명을 받는 것.
원문
○弘文館副提學安處良等來啓曰: "今聞奉先寺住持僧學祖詣政院, 請勿動寺穀, 臣等以爲不可。 政院, 非宰相不得入啓事, 學祖乃一髡首也, 安敢入政院啓事乎? 若有可言事, 則當告該司; 如不得伸, 上言可矣。 此僧敢入政院, 又頑然坐食賓廳, 請鞫問罪之, 其穀仍封賑民。 且承旨等接待僧人, 令坐楹外, 亦不可。" 承旨等啓曰: "臣等未及計較, 接待失宜, 請待罪。" 傳曰: "此僧本士族子孫, 粗知古今事理, 非庸僧也, 待之不可卑下也。 世祖常令政院待之, 恩眷甚厚。 先王所畜, 雖犬馬猶且愛敬, 況此僧先王致敬者乎? 僧亦吾民也, 給穀救荒, 豈不可乎? 奉先寺, 先王眞殿所在, 常時禁火及掃除事緊, 居僧不可少也。 若無穀可食, 則寺將空矣, 兩大妃豈不軫慮? 予亦安心乎? 況此穀乃貞熹王后所賜, 不可奪也。" 仍命承旨等勿待罪。 處良、金訢、昌臣啓曰: "雖先王所行之事, 其事若非, 則不可從也。 眞殿雖無僧徒, 參奉、守護軍足以守之矣。 僧之於民, 亦大有輕重。 民則供貢賦, 裕國用, 邊境有事, 則執戈以禦之。 古云: ‘民惟邦本, 本固邦寧。’ 非民則社稷宗廟, 何以守之? 此民之所以重也。 僧則蔑棄人倫, 逃賦遊食, 天地間一蠧耳。 雖不可殺, 其於賑濟, 亦不可先施也。 且僧徒多積穀粟, 煖衣飽食; 吾民不厭糟糠, 將爲餓殍。 臣等謂奪僧之穀, 賑民之飢可也。" 傳曰: "爾等之言, 何其褊也? 君之於民, 死者欲生之, 飢者欲賑之。 僧亦人也, 將至餓死, 則獨不救之乎? 此非輔我之言也。" 處良等啓曰: "以王者一視同仁之心觀之, 僧亦人命, 固當賑䘏; 以國家之政言之, 民爲重, 僧爲輕。" 傳曰: "爾等之言, 豈可謂補闕乎? 古之王者鑿池得朽骨而埋之, 人謂之澤及朽骨, 況此生人乎? 若以爾等爲賑濟使, 則必忍視僧人之餓死, 而只救飢民也。" 處良又啓曰: "臣等非偏疾僧而欲其死也, 專以輕重先後而言也。" 傳曰: "當議可否於大臣而行之。" 竟留中不行。
【史臣曰: "承旨卽古之納言也。 敷奏復逆必審之, 旣允而後出納之。 髡首敢以私事冒啓, 而權健等迎之于坐, 俛首聽言以入, 豈惟允云乎? 物論非之。 學祖在世祖朝, 與信眉、學悅同作奸慝, 貽病于民。 且肆其陰計, 以其弟永銓等皆爲顯官。 其母家在安東, 取良家女爲妾生子, 以金山 直指寺爲私刹, 蓄積鉅萬, 多聚其徒, 自奉甚侈。"】
성종실록181권, 성종 16년 7월 4일 壬子 3/8 기사 / 1485년 명 성화(成化) 21년
홍문관 부제학 안처량이 봉선사 주지 학조에게 죄주기를 아뢰다
국역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안처량(安處良) 등이 와서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봉선사(奉先寺) 주지승(住持僧) 학조(學祖)가 승정원(承政院)에 나아가 절의 곡식을 동원하지 말기를 청하였다고 하는데, 신 등은 불가하다고 여깁니다. 승정원은 재상(宰相)이 아니면 들어가서 일을 아뢸 수 없는 곳인데, 학조는 한낱 머리깎은 중으로서 어찌 감히 승정원에 들어가 일을 아뢴단 말입니까? 만약 말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해사(該司)에 고할 것이고, 그리고도 뜻을 펴지 못할 것 같으면 상언(上言)함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 중은 감히 승정원에 들어갔고 또 버젓이 빈청(賓廳)에 앉아 음식을 먹었으니, 국문(鞫問)하여 죄주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 곡식은 그대로 봉(封)하여 백성을 진휼(賑恤)하도록 하소서. 또 승지(承旨)들이 중을 접대하며 영외(楹外)에 앉게 한 것도 옳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승지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여 접대함이 잘못되었습니다. 대죄(待罪)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중은 본래 사족(士族)의 자손으로, 고금(古今)의 사리(事理)를 대강 알고 있으니, 범상한 중이 아니므로 낮추어 대우하여서는 안된다. 세조(世祖)께서 항상 승정원으로 하여금 접대하게 하셨고 은총이 매우 두터웠었다. 선왕(先王)이 기르던 것은 비록 견마(犬馬)라 하더라도 오히려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인데, 더구나 이 중은 선왕께서 지극히 공경한 자가 아니던가? 중도 내 백성인데 곡식을 주어 구황(救荒)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봉선사는 선왕의 진전(眞殿)이 있는 곳으로서 항상 화기(火氣)를 금하고 소제(掃除)하는 일이 긴요(緊要)하므로 거처하는 중이 적어서는 안된다. 만약 먹을 곡식이 없다면 절이 장차 비게 될 것이니, 두 분 대비(大妃)께서 어찌 진념(軫念)하지 않으시며 나 또한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더구나 이 곡식은 정희 왕후(貞熹王后)게서 내리신 것이니, 빼앗을 수 없다."
하고, 이어 승지 등에게 명하여 대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안처량(安處良)·김흔(金訢)·이창신(李昌臣) 등이 아뢰기를,
"비록 선왕께서 행하신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이 만일 그릇된 것이면 따를 수 없습니다. 진전(眞殿)은 비록 승도(僧徒)가 없더라도 참봉(參奉)과 수호군(守護軍)으로 지키기에 족합니다. 그리고 중과 백성은 또한 크게 경중(輕重)이 있습니다. 백성은 공부(貢賦)786) 를 바쳐서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고, 변경(邊境)에 일이 있으면 창을 잡고 이를 막습니다. 옛글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아니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무엇으로 지키겠습니까? 이것이 백성을 중히 여기는 까닭입니다. 중은 인륜(人倫)을 멸시(蔑視)하여 버리고 공부(貢賦)를 피하여 놀고 먹으니, 천지 사이에 한낱 좀벌레와 같을 뿐입니다. 비록 죽게 하여서는 안되겠지만, 그 진제(賑濟)함에 있어서 먼저 베풀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도(僧徒)는 곡식을 많이 쌓아 놓고서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고 있는데, 우리 백성은 술지게미나 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여 장차 굶어죽게 될 형편이니, 신 등은 중의 곡식을 빼앗아 백성의 굶주림을 구제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들의 말은 어찌 그렇게도 편벽된가? 임금은 백성에 대하여 죽는 자를 살리려 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려고 한다. 중도 사람인데, 장차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른다면 이들만을 구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나를 보필(輔弼)하는 말이 아니다."
하였다. 안처량 등이 아뢰기를,
"왕자(王者)의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중도 인명(人命)이니 진실로 진휼(賑䘏)함이 마땅하지만, 나라의 정사를 가지고 말한다면 백성이 중하고 중은 경(輕)한 쪽이 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들의 말을 어찌 임금의 덕이 부족함을 돕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옛날에 왕이 못을 파다가 나온 썩은 뼈를 묻어 주었는데, 사람들이 이르기를, ‘은택이 썩은 뼈에도 미쳤다.’고 하였다. 더구나 이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가? 만약 그대들을 진제사(賑濟使)로 삼는다면 반드시 중들의 굶어 죽는 것은 그냥 보아 넘기고 다만 기민(飢民)만을 구제할 것이다."
하였다. 안처량이 또 아뢰기를,
"신 등이 편벽되게 중을 미워하여 죽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경중(輕重)과 선후(先後)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마땅히 대신(大臣)에게 그 가부(可否)를 의논하여 행하겠다."
하였으나, 마침내 머물러 두고 행하지 아니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승지(承旨)는 옛날의 납언(納言)787) 이니, 부주(敷奏)788) 하고 복역(復逆)789) 함에 반드시 자세히 살펴 도리(道理)에 합당한 뒤에 이를 출납하여야 하는 것이다. 머리 깎은 자가 감히 사사로운 일을 가지고 무리하게 계달하였는데도 권건(權健)의 무리가 이를 맞아 자리에 앉히고 머리를 숙여 그 말에 따라 입계(入啓)하였으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다 하겠는가? 물론(物論)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학조(學祖)는 세조 때에, 신미(信眉)·학열(學悅)과 더불어 간특(奸慝)함을 일삼아 백성에게 해를 끼쳤으며, 또 그 음험(陰險)한 계교를 마음대로 하여 그 아우 영전(永銓) 등을 모두 현관(顯官)이 되게 하였고, 어미의 집이 안동(安東)에 있었는데 그 곳 양가(良家)의 딸에게 장가들어 첩으로 삼아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금산(金山) 직지사(直指寺)를 자기 개인 소유의 절로 만들어 축적(蓄積)이 거만(鉅萬)에 이르렀고, 도당을 많이 모아 스스로 봉양하기를 매우 사치스럽게 하였다." 하였다.
- [註 786] 공부(貢賦) : 공물과 부세.
- [註 787] 납언(納言) : 중국 순임금 때의 벼슬 이름.
- [註 788] 부주(敷奏) : 진언하는 것.
- [註 789] 복역(復逆) : 복은 신하의 주상(奏上)이고, 역은 임금의 명을 받는 것.
원문
○弘文館副提學安處良等來啓曰: "今聞奉先寺住持僧學祖詣政院, 請勿動寺穀, 臣等以爲不可。 政院, 非宰相不得入啓事, 學祖乃一髡首也, 安敢入政院啓事乎? 若有可言事, 則當告該司; 如不得伸, 上言可矣。 此僧敢入政院, 又頑然坐食賓廳, 請鞫問罪之, 其穀仍封賑民。 且承旨等接待僧人, 令坐楹外, 亦不可。" 承旨等啓曰: "臣等未及計較, 接待失宜, 請待罪。" 傳曰: "此僧本士族子孫, 粗知古今事理, 非庸僧也, 待之不可卑下也。 世祖常令政院待之, 恩眷甚厚。 先王所畜, 雖犬馬猶且愛敬, 況此僧先王致敬者乎? 僧亦吾民也, 給穀救荒, 豈不可乎? 奉先寺, 先王眞殿所在, 常時禁火及掃除事緊, 居僧不可少也。 若無穀可食, 則寺將空矣, 兩大妃豈不軫慮? 予亦安心乎? 況此穀乃貞熹王后所賜, 不可奪也。" 仍命承旨等勿待罪。 處良、金訢、昌臣啓曰: "雖先王所行之事, 其事若非, 則不可從也。 眞殿雖無僧徒, 參奉、守護軍足以守之矣。 僧之於民, 亦大有輕重。 民則供貢賦, 裕國用, 邊境有事, 則執戈以禦之。 古云: ‘民惟邦本, 本固邦寧。’ 非民則社稷宗廟, 何以守之? 此民之所以重也。 僧則蔑棄人倫, 逃賦遊食, 天地間一蠧耳。 雖不可殺, 其於賑濟, 亦不可先施也。 且僧徒多積穀粟, 煖衣飽食; 吾民不厭糟糠, 將爲餓殍。 臣等謂奪僧之穀, 賑民之飢可也。" 傳曰: "爾等之言, 何其褊也? 君之於民, 死者欲生之, 飢者欲賑之。 僧亦人也, 將至餓死, 則獨不救之乎? 此非輔我之言也。" 處良等啓曰: "以王者一視同仁之心觀之, 僧亦人命, 固當賑䘏; 以國家之政言之, 民爲重, 僧爲輕。" 傳曰: "爾等之言, 豈可謂補闕乎? 古之王者鑿池得朽骨而埋之, 人謂之澤及朽骨, 況此生人乎? 若以爾等爲賑濟使, 則必忍視僧人之餓死, 而只救飢民也。" 處良又啓曰: "臣等非偏疾僧而欲其死也, 專以輕重先後而言也。" 傳曰: "當議可否於大臣而行之。" 竟留中不行。
【史臣曰: "承旨卽古之納言也。 敷奏復逆必審之, 旣允而後出納之。 髡首敢以私事冒啓, 而權健等迎之于坐, 俛首聽言以入, 豈惟允云乎? 物論非之。 學祖在世祖朝, 與信眉、學悅同作奸慝, 貽病于民。 且肆其陰計, 以其弟永銓等皆爲顯官。 其母家在安東, 取良家女爲妾生子, 以金山 直指寺爲私刹, 蓄積鉅萬, 多聚其徒, 自奉甚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