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실록9권, 순조 6년 6월 25일 신축 2/4 기사 / 1806년 청 가경(嘉慶) 11년
삼사의 합사에 의하여 김귀주에게 추탈하는 전형을 실시하다
국역
삼사(三司)의 합사에 의하여 김귀주에게 추탈(追奪)하는 전형을 실시하였다. 영조 만년으로부터 척리(戚里)에 남북의 칭호가 있었다. 남쪽에는 김귀주가 이현(泥峴)에 살았고 북쪽에는 홍봉한(洪鳳漢)이 안국동(安國洞)에 살았는데, 홍봉한은 먼저 이미 귀현(貴顯)하게 되어 상상(上相)의 직위에 있으면서 국정(國政)을 잡은 지 10여 년 동안에 권세가 무겁고 세력이 대단하여도 인심(人心)을 많이 복종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청론(淸論)의 선비들이 모두 배척하였다. 김귀주는 늦게 진출한 자로 대항하여 겨룰 것을 생각하여 널리 한준(寒畯)271) 과 사귀고 헛된 명예를 부정하게 거두어 김종수(金鍾秀)·정이환(鄭履煥)·심환지(沈煥之) 등과 더불어 결탁해 사당(死黨)을 만들어서 홍씨(洪氏)를 기울어지게 하였다. 또 임오년272) 5월 이후로는, 정묘(正廟)께서 저부(儲副)를 담당하심을 시기하여 몰래 동요케 할 계획을 하였다.
김귀주의 종숙(從叔)인 김한록(金漢祿)이란 자는 본래 고 장령 한원진(韓元震)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기 때문에 호중(湖中)의 선비들이 서로 편드는 자가 많아서, 이에 강론을 핑계하고는 송(宋)나라 유학자인 호씨(胡氏)273) 가 당(唐)나라 중종(中宗)에 대해 한 말을 인용해 여덟 글자의 흉언(凶言)을 창시하여 돌려가면서 서로 선동하고 미혹하였다. 고 부제학 김시찬은 우아하여 대단한 명망이 있었는데, 이 흉언을 듣고는 주자(朱子)가 장경부(張敬夫)에게 답한 서찰을 원거하여 몹시 배척하였으므로 그 계획이 드디어 저지되었고, 정묘께서도 역시 그 상황을 통촉하였었다. 그러나 그가 정순 대비(貞純大妃)의 지친(至親)이 된다고 하여 그 일을 숨겼었는데, 병신년274) 에 미쳐서는 홍봉한의 아우 홍인한(洪麟漢)이 대리(代理)함을 방해한 것으로 인하여 역적으로 논죄해서 홍씨는 완전히 폐가되었다. 얼마 안 되는 동안에, 김귀주도 역시 임진년275) 의 홍봉한을 공격한 소장에 감히 대내(大內)에서 수작한 것을 말함에 저군(儲君)으로 증거를 삼아서 말하여 스스로 부도(不道)를 범하였고, 신묘년276) 에 궁성(宮城)의 호위에 참여할 때 그의 아재비 김한기(金漢耆)와 적신(賊臣) 정후겸(鄭厚謙)으로 더불어 미리 빈틈없이 준비하고 계획하여 천청(天聽)을 현혹시켰으며, 그해 가을에 또 ‘아무 해에는 망극하고 차마 듣지 못한다’는 말로 안팎을 공동(恐動)하는 등 네 가지 큰 죄안(罪案)으로써 해도(海島)에 찬축되었다. 그러나 김종수(金鍾秀)는 바야흐로 적신 홍국영(洪國榮)을 끼고 요직에 앉아 권력을 잡고서 홍씨를 공격하는 것으로 의리를 삼았기 때문에 김귀주가 비록 패하였다고는 하나 그 당은 아직도 성하여, 을묘년277) 에 국세(局勢)가 한번 변하자 심환지가 나랏일을 담당하였다.
대개 수십년 이래로 남당(南黨)에 접근하는 자를 벽파(僻派)라 일렀고 북당(北黨)에 접근하는 자를 시파(時派)라 일렀는데, 논의가 분열되어 경알(傾軋)하기를 마지 않았다. 경신년278) 에 대왕 대비께서 수렴 청정(垂簾聽政)할 때에는 대신들이 김귀주의 관작을 회복시키자는 청으로 인하여 그의 아우 김용주(金龍柱)와 아들 김노충(金魯忠), 김한록의 아들 김관주(金觀柱)·김일주(金日柱) 등이 다시 일어나 일을 마음대로 하여 심환지와 같이 협모(協謀)해 홍봉한의 아들 홍낙임(洪樂任)을 구살(構殺)하였다. 대저 자기에게 빌붙지 않는 자는 모두, 의리에 배치되고 추숭(追崇)을 주장한다 하여 그 죄를 성토해 찬축(竄逐)·폐출(廢黜)하였으므로 조정이 텅 비게 되었고, 또 김한기의 유소(遺疏)에 조그맣게 올라 있는 원망을 가지고도 다 역률(逆律)을 썼다.
이보다 앞서 정묘(正廟) 경신년에는 왕세자의 대혼(大婚)을 김조순(金祖淳)의 딸에게 정하여 이미 재간택(再揀澤)을 행하였고, 정묘께서 승하하자 정순 대비께서 김조순이 마땅히 폐부지친(肺腑之親)을 삼을 만하다는 생각으로 융원(戎垣)279) 에 발탁 제수하였다. 이에 김용주의 무리들은 김조순이 그 당이 아니라서 대례(大禮)를 치룬 뒤에는 마침내 자신들의 우환이 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대사헌 권유를 부추겨 신유년280) 의 흉소(凶疏)를 꾸며내어 ‘도인(都人) 윤(尹)·길(姞), 곡돌 사신(曲堗徙薪)281) ’ 등의 말로써 현혹시키고 마음을 떠보는 조짐을 삼았으며, 또 ‘삼간택(三揀擇)을 하지 않는다’느니 ‘10월에는 길일(吉日)이 없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발표하여 온 세상을 유혹하고 위협하자, 심환지가 수상(首相)으로 노신(老臣)의 충심이라면서 권유를 포장(褒奬)하여 기미가 심히 위험하고 절박하였는데, 정순 대비께서 확연(確然)하게 흔들리지 않음을 힘입어 감히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었다. 갑자년282) 여름에 이르러서는 대신(臺臣)의 말로 인하여 권유를 국문하였으나 지레 죽게 되자 대역률(大逆律)을 시행하여 그 간범(干犯)한 자들을 주륙하였으며, 을축년283) 겨울에는 우상(右相) 김달순(金達淳)이 처음으로 연석(筵席)에서 경모궁(景慕宮)284) 께서 대리할 때 상서(上書)한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에게 포장하는 은전을 내리자고 하였고, 이어서 세초(洗草)한 서본(書本)을 올려 간범한 아무 연도가 선왕(先王)께 배치(背馳)되었다 하여 사사(賜死)하였다.
대저 그 당여(黨與)에 전부 찬출(竄黜)을 행하여 심환지의 관작을 추삭(追削)하였는데, 김이영(金履永)의 상소가 나오기에 미쳐서는 김한록의 흉언을 온 나라에서 성토하게 되자 대역률을 뒤좇아 실시하여 좌죄(坐罪)해야 될 자는 귀양보냈으며 다시 김귀주의 관작을 삭탈하고 또 김종수(金鍾秀)의 관작을 추삭하였다. 대개 김귀주와 김한록이 앞뒤 50년 동안 대단히 흉악한 짓을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죄인을 알게 되어 천토(天討)를 비로소 크게 행하게 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558면
- [註 271] 한준(寒畯) : 빈한(貧寒)한 준사(俊士).
- [註 272]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 [註 273] 호씨(胡氏) : 북송(北宋)의 유학자 호안국(胡安國).
- [註 274] 병신년 : 1776 영조 52년.
- [註 275] 임진년 : 1772 영조 48년.
- [註 276] 신묘년 : 1771 영조 47년.
- [註 277] 을묘년 : 1795 정조 19년.
- [註 278] 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
- [註 279] 융원(戎垣) : 대장의 자리.
- [註 280] 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 [註 281] 곡돌 사신(曲堗徙薪) : 화재(火災)를 예방하기 위하여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딴 곳으로 옮긴다는 뜻으로. 화란(禍亂)을 미연(未然)에 방지한다는 비유. 한(漢)나라 곽광(藿光)의 일족(一族)들이 권세를 믿고 모역(謀逆)하다가 주멸(誅滅)을 당한 후에 어느 사람이 이런 내용으로 상서(上書)했던 고사가 있음.
- [註 282] 갑자년 : 1804 순조 4년.
- [註 283] 을축년 : 1805 순조 5년.
- [註 284] 경모궁(景慕宮) : 장헌 세자(莊獻世子)를 지칭함.
원문
○依三司合辭, 龜柱施以追奪之典。 自英宗晩年, 有戚里南、北之稱。 南則金龜柱居泥峴, 北則洪鳳漢居安國洞。 而鳳漢先已貴顯, 位上相, 秉國政十餘年, 權重勢盛, 多不厭人心, 淸論之士, 皆斥之。 龜柱以晩進, 思與之角, 廣交寒畯, 曲收虛譽, 與金鍾秀、鄭履煥、沈煥之等, 結爲死黨, 以傾洪氏。 又因壬午五月後, 忌正廟當儲副, 陰爲動搖計。 而龜柱之從叔漢祿者, 本受業於故掌令韓元震之門, 故湖中士, 多相與者, 乃托講論, 引宋儒胡氏 唐 中宗說, 倡八字凶言, 轉相煽惑。 時故副學金時粲, 雅有重名, 聞此說, 據朱子答張敬夫書, 嚴斥之, 其計遂沮, 正廟亦燭其狀。 然以其爲貞純大妃至親, 隱其事。 及丙申, 鳳漢之弟麟漢, 因沮戲代理, 以逆論死, 洪氏盡廢。 未幾, 龜柱亦以壬辰攻鳳漢疏, 敢道自內酬酢, 以儲君爲證, 而言自犯不道, 與辛卯宮城扈衛時, 與其叔漢耆、賊臣鄭厚謙, 綢繆排布, 眩惑天聽。 其秋, 又以某年罔極不忍聞之說, 恐動內外等四大罪案, 竄海島。 而鍾秀方挾賊臣洪國榮柄用, 以攻洪氏爲義理, 故龜柱雖敗, 其黨猶盛, 乙卯局勢一變, 煥之當國。 蓋數十年來, 追南者謂之 ‘僻’, 近北者謂之 ‘時’, 論議分裂, 傾軋不已。 庚申垂簾, 因大臣請復龜柱官, 其弟龍柱、子魯忠、漢祿之子觀柱ㆍ日柱等, 復起用事, 與煥之協謀, 構殺鳳漢之子樂任。 凡不附己者, 竝以背馳義理, 主張追崇, 聲其罪, 竄逐廢黜, 朝著爲空, 又以漢耆遺疏上絲髮之怨, 皆用逆律。 先是正廟庚申, 定王世子大婚於金祖淳女, 已行再揀, 正廟禮陟, 貞純大妃念祖淳當爲肺腑之親, 擢授戎垣。 於是龍柱輩, 以祖淳非其黨, 恐大禮之後, 終爲己患, 遂嗾大司憲權裕, 粧出辛酉凶疏, 以 ‘都人尹、姞, 曲堗徙薪’ 等語, 爲熒惑嘗試之漸, 又發 ‘三揀不爲’、‘月無吉’ 之說, 誘脅一世, 煥之以首相, 奬裕以老臣忠悃, 機甚危迫, 賴貞純大妃, 確然不動, 未敢售。 至甲子夏, 因臺臣言, 鞫裕徑斃, 施大逆律, 誅其于犯者。 乙丑冬, 右相金達淳, 初筵請景慕宮代理時上書人朴致遠、尹在謙褒典, 仍進洗草書本, 以干犯某年, 背馳先王, 賜死。 凡其黨與, 盡行竄黜, 追削煥之官, 及金履永疏發, 漢祿凶言, 擧國討之, 追施大逆律, 應坐者配之, 復削龜柱官, 又追削鐘秀官。 蓋龜、祿稔凶首尾五十載, 至是罪人斯得, 天討始大行焉。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558면
순조실록9권, 순조 6년 6월 25일 신축 2/4 기사 / 1806년 청 가경(嘉慶) 11년
삼사의 합사에 의하여 김귀주에게 추탈하는 전형을 실시하다
국역
삼사(三司)의 합사에 의하여 김귀주에게 추탈(追奪)하는 전형을 실시하였다. 영조 만년으로부터 척리(戚里)에 남북의 칭호가 있었다. 남쪽에는 김귀주가 이현(泥峴)에 살았고 북쪽에는 홍봉한(洪鳳漢)이 안국동(安國洞)에 살았는데, 홍봉한은 먼저 이미 귀현(貴顯)하게 되어 상상(上相)의 직위에 있으면서 국정(國政)을 잡은 지 10여 년 동안에 권세가 무겁고 세력이 대단하여도 인심(人心)을 많이 복종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청론(淸論)의 선비들이 모두 배척하였다. 김귀주는 늦게 진출한 자로 대항하여 겨룰 것을 생각하여 널리 한준(寒畯)271) 과 사귀고 헛된 명예를 부정하게 거두어 김종수(金鍾秀)·정이환(鄭履煥)·심환지(沈煥之) 등과 더불어 결탁해 사당(死黨)을 만들어서 홍씨(洪氏)를 기울어지게 하였다. 또 임오년272) 5월 이후로는, 정묘(正廟)께서 저부(儲副)를 담당하심을 시기하여 몰래 동요케 할 계획을 하였다.
김귀주의 종숙(從叔)인 김한록(金漢祿)이란 자는 본래 고 장령 한원진(韓元震)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기 때문에 호중(湖中)의 선비들이 서로 편드는 자가 많아서, 이에 강론을 핑계하고는 송(宋)나라 유학자인 호씨(胡氏)273) 가 당(唐)나라 중종(中宗)에 대해 한 말을 인용해 여덟 글자의 흉언(凶言)을 창시하여 돌려가면서 서로 선동하고 미혹하였다. 고 부제학 김시찬은 우아하여 대단한 명망이 있었는데, 이 흉언을 듣고는 주자(朱子)가 장경부(張敬夫)에게 답한 서찰을 원거하여 몹시 배척하였으므로 그 계획이 드디어 저지되었고, 정묘께서도 역시 그 상황을 통촉하였었다. 그러나 그가 정순 대비(貞純大妃)의 지친(至親)이 된다고 하여 그 일을 숨겼었는데, 병신년274) 에 미쳐서는 홍봉한의 아우 홍인한(洪麟漢)이 대리(代理)함을 방해한 것으로 인하여 역적으로 논죄해서 홍씨는 완전히 폐가되었다. 얼마 안 되는 동안에, 김귀주도 역시 임진년275) 의 홍봉한을 공격한 소장에 감히 대내(大內)에서 수작한 것을 말함에 저군(儲君)으로 증거를 삼아서 말하여 스스로 부도(不道)를 범하였고, 신묘년276) 에 궁성(宮城)의 호위에 참여할 때 그의 아재비 김한기(金漢耆)와 적신(賊臣) 정후겸(鄭厚謙)으로 더불어 미리 빈틈없이 준비하고 계획하여 천청(天聽)을 현혹시켰으며, 그해 가을에 또 ‘아무 해에는 망극하고 차마 듣지 못한다’는 말로 안팎을 공동(恐動)하는 등 네 가지 큰 죄안(罪案)으로써 해도(海島)에 찬축되었다. 그러나 김종수(金鍾秀)는 바야흐로 적신 홍국영(洪國榮)을 끼고 요직에 앉아 권력을 잡고서 홍씨를 공격하는 것으로 의리를 삼았기 때문에 김귀주가 비록 패하였다고는 하나 그 당은 아직도 성하여, 을묘년277) 에 국세(局勢)가 한번 변하자 심환지가 나랏일을 담당하였다.
대개 수십년 이래로 남당(南黨)에 접근하는 자를 벽파(僻派)라 일렀고 북당(北黨)에 접근하는 자를 시파(時派)라 일렀는데, 논의가 분열되어 경알(傾軋)하기를 마지 않았다. 경신년278) 에 대왕 대비께서 수렴 청정(垂簾聽政)할 때에는 대신들이 김귀주의 관작을 회복시키자는 청으로 인하여 그의 아우 김용주(金龍柱)와 아들 김노충(金魯忠), 김한록의 아들 김관주(金觀柱)·김일주(金日柱) 등이 다시 일어나 일을 마음대로 하여 심환지와 같이 협모(協謀)해 홍봉한의 아들 홍낙임(洪樂任)을 구살(構殺)하였다. 대저 자기에게 빌붙지 않는 자는 모두, 의리에 배치되고 추숭(追崇)을 주장한다 하여 그 죄를 성토해 찬축(竄逐)·폐출(廢黜)하였으므로 조정이 텅 비게 되었고, 또 김한기의 유소(遺疏)에 조그맣게 올라 있는 원망을 가지고도 다 역률(逆律)을 썼다.
이보다 앞서 정묘(正廟) 경신년에는 왕세자의 대혼(大婚)을 김조순(金祖淳)의 딸에게 정하여 이미 재간택(再揀澤)을 행하였고, 정묘께서 승하하자 정순 대비께서 김조순이 마땅히 폐부지친(肺腑之親)을 삼을 만하다는 생각으로 융원(戎垣)279) 에 발탁 제수하였다. 이에 김용주의 무리들은 김조순이 그 당이 아니라서 대례(大禮)를 치룬 뒤에는 마침내 자신들의 우환이 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대사헌 권유를 부추겨 신유년280) 의 흉소(凶疏)를 꾸며내어 ‘도인(都人) 윤(尹)·길(姞), 곡돌 사신(曲堗徙薪)281) ’ 등의 말로써 현혹시키고 마음을 떠보는 조짐을 삼았으며, 또 ‘삼간택(三揀擇)을 하지 않는다’느니 ‘10월에는 길일(吉日)이 없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발표하여 온 세상을 유혹하고 위협하자, 심환지가 수상(首相)으로 노신(老臣)의 충심이라면서 권유를 포장(褒奬)하여 기미가 심히 위험하고 절박하였는데, 정순 대비께서 확연(確然)하게 흔들리지 않음을 힘입어 감히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었다. 갑자년282) 여름에 이르러서는 대신(臺臣)의 말로 인하여 권유를 국문하였으나 지레 죽게 되자 대역률(大逆律)을 시행하여 그 간범(干犯)한 자들을 주륙하였으며, 을축년283) 겨울에는 우상(右相) 김달순(金達淳)이 처음으로 연석(筵席)에서 경모궁(景慕宮)284) 께서 대리할 때 상서(上書)한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에게 포장하는 은전을 내리자고 하였고, 이어서 세초(洗草)한 서본(書本)을 올려 간범한 아무 연도가 선왕(先王)께 배치(背馳)되었다 하여 사사(賜死)하였다.
대저 그 당여(黨與)에 전부 찬출(竄黜)을 행하여 심환지의 관작을 추삭(追削)하였는데, 김이영(金履永)의 상소가 나오기에 미쳐서는 김한록의 흉언을 온 나라에서 성토하게 되자 대역률을 뒤좇아 실시하여 좌죄(坐罪)해야 될 자는 귀양보냈으며 다시 김귀주의 관작을 삭탈하고 또 김종수(金鍾秀)의 관작을 추삭하였다. 대개 김귀주와 김한록이 앞뒤 50년 동안 대단히 흉악한 짓을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죄인을 알게 되어 천토(天討)를 비로소 크게 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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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271] 한준(寒畯) : 빈한(貧寒)한 준사(俊士).
- [註 272]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 [註 273] 호씨(胡氏) : 북송(北宋)의 유학자 호안국(胡安國).
- [註 274] 병신년 : 1776 영조 52년.
- [註 275] 임진년 : 1772 영조 48년.
- [註 276] 신묘년 : 1771 영조 47년.
- [註 277] 을묘년 : 1795 정조 19년.
- [註 278] 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
- [註 279] 융원(戎垣) : 대장의 자리.
- [註 280] 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 [註 281] 곡돌 사신(曲堗徙薪) : 화재(火災)를 예방하기 위하여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딴 곳으로 옮긴다는 뜻으로. 화란(禍亂)을 미연(未然)에 방지한다는 비유. 한(漢)나라 곽광(藿光)의 일족(一族)들이 권세를 믿고 모역(謀逆)하다가 주멸(誅滅)을 당한 후에 어느 사람이 이런 내용으로 상서(上書)했던 고사가 있음.
- [註 282] 갑자년 : 1804 순조 4년.
- [註 283] 을축년 : 1805 순조 5년.
- [註 284] 경모궁(景慕宮) : 장헌 세자(莊獻世子)를 지칭함.
원문
○依三司合辭, 龜柱施以追奪之典。 自英宗晩年, 有戚里南、北之稱。 南則金龜柱居泥峴, 北則洪鳳漢居安國洞。 而鳳漢先已貴顯, 位上相, 秉國政十餘年, 權重勢盛, 多不厭人心, 淸論之士, 皆斥之。 龜柱以晩進, 思與之角, 廣交寒畯, 曲收虛譽, 與金鍾秀、鄭履煥、沈煥之等, 結爲死黨, 以傾洪氏。 又因壬午五月後, 忌正廟當儲副, 陰爲動搖計。 而龜柱之從叔漢祿者, 本受業於故掌令韓元震之門, 故湖中士, 多相與者, 乃托講論, 引宋儒胡氏 唐 中宗說, 倡八字凶言, 轉相煽惑。 時故副學金時粲, 雅有重名, 聞此說, 據朱子答張敬夫書, 嚴斥之, 其計遂沮, 正廟亦燭其狀。 然以其爲貞純大妃至親, 隱其事。 及丙申, 鳳漢之弟麟漢, 因沮戲代理, 以逆論死, 洪氏盡廢。 未幾, 龜柱亦以壬辰攻鳳漢疏, 敢道自內酬酢, 以儲君爲證, 而言自犯不道, 與辛卯宮城扈衛時, 與其叔漢耆、賊臣鄭厚謙, 綢繆排布, 眩惑天聽。 其秋, 又以某年罔極不忍聞之說, 恐動內外等四大罪案, 竄海島。 而鍾秀方挾賊臣洪國榮柄用, 以攻洪氏爲義理, 故龜柱雖敗, 其黨猶盛, 乙卯局勢一變, 煥之當國。 蓋數十年來, 追南者謂之 ‘僻’, 近北者謂之 ‘時’, 論議分裂, 傾軋不已。 庚申垂簾, 因大臣請復龜柱官, 其弟龍柱、子魯忠、漢祿之子觀柱ㆍ日柱等, 復起用事, 與煥之協謀, 構殺鳳漢之子樂任。 凡不附己者, 竝以背馳義理, 主張追崇, 聲其罪, 竄逐廢黜, 朝著爲空, 又以漢耆遺疏上絲髮之怨, 皆用逆律。 先是正廟庚申, 定王世子大婚於金祖淳女, 已行再揀, 正廟禮陟, 貞純大妃念祖淳當爲肺腑之親, 擢授戎垣。 於是龍柱輩, 以祖淳非其黨, 恐大禮之後, 終爲己患, 遂嗾大司憲權裕, 粧出辛酉凶疏, 以 ‘都人尹、姞, 曲堗徙薪’ 等語, 爲熒惑嘗試之漸, 又發 ‘三揀不爲’、‘月無吉’ 之說, 誘脅一世, 煥之以首相, 奬裕以老臣忠悃, 機甚危迫, 賴貞純大妃, 確然不動, 未敢售。 至甲子夏, 因臺臣言, 鞫裕徑斃, 施大逆律, 誅其于犯者。 乙丑冬, 右相金達淳, 初筵請景慕宮代理時上書人朴致遠、尹在謙褒典, 仍進洗草書本, 以干犯某年, 背馳先王, 賜死。 凡其黨與, 盡行竄黜, 追削煥之官, 及金履永疏發, 漢祿凶言, 擧國討之, 追施大逆律, 應坐者配之, 復削龜柱官, 又追削鐘秀官。 蓋龜、祿稔凶首尾五十載, 至是罪人斯得, 天討始大行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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