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 10월 13일 무진 1/1 기사 / 1711년 청 강희(康熙) 50년
전옥 죄인 윤진흥과 장천련을 개좌하여 추문하고 부대시참하다
국역
처음에 대신(大臣)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전옥(典獄)의 죄인 윤진흥(尹震興)과 장천련(張千連)을 금부(禁府)로 이송(移送)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개좌(開坐)하여 추문하니, 윤진흥의 공사에 일컫기를,
"6월 사이에 함께 있는 죄수 장천련이 갑자기 강개(慷慨)한 빛을 보이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괘서(掛書)한 일은 밖의 사람과 서로 통하고 있어 그 단서를 알게 되었다.’고 하여 끝에 가서 고달(告達)한 것이니, 만약 장천련에게 물으면 그가 마땅히 곧바로 진달할 것입니다."
하였다. 장천련의 공사(供辭)에는 말하기를,
"임오년453) 9월에 장의동(壯義洞) 사인(士人) 이성번 (李盛藩)이 곡산(谷山)의 전세(田稅)를 방납(防納)454) 했다는 일로 갇혀서 같은 칸에 함께 있었는데, 그가 여질[癘病]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밤낮으로 구호(救護)하여 정의(情義)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이성번이 방송(放送)된 후에 그를 구료(救療)해 준 정을 생각하여 혹 문안하기도 하고, 혹은 먹을 것을 보내 오기도 하였는데, 이번 3월 13일에는 형(刑)을 받는 일로 형조(刑曹)로 나아가던 중, 이성번의 아들 이방억(李方億)을 혜정교(惠政橋)에서 만났습니다. 이방억이 따라와 술을 주면서 은근함을 극진히 하고, 이어 말하기를, ‘그대는 죽을까 걱정하지 말라. 반드시 살아날 날이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이어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우리 부자(父子)가 상의하여 장차 방(榜) 거는 일을 하려고 한다. 만약 일이 성공하면 그대는 방송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방을 건다고 어찌 방송(放送)되겠는가?’ 하니, 이방억이 손을 흔들어 중지시키면서 말하기를, ‘조심하여 입 밖에 내지 말라. 지난 겨울에 해랑도(海浪島) 적(賊)의 일로 소란이 있었으니, 이때에 방(榜)을 걸면 인심이 더욱 흉흉해지고 시끄러워서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우므로 옥(獄)이 비게 될 것이니, 어찌 살아날 방도가 아니겠는가? 만약 벗어나 오거든 모름지기 나를 파주(坡州)로 찾아와 양식 밑천을 가져가라.’ 하였습니다. 5월 초3일에는 또 그의 종 백이(白伊)를 시켜 옥문(獄門) 밖에 와서 엽전(葉錢) 1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그 일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그대가 얼마나 더 갇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6월에 비로소 이 일을 윤진흥(尹震興)에게 말하였습니다."
하니, 금부에서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이성번(李盛蕃)·이방억(李方億)·백이(白伊) 등을 나문(拿問)할 것을 계청하였다. 종사관(從事官)이 돌아와 말하기를,
"이성번은 연전(年前)에 죽었고, 그 아들의 이름은 방억이 아니라 방엽(方燁)이었으며, 사는 곳도 파주(坡州)가 아니고 바로 부평(富平)이었으며, 이성번의 종 가운데는 원래 백이라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주와 부평 두곳에 나장(羅將)을 나누어 보내 이성번 부자(父子)와 그의 종 백이를 찾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 이성번이라 이름한 사람을 파주에서 잡아오고, 종 백이는 부평에서 잡아왔는데, 부평부(富平府)에서 치보(馳報)하기를,
"이방엽(李方燁)의 아비는 이성번이 아니라 바로 이후번(李後蕃)인데 지금은 이미 죽었으며, 이방엽은 마침 다른 곳에 가서 그의 어미 및 동생 이방걸(李方杰)을 잡아 보냅니다."
하였다. 이성번 및 백이를 추문(推問)하니, 이성번이 말하기를,
"본래 파주의 교생(校生)으로 원래 방납(防納)한 일로 갇힌 일이 없으며, 또 장천련(張千連)과는 원래 면식(面識)이 없습니다. 아직 아내를 얻지 못했는데 어찌 아들이 있겠으며, 또 백이라 이름한 사람도 모릅니다."
하고, 백이는 말하기를,
"본래 신문(新門) 밖에 사는 사인(士人) 이창문(李昌門)의 종으로 이른바 이방억이란 이름은 금시 초문(今始初聞)입니다."
하였다. 금부에서 두 사람을 장천련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니, 장천련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고한 이성번과 백이가 아닙니다."
하였다. 한성부(漢城府)에서 장적(帳籍)을 고출(考出)해 보니, 이성번은 단지 기묘년에 경적(京籍)에 들어왔는데, 아들 이방엽(李方燁)·이방욱(李方煜)을 거느린 것으로 되어 있고, 신묘년 부평(富平)의 호적에는 이방엽(李方燁)이 호주(戶主)로 되어 있으며 아비의 이름은 이후번(李後蕃)으로 되어 있었으나, 백이(白伊)는 원래 그 밑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방엽(李方燁)의 어미를 추문하니, 말하기를,
"남편 이성번이 곡산(谷山)의 전세(田稅)를 방납한 일로 갇혔다가 을유년455) 에 방송되었는데 기축년456) 에 죽었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후번(後蕃)이라고 이름을 고친 일이 있는 듯 싶은데,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실제 방엽(方燁)으로 이른바 방억(方億)은 금시 초문입니다. 방엽은 올 가을에 목화(木花)를 무역(貿易)하는 일로 호서(湖西)·해서(海西) 지방으로 갔습니다."
하니, 금부에서 백이를 방송할 것을 아뢰고, 또 이성번(李盛蕃)의 적형(嫡兄) 이항번(李恒蕃)을 잡아다 이성번이 이름을 고친 곡절과 생사(生死)의 허실을 험문(驗問)할 것을 청하였다. 이항번이 말하기를,
"이성번은 과연 얼제(孼弟)457) 인데, 경진년458) 에 전세를 방납한 일로 갇혔다가 을유년에 방송되었습니다. 기축년 삭녕(朔寧)에 갔다가 화적(火賊)의 칼에 찔려 죽었는데, 이는 바로 배반한 노예배의 소행으로, 토포영(討捕營)에서 그 일을 느슨하게 다루기 때문에 그의 아들 이방욱(李方煜)이 격고(擊鼓)하여 억울함을 하소하였는데, 그 일은 형조에 내려져 있습니다. 이름자가 서로 틀린 일은 그가 죄를 입어 갇힌 것을 부끄럽게 여겨 과연 이후에 후번이라 개명하였고, 이방엽은 9월에 해서(海西)로 내려갔으며, 백이는 족인(族人) 이창문(李昌門)의 종이요 이방엽의 종은 아닙니다."
하였다. 금부에서 형조에 있는 이방욱(李方煜)의 격고(擊鼓) 추안(推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이성번이 죽은 것은 명백하였다. 이로써 다시 장천련을 추고하니, 이방억(李方億)의 개명(改名) 여부와 이성번의 사생(死生)은 그가 아는 바가 아니라 하였으며, 이번 3월에 이방억이 흑립(黑笠)을 쓰고 도포(道袍)를 입고 와서 부자(父子)가 방(榜) 거는 일을 상의하였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만약 면질(面質)시켜 준다면 그 자리에서 증명할 수가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얼마 후, 이방엽(李方燁)을 잡아다 추문하였더니, 말하기를,
"아비 이성번은 전세의 일로 갇혀 신사년459) 에 금부(禁府)로 옮겼다가 갑신년460) 에 다시 갇히고, 을유년에 방환되어 기축년에 죽었습니다."
하여, 장천련이 이른바 임오년 운운한 것과는 연도가 서로 틀렸다. 또 말하기를,
"금년 정월에 옹진(甕津)에 가서 읍내 최영선(崔迎善)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3월 초 10일에 떠나 17일에 곧바로 부평에 돌아왔습니다. 옹진과 서울의 거리는 바로 5일정(日程)이므로 13일에 만났다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고, 종 가운데 원래 백이라 이름한 자도 없으니 백이를 시켜 말을 전했다는 것 역시 매우 맹랑하고, 또 이른바 이방억이란 이름도 금시 초문입니다."
하였다. 금부에서 면질(面質)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장천련이 말하기를,
"그때 대화하는 형상을 죄인 정팔익(鄭八翼)이 참여해 보았습니다."
하므로, 금부에서 정팔익을 추문하니, 말하기를,
"계하(啓下)461) 한 죄인과 형조(刑曹)의 죄인은 원래 일시에 상조(上曹)하는 규정이 없습니다. 저는 계하의 죄인이어서 원래 장천련과 함께 형조에 간 일이 없는데, 어찌 참여하여 볼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판의금(判義禁) 최석항(崔錫恒)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장천련의 공사(供辭)에 어긋난 단서가 매우 많고, 또 그가 ‘3월 13일 형을 받기 위해 형조로 갈 때에 이방억을 만났다.’고 말하는데, 형조의 문서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3월 안에는 장천련이 형조에 간 일이 없었습니다. 마땅히 형신(刑訊)을 청하여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는 이진해(李振海)와 다름이 있어, 거짓이면 무고(誣告)가 될 것이므로 본부(本府)에서 안치(按治)하는 것은 부당하니,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국청을 설치하기에 미쳐서 장천련은 기꺼이 즉시 자복(自服)하지 않았고, 윤진흥(尹震興)은 말하기를,
"장천련이 언서(諺書)로 수표(手標)를 만들어 주기에 이른 까닭으로 발고(發告)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먼저 장천련을 형추하기를 청하였는데, 장천련은 형장(刑杖) 1차를 맞고 승복(承服)하여 윤진흥과 함께 꾀하여 계획을 세운 형상이 그 초사에 드러났다. 또 윤진흥을 형추하기를 청하였는데, 윤진흥은 위엄(威嚴)을 가하자 승복하였다. 장천련의 결안(結案)에 말하기를,
"일찍이 이성번과 함께 옥(獄)에 있으면서 그가 글에 능하고 글씨를 잘 쓰는 것을 익히 알았기 때문에 계획을 세울 때에 그가 이미 죽은 것을 모르고 윤진흥에게 말하기를, ‘바야흐로 괘서(掛書)한 일로 조가(朝家)에서 현상(懸賞)하여 체포하는 거조가 있게 되는데, 사수(死囚)로서 고발한 자는 또한 죽음을 면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이성번처럼 글을 잘하는 자의 소행이다. 이를 틈타 고발하면 혹 죽음을 면할 수 있다.’라고 하니, 윤진흥은 말하기를, ‘네 말이 그럴듯하나 다만 네 말만을 믿고 이런 큰 일을 고발할 수는 없으니 모름지기 문자(文字)로 표(標)를 만들어 달라.’ 했던 까닭에 과연 언문으로 수표(手標)를 만들어 주고, 윤진흥으로 하여금 정장(呈狀)하게 한 것이다. 전초(前招) 안에 있는 ‘이성번 부자(父子)가 괘서했다.’는 일과 ‘3월 13일에 형조로 갈 때 이방억을 만나 대화하는 것을 정팔익(鄭八翼)이 참여하여 보았다.’는 등의 말은 모두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하였고, 윤진흥의 결안(結案)에도 역시 말하기를,
"죽음에서 살아날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과연 고발을 허락하였고, 수표를 받은 것은, 일이 이루어지면 상(賞)을 받을 수 있고 허사가 되더라도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 표문(標文)을 받고 정장(呈狀)한 것이다."
하였는데, 당초에 함께 모의하여 남을 무함한 악역(惡逆)의 형상이 확실하므로 장천련과 윤진흥은 수교(受敎) 및 《대전(大典)》에 의하여 부대시참(不待時斬)462) 하고, 그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였다.
- [註 453] 임오년 : 1702 숙종 28년.
- [註 454] 방납(防納) : 백성들이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로 공물(貢物)을 바치는데, 그 지방에서 생산할 수 없는 가공품이나 토산이 아닌 공물을 바쳐야 할 경우에 납공자(納貢者)의 공물을 대신 바치고 그 값을 갑절이나 불려 받던 일.
- [註 455]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 [註 456] 기축년 : 1709 숙종 35년.
- [註 457] 얼제(孼弟) : 서제(庶弟).
- [註 458] 경진년 : 1700 숙종 26년.
- [註 459] 신사년 : 1701 숙종 27년.
- [註 460] 갑신년 : 1704 숙종 30년.
- [註 461] 계하(啓下) : 임금의 재가를 받음.
- [註 462] 부대시참(不待時斬) :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참(處斬)함. 사형을 할 때 가을철 추분(秋分)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이나, 십악 대죄(十惡大罪) 등 중죄(重罪)를 범한 죄인은 이에 구애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였음.
원문
○戊辰/初, 大臣筵白請典獄罪人尹震興、張千連, 移送禁府。 開坐推問, 則震興供辭稱: "六月間同囚張千連, 忽有慷慨之色, 問其故則以爲: ‘掛書事, 有與外人相通與知之端, 而末由告達。’ 若問千連, 渠當直陳。" 千連供辭以爲: "壬午九月, 壯義洞士人李盛蕃, 以谷山田稅防納事被囚, 同在一間, 患厲幾死, 故爲之晝夜救護, 情義不泛。 盛蕃蒙放之後, 軫其救療之情, 或存問兼饋食物。 今三月十三日, 以受刑事, 將往刑曹, 逢盛蕃之子方億於惠政橋。 方億追到饋酒, 極致慇懃, 仍言汝勿慮死。 必有可生之日。’ 乃附耳語曰: ‘吾父子相議, 將有掛榜事。 若成事, 則汝當見放。’ 問掛榜何與於見放乎? 方億揮手止之曰: ‘愼勿出口。 前冬以海浪賊事, 有騷屑。 此際掛榜, 則人心益增洶擾, 國內大亂, 獄隨以空虛, 豈非可生之道乎? 若見脫, 須訪我於坡州, 覓去糧資。’ 五月初三日, 又使其奴白伊, 到獄門外, 遺十葉錢, 語以其事已成, 汝幾何在囚也? 六月, 始以此事, 言於震興矣。" 禁府啓請, 使捕廳拿問盛蕃、方億、白伊等。 從事官回告以爲: "盛蕃年前身死, 厥子名非方億, 乃方燁, 所居非坡州, 乃富平。 盛蕃之奴, 元無白伊爲名之人。 坡州、富平兩處, 分送羅將, 盛蕃父子及其奴白伊, 使之搜覓矣, 旣而李盛蕃爲名人, 自坡州拿來, 奴白伊自富平捉來, 而富平府馳報, 方燁之父非盛蕃, 乃後蕃, 而今已身死, 方燁則適往他處, 其母及弟方杰捉送云。" 推問李盛蕃及白伊, 則盛蕃以爲: "本以坡州校生, 元無以防納事被囚之事, 且與張千連元不識面。 尙未娶妻, 何以有子? 又不知白伊爲名之人。" 白伊以爲: "本以新門外士人李昌門之奴。 所謂李方億, 今始初聞。" 禁府請使兩人, 與千連面質, 則千連曰: "此非吾所告之李盛蕃及白伊也。 漢城府考出帳籍, 則李盛蕃只於己卯入京籍, 而率子方燁、方煜。 辛卯富平戶籍, 則邦燁爲主戶, 父名書以後蕃, 白伊則元無載錄於率下。 推問方燁之母, 則以爲: "夫盛蕃, 以谷山田稅防納事被囚, 乙酉蒙放, 己丑身死。 夫生時似有改名後蕃之事, 而不能詳知。 子名實邦燁, 而所謂方億, 今始初聞。 邦燁, 今秋以木花貿易, 出往湖西、海西間。" 禁府啓放白伊, 又請拿盛蕃嫡兄恒蕃, 驗問盛蕃改名曲折, 生死虛實。 恒蕃以爲: "成蕃果其孽弟, 而庚辰以田稅防納事, 被囚, 乙酉蒙放。 己丑往朔寧, 爲火賊所刃殺, 而此乃叛奴輩所爲, 討捕營緩治其事, 故其子邦煜, 擊皷訟冤, 事下刑曹。 名字相左事, 渠以被罪見囚爲恥, 果以後蕃改名, 邦燁則九月, 下往海西, 白伊則族人李昌門之奴, 非邦燁之奴也。 禁府取考刑曹所在邦煜擊皷推案, 則盛蕃之死, 明白矣。 以此更推於千連, 則以爲方億改名與否, 盛蕃死生, 非渠所知, 今三月, 方億戴黑笠着道袍, 以父子相議掛榜事, 分明言說, 若與面質, 則可以立辨。 未幾邦燁拿來推問, 則以爲: "其父盛蕃, 以田稅事被囚, 辛巳移禁府, 甲申還囚, 乙酉蒙放, 己丑身死。 千連所謂壬午云云, 年歲相左。" 又以爲: "渠於今年正月, 往甕津, 止接於邑內崔迎善家, 三月初十日離發, 十七日直歸富平。 甕津距京, 乃五日程, 十三日逢着之說, 萬萬無據, 奴名元無白伊, 則使白伊傳語者, 亦甚孟浪, 且所謂方億之名, 今始初聞。" 禁府請使面質, 則千連以爲: "伊時對話之狀, 罪人鄭八翼參見矣。" 禁府推問八翼, 則以爲: "啓下罪人, 與刑曹罪人, 元無一時上曹之規。 渠則自是啓下罪人, 元不與千連同往刑曹, 豈有參見之理乎?" 至是, 判義禁崔錫恒筵白曰: "千連所供, 違端甚多。 且渠以三月十三日, 將受刑上曹時, 逢着方億爲言, 而取考刑曹文書, 三月內千連無一番上曹之事。 似當請刑。" 上敎以此與李振海有異, 虛則爲誣告, 不當自本府按治, 設鞫可也。 及設鞫, 千連不肯卽服, 震興則以爲: "千連至以諺書, 成給手標, 故不得不發告。" 鞫廳先請刑推千連, 千連受刑第一度承服, 而震興同謀設計之狀, 現露於其招。 又請刑推震興, 震興施威次承服。 千連結案曰: "曾與李盛蕃, 同在獄中, 稔知其能文善書, 故設計之時, 不意其已死, 言于尹震興曰: ‘方以掛書事, 朝家有購捕之擧, 而死囚之發告者, 亦許免死云。 此必如盛蕃能文者所爲也。 乘此發告, 或可免死云, 則震興曰: ‘汝言然矣, 但不可只憑汝言, 發此大事。 須以文字成標’ 云, 故果爲成給諺文手標, 使震興呈狀矣。 前招內, 盛蕃父子掛書事, 及三月十三日上曹時, 與方億接話, 八翼參見等說, 俱是虛妄的實。" 震興決案, 亦以爲死中求生之心, 不能無動, 故果許發告, 而若受手標, 則事成可以受賞, 歸虛亦足爲免死之證, 以此受其標文而呈狀。 當初同謀誣人惡逆之狀, 的實。 千連、震興, 依受敎及《大典》, 不待時斬, 籍沒家産。
숙종 37년 (1711) 10월 13일
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 10월 13일 무진 1/1 기사 / 1711년 청 강희(康熙) 50년
전옥 죄인 윤진흥과 장천련을 개좌하여 추문하고 부대시참하다
국역
처음에 대신(大臣)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전옥(典獄)의 죄인 윤진흥(尹震興)과 장천련(張千連)을 금부(禁府)로 이송(移送)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개좌(開坐)하여 추문하니, 윤진흥의 공사에 일컫기를,
"6월 사이에 함께 있는 죄수 장천련이 갑자기 강개(慷慨)한 빛을 보이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괘서(掛書)한 일은 밖의 사람과 서로 통하고 있어 그 단서를 알게 되었다.’고 하여 끝에 가서 고달(告達)한 것이니, 만약 장천련에게 물으면 그가 마땅히 곧바로 진달할 것입니다."
하였다. 장천련의 공사(供辭)에는 말하기를,
"임오년453) 9월에 장의동(壯義洞) 사인(士人) 이성번 (李盛藩)이 곡산(谷山)의 전세(田稅)를 방납(防納)454) 했다는 일로 갇혀서 같은 칸에 함께 있었는데, 그가 여질[癘病]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밤낮으로 구호(救護)하여 정의(情義)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이성번이 방송(放送)된 후에 그를 구료(救療)해 준 정을 생각하여 혹 문안하기도 하고, 혹은 먹을 것을 보내 오기도 하였는데, 이번 3월 13일에는 형(刑)을 받는 일로 형조(刑曹)로 나아가던 중, 이성번의 아들 이방억(李方億)을 혜정교(惠政橋)에서 만났습니다. 이방억이 따라와 술을 주면서 은근함을 극진히 하고, 이어 말하기를, ‘그대는 죽을까 걱정하지 말라. 반드시 살아날 날이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이어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우리 부자(父子)가 상의하여 장차 방(榜) 거는 일을 하려고 한다. 만약 일이 성공하면 그대는 방송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방을 건다고 어찌 방송(放送)되겠는가?’ 하니, 이방억이 손을 흔들어 중지시키면서 말하기를, ‘조심하여 입 밖에 내지 말라. 지난 겨울에 해랑도(海浪島) 적(賊)의 일로 소란이 있었으니, 이때에 방(榜)을 걸면 인심이 더욱 흉흉해지고 시끄러워서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우므로 옥(獄)이 비게 될 것이니, 어찌 살아날 방도가 아니겠는가? 만약 벗어나 오거든 모름지기 나를 파주(坡州)로 찾아와 양식 밑천을 가져가라.’ 하였습니다. 5월 초3일에는 또 그의 종 백이(白伊)를 시켜 옥문(獄門) 밖에 와서 엽전(葉錢) 1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그 일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그대가 얼마나 더 갇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6월에 비로소 이 일을 윤진흥(尹震興)에게 말하였습니다."
하니, 금부에서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이성번(李盛蕃)·이방억(李方億)·백이(白伊) 등을 나문(拿問)할 것을 계청하였다. 종사관(從事官)이 돌아와 말하기를,
"이성번은 연전(年前)에 죽었고, 그 아들의 이름은 방억이 아니라 방엽(方燁)이었으며, 사는 곳도 파주(坡州)가 아니고 바로 부평(富平)이었으며, 이성번의 종 가운데는 원래 백이라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주와 부평 두곳에 나장(羅將)을 나누어 보내 이성번 부자(父子)와 그의 종 백이를 찾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 이성번이라 이름한 사람을 파주에서 잡아오고, 종 백이는 부평에서 잡아왔는데, 부평부(富平府)에서 치보(馳報)하기를,
"이방엽(李方燁)의 아비는 이성번이 아니라 바로 이후번(李後蕃)인데 지금은 이미 죽었으며, 이방엽은 마침 다른 곳에 가서 그의 어미 및 동생 이방걸(李方杰)을 잡아 보냅니다."
하였다. 이성번 및 백이를 추문(推問)하니, 이성번이 말하기를,
"본래 파주의 교생(校生)으로 원래 방납(防納)한 일로 갇힌 일이 없으며, 또 장천련(張千連)과는 원래 면식(面識)이 없습니다. 아직 아내를 얻지 못했는데 어찌 아들이 있겠으며, 또 백이라 이름한 사람도 모릅니다."
하고, 백이는 말하기를,
"본래 신문(新門) 밖에 사는 사인(士人) 이창문(李昌門)의 종으로 이른바 이방억이란 이름은 금시 초문(今始初聞)입니다."
하였다. 금부에서 두 사람을 장천련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니, 장천련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고한 이성번과 백이가 아닙니다."
하였다. 한성부(漢城府)에서 장적(帳籍)을 고출(考出)해 보니, 이성번은 단지 기묘년에 경적(京籍)에 들어왔는데, 아들 이방엽(李方燁)·이방욱(李方煜)을 거느린 것으로 되어 있고, 신묘년 부평(富平)의 호적에는 이방엽(李方燁)이 호주(戶主)로 되어 있으며 아비의 이름은 이후번(李後蕃)으로 되어 있었으나, 백이(白伊)는 원래 그 밑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방엽(李方燁)의 어미를 추문하니, 말하기를,
"남편 이성번이 곡산(谷山)의 전세(田稅)를 방납한 일로 갇혔다가 을유년455) 에 방송되었는데 기축년456) 에 죽었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후번(後蕃)이라고 이름을 고친 일이 있는 듯 싶은데,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실제 방엽(方燁)으로 이른바 방억(方億)은 금시 초문입니다. 방엽은 올 가을에 목화(木花)를 무역(貿易)하는 일로 호서(湖西)·해서(海西) 지방으로 갔습니다."
하니, 금부에서 백이를 방송할 것을 아뢰고, 또 이성번(李盛蕃)의 적형(嫡兄) 이항번(李恒蕃)을 잡아다 이성번이 이름을 고친 곡절과 생사(生死)의 허실을 험문(驗問)할 것을 청하였다. 이항번이 말하기를,
"이성번은 과연 얼제(孼弟)457) 인데, 경진년458) 에 전세를 방납한 일로 갇혔다가 을유년에 방송되었습니다. 기축년 삭녕(朔寧)에 갔다가 화적(火賊)의 칼에 찔려 죽었는데, 이는 바로 배반한 노예배의 소행으로, 토포영(討捕營)에서 그 일을 느슨하게 다루기 때문에 그의 아들 이방욱(李方煜)이 격고(擊鼓)하여 억울함을 하소하였는데, 그 일은 형조에 내려져 있습니다. 이름자가 서로 틀린 일은 그가 죄를 입어 갇힌 것을 부끄럽게 여겨 과연 이후에 후번이라 개명하였고, 이방엽은 9월에 해서(海西)로 내려갔으며, 백이는 족인(族人) 이창문(李昌門)의 종이요 이방엽의 종은 아닙니다."
하였다. 금부에서 형조에 있는 이방욱(李方煜)의 격고(擊鼓) 추안(推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이성번이 죽은 것은 명백하였다. 이로써 다시 장천련을 추고하니, 이방억(李方億)의 개명(改名) 여부와 이성번의 사생(死生)은 그가 아는 바가 아니라 하였으며, 이번 3월에 이방억이 흑립(黑笠)을 쓰고 도포(道袍)를 입고 와서 부자(父子)가 방(榜) 거는 일을 상의하였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만약 면질(面質)시켜 준다면 그 자리에서 증명할 수가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얼마 후, 이방엽(李方燁)을 잡아다 추문하였더니, 말하기를,
"아비 이성번은 전세의 일로 갇혀 신사년459) 에 금부(禁府)로 옮겼다가 갑신년460) 에 다시 갇히고, 을유년에 방환되어 기축년에 죽었습니다."
하여, 장천련이 이른바 임오년 운운한 것과는 연도가 서로 틀렸다. 또 말하기를,
"금년 정월에 옹진(甕津)에 가서 읍내 최영선(崔迎善)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3월 초 10일에 떠나 17일에 곧바로 부평에 돌아왔습니다. 옹진과 서울의 거리는 바로 5일정(日程)이므로 13일에 만났다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고, 종 가운데 원래 백이라 이름한 자도 없으니 백이를 시켜 말을 전했다는 것 역시 매우 맹랑하고, 또 이른바 이방억이란 이름도 금시 초문입니다."
하였다. 금부에서 면질(面質)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장천련이 말하기를,
"그때 대화하는 형상을 죄인 정팔익(鄭八翼)이 참여해 보았습니다."
하므로, 금부에서 정팔익을 추문하니, 말하기를,
"계하(啓下)461) 한 죄인과 형조(刑曹)의 죄인은 원래 일시에 상조(上曹)하는 규정이 없습니다. 저는 계하의 죄인이어서 원래 장천련과 함께 형조에 간 일이 없는데, 어찌 참여하여 볼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판의금(判義禁) 최석항(崔錫恒)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장천련의 공사(供辭)에 어긋난 단서가 매우 많고, 또 그가 ‘3월 13일 형을 받기 위해 형조로 갈 때에 이방억을 만났다.’고 말하는데, 형조의 문서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3월 안에는 장천련이 형조에 간 일이 없었습니다. 마땅히 형신(刑訊)을 청하여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는 이진해(李振海)와 다름이 있어, 거짓이면 무고(誣告)가 될 것이므로 본부(本府)에서 안치(按治)하는 것은 부당하니,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국청을 설치하기에 미쳐서 장천련은 기꺼이 즉시 자복(自服)하지 않았고, 윤진흥(尹震興)은 말하기를,
"장천련이 언서(諺書)로 수표(手標)를 만들어 주기에 이른 까닭으로 발고(發告)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먼저 장천련을 형추하기를 청하였는데, 장천련은 형장(刑杖) 1차를 맞고 승복(承服)하여 윤진흥과 함께 꾀하여 계획을 세운 형상이 그 초사에 드러났다. 또 윤진흥을 형추하기를 청하였는데, 윤진흥은 위엄(威嚴)을 가하자 승복하였다. 장천련의 결안(結案)에 말하기를,
"일찍이 이성번과 함께 옥(獄)에 있으면서 그가 글에 능하고 글씨를 잘 쓰는 것을 익히 알았기 때문에 계획을 세울 때에 그가 이미 죽은 것을 모르고 윤진흥에게 말하기를, ‘바야흐로 괘서(掛書)한 일로 조가(朝家)에서 현상(懸賞)하여 체포하는 거조가 있게 되는데, 사수(死囚)로서 고발한 자는 또한 죽음을 면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이성번처럼 글을 잘하는 자의 소행이다. 이를 틈타 고발하면 혹 죽음을 면할 수 있다.’라고 하니, 윤진흥은 말하기를, ‘네 말이 그럴듯하나 다만 네 말만을 믿고 이런 큰 일을 고발할 수는 없으니 모름지기 문자(文字)로 표(標)를 만들어 달라.’ 했던 까닭에 과연 언문으로 수표(手標)를 만들어 주고, 윤진흥으로 하여금 정장(呈狀)하게 한 것이다. 전초(前招) 안에 있는 ‘이성번 부자(父子)가 괘서했다.’는 일과 ‘3월 13일에 형조로 갈 때 이방억을 만나 대화하는 것을 정팔익(鄭八翼)이 참여하여 보았다.’는 등의 말은 모두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하였고, 윤진흥의 결안(結案)에도 역시 말하기를,
"죽음에서 살아날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과연 고발을 허락하였고, 수표를 받은 것은, 일이 이루어지면 상(賞)을 받을 수 있고 허사가 되더라도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 표문(標文)을 받고 정장(呈狀)한 것이다."
하였는데, 당초에 함께 모의하여 남을 무함한 악역(惡逆)의 형상이 확실하므로 장천련과 윤진흥은 수교(受敎) 및 《대전(大典)》에 의하여 부대시참(不待時斬)462) 하고, 그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였다.
- [註 453] 임오년 : 1702 숙종 28년.
- [註 454] 방납(防納) : 백성들이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로 공물(貢物)을 바치는데, 그 지방에서 생산할 수 없는 가공품이나 토산이 아닌 공물을 바쳐야 할 경우에 납공자(納貢者)의 공물을 대신 바치고 그 값을 갑절이나 불려 받던 일.
- [註 455]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 [註 456] 기축년 : 1709 숙종 35년.
- [註 457] 얼제(孼弟) : 서제(庶弟).
- [註 458] 경진년 : 1700 숙종 26년.
- [註 459] 신사년 : 1701 숙종 27년.
- [註 460] 갑신년 : 1704 숙종 30년.
- [註 461] 계하(啓下) : 임금의 재가를 받음.
- [註 462] 부대시참(不待時斬) :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참(處斬)함. 사형을 할 때 가을철 추분(秋分)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이나, 십악 대죄(十惡大罪) 등 중죄(重罪)를 범한 죄인은 이에 구애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였음.
원문
○戊辰/初, 大臣筵白請典獄罪人尹震興、張千連, 移送禁府。 開坐推問, 則震興供辭稱: "六月間同囚張千連, 忽有慷慨之色, 問其故則以爲: ‘掛書事, 有與外人相通與知之端, 而末由告達。’ 若問千連, 渠當直陳。" 千連供辭以爲: "壬午九月, 壯義洞士人李盛蕃, 以谷山田稅防納事被囚, 同在一間, 患厲幾死, 故爲之晝夜救護, 情義不泛。 盛蕃蒙放之後, 軫其救療之情, 或存問兼饋食物。 今三月十三日, 以受刑事, 將往刑曹, 逢盛蕃之子方億於惠政橋。 方億追到饋酒, 極致慇懃, 仍言汝勿慮死。 必有可生之日。’ 乃附耳語曰: ‘吾父子相議, 將有掛榜事。 若成事, 則汝當見放。’ 問掛榜何與於見放乎? 方億揮手止之曰: ‘愼勿出口。 前冬以海浪賊事, 有騷屑。 此際掛榜, 則人心益增洶擾, 國內大亂, 獄隨以空虛, 豈非可生之道乎? 若見脫, 須訪我於坡州, 覓去糧資。’ 五月初三日, 又使其奴白伊, 到獄門外, 遺十葉錢, 語以其事已成, 汝幾何在囚也? 六月, 始以此事, 言於震興矣。" 禁府啓請, 使捕廳拿問盛蕃、方億、白伊等。 從事官回告以爲: "盛蕃年前身死, 厥子名非方億, 乃方燁, 所居非坡州, 乃富平。 盛蕃之奴, 元無白伊爲名之人。 坡州、富平兩處, 分送羅將, 盛蕃父子及其奴白伊, 使之搜覓矣, 旣而李盛蕃爲名人, 自坡州拿來, 奴白伊自富平捉來, 而富平府馳報, 方燁之父非盛蕃, 乃後蕃, 而今已身死, 方燁則適往他處, 其母及弟方杰捉送云。" 推問李盛蕃及白伊, 則盛蕃以爲: "本以坡州校生, 元無以防納事被囚之事, 且與張千連元不識面。 尙未娶妻, 何以有子? 又不知白伊爲名之人。" 白伊以爲: "本以新門外士人李昌門之奴。 所謂李方億, 今始初聞。" 禁府請使兩人, 與千連面質, 則千連曰: "此非吾所告之李盛蕃及白伊也。 漢城府考出帳籍, 則李盛蕃只於己卯入京籍, 而率子方燁、方煜。 辛卯富平戶籍, 則邦燁爲主戶, 父名書以後蕃, 白伊則元無載錄於率下。 推問方燁之母, 則以爲: "夫盛蕃, 以谷山田稅防納事被囚, 乙酉蒙放, 己丑身死。 夫生時似有改名後蕃之事, 而不能詳知。 子名實邦燁, 而所謂方億, 今始初聞。 邦燁, 今秋以木花貿易, 出往湖西、海西間。" 禁府啓放白伊, 又請拿盛蕃嫡兄恒蕃, 驗問盛蕃改名曲折, 生死虛實。 恒蕃以爲: "成蕃果其孽弟, 而庚辰以田稅防納事, 被囚, 乙酉蒙放。 己丑往朔寧, 爲火賊所刃殺, 而此乃叛奴輩所爲, 討捕營緩治其事, 故其子邦煜, 擊皷訟冤, 事下刑曹。 名字相左事, 渠以被罪見囚爲恥, 果以後蕃改名, 邦燁則九月, 下往海西, 白伊則族人李昌門之奴, 非邦燁之奴也。 禁府取考刑曹所在邦煜擊皷推案, 則盛蕃之死, 明白矣。 以此更推於千連, 則以爲方億改名與否, 盛蕃死生, 非渠所知, 今三月, 方億戴黑笠着道袍, 以父子相議掛榜事, 分明言說, 若與面質, 則可以立辨。 未幾邦燁拿來推問, 則以爲: "其父盛蕃, 以田稅事被囚, 辛巳移禁府, 甲申還囚, 乙酉蒙放, 己丑身死。 千連所謂壬午云云, 年歲相左。" 又以爲: "渠於今年正月, 往甕津, 止接於邑內崔迎善家, 三月初十日離發, 十七日直歸富平。 甕津距京, 乃五日程, 十三日逢着之說, 萬萬無據, 奴名元無白伊, 則使白伊傳語者, 亦甚孟浪, 且所謂方億之名, 今始初聞。" 禁府請使面質, 則千連以爲: "伊時對話之狀, 罪人鄭八翼參見矣。" 禁府推問八翼, 則以爲: "啓下罪人, 與刑曹罪人, 元無一時上曹之規。 渠則自是啓下罪人, 元不與千連同往刑曹, 豈有參見之理乎?" 至是, 判義禁崔錫恒筵白曰: "千連所供, 違端甚多。 且渠以三月十三日, 將受刑上曹時, 逢着方億爲言, 而取考刑曹文書, 三月內千連無一番上曹之事。 似當請刑。" 上敎以此與李振海有異, 虛則爲誣告, 不當自本府按治, 設鞫可也。 及設鞫, 千連不肯卽服, 震興則以爲: "千連至以諺書, 成給手標, 故不得不發告。" 鞫廳先請刑推千連, 千連受刑第一度承服, 而震興同謀設計之狀, 現露於其招。 又請刑推震興, 震興施威次承服。 千連結案曰: "曾與李盛蕃, 同在獄中, 稔知其能文善書, 故設計之時, 不意其已死, 言于尹震興曰: ‘方以掛書事, 朝家有購捕之擧, 而死囚之發告者, 亦許免死云。 此必如盛蕃能文者所爲也。 乘此發告, 或可免死云, 則震興曰: ‘汝言然矣, 但不可只憑汝言, 發此大事。 須以文字成標’ 云, 故果爲成給諺文手標, 使震興呈狀矣。 前招內, 盛蕃父子掛書事, 及三月十三日上曹時, 與方億接話, 八翼參見等說, 俱是虛妄的實。" 震興決案, 亦以爲死中求生之心, 不能無動, 故果許發告, 而若受手標, 則事成可以受賞, 歸虛亦足爲免死之證, 以此受其標文而呈狀。 當初同謀誣人惡逆之狀, 的實。 千連、震興, 依受敎及《大典》, 不待時斬, 籍沒家産。
원본
숙종 37년 (1711) 10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