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중초본]57권, 광해 4년 9월 18일 기유 1/1 기사 / 1612년 명 만력(萬曆) 40년
시사청에 나아가 조강하고 《상서》를 강독하다
국역
왕이 〈시사청(褀事廳)에 나아가〉 조강하였다. 영사(領事) 이항복, 특진관 김신원(金信元), 동지사 조정(趙挺), 특진관 유공량(柳公亮), 참찬관 이호신(李好信), 집의 신경락(申景洛), 사간 윤중삼(尹重三), 시강관 유숙(柳潚), 검토관 조명욱(曺明勖), 기사관 민응회(閔應恢)·이경여(李敬輿)·권척(權倜)이 입시하였다. 《상서(尙書)》의 대고(大誥)를 강독하였다. 〈유숙이 아뢰기를,
"문왕과 무왕은 그 백성들을 잘 받들고 덕을 행할 만하였으니 참으로 귀신과 하늘의 주인이 될 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문왕과 무왕을 가르치시어 아름답게 간택하신 다음 온 나라의 명을 그들에게 붙여주어 만국을 바로잡게 한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영승우려(靈承于旅)’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자 유숙이 아뢰기를,
"영(靈)은 선(善)이고 여(旅)는 중(衆)이니 ‘백성들을 잘 받든다.’는 뜻입니다. ‘식교용휴(式敎用休)’는 문왕과 무왕이 이미 하늘에게 인정을 받아 그 덕이 날로 새로워져 좌우로 도의 근원을 찾아냄에 그 생각이 일으켜주는 것 같고 그 행동이 도와주는 것 같았으니, 이는 바로 하늘이 가르치시어 성대하고도 아름답게 한 것이지 곡진하게 타이르면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장(章)은 ‘하늘이 이미 주나라에 게 천명(天命)을 주어 하나로 정해 주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오히려 조용히 있지 못하고 어수선하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명임을 분명하게 지적하여 간사한 마음을 품은 자를 두렵게 만들어 복종시킴이 이보다 더 절실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른바 ‘영승우려’라는 것은 그 당시의 방언입니다. 문리로서 말을 한다면 오히려 《대학》에서 이른바 ‘명명덕(明明德)’이며, 《중용》에서 이른바 ‘독공이천하평(篤恭而天下平)’입니다. 임금의 덕은 오로지 공(公)과 사(私)의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사사로움에 구애되어 공도를 행하지 않으면 비록 덕스럽게 되려고 하더라도 능히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치란과 홍망의 기미는 터럭만큼의 사이도 용납치 않는 것으로, 이른바 ‘극감용덕(克勘用德)’ 네 글자는 성학 공부에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은나라 백성들은 참으로 죄줄 만하다. 그러나 사람마다 모두 집터를 파내고 전지를 몰수할 수야 있겠는가."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은나라 백성들은 선왕(先王)의 은택을 생각하여 비록 주(紂)처럼 포학한 임금이 다스렸어도 사람들이 모반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이 이들에 대해서 곡진하게 타이르면서 효유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대개 위협에 못이겨 따른 사람들은 치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찌 사람마다 모두 죄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유숙이 아뢰기를,
"대개 이 편은 역적을 토죄하는 의리가 많이 있으니 상께서 유념하시는 것이 지당합니다. 온 나라 백성들의 목숨을 다 주벌할 수는 없으나 우두머리가 되는 자는 주살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것은 백성들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지 주왕(紂王)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대개 그 당시에 위협에 못이겨 따른 무리들은 주나라의 지극한 덕을 모르고 삼감(三監)102) 을 따라 난을 일으킨 것이므로 반복해서 타일러서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조정(趙挺)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양사가 사피함을 인하여 상께서 앞뒤로 내린 하교가 매우 엄준하였는데, 사체에 있어서 지극히 미안합니다. 언관은 말하는 것으로 책임을 맡고 있는바, 혹 과격한 말이 있더라도 상께서 반드시 너그럽게 용납하여 받아들여야만 직언이 들어올 것입니다. 소신은 노둔하여 참으로 아는 바가 없으나 언관으로 있기에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폐를 구제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기에 간원의 장관이 피혐한 데 대해서 잠시 말한 것이다. 진달한 말은 마땅히 유념하겠다. 경은 헌부의 장관으로 있으니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라."
하였다. 〈왕이 좌상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북도의 서장을 보건대 그 허실을 비록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자못 염려스러운 점이 있다. 모르겠다만 경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아이(阿耳)의 일은 과연 염려가 됩니다. 만약 곧장 몰아쳐 온다면 한 곳도 믿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근래에는 기근이 잇따르고 여역이 몹시 성하여 큰 고을의 토병(土兵)들이 혹 수백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의 풍수의 재해 또한 근고에 없던 바로서 일마다 불길하여 사람들의 기가 꺾였으니,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북병사를 아직까지 체차하지 않았는데, 만약 체차한다면 어느 사람이 합당하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합당한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이경준(李慶濬)은 상중에 있고 유형(柳珩)은 병중에 있으며 이기빈(李箕賓)은 논박을 받고 있습니다. 이 외에는 전혀 합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경의 소견을 말하기만 하라."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신진 무사 중에 이광영(李光英)·이괄(李适)·이종일(李宗一)을 잘 키우면 병사로 삼기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유공량이 아뢰기를,
"성스럽고 밝은 세상에 어찌 흉역들이 갑자기 일어날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당초에 체포할 즈음에는 백성들이 대부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연루되었던 자들이 대부분 석방되었으므로 민심이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그곳의 백성들은 글을 아는 자들이 없어서 몹시 완악스럽습니다. 수령을 만약 잘 가려뽑아서 보내면 거의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이 역적들의 정상을 자세히 살펴서 그 무리들을 체포하기에 힘쓰고 있으니, 참으로 기쁘다. 그들 중 석방해도 될 만한 연루자들을 이미 분간하여 석방하였다. 그곳의 인심은 전부터 이상하였는데, 대개 무지하고 무식해서 그런 것인가? 어찌하여 흉악하고 패려스럽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자 유공량이 아뢰기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라 본디 아는 것이 없어서 잡스러운 말에 일제히 동요되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김제세는 흉악한 모의를 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그간의 곡절과 한 짓에 대해 일찍이 들은 바가 없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역모가 아주 흉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으며, 비록 혹 알더라도 어찌 말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김강재는 어찌하여 체포하지 못하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그 무리들이 같은 고을에 산다는 기별을 일찍 듣지 못하여 끝내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실로 소루해서 그런 것인바, 몹시 황공스럽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이른바 ‘서로 화목하지 못했다.’고 하는 말은 참으로 그러한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그놈의 극악스런 일은 말할 것이 못 됩니다. 그 형제들은 서로 원수와 같이 지내어 송관(訟官)을 만나면 반드시 한꺼번에 정송(呈訟)하였다고 합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김일승(金日昇)의 일은 어찌하여 여러 날 동안 지체하게 되었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신율에게 물어보니 ‘적의 장물을 수색할 때 그 문서가 마침 나온 것이지 그 문서를 찾아내려고 해서 얻은 것은 아니다.’고 합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적장(賊將) 윤봉익(尹鳳翼)·최군(崔君) 등이 내응한다는 설은 상세히 알지 못하겠다. 경은 들은 바가 없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그 무리들은 반드시 변성명을 하였을 것으로, 들을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최봉춘(崔奉春) 등 전후로 두 사람을 잡아왔는데 뒤에 온 자가 혹시 이른바 최군(崔君)이 아니겠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상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은 민탁(閔卓)이 바로 윤봉익(尹鳳翼)이라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김제세는 종잡을 수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기 때문에 그의 말을 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김제세를 체포할 때, 곤장 한 대 때리지 않았는데도 낱낱이 승복하였는가, 엄하게 신문한 뒤 직초(直招)하였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대개 인신(印信)을 위조한 역적입니다. 곤장을 친 뒤에야 승복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유공량에게 묻기를,】
"정인홍을 끌어들인 일은 과연 김제세의 입에서 나왔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미 공초를 받아서 보고하였는바, 조정에서 마땅히 처치할 것이므로 소신은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윤훤(尹暄)이 다시 캐묻고자 하였으므로 소신이 한 도의 주장(主將)으로 있어서 부득불 가서 참여해 캐물었습니다. 정인홍의 일에 대해 김제세가 과연 말하였는데, 당초에 이미 공초를 받았으므로 상세히 캐묻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전차(戰車)를 만들어 두었는데 어떤 사람은 ‘아주 좋으니 많이 만들어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혹자는 ‘왜적을 방비하는 데는 마땅하나 오랑캐를 방비하는 데는 마땅치 않다.’ 합니다. 한교(韓嶠)가 자못 군법(軍法)을 알므로 도감에서 교훈관(敎訓官)이라고 칭하고서 전차를 만들게 허락하였습니다. 유형이 평안도에 있을 때에 역시 한교를 불러다가 전차를 만들게 해 시험해 보니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도 전차로 싸울 수 있는가?"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것은 평지에서 시험해 볼 수 있고 쓸 수 있는 법이지, 험준한 산천에서는 결단코 쓸 수가 없습니다. 6, 7년 전에 사간원에서도 차자를 올려 전차로 싸우기를 청하였습니다. 대개 이것은 총을 장치한 전차가 아니니 비록 그 제도가 같은 듯하나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담장을 둘러쳐서 막은 것 같은데 한 사람이 밀고서 갈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전차에는 몇 사람이나 탈 수 있는가?"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많이 탈 수는 없습니다. 대개 방패와 같습니다. 뒷날 교외에서 시재(試才)할 때 가지고 오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미시(未時)에 시사청에 나아가〉 영의정 이덕형, 개성 군수(開城郡守) 홍이상(洪履祥), 예조 참판 신율(申慄)을 인견하였는데, 〈좌승지 이호신(李好信), 기사관 민응회(閔應恢)·이경여(李敬輿)·권척(權倜)이 입시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오랑캐가 진고(進告)한 것은 전부터 혹 사실이 아닌 것이 있었다. 이번에 진고한 자는 자못 우리 나라를 위한 정성이 있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몹시 염려스럽다. 경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난리 뒤로 임무를 받은 곳이 모두 남쪽 지방이었으므로 바다를 방비하는 일에 대해서는 잘하고 잘못하고 간에 처리한 경험이 자못 많습니다. 그러나 북쪽 지방에 대해서는 일찍이 왕래해 보지 않았고 일을 처리해 보지 않아서 단지 변방 장수의 장계만 보고서 멀리서 헤아리므로 상세히 알지를 못합니다. 대개 요즈음에는 운수가 불행해서 함경 일로(一路)가 기근이 거듭되고 여역이 퍼져서 죽는 자가 잇달아 변성(邊城)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변란이 생기면, 눈 앞의 불을 먼 곳의 물을 길어다가 끄려는 것과 같아질 것이니,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다만 적의 형세가 홀적(忽賊)과 서로 다투고 있어서 쉽사리 변경을 침범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군사를 더 보태는 일은 예로부터 부득이한 거조에서 나온 것으로, 나라에서 늘상 행하던 규례가 아닙니다. 근래에 변방을 맡은 신하가 조정에서 고려해 주기를 바라서 으레 정도가 지나친 의논을 내어 혹 첨방군(添防軍)을 청하여 눈앞의 위급함을 구하고는 합니다. 그 사이의 실상은 상세히 알 수 없으며 번호(藩胡)가 진고한 말 역시 사실이 아닌 것이 많습니다. 만약 적정(賊情)의 허실을 정확히 알고 싶으면 의당 체찰사로 하여금 해도의 종사관을 보내게 하거나, 혹 비변사로 하여금 문낭청(文郞廳)을 보내어 적정을 염탐하게 〈하여야 합니다. 동옷을 가까운 시일 내에 들여보내야 하니 그때 그들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나누어 주게 하고 이어서 적의 소식을 염탐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체찰사에게 말하여 의논해 정하라. 대개 남방이나 북방이나 따질 것 없이 우리에게 있어서 방비가 견고한 다음에야 걱정이 없을 수 있다. 그런데 근래에는 느슨한 것이 풍조가 되어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고 있어 군무(軍務)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몹시 한심스럽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외환은 걱정할 것이 없었고 내환이 가장 걱정스러웠습니다. 반드시 조정에서부터 정신을 차려야만 천리 변방을 막을 기상이 생겨서 적을 막을 수가 있는 법입니다. 비변사에서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상께서도 모름지기 자강하도록 분발하여 항상 경칙하여 본보기를 보인 다음에야 바람에 풀이 눕는 듯한 효과가 메아리나 그림자보다 더 빠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국가가 한가로울 때 정형(政刑)을 밝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주에 ‘어진 이를 임용하고 능한 자를 부려서 각자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자강한다는 것의 실체는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조정은 바로 외방의 근본이니 반드시 조정을 먼저 바르게 한 다음에야 외방에 대한 걱정이 없을 수 있습니다.
상께서 여러 차례 변방의 방비를 신칙하는 명을 내리셨으나 조정의 일은 날이 갈수록 무너지고 있으니, 어떻게 기강을 바로잡고 변방의 방비를 신칙해서 외환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신과 같이 노둔한 자를 내쳐서 제거하고 상께서도 무언가 큰 일을 할 뜻을 가지신다면 조정을 존엄하게 하고 외침을 방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지당한바 내가 유념하겠다. 이러한 때에는 대신이 사피해서는 안 되니 그런 생각을 품지 말고 마음을 다해 직무를 살피라. 그리고 요즈음에는 단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기만을 일삼고 있는데, 예전에도 이와 같았는가? 그 까닭을 모르겠다."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요즈음에는 나라에 기강이 없어 사람마다 자신만 편할 생각을 품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고 놀랍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왜인을 접대할 때 여악(女樂)을 베풀지 않은 탓으로 화를 많이 내고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물력이 탕갈된 이때 여악을 베풀기가 온당치 않으므로 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근래에 듣건대 그곳을 맡고 있는 관원이 이미 조처했다고 합니다. 대개 크게 관계되지 않는 일은 비록 설행하게 하더라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뒤폐단이 있는 일에 이르러서는 금지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그들이 요청해 왔을 때 소신이 금지시키라는 뜻으로 계달하였었는데, 그 뒤에 따라준 일이 많이 있었으므로 점차 끝없는 폐단이 있게 된 것입니다. 임진년에 치욕을 당해 만세토록 잊지 못할 원수인데 이와 같이 허락하고 대우해 주었으니 끝내는 반드시 막기 어려운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인의 정상은 교활하고 불측하니 화를 내는 기색이 있을 때 우리 나라에서 더한층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저들 역시 저절로 기가 꺾일 것입니다. 지금 왜인의 정상을 잘 모르는 탓에 왜인을 대하는 방도로 그들을 대하지 않고 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요청을 해서 점차 막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상경(上京)하는 것과 같이 중대한 일은 마땅히 딱부러지게 금지시키고, 여악과 같은 일에 대해서는 비록 허락해 주더라도 무방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황응양 지휘는 언제 돌아가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달 그믐쯤 돌아갈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반년 동안이나 역옥(逆獄)을 다스렸으니 옥정(獄情)과 인심을 상께서 모두 짐작하고 계실 것입니다. 말세라서 인심이 점차 예스럽지 않은데, 인심이 한번 요동되면 뒤폐단이 무궁하여 끝내는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성묘(成廟)께서 어린 나이에 즉위하시자 처음에는 고변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정희 왕후(貞熹王后)는 성비(聖妃)로, 성묘의 성덕이 하늘과 같아 얼마 안 있어 다시 정무(政務)를 이어받아 지극한 다스림을 이룩하였습니다. 중묘(中廟)께서 반정(反正)한 뒤 고변하는 자가 역시 많아 견성군(甄城君)이나 영성군(靈城君)과 같이 고변하는 자가 속출하였는데, 중묘께서 처음에는 따라주었다가 후회한 것도 많았습니다. 지난번에 개성부에서 익명서의 변고가 있어서 이 때문에 인심이 소요하고 있으니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이시언은 착한 사람이니 반드시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그는 반드시 ‘이러한 일이 만약 다른 곳에서 다시 일어났는데, 수령으로 있는 자가 먼저 고발해놓지 않으면 일이 몹시 온당치 않을 것이다.’고 여겨, 이 때문에 지레 먼저 정고한 것입니다. 대개 이 일은 조종조의 금석과 같은 법전이 있으니 처치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개성부의 익명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곳의 인심이 아주 나빠서 서경덕(徐敬德)의 묘를 파헤친 뒤에 이와 같은 일이 잇달아 있습니다. 이것은 무뢰배들이 한갓 원한을 갚으려고 꾀하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으로, 몹시 놀랍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 수가 거의 1백여 명이나 되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가 미워하는 자를 마구 써서 던져넣은 것이니 그 숫자가 많더라도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홍이상이 아뢰기를,
"개성부는 옛 도읍으로 민풍(民風)과 토속(土俗)이 전부터 아름다워서 다른 곳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인심이 아주 나빠서 점차 극심한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신과 같이 노둔한 자는 임무를 감당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은 선조 때의 노신이니 의당 조정에 있게 해야지 외임을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송도가 막 역변(逆變)을 겪어서 경이 아니면 다독거릴 만한 자가 없으니, 경은 가서 마음을 다해 직무를 보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홍이상이 아뢰기를,
"소신은 나이가 이미 늙어서 정신이 쇠모해 비록 심상한 직무라도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와 같이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겠습니까. 명을 받든 이후로 염려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개 그곳 사람들은 모두가 모리배들로 하찮은 이익도 서로 다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국가에 일이 많아 백성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여서 이런 변고가 있는 것입니다. 소신은 재주가 부족해서 반드시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니, 몹시 황공스럽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인심이 아주 나쁘다고 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하자 홍이상이 아뢰기를,
"서경덕의 묘를 파헤치고, 심지어는 역적에 관한 익명서의 변고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사대부들 사이에 서로 당파를 만들어서 잡스런 논의가 아주 많고 서로 다투어서 원한을 갚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아주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풍조가 이상해져서 송도뿐만 아니라 외방의 열읍에 모두 편당이 있으며, 심지어는 미천한 아랫것들에게까지 모두 이런 논의가 있어서 옥송(獄訟)을 일으키는 단서가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고 있으니, 몹시 한심합니다. 《상서(尙書)》 홍범편(洪範篇)에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게 하여 임금의 의를 따르고, 사사로이 좋아하는 일이 없게 해 임금의 도를 따르며, 사사로이 싫어하는 일이 없게 해 임금의 길을 따르소서. 치우치지 않고 편들지 않으면 왕도가 탕탕(蕩蕩)하며, 편들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평평(平平)하며, 뒤집어지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정직할 것이니, 그 극(極)에 모여 그 극으로 돌아올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학문에 있어서는 비록 성정(誠正)의 지경에 이르더라도 한 생각이 혹시라도 치우치게 되면 광대하고도 광명한 전체(全體)가 반드시 바름을 잃게 됩니다. 이에 희로애락호오(喜怒哀樂好惡)가 치우친 마음에서 쉽사리 생겨나 점차 사욕(私欲)이 유행하는 데 이르러도 그 그름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번 치우친 곳에 항상 경계하여 척연히 깨달아야만 성정 공부(誠正工夫)에 어긋나지 않게 됩니다. 더구나 제왕의 학문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으로, 참으로 한 생각이라도 치우친 것이 있다면 모든 정무가 잘못되어서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게 됩니다. 현재 조정에는 모든 일이 날이 갈수록 형편없어져 장차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릴 곳이 아니겠습니까. 정교(政敎)가 사사로움을 따르고 용사(用舍)가 공정치 않은 것이 실로 치우친 폐단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송도의 일에 대해서는 홍이상이 이미 말하였으니, 신이 감히 다시 진달드리지 않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옛말에 ‘임금과 재상은 일체’라고 하였는바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경은 수상이 되었으니 폐단을 바로잡는 모든 일을 십분 잘 처리하라."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기울어진 다음에는 비록 옛날의 현명한 사람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더라도 반드시 감당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신과 같이 용렬한 자이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 일은 몹시 어렵다. 옛말에 이르기를 ‘하북(河北)의 적은 오히려 제거하기 쉬우나 조정의 붕당은 제거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는바, 어찌 참으로 그렇지 않겠는가. 하늘이 인재를 내면서는 한 세대의 일을 맡기에 충분하게 하였다. 그러니 만약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내쫓는다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홍이상이 아뢰기를,
"중묘조 때 유호인(兪好仁)은 별로 볼 만한 일이 없었는데도 중묘께서 항상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가 경상도의 수령으로 있을 때 중묘께서 사람을 시켜 보게 하였더니 ‘북쪽을 바라봄에 군신간이 막혀 있다.[北望君臣隔]’라는 시구가 있었습니다. 한 때의 돌보아줌이 비록 중하였지만 승진시키지 않아서 단지 응교만 되고 끝내 당상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씀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와 같은 다음에야 공(公)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께서 문종(文宗)의 말로 하교하시었는데, 그 말이 무어 취할 만한 점이 있겠습니까. 문종은 이훈(李訓)·정주(鄭注) 등과 함께 일을 하였으니, 어찌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질 리가 있었겠습니까.
사람을 쓰고 다스리는 즈음에는 위엄과 형벌로 제압할 수 없습니다.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 비록 범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왕자(王者)의 도에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에 존양(存養)하고 성찰(省察)하는 공부가 바로 정자와 주자가 전수한 것입니다. 만약 청한(淸閑)할 때 척연히 성찰한다면 시비가 저절로 밝아질 것이고, 심려가 혼란할 때에는 이와 반대로 될 것입니다. 소신은 외람되어서 감히 진달드리지 못할 바이나 마침 성상의 하문을 받았으므로 분수를 잊고 감히 진달드립니다.〉"
하였다. 왕이 신율(申慄)에게 이르기를,
"경이 간악한 음모를 적발해내어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소신은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당초에 김제세(金濟世)가 위조한 공문을 가지고 갔는데, 평상시에 초료장(草料狀)103) 을 가진 자는 으레 반드시 보고서 먹여줍니다. 김제세가 글을 전할 때, 초료장을 제시하기를 요구하였는데 그 문서 내용이 어긋나서 삼척 동자라도 모두 형편없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인하여 잡아가두고서 캐물으니 그의 동생인 김익진(金翼辰)이 서울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즉시 그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어서 〈체포하고서〉 인신(印信)의 행방을 물으니 김제세가 곧바로 납초(納招)하지 않았습니다. 김익진에게 물었더니 인신이 정의민(丁義民)의 집에 있다고 하였는데, 곤장을 치면서 캐물으니 과연 그의 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화적질을 한 일을 공초하였는데 ‘장차 큰 일을 할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상세히 그 곡절을 캐물으니 주모자인 김백함(金百緘) 및 대장의 이름과 나이를 모두 납초하였습니다. 김직재는 바로 소신의 사촌 동서인데 일찍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실로 김백함이 김직재의 아들인 줄을 몰랐습니다. 신이 김백함이 어떤 자냐고 물으니, 말하기를 ‘이는 바로 평시 출신(平時出身)인 김직재의 아들이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역변에 대해 듣고 또 김직재가 주모자라고 들었을 때 몹시 놀랍고 두려웠습니다. 이에 즉시 강음(江陰)의 관원에게 통고하여 체포하였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김제세는 곤장 한 대 치지 않았는데 곧장 납초하였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김제세는 7, 8대를 마구 때렸더니 불었고 김익진은 10여 차례 마구 때렸더니 말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네가 비록 납초한다 해도 만약 애매한 사람이 있으면 함부로 납초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더니 ‘평산(平山)에 사는 정의민(丁義民)은 실로 애매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어보(御寶)와 인신을 가지고 가서 누구에게 주려고 하였다고 하였는가? 그 자들이 전벽(田闢)에게 전해 주려고 하였다는데, 그 말이 참으로 사실인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비록 전벽에게 전해주려고 하였다고는 하지만 역시 완전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그 자들이 스스로 쓰려고 한 데 불과합니다. 대개 황해도는 인심이 아주 나쁩니다. 황주(黃州)의 향소(鄕所)에 영리(營吏)를 해치려는 자가 있었는데, 그 향소가 마침 그 고을의 파총(把摠)이 되었을 때 성문(成文)을 위조하여 속오군(束伍軍)을 불러모아 하루 저녁에 거사하여 먼저 병사와 판관을 제거한 뒤 그 영리를 죽이려고 모의하였습니다. 병사가 그 소식을 듣고는 즉시 향소를 체포해서 캐물으니 과연 ‘영리와 혐의가 있어서 이런 짓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무지 망작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그곳의 인심이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 도의 인심이 전부터 이상하였습니다. 대개 글자를 아는 자가 없어서 몽매한 백성들이 금수와 같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하고 홍이상이 아뢰기를,
"기축년의 옥사 때 소신이 문사 낭청(問事郞廳)이 되었는데, 그 뒤에 명을 받들고 황해도에 가서 보니, 그곳의 인심이 과연 무식하였습니다. 정적(鄭賊)104) 이 천리 밖에 있으면서 능히 위협하여 동모하였으니 참으로 몹시 놀랍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으로는, 최봉춘은 필시 최군이고 최군은 반드시 이름을 바꾸고서 모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간의 사정은 상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경은 그곳에 있었으니 필시 자세히 들었을 것이다. 이른바 최군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변성명하였으니 그의 행방을 들을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조광벽(趙光璧)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군도목(軍都目)을 해득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같이 거처하면서 시를 지었다는 일은 필시 거짓말입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민탁(閔卓)이 윤봉익(尹鳳翼)이라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상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대개 그 무리들이 흉모를 꾸민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본도의 사람 중에는 일찍이 아는 자가 없었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역모를 꾸민 일은 몹시 흉악하고도 참혹하니 비록 혹 알더라도 어찌 퍼뜨릴 리가 있겠습니까. 대개 평산의 정의민 집에 김직재가 항상 갔다고 하는데, 지난번에 관군이 체포할 때 평산의 백성들이 모두 ‘이번에 필시 정의민·박이관(朴以觀) 등이 체포될 것이다.’고 하였으니, 그 동모하였다는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김강재(金强哉)는 어찌해서 체포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김강재는 당초에 재궁(齋宮)에 있었는데 그 뒤에 기미를 알아채고서 도망하였습니다. 필시 자신의 죄를 알고서 자살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살아 있다면 어찌 체포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김일승(金日昇)의 문서는 어찌하여 일찍 아뢰지 않았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최후에 적장(賊贓)을 수색할 때 마침 그 문서를 찾아내었으므로 감사에게 보고하고서 계달하였던 것이지, 당초 문서에 뜻을 두고 있다가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이영(李永)의 일은 어떠한가?"
하자 신율이 아뢰기를,
"비록 김일승의 처족(妻族)이기는 하지만 역시 연좌시킬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됨이 아주 어리석어서 중사(中使)가 올라올 때 산위에서 망을 보았으므로 도직(盜直)에게 잡혔습니다. 대개 그 사람은 숙맥도 구별하지 못하나 이미 중사에게 체포되었으므로 가두고서 기다렸던 것인데 그 뒤에 목매달아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김제세를 체포할 때 안종길(安宗吉) 역시 동참하였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역모한 사실을 말하지 않다가 여러 차례 캐물은 다음에야 직초(直招)하였습니다. 팔도의 정장(定將)을 모두 납초한 후에 다시 추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안종길이 왔으므로 다른 곳에서 추문하고자 하다가 신의 생각에 ‘이 역적이 만약 서울에 올라가서 도로 숨길 경우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고 여겨졌으므로 안종길이 떠나가려 하는 것을 신이 머물도록 청하여서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정인홍의 이름을 김제세가 과연 말하였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정인홍의 이름을, 다시 추문할 때 과연 납초하였습니다. 같이 추고한 관원 권엽(權曄)이 와서 참여해 추문하자 처음에는 ‘정(鄭)’이라고 말하였고 또 ‘대사헌’이라고 말하였으며 끝내는 이름을 말하였습니다. 권엽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기에, 신이 ‘감사와 병사가 몸소 추문할 것이니 이 일은 주장(主將)이 처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감사와 병사가 캐물으니 역시 이름을 말하였습니다."
하였다.〈왕이 영상에게 이르기를,
"경이 근친(覲親)하고자 한다는데 이와 같이 어려운 때 황 지휘 역시 와 있으니 외방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속히 갔다가 돌아오라."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황 지휘가 그믐쯤 돌아갈 것이고 양 어사(楊御史)의 시문(詩文) 역시 고칠 곳이 있어서 그 전에 올라오고자 합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21일에 거둥한 뒤 즉시 내려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106면
- 【분류】외교-야(野)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예술-음악(音樂) / 변란-정변(政變) / 풍속-예속(禮俗) / 사법-치안(治安)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인사-관리(管理)
- [註 102] 삼감(三監) : 관숙(管叔)·채숙(蔡叔)·곽숙(藿叔)임.
- [註 103] 초료장(草料狀) : 공무로 출장하는 관원에게 연도의 각 역참(驛站)에서 역마·식료 등을 공급하도록 명령하는 문서. 초료(草料).
- [註 104] 정적(鄭賊) : 정여립(鄭汝立).
원문
○壬子九月十八日己酉王(出御視事廳), 朝講。 領事李恒福、特進官金信元、同知事趙挺、特進官柳公亮、參贊官李好信、執義申景洛、司諫尹重三、侍講官柳潚、檢討官曺明勗、記事官閔應恢·李敬輿·權倜入侍。 講《尙書》 《大誥》。 (柳潚曰: "文王、武王善承其衆, 克堪用德, 是誠可以爲神天之主矣。 故天式敎文、武, 用以休美簡擇, 畏畀付殷命, 以正多方也。" 王曰: "‘靈承于旅’者, 何意耶?" 柳潚曰: "靈, 善也; 旅, 衆也, 謂‘善承民衆’也。 ‘式敎用休’, 言文、武旣得乎天, 其德日新, 左右逢源, 其思也若起之, 其行也若翼之, 此乃天之所以式敎而用昌大休明者也, 非諄諄然而敎之也。 此章言‘天旣命我周而定于一矣。 爾猶洶洶不靖, 欲何爲耶?’ 明指天命, 讋服奸雄之心者, 無切於是矣。" 李恒福曰: "所謂‘靈承于旅’者, 其時方言也。 若以文理言之, 則猶《大學》所謂‘明明德’、《中庸》所謂‘篤恭而天下平’也。 人主爲德, 只在公私之間。 苟拘於私, 公道不行, 雖欲爲德, 亦不克堪。 治亂、興亡之機, 間不容髮, 所謂‘克堪用德’四字, 最切於聖學工夫也。" 王曰: "殷民固可罪之。 然人人皆可瀦宅收田耶?" 李恒福曰: "殷民思先王之惠澤, 雖以紂之暴虐, 人無叛意。 故周公於此, 諄諄曉諭。 蓋脅從罔治之意也, 豈可人人而罪之哉?") 柳潚曰: "大槪此篇多有討逆之義, 自上體念至當。 四國民命, 雖不得盡誅, 其爲首者則不可不誅之矣。" 李恒福曰: "此則指民衆, 而言非指紂而言也。 故其辭如此。 大抵其時, 脅從之類, 不知周之至德, 從三監而作亂。 故反復敎諭, 以鎭人心也。" 趙挺曰: "頃因兩司避嫌, 自上前後下敎極其嚴峻, 事體至爲未安。 言官以言爲責, 或不無過激之言, 自上必須優容嘉納, 直言可入矣。 小臣駑劣, 固無所識, 而待罪言地, 惶恐敢啓。" 上曰: "時弊不可不救, 故於諫長之避嫌, 暫言之矣, 所達之辭, 當體念。 卿爲憲長, 須振肅頹綱。" (王言于左相李恒福曰: "頃者見北道書狀, 其虛實, 雖未能詳知, 頗有可慮。 未知卿意如何?" 李恒福曰: "阿耳之事, 果爲可慮。 若長驅則無一處可恃。 加之以近來饑饉相因, 癘疫熾發, 大邑土兵, 或斃數百。 近日風水災, 亦近古所無, 事事不吉, 人情沮喪, 極可慮也。" 王曰: "北兵使時未遞差, 若遞則何人可合乎?" 李恒福曰: "可合之人絶無矣。 李慶濬在喪, 柳珩得病, 李箕賓被論。 此外絶無可合之人矣。" 王曰: "卿之所見第言之。" 李恒福曰: "新進武士中李光英、李适、李宗一培養, 則可合爲兵使矣。" 柳公亮曰: "聖明之世, 豈料凶逆之遽起乎? 當初逮捕之際, 民情多危懼。 厥後辭連者, 多數放釋, 故民心稍定矣。 其處人民無識字者, 極其頑愚。 守令若擇差, 則庶可爲矣。" 王曰: "卿詳察賊情, 勉捕其黨, 良用爲喜。 其辭連可釋者, 旣已分揀放送矣。 大槪其處人心, 自前異常, 蓋無知無識而然耶? 何兇悖至此耶?" 柳公亮曰: "蚩蚩愚氓, 本無知識, 齊動雜言, 以至於此矣。" 王曰: "金濟世兇謀已久, 其所爲曲折, 曾無所聞耶?" 柳公亮曰: "逆謀極兇, 孰有知之者, 雖或知之, 豈有言之之理乎?" 王曰: "金强哉何不得捕捉乎?" 柳公亮曰: "渠輩一邑居生之奇, 曾未聞知, 竟不得捕, 此實疎漏所致, 極爲惶恐。" 王曰: "所謂‘不和’之言, 誠然乎?" 柳公亮曰: "其漢極惡之事, 不足云云。 而其兄弟如讐, 若逢訟官, 必一時呈訟云矣。" 王曰: "金日昇事, 何至累日遲滯乎?" 柳公亮曰: "問于申慄, 則‘賊贓搜探時, 其文書適現出矣, 非有意於搜出文書而得之也。’" 王曰: "賊將尹鳳翼、崔君等內應之說, 未能詳知, 卿無所聞乎?" 柳公亮曰: "渠輩必變姓名, 無從可聞矣。" 王曰: "崔奉春等前後二人捉來, 後來者果非所謂崔君乎?" 柳公亮曰: "未能詳知矣。" 王曰: "或謂閔卓是尹鳳翼云, 然耶?" 柳公亮曰: "金濟世變幻不測, 其言不可盡信矣。" 王曰: "金濟世捕捉時, 不下一杖, 箇箇承服乎? 嚴訊後直招乎?" 柳公亮曰: "大槪僞造印信之賊也。 杖而後承服矣。") 王問于柳公亮 曰: "鄭仁弘援引之事, 果出於濟世之口耶?" 柳公亮 對曰: "旣捧招辭而報稟矣。 朝廷自當處置, 故小臣只待命令而已。 尹暄欲更問, 故小臣爲一道主將, 不得不往參問之。 鄭仁弘事, 濟世果言之矣。 當初旣已捧招, 故不爲詳問。" (李恒福曰: "戰車造置, 而或云‘極好, 不可不多造用之。’ 或云‘宜於防倭, 不宜於防胡矣。’ 韓嶠頗知軍法, 都監稱爲敎訓官而聽其造車。 柳珩在平安道時, 亦招致韓嶠, 造車試驗, 則甚好云矣。" 王曰: "我國亦可爲車戰乎?" 李恒福曰: "此乃平地可試可用之法, 山川險阻處, 決不可用矣。 六七年前, 司諫院亦箚子, 請爲車戰矣。 大槪此非載銃之車也。 雖似同制, 而實則不同。 有若垣墻以防捍, 然一人推而行之矣。" 王曰: "車戰幾人乘之?" 李恒福曰: "不爲多乘, 大槪如防牌。 然後日郊外試才時, 當取去矣。")○王(未時, 出御視事廳,) 引見領議政李德馨、開城留守洪履祥、禮曹參判申慄。 (左承旨李好信、記事官閔應恢·李敬輿·權倜入侍。) 王曰: "胡人進告, 自前或有不實矣。 今此進告者, 頗有爲我國情誠云, 其言果實, 則極爲可慮。 於卿意如何?" 李德馨曰: "亂後受任, 每在南方, 海邦之事, 則善惡間多有料理矣。 北方則身不曾往來, 事不料理, 只因邊臣狀啓, 而揣度之, 故未能詳知。 大槪近來不幸, 咸鏡一路, 饑饉荐至, 癘疫相仍, 死亡相繼, 邊城一空。 若變生則有同以遠水救近火, 極可慮也。 但賊勢與忽賊, 有蚌鷸之勢, 似不得容易犯邊矣。 添兵之事, 自古出於不得已之擧也, 非國家常行之道也。 近來邊臣, 冀朝廷顧念, 例發過當之議, 或請添防之軍, 以救目前之急。 其間實狀, 不能詳知, 藩胡進告之言, 亦多不實。 若欲的知賊情虛實, 則宜令體察使, 遣該道從事官, 或令備邊司, 委送文郞廳, 俾探賊情, (襦衣近當入送, 其時使之領去分給, 仍令探聽賊奇)似當。" 王曰: "若然則言于體察使議定。 大槪無南無北, 在我防備牢固, 然後可以無憂。 而近來現 玩愒成風, 悠泛度日, 軍務之事, 專不致意, 極可寒心, 未知何以爲之也。" 李德馨曰: "自古外海不足患, 內患最可憂。 必自朝廷, 振發精神, 有折衝千里之氣, 可以禦敵。 備邊司自當其責, 然自上亦須奮發自强, 常加警飭, 以爲表迪之方, 然後風草之效, 捷於影響。 孟子曰: ‘國家閑暇, 及是時, 明其政刑。’ 註曰: ‘任賢使能, 各擧其職。’ 所謂自强之實, 不在多言。 朝廷是外方之根抵, 必先正朝廷, 然後外方可以無憂矣。 自上累下申飭邊備之命, 而朝廷之事, 日就頹圮, 其何以整頓紀綱, 申飭邊備, 以弭外患哉? 如臣駑劣者, 斥而去之, 自上亦振發有爲之志, 庶可以尊朝廷而禦外侮矣。" 王曰: "卿言至當, 予當體念。 此時大臣, 不可辭避, 勿懷此意, 盡心職事。 且近日之事, 只是辭職疏章而已, 古亦如是乎? 未知其故。" 李德馨曰: "近來國無紀綱, 人懷自便, 以至於此, 豈不痛愕乎?" 王曰: "倭人接待時, 女樂不設, 故多有生怒云, 何以爲之?" 李德馨曰: "物力蕩竭之時, 女樂設行未安, 故勿令行之。 近聞其處守土之官, 已爲措備云。 大槪不關之事也, 雖使設行, 亦無所妨。 至有後弊之事, 則不可不防禁。 頃日渠輩要請之時, 小臣以禁斷之意啓達, 而厥後多有聽從之事, 故漸至無窮之弊。 壬辰羞辱, 萬世不忘之讐, 而如是許待, 終必有難防之禍矣。 且倭人情狀, 巧詐不測, 若有怒色, 我國加一等生怒以示之, 則彼亦自沮矣。 今者不知倭情, 故待之不以待倭之道。 以此, 多少要請, 漸至難防。 如上京重大之事, 當斷然絶禁, 如女樂一事, 雖許之無妨矣。" (王曰: "黃指揮何間回還耶?" 李德馨曰: "今月晦間, 當還歸矣。") 李德馨曰: "半歲推治逆獄, 獄情與人心, 自上無不斟酌矣。 末世人心, 漸不如古, 人心一搖, 後弊無窮, 終至於不能救。 成廟沖年卽祚, 當初告變者甚多。 貞熹王后乃聖妃, 成廟聖德如天, 未久受復辟之政, 陶成至治。 中廟反正之後, 告變者亦多, 如甄城、靈城, 告者繼出,中廟初聽從, 而後悔亦多矣。 頃者開城府有匿名書之變, 以此人心騷擾, 極爲可慮。 李時彦, 善人也, 必不爲此事矣。 小臣之意則彼必以爲: ‘此事若更出於他處, 而守土之臣不先告發, 事甚未安。’ 必以此而徑先呈告矣。 大槪此事, 自有祖宗朝金石之典, 處之不難矣。" 王曰: "開城府匿名[書] 事, 未知何故耶。" 李德馨曰: "其處人心極惡, 徐敬德墳塋掘發之後, 如此之事, 連續有之。 此不過無賴之徒, 欲爲報怨之計, 以至於此, 極可駭也。" 王曰: "其數幾至百, 未知其故。" 李德馨曰: "渠所憎惡者, 亂書投呈, 其數雖多, 何足疑怪?" 洪履祥曰: "開城府是舊都也。 民風土俗, 自前淳美, 不似他處矣。 近來人心極惡, 漸至十分地頭, 小臣駑劣, 恐未堪任。" 王曰: "卿乃先朝耆舊, 當留置朝廷, 不宜外任, 而松都纔經逆變, 非卿無可合者, 卿宜往欽, 盡心職事。" 洪履祥曰: "小臣年旣衰老, 精神頓減, 雖尋常職事, 恐難堪任。 況此難治之地乎? 承命以往, 不勝悶慮。 大槪其處, 皆是謀 牟利之人, 錐刀競利, 以資其生。 近來國家多事, 民不堪其苦, 有此變故。 小臣才不逮, 必不能堪當, 惶恐惶恐。" (王曰: "人心極惡云, 未知何故耶。" 洪履祥曰: "徐敬德墳墓掘取, 至於逆賊匿名, 其惡可知。 加以士夫間植黨, 雜論甚多, 爭相報怨, 此所謂極惡也。") 李德馨曰: "近年以來, 風氣殊常, 非徒松都, 外方列邑, 無不有偏黨, 至於微末下賤, 皆有此論, 獄訟爭端, 皆由於此, 極爲寒心。 《尙書》 《洪範》篇曰: ‘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 大凡學問, 雖至誠正地頭, 一念或偏, 則廣大光明之全體, 必不得其正。 喜怒哀樂好惡, 偏心易生, 漸至於私欲流行, 不覺其非。 每於偏倚處, 常加警戒, 惕然覺悟, 庶不悖於誠正工夫。 況帝王學問, 代天理物, 苟有一念之偏, 則庶務叢脞, 公道不行。 卽今朝廷, 百事日就無形, 將至於不可救, 豈非痛哭流涕處也? 政敎循私, 用舍不公, 悉由於偏倚之弊矣。 松都之事, 履祥旣言之, 臣不敢更達矣。" 王曰: "古語云: ‘君相一體。’ 吾當體念。 卿爲首相, 凡可以爲矯弊之事, 十分善處。" 李德馨曰: "如此旣傾之後, 雖使古先哲人當之, 必不能堪。 況如臣庸劣者乎?" 王曰: "此事極難。 古語曰: ‘去河北賊易, 去朝廷朋黨難’, 豈不誠然乎? 天生人才, 自足了一世事。 若擧賢而退不肖, 則必不如是矣。" 洪履祥曰:"中廟朝兪好仁, 別無可觀之事, 而中廟常眷遇。 及其爲慶尙道守令,中廟使人見之, 則有‘北望君臣隔’之句。 一時恩眷雖重, 而不爲陞遷, 只爲應敎, 終不爲堂上。 人君用人, 必如是而後, 可謂公矣。 自上以文宗之言下敎, 此言何足取乎? 文宗與李訓、鄭注 用 同事, 豈有爲國之理乎? 用人致治之際, 不可以威刑制之。 誠意、正心, 雖是庸常之言, 王者之道, 無逾於此。 (喜怒哀樂未發之前, 存養、省察工夫, 此乃程、朱之的傳也。 若於淸閑之時, 惕然省察, 則是非自明, 若心慮昏辭亂之時, 則反是矣。 小臣猥濫, 所不敢達, 而適承聖上之下問, 小臣忘分義, 敢達。)"○王言于申慄曰: "卿摘發奸謀, 以安社稷, 良用嘉焉。" 申慄曰: "小臣別無所爲之事。 當初金濟世持僞造公文而去, 常時持草料者, 例必見而饋之。 濟世 之傳書也, 徵索草料, 而其公文齟齬, 雖三尺童子, 皆知其無形矣。 因捉致推問, 則厥弟 益 翼辰在京云矣。 臣卽送人于渠家(收捕), 問其印信去處, 則濟世不爲直招。 問于 益 翼辰, 則曰: ‘印信在丁義民家。’ 因杖而問之, 則果在渠家云。 且供稱爲火賊之事, 而將爲大事, 故不殺害人物云。 因詳問其曲折, 則主謀金百緘及大將姓名、年歲皆納招。 直哉乃小臣四寸同壻, 而曾不見其面目, 故實不知百緘之爲直哉子。 臣問百緘者何人云, 則曰: ‘此乃平時出身金直哉子’云矣。 始聞逆變, 且聞直哉之爲謀首, 極爲驚惶。 卽通于江陰官捕捉矣。" 王曰: "金濟世不下一杖而直招乎?" 申慄曰: "濟世亂杖七八度而言之, 益 翼辰亂杖十餘度言之矣。 臣且曰: ‘汝雖納招, 若有曖昧之人, 不可亂招’云, 則曰: ‘平山 丁義民實曖昧’云矣。" 王曰: "御寶及印信取去, 欲給何人云乎? 渠輩欲傳于田闢云, 此語誠然乎?" 申慄曰: "雖曰將傳于田闢, 亦不可盡信。 小臣之意, 則不過渠輩欲自用之矣。 大槪黃海道人心極惡。 黃州鄕所有欲害營吏者, 其鄕所適爲其邑把總, 僞造成文, 招集束伍軍, 一夕謀爲擧事, 先除兵使及判官後, 殺其營吏。 兵使聞其奇, 卽捉其鄕所問之, 則果與營吏有嫌, 而如是爲之云。 其無知妄作, 類如是矣。" 王曰: "其處人心, 何其至此耶?" 李德馨曰: "其道人心, 自前異常。 大槪無識字者, 蚩蚩之氓, 有同禽獸, 極可駭也。" 洪履祥曰: "己丑年小臣爲問事郞廳, 厥後奉命往黃海道目覩, 則其處人心, 果爲無識。 鄭賊在千里之外, 能脅從同謀, 誠可痛愕。" 王曰: "崔奉春果是崔君乎?" 申慄曰: "小臣之意, 則奉春必非崔君, 崔君必改姓名作謀。 其間事情, 未能詳知。" 王曰: "卿在其處, 必詳聞之。 所謂崔君當在何處乎?" 申慄曰: "如是變姓名, 其去處無因得聞矣。" 王曰: "趙光璧事何如?" 申慄曰: "不解見軍都目云, 其同處作詩之事, 必是虛言也。" 王曰: "閔卓是尹鳳翼云, 然耶?" 申慄曰: "未能詳知矣。" 王曰: "大槪渠輩兇謀旣久, 本道之人, 曾無知之者乎?" 申慄曰: "逆謀之事, 極兇極慘, 雖或知之, 豈有傳播之理乎? 大槪平山 丁義民家舍, 直哉常常往之云。 頃者軍官收捕時, 平山之民皆曰: ‘此必丁義民、朴以觀等逮捕’云, 則其同謀之意可知矣。" 王曰: "金强哉何不得捕捉乎?" 申慄曰: "强哉初在齋宮, 厥後知幾逃躱。 必是自知己罪而自盡也。 若生存, 則豈有不捕之理乎?" 王曰: "金日昇文書, 何不早啓乎?" 申慄曰: "最後賊贓搜探時, 適得其文書, 故報于監司而啓達矣, 初非有意於文書而得之也。" 王曰: "李永之事何如?" 申慄曰: "雖是金日昇妻族, 亦無連坐之事。 而爲人至愚, 中使上來時, 在山上瞻望, 故爲盜直所捉。 大槪其人, 不辨菽麥, 而旣爲中使所捉, 故拘囚以待, 厥後結項自處云矣。" 王曰: "金濟世捕捉時, 安宗吉亦同參乎?" 申慄曰: "當初不言逆謀, 屢次鉤問後直招。 八道定將, 盡爲納招後, 欲爲更推矣。 安宗吉適來, 臣欲於他處推問, 臣意以爲: ‘此賊若上京還諱, 則無以發明。’ 故宗吉欲起去, 臣請留, 使之參聽矣。" 王曰: "鄭仁弘姓名, 濟世果言之乎?" 申慄曰: "鄭仁弘姓名, 更推之時, 果爲納招。 同推官權曄來參問之, 則初言鄭鄭, 又言大司憲, 終言姓名。 權曄曰: ‘此事何以爲之?’ 臣曰: ‘監兵使當躬親推問, 此則主將當爲處置。’ 厥後監兵使問之, 則亦言姓名矣。" (王言于領相曰: "卿欲爲覲親云, 如此艱虞之時, 黃指揮亦來, 不可久留外處。 從速往還。" 李德馨曰: "黃指揮晦間當還歸, 楊御史詩文, 亦有可改處, 其前欲爲上來耳。" 王曰: "二十一日擧動後, 卽下去爲當。")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106면
- 【분류】외교-야(野)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예술-음악(音樂) / 변란-정변(政變) / 풍속-예속(禮俗) / 사법-치안(治安)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인사-관리(管理)
광해 4년 (1612) 9월 18일
광해군일기[중초본]57권, 광해 4년 9월 18일 기유 1/1 기사 / 1612년 명 만력(萬曆) 40년
시사청에 나아가 조강하고 《상서》를 강독하다
국역
왕이 〈시사청(褀事廳)에 나아가〉 조강하였다. 영사(領事) 이항복, 특진관 김신원(金信元), 동지사 조정(趙挺), 특진관 유공량(柳公亮), 참찬관 이호신(李好信), 집의 신경락(申景洛), 사간 윤중삼(尹重三), 시강관 유숙(柳潚), 검토관 조명욱(曺明勖), 기사관 민응회(閔應恢)·이경여(李敬輿)·권척(權倜)이 입시하였다. 《상서(尙書)》의 대고(大誥)를 강독하였다. 〈유숙이 아뢰기를,
"문왕과 무왕은 그 백성들을 잘 받들고 덕을 행할 만하였으니 참으로 귀신과 하늘의 주인이 될 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문왕과 무왕을 가르치시어 아름답게 간택하신 다음 온 나라의 명을 그들에게 붙여주어 만국을 바로잡게 한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영승우려(靈承于旅)’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자 유숙이 아뢰기를,
"영(靈)은 선(善)이고 여(旅)는 중(衆)이니 ‘백성들을 잘 받든다.’는 뜻입니다. ‘식교용휴(式敎用休)’는 문왕과 무왕이 이미 하늘에게 인정을 받아 그 덕이 날로 새로워져 좌우로 도의 근원을 찾아냄에 그 생각이 일으켜주는 것 같고 그 행동이 도와주는 것 같았으니, 이는 바로 하늘이 가르치시어 성대하고도 아름답게 한 것이지 곡진하게 타이르면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장(章)은 ‘하늘이 이미 주나라에 게 천명(天命)을 주어 하나로 정해 주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오히려 조용히 있지 못하고 어수선하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명임을 분명하게 지적하여 간사한 마음을 품은 자를 두렵게 만들어 복종시킴이 이보다 더 절실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른바 ‘영승우려’라는 것은 그 당시의 방언입니다. 문리로서 말을 한다면 오히려 《대학》에서 이른바 ‘명명덕(明明德)’이며, 《중용》에서 이른바 ‘독공이천하평(篤恭而天下平)’입니다. 임금의 덕은 오로지 공(公)과 사(私)의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사사로움에 구애되어 공도를 행하지 않으면 비록 덕스럽게 되려고 하더라도 능히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치란과 홍망의 기미는 터럭만큼의 사이도 용납치 않는 것으로, 이른바 ‘극감용덕(克勘用德)’ 네 글자는 성학 공부에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은나라 백성들은 참으로 죄줄 만하다. 그러나 사람마다 모두 집터를 파내고 전지를 몰수할 수야 있겠는가."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은나라 백성들은 선왕(先王)의 은택을 생각하여 비록 주(紂)처럼 포학한 임금이 다스렸어도 사람들이 모반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이 이들에 대해서 곡진하게 타이르면서 효유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대개 위협에 못이겨 따른 사람들은 치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찌 사람마다 모두 죄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유숙이 아뢰기를,
"대개 이 편은 역적을 토죄하는 의리가 많이 있으니 상께서 유념하시는 것이 지당합니다. 온 나라 백성들의 목숨을 다 주벌할 수는 없으나 우두머리가 되는 자는 주살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것은 백성들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지 주왕(紂王)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대개 그 당시에 위협에 못이겨 따른 무리들은 주나라의 지극한 덕을 모르고 삼감(三監)102) 을 따라 난을 일으킨 것이므로 반복해서 타일러서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조정(趙挺)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양사가 사피함을 인하여 상께서 앞뒤로 내린 하교가 매우 엄준하였는데, 사체에 있어서 지극히 미안합니다. 언관은 말하는 것으로 책임을 맡고 있는바, 혹 과격한 말이 있더라도 상께서 반드시 너그럽게 용납하여 받아들여야만 직언이 들어올 것입니다. 소신은 노둔하여 참으로 아는 바가 없으나 언관으로 있기에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폐를 구제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기에 간원의 장관이 피혐한 데 대해서 잠시 말한 것이다. 진달한 말은 마땅히 유념하겠다. 경은 헌부의 장관으로 있으니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라."
하였다. 〈왕이 좌상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북도의 서장을 보건대 그 허실을 비록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자못 염려스러운 점이 있다. 모르겠다만 경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아이(阿耳)의 일은 과연 염려가 됩니다. 만약 곧장 몰아쳐 온다면 한 곳도 믿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근래에는 기근이 잇따르고 여역이 몹시 성하여 큰 고을의 토병(土兵)들이 혹 수백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의 풍수의 재해 또한 근고에 없던 바로서 일마다 불길하여 사람들의 기가 꺾였으니,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북병사를 아직까지 체차하지 않았는데, 만약 체차한다면 어느 사람이 합당하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합당한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이경준(李慶濬)은 상중에 있고 유형(柳珩)은 병중에 있으며 이기빈(李箕賓)은 논박을 받고 있습니다. 이 외에는 전혀 합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경의 소견을 말하기만 하라."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신진 무사 중에 이광영(李光英)·이괄(李适)·이종일(李宗一)을 잘 키우면 병사로 삼기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유공량이 아뢰기를,
"성스럽고 밝은 세상에 어찌 흉역들이 갑자기 일어날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당초에 체포할 즈음에는 백성들이 대부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연루되었던 자들이 대부분 석방되었으므로 민심이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그곳의 백성들은 글을 아는 자들이 없어서 몹시 완악스럽습니다. 수령을 만약 잘 가려뽑아서 보내면 거의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이 역적들의 정상을 자세히 살펴서 그 무리들을 체포하기에 힘쓰고 있으니, 참으로 기쁘다. 그들 중 석방해도 될 만한 연루자들을 이미 분간하여 석방하였다. 그곳의 인심은 전부터 이상하였는데, 대개 무지하고 무식해서 그런 것인가? 어찌하여 흉악하고 패려스럽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자 유공량이 아뢰기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라 본디 아는 것이 없어서 잡스러운 말에 일제히 동요되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김제세는 흉악한 모의를 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그간의 곡절과 한 짓에 대해 일찍이 들은 바가 없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역모가 아주 흉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으며, 비록 혹 알더라도 어찌 말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김강재는 어찌하여 체포하지 못하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그 무리들이 같은 고을에 산다는 기별을 일찍 듣지 못하여 끝내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실로 소루해서 그런 것인바, 몹시 황공스럽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이른바 ‘서로 화목하지 못했다.’고 하는 말은 참으로 그러한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그놈의 극악스런 일은 말할 것이 못 됩니다. 그 형제들은 서로 원수와 같이 지내어 송관(訟官)을 만나면 반드시 한꺼번에 정송(呈訟)하였다고 합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김일승(金日昇)의 일은 어찌하여 여러 날 동안 지체하게 되었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신율에게 물어보니 ‘적의 장물을 수색할 때 그 문서가 마침 나온 것이지 그 문서를 찾아내려고 해서 얻은 것은 아니다.’고 합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적장(賊將) 윤봉익(尹鳳翼)·최군(崔君) 등이 내응한다는 설은 상세히 알지 못하겠다. 경은 들은 바가 없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그 무리들은 반드시 변성명을 하였을 것으로, 들을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최봉춘(崔奉春) 등 전후로 두 사람을 잡아왔는데 뒤에 온 자가 혹시 이른바 최군(崔君)이 아니겠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상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은 민탁(閔卓)이 바로 윤봉익(尹鳳翼)이라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김제세는 종잡을 수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기 때문에 그의 말을 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김제세를 체포할 때, 곤장 한 대 때리지 않았는데도 낱낱이 승복하였는가, 엄하게 신문한 뒤 직초(直招)하였는가?"
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대개 인신(印信)을 위조한 역적입니다. 곤장을 친 뒤에야 승복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유공량에게 묻기를,】
"정인홍을 끌어들인 일은 과연 김제세의 입에서 나왔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미 공초를 받아서 보고하였는바, 조정에서 마땅히 처치할 것이므로 소신은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윤훤(尹暄)이 다시 캐묻고자 하였으므로 소신이 한 도의 주장(主將)으로 있어서 부득불 가서 참여해 캐물었습니다. 정인홍의 일에 대해 김제세가 과연 말하였는데, 당초에 이미 공초를 받았으므로 상세히 캐묻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전차(戰車)를 만들어 두었는데 어떤 사람은 ‘아주 좋으니 많이 만들어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혹자는 ‘왜적을 방비하는 데는 마땅하나 오랑캐를 방비하는 데는 마땅치 않다.’ 합니다. 한교(韓嶠)가 자못 군법(軍法)을 알므로 도감에서 교훈관(敎訓官)이라고 칭하고서 전차를 만들게 허락하였습니다. 유형이 평안도에 있을 때에 역시 한교를 불러다가 전차를 만들게 해 시험해 보니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도 전차로 싸울 수 있는가?"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것은 평지에서 시험해 볼 수 있고 쓸 수 있는 법이지, 험준한 산천에서는 결단코 쓸 수가 없습니다. 6, 7년 전에 사간원에서도 차자를 올려 전차로 싸우기를 청하였습니다. 대개 이것은 총을 장치한 전차가 아니니 비록 그 제도가 같은 듯하나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담장을 둘러쳐서 막은 것 같은데 한 사람이 밀고서 갈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전차에는 몇 사람이나 탈 수 있는가?"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많이 탈 수는 없습니다. 대개 방패와 같습니다. 뒷날 교외에서 시재(試才)할 때 가지고 오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미시(未時)에 시사청에 나아가〉 영의정 이덕형, 개성 군수(開城郡守) 홍이상(洪履祥), 예조 참판 신율(申慄)을 인견하였는데, 〈좌승지 이호신(李好信), 기사관 민응회(閔應恢)·이경여(李敬輿)·권척(權倜)이 입시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오랑캐가 진고(進告)한 것은 전부터 혹 사실이 아닌 것이 있었다. 이번에 진고한 자는 자못 우리 나라를 위한 정성이 있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몹시 염려스럽다. 경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난리 뒤로 임무를 받은 곳이 모두 남쪽 지방이었으므로 바다를 방비하는 일에 대해서는 잘하고 잘못하고 간에 처리한 경험이 자못 많습니다. 그러나 북쪽 지방에 대해서는 일찍이 왕래해 보지 않았고 일을 처리해 보지 않아서 단지 변방 장수의 장계만 보고서 멀리서 헤아리므로 상세히 알지를 못합니다. 대개 요즈음에는 운수가 불행해서 함경 일로(一路)가 기근이 거듭되고 여역이 퍼져서 죽는 자가 잇달아 변성(邊城)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변란이 생기면, 눈 앞의 불을 먼 곳의 물을 길어다가 끄려는 것과 같아질 것이니,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다만 적의 형세가 홀적(忽賊)과 서로 다투고 있어서 쉽사리 변경을 침범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군사를 더 보태는 일은 예로부터 부득이한 거조에서 나온 것으로, 나라에서 늘상 행하던 규례가 아닙니다. 근래에 변방을 맡은 신하가 조정에서 고려해 주기를 바라서 으레 정도가 지나친 의논을 내어 혹 첨방군(添防軍)을 청하여 눈앞의 위급함을 구하고는 합니다. 그 사이의 실상은 상세히 알 수 없으며 번호(藩胡)가 진고한 말 역시 사실이 아닌 것이 많습니다. 만약 적정(賊情)의 허실을 정확히 알고 싶으면 의당 체찰사로 하여금 해도의 종사관을 보내게 하거나, 혹 비변사로 하여금 문낭청(文郞廳)을 보내어 적정을 염탐하게 〈하여야 합니다. 동옷을 가까운 시일 내에 들여보내야 하니 그때 그들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나누어 주게 하고 이어서 적의 소식을 염탐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체찰사에게 말하여 의논해 정하라. 대개 남방이나 북방이나 따질 것 없이 우리에게 있어서 방비가 견고한 다음에야 걱정이 없을 수 있다. 그런데 근래에는 느슨한 것이 풍조가 되어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고 있어 군무(軍務)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몹시 한심스럽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외환은 걱정할 것이 없었고 내환이 가장 걱정스러웠습니다. 반드시 조정에서부터 정신을 차려야만 천리 변방을 막을 기상이 생겨서 적을 막을 수가 있는 법입니다. 비변사에서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상께서도 모름지기 자강하도록 분발하여 항상 경칙하여 본보기를 보인 다음에야 바람에 풀이 눕는 듯한 효과가 메아리나 그림자보다 더 빠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국가가 한가로울 때 정형(政刑)을 밝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주에 ‘어진 이를 임용하고 능한 자를 부려서 각자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자강한다는 것의 실체는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조정은 바로 외방의 근본이니 반드시 조정을 먼저 바르게 한 다음에야 외방에 대한 걱정이 없을 수 있습니다.
상께서 여러 차례 변방의 방비를 신칙하는 명을 내리셨으나 조정의 일은 날이 갈수록 무너지고 있으니, 어떻게 기강을 바로잡고 변방의 방비를 신칙해서 외환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신과 같이 노둔한 자를 내쳐서 제거하고 상께서도 무언가 큰 일을 할 뜻을 가지신다면 조정을 존엄하게 하고 외침을 방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지당한바 내가 유념하겠다. 이러한 때에는 대신이 사피해서는 안 되니 그런 생각을 품지 말고 마음을 다해 직무를 살피라. 그리고 요즈음에는 단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기만을 일삼고 있는데, 예전에도 이와 같았는가? 그 까닭을 모르겠다."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요즈음에는 나라에 기강이 없어 사람마다 자신만 편할 생각을 품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고 놀랍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왜인을 접대할 때 여악(女樂)을 베풀지 않은 탓으로 화를 많이 내고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물력이 탕갈된 이때 여악을 베풀기가 온당치 않으므로 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근래에 듣건대 그곳을 맡고 있는 관원이 이미 조처했다고 합니다. 대개 크게 관계되지 않는 일은 비록 설행하게 하더라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뒤폐단이 있는 일에 이르러서는 금지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그들이 요청해 왔을 때 소신이 금지시키라는 뜻으로 계달하였었는데, 그 뒤에 따라준 일이 많이 있었으므로 점차 끝없는 폐단이 있게 된 것입니다. 임진년에 치욕을 당해 만세토록 잊지 못할 원수인데 이와 같이 허락하고 대우해 주었으니 끝내는 반드시 막기 어려운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인의 정상은 교활하고 불측하니 화를 내는 기색이 있을 때 우리 나라에서 더한층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저들 역시 저절로 기가 꺾일 것입니다. 지금 왜인의 정상을 잘 모르는 탓에 왜인을 대하는 방도로 그들을 대하지 않고 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요청을 해서 점차 막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상경(上京)하는 것과 같이 중대한 일은 마땅히 딱부러지게 금지시키고, 여악과 같은 일에 대해서는 비록 허락해 주더라도 무방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황응양 지휘는 언제 돌아가겠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달 그믐쯤 돌아갈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반년 동안이나 역옥(逆獄)을 다스렸으니 옥정(獄情)과 인심을 상께서 모두 짐작하고 계실 것입니다. 말세라서 인심이 점차 예스럽지 않은데, 인심이 한번 요동되면 뒤폐단이 무궁하여 끝내는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성묘(成廟)께서 어린 나이에 즉위하시자 처음에는 고변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정희 왕후(貞熹王后)는 성비(聖妃)로, 성묘의 성덕이 하늘과 같아 얼마 안 있어 다시 정무(政務)를 이어받아 지극한 다스림을 이룩하였습니다. 중묘(中廟)께서 반정(反正)한 뒤 고변하는 자가 역시 많아 견성군(甄城君)이나 영성군(靈城君)과 같이 고변하는 자가 속출하였는데, 중묘께서 처음에는 따라주었다가 후회한 것도 많았습니다. 지난번에 개성부에서 익명서의 변고가 있어서 이 때문에 인심이 소요하고 있으니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이시언은 착한 사람이니 반드시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그는 반드시 ‘이러한 일이 만약 다른 곳에서 다시 일어났는데, 수령으로 있는 자가 먼저 고발해놓지 않으면 일이 몹시 온당치 않을 것이다.’고 여겨, 이 때문에 지레 먼저 정고한 것입니다. 대개 이 일은 조종조의 금석과 같은 법전이 있으니 처치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개성부의 익명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곳의 인심이 아주 나빠서 서경덕(徐敬德)의 묘를 파헤친 뒤에 이와 같은 일이 잇달아 있습니다. 이것은 무뢰배들이 한갓 원한을 갚으려고 꾀하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으로, 몹시 놀랍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 수가 거의 1백여 명이나 되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가 미워하는 자를 마구 써서 던져넣은 것이니 그 숫자가 많더라도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홍이상이 아뢰기를,
"개성부는 옛 도읍으로 민풍(民風)과 토속(土俗)이 전부터 아름다워서 다른 곳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인심이 아주 나빠서 점차 극심한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신과 같이 노둔한 자는 임무를 감당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은 선조 때의 노신이니 의당 조정에 있게 해야지 외임을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송도가 막 역변(逆變)을 겪어서 경이 아니면 다독거릴 만한 자가 없으니, 경은 가서 마음을 다해 직무를 보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홍이상이 아뢰기를,
"소신은 나이가 이미 늙어서 정신이 쇠모해 비록 심상한 직무라도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와 같이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겠습니까. 명을 받든 이후로 염려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개 그곳 사람들은 모두가 모리배들로 하찮은 이익도 서로 다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국가에 일이 많아 백성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여서 이런 변고가 있는 것입니다. 소신은 재주가 부족해서 반드시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니, 몹시 황공스럽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인심이 아주 나쁘다고 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하자 홍이상이 아뢰기를,
"서경덕의 묘를 파헤치고, 심지어는 역적에 관한 익명서의 변고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사대부들 사이에 서로 당파를 만들어서 잡스런 논의가 아주 많고 서로 다투어서 원한을 갚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아주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풍조가 이상해져서 송도뿐만 아니라 외방의 열읍에 모두 편당이 있으며, 심지어는 미천한 아랫것들에게까지 모두 이런 논의가 있어서 옥송(獄訟)을 일으키는 단서가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고 있으니, 몹시 한심합니다. 《상서(尙書)》 홍범편(洪範篇)에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게 하여 임금의 의를 따르고, 사사로이 좋아하는 일이 없게 해 임금의 도를 따르며, 사사로이 싫어하는 일이 없게 해 임금의 길을 따르소서. 치우치지 않고 편들지 않으면 왕도가 탕탕(蕩蕩)하며, 편들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평평(平平)하며, 뒤집어지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정직할 것이니, 그 극(極)에 모여 그 극으로 돌아올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학문에 있어서는 비록 성정(誠正)의 지경에 이르더라도 한 생각이 혹시라도 치우치게 되면 광대하고도 광명한 전체(全體)가 반드시 바름을 잃게 됩니다. 이에 희로애락호오(喜怒哀樂好惡)가 치우친 마음에서 쉽사리 생겨나 점차 사욕(私欲)이 유행하는 데 이르러도 그 그름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번 치우친 곳에 항상 경계하여 척연히 깨달아야만 성정 공부(誠正工夫)에 어긋나지 않게 됩니다. 더구나 제왕의 학문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으로, 참으로 한 생각이라도 치우친 것이 있다면 모든 정무가 잘못되어서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게 됩니다. 현재 조정에는 모든 일이 날이 갈수록 형편없어져 장차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릴 곳이 아니겠습니까. 정교(政敎)가 사사로움을 따르고 용사(用舍)가 공정치 않은 것이 실로 치우친 폐단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송도의 일에 대해서는 홍이상이 이미 말하였으니, 신이 감히 다시 진달드리지 않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옛말에 ‘임금과 재상은 일체’라고 하였는바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경은 수상이 되었으니 폐단을 바로잡는 모든 일을 십분 잘 처리하라."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기울어진 다음에는 비록 옛날의 현명한 사람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더라도 반드시 감당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신과 같이 용렬한 자이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 일은 몹시 어렵다. 옛말에 이르기를 ‘하북(河北)의 적은 오히려 제거하기 쉬우나 조정의 붕당은 제거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는바, 어찌 참으로 그렇지 않겠는가. 하늘이 인재를 내면서는 한 세대의 일을 맡기에 충분하게 하였다. 그러니 만약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내쫓는다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홍이상이 아뢰기를,
"중묘조 때 유호인(兪好仁)은 별로 볼 만한 일이 없었는데도 중묘께서 항상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가 경상도의 수령으로 있을 때 중묘께서 사람을 시켜 보게 하였더니 ‘북쪽을 바라봄에 군신간이 막혀 있다.[北望君臣隔]’라는 시구가 있었습니다. 한 때의 돌보아줌이 비록 중하였지만 승진시키지 않아서 단지 응교만 되고 끝내 당상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씀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와 같은 다음에야 공(公)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께서 문종(文宗)의 말로 하교하시었는데, 그 말이 무어 취할 만한 점이 있겠습니까. 문종은 이훈(李訓)·정주(鄭注) 등과 함께 일을 하였으니, 어찌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질 리가 있었겠습니까.
사람을 쓰고 다스리는 즈음에는 위엄과 형벌로 제압할 수 없습니다.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 비록 범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왕자(王者)의 도에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에 존양(存養)하고 성찰(省察)하는 공부가 바로 정자와 주자가 전수한 것입니다. 만약 청한(淸閑)할 때 척연히 성찰한다면 시비가 저절로 밝아질 것이고, 심려가 혼란할 때에는 이와 반대로 될 것입니다. 소신은 외람되어서 감히 진달드리지 못할 바이나 마침 성상의 하문을 받았으므로 분수를 잊고 감히 진달드립니다.〉"
하였다. 왕이 신율(申慄)에게 이르기를,
"경이 간악한 음모를 적발해내어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소신은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당초에 김제세(金濟世)가 위조한 공문을 가지고 갔는데, 평상시에 초료장(草料狀)103) 을 가진 자는 으레 반드시 보고서 먹여줍니다. 김제세가 글을 전할 때, 초료장을 제시하기를 요구하였는데 그 문서 내용이 어긋나서 삼척 동자라도 모두 형편없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인하여 잡아가두고서 캐물으니 그의 동생인 김익진(金翼辰)이 서울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즉시 그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어서 〈체포하고서〉 인신(印信)의 행방을 물으니 김제세가 곧바로 납초(納招)하지 않았습니다. 김익진에게 물었더니 인신이 정의민(丁義民)의 집에 있다고 하였는데, 곤장을 치면서 캐물으니 과연 그의 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화적질을 한 일을 공초하였는데 ‘장차 큰 일을 할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상세히 그 곡절을 캐물으니 주모자인 김백함(金百緘) 및 대장의 이름과 나이를 모두 납초하였습니다. 김직재는 바로 소신의 사촌 동서인데 일찍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실로 김백함이 김직재의 아들인 줄을 몰랐습니다. 신이 김백함이 어떤 자냐고 물으니, 말하기를 ‘이는 바로 평시 출신(平時出身)인 김직재의 아들이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역변에 대해 듣고 또 김직재가 주모자라고 들었을 때 몹시 놀랍고 두려웠습니다. 이에 즉시 강음(江陰)의 관원에게 통고하여 체포하였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김제세는 곤장 한 대 치지 않았는데 곧장 납초하였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김제세는 7, 8대를 마구 때렸더니 불었고 김익진은 10여 차례 마구 때렸더니 말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네가 비록 납초한다 해도 만약 애매한 사람이 있으면 함부로 납초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더니 ‘평산(平山)에 사는 정의민(丁義民)은 실로 애매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어보(御寶)와 인신을 가지고 가서 누구에게 주려고 하였다고 하였는가? 그 자들이 전벽(田闢)에게 전해 주려고 하였다는데, 그 말이 참으로 사실인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비록 전벽에게 전해주려고 하였다고는 하지만 역시 완전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그 자들이 스스로 쓰려고 한 데 불과합니다. 대개 황해도는 인심이 아주 나쁩니다. 황주(黃州)의 향소(鄕所)에 영리(營吏)를 해치려는 자가 있었는데, 그 향소가 마침 그 고을의 파총(把摠)이 되었을 때 성문(成文)을 위조하여 속오군(束伍軍)을 불러모아 하루 저녁에 거사하여 먼저 병사와 판관을 제거한 뒤 그 영리를 죽이려고 모의하였습니다. 병사가 그 소식을 듣고는 즉시 향소를 체포해서 캐물으니 과연 ‘영리와 혐의가 있어서 이런 짓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무지 망작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그곳의 인심이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 도의 인심이 전부터 이상하였습니다. 대개 글자를 아는 자가 없어서 몽매한 백성들이 금수와 같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하고 홍이상이 아뢰기를,
"기축년의 옥사 때 소신이 문사 낭청(問事郞廳)이 되었는데, 그 뒤에 명을 받들고 황해도에 가서 보니, 그곳의 인심이 과연 무식하였습니다. 정적(鄭賊)104) 이 천리 밖에 있으면서 능히 위협하여 동모하였으니 참으로 몹시 놀랍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으로는, 최봉춘은 필시 최군이고 최군은 반드시 이름을 바꾸고서 모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간의 사정은 상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경은 그곳에 있었으니 필시 자세히 들었을 것이다. 이른바 최군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변성명하였으니 그의 행방을 들을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조광벽(趙光璧)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군도목(軍都目)을 해득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같이 거처하면서 시를 지었다는 일은 필시 거짓말입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민탁(閔卓)이 윤봉익(尹鳳翼)이라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상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대개 그 무리들이 흉모를 꾸민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본도의 사람 중에는 일찍이 아는 자가 없었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역모를 꾸민 일은 몹시 흉악하고도 참혹하니 비록 혹 알더라도 어찌 퍼뜨릴 리가 있겠습니까. 대개 평산의 정의민 집에 김직재가 항상 갔다고 하는데, 지난번에 관군이 체포할 때 평산의 백성들이 모두 ‘이번에 필시 정의민·박이관(朴以觀) 등이 체포될 것이다.’고 하였으니, 그 동모하였다는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김강재(金强哉)는 어찌해서 체포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김강재는 당초에 재궁(齋宮)에 있었는데 그 뒤에 기미를 알아채고서 도망하였습니다. 필시 자신의 죄를 알고서 자살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살아 있다면 어찌 체포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김일승(金日昇)의 문서는 어찌하여 일찍 아뢰지 않았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최후에 적장(賊贓)을 수색할 때 마침 그 문서를 찾아내었으므로 감사에게 보고하고서 계달하였던 것이지, 당초 문서에 뜻을 두고 있다가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이영(李永)의 일은 어떠한가?"
하자 신율이 아뢰기를,
"비록 김일승의 처족(妻族)이기는 하지만 역시 연좌시킬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됨이 아주 어리석어서 중사(中使)가 올라올 때 산위에서 망을 보았으므로 도직(盜直)에게 잡혔습니다. 대개 그 사람은 숙맥도 구별하지 못하나 이미 중사에게 체포되었으므로 가두고서 기다렸던 것인데 그 뒤에 목매달아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김제세를 체포할 때 안종길(安宗吉) 역시 동참하였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역모한 사실을 말하지 않다가 여러 차례 캐물은 다음에야 직초(直招)하였습니다. 팔도의 정장(定將)을 모두 납초한 후에 다시 추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안종길이 왔으므로 다른 곳에서 추문하고자 하다가 신의 생각에 ‘이 역적이 만약 서울에 올라가서 도로 숨길 경우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고 여겨졌으므로 안종길이 떠나가려 하는 것을 신이 머물도록 청하여서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정인홍의 이름을 김제세가 과연 말하였는가?"
하니 신율이 아뢰기를,
"정인홍의 이름을, 다시 추문할 때 과연 납초하였습니다. 같이 추고한 관원 권엽(權曄)이 와서 참여해 추문하자 처음에는 ‘정(鄭)’이라고 말하였고 또 ‘대사헌’이라고 말하였으며 끝내는 이름을 말하였습니다. 권엽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기에, 신이 ‘감사와 병사가 몸소 추문할 것이니 이 일은 주장(主將)이 처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감사와 병사가 캐물으니 역시 이름을 말하였습니다."
하였다.〈왕이 영상에게 이르기를,
"경이 근친(覲親)하고자 한다는데 이와 같이 어려운 때 황 지휘 역시 와 있으니 외방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속히 갔다가 돌아오라."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황 지휘가 그믐쯤 돌아갈 것이고 양 어사(楊御史)의 시문(詩文) 역시 고칠 곳이 있어서 그 전에 올라오고자 합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21일에 거둥한 뒤 즉시 내려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106면
- 【분류】외교-야(野)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예술-음악(音樂) / 변란-정변(政變) / 풍속-예속(禮俗) / 사법-치안(治安)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인사-관리(管理)
- [註 102] 삼감(三監) : 관숙(管叔)·채숙(蔡叔)·곽숙(藿叔)임.
- [註 103] 초료장(草料狀) : 공무로 출장하는 관원에게 연도의 각 역참(驛站)에서 역마·식료 등을 공급하도록 명령하는 문서. 초료(草料).
- [註 104] 정적(鄭賊) : 정여립(鄭汝立).
원문
○壬子九月十八日己酉王(出御視事廳), 朝講。 領事李恒福、特進官金信元、同知事趙挺、特進官柳公亮、參贊官李好信、執義申景洛、司諫尹重三、侍講官柳潚、檢討官曺明勗、記事官閔應恢·李敬輿·權倜入侍。 講《尙書》 《大誥》。 (柳潚曰: "文王、武王善承其衆, 克堪用德, 是誠可以爲神天之主矣。 故天式敎文、武, 用以休美簡擇, 畏畀付殷命, 以正多方也。" 王曰: "‘靈承于旅’者, 何意耶?" 柳潚曰: "靈, 善也; 旅, 衆也, 謂‘善承民衆’也。 ‘式敎用休’, 言文、武旣得乎天, 其德日新, 左右逢源, 其思也若起之, 其行也若翼之, 此乃天之所以式敎而用昌大休明者也, 非諄諄然而敎之也。 此章言‘天旣命我周而定于一矣。 爾猶洶洶不靖, 欲何爲耶?’ 明指天命, 讋服奸雄之心者, 無切於是矣。" 李恒福曰: "所謂‘靈承于旅’者, 其時方言也。 若以文理言之, 則猶《大學》所謂‘明明德’、《中庸》所謂‘篤恭而天下平’也。 人主爲德, 只在公私之間。 苟拘於私, 公道不行, 雖欲爲德, 亦不克堪。 治亂、興亡之機, 間不容髮, 所謂‘克堪用德’四字, 最切於聖學工夫也。" 王曰: "殷民固可罪之。 然人人皆可瀦宅收田耶?" 李恒福曰: "殷民思先王之惠澤, 雖以紂之暴虐, 人無叛意。 故周公於此, 諄諄曉諭。 蓋脅從罔治之意也, 豈可人人而罪之哉?") 柳潚曰: "大槪此篇多有討逆之義, 自上體念至當。 四國民命, 雖不得盡誅, 其爲首者則不可不誅之矣。" 李恒福曰: "此則指民衆, 而言非指紂而言也。 故其辭如此。 大抵其時, 脅從之類, 不知周之至德, 從三監而作亂。 故反復敎諭, 以鎭人心也。" 趙挺曰: "頃因兩司避嫌, 自上前後下敎極其嚴峻, 事體至爲未安。 言官以言爲責, 或不無過激之言, 自上必須優容嘉納, 直言可入矣。 小臣駑劣, 固無所識, 而待罪言地, 惶恐敢啓。" 上曰: "時弊不可不救, 故於諫長之避嫌, 暫言之矣, 所達之辭, 當體念。 卿爲憲長, 須振肅頹綱。" (王言于左相李恒福曰: "頃者見北道書狀, 其虛實, 雖未能詳知, 頗有可慮。 未知卿意如何?" 李恒福曰: "阿耳之事, 果爲可慮。 若長驅則無一處可恃。 加之以近來饑饉相因, 癘疫熾發, 大邑土兵, 或斃數百。 近日風水災, 亦近古所無, 事事不吉, 人情沮喪, 極可慮也。" 王曰: "北兵使時未遞差, 若遞則何人可合乎?" 李恒福曰: "可合之人絶無矣。 李慶濬在喪, 柳珩得病, 李箕賓被論。 此外絶無可合之人矣。" 王曰: "卿之所見第言之。" 李恒福曰: "新進武士中李光英、李适、李宗一培養, 則可合爲兵使矣。" 柳公亮曰: "聖明之世, 豈料凶逆之遽起乎? 當初逮捕之際, 民情多危懼。 厥後辭連者, 多數放釋, 故民心稍定矣。 其處人民無識字者, 極其頑愚。 守令若擇差, 則庶可爲矣。" 王曰: "卿詳察賊情, 勉捕其黨, 良用爲喜。 其辭連可釋者, 旣已分揀放送矣。 大槪其處人心, 自前異常, 蓋無知無識而然耶? 何兇悖至此耶?" 柳公亮曰: "蚩蚩愚氓, 本無知識, 齊動雜言, 以至於此矣。" 王曰: "金濟世兇謀已久, 其所爲曲折, 曾無所聞耶?" 柳公亮曰: "逆謀極兇, 孰有知之者, 雖或知之, 豈有言之之理乎?" 王曰: "金强哉何不得捕捉乎?" 柳公亮曰: "渠輩一邑居生之奇, 曾未聞知, 竟不得捕, 此實疎漏所致, 極爲惶恐。" 王曰: "所謂‘不和’之言, 誠然乎?" 柳公亮曰: "其漢極惡之事, 不足云云。 而其兄弟如讐, 若逢訟官, 必一時呈訟云矣。" 王曰: "金日昇事, 何至累日遲滯乎?" 柳公亮曰: "問于申慄, 則‘賊贓搜探時, 其文書適現出矣, 非有意於搜出文書而得之也。’" 王曰: "賊將尹鳳翼、崔君等內應之說, 未能詳知, 卿無所聞乎?" 柳公亮曰: "渠輩必變姓名, 無從可聞矣。" 王曰: "崔奉春等前後二人捉來, 後來者果非所謂崔君乎?" 柳公亮曰: "未能詳知矣。" 王曰: "或謂閔卓是尹鳳翼云, 然耶?" 柳公亮曰: "金濟世變幻不測, 其言不可盡信矣。" 王曰: "金濟世捕捉時, 不下一杖, 箇箇承服乎? 嚴訊後直招乎?" 柳公亮曰: "大槪僞造印信之賊也。 杖而後承服矣。") 王問于柳公亮 曰: "鄭仁弘援引之事, 果出於濟世之口耶?" 柳公亮 對曰: "旣捧招辭而報稟矣。 朝廷自當處置, 故小臣只待命令而已。 尹暄欲更問, 故小臣爲一道主將, 不得不往參問之。 鄭仁弘事, 濟世果言之矣。 當初旣已捧招, 故不爲詳問。" (李恒福曰: "戰車造置, 而或云‘極好, 不可不多造用之。’ 或云‘宜於防倭, 不宜於防胡矣。’ 韓嶠頗知軍法, 都監稱爲敎訓官而聽其造車。 柳珩在平安道時, 亦招致韓嶠, 造車試驗, 則甚好云矣。" 王曰: "我國亦可爲車戰乎?" 李恒福曰: "此乃平地可試可用之法, 山川險阻處, 決不可用矣。 六七年前, 司諫院亦箚子, 請爲車戰矣。 大槪此非載銃之車也。 雖似同制, 而實則不同。 有若垣墻以防捍, 然一人推而行之矣。" 王曰: "車戰幾人乘之?" 李恒福曰: "不爲多乘, 大槪如防牌。 然後日郊外試才時, 當取去矣。")○王(未時, 出御視事廳,) 引見領議政李德馨、開城留守洪履祥、禮曹參判申慄。 (左承旨李好信、記事官閔應恢·李敬輿·權倜入侍。) 王曰: "胡人進告, 自前或有不實矣。 今此進告者, 頗有爲我國情誠云, 其言果實, 則極爲可慮。 於卿意如何?" 李德馨曰: "亂後受任, 每在南方, 海邦之事, 則善惡間多有料理矣。 北方則身不曾往來, 事不料理, 只因邊臣狀啓, 而揣度之, 故未能詳知。 大槪近來不幸, 咸鏡一路, 饑饉荐至, 癘疫相仍, 死亡相繼, 邊城一空。 若變生則有同以遠水救近火, 極可慮也。 但賊勢與忽賊, 有蚌鷸之勢, 似不得容易犯邊矣。 添兵之事, 自古出於不得已之擧也, 非國家常行之道也。 近來邊臣, 冀朝廷顧念, 例發過當之議, 或請添防之軍, 以救目前之急。 其間實狀, 不能詳知, 藩胡進告之言, 亦多不實。 若欲的知賊情虛實, 則宜令體察使, 遣該道從事官, 或令備邊司, 委送文郞廳, 俾探賊情, (襦衣近當入送, 其時使之領去分給, 仍令探聽賊奇)似當。" 王曰: "若然則言于體察使議定。 大槪無南無北, 在我防備牢固, 然後可以無憂。 而近來現 玩愒成風, 悠泛度日, 軍務之事, 專不致意, 極可寒心, 未知何以爲之也。" 李德馨曰: "自古外海不足患, 內患最可憂。 必自朝廷, 振發精神, 有折衝千里之氣, 可以禦敵。 備邊司自當其責, 然自上亦須奮發自强, 常加警飭, 以爲表迪之方, 然後風草之效, 捷於影響。 孟子曰: ‘國家閑暇, 及是時, 明其政刑。’ 註曰: ‘任賢使能, 各擧其職。’ 所謂自强之實, 不在多言。 朝廷是外方之根抵, 必先正朝廷, 然後外方可以無憂矣。 自上累下申飭邊備之命, 而朝廷之事, 日就頹圮, 其何以整頓紀綱, 申飭邊備, 以弭外患哉? 如臣駑劣者, 斥而去之, 自上亦振發有爲之志, 庶可以尊朝廷而禦外侮矣。" 王曰: "卿言至當, 予當體念。 此時大臣, 不可辭避, 勿懷此意, 盡心職事。 且近日之事, 只是辭職疏章而已, 古亦如是乎? 未知其故。" 李德馨曰: "近來國無紀綱, 人懷自便, 以至於此, 豈不痛愕乎?" 王曰: "倭人接待時, 女樂不設, 故多有生怒云, 何以爲之?" 李德馨曰: "物力蕩竭之時, 女樂設行未安, 故勿令行之。 近聞其處守土之官, 已爲措備云。 大槪不關之事也, 雖使設行, 亦無所妨。 至有後弊之事, 則不可不防禁。 頃日渠輩要請之時, 小臣以禁斷之意啓達, 而厥後多有聽從之事, 故漸至無窮之弊。 壬辰羞辱, 萬世不忘之讐, 而如是許待, 終必有難防之禍矣。 且倭人情狀, 巧詐不測, 若有怒色, 我國加一等生怒以示之, 則彼亦自沮矣。 今者不知倭情, 故待之不以待倭之道。 以此, 多少要請, 漸至難防。 如上京重大之事, 當斷然絶禁, 如女樂一事, 雖許之無妨矣。" (王曰: "黃指揮何間回還耶?" 李德馨曰: "今月晦間, 當還歸矣。") 李德馨曰: "半歲推治逆獄, 獄情與人心, 自上無不斟酌矣。 末世人心, 漸不如古, 人心一搖, 後弊無窮, 終至於不能救。 成廟沖年卽祚, 當初告變者甚多。 貞熹王后乃聖妃, 成廟聖德如天, 未久受復辟之政, 陶成至治。 中廟反正之後, 告變者亦多, 如甄城、靈城, 告者繼出,中廟初聽從, 而後悔亦多矣。 頃者開城府有匿名書之變, 以此人心騷擾, 極爲可慮。 李時彦, 善人也, 必不爲此事矣。 小臣之意則彼必以爲: ‘此事若更出於他處, 而守土之臣不先告發, 事甚未安。’ 必以此而徑先呈告矣。 大槪此事, 自有祖宗朝金石之典, 處之不難矣。" 王曰: "開城府匿名[書] 事, 未知何故耶。" 李德馨曰: "其處人心極惡, 徐敬德墳塋掘發之後, 如此之事, 連續有之。 此不過無賴之徒, 欲爲報怨之計, 以至於此, 極可駭也。" 王曰: "其數幾至百, 未知其故。" 李德馨曰: "渠所憎惡者, 亂書投呈, 其數雖多, 何足疑怪?" 洪履祥曰: "開城府是舊都也。 民風土俗, 自前淳美, 不似他處矣。 近來人心極惡, 漸至十分地頭, 小臣駑劣, 恐未堪任。" 王曰: "卿乃先朝耆舊, 當留置朝廷, 不宜外任, 而松都纔經逆變, 非卿無可合者, 卿宜往欽, 盡心職事。" 洪履祥曰: "小臣年旣衰老, 精神頓減, 雖尋常職事, 恐難堪任。 況此難治之地乎? 承命以往, 不勝悶慮。 大槪其處, 皆是謀 牟利之人, 錐刀競利, 以資其生。 近來國家多事, 民不堪其苦, 有此變故。 小臣才不逮, 必不能堪當, 惶恐惶恐。" (王曰: "人心極惡云, 未知何故耶。" 洪履祥曰: "徐敬德墳墓掘取, 至於逆賊匿名, 其惡可知。 加以士夫間植黨, 雜論甚多, 爭相報怨, 此所謂極惡也。") 李德馨曰: "近年以來, 風氣殊常, 非徒松都, 外方列邑, 無不有偏黨, 至於微末下賤, 皆有此論, 獄訟爭端, 皆由於此, 極爲寒心。 《尙書》 《洪範》篇曰: ‘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 大凡學問, 雖至誠正地頭, 一念或偏, 則廣大光明之全體, 必不得其正。 喜怒哀樂好惡, 偏心易生, 漸至於私欲流行, 不覺其非。 每於偏倚處, 常加警戒, 惕然覺悟, 庶不悖於誠正工夫。 況帝王學問, 代天理物, 苟有一念之偏, 則庶務叢脞, 公道不行。 卽今朝廷, 百事日就無形, 將至於不可救, 豈非痛哭流涕處也? 政敎循私, 用舍不公, 悉由於偏倚之弊矣。 松都之事, 履祥旣言之, 臣不敢更達矣。" 王曰: "古語云: ‘君相一體。’ 吾當體念。 卿爲首相, 凡可以爲矯弊之事, 十分善處。" 李德馨曰: "如此旣傾之後, 雖使古先哲人當之, 必不能堪。 況如臣庸劣者乎?" 王曰: "此事極難。 古語曰: ‘去河北賊易, 去朝廷朋黨難’, 豈不誠然乎? 天生人才, 自足了一世事。 若擧賢而退不肖, 則必不如是矣。" 洪履祥曰:"中廟朝兪好仁, 別無可觀之事, 而中廟常眷遇。 及其爲慶尙道守令,中廟使人見之, 則有‘北望君臣隔’之句。 一時恩眷雖重, 而不爲陞遷, 只爲應敎, 終不爲堂上。 人君用人, 必如是而後, 可謂公矣。 自上以文宗之言下敎, 此言何足取乎? 文宗與李訓、鄭注 用 同事, 豈有爲國之理乎? 用人致治之際, 不可以威刑制之。 誠意、正心, 雖是庸常之言, 王者之道, 無逾於此。 (喜怒哀樂未發之前, 存養、省察工夫, 此乃程、朱之的傳也。 若於淸閑之時, 惕然省察, 則是非自明, 若心慮昏辭亂之時, 則反是矣。 小臣猥濫, 所不敢達, 而適承聖上之下問, 小臣忘分義, 敢達。)"○王言于申慄曰: "卿摘發奸謀, 以安社稷, 良用嘉焉。" 申慄曰: "小臣別無所爲之事。 當初金濟世持僞造公文而去, 常時持草料者, 例必見而饋之。 濟世 之傳書也, 徵索草料, 而其公文齟齬, 雖三尺童子, 皆知其無形矣。 因捉致推問, 則厥弟 益 翼辰在京云矣。 臣卽送人于渠家(收捕), 問其印信去處, 則濟世不爲直招。 問于 益 翼辰, 則曰: ‘印信在丁義民家。’ 因杖而問之, 則果在渠家云。 且供稱爲火賊之事, 而將爲大事, 故不殺害人物云。 因詳問其曲折, 則主謀金百緘及大將姓名、年歲皆納招。 直哉乃小臣四寸同壻, 而曾不見其面目, 故實不知百緘之爲直哉子。 臣問百緘者何人云, 則曰: ‘此乃平時出身金直哉子’云矣。 始聞逆變, 且聞直哉之爲謀首, 極爲驚惶。 卽通于江陰官捕捉矣。" 王曰: "金濟世不下一杖而直招乎?" 申慄曰: "濟世亂杖七八度而言之, 益 翼辰亂杖十餘度言之矣。 臣且曰: ‘汝雖納招, 若有曖昧之人, 不可亂招’云, 則曰: ‘平山 丁義民實曖昧’云矣。" 王曰: "御寶及印信取去, 欲給何人云乎? 渠輩欲傳于田闢云, 此語誠然乎?" 申慄曰: "雖曰將傳于田闢, 亦不可盡信。 小臣之意, 則不過渠輩欲自用之矣。 大槪黃海道人心極惡。 黃州鄕所有欲害營吏者, 其鄕所適爲其邑把總, 僞造成文, 招集束伍軍, 一夕謀爲擧事, 先除兵使及判官後, 殺其營吏。 兵使聞其奇, 卽捉其鄕所問之, 則果與營吏有嫌, 而如是爲之云。 其無知妄作, 類如是矣。" 王曰: "其處人心, 何其至此耶?" 李德馨曰: "其道人心, 自前異常。 大槪無識字者, 蚩蚩之氓, 有同禽獸, 極可駭也。" 洪履祥曰: "己丑年小臣爲問事郞廳, 厥後奉命往黃海道目覩, 則其處人心, 果爲無識。 鄭賊在千里之外, 能脅從同謀, 誠可痛愕。" 王曰: "崔奉春果是崔君乎?" 申慄曰: "小臣之意, 則奉春必非崔君, 崔君必改姓名作謀。 其間事情, 未能詳知。" 王曰: "卿在其處, 必詳聞之。 所謂崔君當在何處乎?" 申慄曰: "如是變姓名, 其去處無因得聞矣。" 王曰: "趙光璧事何如?" 申慄曰: "不解見軍都目云, 其同處作詩之事, 必是虛言也。" 王曰: "閔卓是尹鳳翼云, 然耶?" 申慄曰: "未能詳知矣。" 王曰: "大槪渠輩兇謀旣久, 本道之人, 曾無知之者乎?" 申慄曰: "逆謀之事, 極兇極慘, 雖或知之, 豈有傳播之理乎? 大槪平山 丁義民家舍, 直哉常常往之云。 頃者軍官收捕時, 平山之民皆曰: ‘此必丁義民、朴以觀等逮捕’云, 則其同謀之意可知矣。" 王曰: "金强哉何不得捕捉乎?" 申慄曰: "强哉初在齋宮, 厥後知幾逃躱。 必是自知己罪而自盡也。 若生存, 則豈有不捕之理乎?" 王曰: "金日昇文書, 何不早啓乎?" 申慄曰: "最後賊贓搜探時, 適得其文書, 故報于監司而啓達矣, 初非有意於文書而得之也。" 王曰: "李永之事何如?" 申慄曰: "雖是金日昇妻族, 亦無連坐之事。 而爲人至愚, 中使上來時, 在山上瞻望, 故爲盜直所捉。 大槪其人, 不辨菽麥, 而旣爲中使所捉, 故拘囚以待, 厥後結項自處云矣。" 王曰: "金濟世捕捉時, 安宗吉亦同參乎?" 申慄曰: "當初不言逆謀, 屢次鉤問後直招。 八道定將, 盡爲納招後, 欲爲更推矣。 安宗吉適來, 臣欲於他處推問, 臣意以爲: ‘此賊若上京還諱, 則無以發明。’ 故宗吉欲起去, 臣請留, 使之參聽矣。" 王曰: "鄭仁弘姓名, 濟世果言之乎?" 申慄曰: "鄭仁弘姓名, 更推之時, 果爲納招。 同推官權曄來參問之, 則初言鄭鄭, 又言大司憲, 終言姓名。 權曄曰: ‘此事何以爲之?’ 臣曰: ‘監兵使當躬親推問, 此則主將當爲處置。’ 厥後監兵使問之, 則亦言姓名矣。" (王言于領相曰: "卿欲爲覲親云, 如此艱虞之時, 黃指揮亦來, 不可久留外處。 從速往還。" 李德馨曰: "黃指揮晦間當還歸, 楊御史詩文, 亦有可改處, 其前欲爲上來耳。" 王曰: "二十一日擧動後, 卽下去爲當。")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1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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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광해 4년 (1612)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