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22권, 선조 21년 1월 5일 기축 1/2 기사 / 1588년 명 만력(萬曆) 16년
조헌의 상소를 소각하고 내리지 않았는데 거기에 실린 동·서 각인들의 관계와 행실
국역
비망기(備忘記)로 이르기를,
"지금 조헌의 소(疏)를 보니, 이는 인요(人妖)010) 라 하늘의 견책이 지극히 깊으니, 두렵고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이 어찌 과인(寡人)이 현상 명경(賢相名卿)을 지성으로 대우하지 않고 직무를 전적으로 위임하지 않았던 소치가 아니겠는가. 더욱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다. 이 소(疏)를 불가불 내려야 하겠지만, 또 차마 내릴 수도 없다. 이 소가 한번 내려가면 그 손상되는 바가 매우 클 것이므로 아예 내가 그 허물을 지고 이미 소각시켜 버렸으니, 사관(史官)은 나의 허물을 대서(大書)하여 후세를 경계하였으면 한다."
하였다. 처음에 조헌이 옥천군(沃川郡)에서 감사 권징(權徵)에게 투소(投疏)하자, 권징이 조헌으로 하여금 직접 정원(政院)에 올리게 하였으므로, 이번에 정원에 올리며 말하기를,
"지난 해 정원에 소를 올릴 때, 정원이 먼저 유전(柳㙉)·노식(盧植)에게 간통(簡通)011) 한 뒤에야 입계(入啓)하였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게 하였다. 이번의 소에 대해서는 간통하지 말고 바로 속히 입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그 소중(疏中)에 잘못 쓰인 곳과 격식에 위배되는 곳이 많은 줄 알고 있었으나 그의 말을 노여워하여 한 차례 훑어 보고 바로 입계시킨 뒤에 한마디 회계(回啓)012) 하려고 기초(起草)를 하다가 소각시켰다는 명이 갑자기 내려 오자 그만 두었다. 그 소의(疏意)의 대개는, 도술(道術)·국운(國運)·군식(軍食)·비변책(備邊策)을 논하고, 끝에는 일본(日本) 정벌(征伐)을 논하였는데, 일본과 단절하는 계책과 우리를 강하게 하는 계책이 들어있었다. 또 소 중에 별폭(別幅) 2도(度)가 있는데, 매조(每條) 아래 대주(大註)를 붙이고 대주 안에 또 소주(小註)를 붙여, 번번이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이이(李珥)의 학문을 증명하였다. 또 이이가 이황(李滉)과는 뜻도 같고 도(道)도 같은데, 이황의 문도(門徒) 중에 하나도 그 스승의 뜻을 아는 이가 없어 서로 헐뜯어 이이와의 사이를 둘로 갈라 놓으려 하고 있다고 하고, 노수신(盧守愼)은 겨우 글줄이나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 이황과는 서로 반대되니 이는 위학(僞學)이라고 하면서, 그의 ‘욕심은 사람의 성이다. [欲者人之性]’는 시(詩)와 ‘사람의 욕심은 천성이 아니다. [人欲非天性]’는 두 시를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또 노수신이 신(臣)의 충고를 듣지 않고 완동(頑童)들과 친하며, 을해년에 출생한 자는 장차 재상(宰相)이 될 것이다 하여 아무리 서리(胥吏)의 무리라도 반드시 더불어 계(契)를 맺었다고 하였고, 그 주(註)에, 옥천군(沃川郡)에서 호상(護喪)을 맡았던 아전을 시켜 해마다 목화(木花)를 반복 무역하여 권귀(權貴)를 부르고 재물을 주어서 그 자제와 친척 중에 벼슬을 제수받은 자가 11명이나 되며, 주사(籌司)는 군국(軍國)의 대사를 대처하는 곳인데 봄에는 객(客)들과 대좌하여 술을 마실 뿐 비변(備邊)에 대한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가을에는 신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정유길(鄭惟吉)은 이민각(李民覺)의 충고를 듣지 않고 의녀(醫女)에 고혹(蠱惑)되어 그 조부(祖父)013) 의 풍도를 크게 무너뜨렸다고 하였고, 그 주(註)에, 정유길은 기대항(奇大恒)의 벗으로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첩을 차지하였고, 김귀영(金貴榮)·유전(柳㙉)은 붕사(朋邪)의 괴수로 나라를 저버리고 외구(外寇)를 불러들였으며, 김응남(金應南)·백유양(白惟讓)·허봉(許篈)·이발(李潑)의 모사만을 듣고 조권(朝權)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그 모주(謀主)는 이산해(李山海)라고 하였고, 그 주(註)에 ‘유전(柳㙉)은 본디 원대한 계책도 없고 다만 이산해와 결탁하여 높은 반열(班列)에 올랐으므로 정철(鄭澈)이 심지어 유전의 백마(白麻)를 찢어 버리려 하였으니, 정철은 오늘의 양성(陽城)014) 이다. 이산해가 정철을 미워하여 이이를 정철의 구교(舊交)라 해서 아울러 절교하는 등 미천할 때의 벗을 영귀할 때 잊어 버렸으니, 이는 비부(鄙夫)의 태도이다.’고 하였다.
또 서인원(徐仁元)과 심대(沈岱)는 지금 동인(東人) 중의 거벽(巨擘)이다. 심암(沈巖)이 죽음을 모면한 것은 심대가 그 아우인 때문이오, 서예원(徐禮元)이 형(刑)을 바로 받지 않은 것은 서인원이 그 형인 때문이며, 심암을 추천한 자는 유전이오, 서예원을 기용(起用)한 자는 이산해이다. 이로써 말한다면 심암의 패군(敗軍)은 곧 유전의 패군이오, 서예원의 패사(敗事)는 곧 이산해의 패사이다. 심암이 비록 죽었으나 두 사람이 오히려 살아 있으니, 남북(南北) 사람들 중에 어느 누가 명령을 달게 받으려 하겠는가. 우선 이 두 사람부터 파출(罷黜)시키고 급히 중사(中使)를 보내 박순(朴淳)과 정철을 소환하여 조권(朝權)을 위임하고 세자 책봉을 의논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정언신(鄭彦信)은 나라를 저버리는 악인이오, 권극례(權克禮)는 벼슬을 판 간인(奸人)이라 하였고, 그 주(注)에, 국가에 식량이 한창 부족한데, 호령(湖嶺)015) 에서 쌀 1백 석을 수송하여 허봉과 송응개(宋應槪)에게 뇌물로 주므로, 임윤신(任允臣)과 한백후(韓伯厚)가 회계(會計)에 대해 입계(入啓)하려 하다가 노식(盧植)의 위협으로 한백후가 끝내 그만두고 말았으니, 노식이 비록 죽었으나 관작을 삭탈하고 정언신도 의당 강등시켜야 하며, 권극례는 탐음 남종(貪淫濫從)하다고 하였다. 또 자신에게 굶어 죽은 한 아우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삼공(三公)이 나의 아우를 죽인 것이다. 삼공이 음양을 잘 섭리하여 시화 연풍(時和年豊)하였다면 내 아우가 반드시 죽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심공에게 그 책임을 지운다면, 나의 아우를 직접 죽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 윤경(尹暻)은 허봉을 깍듯이 섬긴 자이다. 허봉의 일당 김응남(金應南)·백유양(白惟讓)·홍가신(洪可臣)·이발(李潑)·이길(李洁)이 서로 조정과 결탁하여 구호했기 때문에 그 아들 홍렬(弘烈)의 체포가 늦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또 허봉과 이양중(李養中)은 어려서부터 절친한 벗으로 함께 한 기생을 간음했다고 하였다. 또 양사기(楊士奇)를 이어 서익(徐益)마저 죽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서기(徐起)·송익필(宋翼弼)을 군중(軍中)에 두어 군기(軍機)를 참찬(參贊)하게 하고, 또 박인적(朴麟迹)으로 둔전관(屯田官)을 삼아 성적을 책임지워야 한다고 하였다.
또 일본의 사신을 구류시키고 이를 천자(天子)에게 고하여 문죄(問罪)를 단행한다면 종계(宗系)를 개정(改正)하는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또 선왕조(先王朝)에서는 복상(卜相)016) 에 적격자를 얻어 풍속이 순미(淳美)하므로 강상(綱常)의 변(變)이 없고 다만 홍길동(洪吉同)·이연수(李連壽) 두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항간에서 욕을 할 때는 으레 이 두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았는데, 지금에는 복상에 적격자를 얻지 못하여 풍속이 괴패(乖敗)하고 강상의 변이 곳곳마다 일어나므로 홍길동·이연수의 이름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또 군국(軍國)의 일을 의논하려면 황임(黃琳)·이증(李增)·안자유(安自裕)·이준민(李俊民)·김명원(金命元)·홍성민(洪聖民)·황정욱(黃廷彧)·이산보(李山甫) 등을 불러들여야 한다. 이들은 다 질실(質實)하고 유아(儒雅)하여 함께 일을 의논할 만하다고 하였다. 또 우리 나라의 소인(小人)은 모모(某某)이다. 반드시 양연(粱淵)이 있어야 김안로를 제거할 수 있고, 이탁(李鐸)이 있어야 이양(李樑)을 제거할 수 있고, 박순(朴淳)이 있어야 윤원형을 제거할 수 있고, 정철이 있어야 김개(金鎧)를 제거할 수 있으니 정인 군자가 조정에 있어야 간사한 자가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이가 ‘네가 미천한 사람으로 조정(朝廷)을 그처럼 지척(指斥)하고 있으니, 혹 상으로부터 듣기 싫어하는 일이 없겠는가. 화(禍)가 반드시 자신에게 미칠 것이다.’ 하기에, 신은 ‘그렇지 않다. 박순(朴淳)은 충렬(忠烈)한 선비로 선왕조(先王朝)로부터 알려진 사람이오, 정철은 충신(忠藎)의 선비로 상으로부터 의중(倚重)을 받는 사람이오, 성혼(成渾)은 학문의 선비로 상으로부터 초빙을 받은 사람이며, 민순(閔純)이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춘금(春金)의 옥사(獄事)와 백모(白帽)의 상소017) 에 대해서는 상으로부터 채용된 바가 있다. 신의 소(疏)를 보면 반드시 가납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 [註 010] 인요(人妖) : 정상에서 어긋난 짓을 하는 사람.
- [註 011] 간통(簡通) : 대각(臺閣)의 벼슬아치가 서면으로 의견을 통합하는 일.
- [註 012] 회계(回啓) : 임금의 물음에 대해 심의하여 상주(上奏)함.
- [註 013] 조부(祖父) : 정광필(鄭光弼)을 말함.
- [註 014] 백마(白麻)를 찢어 버리려 하였으니, 정철은 오늘의 양성(陽城) : 백마는 황제의 조서(詔書). 재상으로 임용한다는 사령서를 말함, 당 덕종(唐德宗) 때 간의 대부(諫議大夫)로 있던 양성이 간신 배연령(裵延齡)을 재상에 등용한다는 소식을 듣고 ‘만약에 배연령을 재상에 등용하면 그 황마를 찢어버리겠다."고 적극 저지하여 뜻을 관철시켰음. 《당서(唐書)》 권194.
- [註 015] 호령(湖嶺) : 충청도와 경상도의 별칭.
- [註 016] 복상(卜相) : 정승을 새로 가려 뽑음.
- [註 017] 백모(白帽)의 상소 : 선조 8년(1575)에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상(喪)을 만나 예관(禮官)들이 《오례의(五禮儀)》에 따라 오모 흑대(烏帽黑帶)로서 상복을 결정지으려 하자, 민순(閔純)이 송 효종(宋孝宗)의 백모 삼년제(白帽三年制)를 따르자고 건의한 상소를 말함.
원문
○己丑/備忘記曰:
今見趙憲之疏, 此乃人妖, 天之譴告至深, 不勝兢惕, 豈非寡昧於賢相名卿, 不能待以至誠, 委任不專, 有以致此耶? 尤不勝慙恧。 疏不可不下, 而此疏不忍下, 一下, 所損甚大。 予寧受過, 已焚之矣, 願史官大書予過, 以戒後世足矣。
初憲自沃川郡, 投疏于監司權徵, 徵令憲自呈政院, 至是呈于院曰:
頃年上疏, 政院先爲簡通于柳㙉ㆍ盧植, 然後始爲入啓。 使憲久立門外。 今此上疏, 毋爲簡通, 宜速入之。
政院知其疏中, 多有錯書處, 有違格處, 而怒其言, 一番看過, 遂入之。 方欲爲一言回啓起草, 焚命遽下, 遂止。 疏旨大槪, 論道術, 論國步, 論軍食, 論邊策。 末終論征日本, 有絶彼之策, 有强我之策, 疏中又有別幅二度, 每條下有大註, 註中又有小註, 動引朱子之言, 以證李珥之學。 又與李滉志同道同, 而滉之門徒, 無一人識其師意, 好加詆毁, 遂欲岐珥而二之, 彼盧守愼粗知讀書, 而與滉相反, 僞學也, 引其欲者人之性, 人欲非天性, 二詩而證之。 又曰: "守愼不聽臣憲之諫, 昵比頑童, 生年乙亥者, 身居相位, 雖胥吏必與作契。" 註曰: "沃郡護喪之吏, 使之年年反貿木花, 招權納財, 子弟親戚除官者十一人, 籌邊, 待价國之大事, 而春則與客對飮, 不赴備邊之召, 秋則托病不來。" 云云。 惟吉不聽民覺之諫, 蠱心醫女, 大毁祖風, 註曰: "惟吉 大恒之友, 而大恒旣死, 取其妾, 貴榮、㙉朋邪之魁, 負國召寇, 一聽應南、惟讓、篈、潑之謀, 專擅朝柄, 而爲其謀主者山海也。" 註曰: "㙉素無遠計, 惟結山海, 得躋崇班, 鄭澈至欲裂㙉麻, 澈今日之陽城也。 山海惡之, 竝與珥、澈之舊交而絶之, 賤交貴忌, 鄙夫之態也。 仁元、岱, 今日東人之巨擘也。 沈巖之緩其死, 岱爲之弟也, 禮元之不卽刑, 仁元爲其兄也, 而薦巖㙉也。 用禮元 山海也。 以是言之, 則巖之敗軍, 㙉之敗軍也。 禮元之僨事, 山海之僨事也。 巖雖已死, 兩人尙在, 南北之人, 孰肯用命哉? 爲先罷黜此兩人, 亟遣中使, 召還淳ㆍ澈, 授以國柄, 議建儲嗣。" 又曰: "彦信負國之惡, 克禮賣爵之奸。’ 註曰: "國家方患, 國食不足, 湖嶺運米一百碩, 賂篈、應漑而任允臣ㆍ韓伯厚, 欲於會計入啓, 爲盧植所脅, 伯厚竟不果, 植雖已死, 宜削奪官爵, 彦信亦宜責降, 克禮貪淫縱濫。" 云云。 又曰: "臣只有一弟, 死於涸轍, 是三公殺我弟也。 三公之任, 爕理陰陽, 時和歲豐, 則臣弟必不至死。 而今之三公, 苟充其任, 雖謂之殺吾弟可也。" 又曰: "尹暻善事許篈者也。 篈之倘應南、惟讓、可臣、潑、洁相爲締結, 朝廷救之, 故其子弘烈緩於捉囚。" 又曰: "篈與養中, 自少相善之友, 而同奸一妓。" 又曰: "士奇已死, 徐益又亡, 軍國重事, 無人可堪, 請以徐起ㆍ宋翼弼, 置于軍中, 參贊軍機, 又以朴麟迹爲屯田官, 可以責效。" 又曰: "拘留日本使臣, 上告天子, 爲問罪之擧, 則改宗系一事, 亦可易必矣。" 又曰: "先王朝, 卜相得人, 風俗淳美, 無有綱常之變, 只洪吉同ㆍ李連壽兩人而已, 閭里詬謾, 必以此兩人辱之, 今則相不得人, 風俗乖敗, 綱常之變, 在在皆然, 吉同ㆍ連壽之名沒矣。" 又曰: "欲議軍國之事, 請召黃琳、李增、安自裕、李俊民、金命元、洪聖民、黃廷彧、李山甫。 皆質實儒雅, 可與議事。" 又曰: "我國小人某某, 必有梁淵, 然後可除安老。 必有李鐸, 然後可除李樑, 必有朴淳, 然後可除元衡, 必有鄭澈, 然後可除金鎧, 正人君子在朝, 然後姦邪自退。" 又曰: "或者曰: ‘爾以微賤之人, 指斥朝廷, 無乃自上有厭聞之事耶? 禍必及己。’ 臣意曰: ‘不然, 淳忠烈之士也, 自先朝著稱者, 澈忠藎之士也, 自上倚重者, 渾學問之士也, 自上所聘召者。 閔純之爲持平也, 春金之獄, 白帽之疏, 自上所(采)〔採〕 用者。 試見臣疏, 則必有嘉納之理’" 云云。
선조 21년 (1588) 1월 5일
선조실록22권, 선조 21년 1월 5일 기축 1/2 기사 / 1588년 명 만력(萬曆) 16년
조헌의 상소를 소각하고 내리지 않았는데 거기에 실린 동·서 각인들의 관계와 행실
국역
비망기(備忘記)로 이르기를,
"지금 조헌의 소(疏)를 보니, 이는 인요(人妖)010) 라 하늘의 견책이 지극히 깊으니, 두렵고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이 어찌 과인(寡人)이 현상 명경(賢相名卿)을 지성으로 대우하지 않고 직무를 전적으로 위임하지 않았던 소치가 아니겠는가. 더욱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다. 이 소(疏)를 불가불 내려야 하겠지만, 또 차마 내릴 수도 없다. 이 소가 한번 내려가면 그 손상되는 바가 매우 클 것이므로 아예 내가 그 허물을 지고 이미 소각시켜 버렸으니, 사관(史官)은 나의 허물을 대서(大書)하여 후세를 경계하였으면 한다."
하였다. 처음에 조헌이 옥천군(沃川郡)에서 감사 권징(權徵)에게 투소(投疏)하자, 권징이 조헌으로 하여금 직접 정원(政院)에 올리게 하였으므로, 이번에 정원에 올리며 말하기를,
"지난 해 정원에 소를 올릴 때, 정원이 먼저 유전(柳㙉)·노식(盧植)에게 간통(簡通)011) 한 뒤에야 입계(入啓)하였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게 하였다. 이번의 소에 대해서는 간통하지 말고 바로 속히 입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그 소중(疏中)에 잘못 쓰인 곳과 격식에 위배되는 곳이 많은 줄 알고 있었으나 그의 말을 노여워하여 한 차례 훑어 보고 바로 입계시킨 뒤에 한마디 회계(回啓)012) 하려고 기초(起草)를 하다가 소각시켰다는 명이 갑자기 내려 오자 그만 두었다. 그 소의(疏意)의 대개는, 도술(道術)·국운(國運)·군식(軍食)·비변책(備邊策)을 논하고, 끝에는 일본(日本) 정벌(征伐)을 논하였는데, 일본과 단절하는 계책과 우리를 강하게 하는 계책이 들어있었다. 또 소 중에 별폭(別幅) 2도(度)가 있는데, 매조(每條) 아래 대주(大註)를 붙이고 대주 안에 또 소주(小註)를 붙여, 번번이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이이(李珥)의 학문을 증명하였다. 또 이이가 이황(李滉)과는 뜻도 같고 도(道)도 같은데, 이황의 문도(門徒) 중에 하나도 그 스승의 뜻을 아는 이가 없어 서로 헐뜯어 이이와의 사이를 둘로 갈라 놓으려 하고 있다고 하고, 노수신(盧守愼)은 겨우 글줄이나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 이황과는 서로 반대되니 이는 위학(僞學)이라고 하면서, 그의 ‘욕심은 사람의 성이다. [欲者人之性]’는 시(詩)와 ‘사람의 욕심은 천성이 아니다. [人欲非天性]’는 두 시를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또 노수신이 신(臣)의 충고를 듣지 않고 완동(頑童)들과 친하며, 을해년에 출생한 자는 장차 재상(宰相)이 될 것이다 하여 아무리 서리(胥吏)의 무리라도 반드시 더불어 계(契)를 맺었다고 하였고, 그 주(註)에, 옥천군(沃川郡)에서 호상(護喪)을 맡았던 아전을 시켜 해마다 목화(木花)를 반복 무역하여 권귀(權貴)를 부르고 재물을 주어서 그 자제와 친척 중에 벼슬을 제수받은 자가 11명이나 되며, 주사(籌司)는 군국(軍國)의 대사를 대처하는 곳인데 봄에는 객(客)들과 대좌하여 술을 마실 뿐 비변(備邊)에 대한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가을에는 신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정유길(鄭惟吉)은 이민각(李民覺)의 충고를 듣지 않고 의녀(醫女)에 고혹(蠱惑)되어 그 조부(祖父)013) 의 풍도를 크게 무너뜨렸다고 하였고, 그 주(註)에, 정유길은 기대항(奇大恒)의 벗으로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첩을 차지하였고, 김귀영(金貴榮)·유전(柳㙉)은 붕사(朋邪)의 괴수로 나라를 저버리고 외구(外寇)를 불러들였으며, 김응남(金應南)·백유양(白惟讓)·허봉(許篈)·이발(李潑)의 모사만을 듣고 조권(朝權)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그 모주(謀主)는 이산해(李山海)라고 하였고, 그 주(註)에 ‘유전(柳㙉)은 본디 원대한 계책도 없고 다만 이산해와 결탁하여 높은 반열(班列)에 올랐으므로 정철(鄭澈)이 심지어 유전의 백마(白麻)를 찢어 버리려 하였으니, 정철은 오늘의 양성(陽城)014) 이다. 이산해가 정철을 미워하여 이이를 정철의 구교(舊交)라 해서 아울러 절교하는 등 미천할 때의 벗을 영귀할 때 잊어 버렸으니, 이는 비부(鄙夫)의 태도이다.’고 하였다.
또 서인원(徐仁元)과 심대(沈岱)는 지금 동인(東人) 중의 거벽(巨擘)이다. 심암(沈巖)이 죽음을 모면한 것은 심대가 그 아우인 때문이오, 서예원(徐禮元)이 형(刑)을 바로 받지 않은 것은 서인원이 그 형인 때문이며, 심암을 추천한 자는 유전이오, 서예원을 기용(起用)한 자는 이산해이다. 이로써 말한다면 심암의 패군(敗軍)은 곧 유전의 패군이오, 서예원의 패사(敗事)는 곧 이산해의 패사이다. 심암이 비록 죽었으나 두 사람이 오히려 살아 있으니, 남북(南北) 사람들 중에 어느 누가 명령을 달게 받으려 하겠는가. 우선 이 두 사람부터 파출(罷黜)시키고 급히 중사(中使)를 보내 박순(朴淳)과 정철을 소환하여 조권(朝權)을 위임하고 세자 책봉을 의논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정언신(鄭彦信)은 나라를 저버리는 악인이오, 권극례(權克禮)는 벼슬을 판 간인(奸人)이라 하였고, 그 주(注)에, 국가에 식량이 한창 부족한데, 호령(湖嶺)015) 에서 쌀 1백 석을 수송하여 허봉과 송응개(宋應槪)에게 뇌물로 주므로, 임윤신(任允臣)과 한백후(韓伯厚)가 회계(會計)에 대해 입계(入啓)하려 하다가 노식(盧植)의 위협으로 한백후가 끝내 그만두고 말았으니, 노식이 비록 죽었으나 관작을 삭탈하고 정언신도 의당 강등시켜야 하며, 권극례는 탐음 남종(貪淫濫從)하다고 하였다. 또 자신에게 굶어 죽은 한 아우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삼공(三公)이 나의 아우를 죽인 것이다. 삼공이 음양을 잘 섭리하여 시화 연풍(時和年豊)하였다면 내 아우가 반드시 죽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심공에게 그 책임을 지운다면, 나의 아우를 직접 죽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 윤경(尹暻)은 허봉을 깍듯이 섬긴 자이다. 허봉의 일당 김응남(金應南)·백유양(白惟讓)·홍가신(洪可臣)·이발(李潑)·이길(李洁)이 서로 조정과 결탁하여 구호했기 때문에 그 아들 홍렬(弘烈)의 체포가 늦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또 허봉과 이양중(李養中)은 어려서부터 절친한 벗으로 함께 한 기생을 간음했다고 하였다. 또 양사기(楊士奇)를 이어 서익(徐益)마저 죽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서기(徐起)·송익필(宋翼弼)을 군중(軍中)에 두어 군기(軍機)를 참찬(參贊)하게 하고, 또 박인적(朴麟迹)으로 둔전관(屯田官)을 삼아 성적을 책임지워야 한다고 하였다.
또 일본의 사신을 구류시키고 이를 천자(天子)에게 고하여 문죄(問罪)를 단행한다면 종계(宗系)를 개정(改正)하는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또 선왕조(先王朝)에서는 복상(卜相)016) 에 적격자를 얻어 풍속이 순미(淳美)하므로 강상(綱常)의 변(變)이 없고 다만 홍길동(洪吉同)·이연수(李連壽) 두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항간에서 욕을 할 때는 으레 이 두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았는데, 지금에는 복상에 적격자를 얻지 못하여 풍속이 괴패(乖敗)하고 강상의 변이 곳곳마다 일어나므로 홍길동·이연수의 이름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또 군국(軍國)의 일을 의논하려면 황임(黃琳)·이증(李增)·안자유(安自裕)·이준민(李俊民)·김명원(金命元)·홍성민(洪聖民)·황정욱(黃廷彧)·이산보(李山甫) 등을 불러들여야 한다. 이들은 다 질실(質實)하고 유아(儒雅)하여 함께 일을 의논할 만하다고 하였다. 또 우리 나라의 소인(小人)은 모모(某某)이다. 반드시 양연(粱淵)이 있어야 김안로를 제거할 수 있고, 이탁(李鐸)이 있어야 이양(李樑)을 제거할 수 있고, 박순(朴淳)이 있어야 윤원형을 제거할 수 있고, 정철이 있어야 김개(金鎧)를 제거할 수 있으니 정인 군자가 조정에 있어야 간사한 자가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이가 ‘네가 미천한 사람으로 조정(朝廷)을 그처럼 지척(指斥)하고 있으니, 혹 상으로부터 듣기 싫어하는 일이 없겠는가. 화(禍)가 반드시 자신에게 미칠 것이다.’ 하기에, 신은 ‘그렇지 않다. 박순(朴淳)은 충렬(忠烈)한 선비로 선왕조(先王朝)로부터 알려진 사람이오, 정철은 충신(忠藎)의 선비로 상으로부터 의중(倚重)을 받는 사람이오, 성혼(成渾)은 학문의 선비로 상으로부터 초빙을 받은 사람이며, 민순(閔純)이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춘금(春金)의 옥사(獄事)와 백모(白帽)의 상소017) 에 대해서는 상으로부터 채용된 바가 있다. 신의 소(疏)를 보면 반드시 가납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 [註 010] 인요(人妖) : 정상에서 어긋난 짓을 하는 사람.
- [註 011] 간통(簡通) : 대각(臺閣)의 벼슬아치가 서면으로 의견을 통합하는 일.
- [註 012] 회계(回啓) : 임금의 물음에 대해 심의하여 상주(上奏)함.
- [註 013] 조부(祖父) : 정광필(鄭光弼)을 말함.
- [註 014] 백마(白麻)를 찢어 버리려 하였으니, 정철은 오늘의 양성(陽城) : 백마는 황제의 조서(詔書). 재상으로 임용한다는 사령서를 말함, 당 덕종(唐德宗) 때 간의 대부(諫議大夫)로 있던 양성이 간신 배연령(裵延齡)을 재상에 등용한다는 소식을 듣고 ‘만약에 배연령을 재상에 등용하면 그 황마를 찢어버리겠다."고 적극 저지하여 뜻을 관철시켰음. 《당서(唐書)》 권194.
- [註 015] 호령(湖嶺) : 충청도와 경상도의 별칭.
- [註 016] 복상(卜相) : 정승을 새로 가려 뽑음.
- [註 017] 백모(白帽)의 상소 : 선조 8년(1575)에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상(喪)을 만나 예관(禮官)들이 《오례의(五禮儀)》에 따라 오모 흑대(烏帽黑帶)로서 상복을 결정지으려 하자, 민순(閔純)이 송 효종(宋孝宗)의 백모 삼년제(白帽三年制)를 따르자고 건의한 상소를 말함.
원문
○己丑/備忘記曰:
今見趙憲之疏, 此乃人妖, 天之譴告至深, 不勝兢惕, 豈非寡昧於賢相名卿, 不能待以至誠, 委任不專, 有以致此耶? 尤不勝慙恧。 疏不可不下, 而此疏不忍下, 一下, 所損甚大。 予寧受過, 已焚之矣, 願史官大書予過, 以戒後世足矣。
初憲自沃川郡, 投疏于監司權徵, 徵令憲自呈政院, 至是呈于院曰:
頃年上疏, 政院先爲簡通于柳㙉ㆍ盧植, 然後始爲入啓。 使憲久立門外。 今此上疏, 毋爲簡通, 宜速入之。
政院知其疏中, 多有錯書處, 有違格處, 而怒其言, 一番看過, 遂入之。 方欲爲一言回啓起草, 焚命遽下, 遂止。 疏旨大槪, 論道術, 論國步, 論軍食, 論邊策。 末終論征日本, 有絶彼之策, 有强我之策, 疏中又有別幅二度, 每條下有大註, 註中又有小註, 動引朱子之言, 以證李珥之學。 又與李滉志同道同, 而滉之門徒, 無一人識其師意, 好加詆毁, 遂欲岐珥而二之, 彼盧守愼粗知讀書, 而與滉相反, 僞學也, 引其欲者人之性, 人欲非天性, 二詩而證之。 又曰: "守愼不聽臣憲之諫, 昵比頑童, 生年乙亥者, 身居相位, 雖胥吏必與作契。" 註曰: "沃郡護喪之吏, 使之年年反貿木花, 招權納財, 子弟親戚除官者十一人, 籌邊, 待价國之大事, 而春則與客對飮, 不赴備邊之召, 秋則托病不來。" 云云。 惟吉不聽民覺之諫, 蠱心醫女, 大毁祖風, 註曰: "惟吉 大恒之友, 而大恒旣死, 取其妾, 貴榮、㙉朋邪之魁, 負國召寇, 一聽應南、惟讓、篈、潑之謀, 專擅朝柄, 而爲其謀主者山海也。" 註曰: "㙉素無遠計, 惟結山海, 得躋崇班, 鄭澈至欲裂㙉麻, 澈今日之陽城也。 山海惡之, 竝與珥、澈之舊交而絶之, 賤交貴忌, 鄙夫之態也。 仁元、岱, 今日東人之巨擘也。 沈巖之緩其死, 岱爲之弟也, 禮元之不卽刑, 仁元爲其兄也, 而薦巖㙉也。 用禮元 山海也。 以是言之, 則巖之敗軍, 㙉之敗軍也。 禮元之僨事, 山海之僨事也。 巖雖已死, 兩人尙在, 南北之人, 孰肯用命哉? 爲先罷黜此兩人, 亟遣中使, 召還淳ㆍ澈, 授以國柄, 議建儲嗣。" 又曰: "彦信負國之惡, 克禮賣爵之奸。’ 註曰: "國家方患, 國食不足, 湖嶺運米一百碩, 賂篈、應漑而任允臣ㆍ韓伯厚, 欲於會計入啓, 爲盧植所脅, 伯厚竟不果, 植雖已死, 宜削奪官爵, 彦信亦宜責降, 克禮貪淫縱濫。" 云云。 又曰: "臣只有一弟, 死於涸轍, 是三公殺我弟也。 三公之任, 爕理陰陽, 時和歲豐, 則臣弟必不至死。 而今之三公, 苟充其任, 雖謂之殺吾弟可也。" 又曰: "尹暻善事許篈者也。 篈之倘應南、惟讓、可臣、潑、洁相爲締結, 朝廷救之, 故其子弘烈緩於捉囚。" 又曰: "篈與養中, 自少相善之友, 而同奸一妓。" 又曰: "士奇已死, 徐益又亡, 軍國重事, 無人可堪, 請以徐起ㆍ宋翼弼, 置于軍中, 參贊軍機, 又以朴麟迹爲屯田官, 可以責效。" 又曰: "拘留日本使臣, 上告天子, 爲問罪之擧, 則改宗系一事, 亦可易必矣。" 又曰: "先王朝, 卜相得人, 風俗淳美, 無有綱常之變, 只洪吉同ㆍ李連壽兩人而已, 閭里詬謾, 必以此兩人辱之, 今則相不得人, 風俗乖敗, 綱常之變, 在在皆然, 吉同ㆍ連壽之名沒矣。" 又曰: "欲議軍國之事, 請召黃琳、李增、安自裕、李俊民、金命元、洪聖民、黃廷彧、李山甫。 皆質實儒雅, 可與議事。" 又曰: "我國小人某某, 必有梁淵, 然後可除安老。 必有李鐸, 然後可除李樑, 必有朴淳, 然後可除元衡, 必有鄭澈, 然後可除金鎧, 正人君子在朝, 然後姦邪自退。" 又曰: "或者曰: ‘爾以微賤之人, 指斥朝廷, 無乃自上有厭聞之事耶? 禍必及己。’ 臣意曰: ‘不然, 淳忠烈之士也, 自先朝著稱者, 澈忠藎之士也, 自上倚重者, 渾學問之士也, 自上所聘召者。 閔純之爲持平也, 春金之獄, 白帽之疏, 自上所(采)〔採〕 用者。 試見臣疏, 則必有嘉納之理’" 云云。
원본
선조 21년 (1588) 1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