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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7권, 선조 6년 11월 26일 임인 1/4 기사 / 1573년 명 만력(萬曆) 1년

조강에 《서경》을 강하고 군신의 의리, 이황의 시호, 동방의 도통, 군액 등을 논하다

국역

조강이 있었다. 영사(領事) 노수신(盧守愼), 지사(知事) 정종영(鄭宗榮), 특진관(特進官) 성세장(成世章)·허세린(許世麟)과 양사(兩司)의 노진(盧禛)·김성일(金誠一), 승지(承旨) 이이(李珥), 진강관(進講官) 유희춘(柳希春)·조정기(趙廷機), 사관(史官) 심희수(沈喜壽)·홍인헌(洪仁憲)·허봉(許篈)이 입시하였다. ‘이윤(伊尹)이 몸소 먼저 보니’에서부터 사씨(史氏)가 말한 충신(忠信)하여 끝맺음이 있다는 설(說)175) 까지 진강(進講)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예전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충신으로 서로 허여하여 정지(情志)가 서로 미더웠기 때문에 유종의 미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고, 노수신이 아뢰기를,

"이이가 말한 것은 별개의 한 뜻입니다. 경(經)에서 말한 충신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김우옹이 아뢰기를,

"충신이라는 것은 성(誠)입니다. 간직한 것이 하나의 성실한 마음일 뿐이므로 일마다 유종의 미가 있었던 것인데, 그 요체는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은176) 데에서 비롯됩니다. 이이가 말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허여하는 충신도 또한 이 가운데에서 나온 것으로, 두 가지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태갑(太甲)이윤을 믿고 욕심대로 하였으므로 이윤이 이것을 말하였는데 도리로 말하여도 그러한 것으로 천하의 일이 다 임금의 몸에 근본합니다. 임금은 부도(父道)요 천도(天道)이며 신하는 자도(子道)요 지도(地道)입니다. 지도는 홀로 완성할 수 없고 하늘을 대신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므로 땅에는 홀로 자라는 물건이 없고 신하는 홀로 이루는 공이 없기 때문에 임금을 바루지 못하고 일을 성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이 이윤태갑을 서둘러서 바룬 까닭입니다."

이이가 아뢰기를,

"태갑이윤을 믿고 욕심대로 한 것은 본디 좋지 않지만 이윤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사람을 알아보는 총명이 있는 것이니, 이 총명 때문에 마침내 허물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하고, 김우옹이 아뢰기를,

"태갑이윤을 알아본 것이 총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돌이키지 못하고 욕심대로 하였다면 망하지 않는다고 기필할 수 없었을 것이니, 그때는 이윤이 있었더라도 구제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또 임금이 욕심대로 하는데도 어진 신하가 보존될 리가 없으니, 이윤인들 어찌 무사하기를 보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를테면, 후한(後漢)의 유선(劉禪)공명(孔明)에게 위임하였으므로 나라가 다스려지고 군사가 강하여 중원(中原)에 대항하였으나 망령되이 스스로 못난 체하면서 잘 닦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소인 황호(黃皓)·진지(陳祗)를 가까이 하여 나라를 망쳤으니, 여기에서 임금은 스스로 닦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닦이지 않으면 어진 신하에게 맡기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어진 신하가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그러나 후주(後主)도 능히 공명에게 맡기고 믿어서 그의 말을 써서 궁(宮)·부(府)가 일체(一體)가 되는 법을 공명이 살아 있는 동안 대강 시행하였으므로 공명이 그 뜻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명이 살아 있었더라도 어찌 그 위망(危亡)을 구제할 수 있었겠으며 공명의 몸 또한 어찌 그 나라에 설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노진(盧禛)·김성일(金誠一)이 나아가 행장(行狀)을 기다리지 말고 이황(李滉)에게 시호(諡號)를 내리기를 계청하였고, 노수신(盧守愼)과 특진관(特進官)·참찬관(參贊官) 이하는 다 행장을 가져다 본 뒤에 시호를 내리기를 바랐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명현(名賢)의 행장은 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유(先儒) 주자(朱子)의 행장은 수십년토록 오래 기다렸고, 이천(伊川)177) 은 문인(門人)·고제(高弟)가 다 먼저 죽었으므로 끝내 감히 지은 자가 없었으니, 그 어렵기가 이와 같습니다. 대현(大賢)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상규(常規)에 얽매여서는 안 되니, 어찌 행장이 없다 하여 정(程) 주(朱)의 시호를 내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우옹이 또 아뢰기를,

"이황박순(朴淳)이 지은 묘지(墓誌)와 그 문인의 서술(敍述) 등이 있으니, 가져다 보고 의거하여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이이 등은 다 옳다 하였다. 김성일은 옳지 않다 하면서 아뢰기를,

"대현을 대우하는 데는 상규에 얽매여서는 안 되는데, 반드시 행장을 본 뒤에야 한다면 이는 그 사람을 이것을 본 뒤에야 알 수 있다는 것과 같으니, 또한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김우옹이 아뢰기를,

"이는 참으로 그렇습니다. 다만 위의 뜻이 반드시 고사(故事)에 방애가 되지 않기를 바라시므로 신들이 이 말을 한 것인데, 또한 마지못해 한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빨리 시호를 내리고 싶지만 전에 없던 예(例)를 시작하여 뒤폐단을 열 수는 없다."

하였다. 김성일이 인하여 이황의 바른 학문과 높은 조예를 말하고, 김우옹도 그 학문은 우리 동방에 한 사람뿐이라고 말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동방은 정몽주(鄭夢周)가 창학(倡學)한 뒤부터 아조(我朝)에 들어와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 같은 이가 도학(道學)을 한 사람인데 또한 공부하는 데 대한 상세한 방법을 몰랐고, 그 밖에는 학문한다는 사람이 있었어도 거의 다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황 같은 사람은 그 언론(言論)과 풍지(風旨)를 들으면 옛사람의 학문을 참으로 안 사람으로서 진실로 이와 비견될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자품(資稟)과 정신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듯한데, 전하께서는 아마도 이 때문에 부족하게 여기시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학문의 공이 지극함에 따라 기질이 변화되어 옛사람의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시종 한결같이 공부를 쌓아서 조예가 날로 깊었으니, 부족하게 여길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김성일이 아뢰기를,

"이 사람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아서 볼 만한 것이 있는데, 어찌 언론·풍지의 한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이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김우옹이 아뢰기를,

"행장을 기다려서 시호를 의논하게 한 것은 국가가 법을 세움에 있어 대강(大綱)만을 두어 통용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 이황은 보통 사람이 따르지 못할 덕업(德業)이 있으니, 시호를 내리는 일도 상규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일마다 고사만을 고수하고 변통하는 것이 없으면, 치도(治道)에 매우 방해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말이 군액(軍額)이 부족한 폐단에 미치자, 노수신이 아뢰기를,

"모든 사람이 일의 폐단만을 말할 뿐 폐단을 바로잡을 계책은 말하지 않으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고, 김우옹이 아뢰기를,

"오늘날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은 다만 헛된 액수가 많기를 힘쓰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실제의 군액을 채우기를 힘써서 군정(軍丁)이 다 충실하게 되면, 백성의 힘이 펴지고 유망(流亡)했던 사람도 점점 돌아올 것이니, 액수를 줄인다 하더라도 뒤에는 반드시 늘어날 것입니다. 헛된 액수를 채우기만을 힘쓰고 충실하지 않게 한다면, 이들이 유망하여 그 해가 일족과 이웃에게 미쳐 백성이 모두 있을 곳을 잃는 유민이 될 것이니, 그렇다면 액수를 늘인다는 것이 곧 줄이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이것은 계축년178) 이래 수십 년 동안 백성의 큰 걱정거리가 된 것이니, 이제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이이가 아뢰기를,

"액수를 줄여서 백성의 힘을 펴게 하면 백성의 생업이 안정되어 점점 살아날 길이 있을 것이니, 백성이 점점 생업을 회복한 뒤에 점차로 옛 액수를 회복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 때 군적사(軍籍使)들이 풍지(風旨)만 잘 받들기 위해 급박하게 액수 채우기 만을 힘써 허장(虛張)한 것이 많아서 고을들이 소란하였으므로 언급한 것이다. 이이 등이 이를 인하여 국가가 사천(私賤)에 대해서만 입법이 치우쳐서 이미 모역(母役)을 따르게 하였는데 또 부역(父役)을 따르게 하기 때문에 그 폐단이 양민(良民)에 미쳐 모두 사가(私家)에 들어가게 되어 군정이 날로 줄어간다는 것을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법은 참으로 온편하지 못하다. 대저 법전은 변동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런 법은 변통해야 할 듯하다."

하였다. 뭇 신하들이 인하여 변통하는 것이 온편하다는 데에 찬성을 하니, 곧바로 수의(收議)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또 부역을 따라야 하는가, 모역을 따라야 하는가를 하문하니, 사람들이 모두 모역을 따르게 하는 것이 온편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김우옹이 아뢰기를,

"부역을 따르게 하는 것이 의리에 당연한 것인데, 어찌 모역을 따르게 함으로써 사람의 도리를 어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오활하다고 하였다. 관원들의 피혐(避嫌)·휴고(休告)가 많다는 데에 말이 미치자 김성일이 아뢰기를,

"지금 위로 삼공(三公)·육경(六卿)부터 모두들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의정부의 좌기(坐起)에도 중대한 일에 관계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예식만을 갖출 뿐이라 합니다. 대신이 이러하니 관원들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내가 임금으로서 임금답지 못하니, 신하가 이러한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노수신이 인하여 병을 빌어 해면(解免)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근일 재이(災異)가 비상하니, 재이에 따라 신처럼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자를 파면하고 근일 어진 사람을 찾아서 갈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오늘날의 신하들 중에 경보다 나은 자가 없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재이 때문에 삼공을 파면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닙니다. 임금은 재이를 만나면 자신을 죄책하면서 두려워하는 자세로 행실을 닦아야 하는 것인데, 어찌 죄를 대신에게 미룰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우옹은 아뢰기를,

"대신은 반드시 심신을 다 바쳐 힘쓰되 죽어야 그만둔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요, 자신만을 돌보아 머뭇거리면서 일을 피하여서는 안 됩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충신(忠信)으로 성취할 도리를 자임(自任)하시고 대신은 정승으로서 또한 성취하기를 스스로 기약하여 임금과 신하가 힘을 다하여 함께 어려움을 구제해야 합니다. 따라서 한가히 지내는 것만을 생각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계사(啓事)가 끝나고서 김우옹이 나아가 아뢰기를,

"호당(湖堂)179) 에 말미를 주는 것은 문장을 배양하여 뒷날 문형(文衡)의 소용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니 문학하는 선비를 뽑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신은 젊어서 부터 어리석어서 글짓기를 익히지 못한 탓으로 외람되이 급제는 하였으나 글짓기는 방법을 모릅니다. 시문(詩文) 따위로 말하면 전혀 글귀를 짓지 못하는데, 이러한 사람이 어찌 이 선발에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근일의 사면(辭免)을 보건대 허락받은 자가 전혀 없어서 겉치레가 될 뿐이니, 이것은 매우 온편치 못합니다. 대저 사면은 본디 모두 따를 수 없으나 그 사리를 보아 따를 만한 실상이 있으면 따라야만이 염치를 배양하여 사대부(士大夫)가 사양하고 받는 의리를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신이 소장(疏章)을 갖추어 아뢰려고 하였으나 진엄(震嚴)을 번거롭게 하고 겉치레가 되기만 할까 염려되어 우선 감히 내지 않고 입으로 실정을 아뢰어 굽어살피시기를 바라니, 윤허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합당하므로 초계(抄啓)하였을 것이니, 사퇴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註 175] 사씨(史氏)가 말한 충신(忠信)하여 끝맺음이 있다는 설(說) : 채침(蔡沈)의 소(疏)에 "시시(施氏)가 ‘하나라의 선왕(先王)은 충신(忠信)하여 끝맺음이 있었다.’ 하였다." 했으니, 실록 원문에 사씨(史氏)라 한 것은 시씨(施氏)의 오기인 듯하다.
  • [註 176]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은 : 은미한 곳에서도 삼가서 귀신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뜻. 옥루는 실(室)의 서북 구석인데, 귀신을 모셔 제사하는 곳으로 집안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곳이다. 전용하여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이라는 뜻으로 쓴다.
  • [註 177] 이천(伊川) : 정이(程頤)의 호.
  • [註 178] 계축년 : 1553 명종 8년.
  • [註 179] 호당(湖堂) :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원문

○壬寅/朝講。 領事盧守愼、知事鄭宗榮、特進官成世重ㆍ許世麟、兩司盧禛金誠一、承旨李珥、進講官柳希春趙廷機、史官沈喜壽洪仁憲許篈入侍進講。 自伊尹躬先見, 止史氏之言, 忠信有終之說。 李珥啓曰: "古者君臣之間, 以忠信相與, 情志交孚, 故能有終。" 守愼曰: "言別是一義。 經言忠信之義, 却不然。" 宇顒曰: "忠信者誠也, 所存只是一箇誠實之心, 故事事有終, 其要自不愧屋漏始。 若言君臣相與之忠信, 亦自此中流出, 無二道也。" 宇顒曰: "太甲伊尹而縱欲, 故伊尹言此。 然以理言之, 亦然。 天下之事, 皆本於君身, 君者父道也, 天道也。 臣者子道也, 地道也。 地道無成, 而代有終也。 地無獨生之物, 臣無獨成之功, 故未有不能正君, 而能成事者也。 伊尹所以汲汲於正太甲之身也。" 曰: "太甲縱欲, 固不好。 然能知伊尹之可恃, 亦有知人之明。 由其明, 故終能改過爾。" 宇顒曰: "太甲伊尹, 雖是明處, 然不能自反而縱欲, 未必不亡。 雖有伊尹, 亦不能救也。 且未有君縱欲, 而賢臣能存之理, 伊尹亦安能保其無恙乎? 如後漢 劉禪委任孔明, 故國治兵强, 抗衡中原, 而妄自菲薄, 不能自修, 故卒以昵近小人黃晧陳祗, 以亡其國。 以此知人君, 莫急於自修, 身若不修, 雖任賢臣, 亦末如之何, 況無賢臣乎? 雖然, 後主亦能委信孔明, 所用其言, 粗行宮府一體之法, 以終孔明之世, 故孔明能行其志。 如其不然, 孔明雖存, 亦豈能救其危亡, 而孔明之身, 亦安能立於其國乎?" 誠一進啓請李滉賜諡不待行狀。 守愼及特進、參贊以下, 皆欲宣取行狀, 然後賜諡。 宇顒等啓曰: "名賢行狀, 不可容易。 先儒朱子行狀, 至待數十年之久。 伊川則門人高(第)〔弟〕 , 皆己先沒, 故終無敢下筆者, 其難也如此。 待大賢, 不可拘於常規, 豈可以無行狀, 而不賜伊川 之諡乎?" 宇顒又曰: "朴淳所製墓誌及其門人敍述等, 取來觀之, 以爲依據, 亦恐無妨。" 李珥等皆以爲可。 誠一不可曰: "待大賢, 不可拘常規。 若必待是, 而後爲之, 是猶以其人爲必待是, 而後可知也。 不亦小乎?" 宇顒曰: "此固然矣。 但上意必欲不礙於故事, 故臣等爲此說, 亦不得已之論。" 上曰: "雖欲速爲賜諡, 不可創爲無前之例, 以開後弊也。" 誠一因言學問之正、造詣之高。 宇顒亦言其學, 吾東方一人而已。 曰: "東方, 自鄭夢周倡學之後, 入我朝, 如金宏弼趙光祖, 道學之人也。 亦未知其用工之詳, 其它雖有所謂學問者, 而率皆不成模樣。 若者, 聽其言論風旨, 眞知古人之學者, 誠未有其比也。 但其人資稟精神, 似不逮於古人。 殿下想必以此少之, 然其學問之工至, 而變化其氣質, 潛心古人之學, 終始如一, 積累工夫, 所造日深, 恐不可少也。" 誠一曰: "此人之學, 如靑天白日, 有目可覩, 豈可以言論風旨之一二言乎? 言非是。" 宇顒曰: "待行狀而議諡者, 國家立法, 只設大綱, 使之通行而已。 今有非常人所及之德業, 賜諡之事, 亦不可拘於常規。 若每事只守故事, 無所變通, 則甚妨治道也。" 言及軍額不足之弊。 守愼曰: "諸人每陳事弊, 不言救弊之策, 何益?" 宇顒曰: "今日救弊。 只在不務虛額之多, 只務從實充軍。 軍丁皆實, 則民力紓, 而流亡漸還。 今雖減額, 而後必增, 只務虛額而不實, 則此等流移, 害及族隣, 而遺民盡至失所。 然則增額, 乃所以減之也。 此癸丑以來數十年來, 爲民巨患者也。 今不可以不戒。" 曰: "減額紓民, 則民有安業滋息之理, 民漸復業, 然後漸復舊額可也。" 是時籍軍, 使之徒承望風旨, 務以刻急爲辦事, 多所虛張, 州縣騷然, 故及之。 等因言: "國家於私賤, 立法獨偏, 旣從母, 又從父, 其弊至於良民盡入私家, 而軍丁日少。" 上曰: "此法誠未便。 大抵, 法典不可變, 然若此法, 似當變通。" 群臣因贊其變通之便。 乃 命收議。 上又問: "從父乎? 從母乎?" 諸人皆曰: "從母便。 宇顒曰: "從父是義理所當然。 豈可從母, 違背人理乎?" 諸人皆以爲迂闊。 因言及諸官避嫌休告之煩。 誠一曰: "今上自三公六卿, 皆失其職。 聞議政府坐起, 無一關重事, 只備禮而已。 大臣如此, 庶官之不職, 亦宜也。" 上曰: "然, 予是辟不辟, 亦宜臣下之如此也。" 守愼因謝病乞免, 且曰: "近日災異非常, 乞因災異, 策免如臣不職者, 更求賢人代之。" 上曰卿何出此言? 今日群臣無出卿右者。" 曰: "以災異策免三公, 非合理之事。 人君遇災, 當罪己責躬, 側身修行, 豈可委罪大臣乎?" 宇顒曰: "大臣須有鞠躬盡力, 死而後已之心, 不可只顧一身, 逡巡避事也。 臣願殿下, 以忠信有終之道自任, 而大臣以相, 亦惟終之事自期, 君臣戮力, 共濟艱難, 不可只恁悠悠也。" 啓事畢, 宇顒進 啓曰: "賜暇湖堂, 所以培養文章, 爲他日文衡之用, 所宜抄選文學之士。 臣少而踈昧, 不習爲文, 雖濫叨科目, 而不知作文門戶。 至如詩文之類, 全不能下句, 如此之人, 豈可冒居此選乎? 伏見近日辭免, 絶無得請者, 只成文具, 此甚非便。 夫辭免固不盡從, 只觀其事理, 有可從之實, 則從之, 乃可以培養廉恥, 全士大夫辭受之義也。 今臣欲具疏陳達, 而恐瀆震嚴, 只成文具, 故姑不敢發, 而口陳情實, 伏蘄照臨, 庶賜允可。" 上曰: "必可合, 故抄啓也。 可勿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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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7권, 선조 6년 11월 26일 임인 1/4 기사 / 1573년 명 만력(萬曆) 1년

조강에 《서경》을 강하고 군신의 의리, 이황의 시호, 동방의 도통, 군액 등을 논하다

국역

조강이 있었다. 영사(領事) 노수신(盧守愼), 지사(知事) 정종영(鄭宗榮), 특진관(特進官) 성세장(成世章)·허세린(許世麟)과 양사(兩司)의 노진(盧禛)·김성일(金誠一), 승지(承旨) 이이(李珥), 진강관(進講官) 유희춘(柳希春)·조정기(趙廷機), 사관(史官) 심희수(沈喜壽)·홍인헌(洪仁憲)·허봉(許篈)이 입시하였다. ‘이윤(伊尹)이 몸소 먼저 보니’에서부터 사씨(史氏)가 말한 충신(忠信)하여 끝맺음이 있다는 설(說)175) 까지 진강(進講)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예전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충신으로 서로 허여하여 정지(情志)가 서로 미더웠기 때문에 유종의 미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고, 노수신이 아뢰기를,

"이이가 말한 것은 별개의 한 뜻입니다. 경(經)에서 말한 충신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김우옹이 아뢰기를,

"충신이라는 것은 성(誠)입니다. 간직한 것이 하나의 성실한 마음일 뿐이므로 일마다 유종의 미가 있었던 것인데, 그 요체는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은176) 데에서 비롯됩니다. 이이가 말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허여하는 충신도 또한 이 가운데에서 나온 것으로, 두 가지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태갑(太甲)이윤을 믿고 욕심대로 하였으므로 이윤이 이것을 말하였는데 도리로 말하여도 그러한 것으로 천하의 일이 다 임금의 몸에 근본합니다. 임금은 부도(父道)요 천도(天道)이며 신하는 자도(子道)요 지도(地道)입니다. 지도는 홀로 완성할 수 없고 하늘을 대신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므로 땅에는 홀로 자라는 물건이 없고 신하는 홀로 이루는 공이 없기 때문에 임금을 바루지 못하고 일을 성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이 이윤태갑을 서둘러서 바룬 까닭입니다."

이이가 아뢰기를,

"태갑이윤을 믿고 욕심대로 한 것은 본디 좋지 않지만 이윤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사람을 알아보는 총명이 있는 것이니, 이 총명 때문에 마침내 허물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하고, 김우옹이 아뢰기를,

"태갑이윤을 알아본 것이 총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돌이키지 못하고 욕심대로 하였다면 망하지 않는다고 기필할 수 없었을 것이니, 그때는 이윤이 있었더라도 구제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또 임금이 욕심대로 하는데도 어진 신하가 보존될 리가 없으니, 이윤인들 어찌 무사하기를 보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를테면, 후한(後漢)의 유선(劉禪)공명(孔明)에게 위임하였으므로 나라가 다스려지고 군사가 강하여 중원(中原)에 대항하였으나 망령되이 스스로 못난 체하면서 잘 닦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소인 황호(黃皓)·진지(陳祗)를 가까이 하여 나라를 망쳤으니, 여기에서 임금은 스스로 닦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닦이지 않으면 어진 신하에게 맡기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어진 신하가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그러나 후주(後主)도 능히 공명에게 맡기고 믿어서 그의 말을 써서 궁(宮)·부(府)가 일체(一體)가 되는 법을 공명이 살아 있는 동안 대강 시행하였으므로 공명이 그 뜻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명이 살아 있었더라도 어찌 그 위망(危亡)을 구제할 수 있었겠으며 공명의 몸 또한 어찌 그 나라에 설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노진(盧禛)·김성일(金誠一)이 나아가 행장(行狀)을 기다리지 말고 이황(李滉)에게 시호(諡號)를 내리기를 계청하였고, 노수신(盧守愼)과 특진관(特進官)·참찬관(參贊官) 이하는 다 행장을 가져다 본 뒤에 시호를 내리기를 바랐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명현(名賢)의 행장은 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유(先儒) 주자(朱子)의 행장은 수십년토록 오래 기다렸고, 이천(伊川)177) 은 문인(門人)·고제(高弟)가 다 먼저 죽었으므로 끝내 감히 지은 자가 없었으니, 그 어렵기가 이와 같습니다. 대현(大賢)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상규(常規)에 얽매여서는 안 되니, 어찌 행장이 없다 하여 정(程) 주(朱)의 시호를 내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우옹이 또 아뢰기를,

"이황박순(朴淳)이 지은 묘지(墓誌)와 그 문인의 서술(敍述) 등이 있으니, 가져다 보고 의거하여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이이 등은 다 옳다 하였다. 김성일은 옳지 않다 하면서 아뢰기를,

"대현을 대우하는 데는 상규에 얽매여서는 안 되는데, 반드시 행장을 본 뒤에야 한다면 이는 그 사람을 이것을 본 뒤에야 알 수 있다는 것과 같으니, 또한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김우옹이 아뢰기를,

"이는 참으로 그렇습니다. 다만 위의 뜻이 반드시 고사(故事)에 방애가 되지 않기를 바라시므로 신들이 이 말을 한 것인데, 또한 마지못해 한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빨리 시호를 내리고 싶지만 전에 없던 예(例)를 시작하여 뒤폐단을 열 수는 없다."

하였다. 김성일이 인하여 이황의 바른 학문과 높은 조예를 말하고, 김우옹도 그 학문은 우리 동방에 한 사람뿐이라고 말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동방은 정몽주(鄭夢周)가 창학(倡學)한 뒤부터 아조(我朝)에 들어와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 같은 이가 도학(道學)을 한 사람인데 또한 공부하는 데 대한 상세한 방법을 몰랐고, 그 밖에는 학문한다는 사람이 있었어도 거의 다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황 같은 사람은 그 언론(言論)과 풍지(風旨)를 들으면 옛사람의 학문을 참으로 안 사람으로서 진실로 이와 비견될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자품(資稟)과 정신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듯한데, 전하께서는 아마도 이 때문에 부족하게 여기시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학문의 공이 지극함에 따라 기질이 변화되어 옛사람의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시종 한결같이 공부를 쌓아서 조예가 날로 깊었으니, 부족하게 여길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김성일이 아뢰기를,

"이 사람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아서 볼 만한 것이 있는데, 어찌 언론·풍지의 한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이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김우옹이 아뢰기를,

"행장을 기다려서 시호를 의논하게 한 것은 국가가 법을 세움에 있어 대강(大綱)만을 두어 통용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 이황은 보통 사람이 따르지 못할 덕업(德業)이 있으니, 시호를 내리는 일도 상규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일마다 고사만을 고수하고 변통하는 것이 없으면, 치도(治道)에 매우 방해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말이 군액(軍額)이 부족한 폐단에 미치자, 노수신이 아뢰기를,

"모든 사람이 일의 폐단만을 말할 뿐 폐단을 바로잡을 계책은 말하지 않으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고, 김우옹이 아뢰기를,

"오늘날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은 다만 헛된 액수가 많기를 힘쓰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실제의 군액을 채우기를 힘써서 군정(軍丁)이 다 충실하게 되면, 백성의 힘이 펴지고 유망(流亡)했던 사람도 점점 돌아올 것이니, 액수를 줄인다 하더라도 뒤에는 반드시 늘어날 것입니다. 헛된 액수를 채우기만을 힘쓰고 충실하지 않게 한다면, 이들이 유망하여 그 해가 일족과 이웃에게 미쳐 백성이 모두 있을 곳을 잃는 유민이 될 것이니, 그렇다면 액수를 늘인다는 것이 곧 줄이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이것은 계축년178) 이래 수십 년 동안 백성의 큰 걱정거리가 된 것이니, 이제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이이가 아뢰기를,

"액수를 줄여서 백성의 힘을 펴게 하면 백성의 생업이 안정되어 점점 살아날 길이 있을 것이니, 백성이 점점 생업을 회복한 뒤에 점차로 옛 액수를 회복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 때 군적사(軍籍使)들이 풍지(風旨)만 잘 받들기 위해 급박하게 액수 채우기 만을 힘써 허장(虛張)한 것이 많아서 고을들이 소란하였으므로 언급한 것이다. 이이 등이 이를 인하여 국가가 사천(私賤)에 대해서만 입법이 치우쳐서 이미 모역(母役)을 따르게 하였는데 또 부역(父役)을 따르게 하기 때문에 그 폐단이 양민(良民)에 미쳐 모두 사가(私家)에 들어가게 되어 군정이 날로 줄어간다는 것을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법은 참으로 온편하지 못하다. 대저 법전은 변동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런 법은 변통해야 할 듯하다."

하였다. 뭇 신하들이 인하여 변통하는 것이 온편하다는 데에 찬성을 하니, 곧바로 수의(收議)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또 부역을 따라야 하는가, 모역을 따라야 하는가를 하문하니, 사람들이 모두 모역을 따르게 하는 것이 온편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김우옹이 아뢰기를,

"부역을 따르게 하는 것이 의리에 당연한 것인데, 어찌 모역을 따르게 함으로써 사람의 도리를 어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오활하다고 하였다. 관원들의 피혐(避嫌)·휴고(休告)가 많다는 데에 말이 미치자 김성일이 아뢰기를,

"지금 위로 삼공(三公)·육경(六卿)부터 모두들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의정부의 좌기(坐起)에도 중대한 일에 관계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예식만을 갖출 뿐이라 합니다. 대신이 이러하니 관원들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내가 임금으로서 임금답지 못하니, 신하가 이러한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노수신이 인하여 병을 빌어 해면(解免)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근일 재이(災異)가 비상하니, 재이에 따라 신처럼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자를 파면하고 근일 어진 사람을 찾아서 갈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오늘날의 신하들 중에 경보다 나은 자가 없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재이 때문에 삼공을 파면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닙니다. 임금은 재이를 만나면 자신을 죄책하면서 두려워하는 자세로 행실을 닦아야 하는 것인데, 어찌 죄를 대신에게 미룰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우옹은 아뢰기를,

"대신은 반드시 심신을 다 바쳐 힘쓰되 죽어야 그만둔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요, 자신만을 돌보아 머뭇거리면서 일을 피하여서는 안 됩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충신(忠信)으로 성취할 도리를 자임(自任)하시고 대신은 정승으로서 또한 성취하기를 스스로 기약하여 임금과 신하가 힘을 다하여 함께 어려움을 구제해야 합니다. 따라서 한가히 지내는 것만을 생각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계사(啓事)가 끝나고서 김우옹이 나아가 아뢰기를,

"호당(湖堂)179) 에 말미를 주는 것은 문장을 배양하여 뒷날 문형(文衡)의 소용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니 문학하는 선비를 뽑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신은 젊어서 부터 어리석어서 글짓기를 익히지 못한 탓으로 외람되이 급제는 하였으나 글짓기는 방법을 모릅니다. 시문(詩文) 따위로 말하면 전혀 글귀를 짓지 못하는데, 이러한 사람이 어찌 이 선발에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근일의 사면(辭免)을 보건대 허락받은 자가 전혀 없어서 겉치레가 될 뿐이니, 이것은 매우 온편치 못합니다. 대저 사면은 본디 모두 따를 수 없으나 그 사리를 보아 따를 만한 실상이 있으면 따라야만이 염치를 배양하여 사대부(士大夫)가 사양하고 받는 의리를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신이 소장(疏章)을 갖추어 아뢰려고 하였으나 진엄(震嚴)을 번거롭게 하고 겉치레가 되기만 할까 염려되어 우선 감히 내지 않고 입으로 실정을 아뢰어 굽어살피시기를 바라니, 윤허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합당하므로 초계(抄啓)하였을 것이니, 사퇴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註 175] 사씨(史氏)가 말한 충신(忠信)하여 끝맺음이 있다는 설(說) : 채침(蔡沈)의 소(疏)에 "시시(施氏)가 ‘하나라의 선왕(先王)은 충신(忠信)하여 끝맺음이 있었다.’ 하였다." 했으니, 실록 원문에 사씨(史氏)라 한 것은 시씨(施氏)의 오기인 듯하다.
  • [註 176]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은 : 은미한 곳에서도 삼가서 귀신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뜻. 옥루는 실(室)의 서북 구석인데, 귀신을 모셔 제사하는 곳으로 집안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곳이다. 전용하여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이라는 뜻으로 쓴다.
  • [註 177] 이천(伊川) : 정이(程頤)의 호.
  • [註 178] 계축년 : 1553 명종 8년.
  • [註 179] 호당(湖堂) :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원문

○壬寅/朝講。 領事盧守愼、知事鄭宗榮、特進官成世重ㆍ許世麟、兩司盧禛金誠一、承旨李珥、進講官柳希春趙廷機、史官沈喜壽洪仁憲許篈入侍進講。 自伊尹躬先見, 止史氏之言, 忠信有終之說。 李珥啓曰: "古者君臣之間, 以忠信相與, 情志交孚, 故能有終。" 守愼曰: "言別是一義。 經言忠信之義, 却不然。" 宇顒曰: "忠信者誠也, 所存只是一箇誠實之心, 故事事有終, 其要自不愧屋漏始。 若言君臣相與之忠信, 亦自此中流出, 無二道也。" 宇顒曰: "太甲伊尹而縱欲, 故伊尹言此。 然以理言之, 亦然。 天下之事, 皆本於君身, 君者父道也, 天道也。 臣者子道也, 地道也。 地道無成, 而代有終也。 地無獨生之物, 臣無獨成之功, 故未有不能正君, 而能成事者也。 伊尹所以汲汲於正太甲之身也。" 曰: "太甲縱欲, 固不好。 然能知伊尹之可恃, 亦有知人之明。 由其明, 故終能改過爾。" 宇顒曰: "太甲伊尹, 雖是明處, 然不能自反而縱欲, 未必不亡。 雖有伊尹, 亦不能救也。 且未有君縱欲, 而賢臣能存之理, 伊尹亦安能保其無恙乎? 如後漢 劉禪委任孔明, 故國治兵强, 抗衡中原, 而妄自菲薄, 不能自修, 故卒以昵近小人黃晧陳祗, 以亡其國。 以此知人君, 莫急於自修, 身若不修, 雖任賢臣, 亦末如之何, 況無賢臣乎? 雖然, 後主亦能委信孔明, 所用其言, 粗行宮府一體之法, 以終孔明之世, 故孔明能行其志。 如其不然, 孔明雖存, 亦豈能救其危亡, 而孔明之身, 亦安能立於其國乎?" 誠一進啓請李滉賜諡不待行狀。 守愼及特進、參贊以下, 皆欲宣取行狀, 然後賜諡。 宇顒等啓曰: "名賢行狀, 不可容易。 先儒朱子行狀, 至待數十年之久。 伊川則門人高(第)〔弟〕 , 皆己先沒, 故終無敢下筆者, 其難也如此。 待大賢, 不可拘於常規, 豈可以無行狀, 而不賜伊川 之諡乎?" 宇顒又曰: "朴淳所製墓誌及其門人敍述等, 取來觀之, 以爲依據, 亦恐無妨。" 李珥等皆以爲可。 誠一不可曰: "待大賢, 不可拘常規。 若必待是, 而後爲之, 是猶以其人爲必待是, 而後可知也。 不亦小乎?" 宇顒曰: "此固然矣。 但上意必欲不礙於故事, 故臣等爲此說, 亦不得已之論。" 上曰: "雖欲速爲賜諡, 不可創爲無前之例, 以開後弊也。" 誠一因言學問之正、造詣之高。 宇顒亦言其學, 吾東方一人而已。 曰: "東方, 自鄭夢周倡學之後, 入我朝, 如金宏弼趙光祖, 道學之人也。 亦未知其用工之詳, 其它雖有所謂學問者, 而率皆不成模樣。 若者, 聽其言論風旨, 眞知古人之學者, 誠未有其比也。 但其人資稟精神, 似不逮於古人。 殿下想必以此少之, 然其學問之工至, 而變化其氣質, 潛心古人之學, 終始如一, 積累工夫, 所造日深, 恐不可少也。" 誠一曰: "此人之學, 如靑天白日, 有目可覩, 豈可以言論風旨之一二言乎? 言非是。" 宇顒曰: "待行狀而議諡者, 國家立法, 只設大綱, 使之通行而已。 今有非常人所及之德業, 賜諡之事, 亦不可拘於常規。 若每事只守故事, 無所變通, 則甚妨治道也。" 言及軍額不足之弊。 守愼曰: "諸人每陳事弊, 不言救弊之策, 何益?" 宇顒曰: "今日救弊。 只在不務虛額之多, 只務從實充軍。 軍丁皆實, 則民力紓, 而流亡漸還。 今雖減額, 而後必增, 只務虛額而不實, 則此等流移, 害及族隣, 而遺民盡至失所。 然則增額, 乃所以減之也。 此癸丑以來數十年來, 爲民巨患者也。 今不可以不戒。" 曰: "減額紓民, 則民有安業滋息之理, 民漸復業, 然後漸復舊額可也。" 是時籍軍, 使之徒承望風旨, 務以刻急爲辦事, 多所虛張, 州縣騷然, 故及之。 等因言: "國家於私賤, 立法獨偏, 旣從母, 又從父, 其弊至於良民盡入私家, 而軍丁日少。" 上曰: "此法誠未便。 大抵, 法典不可變, 然若此法, 似當變通。" 群臣因贊其變通之便。 乃 命收議。 上又問: "從父乎? 從母乎?" 諸人皆曰: "從母便。 宇顒曰: "從父是義理所當然。 豈可從母, 違背人理乎?" 諸人皆以爲迂闊。 因言及諸官避嫌休告之煩。 誠一曰: "今上自三公六卿, 皆失其職。 聞議政府坐起, 無一關重事, 只備禮而已。 大臣如此, 庶官之不職, 亦宜也。" 上曰: "然, 予是辟不辟, 亦宜臣下之如此也。" 守愼因謝病乞免, 且曰: "近日災異非常, 乞因災異, 策免如臣不職者, 更求賢人代之。" 上曰卿何出此言? 今日群臣無出卿右者。" 曰: "以災異策免三公, 非合理之事。 人君遇災, 當罪己責躬, 側身修行, 豈可委罪大臣乎?" 宇顒曰: "大臣須有鞠躬盡力, 死而後已之心, 不可只顧一身, 逡巡避事也。 臣願殿下, 以忠信有終之道自任, 而大臣以相, 亦惟終之事自期, 君臣戮力, 共濟艱難, 不可只恁悠悠也。" 啓事畢, 宇顒進 啓曰: "賜暇湖堂, 所以培養文章, 爲他日文衡之用, 所宜抄選文學之士。 臣少而踈昧, 不習爲文, 雖濫叨科目, 而不知作文門戶。 至如詩文之類, 全不能下句, 如此之人, 豈可冒居此選乎? 伏見近日辭免, 絶無得請者, 只成文具, 此甚非便。 夫辭免固不盡從, 只觀其事理, 有可從之實, 則從之, 乃可以培養廉恥, 全士大夫辭受之義也。 今臣欲具疏陳達, 而恐瀆震嚴, 只成文具, 故姑不敢發, 而口陳情實, 伏蘄照臨, 庶賜允可。" 上曰: "必可合, 故抄啓也。 可勿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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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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