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41권, 성종 5년 4월 28일 임오 3/4 기사 / 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좌의정 최항의 졸기
국역
좌의정(左議政) 최항(崔恒)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하기를 전례와 같이 하였다. 최항의 자는 정보(貞父), 삭녕인(朔寧人)으로, 증 영의정(贈領議政) 최사유(崔士柔)의 아들이다. 최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 읽기를 좋아했다. 선덕(宣德)232) 갑인년233) 에 세종(世宗)이 관학(館學)에 나아가 학사(學士)에게 책문(策問)을 하고서 제1인(人)으로 발탁(拔擢)을 하고, 선교랑(宣敎郞)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특별히 제수하여, 수찬(修撰)·교리(校理)·직전(直殿)을 역임(歷任)시켰다. 정묘년234) 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직제학(直提學)에 승진이 되었다. 경태(景泰)235) 경오년236) 에 문종(文宗)이 즉위(卽位)하고선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에 제수(除授)되고, 신미년237) 에 부제학(副提學)에 승진되고, 임신년238) 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전보(轉補)되었다. 계유년239) 에 세조(世祖)가 정란(靖亂)을 할 때에 최항이 마침 정원(政院)에 숙직(宿直)을 하였으므로, 공신(功臣)에 참여(參與)하게 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승진이 되고, 수충 위사 협찬 정란 공신(輸忠衛社協贊靖亂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갑술년240) 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다 영성군(寧城君)에 봉(封)해졌고, 을해년241) 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卽位)하고서는 좌익 공신(佐翼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천순(天順)242) 정축년243) 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에서 곧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며, 무인년244) 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가 이어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그 해 겨울에 모친(母親)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기묘년245) 에 기복(起復)되어 정헌 대부 중추원사(中樞院使)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겸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이는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직인데, 최항이 세 번이나 상서(上書)하여 3년상(三年喪)을 마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경진년246) 에 숭정 대부(崇政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으며, 계미년247) 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除授)되고, 이어 좌참찬(左參贊)에 전임(轉任)되었다. 성화(成化)248) 병술년249) 에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승진이 되어 병조 판서(兵曹判書)의 일까지 겸임(兼任)을 하고, 이어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에 승진이 되었다. 정해년250) 에 대광 보국(大匡輔國) 우의정(右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으로 전임(轉任)이 되었다가 얼마 안가서 또다시 영성군(寧城君)으로 봉해졌다가, 경인년251) 에 부원군(府院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신묘년252) 에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다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제수되었으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66세이다. 문정(文靖)이라고 시호(諡號)하니 ‘도덕(道德)이 높고 박학다문(博學多聞)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최항의 사람됨은 겸손하고 조심성 있고 말이 적은데다가, 비록 한더위라도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무릅을 모으고 꿇어앉아 온종일 게으른 표정이 없었으며,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문장(文章)으로는 대우(對偶)에 능하여 한때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래서 중국(中國) 조정(朝廷)에서까지도 정절(精切)253) 하다고 평을 하였으며, 세조(世祖)·예종(睿宗)의 《실록(實錄)》과 《무정보감(武定寶鑑)》·《경국대전(經國大典)》은 모두 그가 찬정(撰定)한 것이다. 그의 호(號)는 태허정(太虛亭)이며, 유집(遺集)이 세상에 전(傳)한다. 최항은 어떤 일에 임(臨)해서는 과단성 있게 재결(裁決)함이 적었다. 전조(銓曹)254) 의 장(長)이 되고 상위(相位)에 있을 때에도, 건백(建白)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대로 의위(依違)255) 할 뿐이었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훈구 대신(勳舊大臣)들과 시비(是非)를 논란(論難)하면서 그의 뜻을 관찰하려고, 최항에게 묻기를,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어떤 법을 제정하려 하고, 남쪽과 북쪽도 정벌(征伐)하려고 하는데, 가능한가?"
하니 최항은 옳고 그름과 쉽고 어려움도 계산해 보지 않고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리며 조심성 있게 대답하기를,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두 번 최항에게 물으니, 다시 대답하는 말도,
"옳습니다."
라고만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는 문형(文衡)을 맡은 자로서 의정(議政)에 제수(除授)가 되면 반드시 사양을 하였었는데, 최항은 의정에 제수되었을 때에 그대로 받으면서 사양을 하지 않으니, 그 당시의 여론이 그러한 점을 비난하였다. 그의 아내는 서씨(徐氏)인데, 성질이 사나왔으며, 가정일은 모두가 서씨가 하자는 대로 했고,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최항은 딸이 많았는데, 사위를 선택함에 있어서, 부자 사람만 취택하고 인품(人品)은 논(論)하지 않았으므로 대다수가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최항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우리집은 활인원(活人院)이다."
하였는데, 그것은 병신만 모였다는 뜻이었다. 기채(奇采)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최항의 친구의 사위인, 이배륜(李培倫)이란 자의 사위였다. 그 기채에겐 딸만 하나 있었다. 그 딸이 정효상(鄭孝常)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부유(富裕)하게 잘살자 최항은 그 부(富)를 탐하여 근족(近族)임도 혐의하지 않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아들 최영호(崔永灝)의 아내를 삼으니, 온 조정(朝廷)에서 비난을 하였다. 최항의 아들은 최영린(崔永潾)과 최영호(崔永灝)인데, 최영린은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그런데 성품이 잔악하고 혹독하여 비록 처로(妻孥)들이라도 형편없이 학대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4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06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 [註 232] 선덕(宣德) : 명(明)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 [註 233] 갑인년 : 1434 세종16년.
- [註 234] 정묘년 : 1447 세종 29년.
- [註 235] 경태(景泰) : 명(明)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 [註 236] 경오년 : 1450 세종 32년.
- [註 237] 신미년 : 1451 문종 원년.
- [註 238] 임신년 : 1452 문종 2년.
- [註 239]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 [註 240] 갑술년 : 1454 단종 2년.
- [註 241] 을해년 : 1455 단종 3년.
- [註 242] 천순(天順) :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 [註 243] 정축년 : 1457 세조 3년.
- [註 244] 무인년 : 1458 세조 4년.
- [註 245] 기묘년 : 1459 세조 5년.
- [註 246] 경진년 : 1460 세조 6년.
- [註 247] 계미년 : 1463 세조 9년.
- [註 248] 성화(成化) :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 [註 249]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 [註 250]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251] 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 [註 252] 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253] 정절(精切) : 정밀하고 적절함.
- [註 254] 전조(銓曹) : 이조(吏曹)와 병조(兵曹).
- [註 255] 의위(依違) : 가부(可否) 결정을 못하고 우물쭈물함.
원문
○左議政崔恒卒。 輟朝、弔祭、禮葬如例。 恒字貞父, 朔寧人, 贈領議政士柔之子。 恒幼聰明, 好讀書, 宣德甲寅, 世宗幸學策士, 遂擢第一人, 特授宣敎郞集賢殿副修撰, 歷修撰、校理、直殿。 丁卯中重試, 陞直提學。 景泰庚午, 文宗卽位, 授左司諫大夫, 辛未陞副提學, 壬申拜同副承旨, 轉左副承旨。 癸酉世祖靖亂, 恒適直政院, 與有功, 陞都承旨, 賜輸忠衛社協賛靖亂功臣之號。 甲戌嘉善吏曹參判封寧城君, 乙亥遷大司憲。 世祖卽位, 賜佐翼功臣號。 天順丁丑, 嘉靖戶曹參判, 尋移吏曹, 戊寅資憲刑曹判書, 俄移工曹。 是年冬, 丁母憂, 己卯起復, 加正憲爲中樞院使藝文館大提學兼成均館大司成。 主文衡也, 恒三上書請終制, 不許。 庚辰加崇政吏曹判書, 癸未拜議政府右參贊, 轉左參贊。 成化丙戌, 陞崇祿兼判兵曹事, 尋陞輔國崇祿左贊成, 丁亥大匡輔國右議政, 轉至領議政, 未幾, 還封寧城君, 庚寅改封府院君。 辛卯賜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號, 復拜議政府左議政, 至是卒, 年六十六。 諡文靖; 道德博聞文, 恭己鮮言靖。 爲人謙謹寡言, 雖盛暑整衣冠, 斂膝危坐, 終日無惰容, 耽學强記。 爲文章, 長於對偶, 一時表箋, 皆出其手。 中朝稱精切, 世祖、睿宗 《實錄》、《武定寶鑑》、《經國大典》皆其所撰定也。 號太虛亭, 有集行于世。 恒臨事, 少裁決。 長銓曹居相位, 一無建白, 依違而已。 世祖嘗與勛舊, 論難是非, 以觀其志, 問恒曰: "吾欲爲某事, 欲立某法, 欲征南伐北, 可乎?" 恒不度是非, 不計難易, 俛首竦身, 謹對曰: "唯。" 上再問, 恒復曰: "唯唯。" 前此典文衡者, 拜議政則必辭, 恒拜議政, 猶帶不辭, 時議譏之。 妻徐氏性悍, 家政一聽於徐, 不得自由。 恒多女, 擇壻惟取富饒, 不論人器, 率多癡騃。 嘗自嘆曰: "吾家乃活人院", 言病人聚也。 有奇采者, 恒友壻李培倫女壻也。 采只有一女, 適鄭孝常家, 饒於財, 恒利其富, 不嫌近族, 取其女爲子永灝妻, 朝議譏之。 恒子永潾、永灝。 永潾登第, 爲刑曹參議。 性殘酷, 雖妻孥間, 毒虐無狀。
- 【태백산사고본】 6책 4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06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성종실록41권, 성종 5년 4월 28일 임오 3/4 기사 / 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좌의정 최항의 졸기
국역
좌의정(左議政) 최항(崔恒)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하기를 전례와 같이 하였다. 최항의 자는 정보(貞父), 삭녕인(朔寧人)으로, 증 영의정(贈領議政) 최사유(崔士柔)의 아들이다. 최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 읽기를 좋아했다. 선덕(宣德)232) 갑인년233) 에 세종(世宗)이 관학(館學)에 나아가 학사(學士)에게 책문(策問)을 하고서 제1인(人)으로 발탁(拔擢)을 하고, 선교랑(宣敎郞)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특별히 제수하여, 수찬(修撰)·교리(校理)·직전(直殿)을 역임(歷任)시켰다. 정묘년234) 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직제학(直提學)에 승진이 되었다. 경태(景泰)235) 경오년236) 에 문종(文宗)이 즉위(卽位)하고선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에 제수(除授)되고, 신미년237) 에 부제학(副提學)에 승진되고, 임신년238) 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전보(轉補)되었다. 계유년239) 에 세조(世祖)가 정란(靖亂)을 할 때에 최항이 마침 정원(政院)에 숙직(宿直)을 하였으므로, 공신(功臣)에 참여(參與)하게 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승진이 되고, 수충 위사 협찬 정란 공신(輸忠衛社協贊靖亂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갑술년240) 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다 영성군(寧城君)에 봉(封)해졌고, 을해년241) 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卽位)하고서는 좌익 공신(佐翼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천순(天順)242) 정축년243) 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에서 곧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며, 무인년244) 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가 이어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그 해 겨울에 모친(母親)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기묘년245) 에 기복(起復)되어 정헌 대부 중추원사(中樞院使)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겸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이는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직인데, 최항이 세 번이나 상서(上書)하여 3년상(三年喪)을 마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경진년246) 에 숭정 대부(崇政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으며, 계미년247) 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除授)되고, 이어 좌참찬(左參贊)에 전임(轉任)되었다. 성화(成化)248) 병술년249) 에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승진이 되어 병조 판서(兵曹判書)의 일까지 겸임(兼任)을 하고, 이어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에 승진이 되었다. 정해년250) 에 대광 보국(大匡輔國) 우의정(右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으로 전임(轉任)이 되었다가 얼마 안가서 또다시 영성군(寧城君)으로 봉해졌다가, 경인년251) 에 부원군(府院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신묘년252) 에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다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제수되었으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66세이다. 문정(文靖)이라고 시호(諡號)하니 ‘도덕(道德)이 높고 박학다문(博學多聞)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최항의 사람됨은 겸손하고 조심성 있고 말이 적은데다가, 비록 한더위라도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무릅을 모으고 꿇어앉아 온종일 게으른 표정이 없었으며,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문장(文章)으로는 대우(對偶)에 능하여 한때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래서 중국(中國) 조정(朝廷)에서까지도 정절(精切)253) 하다고 평을 하였으며, 세조(世祖)·예종(睿宗)의 《실록(實錄)》과 《무정보감(武定寶鑑)》·《경국대전(經國大典)》은 모두 그가 찬정(撰定)한 것이다. 그의 호(號)는 태허정(太虛亭)이며, 유집(遺集)이 세상에 전(傳)한다. 최항은 어떤 일에 임(臨)해서는 과단성 있게 재결(裁決)함이 적었다. 전조(銓曹)254) 의 장(長)이 되고 상위(相位)에 있을 때에도, 건백(建白)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대로 의위(依違)255) 할 뿐이었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훈구 대신(勳舊大臣)들과 시비(是非)를 논란(論難)하면서 그의 뜻을 관찰하려고, 최항에게 묻기를,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어떤 법을 제정하려 하고, 남쪽과 북쪽도 정벌(征伐)하려고 하는데, 가능한가?"
하니 최항은 옳고 그름과 쉽고 어려움도 계산해 보지 않고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리며 조심성 있게 대답하기를,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두 번 최항에게 물으니, 다시 대답하는 말도,
"옳습니다."
라고만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는 문형(文衡)을 맡은 자로서 의정(議政)에 제수(除授)가 되면 반드시 사양을 하였었는데, 최항은 의정에 제수되었을 때에 그대로 받으면서 사양을 하지 않으니, 그 당시의 여론이 그러한 점을 비난하였다. 그의 아내는 서씨(徐氏)인데, 성질이 사나왔으며, 가정일은 모두가 서씨가 하자는 대로 했고,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최항은 딸이 많았는데, 사위를 선택함에 있어서, 부자 사람만 취택하고 인품(人品)은 논(論)하지 않았으므로 대다수가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최항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우리집은 활인원(活人院)이다."
하였는데, 그것은 병신만 모였다는 뜻이었다. 기채(奇采)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최항의 친구의 사위인, 이배륜(李培倫)이란 자의 사위였다. 그 기채에겐 딸만 하나 있었다. 그 딸이 정효상(鄭孝常)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부유(富裕)하게 잘살자 최항은 그 부(富)를 탐하여 근족(近族)임도 혐의하지 않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아들 최영호(崔永灝)의 아내를 삼으니, 온 조정(朝廷)에서 비난을 하였다. 최항의 아들은 최영린(崔永潾)과 최영호(崔永灝)인데, 최영린은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그런데 성품이 잔악하고 혹독하여 비록 처로(妻孥)들이라도 형편없이 학대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4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06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 [註 232] 선덕(宣德) : 명(明)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 [註 233] 갑인년 : 1434 세종16년.
- [註 234] 정묘년 : 1447 세종 29년.
- [註 235] 경태(景泰) : 명(明)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 [註 236] 경오년 : 1450 세종 32년.
- [註 237] 신미년 : 1451 문종 원년.
- [註 238] 임신년 : 1452 문종 2년.
- [註 239]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 [註 240] 갑술년 : 1454 단종 2년.
- [註 241] 을해년 : 1455 단종 3년.
- [註 242] 천순(天順) :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 [註 243] 정축년 : 1457 세조 3년.
- [註 244] 무인년 : 1458 세조 4년.
- [註 245] 기묘년 : 1459 세조 5년.
- [註 246] 경진년 : 1460 세조 6년.
- [註 247] 계미년 : 1463 세조 9년.
- [註 248] 성화(成化) :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 [註 249]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 [註 250]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251] 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 [註 252] 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253] 정절(精切) : 정밀하고 적절함.
- [註 254] 전조(銓曹) : 이조(吏曹)와 병조(兵曹).
- [註 255] 의위(依違) : 가부(可否) 결정을 못하고 우물쭈물함.
원문
○左議政崔恒卒。 輟朝、弔祭、禮葬如例。 恒字貞父, 朔寧人, 贈領議政士柔之子。 恒幼聰明, 好讀書, 宣德甲寅, 世宗幸學策士, 遂擢第一人, 特授宣敎郞集賢殿副修撰, 歷修撰、校理、直殿。 丁卯中重試, 陞直提學。 景泰庚午, 文宗卽位, 授左司諫大夫, 辛未陞副提學, 壬申拜同副承旨, 轉左副承旨。 癸酉世祖靖亂, 恒適直政院, 與有功, 陞都承旨, 賜輸忠衛社協賛靖亂功臣之號。 甲戌嘉善吏曹參判封寧城君, 乙亥遷大司憲。 世祖卽位, 賜佐翼功臣號。 天順丁丑, 嘉靖戶曹參判, 尋移吏曹, 戊寅資憲刑曹判書, 俄移工曹。 是年冬, 丁母憂, 己卯起復, 加正憲爲中樞院使藝文館大提學兼成均館大司成。 主文衡也, 恒三上書請終制, 不許。 庚辰加崇政吏曹判書, 癸未拜議政府右參贊, 轉左參贊。 成化丙戌, 陞崇祿兼判兵曹事, 尋陞輔國崇祿左贊成, 丁亥大匡輔國右議政, 轉至領議政, 未幾, 還封寧城君, 庚寅改封府院君。 辛卯賜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號, 復拜議政府左議政, 至是卒, 年六十六。 諡文靖; 道德博聞文, 恭己鮮言靖。 爲人謙謹寡言, 雖盛暑整衣冠, 斂膝危坐, 終日無惰容, 耽學强記。 爲文章, 長於對偶, 一時表箋, 皆出其手。 中朝稱精切, 世祖、睿宗 《實錄》、《武定寶鑑》、《經國大典》皆其所撰定也。 號太虛亭, 有集行于世。 恒臨事, 少裁決。 長銓曹居相位, 一無建白, 依違而已。 世祖嘗與勛舊, 論難是非, 以觀其志, 問恒曰: "吾欲爲某事, 欲立某法, 欲征南伐北, 可乎?" 恒不度是非, 不計難易, 俛首竦身, 謹對曰: "唯。" 上再問, 恒復曰: "唯唯。" 前此典文衡者, 拜議政則必辭, 恒拜議政, 猶帶不辭, 時議譏之。 妻徐氏性悍, 家政一聽於徐, 不得自由。 恒多女, 擇壻惟取富饒, 不論人器, 率多癡騃。 嘗自嘆曰: "吾家乃活人院", 言病人聚也。 有奇采者, 恒友壻李培倫女壻也。 采只有一女, 適鄭孝常家, 饒於財, 恒利其富, 不嫌近族, 取其女爲子永灝妻, 朝議譏之。 恒子永潾、永灝。 永潾登第, 爲刑曹參議。 性殘酷, 雖妻孥間, 毒虐無狀。
- 【태백산사고본】 6책 4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06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