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11권, 세종 3년 2월 18일 신해 3/3 기사 / 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임군례를 저자 거리에서 다섯 수레로 환형에 처하다
국역
임군례(任君禮)를 저자 거리에서 〈다섯 수레로〉 환형(轘刑)에 처하였다. 군례의 아비 임언충(任彦忠)은 한족(漢族)인데, 역관(譯官)으로 개국 공신에 참예하였던 고로, 군례도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되었는데, 사람된 품이 욕심 많고 야비하며, 역관으로서 여러번 명나라에 사신을 따라가서 〈그것으로 인하여〉 큰 부자가 되었으면서, 일시라도 기세 있는 자면 반드시 아부하므로, 사람들이 오방저미(五方猪尾)라고 별명하였으니, 돼지는 꼬리를 잘 흔들므로, 사람이 쫓아다니며 아부하기 좋아하고, 가는 곳마다 아부하지 않는 데 없는 것을 속담에 오방저미라고 한다. 충호위(忠扈衛)의 제거(提擧)가 되어 관의 목수를 사사로 그 집 역사에 부렸고, 또 관의 재정을 도적질한 일이 있으므로, 제조(提調) 도총제 이징(李澄)이 그 하는 짓을 미워하여, 관청 내의 물품을 장부에 등록하고 출납을 밝히려 하니, 군례가 그와 같은 전례가 없다 하여 듣지 아니하므로, 그것이 흔단이 되어 서로 꾸짖고 욕하였다가, 이징이 상왕께 아뢰어, 상왕이 군례의 제거직을 파면하고 행 대호군(行大護軍)을 시켰더니, 군례가 원망하고 분해하여 큰 소리로 떠들기를,
"상왕이 참소하는 말만 믿고 나에게 이런 굴욕을 당하게 하니, 내가 이징과 판가름을 하려고 하였으나, 상왕이 말리는 것 같아서, 내가 하지 못하였다."
하고, 인하여 상왕에게 글을 올렸는데, 말이 매우 거만할 뿐 아니라, 이징의 참소라는 등의 말이 있으므로, 상왕이 노하며 말하기를,
"참소라는 말은 이간 붙인다는 말인데, 그 놈이 나에게 이간 붙인다는 말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냐."
하고, 의금부에 하옥하여 국문하기를 명령하고, 군례가 글을 알지 못하므로, 반드시 교사한 자가 있으리라 하여 힐문하니, 군례가 정안지(鄭安止)를 지목하므로 포교를 보내어 체포하게 하니, 안지가 도망하였다. 군례가 안지의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글 올리는데 그 의사를 낸 것이라든가 말의 투가 모두 다 안지가 한 일이라."
하여, 의금부에서 안지의 형 정안도(鄭安道)와 처모(妻母)및 처자(妻子)를 잡아 가두었더니, 안지가 자수하여 들어가니, 대질할 때 말하기를,
"군례가 초본을 내어 보이기에, 나는 다만 초고에 의거하여 썼을 뿐이라."
하여, 두 사람이 서로 변명하고 서로 욕하면서, 군례가 자복하려 하지 아니하므로, 안지가 옥중에 있으며 말하기를,
"내가 군례가 상서하는 것을 쓸 적에 다만 상호군이라고만 쓰고 행(行)자를 쓰지 아니하였더니, 군례가 다시 다른 종이를 내어 놓고 고쳐 쓰게 하고, 떠들며 말하기를, ‘나는 공신의 아들로서 두 나라에 통하여 공이 큰데도, 오히려 상호군을 아깝게 여겨 행직(行職)을 제수하여 주니, 이따위 임금이 무슨 대체(大體)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상왕이 무시로 놀러 다니니, 신우(辛禑)가 호곶(壺串)에 가서 놀며 즐겨하던 일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묻기를, ‘상왕이 환후가 있어 왕위를 전위한 것을 병부나 예부에서 아는가.’ 하니, 군례가 말하기를, ‘황엄(黃儼)이 이미 알았는데, 병부나 예부에서 어찌 모르겠는가. 병이라 칭탁하고 왕위를 전위한 것을 황제가 만약 안다면, 충혜왕(忠惠王)의 뒤집힌 전철이 있을 것이다.’ 하매, 군례의 아들 임맹손(任孟孫)이 옆에서 듣고 눈짓으로 말렸다. 안지가 나가자 군례가 자기 말의 부도한 것을 깨닫고 손으로 안지의 옷을 잡고 다른 데 누설하지 말라고 대들며 맹세하게 하였다." 하여, 임금이 삼성(三省)과 호조 판서 이지강(李之剛) 및 좌대언 정초에게 명하여 의금부와 함께 국문하게 하니, 안지가 처음에는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아니하므로, 의리로 따져서 힐문하여도 역시 대답하지 아니하더니, 한나절이 지나서야 토설하여 변명하고 빠져나가려 하고, 군례는 처음에 자복하지 아니하더니, 고문하여서야 급히 말하기를,
"나는 형장에 견디지 못한다. 모두가 안지의 말한 것과 같다."
하므로, 안지가 군례의 아들과 호위사 급사(扈衛司給事) 한 사람을 증인으로 하니, 군례의 아들도 역시 말하기를,
"나는 형장을 견디지 못한다. 모두가 안지의 말과 같다."
하였으나, 오직 급사만은 고문이 심하여도 불복하여 말하기를,
"내 귀로 일찍이 그런 말을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에 이르러 옥사(獄事)가 완료되었으므로, 대역으로 논단(論斷)하고 백관을 저자에 모아 놓고 다섯 수레로 찢어 죽이어 사방에 조리돌리고, 그 가산은 적몰하고, 처자는 노비로 정하였다. 군례가 사귀어 친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가 연루될까 염려하였다.
원문
○轘任君禮於市。 君禮之父彦忠, 漢人也。 以譯語得參開國功臣, 故君禮屬於忠義衛。 爲人貪鄙, 以譯語屢使上國, 以致巨富, 一時之有氣勢者必阿附, 時稱五方猪尾。 猪善搖尾, 故人之喜趨附, 無處不比者, 俗謂之五方猪尾。 爲忠扈衛提擧, 私役工匠於其家, 且有貪汚之事。 提調都摠制李澄疾其所爲, 欲簿司中物, 以記出納, 君禮以無前例止之, 因有隙, 相詰辱之。 澄聞于上王, 上王削君禮提擧職, 除行大護軍。 君禮怨憤揚言曰: "上王信讒, 令我受屈, 我欲與澄辨之, 上王若止之, 我不敢也。" 因上書于上王, 辭甚倨慢, 有以李澄之愬等語。 上王怒曰: "愬者, 讒也。 竪子謂我聽讒。" 命下義禁府鞫之。 以君禮不解書, 必有敎之者, 詰之, 君禮指鄭安止, 發吏捕之, 安止亡。 君禮聞安止亡言: "上書立意措辭, 皆安止所爲。" 義禁府囚安止兄安道及妻母妻子。 安止自就獄對辨曰: "君禮出示藁, 我只據藁寫之耳。" 兩人互辨互詬, 君禮不肯服。 安止在獄中言: "我書君禮上書時, 只寫上護軍, 而不書行職。 君禮更出他紙, 令改書, 揚言曰: ‘我功臣之子, 而通於兩國, 其功大矣。 反惜上護軍而除行職, 如此之主, 可謂知大體乎? 上王非時出遊, 與辛禑之遊樂壺串何異?’ 我問曰: ‘上王有疾傳位, 兵部禮部知之耶?’ 君禮曰: ‘黃儼旣知之矣, 兵禮部豈不知乎? 托疾禪位, 帝若知之, 忠惠王之覆轍在焉。’ 君禮子孟孫在旁聞之, 目禁之。 安止出, 君禮悟其言之不道, 手執安止衣, 逼令誓不漏言。" 上令三省及戶曹判書李之剛、左代言鄭招, 同義禁府鞫之。 安止初則垂首不言, 據義詰問, 亦不答, 至半日餘, 吐辭辨逸。 君禮初不服, 掠之, 遽曰: "吾不耐杖。 一如安止所言。" 安止指君禮子及扈衛司給事一人爲證, 君禮子亦曰: "吾不耐杖。 一如安止所言。" 唯給事掠多, 固不服曰: "吾耳未嘗聞此言。" 至是獄具, 論以大逆, 會百官於市轘之, 徇于四方, 籍家産, 沒妻子爲奴婢。 時君禮所交親者甚衆, 皆恐被連引。
세종 3년 (1421) 2월 18일
국역
임군례(任君禮)를 저자 거리에서 〈다섯 수레로〉 환형(轘刑)에 처하였다. 군례의 아비 임언충(任彦忠)은 한족(漢族)인데, 역관(譯官)으로 개국 공신에 참예하였던 고로, 군례도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되었는데, 사람된 품이 욕심 많고 야비하며, 역관으로서 여러번 명나라에 사신을 따라가서 〈그것으로 인하여〉 큰 부자가 되었으면서, 일시라도 기세 있는 자면 반드시 아부하므로, 사람들이 오방저미(五方猪尾)라고 별명하였으니, 돼지는 꼬리를 잘 흔들므로, 사람이 쫓아다니며 아부하기 좋아하고, 가는 곳마다 아부하지 않는 데 없는 것을 속담에 오방저미라고 한다. 충호위(忠扈衛)의 제거(提擧)가 되어 관의 목수를 사사로 그 집 역사에 부렸고, 또 관의 재정을 도적질한 일이 있으므로, 제조(提調) 도총제 이징(李澄)이 그 하는 짓을 미워하여, 관청 내의 물품을 장부에 등록하고 출납을 밝히려 하니, 군례가 그와 같은 전례가 없다 하여 듣지 아니하므로, 그것이 흔단이 되어 서로 꾸짖고 욕하였다가, 이징이 상왕께 아뢰어, 상왕이 군례의 제거직을 파면하고 행 대호군(行大護軍)을 시켰더니, 군례가 원망하고 분해하여 큰 소리로 떠들기를,
"상왕이 참소하는 말만 믿고 나에게 이런 굴욕을 당하게 하니, 내가 이징과 판가름을 하려고 하였으나, 상왕이 말리는 것 같아서, 내가 하지 못하였다."
하고, 인하여 상왕에게 글을 올렸는데, 말이 매우 거만할 뿐 아니라, 이징의 참소라는 등의 말이 있으므로, 상왕이 노하며 말하기를,
"참소라는 말은 이간 붙인다는 말인데, 그 놈이 나에게 이간 붙인다는 말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냐."
하고, 의금부에 하옥하여 국문하기를 명령하고, 군례가 글을 알지 못하므로, 반드시 교사한 자가 있으리라 하여 힐문하니, 군례가 정안지(鄭安止)를 지목하므로 포교를 보내어 체포하게 하니, 안지가 도망하였다. 군례가 안지의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글 올리는데 그 의사를 낸 것이라든가 말의 투가 모두 다 안지가 한 일이라."
하여, 의금부에서 안지의 형 정안도(鄭安道)와 처모(妻母)및 처자(妻子)를 잡아 가두었더니, 안지가 자수하여 들어가니, 대질할 때 말하기를,
"군례가 초본을 내어 보이기에, 나는 다만 초고에 의거하여 썼을 뿐이라."
하여, 두 사람이 서로 변명하고 서로 욕하면서, 군례가 자복하려 하지 아니하므로, 안지가 옥중에 있으며 말하기를,
"내가 군례가 상서하는 것을 쓸 적에 다만 상호군이라고만 쓰고 행(行)자를 쓰지 아니하였더니, 군례가 다시 다른 종이를 내어 놓고 고쳐 쓰게 하고, 떠들며 말하기를, ‘나는 공신의 아들로서 두 나라에 통하여 공이 큰데도, 오히려 상호군을 아깝게 여겨 행직(行職)을 제수하여 주니, 이따위 임금이 무슨 대체(大體)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상왕이 무시로 놀러 다니니, 신우(辛禑)가 호곶(壺串)에 가서 놀며 즐겨하던 일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묻기를, ‘상왕이 환후가 있어 왕위를 전위한 것을 병부나 예부에서 아는가.’ 하니, 군례가 말하기를, ‘황엄(黃儼)이 이미 알았는데, 병부나 예부에서 어찌 모르겠는가. 병이라 칭탁하고 왕위를 전위한 것을 황제가 만약 안다면, 충혜왕(忠惠王)의 뒤집힌 전철이 있을 것이다.’ 하매, 군례의 아들 임맹손(任孟孫)이 옆에서 듣고 눈짓으로 말렸다. 안지가 나가자 군례가 자기 말의 부도한 것을 깨닫고 손으로 안지의 옷을 잡고 다른 데 누설하지 말라고 대들며 맹세하게 하였다." 하여, 임금이 삼성(三省)과 호조 판서 이지강(李之剛) 및 좌대언 정초에게 명하여 의금부와 함께 국문하게 하니, 안지가 처음에는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아니하므로, 의리로 따져서 힐문하여도 역시 대답하지 아니하더니, 한나절이 지나서야 토설하여 변명하고 빠져나가려 하고, 군례는 처음에 자복하지 아니하더니, 고문하여서야 급히 말하기를,
"나는 형장에 견디지 못한다. 모두가 안지의 말한 것과 같다."
하므로, 안지가 군례의 아들과 호위사 급사(扈衛司給事) 한 사람을 증인으로 하니, 군례의 아들도 역시 말하기를,
"나는 형장을 견디지 못한다. 모두가 안지의 말과 같다."
하였으나, 오직 급사만은 고문이 심하여도 불복하여 말하기를,
"내 귀로 일찍이 그런 말을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에 이르러 옥사(獄事)가 완료되었으므로, 대역으로 논단(論斷)하고 백관을 저자에 모아 놓고 다섯 수레로 찢어 죽이어 사방에 조리돌리고, 그 가산은 적몰하고, 처자는 노비로 정하였다. 군례가 사귀어 친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가 연루될까 염려하였다.
원문
○轘任君禮於市。 君禮之父彦忠, 漢人也。 以譯語得參開國功臣, 故君禮屬於忠義衛。 爲人貪鄙, 以譯語屢使上國, 以致巨富, 一時之有氣勢者必阿附, 時稱五方猪尾。 猪善搖尾, 故人之喜趨附, 無處不比者, 俗謂之五方猪尾。 爲忠扈衛提擧, 私役工匠於其家, 且有貪汚之事。 提調都摠制李澄疾其所爲, 欲簿司中物, 以記出納, 君禮以無前例止之, 因有隙, 相詰辱之。 澄聞于上王, 上王削君禮提擧職, 除行大護軍。 君禮怨憤揚言曰: "上王信讒, 令我受屈, 我欲與澄辨之, 上王若止之, 我不敢也。" 因上書于上王, 辭甚倨慢, 有以李澄之愬等語。 上王怒曰: "愬者, 讒也。 竪子謂我聽讒。" 命下義禁府鞫之。 以君禮不解書, 必有敎之者, 詰之, 君禮指鄭安止, 發吏捕之, 安止亡。 君禮聞安止亡言: "上書立意措辭, 皆安止所爲。" 義禁府囚安止兄安道及妻母妻子。 安止自就獄對辨曰: "君禮出示藁, 我只據藁寫之耳。" 兩人互辨互詬, 君禮不肯服。 安止在獄中言: "我書君禮上書時, 只寫上護軍, 而不書行職。 君禮更出他紙, 令改書, 揚言曰: ‘我功臣之子, 而通於兩國, 其功大矣。 反惜上護軍而除行職, 如此之主, 可謂知大體乎? 上王非時出遊, 與辛禑之遊樂壺串何異?’ 我問曰: ‘上王有疾傳位, 兵部禮部知之耶?’ 君禮曰: ‘黃儼旣知之矣, 兵禮部豈不知乎? 托疾禪位, 帝若知之, 忠惠王之覆轍在焉。’ 君禮子孟孫在旁聞之, 目禁之。 安止出, 君禮悟其言之不道, 手執安止衣, 逼令誓不漏言。" 上令三省及戶曹判書李之剛、左代言鄭招, 同義禁府鞫之。 安止初則垂首不言, 據義詰問, 亦不答, 至半日餘, 吐辭辨逸。 君禮初不服, 掠之, 遽曰: "吾不耐杖。 一如安止所言。" 安止指君禮子及扈衛司給事一人爲證, 君禮子亦曰: "吾不耐杖。 一如安止所言。" 唯給事掠多, 固不服曰: "吾耳未嘗聞此言。" 至是獄具, 論以大逆, 會百官於市轘之, 徇于四方, 籍家産, 沒妻子爲奴婢。 時君禮所交親者甚衆, 皆恐被連引。
원본
세종 3년 (1421) 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