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9권, 세종 2년 8월 24일 경신 2/2 기사 /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변계량이 지어 올린 헌릉 지문
국역
참찬(參贊) 변계량(卞季良)이 헌릉(獻陵) 지문(誌文)을 지어 올렸는데 이르기를,
"삼가 안찰(按察)하여 보니, 태후 민씨(閔氏)는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시다. 고려 문하 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경공(文景公) 휘(諱) 영모(令謨)로부터 육세(六世) 뒤에 황고조(皇高祖)인 휘(諱) 종유(宗儒)가 의릉(毅陵)047) 을 도와 벼슬이 도첨의 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이르고,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이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을 나으시니, 휘(諱)는 적(頔)이요, 문순(文順)이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諱) 변(抃)을 낳으시고, 대광(大匡)이 황고(皇考)를 낳으시니, 순충 동덕 찬화 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諱) 제(霽)이시고, 황비(皇妣) 송씨(宋氏)는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封)하셨으니,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諱) 선(璿)의 따님이다. 을사년 정묘(丁卯)048) 에 태후(太后)를 송경(松京) 철동(鐵洞) 사제(私第)에서 낳으셨다. 태후가 어려서부터 맑고 아름다우시며, 총명하시고 인자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출가할 나이에 배필을 고르시다가 우리 성덕 신공(盛德神功) 상왕의 빈(嬪)으로 들어오셨다. 상왕이 젊어서부터 세상을 경영할 뜻을 두시고 경사(經史)에만 마음을 쓰시고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아니하셨으나, 태후께서 살림하는 데 능숙하시고 주부로서 음식새에 삼가하시여 남편의 공을 이룩하도록 힘쓰셨고, 여러 아들을 가르쳐서 옳은 데로 따르게 하셨고, 시첩들을 예로 대하여 부인의 도리에 극진하셨다. 홍무(洪武) 임신(壬申)에 상왕이 태조를 도우셔서 개국하게 되시니 정녕 옹주(靜寧翁主)에 봉하였고, 경신(庚申)에는 공정왕(恭靖王)이 뒤 이을 아드님이 없으시므로 우리 상왕을 세자(世子)로 봉하시면서, 태후는 정빈(貞嬪)에 봉하셨다. 그 해 11월에 상왕이 공정왕(恭靖王)의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卽位)하시면서 정비(靜妃)에 봉(封)하셨고, 영락 계미 4월에 황제가 조거임(趙居任)을 보내어 우리 상왕을 조선 국왕(朝鮮國王)으로 봉(封)하고, 그 해 10월에 황제가 태후에게 관(冠)·포(袍)를 내렸으니, 화려함이 비할 데 없었다. 이 해부터 정유년까지 여러 번 황제의 내림을 다섯 차례나 받았다. 무술년 8월에 상왕이 우리 주상 전하에게 선위(禪位)하시니, 전하가 즉위하시면서 그 해 겨울 11월 갑인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상왕에게는 성덕 신공(盛德神功)의 존호(尊號)를, 태후에게는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란 존호를 올렸고, 기해년 정월에 황제가 고명(誥命)과 새인(璽印)을 내려 우리 주상 전하를 국왕으로 봉(封)하였다. 경자년 5월 25일에 태후가 병환이 드시었는데, 상왕은 매일 오셔서 보시었고, 주상은 곁에 모시고서 부채[扇]로 서늘하게 하며 침석을 보시고 친히 탕약(湯藥)을 받들어 무릇 구료하심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7월 10일에 수강궁 별전에서 훙(薨)하시니, 춘추가 56세이시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아래로 복예(僕隷)에 이르기까지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아아, 슬프도다. 상왕이 슬퍼하심을 이기지 못하시어 조금 평안치 못하시니, 주상이 대신을 보내어 육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흰옷과 소찬으로 30일을 지내셨으며, 주상은 애통함이 다할 데 없으시어 양암(樑闇)049) 에 거처하시니, 상왕이 장례 뒤에 복을 벗으라 허하셨다. 주상이 9월 14일에 존호(尊號)를 올려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라 하였다. 대신이 헌의(獻議)하기를, ‘오월(五月)만에 장례하는 것은 예(禮)이나, 송나라 제도에 왕공(王公) 이하는 모두 3월이면 장사하라.’ 하였고, 이제 주상은 오랫동안 양암(樑闇)에 거하시어 〈상왕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니, 마땅히 그 때의 편의에 참작하여 송나라 제도에 따라 하기를 청하였더니, 상왕이 윤허하시어 석달 되던 9월 17일에 광주군(廣州郡) 대모산(大母山)에 안장하시고 능 이름을 헌(獻)이라 한다.
태후(太后)께서 유한 정정(幽閑貞靜)의 덕을 타시어 능히 성상(聖上)의 배필이 되시어 19년 동안 내치(內治)에 전력하셔서 내정이 엄숙하고 화락하였으며, 또 성자(聖子)를 낳으셔서 종사(宗社)의 주인이 되게 하고 영귀한 봉양을 누리게 되시니, 아아, 거룩한 일이다. 태후가 사남(四男)과 사녀(四女)를 낳으셨으니, 우리 주상 전하는 셋째이시다. 맏아들은 이제(李禔)이니, 일찍이 세자(世子)가 되었다가 덕에 삼가하지 못하여 여러 신하들이 세자(世子) 되기가 마땅치 않다 하여, 상왕이 황제에게 알리고 폐하여 양녕 대군에 봉하였고, 다음은 이보(李𥙷)이니, 효령 대군에 봉하고, 다음은 이종(李)이니, 성녕 대군(誠寧大君)에 봉하였으나 먼저 돌아갔다. 맏딸은 정순 궁주(貞順宮主)이니,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하가(下嫁)하였으니, 본이 다른 이씨이다. 다음은 경정 궁주(慶貞宮主)이니,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하가하였고, 다음은 경안 궁주(慶安宮主)이니, 길창군 권규(權跬)에게 하가하였으나, 또 앞서 돌아갔다. 다음은 정선 궁주(貞善宮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하가하였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 심씨(恭妃沈氏)는 문하 시중(門下侍中) 휘(諱) 심덕부(沈德符)의 네째 아들인 온(溫)이 따님이시다. 4남과 2녀를 낳으셨으니 아직 모두 어리다. 양녕은 김한로(金漢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리며, 효령은 호조 판서 정역(鄭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두었는데 다 어리고, 성녕은 경창부 윤(慶昌府尹) 성억(成抑)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고, 정순 궁주는 딸이 동부지돈녕(同副知敦寧) 이계린(李季疄)에게 출가하니, 본이 다른 이씨이다. 1녀를 낳았으나 어리다. 경정 궁주는 4녀를 낳았으니, 큰딸은 유학(幼學) 안진(安進)에게 출가하고, 그 아래로는 아직 어리다. 경안 궁주는 2남을 낳았으니, 권담(權聃)은 사헌부 장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재취하였고, 다음은 어리며, 정선 궁주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고 하였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권홍(權弘)을 시켜 돌[石]에 쓰게 하였다.
원문
○參贊卞季良撰獻陵誌文以進曰:
謹按, 太后閔氏, 驪興世家, 自高麗門下侍郞平章事文景公諱令謨六世, 而至皇高祖諱宗儒, 相毅陵, 位都僉議侍郞贊成事, 諡忠順。 忠順生皇曾祖判密直司事諡文順諱頔, 文順生皇祖大匡驪興君諱抃, 大匡生皇考純忠同德贊化功臣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諡文度諱霽, 皇妣宋氏, 封三韓國大夫人, 高麗重大匡礪良君諱璿之女。 以乙巳丁卯, 生太后于松京 鐵洞私第。
太后生而淑懿, 聰惠異常, 將筓擇配, 來嬪于我聖德神功上王, 少有濟世之志, 留心經史, 不事家産。 太后能給於治家, 謹於主饋, 以勉其功。 敎誨多男, 俾循義方, 禮遇妾侍, 克盡婦道。 洪武壬申, 上王扶太祖開國, 封靜寧翁主。 歲庚辰, 恭靖王以無繼嗣, 封我上王世子, 封太后貞嬪。 其年十一月, 上王受恭靖王內禪卽位, 封靜妃。 永樂癸未四月, 帝遣趙居任, 封我上王爲朝鮮國王。 是年冬十月, 帝賜太后冠袍, 鮮麗罕比。 自是年至丁酉, 累受帝賜凡五。
戊戌八月, 上王禪位于我主上殿下, 殿下卽位, 以其冬十一月甲寅, 奉冊寶獻號, 上王曰聖德神功, 太后曰厚德王大妃。 己亥正月, 帝賜誥印, 封我主上殿下爲國王。 庚子五月二十五日, 太后感疾, 上王日至視疾, 主上侍側扇枕, 親奉湯藥, 凡所救療, 無所不至。 七月十日, 薨于壽康宮別殿, 春秋五十六。 大小臣僚下至僕隷, 莫不痛哭。 嗚呼痛哉!
上王不勝軫悼, 稍不豫, 主上遣大臣請進肉, 不許。 以白衣素膳, 終三十日。 主上哀慟罔極, 居于(樑)〔諒〕 闇, 上王許於葬後釋服。 主上以九月十四日, 上尊號曰元敬王太后。 大臣獻議以爲: "五月而葬, 禮也。 然宋制, 王公以下皆三月而葬。 今主上久居諒闇, 不得問安, 當酌時宜, 以從宋制。" 上王許之。 越三月十七日壬午, 安厝于廣州治之大母山, 陵曰獻。
太后稟幽閑貞靜之德, 克配聖上, 以專內治十九年間, 壼儀肅穆。 又誕聖子, 俾主宗社, 以享榮養。 嗚呼盛哉! 太后誕四男四女, 我主上殿下居三。 長曰禔, 嘗爲世子, 不謹于德, 群臣上言不宜儲副, 上王聞于帝廢之, 封讓寧大君。 次曰𥙷, 封孝寧大君, 次曰 ()
〔〕 , 封誠寧大君, 先卒。 長女貞順宮主, 下嫁淸平府院君 李伯剛, 非一李也。 次慶貞宮主, 下嫁平壤君 趙大臨, 次慶安宮主, 下嫁吉昌君 權跬, 亦先卒。 次貞善宮主, 下嫁宜山君 南暉。
我中宮恭妃 沈氏, 門下侍中諱德符第四子溫之女也。 誕四男二女, 皆幼。 讓寧娶金漢老之女, 生三男一女, 皆幼。 孝寧娶戶曹判書鄭易之女, 生五男一女, 皆幼。 誠寧娶慶昌府尹成抑之女, 無子。 貞順宮主生女, 適同副知敦寧李季疄, 亦非一李, 生一女, 幼。 慶貞宮主生四女, 長適幼學安進, 餘幼。 慶安宮主生二男, 聃改娶司憲掌令鄭淵之女, 次幼。 貞善宮主生一男一女, 幼。
命判敦寧府事權弘書諸石。
세종 2년 (1420) 8월 24일
국역
참찬(參贊) 변계량(卞季良)이 헌릉(獻陵) 지문(誌文)을 지어 올렸는데 이르기를,
"삼가 안찰(按察)하여 보니, 태후 민씨(閔氏)는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시다. 고려 문하 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경공(文景公) 휘(諱) 영모(令謨)로부터 육세(六世) 뒤에 황고조(皇高祖)인 휘(諱) 종유(宗儒)가 의릉(毅陵)047) 을 도와 벼슬이 도첨의 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이르고,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이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을 나으시니, 휘(諱)는 적(頔)이요, 문순(文順)이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諱) 변(抃)을 낳으시고, 대광(大匡)이 황고(皇考)를 낳으시니, 순충 동덕 찬화 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諱) 제(霽)이시고, 황비(皇妣) 송씨(宋氏)는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封)하셨으니,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諱) 선(璿)의 따님이다. 을사년 정묘(丁卯)048) 에 태후(太后)를 송경(松京) 철동(鐵洞) 사제(私第)에서 낳으셨다. 태후가 어려서부터 맑고 아름다우시며, 총명하시고 인자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출가할 나이에 배필을 고르시다가 우리 성덕 신공(盛德神功) 상왕의 빈(嬪)으로 들어오셨다. 상왕이 젊어서부터 세상을 경영할 뜻을 두시고 경사(經史)에만 마음을 쓰시고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아니하셨으나, 태후께서 살림하는 데 능숙하시고 주부로서 음식새에 삼가하시여 남편의 공을 이룩하도록 힘쓰셨고, 여러 아들을 가르쳐서 옳은 데로 따르게 하셨고, 시첩들을 예로 대하여 부인의 도리에 극진하셨다. 홍무(洪武) 임신(壬申)에 상왕이 태조를 도우셔서 개국하게 되시니 정녕 옹주(靜寧翁主)에 봉하였고, 경신(庚申)에는 공정왕(恭靖王)이 뒤 이을 아드님이 없으시므로 우리 상왕을 세자(世子)로 봉하시면서, 태후는 정빈(貞嬪)에 봉하셨다. 그 해 11월에 상왕이 공정왕(恭靖王)의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卽位)하시면서 정비(靜妃)에 봉(封)하셨고, 영락 계미 4월에 황제가 조거임(趙居任)을 보내어 우리 상왕을 조선 국왕(朝鮮國王)으로 봉(封)하고, 그 해 10월에 황제가 태후에게 관(冠)·포(袍)를 내렸으니, 화려함이 비할 데 없었다. 이 해부터 정유년까지 여러 번 황제의 내림을 다섯 차례나 받았다. 무술년 8월에 상왕이 우리 주상 전하에게 선위(禪位)하시니, 전하가 즉위하시면서 그 해 겨울 11월 갑인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상왕에게는 성덕 신공(盛德神功)의 존호(尊號)를, 태후에게는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란 존호를 올렸고, 기해년 정월에 황제가 고명(誥命)과 새인(璽印)을 내려 우리 주상 전하를 국왕으로 봉(封)하였다. 경자년 5월 25일에 태후가 병환이 드시었는데, 상왕은 매일 오셔서 보시었고, 주상은 곁에 모시고서 부채[扇]로 서늘하게 하며 침석을 보시고 친히 탕약(湯藥)을 받들어 무릇 구료하심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7월 10일에 수강궁 별전에서 훙(薨)하시니, 춘추가 56세이시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아래로 복예(僕隷)에 이르기까지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아아, 슬프도다. 상왕이 슬퍼하심을 이기지 못하시어 조금 평안치 못하시니, 주상이 대신을 보내어 육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흰옷과 소찬으로 30일을 지내셨으며, 주상은 애통함이 다할 데 없으시어 양암(樑闇)049) 에 거처하시니, 상왕이 장례 뒤에 복을 벗으라 허하셨다. 주상이 9월 14일에 존호(尊號)를 올려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라 하였다. 대신이 헌의(獻議)하기를, ‘오월(五月)만에 장례하는 것은 예(禮)이나, 송나라 제도에 왕공(王公) 이하는 모두 3월이면 장사하라.’ 하였고, 이제 주상은 오랫동안 양암(樑闇)에 거하시어 〈상왕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니, 마땅히 그 때의 편의에 참작하여 송나라 제도에 따라 하기를 청하였더니, 상왕이 윤허하시어 석달 되던 9월 17일에 광주군(廣州郡) 대모산(大母山)에 안장하시고 능 이름을 헌(獻)이라 한다.
태후(太后)께서 유한 정정(幽閑貞靜)의 덕을 타시어 능히 성상(聖上)의 배필이 되시어 19년 동안 내치(內治)에 전력하셔서 내정이 엄숙하고 화락하였으며, 또 성자(聖子)를 낳으셔서 종사(宗社)의 주인이 되게 하고 영귀한 봉양을 누리게 되시니, 아아, 거룩한 일이다. 태후가 사남(四男)과 사녀(四女)를 낳으셨으니, 우리 주상 전하는 셋째이시다. 맏아들은 이제(李禔)이니, 일찍이 세자(世子)가 되었다가 덕에 삼가하지 못하여 여러 신하들이 세자(世子) 되기가 마땅치 않다 하여, 상왕이 황제에게 알리고 폐하여 양녕 대군에 봉하였고, 다음은 이보(李𥙷)이니, 효령 대군에 봉하고, 다음은 이종(李)이니, 성녕 대군(誠寧大君)에 봉하였으나 먼저 돌아갔다. 맏딸은 정순 궁주(貞順宮主)이니,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하가(下嫁)하였으니, 본이 다른 이씨이다. 다음은 경정 궁주(慶貞宮主)이니,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하가하였고, 다음은 경안 궁주(慶安宮主)이니, 길창군 권규(權跬)에게 하가하였으나, 또 앞서 돌아갔다. 다음은 정선 궁주(貞善宮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하가하였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 심씨(恭妃沈氏)는 문하 시중(門下侍中) 휘(諱) 심덕부(沈德符)의 네째 아들인 온(溫)이 따님이시다. 4남과 2녀를 낳으셨으니 아직 모두 어리다. 양녕은 김한로(金漢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리며, 효령은 호조 판서 정역(鄭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두었는데 다 어리고, 성녕은 경창부 윤(慶昌府尹) 성억(成抑)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고, 정순 궁주는 딸이 동부지돈녕(同副知敦寧) 이계린(李季疄)에게 출가하니, 본이 다른 이씨이다. 1녀를 낳았으나 어리다. 경정 궁주는 4녀를 낳았으니, 큰딸은 유학(幼學) 안진(安進)에게 출가하고, 그 아래로는 아직 어리다. 경안 궁주는 2남을 낳았으니, 권담(權聃)은 사헌부 장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재취하였고, 다음은 어리며, 정선 궁주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고 하였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권홍(權弘)을 시켜 돌[石]에 쓰게 하였다.
원문
○參贊卞季良撰獻陵誌文以進曰:
謹按, 太后閔氏, 驪興世家, 自高麗門下侍郞平章事文景公諱令謨六世, 而至皇高祖諱宗儒, 相毅陵, 位都僉議侍郞贊成事, 諡忠順。 忠順生皇曾祖判密直司事諡文順諱頔, 文順生皇祖大匡驪興君諱抃, 大匡生皇考純忠同德贊化功臣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諡文度諱霽, 皇妣宋氏, 封三韓國大夫人, 高麗重大匡礪良君諱璿之女。 以乙巳丁卯, 生太后于松京 鐵洞私第。
太后生而淑懿, 聰惠異常, 將筓擇配, 來嬪于我聖德神功上王, 少有濟世之志, 留心經史, 不事家産。 太后能給於治家, 謹於主饋, 以勉其功。 敎誨多男, 俾循義方, 禮遇妾侍, 克盡婦道。 洪武壬申, 上王扶太祖開國, 封靜寧翁主。 歲庚辰, 恭靖王以無繼嗣, 封我上王世子, 封太后貞嬪。 其年十一月, 上王受恭靖王內禪卽位, 封靜妃。 永樂癸未四月, 帝遣趙居任, 封我上王爲朝鮮國王。 是年冬十月, 帝賜太后冠袍, 鮮麗罕比。 自是年至丁酉, 累受帝賜凡五。
戊戌八月, 上王禪位于我主上殿下, 殿下卽位, 以其冬十一月甲寅, 奉冊寶獻號, 上王曰聖德神功, 太后曰厚德王大妃。 己亥正月, 帝賜誥印, 封我主上殿下爲國王。 庚子五月二十五日, 太后感疾, 上王日至視疾, 主上侍側扇枕, 親奉湯藥, 凡所救療, 無所不至。 七月十日, 薨于壽康宮別殿, 春秋五十六。 大小臣僚下至僕隷, 莫不痛哭。 嗚呼痛哉!
上王不勝軫悼, 稍不豫, 主上遣大臣請進肉, 不許。 以白衣素膳, 終三十日。 主上哀慟罔極, 居于(樑)〔諒〕 闇, 上王許於葬後釋服。 主上以九月十四日, 上尊號曰元敬王太后。 大臣獻議以爲: "五月而葬, 禮也。 然宋制, 王公以下皆三月而葬。 今主上久居諒闇, 不得問安, 當酌時宜, 以從宋制。" 上王許之。 越三月十七日壬午, 安厝于廣州治之大母山, 陵曰獻。
太后稟幽閑貞靜之德, 克配聖上, 以專內治十九年間, 壼儀肅穆。 又誕聖子, 俾主宗社, 以享榮養。 嗚呼盛哉! 太后誕四男四女, 我主上殿下居三。 長曰禔, 嘗爲世子, 不謹于德, 群臣上言不宜儲副, 上王聞于帝廢之, 封讓寧大君。 次曰𥙷, 封孝寧大君, 次曰 ()
〔〕 , 封誠寧大君, 先卒。 長女貞順宮主, 下嫁淸平府院君 李伯剛, 非一李也。 次慶貞宮主, 下嫁平壤君 趙大臨, 次慶安宮主, 下嫁吉昌君 權跬, 亦先卒。 次貞善宮主, 下嫁宜山君 南暉。
我中宮恭妃 沈氏, 門下侍中諱德符第四子溫之女也。 誕四男二女, 皆幼。 讓寧娶金漢老之女, 生三男一女, 皆幼。 孝寧娶戶曹判書鄭易之女, 生五男一女, 皆幼。 誠寧娶慶昌府尹成抑之女, 無子。 貞順宮主生女, 適同副知敦寧李季疄, 亦非一李, 生一女, 幼。 慶貞宮主生四女, 長適幼學安進, 餘幼。 慶安宮主生二男, 聃改娶司憲掌令鄭淵之女, 次幼。 貞善宮主生一男一女, 幼。
命判敦寧府事權弘書諸石。
원본
세종 2년 (1420) 8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