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48권, 고종 44년 1월 21일 陽曆 4/4 기사 /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이용직이 상소문을 올려 선산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청하다
국역
종1품 이용직(李容稙)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이 지난번 삼가 정2품 서신보(徐臣輔) 등의 소본(疏本)을 보니,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 소호리(蘇湖里)에 있는 신의 선조(先祖)의 영당(影堂) 뒤편 기슭의 오봉(烏峯)을 자기 선조의 옛집 안산(案山)이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명으로 보호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곧이어 또 사패(賜牌)로 말을 맺었습니다. 사패는 중한 바가 다른 일과는 자별하니 상소의 내용을 법부(法部)로 하여금 엄히 조사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라는 비답까지 있었습니다. 신들은 모여앉아 두렵고 황송해서 진작 상소를 올려 무함한 것을 해명하려 하였으나 법정(法庭)에서 조사하고 대질하기 전에 지레 먼저 번거롭게 하는 것은 또한 분의(分義)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묵묵히 참아오면서 스스로 판명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송사 안건이 이미 판결되었으므로 그냥 침묵을 지킬 수가 없어서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호소하니,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살펴주소서.
신의 선조의 영당이 안동 서산(西山)에 모셔져 있은 것은 지금 이미 수백 년이 되며 오봉은 그 하나의 줄기입니다. 그러므로 불을 금하고 묘지를 잡는 것을 금한 것과 15명의 수호군(守護軍)을 둔 군적은 시행해 온 공적인 문적이 아직 새로우며 풀을 베고 땔나무를 하기 위해 3, 4냥씩 거둔 유포(儒布)는 사관(査官)의 보고 내용에 밝혀져 있습니다. 과연 조정에서 사패한 땅이라면 해당 군내(郡內)의 삼척동자도 모두 알 뿐만 아니라 절로 읍지(邑誌)에도 근거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인데 어찌 듣지도 알지도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문적이 설령 그들이 상소한 내용처럼 유실되었더라도 해조(該曹)에 내린 명이 왕부(王府)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니 어찌 상고하여 알아낼 수가 없겠습니까? 이것은 문제를 잘 보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 서씨의 옛집으로 말하면 중간에 타인의 소유로 되었기 때문에 정성 왕후가 그것을 듣고 선조의 태실을 아직도 아끼시어 즉시 값을 주고 되찾아서 군사를 두어 수호하게 한 것입니다. 어찌 옛집을 연줄로 하여 산기슭을 넓게 차지하라는 명이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오봉이 옛집에서 앞으로나 뒤로나 가까이 붙어있는 산이라면 거기에 부속될 이치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큰 도랑이 둘로 나누어 놓아 말이나 바람도 넘나들지 못하므로 경계구역이 자연적으로 생겨 지대가 구별되고 내와 들과 수림이 별처럼 흩어져 있고 바둑판 위에 얹힌 듯합니다. 이수(里數)로 세면 5, 6, 7리 남짓 떨어져 있고 보수(步數)로 재면 1,200여 보나 됩니다. 그러니 옛집에서 멀리 보이는 바깥 산이라 핑계 대며 강제로 차지하려는 것은 이치로 보나 법으로 보나 모두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산 밑에서 사는 서상운(徐相運) 등은 겸영사(兼營使)가 완문(完文)을 내주었고 수호하라는 명을 새로 내었다는 말에 빙자한 것이며 또 사패를 뒤섞어 말하면서 서울에 있는 종족(宗族)을 부추겨 폐하를 속이기까지 하였으니 그 죄상을 따져보건대 무슨 법에 처해야 하겠습니까? 겸영사의 완문 내용을 가지고 논하면 소호 구역 안은 한 치의 땅이라 하더라도 이 집이 차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완문은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니 마땅히 한치의 땅도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의 소유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씨 집 뒷산 한 기슭도 전관(專管)하지 못하고 셋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수호하고 있으니, 이른바 완문이라는 것도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5리 밖의 오봉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명을 받고 수호하는 것과 사패는 명의(名義)가 현격히 달라서 과연 사패와 관련된 것이라면 조정에서 명하고 지방관이 거행하는 것이 원래 규례로 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명을 받고 수호하는 것이라면 또한 도신(道臣)이나 군수에게 통지하여 경계를 정하고 표식을 세우는 것은 반드시 응당 행해야 할 절목에 있는 것인데, 어찌 명을 내렸는데도 한 장의 공적이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들은 명을 받고 수호하는 것이 중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명을 받고 수호하는 것에도 마땅히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이고 사패 또한 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소에서는 갑자기 명을 받고 수호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또 사패가 있는 것이라고도 하면서 온통 뒤섞어 인용하였는데, 폐하께 올리는 글을 어찌 감히 이 모양으로 소홀히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법 맡은 관리는 폐하의 명령을 받고 나가 심판한다면 마땅히 사패가 있는가 없는가를 엄하게 조사하여 바르게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씨가 과연 사패가 없다고 자복하였다면 또 사관을 정하여 지형을 그려오게 하여야 할 것이고, 지형을 그려온 조건에서는 그 멀고 가까운 형편을 따지지 않고 주인 없는 빈 산으로 돌려놓아 신들이 송사에서 지게 만들더라도, 신들의 사정(私情)으로 볼 때 여러 대를 수호해 온 땅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빼앗겨 한스럽기는 하겠지만 큰 의리에는 별로 손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씨의 경우에는 명을 받고 수호하던 땅이 한번 변하여 사패가 있는 땅으로 되고, 두 번 변하여 주인 없는 빈 산이 된 것을 달려가 먼저 차지하는 격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제께 사실이 아닌 것을 보고한 데 대한 율문(律文)은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리고 법관이 송사를 처리하는 핵심을 버리고 한 편을 두둔하는 데 매달린 것은 실로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정사에 들어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신들의 가슴에 가득찬 의혹이며 수긍할 수 없는 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 환히 살펴보고 특별히 처분을 내림으로써 바르게 되도록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법부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겠다."
하였다.
원문
從一品李容稙疏略:
臣等向伏見正二品徐臣輔等疏本, 則慶尙北道 安東郡 蘇湖里臣之先祖影堂後麓烏峯, 爲其先祖舊廬, 案山初以貞聖聖母命護起頭, 旋又以賜牌結語。 至蒙賜牌, 所重與他自別, 疏辭令法部嚴査歸正之批。 臣等聚首悚惶, 旣欲陳章辨誣。 而法庭査質之前, 徑先瀆撓, 又非分義, 故隱忍至此, 以俟自明。 今則訟案已決, 不容泯默, 冒昧仰籲。 惟聖明垂察焉。 臣之先祖影堂, 妥侑於安東西山, 今此數百年, 而烏峯其單龍也。 故禁火、禁葬, 十五名守護軍案行, 使之公蹟尙新, 刈草刈薪, 三四兩徵納儒布, 査官之報辭足徵。 若果朝家賜牌之地, 則非獨該郡一境內, 三尺童子所共知, 自有邑誌之可據, 豈有不聞不知之理乎? 且其文蹟遺失, 設或如其疏辭, 該曹成命, 載在王府, 則豈不可按而知也? 此則不待覶縷而自可立辨矣。 篕此徐氏舊廬, 中間爲他人所有, 故貞聖聖母聞之, 以爲先祖胚胎之室, 猶爲愛惜, 卽令贖還置軍守護者也。 豈有因緣舊廬, 廣占山麓之命乎? 況烏峯於舊廬, 爲或前或後逼近之山, 則或不無附屬之理。 今其鴻溝中分, 馬風不及, 經界區域, 天限而地別, 川野林藪, 星散而碁置。 里數跨於五六七零, 步武至於千二百餘。 則托以舊廬遠眺之外案, 而强欲占有之者, 於理於法, 俱無所據。 故山下居徐相運等, 藉其有兼營使完文, 創出命護之說, 又混稱賜牌, 慫慂其在京宗族, 以至於上瞞天聰, 究厥罪狀, 合置何律哉? 以兼營使完文內辭意論之, 蘇湖局內片土尺地, 無非此堂之次知。 此完文足爲憑據, 則宜無他姓所有之片土尺地。 而徐廬後山一麓, 亦不能專管, 三分爲各姓守護, 則其所謂完文, 亦未可準信。 況五里外烏峯乎? 夫命護與賜牌, 名義懸殊, 而果係賜牌, 則朝家成命, 地方官擧行, 自有其例矣。 若是命護, 則亦當知委於道臣或郡守, 定界立標, 必有應行節目矣。 豈有命下而無一張公蹟之理乎? 臣等非謂命護, 不可藉以爲重。 但命護, 亦當有節次; 賜牌, 亦當有成命。 而今其疏中, 忽稱命護, 忽稱賜牌, 混雜引用, 遊辭籠罩, 奏御文字, 豈敢若是囫圇乎? 且司法之官, 奉旨審判, 則當嚴査其賜牌有無, 以爲歸正。 而徐以果無賜牌自服, 則又使之定査官圖形以來, 圖形旣來, 則不問其遠近形便, 而歸之於無主空山, 置臣等於落科, 在臣等私情, 屢世守護之地, 一朝見奪於他人, 雖爲可憾, 別無有損於大義。 而在徐氏則命護之地, 一變爲賜牌之地, 再變爲無主空山, 有若疾足先得者然。 然則告君不實之律, 將安歸乎? 且法官所以捨置訟理之肯綮, 以袒護一邊爲事者, 實未知其必合於天下之平。 此臣等滿心駭惑而不服者也。 伏乞聖慈俯賜鑑燭, 特下處分, 以爲歸正焉。
批曰: "疏辭, 令法部詳査歸正。"
고종 44년 (1907) 1월 21일
고종실록48권, 고종 44년 1월 21일 陽曆 4/4 기사 /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이용직이 상소문을 올려 선산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청하다
국역
종1품 이용직(李容稙)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이 지난번 삼가 정2품 서신보(徐臣輔) 등의 소본(疏本)을 보니,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 소호리(蘇湖里)에 있는 신의 선조(先祖)의 영당(影堂) 뒤편 기슭의 오봉(烏峯)을 자기 선조의 옛집 안산(案山)이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명으로 보호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곧이어 또 사패(賜牌)로 말을 맺었습니다. 사패는 중한 바가 다른 일과는 자별하니 상소의 내용을 법부(法部)로 하여금 엄히 조사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라는 비답까지 있었습니다. 신들은 모여앉아 두렵고 황송해서 진작 상소를 올려 무함한 것을 해명하려 하였으나 법정(法庭)에서 조사하고 대질하기 전에 지레 먼저 번거롭게 하는 것은 또한 분의(分義)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묵묵히 참아오면서 스스로 판명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송사 안건이 이미 판결되었으므로 그냥 침묵을 지킬 수가 없어서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호소하니,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살펴주소서.
신의 선조의 영당이 안동 서산(西山)에 모셔져 있은 것은 지금 이미 수백 년이 되며 오봉은 그 하나의 줄기입니다. 그러므로 불을 금하고 묘지를 잡는 것을 금한 것과 15명의 수호군(守護軍)을 둔 군적은 시행해 온 공적인 문적이 아직 새로우며 풀을 베고 땔나무를 하기 위해 3, 4냥씩 거둔 유포(儒布)는 사관(査官)의 보고 내용에 밝혀져 있습니다. 과연 조정에서 사패한 땅이라면 해당 군내(郡內)의 삼척동자도 모두 알 뿐만 아니라 절로 읍지(邑誌)에도 근거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인데 어찌 듣지도 알지도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문적이 설령 그들이 상소한 내용처럼 유실되었더라도 해조(該曹)에 내린 명이 왕부(王府)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니 어찌 상고하여 알아낼 수가 없겠습니까? 이것은 문제를 잘 보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 서씨의 옛집으로 말하면 중간에 타인의 소유로 되었기 때문에 정성 왕후가 그것을 듣고 선조의 태실을 아직도 아끼시어 즉시 값을 주고 되찾아서 군사를 두어 수호하게 한 것입니다. 어찌 옛집을 연줄로 하여 산기슭을 넓게 차지하라는 명이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오봉이 옛집에서 앞으로나 뒤로나 가까이 붙어있는 산이라면 거기에 부속될 이치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큰 도랑이 둘로 나누어 놓아 말이나 바람도 넘나들지 못하므로 경계구역이 자연적으로 생겨 지대가 구별되고 내와 들과 수림이 별처럼 흩어져 있고 바둑판 위에 얹힌 듯합니다. 이수(里數)로 세면 5, 6, 7리 남짓 떨어져 있고 보수(步數)로 재면 1,200여 보나 됩니다. 그러니 옛집에서 멀리 보이는 바깥 산이라 핑계 대며 강제로 차지하려는 것은 이치로 보나 법으로 보나 모두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산 밑에서 사는 서상운(徐相運) 등은 겸영사(兼營使)가 완문(完文)을 내주었고 수호하라는 명을 새로 내었다는 말에 빙자한 것이며 또 사패를 뒤섞어 말하면서 서울에 있는 종족(宗族)을 부추겨 폐하를 속이기까지 하였으니 그 죄상을 따져보건대 무슨 법에 처해야 하겠습니까? 겸영사의 완문 내용을 가지고 논하면 소호 구역 안은 한 치의 땅이라 하더라도 이 집이 차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완문은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니 마땅히 한치의 땅도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의 소유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씨 집 뒷산 한 기슭도 전관(專管)하지 못하고 셋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수호하고 있으니, 이른바 완문이라는 것도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5리 밖의 오봉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명을 받고 수호하는 것과 사패는 명의(名義)가 현격히 달라서 과연 사패와 관련된 것이라면 조정에서 명하고 지방관이 거행하는 것이 원래 규례로 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명을 받고 수호하는 것이라면 또한 도신(道臣)이나 군수에게 통지하여 경계를 정하고 표식을 세우는 것은 반드시 응당 행해야 할 절목에 있는 것인데, 어찌 명을 내렸는데도 한 장의 공적이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들은 명을 받고 수호하는 것이 중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명을 받고 수호하는 것에도 마땅히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이고 사패 또한 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소에서는 갑자기 명을 받고 수호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또 사패가 있는 것이라고도 하면서 온통 뒤섞어 인용하였는데, 폐하께 올리는 글을 어찌 감히 이 모양으로 소홀히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법 맡은 관리는 폐하의 명령을 받고 나가 심판한다면 마땅히 사패가 있는가 없는가를 엄하게 조사하여 바르게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씨가 과연 사패가 없다고 자복하였다면 또 사관을 정하여 지형을 그려오게 하여야 할 것이고, 지형을 그려온 조건에서는 그 멀고 가까운 형편을 따지지 않고 주인 없는 빈 산으로 돌려놓아 신들이 송사에서 지게 만들더라도, 신들의 사정(私情)으로 볼 때 여러 대를 수호해 온 땅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빼앗겨 한스럽기는 하겠지만 큰 의리에는 별로 손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씨의 경우에는 명을 받고 수호하던 땅이 한번 변하여 사패가 있는 땅으로 되고, 두 번 변하여 주인 없는 빈 산이 된 것을 달려가 먼저 차지하는 격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제께 사실이 아닌 것을 보고한 데 대한 율문(律文)은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리고 법관이 송사를 처리하는 핵심을 버리고 한 편을 두둔하는 데 매달린 것은 실로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정사에 들어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신들의 가슴에 가득찬 의혹이며 수긍할 수 없는 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 환히 살펴보고 특별히 처분을 내림으로써 바르게 되도록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법부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겠다."
하였다.
원문
從一品李容稙疏略:
臣等向伏見正二品徐臣輔等疏本, 則慶尙北道 安東郡 蘇湖里臣之先祖影堂後麓烏峯, 爲其先祖舊廬, 案山初以貞聖聖母命護起頭, 旋又以賜牌結語。 至蒙賜牌, 所重與他自別, 疏辭令法部嚴査歸正之批。 臣等聚首悚惶, 旣欲陳章辨誣。 而法庭査質之前, 徑先瀆撓, 又非分義, 故隱忍至此, 以俟自明。 今則訟案已決, 不容泯默, 冒昧仰籲。 惟聖明垂察焉。 臣之先祖影堂, 妥侑於安東西山, 今此數百年, 而烏峯其單龍也。 故禁火、禁葬, 十五名守護軍案行, 使之公蹟尙新, 刈草刈薪, 三四兩徵納儒布, 査官之報辭足徵。 若果朝家賜牌之地, 則非獨該郡一境內, 三尺童子所共知, 自有邑誌之可據, 豈有不聞不知之理乎? 且其文蹟遺失, 設或如其疏辭, 該曹成命, 載在王府, 則豈不可按而知也? 此則不待覶縷而自可立辨矣。 篕此徐氏舊廬, 中間爲他人所有, 故貞聖聖母聞之, 以爲先祖胚胎之室, 猶爲愛惜, 卽令贖還置軍守護者也。 豈有因緣舊廬, 廣占山麓之命乎? 況烏峯於舊廬, 爲或前或後逼近之山, 則或不無附屬之理。 今其鴻溝中分, 馬風不及, 經界區域, 天限而地別, 川野林藪, 星散而碁置。 里數跨於五六七零, 步武至於千二百餘。 則托以舊廬遠眺之外案, 而强欲占有之者, 於理於法, 俱無所據。 故山下居徐相運等, 藉其有兼營使完文, 創出命護之說, 又混稱賜牌, 慫慂其在京宗族, 以至於上瞞天聰, 究厥罪狀, 合置何律哉? 以兼營使完文內辭意論之, 蘇湖局內片土尺地, 無非此堂之次知。 此完文足爲憑據, 則宜無他姓所有之片土尺地。 而徐廬後山一麓, 亦不能專管, 三分爲各姓守護, 則其所謂完文, 亦未可準信。 況五里外烏峯乎? 夫命護與賜牌, 名義懸殊, 而果係賜牌, 則朝家成命, 地方官擧行, 自有其例矣。 若是命護, 則亦當知委於道臣或郡守, 定界立標, 必有應行節目矣。 豈有命下而無一張公蹟之理乎? 臣等非謂命護, 不可藉以爲重。 但命護, 亦當有節次; 賜牌, 亦當有成命。 而今其疏中, 忽稱命護, 忽稱賜牌, 混雜引用, 遊辭籠罩, 奏御文字, 豈敢若是囫圇乎? 且司法之官, 奉旨審判, 則當嚴査其賜牌有無, 以爲歸正。 而徐以果無賜牌自服, 則又使之定査官圖形以來, 圖形旣來, 則不問其遠近形便, 而歸之於無主空山, 置臣等於落科, 在臣等私情, 屢世守護之地, 一朝見奪於他人, 雖爲可憾, 別無有損於大義。 而在徐氏則命護之地, 一變爲賜牌之地, 再變爲無主空山, 有若疾足先得者然。 然則告君不實之律, 將安歸乎? 且法官所以捨置訟理之肯綮, 以袒護一邊爲事者, 實未知其必合於天下之平。 此臣等滿心駭惑而不服者也。 伏乞聖慈俯賜鑑燭, 特下處分, 以爲歸正焉。
批曰: "疏辭, 令法部詳査歸正。"
원본
고종 44년 (1907)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