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40권, 고종 37년 4월 20일 陽曆 3/5 기사 / 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영정을 모신 후 윤용선 등에게 함흥과 영흥의 사정에 대해 논의하다
국역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장례원 당상(掌隷院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심순택(沈舜澤)·조병세(趙秉世),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용직(李容稙)이다.】 심순택(沈舜澤)이 문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정(影幀)을 아주 안전하게 받들어 왔고 작헌례(酌獻禮)를 순조롭게 마쳤으니 참으로 경사스럽고 다행스럽다."
하니,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영정을 모시고 출발한 지 3일 동안은 계속 단비가 내리다가 14일 이후로는 날씨가 화창해져 영정을 안전하게 봉안할 수 있었고 신들 일행의 많은 인원도 무사히 다녀왔으니, 모두가 신령의 도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길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으니 백성들의 기뻐하는 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능(陵) 위는 모두 태평하고, 두 본궁(本宮)도 안녕하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들이 명을 받들고 각릉(各陵)과 두 본궁에 나아가 봉심하니 모두 안녕하였습니다. 위판(位版)을 고쳐 쓴 다음에 작헌례도 잘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초(莎草)가 마른 곳이 좀 있었고 비각(碑閣)에 비가 새며 앞에 늘인 휘장의 색깔이 변색하였으므로 전부 수리하도록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였습니다.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택일(擇日)하여 알려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대신과 장례원 당상이 북쪽 능을 봉심한 것은 철종(哲宗) 을묘년(1855)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어서 사체(事體)가 자별한데도 순릉 봉사(純陵奉事) 강홍도(康洪道)는 관원을 파견하였다고 하면서 애당초 대령하지 않았고, 심지어 청명절(淸明節) 제향에도 이유 없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어찌 이와 같은 거리낌 없는 버릇이 있겠습니까? 참봉(參奉)이 혼자서 번(番)을 선 지가 지금 8개월이나 된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의 성명이 민장(民狀)에도 여러 번 올랐으니 그의 행실도 알 만한 것입니다. 조정의 체통으로 보더라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순릉 봉사 강홍도를 우선 면직시키고 그 죄상을 도신으로 하여금 사핵(査覈)한 뒤에 징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이 원산항 경무관(元山港警務官) 유한원(劉漢源)의 사건을 정부(政府)에 전보(電報)한 것에 대해서 이미 면직하기를 아뢰었습니다. 그가 항구에 있으면서 한 일은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죄인 한 명을 붙잡기만 하면 번번이 칙령(勅令)이라고 핑계하여 온 경내를 소요하게 하고 백성들이 뿔뿔이 달아나게 하였으므로 이번의 변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류는 다만 면직시키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법부(法部)로 하여금 조율(照律)하여 징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놀라운 일이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연로(沿路) 각군(各郡)의 도로를 수리할 때에 논밭이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3도(道)의 도신에게 분부하여 숙종(肅宗) 무진년(1688)의 규례에 따라 피해당한 면적과 종자 값을 헤아려서 결호전(結戶錢) 중에서 분급(分給)하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3도의 고을과 백성들이 겪는 폐단에 대해 보고할 만한 것이 많으나 가장 심한 것은 북쪽 도적에 대한 문제로서 해마다 변방의 우환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가끔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놀랍고 참혹한 소문이 도는데,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이 더욱 심합니다. 작년 가을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아직 송환받지 못하였으니, 변경의 형세를 생각하면 매우 우려됩니다. 비록 파견하여 주둔시킨 부대가 있으나 그 수가 백을 넘지 않으니,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대적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북청(北靑)까지의 거리가 400리(里)나 되므로 급한 상황에 부딪쳐 구원을 청한다 해도 걸핏하면 여러 날이 걸리므로 군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적들은 벌써 강을 건너가니, 이것이 이른바 긴 채찍도 말의 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변경의 변란을 엄격히 막고자 한다면 토병(土兵)들을 단결시키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두 고을에 현재 포수들이 만든 계(契)의 인원이 5, 6백 명(名) 이하를 밑돌지 않으니, 주민들이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포상금 비용에 보탠다고 합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도적들의 소요를 겪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주둔시킨 부대를 속히 철수하여 돌아오게 하고 해당 양군(兩軍)에서 각각 300명의 포계(砲契)를 설치하게 다음 우선 신포(身布)를 면제하여 해마다 네 등급으로 나누어 재주 등을 평가하게 하되, 석 달을 기한으로 하여 군(郡)에서 합격자 100명을 뽑아 월급을 3원(元)씩 지급하고 윤번(輪番)으로 지키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원수를 고정시키지 말고 재주를 연마하다가 연말에 가서 각각 우수한 사람 10명씩을 뽑아 위에 보고하거든 지방 부대에서 다시 합시(合試)를 보여 수석(首席) 1명을 뽑아 원수부(元帥府)에 보고하면 위관(尉官)으로 차하(差下)하고 그로 하여금 해당 군의 포사(砲士)들을 거느리게 함으로써 격려하는 뜻을 보이되, 지난날 호위청 시사(扈衛廳試射)에서 우수한 사람들에게 요미(料米)를 주고 몰기(沒技)한 사람은 출신(出身)시키던 규례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고장을 편안히 여겨 있는 힘을 다하고 상(賞)을 기대하면서 무술을 닦게 될 것입니다. 만약 긴급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600명의 포사들이 부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와서 그대로 상비군(常備軍)과 예비군(豫備軍)의 규모가 갖추어질 것이니 변방을 굳건히 지키는 방도로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1년간의 군량을 대략 계산해 보면 7,000여 원(圓)을 넘지 않을 것 같으니 본도(本道)의 역전(驛田)에 대한 도조(賭租) 중에서 그 원납(元納)을 제하고 늘어난 수량만 취해도 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니, 본도 도신으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군사에 관한 일이라 함부로 처리할 수 없어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상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경의 근심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걱정된다. 한창 변방을 지킬 대책을 강구하는 중이었는데,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처분하겠다. 도신도 서계(書啓)하였으니, 경의 말처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준원전(濬源殿)에는 5성씨(姓氏)의 충의(忠義)와 24성씨의 충의가 300여 인(人)이 있는데 일제히 신에게 하소연하여 영정을 모셔올 때 배종(陪從)할 것을 자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반차도(班次圖)에 올라 있지 않았으므로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더니 계속 호소하여 그치질 않았는데 실은로 간절한 정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지금 배종하는 사람이 14인이나 되니 마땅히 조정에서 뜻을 보여주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뜻을 보여주는 거조가 있어야 하겠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분참봉(分參奉)으로 차정(差定)하여 첩문(牒文)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함흥(咸興)의 토관(土官)은 태조(太祖)께서 그곳에 주필(駐蹕)하셨을 때에 창설한 것입니다. 이번에 어진(御眞)을 모셔올 때에 토관들이 일제히 배종할 것을 자원한다고 호소하였는데 충의와 의리상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극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기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준원전의 영(令)과 참봉(參奉)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영정을 모시고 올라왔는데 여러 달 동안에 병이나 사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충의와 토관들을 모두 분참봉으로 차하하여 흥덕전(興德殿)에 윤번으로 숙직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좋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임신년(1872)에 경기전(慶基殿)의 수복(守僕) 중에 글을 좀 아는 사람을 불러 올려다가 의식(儀式)을 배워 익히게 한 전례가 있었는데, 이번에 배종하여 온 수복 중에서 글을 좀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의식을 익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준원전의 제반 의절(儀節)이 매우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예식 순서를 쓴 홀기(笏記)도 없으니, 참으로 황송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보과(官報課)로 하여금 예식(禮式)을 인쇄해서 1책(冊)으로 편성하여 준원전과 북도(北道)의 여러 능침의 수복에게 나누어주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은 죄를 지었는데도 아직 처벌을 받지 않아 더욱 황송하고 위축되어서 시골집에 칩복하고 있은 지 3년이나 되었으니, 어찌 폐하를 한 번 만나보는 것이 큰 소원이 아니었겠습니까마는, 사정이 이와 같아서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내의원(內醫院)의 새로운 직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분수와 도리를 돌아볼 때 또다시 폐하의 명에 태만할 수 없어서 명을 받들고 올라와서 폐하를 우러러 보게 되어 지극한 소원을 이루었으니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논의하고 조치를 취하는 사이에 설사 일시적인 이견(異見)이 있다 해도 어찌 이런 일 때문에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은 능역(陵役)의 일로 엄한 견책을 받기까지 하였고 또 나이가 많아지면서 병이 점차 심해져 인정으로나 병으로나 실로 폐하의 보살핌에 만 분의 일도 보답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능역의 일은 그 책임이 사실 감동(監董)에게 있는 것이고 대신(大臣)에 대해서는 원칙을 차리느라고 그렇게 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을 가지고 혐의쩍게 여길 것은 없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어진의 옥축(玉軸)은 너무 무겁고 초본(綃本)은 너무 넓어서 봉안하는 데 불편할 뿐만 아니라 안전하지 못할 듯하다. 약간 변통하여도 별 문제가 없겠으나 중대한 문제이므로 재상들과 의논하여 정하고자 한다. 지난 임신년에 영희전(永禧殿), 경기전의 어진도 이 문제 때문에 문의한 바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의견이 분분한 것을 면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합치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의견을 묻는 것이니 경들의 의견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냉천정(冷泉亭)에 모신 영조(英祖)의 어진은 아래 위의 축(軸)을 침향목(沈香木)으로 하였고 양 끝에 붉은 칠을 하였으며 초본도 비교적 작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축이 무겁고 초가 넓으면 손상을 입기 쉬우므로 약간 줄여도 사체에 문제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의견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문제는 대신들로 하여금 품정(稟定)하도록 해도 되겠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지금 대신들이 한자리에 앉아 상주하고 있으니, 품정이 없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로에 있는 수령의 치적은 응당 우열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일시에 다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파견된 관원들이 일을 행하는 데서 매우 많은 폐단을 끼친 탓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하였습니다. 신이 도중에서 이틀 동안이나 체류한 것도 하소연하는 백성들이 길을 막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조병세가 아뢰기를,
"함경도(咸鏡道)만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신이 살던 가평(加平)도 파견된 관원과 보부상(褓負商)의 폐단이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하고, 심순택이 아뢰기를,
"청양(靑陽) 등지에는 이른바 파견된 관원들이 없는 면(面)이 거의 없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친 것이 컸다는 것은 일전에 신이 이미 연석에서 아뢰었습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만약 이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죄 없는 백성들만 그 피해를 입게 되며 앞날의 근심을 형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파견된 관원들은 황제의 명령이라 핑계대고 강제로 마구 거두어들이며 못하는 짓이 없이 자기 잇속만 채우니, 어찌 남들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을 돌아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10명, 100명이 떼를 지어 화란을 빚어낼까 두려우니 어찌 심각한 근심거리가 아니겠습니까? 또 보부상이 세력을 믿고 기세를 부려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함부로 감행해도 여러 수령이 막아내지 못합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윤용선이 아뢰기를,
"이번에 신련(神輦)을 배봉할 때에 보부상들이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험한 길과 가파른 비탈길을 모두 보부상들이 메고 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신련을 메고 갈 때에 보부상의 복색(服色)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모두 누런 옷에 누런 두건 차림이었는데 전부 자비로 갖추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도의 여러 군에서는 새 법을 많이 쓰던가 아니면 옛 법을 그대로 따르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새 법과 옛 법 두 가지를 절반씩 섞어서 쓰고 있는데, 백성들은 새 법을 매우 좋아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혁 이후의 새 법은 백성들을 보호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새 법이건 옛 법이건 막론하고 굳게 지키고 힘써 실행해야만 효과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지금 새 법은 유명무실하고 옛 법은 이미 모두 없어졌으므로 공과 사가 모호해지고 모든 일마다 문란해졌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곤궁한 백성들은 호소할 데가 없어서 절반이나 예수교를 믿고 외국인을 의지하니, 어찌 우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나라가 아무리 강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까닭 없이 침략 당하지는 않으며 국내의 정사를 잘 다스린다면 딴 나라의 침략도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나라를 위하여 진념(軫念)하시고 정사에 유념하소서. 독쇄 위원(督刷委員)이 조세를 지나치게 받아들이고 여러 모로 주구(誅求)하고 있는데 만약 이런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민란(民亂)이 일어날까 걱정됩니다. 또 내장원(內藏院)은 과연 어떤 부서입니까? 여러 가지 조세를 맡아 독촉하는 판에 백성들은 그 명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으니 속히 폐지시켜야 할 것입니다. 만약 어찌할 수 없어 그대로 둔다면 또한 적임자를 골라서 임무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도(各道)에 파견된 관원들에 대해서는 이미 내부(內部)로 하여금 훈령(訓令)을 내려 철수하게 하였는데 아직도 많이 있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조정의 명령은 사흘을 못간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형편이 과연 그렇습니다. 신이 듣건대, 의정(議政)이 일찍이 보고한 것이 있는데 거기에 나열한 것은 모두 오늘날의 급선무라고 합니다. 이에 의거하여 조치를 취한다면 실효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받아들이소서. 소인배가 연줄을 놓아 대궐에 드나들면서 몰래 농간질하여 폐해가 적지 않으니 일체 숙청해 주소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전하지 못할 우려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자에 의정은 실제상 권력이 없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나라에서 대광(大匡)을 설치한 것이 어찌 그 지위와 권한을 보국 대부(輔國大夫)의 아래에 두려고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지난날 세도(勢道)가 있는 자는 지위가 보국에 그쳤어도 운운할 것이 있으면 도리어 대광으로 하여금 대신 아뢰어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의정에게 권한 없기가 이와 같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 부(府)와 부(部)의 대신들이 모두 권한이 있어서 각자가 자기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의정에게 권한이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또 내가 들으니, 각국(各國)의 대신들은 총리(總理)를 각별히 존경하고 속관(屬官)들도 대신에 대하여 예를 극진히 갖추어 존경하며, 구미(歐美) 여러 나라에서도 대체로 그러하여 대신이 문서를 점검할 때에는 속관들은 공손히 서서 감히 물러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개혁 이후로 위아래의 등급이 매우 그렇지 못하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분의(分義)로 볼 때 진실로 그러합니다. 폐하께서는 의정을 신임하여 그의 말과 논의를 듣고는 그대로 따라 주고 그 권리를 전적으로 맡겨 성공하기를 요구하소서. 또 신이 듣건대, 미관말직도 폐하의 처분을 받지 못하면 차임(差任)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것이 폐하의 마음을 피로하게 하여 잘 선발하지 못할 것은 뻔합니다. 부세(賦稅)에 대해서도 탁지부(度支部)의 관할 하에 전적으로 넘겨 물자를 조달하게 해야 할 것이니 속히 내장원을 철폐함으로써 나라의 재부(財賦)가 두 갈래로 갈라지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세에는 황실과 국가의 구분이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부와 부에서 각각 권리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서로 침범하지 않으므로 의정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참정(參政) 한 사람으로도 충분한데 의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미 소용이 없다면 폐지하는 것도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어찌 정승의 직책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만약 의정을 그대로 두려고 한다면 전적으로 맡겨 그 직책을 다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의식이나 맡기어 의장과 기물을 다루는데 분주하여 한갓 수고스런 일만 있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품계와 지위가 낮은 감역(監役) 같은 자리도 사람들이 반드시 청환(淸宦)이라고 하면서 모두 귀중히 여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의정이 권위가 없어서 지난날 일개 감역만도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정부에 녹사(錄事)가 2인 있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1인을 더 두어야 하겠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서 올라오자 녹사도 신을 만나보러 왔기에 신이 시험 삼아 물었더니, 백관(百官)들을 호령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길가에서 무례한 자들을 만나도 벌 줄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녹사는 바로 의정부에 소속된 관원인데 신과 같은 사람이 또 어떻게 이런 사람을 쓰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경무청(警務廳)과 법부는 범죄 사건을 심리하는 곳인데 도리어 재물을 늘리는 곳이 되어, 시비가 뒤바뀌고 뇌물 수수가 풍습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끔 이러한 폐습이 있다는 것을 듣고 매우 개탄하였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지방 수령들이 불법을 자행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해 지고 있으니, 도리어 개혁 이전보다도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고 보니 몹시 놀라운 일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들이 서로 왕래하는 것이 그전과는 다릅니다. 만약 정사를 잘못하였다가는 이웃 나라에게 수모를 당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곁에 있는 신하들을 신중히 간택하여 속이는 폐단이 없게 하고, 수령을 잘 뽑아서 모든 백성들의 목숨을 보존하게 하고, 의정에게 전임하여 책임지고 성취하는 방도를 다하게 하며, 정사에 마음을 두어 나라가 귀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외적에 대한 우려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고 나라도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 【원본】 44책 40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52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교통-육운(陸運)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정(軍政) / 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
원문
召見時原任大臣禮堂。 【特進官沈舜澤·趙秉世、議政尹容善、掌禮院卿李容稙】 舜澤問候訖。 上曰: "影幀奉來萬安, 酌獻禮順成, 誠極慶幸也。" 容善曰: "陪發三日, 連冒雨霔, 十四日以後, 天氣晴和, 影幀太平奉安, 而臣等一行多率, 亦無事往返, 莫非皇靈攸曁也。 沿路觀瞻, 可謂人山人海, 而衆情歡抃, 亦可知矣。" 上曰: "諸陵上, 俱爲太平, 兩本宮安寧乎?" 容善曰: "臣等承命, 進詣各陵、兩本宮奉審, 俱爲安寧。 位版改題後, 酌獻禮將事安寧。 而略有莎草枯損處, 碑閣滲漏, 面帳渝色, 一竝修改之意, 分付于道臣矣。 令掌禮院, 擇日知委何如?" 允之。 容善曰: "大臣、禮堂, 北陵奉審, 哲宗乙卯以後初有, 而事體自別, 純陵奉事康洪道, 謂以‘派員, 初不待令, 甚至淸明節享, 無端闕參, 豈有如許無忌憚之習乎? 參奉之獨番, 今爲八朔’云。 況又姓名, 屢登民狀, 其行己亦可知也。 揆以朝體, 不可仍置, 純陵奉事康洪道, 姑先免官, 其罪狀, 令道臣査覈懲辦何如?" 允之。 容善曰: "臣以元山警務官劉漢源事, 電報政府, 旣已奏免。 在港行事, 有駭聽聞。 捉一罪人, 輒稱勅令, 一境騷擾, 衆民渙散至此, 今番之變, 如此之類, 不可但以免官而止。 令法部, 照律懲辦何如?" 上曰: "極爲痛駭, 依爲之。" 容善曰: "沿路各郡道路修治之際, 田畓多傷矣。 分付三道道臣, 依肅宗戊辰已例, 量其被傷長廣、種子價, 以結戶錢中分給, 恐好。 故敢此仰達矣。" 允之。 容善曰: "三道郡弊、民瘼, 多有可奏者, 而最是北匪, 歲爲邊患。 種重有殺越人命、剽掠財産, 聞極驚慘, 而三水、甲山, 尤有甚焉。 昨秋之被擄人口, 尙未刷還, 言念邊情, 萬萬憂悶。 該郡縱有隊兵之派駐者, 數不遇百, 寡難敵衆。 且距北靑, 爲四百里之遠, 臨急請援, 動費多日, 兵未到境, 虜已渡江, 此所謂‘長鞭不及馬腹’也。 苟欲嚴防邊警, 莫如團結土兵。 ‘兩郡現有獵砲設契者, 數不下五六百名, 居民出義捐助, 以補賞費’云。 其積若匪擾, 誠可哀也。 以臣愚見, 隊兵出駐, 亟令撤還, 使該兩郡, 各設三百砲契, 先除身布, 每歲分四等, 考藝等, 限三朔, 郡取百人, 入格者月給三元, 輪番防守。 額無恒定, 技就愈精, 年終各抄其尤十人, 報上地方隊。 更加合試, 取居首一人, 轉報元帥府, 奏差尉官, 使之領率該郡砲士, 以示激礪之意, 如前日扈衛廳試射優等付料沒技出身之例。 則安土而效力; 希賞而鍊武。 脫有緩急, 六百砲士, 不待招而自至, 依然有常備豫備之規, 固團之方, 無長於此。 槪算一年兵餉, 似無踰七千餘圓, 就本道驛賭中, 除其元納, 取其加數, 可足此需。 令本道臣, 量宜磨鍊, 恐好。 而事係軍務, 有難擅便。 敢此仰達, 上裁何如?" 上曰: "邊患如此, 誠極憂歎矣。 方究固圉之策, 卿言如此, 當有處分。 而道臣亦有書啓, 若如卿言, 似好矣。" 容善曰: "濬源殿有五姓忠義、廿四姓忠義三百餘人, 而齊訴于臣, 自願陪從。 以班次圖所未載, 却而不許, 屢訴不已, 實由至誠。 見今陪從者, 爲十四人之多, 宜其有朝家示意, 敢此仰達矣。" 上曰: "當有示意矣, 何以區處則爲好乎?" 容善曰: "分參奉差定, 成牒以給, 則恐好矣。" 仍奏曰: "咸興土官, 卽高皇帝駐蹕時所創設也。 今番御眞奉來時, 土官輩, 齊訴自願陪從, 而與忠義, 義無異同。 至誠可嘉, 故敢此仰達矣。" 允之。 容善曰: "濬源殿令、參奉二人中, 一人陪影幀上來, 而累月之間, 疾病、事故, 未可知。 臣意則忠義土官, 竝分參奉差下, 使之交替, 直宿於興德殿何如?" 上曰: "甚好矣。" 仍敎曰: "壬申年, 有慶基殿守僕中稍解文字者, 招上習熟儀式之例。 今番陪來守僕中, 亦有頗識文字者, 肄習可也。" 容善曰: "臣未詳知, 而濬源殿諸般儀節, 萬不成樣, 亦無笏記, 事甚惶悚矣。" 上曰: "使官報課, 印出禮式, 編成一冊, 濬源殿、北道諸陵寢守僕處, 使之頒給, 似好矣。" 秉世曰: "臣以有罪未勘, 去益惶蹙, 蟄伏鄕廬, 三年于玆, 豈不以一瞻天顔爲大願? 情踪若是, 末由如誠。 意外伏蒙醫院新銜, 顧念分義, 難以再致慢命。 故承諭上來, 復睹耿光, 至願斯畢, 死且無憾矣。" 上曰: "議論、施措之間, 設有一時異同, 豈可以此介意乎?" 秉世曰: "臣以陵役事, 至蒙嚴譴, 且賤齒加增, 癃病漸劇, 以情、以病, 實難副聖眷之萬一矣。" 上曰: "陵役事, 其責實在於監董, 至於大臣, 不過存事體而然, 不必以此爲嫌矣。" 仍敎曰: "御眞玉軸過重, 綃本過廣, 則不但奉安非便, 且恐易致未安。 略加變通, 實無如何, 然事係重大, 欲與大臣議定。 而往在壬申年, 永禧殿、慶基殿本, 亦以此事, 有所問議, 而始也未免有携貳, 終焉衆論合一。 故有此詢議, 卿等之意, 以爲何如? 冷泉亭 英廟御眞上下軸, 以沈香爲之, 而塗朱兩端, 且綃本亦較小矣。" 舜澤曰: "以臣愚見, 軸重、綃廣, 易致受損, 略爲減縮, 無損事體。 然但未知諸大臣意見何如矣。" 上曰: "此事令大臣稟定可乎。" 舜澤曰: "今諸大臣同筵上奏, 則雖無稟定, 似恐無妨矣。" 上曰: "沿路守令治績, 應有優劣矣。" 容善曰: "一時難以驟知。 然派員輩之行事, 爲弊甚多, 民情嗷嗷。 臣於途上, 滯留二日, 亦因訴民庶道而然也。" 秉世曰: "非但咸鏡一道爲然, 以臣所居加平言之, 派員與負商之弊, 亦爲不少矣。" 舜澤曰: "其在靑陽等地, 所謂派員, 幾乎無面不有, 大爲民瘼, 日前臣已爲筵奏矣。" 秉世曰: "若不革罷此輩, 無辜小民, 偏被其害, 來頭隱憂, 有難形容。 派員輩之藉托命令, 勒斂橫徵, 無所不至, 專事肥己, 安顧其他人不得聊生哉? 臣恐十百成群, 釀成禍亂, 豈非深憂乎? 且負商輩怙勢使氣, 多行非法, 列邑守令, 不能禁戢。 言念及此, 又豈非痛駭乎?" 容善曰: "今番神輦陪奉時, 負商多著効勞, 險路、峻坂, 皆用負商擔過矣。" 上曰: "然則神輦擔奉時, 負商服色何如?" 容善曰: "皆著黃衣、黃巾, 而‘俱是自備’云矣。" 上曰: "北道諸郡, 多用新法乎? 抑因襲舊規乎?" 容善曰: "新舊二法, 參半用之, 至於民情, ‘頗喜新法’云矣。" 上曰: "更張以後, 新法保護人民故然也。" 秉世曰: "勿論新舊二法, 確守力施, 方奏成效。 今新法焉, 有名無實; 舊法焉, 掃蕩已盡。 公私鶻突, 事事紊亂, 是可曰國有章程乎? 窮民無告, 半入西敎, 依藉外人, 豈非可念乎? 臣愚以爲國雖未强, 必不無故見侵, 內政若修, 外侮自禦。 伏願聖明爲國家軫念, 留神政治焉。 督刷委員之賦斂過重, 誅求多方, 若此不已, 恐致民擾。 且內藏院, 果何院歟? 管督諸稅, 民不堪命, 當亟廢止。 若其不得已而寘之, 亦宜擇人授任矣。" 上曰: "各道派員, 已使內部發訓撤還, 尙今多有乎?" 秉世曰: "諺云: ‘朝令三日’, 今時事誠然矣。 臣聞‘議政, 曾有奏達, 其所臚列, 無非今日急務。’ 依此施措, 可期實效, 伏願亟賜採納焉。 宵小輩之夤緣出入, 欺蔽竊弄, 爲害不少, 伏願一切肅淸焉。 不然國家將有不保之憂矣。" 上曰: "近日議政, 實無權力矣。" 秉世曰: "國家所以設置大匡, 豈欲其位權, 反出於輔國下哉? 然而往時有世道者, ‘位至輔國而止’, 有所云云, 反使大匡, 轉奏施行, 議政之無權, 有若是焉。 而至于今日, 則殆爲甚矣。" 上曰: "近日府部大臣, 皆有權限, 各自主張, 議政無權, 職此之由。 且朕聞之, ‘各國各大臣, 尊敬總理, 與他有異, 其屬官之尊敬大臣, 備極其禮。 歐美諸國, 大槪亦然。 若大臣點檢文簿, 則屬官拱立, 不敢退’云。 至於我國, 更張以後, 上下等級, 殊甚不然矣。" 秉世曰: "分義固然矣。 願陛下信任議政, 聽其言議而必從焉, 專其權利而責成焉。 且臣聞之, ‘微官末職, 未蒙處分, 則不能差任’云, 其爲疲勞聖慮有失簡擇, 必矣。 至於賦稅, 亦宜專歸度支管理, 以爲支撥。 請亟罷內藏院, 使財賦無分貳焉。" 上曰: "近世則皇室與國家有異, 確有區分矣。 府部各主自由權利, 無相侵越, 不許議政干係矣。" 秉世曰: "以今觀之, 一參政足矣, 安用議政哉? 有旣無用, 則廢之亦可矣。" 上曰: "國家豈無相職乎?" 秉世曰: "如其仍置議政, 固宜專任責成, 務盡其職, 不當只以擧用於典禮, 使趨走物采之間, 徒有勞身之役而已。 在往時如監役之品卑、位下者, 人必指爲淸宦, 皆知貴重, 今則議政之無權威, 殆不若往時之一監役矣。" 上曰: "議政府有錄事二人乎?" 容善曰: "然矣。" 上曰: "不可不增置一人矣。" 秉世曰: "臣自鄕上來, 錄事亦爲來見。 故臣試問之, 則答以‘無號令百官之權, 其在街路, 見有無禮者, 亦無施罰之道’云矣。 且錄事, 是政府屬員, 如臣者, 又安用此哉? 臣聞‘警廳與法部, 以審理刑獄之地, 還爲生財之路, 是非顚倒, 賄賂成習’, 聽聞所及, 安得有如此事乎?" 上曰: "‘往往有此等弊習’云, 聞極慨然。" 秉世曰: "外邑守令, 恣行非法, 日甚一日, 反不如更張以前矣。" 上曰: "聞極痛駭也。" 秉世曰: "今則萬國交通, 有異前日。 若政治不美, 貽羞隣邦, 豈非可畏? 愼簡左右, 使無欺竊之弊, 善擇守宰, 以保元元之命, 專任議政, 俾盡責成之道, 留神政治, 不忘國家之重焉。 然則外慮不足畏, 而國無不治矣。" 上曰: "然矣。"
- 【원본】 44책 40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5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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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40권, 고종 37년 4월 20일 陽曆 3/5 기사 / 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영정을 모신 후 윤용선 등에게 함흥과 영흥의 사정에 대해 논의하다
국역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장례원 당상(掌隷院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심순택(沈舜澤)·조병세(趙秉世),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용직(李容稙)이다.】 심순택(沈舜澤)이 문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정(影幀)을 아주 안전하게 받들어 왔고 작헌례(酌獻禮)를 순조롭게 마쳤으니 참으로 경사스럽고 다행스럽다."
하니,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영정을 모시고 출발한 지 3일 동안은 계속 단비가 내리다가 14일 이후로는 날씨가 화창해져 영정을 안전하게 봉안할 수 있었고 신들 일행의 많은 인원도 무사히 다녀왔으니, 모두가 신령의 도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길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으니 백성들의 기뻐하는 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능(陵) 위는 모두 태평하고, 두 본궁(本宮)도 안녕하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들이 명을 받들고 각릉(各陵)과 두 본궁에 나아가 봉심하니 모두 안녕하였습니다. 위판(位版)을 고쳐 쓴 다음에 작헌례도 잘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초(莎草)가 마른 곳이 좀 있었고 비각(碑閣)에 비가 새며 앞에 늘인 휘장의 색깔이 변색하였으므로 전부 수리하도록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였습니다.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택일(擇日)하여 알려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대신과 장례원 당상이 북쪽 능을 봉심한 것은 철종(哲宗) 을묘년(1855)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어서 사체(事體)가 자별한데도 순릉 봉사(純陵奉事) 강홍도(康洪道)는 관원을 파견하였다고 하면서 애당초 대령하지 않았고, 심지어 청명절(淸明節) 제향에도 이유 없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어찌 이와 같은 거리낌 없는 버릇이 있겠습니까? 참봉(參奉)이 혼자서 번(番)을 선 지가 지금 8개월이나 된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의 성명이 민장(民狀)에도 여러 번 올랐으니 그의 행실도 알 만한 것입니다. 조정의 체통으로 보더라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순릉 봉사 강홍도를 우선 면직시키고 그 죄상을 도신으로 하여금 사핵(査覈)한 뒤에 징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이 원산항 경무관(元山港警務官) 유한원(劉漢源)의 사건을 정부(政府)에 전보(電報)한 것에 대해서 이미 면직하기를 아뢰었습니다. 그가 항구에 있으면서 한 일은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죄인 한 명을 붙잡기만 하면 번번이 칙령(勅令)이라고 핑계하여 온 경내를 소요하게 하고 백성들이 뿔뿔이 달아나게 하였으므로 이번의 변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류는 다만 면직시키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법부(法部)로 하여금 조율(照律)하여 징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놀라운 일이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연로(沿路) 각군(各郡)의 도로를 수리할 때에 논밭이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3도(道)의 도신에게 분부하여 숙종(肅宗) 무진년(1688)의 규례에 따라 피해당한 면적과 종자 값을 헤아려서 결호전(結戶錢) 중에서 분급(分給)하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3도의 고을과 백성들이 겪는 폐단에 대해 보고할 만한 것이 많으나 가장 심한 것은 북쪽 도적에 대한 문제로서 해마다 변방의 우환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가끔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놀랍고 참혹한 소문이 도는데,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이 더욱 심합니다. 작년 가을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아직 송환받지 못하였으니, 변경의 형세를 생각하면 매우 우려됩니다. 비록 파견하여 주둔시킨 부대가 있으나 그 수가 백을 넘지 않으니,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대적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북청(北靑)까지의 거리가 400리(里)나 되므로 급한 상황에 부딪쳐 구원을 청한다 해도 걸핏하면 여러 날이 걸리므로 군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적들은 벌써 강을 건너가니, 이것이 이른바 긴 채찍도 말의 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변경의 변란을 엄격히 막고자 한다면 토병(土兵)들을 단결시키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두 고을에 현재 포수들이 만든 계(契)의 인원이 5, 6백 명(名) 이하를 밑돌지 않으니, 주민들이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포상금 비용에 보탠다고 합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도적들의 소요를 겪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주둔시킨 부대를 속히 철수하여 돌아오게 하고 해당 양군(兩軍)에서 각각 300명의 포계(砲契)를 설치하게 다음 우선 신포(身布)를 면제하여 해마다 네 등급으로 나누어 재주 등을 평가하게 하되, 석 달을 기한으로 하여 군(郡)에서 합격자 100명을 뽑아 월급을 3원(元)씩 지급하고 윤번(輪番)으로 지키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원수를 고정시키지 말고 재주를 연마하다가 연말에 가서 각각 우수한 사람 10명씩을 뽑아 위에 보고하거든 지방 부대에서 다시 합시(合試)를 보여 수석(首席) 1명을 뽑아 원수부(元帥府)에 보고하면 위관(尉官)으로 차하(差下)하고 그로 하여금 해당 군의 포사(砲士)들을 거느리게 함으로써 격려하는 뜻을 보이되, 지난날 호위청 시사(扈衛廳試射)에서 우수한 사람들에게 요미(料米)를 주고 몰기(沒技)한 사람은 출신(出身)시키던 규례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고장을 편안히 여겨 있는 힘을 다하고 상(賞)을 기대하면서 무술을 닦게 될 것입니다. 만약 긴급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600명의 포사들이 부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와서 그대로 상비군(常備軍)과 예비군(豫備軍)의 규모가 갖추어질 것이니 변방을 굳건히 지키는 방도로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1년간의 군량을 대략 계산해 보면 7,000여 원(圓)을 넘지 않을 것 같으니 본도(本道)의 역전(驛田)에 대한 도조(賭租) 중에서 그 원납(元納)을 제하고 늘어난 수량만 취해도 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니, 본도 도신으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군사에 관한 일이라 함부로 처리할 수 없어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상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경의 근심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걱정된다. 한창 변방을 지킬 대책을 강구하는 중이었는데,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처분하겠다. 도신도 서계(書啓)하였으니, 경의 말처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준원전(濬源殿)에는 5성씨(姓氏)의 충의(忠義)와 24성씨의 충의가 300여 인(人)이 있는데 일제히 신에게 하소연하여 영정을 모셔올 때 배종(陪從)할 것을 자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반차도(班次圖)에 올라 있지 않았으므로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더니 계속 호소하여 그치질 않았는데 실은로 간절한 정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지금 배종하는 사람이 14인이나 되니 마땅히 조정에서 뜻을 보여주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뜻을 보여주는 거조가 있어야 하겠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분참봉(分參奉)으로 차정(差定)하여 첩문(牒文)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함흥(咸興)의 토관(土官)은 태조(太祖)께서 그곳에 주필(駐蹕)하셨을 때에 창설한 것입니다. 이번에 어진(御眞)을 모셔올 때에 토관들이 일제히 배종할 것을 자원한다고 호소하였는데 충의와 의리상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극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기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준원전의 영(令)과 참봉(參奉)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영정을 모시고 올라왔는데 여러 달 동안에 병이나 사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충의와 토관들을 모두 분참봉으로 차하하여 흥덕전(興德殿)에 윤번으로 숙직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좋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임신년(1872)에 경기전(慶基殿)의 수복(守僕) 중에 글을 좀 아는 사람을 불러 올려다가 의식(儀式)을 배워 익히게 한 전례가 있었는데, 이번에 배종하여 온 수복 중에서 글을 좀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의식을 익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준원전의 제반 의절(儀節)이 매우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예식 순서를 쓴 홀기(笏記)도 없으니, 참으로 황송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보과(官報課)로 하여금 예식(禮式)을 인쇄해서 1책(冊)으로 편성하여 준원전과 북도(北道)의 여러 능침의 수복에게 나누어주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은 죄를 지었는데도 아직 처벌을 받지 않아 더욱 황송하고 위축되어서 시골집에 칩복하고 있은 지 3년이나 되었으니, 어찌 폐하를 한 번 만나보는 것이 큰 소원이 아니었겠습니까마는, 사정이 이와 같아서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내의원(內醫院)의 새로운 직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분수와 도리를 돌아볼 때 또다시 폐하의 명에 태만할 수 없어서 명을 받들고 올라와서 폐하를 우러러 보게 되어 지극한 소원을 이루었으니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논의하고 조치를 취하는 사이에 설사 일시적인 이견(異見)이 있다 해도 어찌 이런 일 때문에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은 능역(陵役)의 일로 엄한 견책을 받기까지 하였고 또 나이가 많아지면서 병이 점차 심해져 인정으로나 병으로나 실로 폐하의 보살핌에 만 분의 일도 보답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능역의 일은 그 책임이 사실 감동(監董)에게 있는 것이고 대신(大臣)에 대해서는 원칙을 차리느라고 그렇게 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을 가지고 혐의쩍게 여길 것은 없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어진의 옥축(玉軸)은 너무 무겁고 초본(綃本)은 너무 넓어서 봉안하는 데 불편할 뿐만 아니라 안전하지 못할 듯하다. 약간 변통하여도 별 문제가 없겠으나 중대한 문제이므로 재상들과 의논하여 정하고자 한다. 지난 임신년에 영희전(永禧殿), 경기전의 어진도 이 문제 때문에 문의한 바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의견이 분분한 것을 면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합치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의견을 묻는 것이니 경들의 의견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냉천정(冷泉亭)에 모신 영조(英祖)의 어진은 아래 위의 축(軸)을 침향목(沈香木)으로 하였고 양 끝에 붉은 칠을 하였으며 초본도 비교적 작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축이 무겁고 초가 넓으면 손상을 입기 쉬우므로 약간 줄여도 사체에 문제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의견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문제는 대신들로 하여금 품정(稟定)하도록 해도 되겠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지금 대신들이 한자리에 앉아 상주하고 있으니, 품정이 없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로에 있는 수령의 치적은 응당 우열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일시에 다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파견된 관원들이 일을 행하는 데서 매우 많은 폐단을 끼친 탓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하였습니다. 신이 도중에서 이틀 동안이나 체류한 것도 하소연하는 백성들이 길을 막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조병세가 아뢰기를,
"함경도(咸鏡道)만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신이 살던 가평(加平)도 파견된 관원과 보부상(褓負商)의 폐단이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하고, 심순택이 아뢰기를,
"청양(靑陽) 등지에는 이른바 파견된 관원들이 없는 면(面)이 거의 없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친 것이 컸다는 것은 일전에 신이 이미 연석에서 아뢰었습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만약 이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죄 없는 백성들만 그 피해를 입게 되며 앞날의 근심을 형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파견된 관원들은 황제의 명령이라 핑계대고 강제로 마구 거두어들이며 못하는 짓이 없이 자기 잇속만 채우니, 어찌 남들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을 돌아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10명, 100명이 떼를 지어 화란을 빚어낼까 두려우니 어찌 심각한 근심거리가 아니겠습니까? 또 보부상이 세력을 믿고 기세를 부려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함부로 감행해도 여러 수령이 막아내지 못합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윤용선이 아뢰기를,
"이번에 신련(神輦)을 배봉할 때에 보부상들이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험한 길과 가파른 비탈길을 모두 보부상들이 메고 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신련을 메고 갈 때에 보부상의 복색(服色)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모두 누런 옷에 누런 두건 차림이었는데 전부 자비로 갖추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도의 여러 군에서는 새 법을 많이 쓰던가 아니면 옛 법을 그대로 따르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새 법과 옛 법 두 가지를 절반씩 섞어서 쓰고 있는데, 백성들은 새 법을 매우 좋아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혁 이후의 새 법은 백성들을 보호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새 법이건 옛 법이건 막론하고 굳게 지키고 힘써 실행해야만 효과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지금 새 법은 유명무실하고 옛 법은 이미 모두 없어졌으므로 공과 사가 모호해지고 모든 일마다 문란해졌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곤궁한 백성들은 호소할 데가 없어서 절반이나 예수교를 믿고 외국인을 의지하니, 어찌 우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나라가 아무리 강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까닭 없이 침략 당하지는 않으며 국내의 정사를 잘 다스린다면 딴 나라의 침략도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나라를 위하여 진념(軫念)하시고 정사에 유념하소서. 독쇄 위원(督刷委員)이 조세를 지나치게 받아들이고 여러 모로 주구(誅求)하고 있는데 만약 이런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민란(民亂)이 일어날까 걱정됩니다. 또 내장원(內藏院)은 과연 어떤 부서입니까? 여러 가지 조세를 맡아 독촉하는 판에 백성들은 그 명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으니 속히 폐지시켜야 할 것입니다. 만약 어찌할 수 없어 그대로 둔다면 또한 적임자를 골라서 임무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도(各道)에 파견된 관원들에 대해서는 이미 내부(內部)로 하여금 훈령(訓令)을 내려 철수하게 하였는데 아직도 많이 있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조정의 명령은 사흘을 못간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형편이 과연 그렇습니다. 신이 듣건대, 의정(議政)이 일찍이 보고한 것이 있는데 거기에 나열한 것은 모두 오늘날의 급선무라고 합니다. 이에 의거하여 조치를 취한다면 실효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받아들이소서. 소인배가 연줄을 놓아 대궐에 드나들면서 몰래 농간질하여 폐해가 적지 않으니 일체 숙청해 주소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전하지 못할 우려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자에 의정은 실제상 권력이 없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나라에서 대광(大匡)을 설치한 것이 어찌 그 지위와 권한을 보국 대부(輔國大夫)의 아래에 두려고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지난날 세도(勢道)가 있는 자는 지위가 보국에 그쳤어도 운운할 것이 있으면 도리어 대광으로 하여금 대신 아뢰어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의정에게 권한 없기가 이와 같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 부(府)와 부(部)의 대신들이 모두 권한이 있어서 각자가 자기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의정에게 권한이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또 내가 들으니, 각국(各國)의 대신들은 총리(總理)를 각별히 존경하고 속관(屬官)들도 대신에 대하여 예를 극진히 갖추어 존경하며, 구미(歐美) 여러 나라에서도 대체로 그러하여 대신이 문서를 점검할 때에는 속관들은 공손히 서서 감히 물러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개혁 이후로 위아래의 등급이 매우 그렇지 못하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분의(分義)로 볼 때 진실로 그러합니다. 폐하께서는 의정을 신임하여 그의 말과 논의를 듣고는 그대로 따라 주고 그 권리를 전적으로 맡겨 성공하기를 요구하소서. 또 신이 듣건대, 미관말직도 폐하의 처분을 받지 못하면 차임(差任)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것이 폐하의 마음을 피로하게 하여 잘 선발하지 못할 것은 뻔합니다. 부세(賦稅)에 대해서도 탁지부(度支部)의 관할 하에 전적으로 넘겨 물자를 조달하게 해야 할 것이니 속히 내장원을 철폐함으로써 나라의 재부(財賦)가 두 갈래로 갈라지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세에는 황실과 국가의 구분이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부와 부에서 각각 권리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서로 침범하지 않으므로 의정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참정(參政) 한 사람으로도 충분한데 의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미 소용이 없다면 폐지하는 것도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어찌 정승의 직책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만약 의정을 그대로 두려고 한다면 전적으로 맡겨 그 직책을 다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의식이나 맡기어 의장과 기물을 다루는데 분주하여 한갓 수고스런 일만 있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품계와 지위가 낮은 감역(監役) 같은 자리도 사람들이 반드시 청환(淸宦)이라고 하면서 모두 귀중히 여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의정이 권위가 없어서 지난날 일개 감역만도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정부에 녹사(錄事)가 2인 있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1인을 더 두어야 하겠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서 올라오자 녹사도 신을 만나보러 왔기에 신이 시험 삼아 물었더니, 백관(百官)들을 호령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길가에서 무례한 자들을 만나도 벌 줄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녹사는 바로 의정부에 소속된 관원인데 신과 같은 사람이 또 어떻게 이런 사람을 쓰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경무청(警務廳)과 법부는 범죄 사건을 심리하는 곳인데 도리어 재물을 늘리는 곳이 되어, 시비가 뒤바뀌고 뇌물 수수가 풍습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끔 이러한 폐습이 있다는 것을 듣고 매우 개탄하였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지방 수령들이 불법을 자행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해 지고 있으니, 도리어 개혁 이전보다도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고 보니 몹시 놀라운 일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들이 서로 왕래하는 것이 그전과는 다릅니다. 만약 정사를 잘못하였다가는 이웃 나라에게 수모를 당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곁에 있는 신하들을 신중히 간택하여 속이는 폐단이 없게 하고, 수령을 잘 뽑아서 모든 백성들의 목숨을 보존하게 하고, 의정에게 전임하여 책임지고 성취하는 방도를 다하게 하며, 정사에 마음을 두어 나라가 귀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외적에 대한 우려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고 나라도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 【원본】 44책 40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52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교통-육운(陸運)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정(軍政) / 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
원문
召見時原任大臣禮堂。 【特進官沈舜澤·趙秉世、議政尹容善、掌禮院卿李容稙】 舜澤問候訖。 上曰: "影幀奉來萬安, 酌獻禮順成, 誠極慶幸也。" 容善曰: "陪發三日, 連冒雨霔, 十四日以後, 天氣晴和, 影幀太平奉安, 而臣等一行多率, 亦無事往返, 莫非皇靈攸曁也。 沿路觀瞻, 可謂人山人海, 而衆情歡抃, 亦可知矣。" 上曰: "諸陵上, 俱爲太平, 兩本宮安寧乎?" 容善曰: "臣等承命, 進詣各陵、兩本宮奉審, 俱爲安寧。 位版改題後, 酌獻禮將事安寧。 而略有莎草枯損處, 碑閣滲漏, 面帳渝色, 一竝修改之意, 分付于道臣矣。 令掌禮院, 擇日知委何如?" 允之。 容善曰: "大臣、禮堂, 北陵奉審, 哲宗乙卯以後初有, 而事體自別, 純陵奉事康洪道, 謂以‘派員, 初不待令, 甚至淸明節享, 無端闕參, 豈有如許無忌憚之習乎? 參奉之獨番, 今爲八朔’云。 況又姓名, 屢登民狀, 其行己亦可知也。 揆以朝體, 不可仍置, 純陵奉事康洪道, 姑先免官, 其罪狀, 令道臣査覈懲辦何如?" 允之。 容善曰: "臣以元山警務官劉漢源事, 電報政府, 旣已奏免。 在港行事, 有駭聽聞。 捉一罪人, 輒稱勅令, 一境騷擾, 衆民渙散至此, 今番之變, 如此之類, 不可但以免官而止。 令法部, 照律懲辦何如?" 上曰: "極爲痛駭, 依爲之。" 容善曰: "沿路各郡道路修治之際, 田畓多傷矣。 分付三道道臣, 依肅宗戊辰已例, 量其被傷長廣、種子價, 以結戶錢中分給, 恐好。 故敢此仰達矣。" 允之。 容善曰: "三道郡弊、民瘼, 多有可奏者, 而最是北匪, 歲爲邊患。 種重有殺越人命、剽掠財産, 聞極驚慘, 而三水、甲山, 尤有甚焉。 昨秋之被擄人口, 尙未刷還, 言念邊情, 萬萬憂悶。 該郡縱有隊兵之派駐者, 數不遇百, 寡難敵衆。 且距北靑, 爲四百里之遠, 臨急請援, 動費多日, 兵未到境, 虜已渡江, 此所謂‘長鞭不及馬腹’也。 苟欲嚴防邊警, 莫如團結土兵。 ‘兩郡現有獵砲設契者, 數不下五六百名, 居民出義捐助, 以補賞費’云。 其積若匪擾, 誠可哀也。 以臣愚見, 隊兵出駐, 亟令撤還, 使該兩郡, 各設三百砲契, 先除身布, 每歲分四等, 考藝等, 限三朔, 郡取百人, 入格者月給三元, 輪番防守。 額無恒定, 技就愈精, 年終各抄其尤十人, 報上地方隊。 更加合試, 取居首一人, 轉報元帥府, 奏差尉官, 使之領率該郡砲士, 以示激礪之意, 如前日扈衛廳試射優等付料沒技出身之例。 則安土而效力; 希賞而鍊武。 脫有緩急, 六百砲士, 不待招而自至, 依然有常備豫備之規, 固團之方, 無長於此。 槪算一年兵餉, 似無踰七千餘圓, 就本道驛賭中, 除其元納, 取其加數, 可足此需。 令本道臣, 量宜磨鍊, 恐好。 而事係軍務, 有難擅便。 敢此仰達, 上裁何如?" 上曰: "邊患如此, 誠極憂歎矣。 方究固圉之策, 卿言如此, 當有處分。 而道臣亦有書啓, 若如卿言, 似好矣。" 容善曰: "濬源殿有五姓忠義、廿四姓忠義三百餘人, 而齊訴于臣, 自願陪從。 以班次圖所未載, 却而不許, 屢訴不已, 實由至誠。 見今陪從者, 爲十四人之多, 宜其有朝家示意, 敢此仰達矣。" 上曰: "當有示意矣, 何以區處則爲好乎?" 容善曰: "分參奉差定, 成牒以給, 則恐好矣。" 仍奏曰: "咸興土官, 卽高皇帝駐蹕時所創設也。 今番御眞奉來時, 土官輩, 齊訴自願陪從, 而與忠義, 義無異同。 至誠可嘉, 故敢此仰達矣。" 允之。 容善曰: "濬源殿令、參奉二人中, 一人陪影幀上來, 而累月之間, 疾病、事故, 未可知。 臣意則忠義土官, 竝分參奉差下, 使之交替, 直宿於興德殿何如?" 上曰: "甚好矣。" 仍敎曰: "壬申年, 有慶基殿守僕中稍解文字者, 招上習熟儀式之例。 今番陪來守僕中, 亦有頗識文字者, 肄習可也。" 容善曰: "臣未詳知, 而濬源殿諸般儀節, 萬不成樣, 亦無笏記, 事甚惶悚矣。" 上曰: "使官報課, 印出禮式, 編成一冊, 濬源殿、北道諸陵寢守僕處, 使之頒給, 似好矣。" 秉世曰: "臣以有罪未勘, 去益惶蹙, 蟄伏鄕廬, 三年于玆, 豈不以一瞻天顔爲大願? 情踪若是, 末由如誠。 意外伏蒙醫院新銜, 顧念分義, 難以再致慢命。 故承諭上來, 復睹耿光, 至願斯畢, 死且無憾矣。" 上曰: "議論、施措之間, 設有一時異同, 豈可以此介意乎?" 秉世曰: "臣以陵役事, 至蒙嚴譴, 且賤齒加增, 癃病漸劇, 以情、以病, 實難副聖眷之萬一矣。" 上曰: "陵役事, 其責實在於監董, 至於大臣, 不過存事體而然, 不必以此爲嫌矣。" 仍敎曰: "御眞玉軸過重, 綃本過廣, 則不但奉安非便, 且恐易致未安。 略加變通, 實無如何, 然事係重大, 欲與大臣議定。 而往在壬申年, 永禧殿、慶基殿本, 亦以此事, 有所問議, 而始也未免有携貳, 終焉衆論合一。 故有此詢議, 卿等之意, 以爲何如? 冷泉亭 英廟御眞上下軸, 以沈香爲之, 而塗朱兩端, 且綃本亦較小矣。" 舜澤曰: "以臣愚見, 軸重、綃廣, 易致受損, 略爲減縮, 無損事體。 然但未知諸大臣意見何如矣。" 上曰: "此事令大臣稟定可乎。" 舜澤曰: "今諸大臣同筵上奏, 則雖無稟定, 似恐無妨矣。" 上曰: "沿路守令治績, 應有優劣矣。" 容善曰: "一時難以驟知。 然派員輩之行事, 爲弊甚多, 民情嗷嗷。 臣於途上, 滯留二日, 亦因訴民庶道而然也。" 秉世曰: "非但咸鏡一道爲然, 以臣所居加平言之, 派員與負商之弊, 亦爲不少矣。" 舜澤曰: "其在靑陽等地, 所謂派員, 幾乎無面不有, 大爲民瘼, 日前臣已爲筵奏矣。" 秉世曰: "若不革罷此輩, 無辜小民, 偏被其害, 來頭隱憂, 有難形容。 派員輩之藉托命令, 勒斂橫徵, 無所不至, 專事肥己, 安顧其他人不得聊生哉? 臣恐十百成群, 釀成禍亂, 豈非深憂乎? 且負商輩怙勢使氣, 多行非法, 列邑守令, 不能禁戢。 言念及此, 又豈非痛駭乎?" 容善曰: "今番神輦陪奉時, 負商多著効勞, 險路、峻坂, 皆用負商擔過矣。" 上曰: "然則神輦擔奉時, 負商服色何如?" 容善曰: "皆著黃衣、黃巾, 而‘俱是自備’云矣。" 上曰: "北道諸郡, 多用新法乎? 抑因襲舊規乎?" 容善曰: "新舊二法, 參半用之, 至於民情, ‘頗喜新法’云矣。" 上曰: "更張以後, 新法保護人民故然也。" 秉世曰: "勿論新舊二法, 確守力施, 方奏成效。 今新法焉, 有名無實; 舊法焉, 掃蕩已盡。 公私鶻突, 事事紊亂, 是可曰國有章程乎? 窮民無告, 半入西敎, 依藉外人, 豈非可念乎? 臣愚以爲國雖未强, 必不無故見侵, 內政若修, 外侮自禦。 伏願聖明爲國家軫念, 留神政治焉。 督刷委員之賦斂過重, 誅求多方, 若此不已, 恐致民擾。 且內藏院, 果何院歟? 管督諸稅, 民不堪命, 當亟廢止。 若其不得已而寘之, 亦宜擇人授任矣。" 上曰: "各道派員, 已使內部發訓撤還, 尙今多有乎?" 秉世曰: "諺云: ‘朝令三日’, 今時事誠然矣。 臣聞‘議政, 曾有奏達, 其所臚列, 無非今日急務。’ 依此施措, 可期實效, 伏願亟賜採納焉。 宵小輩之夤緣出入, 欺蔽竊弄, 爲害不少, 伏願一切肅淸焉。 不然國家將有不保之憂矣。" 上曰: "近日議政, 實無權力矣。" 秉世曰: "國家所以設置大匡, 豈欲其位權, 反出於輔國下哉? 然而往時有世道者, ‘位至輔國而止’, 有所云云, 反使大匡, 轉奏施行, 議政之無權, 有若是焉。 而至于今日, 則殆爲甚矣。" 上曰: "近日府部大臣, 皆有權限, 各自主張, 議政無權, 職此之由。 且朕聞之, ‘各國各大臣, 尊敬總理, 與他有異, 其屬官之尊敬大臣, 備極其禮。 歐美諸國, 大槪亦然。 若大臣點檢文簿, 則屬官拱立, 不敢退’云。 至於我國, 更張以後, 上下等級, 殊甚不然矣。" 秉世曰: "分義固然矣。 願陛下信任議政, 聽其言議而必從焉, 專其權利而責成焉。 且臣聞之, ‘微官末職, 未蒙處分, 則不能差任’云, 其爲疲勞聖慮有失簡擇, 必矣。 至於賦稅, 亦宜專歸度支管理, 以爲支撥。 請亟罷內藏院, 使財賦無分貳焉。" 上曰: "近世則皇室與國家有異, 確有區分矣。 府部各主自由權利, 無相侵越, 不許議政干係矣。" 秉世曰: "以今觀之, 一參政足矣, 安用議政哉? 有旣無用, 則廢之亦可矣。" 上曰: "國家豈無相職乎?" 秉世曰: "如其仍置議政, 固宜專任責成, 務盡其職, 不當只以擧用於典禮, 使趨走物采之間, 徒有勞身之役而已。 在往時如監役之品卑、位下者, 人必指爲淸宦, 皆知貴重, 今則議政之無權威, 殆不若往時之一監役矣。" 上曰: "議政府有錄事二人乎?" 容善曰: "然矣。" 上曰: "不可不增置一人矣。" 秉世曰: "臣自鄕上來, 錄事亦爲來見。 故臣試問之, 則答以‘無號令百官之權, 其在街路, 見有無禮者, 亦無施罰之道’云矣。 且錄事, 是政府屬員, 如臣者, 又安用此哉? 臣聞‘警廳與法部, 以審理刑獄之地, 還爲生財之路, 是非顚倒, 賄賂成習’, 聽聞所及, 安得有如此事乎?" 上曰: "‘往往有此等弊習’云, 聞極慨然。" 秉世曰: "外邑守令, 恣行非法, 日甚一日, 反不如更張以前矣。" 上曰: "聞極痛駭也。" 秉世曰: "今則萬國交通, 有異前日。 若政治不美, 貽羞隣邦, 豈非可畏? 愼簡左右, 使無欺竊之弊, 善擇守宰, 以保元元之命, 專任議政, 俾盡責成之道, 留神政治, 不忘國家之重焉。 然則外慮不足畏, 而國無不治矣。" 上曰: "然矣。"
- 【원본】 44책 40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52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교통-육운(陸運)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정(軍政) / 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