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3권, 고종 3년 7월 12일 戊辰 4/4 기사 / 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경상 좌도의 조창의 운반선이 침몰된 것과 관련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하다
국역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경상좌도(慶尙左道) 조창(漕倉)의 조선(漕船)이 표류하다가 홍주(洪州) 원산진(元山鎭)의 효자도(孝子島)에 이르러 침몰하였는데, 배에 실은 쌀 1,067석(石) 5두(斗)는 수량에 맞게 내렸으며, 그 수량은 대조 인장(印章)이 찍힌 문서와 별로 어긋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밤을 무릅쓰고 경솔하게 나간 것은 이미 경계하고 조심하는 행동이 아니었으며, 배가 암초에 걸리자 각자 자기 살 궁리만 하였으니, 만약 간사한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색리(色吏)와 사격(沙格)들에 대하여 다시 엄격히 조사하고 해당 율(律)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운 차사원(領運差使員)인 구산 첨사(龜山僉使) 장원태(張元泰), 원산 별장(元山別將) 서영수(徐榮修), 서천포 만호(舒川浦萬戶) 최두익(崔斗益)에 대해서는 엄하게 과치(科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원문
고종실록3권, 고종 3년 7월 12일 戊辰 4/4 기사 / 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경상 좌도의 조창의 운반선이 침몰된 것과 관련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하다
국역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경상좌도(慶尙左道) 조창(漕倉)의 조선(漕船)이 표류하다가 홍주(洪州) 원산진(元山鎭)의 효자도(孝子島)에 이르러 침몰하였는데, 배에 실은 쌀 1,067석(石) 5두(斗)는 수량에 맞게 내렸으며, 그 수량은 대조 인장(印章)이 찍힌 문서와 별로 어긋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밤을 무릅쓰고 경솔하게 나간 것은 이미 경계하고 조심하는 행동이 아니었으며, 배가 암초에 걸리자 각자 자기 살 궁리만 하였으니, 만약 간사한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색리(色吏)와 사격(沙格)들에 대하여 다시 엄격히 조사하고 해당 율(律)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운 차사원(領運差使員)인 구산 첨사(龜山僉使) 장원태(張元泰), 원산 별장(元山別將) 서영수(徐榮修), 서천포 만호(舒川浦萬戶) 최두익(崔斗益)에 대해서는 엄하게 과치(科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