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48권, 정조 22년 4월 19일 癸丑 1/4 기사 / 1798년 청 가경(嘉慶) 3년
소나무 충해의 제거를 명하고, 노공(奴貢)의 폐단과 본인이 찬술한 서적에 대해 언급하다
국역
차대가 있었다. 상이 제신에게 하유하기를,
"이번 비는 삼농(三農)093) 에 아주 좋은 비이다. 요즘 벌레를 주워내는 일로 동네 사람들에게 혹 하루씩 울력을 잡히게 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대체로 백성을 위 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 중의 한 가지이다. 《시경》에는 이르기를 "벼메뚜기 제거하고 못된 벌레 불살라주오.[去其螟螣秉卑炎火]" 하였고094) , 당 태종(唐太宗) 같은 이는 삼대(三代) 이후에 영주(英主)라 이를 만한 분으로서 황충(蝗虫)을 삼킨 일까지 있었는데,095) 그 후 요숭(姚崇)이 재상이 되었을 때에는 황충을 주워내서 혹 불태우기도 하고 땅에 묻기도 하여 그 해를 제거하였으므로, 후인들이 또한 그 사업을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소나무의 충해(蟲害)는 비록 농작물의 충해와는 차이가 있으나 백성들에게 대단히 관계됨이 있기는 한가지이다. 소나무가 말라 손상되면 산이 뻘겋게 민둥산이 되어, 백성들이 날로 쓰는 땔나무는 우선 차치하고라도 산의 흙이 자꾸 흘러내리어 좋은 묏자리가 메워져버려서 사람의 기품(氣品)에도 해로움이 많을 것이니, 부득이 곳에 따라 주워내도록 해야겠다. 그러나 만일 이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민폐가 있게 된다면 이는 곧 사람 기르는 자가 사람을 해치는 꼴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실로 내가 다소 마음을 쓰는 곳이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일찍이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는데, 이제 성상의 자상하신 하교를 받들고 보니, 실로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시려는 덕의(德意)를 우러러 느꼈습니다. 비록 초목은 앎이 없다고 하지만, 초목 가운데서도 소나무는 백성에게 대단히 유익한 것이니, 설사 사소한 민폐가 있다 할지라도 어찌 그것을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벌레를 주워서 묻는다고 하니, 날마다 주워 묻는 숫자가 그 얼마이겠는가. 이것이 비록 미물 중의 미물이긴 하지만, 나는 여기에 대해서 생물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나 또한 좋은 도리가 없다. 옛날 홍수를 다스리던 시대에 익(益)은 산택(山澤)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고, 우(禹)임금은 사룡(蛇龍)들을 늪으로 몰아 내쳤으니, 익이 산택에 불지른 것은 아마도 우임금이 미물들을 죽이지 않고 내치기만 한 것보다는 못한 듯하다. 천 년 이후에서도 오히려 익이 우임금에 미치지 못한 것을 상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감히 여기에 의논을 가할 수는 없으나, 그곳이 산택이기 때문에 불태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아마도 처지가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북도(北道)의 노공(奴貢)은 조정에서 긴히 쓸 데도 없는데, 한 사람당 공납하는 것이 30냥을 넘고 있으니 어찌 이와 같은 공납이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특별히 4등 중에서 물량이 너무 많은 동등(冬等) 하나를 견면한 것이다. 그리고 곤포암(昆布巖)은 본궁(本宮)에 응당 소속되는 것인데, 중간에 이를 북병영(北兵營)에 빼앗기고 두 척의 배로 거둔 것만을 관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곤포암을 남북으로 나누어 정하여 남쪽은 궁속(宮屬)에 소속시키고, 북쪽은 해당 병영에 소속시키고 보니, 해당 병영에서는 전에 비해 영원히 절반만 얻게 되고 궁속들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거두게 되었다. 그런데 또 들으니, 궁속들이 거둔 것이 동등(冬等) 하나 견면받은 물량을 충분히 맞먹고도 남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근래 폐단을 바로잡은 가운데서 관민(官民)간에 모두 병폐는 없고 이익만 있게 된 것이 이번 북도의 해부(海夫)들에게 공물 견면해준 일만한 것이 없는지라, 내 마음이 만족하여 나 같이 잠 잘 못자는 사람도 밤이면 조금 잠을 이루게 되었다. 내 마음이 이러한데 더구나 해부들의 마음이야 어떻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머리를 조아리며 잘하신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에게 조정에 나올 기약을 물으니, 김이소는 정세가 미안하다는 이유로 즉시 소명에 따르지 못했는데, 사관이 이에 대하여 회주(回奏)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고 재상 김수항(金壽恒)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가려고 할 적에 선정 송시열(宋時烈)이 그에게 ‘선생(先生)의 묘토(墓土)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다.’096) 는 말로 편지를 보낸 일이 있기는 하나, 그때에 반드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단서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만일 정도와 권도의 의리를 참작한 것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듯하다. 더구나 김수항의 자손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분의 후손으로서 조상이 먼저 이미 갔던 곳을 가지 않는다면 의리로 헤아려볼 때 장차 무슨 말로 변명하겠는가. 영돈녕부사의 일은 잘못되었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고 상신 김창집(金昌集)도 일찍이 사신으로 연경에 가게 되었을 때 동료 재상인 이여(李畬)가 ‘만일 다른 사람 중에 갈 만한 자가 있으면 굳이 갈 것이 없겠다.’고 말하였으니, 고금을 막론하고 이 논의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의 정도와 권도는 절로 각각 타당처가 있기 때문에 옛사람도 일찍이 이 문제로 가는 길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에 대하여 원통함을 품고 아픔을 참는 마음으로 말하자면 온 나라 사람이 다 같은 심정입니다. 어찌 유독 충량가의 후손들만 그러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공자가 일찍이 이르기를 ‘옛것을 전술하기만 하고 창작은 하지 않았다.[述而不作]’ 하였는데, 나의 평생 공부는 1부(部)의 주서(朱書)에 있다. 내 나이 20세 때에 《주서회선(朱書會選)》을 편집하고 또 춘방(春坊)·계방(桂坊)과 협력하여 주해(註解)를 초정(抄定)하였고, 또 《어류(語類)》에 구두점을 찍었다. 30세 때에는 《주자회통(朱子會統)》을 편집하고, 또 고 유신(儒臣) 한억증(韓億增)이 편집한 주서(朱書)를 정정(証定)하였으며, 또 《자양회영(紫陽會英)》 및 《주서각체(朱書各體)》를 편집하였다. 40세 이후에는 주서를 두루 열람한 것이 많은 가운데 근년에 또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편집하였고, 작년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주자전서(朱子全書)》 및 《대전(大全)》·《어류》를 가져다가 구어(句語)를 절략(節略)하여 또 한 책을 만들어서 《주자서절약(朱子書節約)》이라 명명하였다. 요즘에는 또 《주자대전》 및 《어류》와 그 밖의 주 부자(朱夫子)의 손에서 나온 편언 척자(片言隻字)까지를 한데 집대성하여 일부의 전서(全書)로 편집하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편집이 다 이루어지면 장차 주합루(宙合樓) 곁에 방 하나를 별도로 마련하여 주 부자의 진상(眞像)을 봉안하고, 아울러 그 안에다 전서의 판본(板本)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주 부자에게 실로 사사(師事)하는 정성이 있으므로 이와 같이 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는 곧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칙으로서 그 글됨이 참으로 진선진미하여, 내가 일생 동안 좋아한 것이 바로 이 글에 있었다. 20년 전에 이 책을 손수 베끼었는데, 요즘에 또 다시 읽으면서 다시 베끼어 서산(西山)097) 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합해서 내용을 가려 뽑고, 또 《대학》의 경문(經文)·전문(傳文)과 주자의 장구(章句)를 각단(各段)의 첫머리에 기재해서 초계 문신들로 하여금 정서(淨書)하도록 하였으며, 또 호남의 유생들로 하여금 《대학》 1본(本)을 교정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모두 나의 요즘 공부하는 대략인데, 요는 나의 심신에 유익함을 위해서일 뿐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8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재정-역(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상-유학(儒學) / 출판-서책(書冊) / 농업-농작(農作) / 농업-임업(林業) / 신분-천인(賤人) /
- [註 093] 삼농(三農) : 평지농(平地農)·산농(山農)·택농(澤農)을 합칭한 말이다.
- [註 094] "벼메뚜기 제거하고 못된 벌레 불살라주오.[去其螟螣秉卑炎火]" 하였고 : 이 시는 《시경(詩經)》 대아(小雅) 대전(大田)에 나타나 있다.
- [註 095] 당 태종(唐太宗) 같은 이는 삼대(三代) 이후에 영주(英主)라 이를 만한 분으로서 황충(蝗虫)을 삼킨 일까지 있었는데, : 당 태종 정관(貞觀) 2년에 경사(京師)에 가뭄이 들어 황충(蝗虫)이 크게 번지자, 태종이 친히 논에 가서 황충 두어 마리를 잡아가지고 빌기를 "사람은 곡식을 생명으로 삼는데 네가 그 곡식을 먹어버리니, 이는 백성을 해친 것이다. 백성의 과실은 나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니, 네가 진정 영험이 있다면 내 심장만 갉아먹고 백성은 해치지 말거라." 하고는, 그 황충을 삼켜버렸는데, 그 후로는 다시 황충의 재해가 없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정관정요(貞觀政要)》 무농(務農).
- [註 096] ‘선생(先生)의 묘토(墓土)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다.’ : 선생은 곧 김수항(金壽恒)의 할아버지로서 당시 배청파(排淸派)의 영수이기도 했던 김상헌(金尙憲)을 가리키는데, 즉 송시열(宋時烈)이 김수항은 김상헌의 손자로서 자기 조부가 작고한 지 얼마되지도 않아 사신 일행으로 청나라에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이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 [註 097] 서산(西山) : 송나라 진덕수(眞德秀)의 호.
원문
○癸丑/次對。 上諭諸臣曰: "今雨爲三農之幸。 而近以拾蟲事, 坊民或有一日之役, 此蓋爲民除害之一事也。 《詩》言: ‘去其螟螣, 秉昇炎火。’ 如唐之太宗, 可謂三代後英主, 而至有呑蝗之事, 其後姚崇之爲相也, 拾其蟲蝗, 或燒或埋, 以除其害, 後人亦稱其事業。 今此松木之蟲損, 與稼穡之蟊害, 雖有間隔, 而其爲大有關於生民則一也。 松樹枯損, 則山土童濯, 生民日用薪柱, 姑置之, 山土流下, 明堂塡塞, 人之氣品亦多有妨, 不得已使隨處拾之。 若因此而有一臺民弊, 則殆同養人者害人, 此實予多少用心處也。" 右議政李秉模曰: "臣愚見, 未曾慮及於此, 今承縷縷聖敎, 實仰爲生民除害之德意也。 雖云草木無知, 而松於草木中, 有益於生民大矣哉, 則設有些小民弊, 亦何足恤乎?" 上曰: "聞拾而埋云, 逐日拾埋爲幾何? 則此雖微物之微, 而予於此不無斟量之思。 亦無好道理矣。 古昔治水之世, 益烈山澤而焚之, 禹驅蛇龍而放之, 菹益之焚之, 恐有讓於禹之不傷物而放之而已。 千載之下, 尙想禹與益未相及之處耶?" 秉模曰: "臣之愚見, 不敢議到於此, 而以其山澤也, 故不得不焚之, 恐其所處之地異然矣。" 上, 謂右議政李秉模曰: "北道奴貢, 在朝家無緊用, 而一夫所納, 過於三十兩, 豈有如此之貢乎? 特蠲四等中猥多之冬一等。 昆布巖, 本宮應屬者, 而中間見奪於北兵營, 只管二隻船所收云。 今於昆布巖, 定以南北, 南屬宮屬, 北屬該閫, 則該閫比前永得一半, 宮屬視今優收。 而且聞所收足當一等捧貢沾漑之需而有餘矣。 近來釐弊中無弊, 而有益於公與私, 未有若今番北道海夫蠲貢事, 子心充然, 以子罕睡之伎倆, 夜稍得眠矣。 子心如此, 況海夫之心乎?" 秉模頓首稱善。 上, 遣史官問領敦寧金履素造朝之期, 履赤以情地難安, 未卽趨命, 回奏, 上曰: "故相金均恒, 以書狀赴燕也, 先正宋時烈, 以 ‘先生墓土未乾’ 之說, 雖有抵書之事, 而其時必有不得不入去之端而然。 如無參量經權之義, 則似無是也。 況故相之子與孫乎? 在後孫, 不赴其先己赴之地, 揆諸義理, 將何辭乎? 領敦寧事過矣。" 右議政李秉模曰: "故相臣金昌集, 嘗有燕使之行, 僚相李畬以爲, ‘如有他人可赴者, 則不必赴云’, 古今不可無此議論。 而事之經權, 自有稱當處, 故古之人, 亦未嘗以此而行或尼之矣。 若言含冤忍痛之心, 則一國之人同然。 豈獨忠良之裔而然哉?" 上謂筵臣曰: "夫子嘗曰, ‘述而不作’, 予之平生工夫, 在於一部《朱書》。 予年二十時, 輯《朱書會選》, 又與春、桂坊, 抄定註解,又點寫句讀於《語類》。 三十時, 編《朱子會統》, 又証定故儒臣韓億增所編《朱書》, 又編《紫陽會英》及《朱書各體》。 四十後(編)〔徧〕 閱《朱書》者多, 而近年又輯《朱書百選》, 而昨年夏秋, 取《朱子全書》及《大全》、《語類》, 節略句語, 又成一書, 名曰《朱子書節約》。 近又留意於《朱子大全》及《語類》, 與其外片言隻字之出於夫子之手者, 欲爲集大成, 編爲一部全書。 待其編成, 將別搆一室于宙合樓傍奉安朱子眞像, 竝蔵全書板本於其中。 予於朱夫子, 實有師事之誠, 所以欲如是也。 且《大學衍義補》, 卽治國之大經大法, 其爲書也誠爲盡美, 予之一生嗜好在此書。 二十年前, 手抄此書, 近又更讀更抄, 與西山 《衍義》合選, 又以《大學》經文傳文, 朱子章句, 載之各叚之首, 使抄啓文臣等繕寫, 又令湖南儒生, 校錄一本。 此皆予近日工夫之大略, 而要之則只爲心神之有益也。"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8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재정-역(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상-유학(儒學) / 출판-서책(書冊) / 농업-농작(農作) / 농업-임업(林業) / 신분-천인(賤人) /
정조실록48권, 정조 22년 4월 19일 癸丑 1/4 기사 / 1798년 청 가경(嘉慶) 3년
소나무 충해의 제거를 명하고, 노공(奴貢)의 폐단과 본인이 찬술한 서적에 대해 언급하다
국역
차대가 있었다. 상이 제신에게 하유하기를,
"이번 비는 삼농(三農)093) 에 아주 좋은 비이다. 요즘 벌레를 주워내는 일로 동네 사람들에게 혹 하루씩 울력을 잡히게 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대체로 백성을 위 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 중의 한 가지이다. 《시경》에는 이르기를 "벼메뚜기 제거하고 못된 벌레 불살라주오.[去其螟螣秉卑炎火]" 하였고094) , 당 태종(唐太宗) 같은 이는 삼대(三代) 이후에 영주(英主)라 이를 만한 분으로서 황충(蝗虫)을 삼킨 일까지 있었는데,095) 그 후 요숭(姚崇)이 재상이 되었을 때에는 황충을 주워내서 혹 불태우기도 하고 땅에 묻기도 하여 그 해를 제거하였으므로, 후인들이 또한 그 사업을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소나무의 충해(蟲害)는 비록 농작물의 충해와는 차이가 있으나 백성들에게 대단히 관계됨이 있기는 한가지이다. 소나무가 말라 손상되면 산이 뻘겋게 민둥산이 되어, 백성들이 날로 쓰는 땔나무는 우선 차치하고라도 산의 흙이 자꾸 흘러내리어 좋은 묏자리가 메워져버려서 사람의 기품(氣品)에도 해로움이 많을 것이니, 부득이 곳에 따라 주워내도록 해야겠다. 그러나 만일 이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민폐가 있게 된다면 이는 곧 사람 기르는 자가 사람을 해치는 꼴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실로 내가 다소 마음을 쓰는 곳이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일찍이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는데, 이제 성상의 자상하신 하교를 받들고 보니, 실로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시려는 덕의(德意)를 우러러 느꼈습니다. 비록 초목은 앎이 없다고 하지만, 초목 가운데서도 소나무는 백성에게 대단히 유익한 것이니, 설사 사소한 민폐가 있다 할지라도 어찌 그것을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벌레를 주워서 묻는다고 하니, 날마다 주워 묻는 숫자가 그 얼마이겠는가. 이것이 비록 미물 중의 미물이긴 하지만, 나는 여기에 대해서 생물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나 또한 좋은 도리가 없다. 옛날 홍수를 다스리던 시대에 익(益)은 산택(山澤)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고, 우(禹)임금은 사룡(蛇龍)들을 늪으로 몰아 내쳤으니, 익이 산택에 불지른 것은 아마도 우임금이 미물들을 죽이지 않고 내치기만 한 것보다는 못한 듯하다. 천 년 이후에서도 오히려 익이 우임금에 미치지 못한 것을 상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감히 여기에 의논을 가할 수는 없으나, 그곳이 산택이기 때문에 불태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아마도 처지가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북도(北道)의 노공(奴貢)은 조정에서 긴히 쓸 데도 없는데, 한 사람당 공납하는 것이 30냥을 넘고 있으니 어찌 이와 같은 공납이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특별히 4등 중에서 물량이 너무 많은 동등(冬等) 하나를 견면한 것이다. 그리고 곤포암(昆布巖)은 본궁(本宮)에 응당 소속되는 것인데, 중간에 이를 북병영(北兵營)에 빼앗기고 두 척의 배로 거둔 것만을 관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곤포암을 남북으로 나누어 정하여 남쪽은 궁속(宮屬)에 소속시키고, 북쪽은 해당 병영에 소속시키고 보니, 해당 병영에서는 전에 비해 영원히 절반만 얻게 되고 궁속들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거두게 되었다. 그런데 또 들으니, 궁속들이 거둔 것이 동등(冬等) 하나 견면받은 물량을 충분히 맞먹고도 남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근래 폐단을 바로잡은 가운데서 관민(官民)간에 모두 병폐는 없고 이익만 있게 된 것이 이번 북도의 해부(海夫)들에게 공물 견면해준 일만한 것이 없는지라, 내 마음이 만족하여 나 같이 잠 잘 못자는 사람도 밤이면 조금 잠을 이루게 되었다. 내 마음이 이러한데 더구나 해부들의 마음이야 어떻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머리를 조아리며 잘하신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에게 조정에 나올 기약을 물으니, 김이소는 정세가 미안하다는 이유로 즉시 소명에 따르지 못했는데, 사관이 이에 대하여 회주(回奏)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고 재상 김수항(金壽恒)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가려고 할 적에 선정 송시열(宋時烈)이 그에게 ‘선생(先生)의 묘토(墓土)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다.’096) 는 말로 편지를 보낸 일이 있기는 하나, 그때에 반드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단서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만일 정도와 권도의 의리를 참작한 것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듯하다. 더구나 김수항의 자손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분의 후손으로서 조상이 먼저 이미 갔던 곳을 가지 않는다면 의리로 헤아려볼 때 장차 무슨 말로 변명하겠는가. 영돈녕부사의 일은 잘못되었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고 상신 김창집(金昌集)도 일찍이 사신으로 연경에 가게 되었을 때 동료 재상인 이여(李畬)가 ‘만일 다른 사람 중에 갈 만한 자가 있으면 굳이 갈 것이 없겠다.’고 말하였으니, 고금을 막론하고 이 논의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의 정도와 권도는 절로 각각 타당처가 있기 때문에 옛사람도 일찍이 이 문제로 가는 길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에 대하여 원통함을 품고 아픔을 참는 마음으로 말하자면 온 나라 사람이 다 같은 심정입니다. 어찌 유독 충량가의 후손들만 그러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공자가 일찍이 이르기를 ‘옛것을 전술하기만 하고 창작은 하지 않았다.[述而不作]’ 하였는데, 나의 평생 공부는 1부(部)의 주서(朱書)에 있다. 내 나이 20세 때에 《주서회선(朱書會選)》을 편집하고 또 춘방(春坊)·계방(桂坊)과 협력하여 주해(註解)를 초정(抄定)하였고, 또 《어류(語類)》에 구두점을 찍었다. 30세 때에는 《주자회통(朱子會統)》을 편집하고, 또 고 유신(儒臣) 한억증(韓億增)이 편집한 주서(朱書)를 정정(証定)하였으며, 또 《자양회영(紫陽會英)》 및 《주서각체(朱書各體)》를 편집하였다. 40세 이후에는 주서를 두루 열람한 것이 많은 가운데 근년에 또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편집하였고, 작년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주자전서(朱子全書)》 및 《대전(大全)》·《어류》를 가져다가 구어(句語)를 절략(節略)하여 또 한 책을 만들어서 《주자서절약(朱子書節約)》이라 명명하였다. 요즘에는 또 《주자대전》 및 《어류》와 그 밖의 주 부자(朱夫子)의 손에서 나온 편언 척자(片言隻字)까지를 한데 집대성하여 일부의 전서(全書)로 편집하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편집이 다 이루어지면 장차 주합루(宙合樓) 곁에 방 하나를 별도로 마련하여 주 부자의 진상(眞像)을 봉안하고, 아울러 그 안에다 전서의 판본(板本)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주 부자에게 실로 사사(師事)하는 정성이 있으므로 이와 같이 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는 곧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칙으로서 그 글됨이 참으로 진선진미하여, 내가 일생 동안 좋아한 것이 바로 이 글에 있었다. 20년 전에 이 책을 손수 베끼었는데, 요즘에 또 다시 읽으면서 다시 베끼어 서산(西山)097) 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합해서 내용을 가려 뽑고, 또 《대학》의 경문(經文)·전문(傳文)과 주자의 장구(章句)를 각단(各段)의 첫머리에 기재해서 초계 문신들로 하여금 정서(淨書)하도록 하였으며, 또 호남의 유생들로 하여금 《대학》 1본(本)을 교정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모두 나의 요즘 공부하는 대략인데, 요는 나의 심신에 유익함을 위해서일 뿐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8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재정-역(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상-유학(儒學) / 출판-서책(書冊) / 농업-농작(農作) / 농업-임업(林業) / 신분-천인(賤人) /
- [註 093] 삼농(三農) : 평지농(平地農)·산농(山農)·택농(澤農)을 합칭한 말이다.
- [註 094] "벼메뚜기 제거하고 못된 벌레 불살라주오.[去其螟螣秉卑炎火]" 하였고 : 이 시는 《시경(詩經)》 대아(小雅) 대전(大田)에 나타나 있다.
- [註 095] 당 태종(唐太宗) 같은 이는 삼대(三代) 이후에 영주(英主)라 이를 만한 분으로서 황충(蝗虫)을 삼킨 일까지 있었는데, : 당 태종 정관(貞觀) 2년에 경사(京師)에 가뭄이 들어 황충(蝗虫)이 크게 번지자, 태종이 친히 논에 가서 황충 두어 마리를 잡아가지고 빌기를 "사람은 곡식을 생명으로 삼는데 네가 그 곡식을 먹어버리니, 이는 백성을 해친 것이다. 백성의 과실은 나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니, 네가 진정 영험이 있다면 내 심장만 갉아먹고 백성은 해치지 말거라." 하고는, 그 황충을 삼켜버렸는데, 그 후로는 다시 황충의 재해가 없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정관정요(貞觀政要)》 무농(務農).
- [註 096] ‘선생(先生)의 묘토(墓土)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다.’ : 선생은 곧 김수항(金壽恒)의 할아버지로서 당시 배청파(排淸派)의 영수이기도 했던 김상헌(金尙憲)을 가리키는데, 즉 송시열(宋時烈)이 김수항은 김상헌의 손자로서 자기 조부가 작고한 지 얼마되지도 않아 사신 일행으로 청나라에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이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 [註 097] 서산(西山) : 송나라 진덕수(眞德秀)의 호.
원문
○癸丑/次對。 上諭諸臣曰: "今雨爲三農之幸。 而近以拾蟲事, 坊民或有一日之役, 此蓋爲民除害之一事也。 《詩》言: ‘去其螟螣, 秉昇炎火。’ 如唐之太宗, 可謂三代後英主, 而至有呑蝗之事, 其後姚崇之爲相也, 拾其蟲蝗, 或燒或埋, 以除其害, 後人亦稱其事業。 今此松木之蟲損, 與稼穡之蟊害, 雖有間隔, 而其爲大有關於生民則一也。 松樹枯損, 則山土童濯, 生民日用薪柱, 姑置之, 山土流下, 明堂塡塞, 人之氣品亦多有妨, 不得已使隨處拾之。 若因此而有一臺民弊, 則殆同養人者害人, 此實予多少用心處也。" 右議政李秉模曰: "臣愚見, 未曾慮及於此, 今承縷縷聖敎, 實仰爲生民除害之德意也。 雖云草木無知, 而松於草木中, 有益於生民大矣哉, 則設有些小民弊, 亦何足恤乎?" 上曰: "聞拾而埋云, 逐日拾埋爲幾何? 則此雖微物之微, 而予於此不無斟量之思。 亦無好道理矣。 古昔治水之世, 益烈山澤而焚之, 禹驅蛇龍而放之, 菹益之焚之, 恐有讓於禹之不傷物而放之而已。 千載之下, 尙想禹與益未相及之處耶?" 秉模曰: "臣之愚見, 不敢議到於此, 而以其山澤也, 故不得不焚之, 恐其所處之地異然矣。" 上, 謂右議政李秉模曰: "北道奴貢, 在朝家無緊用, 而一夫所納, 過於三十兩, 豈有如此之貢乎? 特蠲四等中猥多之冬一等。 昆布巖, 本宮應屬者, 而中間見奪於北兵營, 只管二隻船所收云。 今於昆布巖, 定以南北, 南屬宮屬, 北屬該閫, 則該閫比前永得一半, 宮屬視今優收。 而且聞所收足當一等捧貢沾漑之需而有餘矣。 近來釐弊中無弊, 而有益於公與私, 未有若今番北道海夫蠲貢事, 子心充然, 以子罕睡之伎倆, 夜稍得眠矣。 子心如此, 況海夫之心乎?" 秉模頓首稱善。 上, 遣史官問領敦寧金履素造朝之期, 履赤以情地難安, 未卽趨命, 回奏, 上曰: "故相金均恒, 以書狀赴燕也, 先正宋時烈, 以 ‘先生墓土未乾’ 之說, 雖有抵書之事, 而其時必有不得不入去之端而然。 如無參量經權之義, 則似無是也。 況故相之子與孫乎? 在後孫, 不赴其先己赴之地, 揆諸義理, 將何辭乎? 領敦寧事過矣。" 右議政李秉模曰: "故相臣金昌集, 嘗有燕使之行, 僚相李畬以爲, ‘如有他人可赴者, 則不必赴云’, 古今不可無此議論。 而事之經權, 自有稱當處, 故古之人, 亦未嘗以此而行或尼之矣。 若言含冤忍痛之心, 則一國之人同然。 豈獨忠良之裔而然哉?" 上謂筵臣曰: "夫子嘗曰, ‘述而不作’, 予之平生工夫, 在於一部《朱書》。 予年二十時, 輯《朱書會選》, 又與春、桂坊, 抄定註解,又點寫句讀於《語類》。 三十時, 編《朱子會統》, 又証定故儒臣韓億增所編《朱書》, 又編《紫陽會英》及《朱書各體》。 四十後(編)〔徧〕 閱《朱書》者多, 而近年又輯《朱書百選》, 而昨年夏秋, 取《朱子全書》及《大全》、《語類》, 節略句語, 又成一書, 名曰《朱子書節約》。 近又留意於《朱子大全》及《語類》, 與其外片言隻字之出於夫子之手者, 欲爲集大成, 編爲一部全書。 待其編成, 將別搆一室于宙合樓傍奉安朱子眞像, 竝蔵全書板本於其中。 予於朱夫子, 實有師事之誠, 所以欲如是也。 且《大學衍義補》, 卽治國之大經大法, 其爲書也誠爲盡美, 予之一生嗜好在此書。 二十年前, 手抄此書, 近又更讀更抄, 與西山 《衍義》合選, 又以《大學》經文傳文, 朱子章句, 載之各叚之首, 使抄啓文臣等繕寫, 又令湖南儒生, 校錄一本。 此皆予近日工夫之大略, 而要之則只爲心神之有益也。"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8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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