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40권, 정조 18년 8월 26일 庚辰 4/4 기사 / 1794년 청 건륭(乾隆) 59년
의금부에서 장단 전 부사 서유화의 초공을 보고하고 원배를 건의하다
국역
의금부가 서유화(徐有和)의 초공(草供)을 바치니, 판하하기를,
"이른바 공초를 바쳤다고 하는 것을 보건대, 말을 처음 꺼낸 대목에서부터 중간에 진술한 데 이르기까지 교지(敎旨)의 뜻을 벗어난 헛소리 아닌 것이 없다. 그가 어떤 자이기에 무엄하기가 이 지경인가. 명색이 왕부(王府)의 구초이거늘 어려움없이 바치고 어려움 없이 써 가지고 와서 연석(筵席)에서 독주(讀奏)할 때에 들여보냈으니 나라의 체면상 몹시 한심하다. 엄히 단속해 잡아오고 엄히 조사해 실정을 파악하게 한 것은 바로 그가 어질지 못하게 일을 처리한 한 가지 문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대답한 바는 이와는 반대로 횡설수설하며 긴요하지도 않고 간여되지도 않는 조건을 끌어다 언급하고 있으니 어떻게 그런 것이 분명함을 밝히는 말이겠으며, 어떻게 그런 것이 정성을 바친 말이겠는가. 그의 죄가 일단 반드시 죽어야 할 죄는 아니고 보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사실대로 정직하게 아뢰고 엄명 아래에서 마땅히 두려워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감히 고의적으로 한 것처럼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등의 말을 함부로 삽입하였으니, 그렇다면 권가의 일은 그가 마음먹고 일부러 죽였다는 것인가. 그가 하찮은 무인이지만 만약 한푼어치라도 높고 도타운 뜻을 알고 있었다면 어찌 감히 방자하게 그러하겠는가. 그의 공초를 만약 모조리 읽는다면 단지 그의 죄만 더해지겠기에 더 이상 읽지 못하게 하였다. 오늘날 기강이 아무리 없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자가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견강부회하는 말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만, 어제 조사하여 아뢰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이면서 비가 내릴 듯했었는데, 오늘 첫 공초와 둘째 공초가 들여오자 찬 구름이 흩어지고 햇빛이 환히 드러났으니, 이로 보면 필시 원통한 기운이 너무 너그러운 형정 때문에 더욱 맺혀졌으리라 여겨진다. 이러고 저러고 간에 사람 목숨이 관계된 바이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옥졸의 패려궂은 버릇은 더욱 엄하게 징계하라. 이 공사(供辭)는 시행하지 말고, 부좌(赴坐)했던 여러 당상관들을 추고하라. 죄인 서유화는 정직하게 공초할 때까지 엄하게 형벌하여 기어코 실정을 밝혀내도록 하라. 엄히 격식을 갖춰 가두고 위엄을 보여 공초를 받은 뒤 아뢰어라."
하고, 이어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의금부가 서유화를 위원군(渭原郡)의 변방으로 유배 보내자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관서의 위원 등 여러 고을의 형편이 더욱 곤란하다는 것을 귀가 있는 사람이면 누가 듣지 못했겠는가. 농사 작황에 관한 장계가 아직 올라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유배지를 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정상적인 일이고 보면 이처럼 마련한 것이 매우 놀랍기만 하다. 그가 살아서 옥문을 나가게 되는 것은 수령과 고을 백성들의 관계를 고려해 뒷 폐단을 특별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엄만 베풀었을 뿐 고문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실정과 자취를 참작한 데서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곳을 어렵사리 찾아 이러한 초기(草記)를 올리다니, 판당(判堂)을 체차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다시 유화를 삼수부(三水府)의 변방으로 유배 보내자고 아뢰었다. 상은 유화가 형벌 시행에 성실하지 못하고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고 해서 매우 미워하였다. 그래서 끝내 상의 시대에는 유화가 목민관이 되지 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5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98면
원문
○義禁府進徐有和草供, 判曰: "所謂捧招, 自其發語之辭, 以至中間歷陳, 無非傳敎旨意外遊辭。 渠是何人, 無嚴至此? 名以王府口招, 無難捧之, 無難書之, 入徹於筵席讀奏之時, 國體所在, 萬萬寒心。 使之嚴飭拿來, 嚴覈得情者, 卽渠處事之不仁一款, 而渠之所對則反是, 橫說竪說, 拖及於沒緊不干之條件。 胡然則發明之談, 胡然則輸款之說也? 渠罪旣非必死之罪, 則曰有曰無, 從實直告, 嚴命之下, 但當怵畏而已, 又敢以自歸用意等語, 汗漫揷入。 然則權哥之事, 渠用意故殺乎? 渠以幺麽武夫, 若知一分高厚之意, 焉敢放恣乃爾? 渠之供招若畢看, 則徒添渠罪。 此所以勿令續讀者也。 今日紀綱雖曰掃地, 如渠者敢若是乎? 事猶近於傅會, 而昨下査啓之命, 黝雲四集, 若將下雨, 及今初供、再供之捧入也, 凄雲勿緊, 日光透露, 此必冤氣愈結於刑政之太寬。 無論如此如彼, 人命所係, 在所服念, 囚吏悖習, 尤宜痛懲。 此供辭勿施, 赴坐諸堂推考。 罪人徐有和, 當限直招嚴刑, 期於得情而後已。 具格嚴囚, 施威取招以聞。" 尋命遠竄。 義禁府以有和 渭原郡邊竄啓, 敎曰: "關西渭原等數邑之尤甚, 有耳者孰不聞之? 年分狀啓, 姑未上來, 勿定配所, 卽是常事, 則如是磨鍊, 萬萬駭然。 渠之生出獄門, 以其特念城化之後弊也, 施威而已, 得免拷掠, 亦出於情跡之參互, 則艱覓善地, 有此草記, 判堂遞差。" 義禁府更以有和 三水府邊竄啓。 上以有和用刑不衷, 無惻怛之心, 深惡之, 終上之世, 有和不得爲牧民之官。
-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5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98면
국역
의금부가 서유화(徐有和)의 초공(草供)을 바치니, 판하하기를,
"이른바 공초를 바쳤다고 하는 것을 보건대, 말을 처음 꺼낸 대목에서부터 중간에 진술한 데 이르기까지 교지(敎旨)의 뜻을 벗어난 헛소리 아닌 것이 없다. 그가 어떤 자이기에 무엄하기가 이 지경인가. 명색이 왕부(王府)의 구초이거늘 어려움없이 바치고 어려움 없이 써 가지고 와서 연석(筵席)에서 독주(讀奏)할 때에 들여보냈으니 나라의 체면상 몹시 한심하다. 엄히 단속해 잡아오고 엄히 조사해 실정을 파악하게 한 것은 바로 그가 어질지 못하게 일을 처리한 한 가지 문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대답한 바는 이와는 반대로 횡설수설하며 긴요하지도 않고 간여되지도 않는 조건을 끌어다 언급하고 있으니 어떻게 그런 것이 분명함을 밝히는 말이겠으며, 어떻게 그런 것이 정성을 바친 말이겠는가. 그의 죄가 일단 반드시 죽어야 할 죄는 아니고 보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사실대로 정직하게 아뢰고 엄명 아래에서 마땅히 두려워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감히 고의적으로 한 것처럼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등의 말을 함부로 삽입하였으니, 그렇다면 권가의 일은 그가 마음먹고 일부러 죽였다는 것인가. 그가 하찮은 무인이지만 만약 한푼어치라도 높고 도타운 뜻을 알고 있었다면 어찌 감히 방자하게 그러하겠는가. 그의 공초를 만약 모조리 읽는다면 단지 그의 죄만 더해지겠기에 더 이상 읽지 못하게 하였다. 오늘날 기강이 아무리 없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자가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견강부회하는 말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만, 어제 조사하여 아뢰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이면서 비가 내릴 듯했었는데, 오늘 첫 공초와 둘째 공초가 들여오자 찬 구름이 흩어지고 햇빛이 환히 드러났으니, 이로 보면 필시 원통한 기운이 너무 너그러운 형정 때문에 더욱 맺혀졌으리라 여겨진다. 이러고 저러고 간에 사람 목숨이 관계된 바이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옥졸의 패려궂은 버릇은 더욱 엄하게 징계하라. 이 공사(供辭)는 시행하지 말고, 부좌(赴坐)했던 여러 당상관들을 추고하라. 죄인 서유화는 정직하게 공초할 때까지 엄하게 형벌하여 기어코 실정을 밝혀내도록 하라. 엄히 격식을 갖춰 가두고 위엄을 보여 공초를 받은 뒤 아뢰어라."
하고, 이어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의금부가 서유화를 위원군(渭原郡)의 변방으로 유배 보내자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관서의 위원 등 여러 고을의 형편이 더욱 곤란하다는 것을 귀가 있는 사람이면 누가 듣지 못했겠는가. 농사 작황에 관한 장계가 아직 올라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유배지를 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정상적인 일이고 보면 이처럼 마련한 것이 매우 놀랍기만 하다. 그가 살아서 옥문을 나가게 되는 것은 수령과 고을 백성들의 관계를 고려해 뒷 폐단을 특별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엄만 베풀었을 뿐 고문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실정과 자취를 참작한 데서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곳을 어렵사리 찾아 이러한 초기(草記)를 올리다니, 판당(判堂)을 체차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다시 유화를 삼수부(三水府)의 변방으로 유배 보내자고 아뢰었다. 상은 유화가 형벌 시행에 성실하지 못하고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고 해서 매우 미워하였다. 그래서 끝내 상의 시대에는 유화가 목민관이 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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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義禁府進徐有和草供, 判曰: "所謂捧招, 自其發語之辭, 以至中間歷陳, 無非傳敎旨意外遊辭。 渠是何人, 無嚴至此? 名以王府口招, 無難捧之, 無難書之, 入徹於筵席讀奏之時, 國體所在, 萬萬寒心。 使之嚴飭拿來, 嚴覈得情者, 卽渠處事之不仁一款, 而渠之所對則反是, 橫說竪說, 拖及於沒緊不干之條件。 胡然則發明之談, 胡然則輸款之說也? 渠罪旣非必死之罪, 則曰有曰無, 從實直告, 嚴命之下, 但當怵畏而已, 又敢以自歸用意等語, 汗漫揷入。 然則權哥之事, 渠用意故殺乎? 渠以幺麽武夫, 若知一分高厚之意, 焉敢放恣乃爾? 渠之供招若畢看, 則徒添渠罪。 此所以勿令續讀者也。 今日紀綱雖曰掃地, 如渠者敢若是乎? 事猶近於傅會, 而昨下査啓之命, 黝雲四集, 若將下雨, 及今初供、再供之捧入也, 凄雲勿緊, 日光透露, 此必冤氣愈結於刑政之太寬。 無論如此如彼, 人命所係, 在所服念, 囚吏悖習, 尤宜痛懲。 此供辭勿施, 赴坐諸堂推考。 罪人徐有和, 當限直招嚴刑, 期於得情而後已。 具格嚴囚, 施威取招以聞。" 尋命遠竄。 義禁府以有和 渭原郡邊竄啓, 敎曰: "關西渭原等數邑之尤甚, 有耳者孰不聞之? 年分狀啓, 姑未上來, 勿定配所, 卽是常事, 則如是磨鍊, 萬萬駭然。 渠之生出獄門, 以其特念城化之後弊也, 施威而已, 得免拷掠, 亦出於情跡之參互, 則艱覓善地, 有此草記, 判堂遞差。" 義禁府更以有和 三水府邊竄啓。 上以有和用刑不衷, 無惻怛之心, 深惡之, 終上之世, 有和不得爲牧民之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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