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37권, 정조 17년 6월 27일 戊子 3/3 기사 / 1793년 청 건륭(乾隆) 58년
어린 아이와 죽은 사람에게 베를 징수한 청주 목사 이낙배를 유배하고 영동 현감 김이석을 충군시키다
국역
청주 목사 이낙배(李樂培)를 숙천부(肅川府)에 유배시키고, 영동 현감 김이석(金履錫)을 영암군(靈巖郡)에 충군(充軍)시켰다. 앞서 호서 어사 윤로동(尹魯東)이 돌아와서 낙배 등의 불법 행위를 아뢰고 또 청주에서는 황백(黃白) 【어린이에게서 베를 징수하는 것을 황구(黃口)라 하고 죽은 사람에게서 베를 징수하는 것을 백골(白骨)이라 한다.】 때문에 찾아와 호소하는 자가 하루에 천여 명이나 되며 영동도 이 수효에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니, 전교하기를,
"황백을 군적에 편입시키는 폐단에 대해서 조정의 명령이 매우 엄할 뿐만이 아닌데, 열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천 명을 넘는단 말인가. 옛날 선왕조 때에는 기읍(畿邑)의 군정을 뽑는 일에 불찰이 있었다 하여 어가가 직접 번화한 거리에 나가서 매우 엄하게 조처를 내렸었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호서의 고을에 천여 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징수하는 폐단이 있다고 하니, 우러러 선왕조의 일을 본받는 도리에 있어 감히 예사롭게 잡아다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낙배와 김이석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거듭 엄히 조사해서 기어코 진상을 밝힌 다음 중한 벌로 다스려서 다른 원들에게도 징계가 되게 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두 고을의 군적을 도백으로 하여금 별도로 강명(剛明)한 조사관을 정해서 지방 수령과 함께 바로잡아 실지 수효가 과연 그러한지의 여부를 우선 조사해서 아뢰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조사를 해본 결과 이름만 올라 있는 군사가 청주는 1천여 명이었고 영동은 3백 명이었으므로, 의금부가 벌을 의논하여 청하기를,
"낙배는 숙천부에 햇수의 기한 없이 귀양보내고 이석은 영암군에 햇수의 기한 없이 충군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60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00면
원문
○配淸州牧使李樂培于肅川府充軍, 永同縣監金履錫于靈巖郡。 先是, 湖西御史尹魯東, 還奏樂培等不法狀。 且言淸州黃白 【兒弱徵布曰黃口, 死而徵布曰白骨。】 來訴者, 一日千餘人, 永同亦不下此數。 敎曰: "籤丁黃白之弊, 朝令不啻申嚴, 十猶駭聆, 而況踰千? 昔在先朝, 以畿邑籤丁之不察, 駕臨通衢, 處分截嚴。 今聞湖郡, 有過千口。 無告冤徵之弊, 其在仰述之道, 其敢尋常拿勘乎? 李樂培、金履錫, 令該府拿來, 反覆嚴覈, 期於得情, 置之重辟, 懲勵他倅。" 仍命兩邑籤丁, 令道伯別定剛明査官, 與地方官眼同, 釐正實數果然與否, 先卽査啓。 及行査, 淸州虛伍千餘名, 永同虛伍三百名。 義禁府議讞, 請樂培, 肅川府勿限年遠配, 履錫, 靈巖郡勿限年充軍, 允之。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60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00면
정조실록37권, 정조 17년 6월 27일 戊子 3/3 기사 / 1793년 청 건륭(乾隆) 58년
어린 아이와 죽은 사람에게 베를 징수한 청주 목사 이낙배를 유배하고 영동 현감 김이석을 충군시키다
국역
청주 목사 이낙배(李樂培)를 숙천부(肅川府)에 유배시키고, 영동 현감 김이석(金履錫)을 영암군(靈巖郡)에 충군(充軍)시켰다. 앞서 호서 어사 윤로동(尹魯東)이 돌아와서 낙배 등의 불법 행위를 아뢰고 또 청주에서는 황백(黃白) 【어린이에게서 베를 징수하는 것을 황구(黃口)라 하고 죽은 사람에게서 베를 징수하는 것을 백골(白骨)이라 한다.】 때문에 찾아와 호소하는 자가 하루에 천여 명이나 되며 영동도 이 수효에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니, 전교하기를,
"황백을 군적에 편입시키는 폐단에 대해서 조정의 명령이 매우 엄할 뿐만이 아닌데, 열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천 명을 넘는단 말인가. 옛날 선왕조 때에는 기읍(畿邑)의 군정을 뽑는 일에 불찰이 있었다 하여 어가가 직접 번화한 거리에 나가서 매우 엄하게 조처를 내렸었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호서의 고을에 천여 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징수하는 폐단이 있다고 하니, 우러러 선왕조의 일을 본받는 도리에 있어 감히 예사롭게 잡아다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낙배와 김이석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거듭 엄히 조사해서 기어코 진상을 밝힌 다음 중한 벌로 다스려서 다른 원들에게도 징계가 되게 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두 고을의 군적을 도백으로 하여금 별도로 강명(剛明)한 조사관을 정해서 지방 수령과 함께 바로잡아 실지 수효가 과연 그러한지의 여부를 우선 조사해서 아뢰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조사를 해본 결과 이름만 올라 있는 군사가 청주는 1천여 명이었고 영동은 3백 명이었으므로, 의금부가 벌을 의논하여 청하기를,
"낙배는 숙천부에 햇수의 기한 없이 귀양보내고 이석은 영암군에 햇수의 기한 없이 충군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60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00면
원문
○配淸州牧使李樂培于肅川府充軍, 永同縣監金履錫于靈巖郡。 先是, 湖西御史尹魯東, 還奏樂培等不法狀。 且言淸州黃白 【兒弱徵布曰黃口, 死而徵布曰白骨。】 來訴者, 一日千餘人, 永同亦不下此數。 敎曰: "籤丁黃白之弊, 朝令不啻申嚴, 十猶駭聆, 而況踰千? 昔在先朝, 以畿邑籤丁之不察, 駕臨通衢, 處分截嚴。 今聞湖郡, 有過千口。 無告冤徵之弊, 其在仰述之道, 其敢尋常拿勘乎? 李樂培、金履錫, 令該府拿來, 反覆嚴覈, 期於得情, 置之重辟, 懲勵他倅。" 仍命兩邑籤丁, 令道伯別定剛明査官, 與地方官眼同, 釐正實數果然與否, 先卽査啓。 及行査, 淸州虛伍千餘名, 永同虛伍三百名。 義禁府議讞, 請樂培, 肅川府勿限年遠配, 履錫, 靈巖郡勿限年充軍, 允之。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60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0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