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30권, 정조 14년 4월 4일 甲寅 3/3 기사 /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북청 부사 유지양이 북도의 백성들을 구제할 대책을 건의하다
국역
북청 부사(北靑府使) 유지양(柳知養)이 상소하기를,
"지난 봄에 북도의 백성들이 아사(餓死)를 면하게 된 것은 모두 우리 성상의 하늘 같은 은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을과 겨울에 이르러 농사는 흉년이 들고 관청의 창고는 이미 바닥이 났으니, 오는 해에 백성을 구제할 대책은 오직 환자곡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설사 장계로 청하여 영남에서 수만 포대를 옮겨오게 하더라도 그것은 큰 바다에 한 톨의 곡식에 불과합니다. 감사가 걱정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신 또한 감히 그르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섣달 초순이 되어 환자를 받아들이는 사무를 겨우 끝내자마자 백성들의 형편이 더욱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 채의 관아를 비우고 의지할 데 없는 가장 궁한 백성들을 모아놓고 구휼하였는데, 열흘마다 구제하는 대상자만해도 3천 명이 넘습니다. 이것은 모두 감사가 요청하여 얻어낸 곡식이고 신이 스스로 마련한 것은 아닙니다.
근처에 도피하였던 백성은 거의 모두 돌아와 안정하였으나 먼 곳에 유랑하는 백성은 아직 더러 돌아오지 않았는데, 얼마 안되는 관청 곡식으로 간신히 분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목마르게 애타는 때에 감사가 나라 돈을 빌려 영남 곡식을 사다가 헐한 값으로 방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신 역시 7, 8백 포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경사(京司)에 새달까지 돈을 바쳐야 하는데, 만약 굶주림을 참고 농사를 지으면서 목숨을 구제하기에 여념이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이 돈을 바치라고 독촉한다면 형세상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해당 관청에 특별히 명하여 이 돈을 독촉하는 지시를 당분간 늦추어 주고 가을에 가서 마련하여 바치게 한다면, 신은 마땅히 힘을 다해 성상의 뜻을 선양하여 위로는 나라 돈에 손해가 없게 하고 아래로는 굶주린 백성들이 힘입어 살아가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은 특별히 염려되는 일이 있습니다. 유랑민으로서 본래부터 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밑천이 없는 자에 대하여 만약 특별히 보살펴주는 휼전이 없으면 지금은 비록 안정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필시 아무런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내년은 바로 신해년이니 지난 자취를 거슬러 상고하면 또 그때와 같은 흉년이 닥칠까 지레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옛날 한나라 소열 황제(昭烈皇帝)는 1냥짜리 돈을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1푼을 1냥 대신으로 쓰게 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재정이 넉넉하고 백성이 안착하였으니, 이것은 위급할 때에 알맞은 훌륭한 구제책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이 돈을 주조하여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고 각각 인구를 계산하여 쌀을 사들이게 한 다음 별도로 한 창고에 저장하여 흉년에 대처할 계책을 미리 강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백성과 나라를 위한 훌륭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또 신은 서너 가지 계속 진술할 조항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선비의 교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북도 사람들은 우둔한 데다가 거칠고 성급하여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으면 대뜸 목을 매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물론 애처로운 일이거니와 명색이 선비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미 견문의 도움이 없는 데다가 이끌어주고 가르쳐주는 공효가 없다 보니, 이 역시 지방관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신이 부임한 후부터 훈장(訓長)을 배치하여 달마다 《소학(小學)》을 강론하면서 망령되이 예의(禮義)로 격려의 방법을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의 후사를 잇는 자는 반드시 예조에 문건을 바쳐 허락을 받게 하고, 혼례를 이루는 자는 반드시 교배례(交拜禮)를 행하게 하였는데, 수년 동안에 예식을 따라 행하는 자가 겨우 서너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계속하여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몸바치는 도리로 인도한다면 훗날의 효력이 또한 반드시 여느 도에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매년 공도회(公都會) 시험에 《소학》을 읽은 자 한두 사람을 뽑는 것은 여러 도에서 공통으로 시행하는 규례인데, 오직 본도만이 이를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먼 지방에 있는 선비들이 이 책을 읽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만약 과조(科條)를 세워 유생으로서 《소학》을 읽지 않은 자는 대과·소과의 응시 등록에 들지 못하게 하고, 또 도회(都會)에 한두 명의 응시 자리를 만들어 이 책을 읽은 자로 하여금 참방(叅榜)하도록 한다면 아마 격려하는 방도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군사 장비를 엄격히 갖추는 일입니다. 신의 고을은 세 군영의 요충 지대이며 한 도의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마병(馬兵)으로서 이른바 충무학(忠武學)이란 것은 변란을 대처하는 데 가장 긴요한 것인데, 전마(戰馬)와 장비의 비용이 다른 군사에 비해 10배나 되므로 그 충원의 걱정 또한 미루어 알 만합니다. 옛날 인조조 때 무신 신원(申瑗)이 병사(兵使)로 있으면서 비로소 이 병제(兵制)를 제정한 것인데, 충무학이란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을 유학(幼學)과 반열을 같게 하여 높은 표창으로 격려하고 활쏘기를 권장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향원(鄕員)의 자제에게 그들의 자원에 따라 참가할 것을 허락하고 이어 초관(哨官)·천총(千摠)·파총(把摠)의 소임으로 승급시켜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때에는 대오에 날쌔고 용감한 미풍이 있었고 결원의 보충에 어려운 현상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 명칭만 있고 실속이 없다 보니, 향인이 무학을 보병과 다름없이 보아 조금 행세하려는 사람은 죽어도 모면하려고 꾀하는 바람에 3백 명 정원 중에 절반은 빈 장부입니다. 이에 신이 감히 완비해볼 계획을 가지고 하루는 여러 무사를 모이게 한 다음 무학 가운데 가장 오래 근무한 두 사람을 뽑아 한 사람은 별장(別將)으로, 한 사람은 천총(千摠)으로 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무반(武班)의 직임과 한두 사창(社倉)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이전에 무학을 거친 사람을 차례로 조사하여 의망하였더니, 잠깐 동안에 무학에 귀속하기를 자원하는 자가 1백 3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선임하는 방법과 군사의 씩씩한 모습은 친기위(親騎衛)와 거의 다름이 없었으나, 도시 시험에 급제시키는 규정에 온 도를 통틀어 1명만 뽑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마도 무사를 격려하고 권장할 수 없을 것 같기에 지난해 어사가 왔을 때 신이 공문으로 사유를 갖추어 자세히 진술하면서 시험을 보이고 사람을 뽑는 방법을 한결같이 친기위(親騎衛)의 제도를 모방하였으면 하니 위에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사가 경연에서 건의할 때에 북관(北關)에 대해서만 논하고 말았습니다. 똑같이 베푸는 조정의 혜택이 어찌 남관(南關)과 북관(北關)의 차이가 있겠으며 남관의 삼수(三水)·갑산(甲山)이 또한 어찌 북관의 경흥(慶興)·회령(會寧)만 못하겠습니까. 소문을 듣고 크게 기대하던 사람들도 이로 인하여 억울해 하며 개중에는 이미 귀속하였다가 후회하는 자도 있습니다. 만약 금년부터 도시 시험을 역시 북관의 규례에 의하여 시행한다면 일도의 무학이 정예롭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정예로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군포를 바치는 인원수에 있어서는 각 군영에 바쳐야 할 수량을 합산하면 3천 7백 88냥 남짓한데, 만약 이 돈을 한 경내 7천여 호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징수한다면 매 호에서 바치는 돈은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선배들의 호포(戶布)에 관한 논의인데 신역을 균등히 하는 방안이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대오에 결원이 생겼을 때에는 결원이 생기는 대로 보충하되 그 성명을 기록해 놓았다가 전쟁에 쓸 인력으로 대비하고 다시금 베를 내는 고통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이게 실로 폐단을 보완하고 백성을 소생시키는 하나의 큰 정사입니다. 그러나 지금 상하가 모두 지쳐 있고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았으므로 이런 때에 갑자기 다시 뜯어고치는 의견을 채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신이 뜻을 두고도 감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의 고을에 경기와 다른 도에서 들어온 유랑민이 모두 6호인데, 그 가운데 2명은 신역이 있으니 의당 조정의 지시대로 베를 감해주어야 하겠습니다만, 그 나머지 가까운 고을에서 모여든 자들도 처음 전하의 분부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 날뛰면서 살게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신이 지금 일일이 구휼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름이 군적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만약 다같이 베를 감하여 준다면 각 군영의 비용을 지탱해 쓸 수 없는 형편이고 만약 종전대로 이들에게 다그쳐 받아낸다면 떠돌아다니다가 죽기는 쉬워도 돈을 바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신이 자체적으로 감해주고 다른 명목의 것을 옮겨 그 숫자를 메우려 하여도 빈약한 창고가 이미 바닥이 났기 때문에 손을 쓸 길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 전하께서 그들을 특별히 불쌍히 여기어 무슨 방법으로든지 돈 4, 5천 냥을 3년을 기한으로 대여해 준다면 신은 마땅히 이 돈으로 창고 하나를 세우고 방편을 세워 이자를 늘려 군사와 백성들의 각종 폐단을 보완해가면서 감할 만한 것은 감하고 구휼할 만한 것은 구휼하겠습니다. 신이 교체되어 떠난 후라도 이대로 준수하게 한다면 오랜 폐단이 점차 사라지고 빈약한 형편이 이를 힘입어 보존될 것입니다.
셋째는 곡식의 장부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신의 고을 환자곡 중에 이른바 당미(唐米)023) 란 것이 있는데, 임술년 큰 흉년이 든 뒤로 이것이 변하여 피당(皮唐)024) 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명칭은 비록 쌀이나 실은 겉곡식입니다. 단지 그 이름이 당미이기 때문에 관청에서 쓸 때에는 전미(田米)025) 와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흉년이 들 때마다 당미가 익으면 하는 수 없이 환자곡을 다른 곡물로 대신 받을 것을 허락하는데, 그 값을 따진다면 당미는 콩이나 조와 그다지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대신 바치는 곡식은 간혹 당미보다 곱절을 받거나 또는 곱절 이상을 받습니다. 저 불쌍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 곱절의 값으로 바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당미 조항에 대하여 적절히 감해 쌀로 환산하는 규정을 만들어 전미와 현저한 차등이 있게 하면 명칭과 사실이 비로소 서로 부합될 것이며 혜택이 장차 아래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넷째는 산간 지방의 폐단을 더는 일입니다. 신의 고을이 거의 수백 리나 되는데, 21개 사(社)로 나누고 2, 3사 안에 각각 창고 하나씩 설치하였으니, 이는 대개 백성들로 하여금 환자곡을 내고 들이기에 편리하게 한 것입니다. 그중에 교제창(交濟倉)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바다를 끼고 설치하여 흉년에 곡식을 운반하는 밑천으로 보탬을 주고 있으니, 그 설치한 의미를 논하면 다른 창고에 비하여 아주 특별합니다. 거기에 저장한 곡식도 3분의 2는 남겨 두고 3분의 1을 나누어 주는 것을 영구한 규례로 삼고 있으며 곡식의 질과 두량(斗量)도 가장 양호하고 정확하다 할 수 있고 섬을 묶고 포장하는 데에도 십분 힘을 들였기 때문에 전부터 온 고을 사람들이 공평히 나누어 가져 어느 한쪽만 고통을 받는 걱정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창고와 본부와의 거리가 40리나 떨어져 있고 산협에 가까운 3, 4개의 사(社)는 본부와의 거리가 혹 1백여 리나 되므로 봄에 내주고 가을에 받아들일 때 반드시 5, 6일의 품을 허비하게 됩니다. 삼가 생각건대, 삼남(三南)에서 곡식을 옮기는 일은 혹은 5, 6년, 혹은 10여 년 간격으로 하는데 비록 그때를 당하더라도 한 창고의 곡식 전량을 옮길 것은 없습니다. 만약 그 곡식의 절반은 그 창고에 그대로 놔두고, 또 산협에 가까운 중간쯤 되는 곳에 별도로 하나의 창고를 설치하여 그 곡식의 본전을 놔두었다가 곡식을 옮기는 때를 만나게 되면 산간 지대의 창고에서 해변 창고로 옮기는 것은 일시적인 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간에 사는 백성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수고하는 것에 비한다면 어느 쪽이 좋고 나쁘다는 것이 판이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신에게 따로 창고 하나를 설치할 것을 허락하고 또한 교제창(交濟倉)이라고 이름을 붙여 산간 백성들이 왕래하는 비용을 없애게 하고, 곡식을 옮길 때에 이르러 그곳 백성들을 시켜 해변 창고에 일제히 옮기게 함으로써 운반하는 조건을 만들어준다면 관청과 민간이 다같이 편리하고 산간과 해변이 고루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이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북관 백성들의 일은 자나깨나 관심거리였는데 때마침 그대가 올린 소를 보았다. 첫번째 조항에서 중앙 관청에 돈을 바치는 기한을 조금 늦추자는 일은, 중앙 관청에서도 손해날 것이 없고 북도 백성들에게는 큰 이익이 될 것이므로 시행할 것을 특별히 허락한다. 두 번째 조항에서 1냥짜리 돈을 주조하자고 청한 일은 성급히 의논할 수 없고, 인구를 따져 쌀을 사들이겠다는 일은 그대의 말이 매우 좋다. 다시 감사와 면대해 의논하거나 서면으로 문의하여 타당한가를 익히 토론한 다음에 이어 감사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세 번째 조항의 공도회(公都會) 시험은 다른 도의 규례대로 《소학(小學)》도 아울러 시험보게 하면 필시 우매한 사람들을 깨우쳐 주는데 도움이 있을 것이다. 담당 관서에 내려보내 품의 조처하게 하겠다. 네 번째 조항의 군사 대비를 엄히 하는 일은 본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충무학(忠武學)을 설치한 본의가 오늘에 와서 완전히 없어지고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려하여 권면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연전에 어사가 북관만 과거보이는 길을 열어줄 것을 논하고 남관만 빼놓았다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섯 번째 조항에서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고질적인 폐단은 듣기에 매우 불쌍하다. 지금 군역(軍役)의 폐단은 어느 도를 막론하고 모두 그러하다. 그대의 고을에서 과연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대책이 있다면 무엇을 주저하고 아낄 것이 있겠는가. 역시 감사와 의논해 보고 나서 그에 대한 편리 여부에 대해 의견을 자세히 진술하도록 하라. 올봄에 도로 돌아온 유랑민들의 신포(身布)와 환곡(還穀)에 있어서는 자연 논의하지 말라는 대상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상소의 내용을 보면 구별해서 취사선택하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인가? 여섯 번째 조항의 다른 곡식으로 대신 받는 폐단과 일곱 번째 조항의 산간 지대에 교제창을 별도로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묘당을 시켜 품의 조처하게끔 하겠다. 대체로 북청 백성들에 대하여 밤낮으로 근심하던 것을 조금이라도 풀게 된 것은 고을 원을 적임자로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모든 일을 다부지게 처결하여 내가 전일에 칭찬하고 가상히 여긴 하교에 부응하라."
하였다. 이어 명하기를,
"유지양은 임기가 찬 뒤에도 그대로 유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와 예조가 복주(覆奏)하기를,
"공도회에서 《소학》을 시험보이는 일에 대해서는, 도에서 올린 장계에 의하여 1년은 남관에서 《소학》을 시험보이고 북관에서 사서(四書)를 시험보이며, 또 1년은 남관에서 사서를 시험보이고 북관에서 《소학》을 시험보여야 하겠습니다. 인구를 계산하여 쌀을 사들이는 일과 군포를 거두는 일과 당미(唐米)를 대신 받는 일과 교제창에 대한 일은 모두 그만두고 충무학에 대한 일은 감사에게 명하여 방안을 논의하여 다시 보고하게 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17면
원문
○北靑府使柳知養上疏曰:
前春北民之得免塡壑者, 罔非我聖上如天之澤, 而逮至秋冬, 穡事告歉, 而公儲已盡, 嗣歲救民之策, 只是捧糴一事, 設或狀請, 而移得嶺南數萬包, 此不過滄海一粟。 道臣之憂, 政在於此, 而臣亦不敢爲非。 及夫臘月之初, 還政纔了, 民勢轉急。 於是乎討一公廨, 留養四窮之最無告者, 逐旬救急之類, 其口又過三千。 此皆道臣請得之穀, 非臣所自辦也。 近境逃避之民, 幾皆還奠, 而遠路流離之跡, 或未盡歸, 些少公穀, 艱辛排比。 方此渴悶之際, 道臣貸得公貨, 往貿嶺穀而來, 以爲輕價發賣之計, 臣亦得七八百包, 而但京司納錢之期, 知在開月。 若使忍飢力田, 救死不贍之民, 督以此錢, 則其勢末由。 特命該司, 姑緩此催錢之令, 使之待秋備納, 則臣當竭力對揚, 上而使公貨無損, 下而使饑民有賴。 抑臣別有所大懼者, 流民之初無恒産者, 若無別般優恤, 則今雖安集, 終必無效。 況明年乃辛亥也。 追考往蹟, 尙多懲吹之道。 昔漢 昭烈鑄一兩錢, 蓋其制, 以一分代一兩而用。 由是而財裕民安, 此副急之良策也。 今若鑄得此錢, 分賜列邑, 俾各計口貿米, 別儲一庫, 預講備荒之策, 則此實民國之大計。 且臣有三四條繼陳者, 其一曰興儒化。 噫! 北路之人, 愚蠢悍急, 一有所激, 輒多自縊。 此固可哀, 而名以爲士者, 旣無聞見之益, 又無導敎之功, 是亦官長之責也。 臣自莅任, 設立訓長, 月講《小學》, 妄欲以禮義爲激勸之方。 立後者使之必呈禮曹, 成婚者使之必行交拜, 數年之間, 從而行禮者, 僅可爲三四家。 今若一向導之以親上死長之義, 則他日得力, 亦未必下於諸道矣。 每年公都 會, 必以講《小學》者取一二人, 乃諸道通行之規, 而獨本道闕焉。 遐儒之不誦是書者, 職由於此。 若立科條, 使儒生之未誦《小學》者, 俾不得入錄於大小科赴場之案, 又於都會, 更定一二試窠, 使誦是書者, 得以參榜, 則庶或有補於激礪之方。 其二曰嚴武備。 臣府以三營要衝之地, 爲一路都會之所。 其中馬兵之所謂忠武學者, 最緊於待變之需, 而惟其戰馬、軍裝之費, 十倍他軍, 塡充之患, 亦可推知。 在昔仁廟朝武臣申瑗爲兵使, 始定兵制, 忠武學之號, 自此爲始。 使之與幼學同班, 激以重賞, 勸其習射。 初以鄕員子弟, 從其願而許副, 仍使轉陞於哨官、千ㆍ把摠之任。 當是時也, 隊伍有驍勇之美, 塡差無艱辛之歎。 今則有其名而無其實, 鄕人之視武學, 與步兵無異, 稍欲行身者, 誓死謀免, 三百其額, 半是虛簿。 臣乃敢爲修明之計, 一日會諸武士, 抄出武學中最久勤者二人, 一差別將, 一差千摠。 凡百武班之任, 一二社倉之窠, 必以曾經武學之人, 次第檢擬, 則斯須之間, 得原屬者, 一百三十有餘人。 其所選差之法, 精壯之容, 與親騎衛幾無異同, 而惟其都試賜第之規, 通一道只取一人, 則恐無以激勸, 故昨年繡衣之來, 臣以公牒, 具由悉陳, 欲其試取之法, 一倣親騎衛之制, 要爲轉達之計, 而及其筵稟, 則只論北關而止。 朝廷一視之澤, 豈有南北關之異, 而南之三、甲, 亦何讓於北之慶、會乎? 聞風顒企者, 由此抑菀, 間有旣屬而還悔者。 若自今年都試, 亦依北關例施行, 則一路武學, 不期精而自精。 至於布軍之額, 計其各營當納之數, 則合錢爲三千七百八十八兩零。 若以此錢, 分徵於一境七千餘戶之民, 則每戶所納, 不至甚多。 此先輩戶布之論, 而均役之策, 亶在於此。 若其闕伍, 則只當隨闕隨補, 錄其姓名, 庸備赴戰之用, 而更無徵布之苦, 則此實補弊蘇民之一大政, 而見方上下俱困, 瘡痍未完, 不當以此時, 捽用更張之論, 此臣有意而不敢爲者也。 臣府流民之自畿甸與他道歸者, 摠爲六戶, 而其中二人有身役, 自當依朝令減布, 而其餘自近境還集者, 初聞有聖旨, 無不雀躍, 謂可以得生。 臣方一一賙賑, 此皆名載軍籍者也。 若一切減布, 則各營公用, 亦無可支之勢, 若依舊侵徵於此輩, 則塡壑易而納錢難。 臣欲私自減給, 推移充數, 則殘廩已竭, 措手沒策。 倘我聖上, 更賜曲憐, 特以某樣錢四五千兩, 限三年許貸, 則臣當以此立一庫, 方便生殖, 以補各樣軍民之弊, 可減者減, 可恤者恤, 雖臣遞歸之後, 俾得依此遵行, 則積弊稍蘇, 殘局賴保。 其三曰正穀簿。 臣府還穀中, 有所謂唐米者, 蓋自壬戌大歉之後, 變爲皮唐。 名雖米而, 實則皮穀也。 惟其名是唐米也, 故凡諸用下之法, 與田米無異。 每當歉歲, 唐米告熟, 則不獲已許以代捧。 若論其價, 則唐與豆粟, 不甚懸殊, 而其所代捧, 則或倍於唐, 又或倍而有餘, 哀彼殘氓, 其何能倍價以納乎? 今若就唐米條, 量減折米之規, 俾與田米, 大有差等, 則名實始相符, 惠澤將下究。 其四曰除峽弊。 臣府地方, 殆近數百里, 分社爲二十一, 各於二三社之內, 設置一倉, 蓋欲使民, 便於糶糴也。 其中有曰交濟倉者, 臨海設倉, 以補荒年移粟之資。 論其事體, 比他尤別, 且其所儲之穀, 永爲二留一分之規, 穀品斗量, 最稱精實, 石繩包裹, 十分用力, 故從前使一府之民, 平均分受, 俾無偏苦之患。 但倉去本府, 爲四十里, 近峽三四社, 則又距本府或百餘里, 春糶秋糴之時, 必費五六日之勞。 竊念, 三南移粟之擧, 或間五六年, 或間十餘年, 雖當此時, 一倉之穀, 亦未必全數移轉。 若以此穀之半, 儲置於該倉, 又於近峽中半之地, 別設一倉, 以藏此穀之本, 若値移粟之時, 則自山倉移海倉, 不過一時之勞。 比諸山氓逐年春秋之苦, 優劣誠判異。 今若許臣別立一倉, 亦名曰交濟, 俾除山氓往來之費。 當其移粟也, 使其民一齊移納於海倉, 俾爲轉運之地, 則公私兩便, 山海均幸, 乞令廟堂稟處焉。
批曰: "北關民事, 爲寢寐關心之端, 際見爾疏。 第一條之京納錢稍緩期限, 在京司無所損, 在北民爲大益, 特爲許施。 第二條之請鑄兩錢, 不須遽議, 而計口貿米, 爾說甚好。 更與道伯, 面議書質, 爛漫停當, 仍令道伯, 論理狀聞。 第三條之公都會, 依他道例兼試《小學》, 必有補於牖蒙, 下該曹稟處。 第四條之嚴武備, 最爲本道當務之先。 況忠武學設施之本意, 到今蔑如, 爲弊至此, 則其所奬拔興勸, 寧容少忽? 年前繡衣之只論關以北科岐, 獨漏以南, 殊未可知。 第五條之布軍痼瘼, 聞甚切矜。 見今軍役之弊, 何道不然, 而爾邑捄弊, 果有其策, 則何靳何惜? 亦須就議道伯, 俾卽詳陳意見便否。 至於今春流民還集之類, 身布還穀, 自在勿論之中, 而觀於疏辭, 似有區別取捨者何也? 第六條之代捧之弊, 第七條之別立交濟山倉, 許令廟堂稟處。 大抵北靑之民, 暫弛宵旰之念, 意謂主倅之得其人, 隨事惕念, 以副前下褒嘉之諭。" 仍命知養準瓜後仍任。 備邊司、禮曹覆奏請, 公都會講《小學》事, 依道啓, 一年則南試小學, 北試四書; 一年則南試四書, 北試《小學》。 計口貿米事、布軍事、唐米代捧事、交濟倉事, 竝寢之, 忠武學事, 命道臣論理更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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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북청 부사(北靑府使) 유지양(柳知養)이 상소하기를,
"지난 봄에 북도의 백성들이 아사(餓死)를 면하게 된 것은 모두 우리 성상의 하늘 같은 은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을과 겨울에 이르러 농사는 흉년이 들고 관청의 창고는 이미 바닥이 났으니, 오는 해에 백성을 구제할 대책은 오직 환자곡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설사 장계로 청하여 영남에서 수만 포대를 옮겨오게 하더라도 그것은 큰 바다에 한 톨의 곡식에 불과합니다. 감사가 걱정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신 또한 감히 그르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섣달 초순이 되어 환자를 받아들이는 사무를 겨우 끝내자마자 백성들의 형편이 더욱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 채의 관아를 비우고 의지할 데 없는 가장 궁한 백성들을 모아놓고 구휼하였는데, 열흘마다 구제하는 대상자만해도 3천 명이 넘습니다. 이것은 모두 감사가 요청하여 얻어낸 곡식이고 신이 스스로 마련한 것은 아닙니다.
근처에 도피하였던 백성은 거의 모두 돌아와 안정하였으나 먼 곳에 유랑하는 백성은 아직 더러 돌아오지 않았는데, 얼마 안되는 관청 곡식으로 간신히 분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목마르게 애타는 때에 감사가 나라 돈을 빌려 영남 곡식을 사다가 헐한 값으로 방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신 역시 7, 8백 포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경사(京司)에 새달까지 돈을 바쳐야 하는데, 만약 굶주림을 참고 농사를 지으면서 목숨을 구제하기에 여념이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이 돈을 바치라고 독촉한다면 형세상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해당 관청에 특별히 명하여 이 돈을 독촉하는 지시를 당분간 늦추어 주고 가을에 가서 마련하여 바치게 한다면, 신은 마땅히 힘을 다해 성상의 뜻을 선양하여 위로는 나라 돈에 손해가 없게 하고 아래로는 굶주린 백성들이 힘입어 살아가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은 특별히 염려되는 일이 있습니다. 유랑민으로서 본래부터 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밑천이 없는 자에 대하여 만약 특별히 보살펴주는 휼전이 없으면 지금은 비록 안정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필시 아무런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내년은 바로 신해년이니 지난 자취를 거슬러 상고하면 또 그때와 같은 흉년이 닥칠까 지레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옛날 한나라 소열 황제(昭烈皇帝)는 1냥짜리 돈을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1푼을 1냥 대신으로 쓰게 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재정이 넉넉하고 백성이 안착하였으니, 이것은 위급할 때에 알맞은 훌륭한 구제책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이 돈을 주조하여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고 각각 인구를 계산하여 쌀을 사들이게 한 다음 별도로 한 창고에 저장하여 흉년에 대처할 계책을 미리 강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백성과 나라를 위한 훌륭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또 신은 서너 가지 계속 진술할 조항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선비의 교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북도 사람들은 우둔한 데다가 거칠고 성급하여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으면 대뜸 목을 매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물론 애처로운 일이거니와 명색이 선비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미 견문의 도움이 없는 데다가 이끌어주고 가르쳐주는 공효가 없다 보니, 이 역시 지방관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신이 부임한 후부터 훈장(訓長)을 배치하여 달마다 《소학(小學)》을 강론하면서 망령되이 예의(禮義)로 격려의 방법을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의 후사를 잇는 자는 반드시 예조에 문건을 바쳐 허락을 받게 하고, 혼례를 이루는 자는 반드시 교배례(交拜禮)를 행하게 하였는데, 수년 동안에 예식을 따라 행하는 자가 겨우 서너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계속하여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몸바치는 도리로 인도한다면 훗날의 효력이 또한 반드시 여느 도에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매년 공도회(公都會) 시험에 《소학》을 읽은 자 한두 사람을 뽑는 것은 여러 도에서 공통으로 시행하는 규례인데, 오직 본도만이 이를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먼 지방에 있는 선비들이 이 책을 읽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만약 과조(科條)를 세워 유생으로서 《소학》을 읽지 않은 자는 대과·소과의 응시 등록에 들지 못하게 하고, 또 도회(都會)에 한두 명의 응시 자리를 만들어 이 책을 읽은 자로 하여금 참방(叅榜)하도록 한다면 아마 격려하는 방도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군사 장비를 엄격히 갖추는 일입니다. 신의 고을은 세 군영의 요충 지대이며 한 도의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마병(馬兵)으로서 이른바 충무학(忠武學)이란 것은 변란을 대처하는 데 가장 긴요한 것인데, 전마(戰馬)와 장비의 비용이 다른 군사에 비해 10배나 되므로 그 충원의 걱정 또한 미루어 알 만합니다. 옛날 인조조 때 무신 신원(申瑗)이 병사(兵使)로 있으면서 비로소 이 병제(兵制)를 제정한 것인데, 충무학이란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을 유학(幼學)과 반열을 같게 하여 높은 표창으로 격려하고 활쏘기를 권장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향원(鄕員)의 자제에게 그들의 자원에 따라 참가할 것을 허락하고 이어 초관(哨官)·천총(千摠)·파총(把摠)의 소임으로 승급시켜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때에는 대오에 날쌔고 용감한 미풍이 있었고 결원의 보충에 어려운 현상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 명칭만 있고 실속이 없다 보니, 향인이 무학을 보병과 다름없이 보아 조금 행세하려는 사람은 죽어도 모면하려고 꾀하는 바람에 3백 명 정원 중에 절반은 빈 장부입니다. 이에 신이 감히 완비해볼 계획을 가지고 하루는 여러 무사를 모이게 한 다음 무학 가운데 가장 오래 근무한 두 사람을 뽑아 한 사람은 별장(別將)으로, 한 사람은 천총(千摠)으로 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무반(武班)의 직임과 한두 사창(社倉)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이전에 무학을 거친 사람을 차례로 조사하여 의망하였더니, 잠깐 동안에 무학에 귀속하기를 자원하는 자가 1백 3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선임하는 방법과 군사의 씩씩한 모습은 친기위(親騎衛)와 거의 다름이 없었으나, 도시 시험에 급제시키는 규정에 온 도를 통틀어 1명만 뽑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마도 무사를 격려하고 권장할 수 없을 것 같기에 지난해 어사가 왔을 때 신이 공문으로 사유를 갖추어 자세히 진술하면서 시험을 보이고 사람을 뽑는 방법을 한결같이 친기위(親騎衛)의 제도를 모방하였으면 하니 위에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사가 경연에서 건의할 때에 북관(北關)에 대해서만 논하고 말았습니다. 똑같이 베푸는 조정의 혜택이 어찌 남관(南關)과 북관(北關)의 차이가 있겠으며 남관의 삼수(三水)·갑산(甲山)이 또한 어찌 북관의 경흥(慶興)·회령(會寧)만 못하겠습니까. 소문을 듣고 크게 기대하던 사람들도 이로 인하여 억울해 하며 개중에는 이미 귀속하였다가 후회하는 자도 있습니다. 만약 금년부터 도시 시험을 역시 북관의 규례에 의하여 시행한다면 일도의 무학이 정예롭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정예로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군포를 바치는 인원수에 있어서는 각 군영에 바쳐야 할 수량을 합산하면 3천 7백 88냥 남짓한데, 만약 이 돈을 한 경내 7천여 호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징수한다면 매 호에서 바치는 돈은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선배들의 호포(戶布)에 관한 논의인데 신역을 균등히 하는 방안이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대오에 결원이 생겼을 때에는 결원이 생기는 대로 보충하되 그 성명을 기록해 놓았다가 전쟁에 쓸 인력으로 대비하고 다시금 베를 내는 고통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이게 실로 폐단을 보완하고 백성을 소생시키는 하나의 큰 정사입니다. 그러나 지금 상하가 모두 지쳐 있고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았으므로 이런 때에 갑자기 다시 뜯어고치는 의견을 채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신이 뜻을 두고도 감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의 고을에 경기와 다른 도에서 들어온 유랑민이 모두 6호인데, 그 가운데 2명은 신역이 있으니 의당 조정의 지시대로 베를 감해주어야 하겠습니다만, 그 나머지 가까운 고을에서 모여든 자들도 처음 전하의 분부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 날뛰면서 살게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신이 지금 일일이 구휼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름이 군적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만약 다같이 베를 감하여 준다면 각 군영의 비용을 지탱해 쓸 수 없는 형편이고 만약 종전대로 이들에게 다그쳐 받아낸다면 떠돌아다니다가 죽기는 쉬워도 돈을 바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신이 자체적으로 감해주고 다른 명목의 것을 옮겨 그 숫자를 메우려 하여도 빈약한 창고가 이미 바닥이 났기 때문에 손을 쓸 길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 전하께서 그들을 특별히 불쌍히 여기어 무슨 방법으로든지 돈 4, 5천 냥을 3년을 기한으로 대여해 준다면 신은 마땅히 이 돈으로 창고 하나를 세우고 방편을 세워 이자를 늘려 군사와 백성들의 각종 폐단을 보완해가면서 감할 만한 것은 감하고 구휼할 만한 것은 구휼하겠습니다. 신이 교체되어 떠난 후라도 이대로 준수하게 한다면 오랜 폐단이 점차 사라지고 빈약한 형편이 이를 힘입어 보존될 것입니다.
셋째는 곡식의 장부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신의 고을 환자곡 중에 이른바 당미(唐米)023) 란 것이 있는데, 임술년 큰 흉년이 든 뒤로 이것이 변하여 피당(皮唐)024) 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명칭은 비록 쌀이나 실은 겉곡식입니다. 단지 그 이름이 당미이기 때문에 관청에서 쓸 때에는 전미(田米)025) 와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흉년이 들 때마다 당미가 익으면 하는 수 없이 환자곡을 다른 곡물로 대신 받을 것을 허락하는데, 그 값을 따진다면 당미는 콩이나 조와 그다지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대신 바치는 곡식은 간혹 당미보다 곱절을 받거나 또는 곱절 이상을 받습니다. 저 불쌍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 곱절의 값으로 바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당미 조항에 대하여 적절히 감해 쌀로 환산하는 규정을 만들어 전미와 현저한 차등이 있게 하면 명칭과 사실이 비로소 서로 부합될 것이며 혜택이 장차 아래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넷째는 산간 지방의 폐단을 더는 일입니다. 신의 고을이 거의 수백 리나 되는데, 21개 사(社)로 나누고 2, 3사 안에 각각 창고 하나씩 설치하였으니, 이는 대개 백성들로 하여금 환자곡을 내고 들이기에 편리하게 한 것입니다. 그중에 교제창(交濟倉)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바다를 끼고 설치하여 흉년에 곡식을 운반하는 밑천으로 보탬을 주고 있으니, 그 설치한 의미를 논하면 다른 창고에 비하여 아주 특별합니다. 거기에 저장한 곡식도 3분의 2는 남겨 두고 3분의 1을 나누어 주는 것을 영구한 규례로 삼고 있으며 곡식의 질과 두량(斗量)도 가장 양호하고 정확하다 할 수 있고 섬을 묶고 포장하는 데에도 십분 힘을 들였기 때문에 전부터 온 고을 사람들이 공평히 나누어 가져 어느 한쪽만 고통을 받는 걱정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창고와 본부와의 거리가 40리나 떨어져 있고 산협에 가까운 3, 4개의 사(社)는 본부와의 거리가 혹 1백여 리나 되므로 봄에 내주고 가을에 받아들일 때 반드시 5, 6일의 품을 허비하게 됩니다. 삼가 생각건대, 삼남(三南)에서 곡식을 옮기는 일은 혹은 5, 6년, 혹은 10여 년 간격으로 하는데 비록 그때를 당하더라도 한 창고의 곡식 전량을 옮길 것은 없습니다. 만약 그 곡식의 절반은 그 창고에 그대로 놔두고, 또 산협에 가까운 중간쯤 되는 곳에 별도로 하나의 창고를 설치하여 그 곡식의 본전을 놔두었다가 곡식을 옮기는 때를 만나게 되면 산간 지대의 창고에서 해변 창고로 옮기는 것은 일시적인 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간에 사는 백성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수고하는 것에 비한다면 어느 쪽이 좋고 나쁘다는 것이 판이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신에게 따로 창고 하나를 설치할 것을 허락하고 또한 교제창(交濟倉)이라고 이름을 붙여 산간 백성들이 왕래하는 비용을 없애게 하고, 곡식을 옮길 때에 이르러 그곳 백성들을 시켜 해변 창고에 일제히 옮기게 함으로써 운반하는 조건을 만들어준다면 관청과 민간이 다같이 편리하고 산간과 해변이 고루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이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북관 백성들의 일은 자나깨나 관심거리였는데 때마침 그대가 올린 소를 보았다. 첫번째 조항에서 중앙 관청에 돈을 바치는 기한을 조금 늦추자는 일은, 중앙 관청에서도 손해날 것이 없고 북도 백성들에게는 큰 이익이 될 것이므로 시행할 것을 특별히 허락한다. 두 번째 조항에서 1냥짜리 돈을 주조하자고 청한 일은 성급히 의논할 수 없고, 인구를 따져 쌀을 사들이겠다는 일은 그대의 말이 매우 좋다. 다시 감사와 면대해 의논하거나 서면으로 문의하여 타당한가를 익히 토론한 다음에 이어 감사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세 번째 조항의 공도회(公都會) 시험은 다른 도의 규례대로 《소학(小學)》도 아울러 시험보게 하면 필시 우매한 사람들을 깨우쳐 주는데 도움이 있을 것이다. 담당 관서에 내려보내 품의 조처하게 하겠다. 네 번째 조항의 군사 대비를 엄히 하는 일은 본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충무학(忠武學)을 설치한 본의가 오늘에 와서 완전히 없어지고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려하여 권면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연전에 어사가 북관만 과거보이는 길을 열어줄 것을 논하고 남관만 빼놓았다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섯 번째 조항에서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고질적인 폐단은 듣기에 매우 불쌍하다. 지금 군역(軍役)의 폐단은 어느 도를 막론하고 모두 그러하다. 그대의 고을에서 과연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대책이 있다면 무엇을 주저하고 아낄 것이 있겠는가. 역시 감사와 의논해 보고 나서 그에 대한 편리 여부에 대해 의견을 자세히 진술하도록 하라. 올봄에 도로 돌아온 유랑민들의 신포(身布)와 환곡(還穀)에 있어서는 자연 논의하지 말라는 대상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상소의 내용을 보면 구별해서 취사선택하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인가? 여섯 번째 조항의 다른 곡식으로 대신 받는 폐단과 일곱 번째 조항의 산간 지대에 교제창을 별도로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묘당을 시켜 품의 조처하게끔 하겠다. 대체로 북청 백성들에 대하여 밤낮으로 근심하던 것을 조금이라도 풀게 된 것은 고을 원을 적임자로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모든 일을 다부지게 처결하여 내가 전일에 칭찬하고 가상히 여긴 하교에 부응하라."
하였다. 이어 명하기를,
"유지양은 임기가 찬 뒤에도 그대로 유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와 예조가 복주(覆奏)하기를,
"공도회에서 《소학》을 시험보이는 일에 대해서는, 도에서 올린 장계에 의하여 1년은 남관에서 《소학》을 시험보이고 북관에서 사서(四書)를 시험보이며, 또 1년은 남관에서 사서를 시험보이고 북관에서 《소학》을 시험보여야 하겠습니다. 인구를 계산하여 쌀을 사들이는 일과 군포를 거두는 일과 당미(唐米)를 대신 받는 일과 교제창에 대한 일은 모두 그만두고 충무학에 대한 일은 감사에게 명하여 방안을 논의하여 다시 보고하게 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17면
원문
○北靑府使柳知養上疏曰:
前春北民之得免塡壑者, 罔非我聖上如天之澤, 而逮至秋冬, 穡事告歉, 而公儲已盡, 嗣歲救民之策, 只是捧糴一事, 設或狀請, 而移得嶺南數萬包, 此不過滄海一粟。 道臣之憂, 政在於此, 而臣亦不敢爲非。 及夫臘月之初, 還政纔了, 民勢轉急。 於是乎討一公廨, 留養四窮之最無告者, 逐旬救急之類, 其口又過三千。 此皆道臣請得之穀, 非臣所自辦也。 近境逃避之民, 幾皆還奠, 而遠路流離之跡, 或未盡歸, 些少公穀, 艱辛排比。 方此渴悶之際, 道臣貸得公貨, 往貿嶺穀而來, 以爲輕價發賣之計, 臣亦得七八百包, 而但京司納錢之期, 知在開月。 若使忍飢力田, 救死不贍之民, 督以此錢, 則其勢末由。 特命該司, 姑緩此催錢之令, 使之待秋備納, 則臣當竭力對揚, 上而使公貨無損, 下而使饑民有賴。 抑臣別有所大懼者, 流民之初無恒産者, 若無別般優恤, 則今雖安集, 終必無效。 況明年乃辛亥也。 追考往蹟, 尙多懲吹之道。 昔漢 昭烈鑄一兩錢, 蓋其制, 以一分代一兩而用。 由是而財裕民安, 此副急之良策也。 今若鑄得此錢, 分賜列邑, 俾各計口貿米, 別儲一庫, 預講備荒之策, 則此實民國之大計。 且臣有三四條繼陳者, 其一曰興儒化。 噫! 北路之人, 愚蠢悍急, 一有所激, 輒多自縊。 此固可哀, 而名以爲士者, 旣無聞見之益, 又無導敎之功, 是亦官長之責也。 臣自莅任, 設立訓長, 月講《小學》, 妄欲以禮義爲激勸之方。 立後者使之必呈禮曹, 成婚者使之必行交拜, 數年之間, 從而行禮者, 僅可爲三四家。 今若一向導之以親上死長之義, 則他日得力, 亦未必下於諸道矣。 每年公都 會, 必以講《小學》者取一二人, 乃諸道通行之規, 而獨本道闕焉。 遐儒之不誦是書者, 職由於此。 若立科條, 使儒生之未誦《小學》者, 俾不得入錄於大小科赴場之案, 又於都會, 更定一二試窠, 使誦是書者, 得以參榜, 則庶或有補於激礪之方。 其二曰嚴武備。 臣府以三營要衝之地, 爲一路都會之所。 其中馬兵之所謂忠武學者, 最緊於待變之需, 而惟其戰馬、軍裝之費, 十倍他軍, 塡充之患, 亦可推知。 在昔仁廟朝武臣申瑗爲兵使, 始定兵制, 忠武學之號, 自此爲始。 使之與幼學同班, 激以重賞, 勸其習射。 初以鄕員子弟, 從其願而許副, 仍使轉陞於哨官、千ㆍ把摠之任。 當是時也, 隊伍有驍勇之美, 塡差無艱辛之歎。 今則有其名而無其實, 鄕人之視武學, 與步兵無異, 稍欲行身者, 誓死謀免, 三百其額, 半是虛簿。 臣乃敢爲修明之計, 一日會諸武士, 抄出武學中最久勤者二人, 一差別將, 一差千摠。 凡百武班之任, 一二社倉之窠, 必以曾經武學之人, 次第檢擬, 則斯須之間, 得原屬者, 一百三十有餘人。 其所選差之法, 精壯之容, 與親騎衛幾無異同, 而惟其都試賜第之規, 通一道只取一人, 則恐無以激勸, 故昨年繡衣之來, 臣以公牒, 具由悉陳, 欲其試取之法, 一倣親騎衛之制, 要爲轉達之計, 而及其筵稟, 則只論北關而止。 朝廷一視之澤, 豈有南北關之異, 而南之三、甲, 亦何讓於北之慶、會乎? 聞風顒企者, 由此抑菀, 間有旣屬而還悔者。 若自今年都試, 亦依北關例施行, 則一路武學, 不期精而自精。 至於布軍之額, 計其各營當納之數, 則合錢爲三千七百八十八兩零。 若以此錢, 分徵於一境七千餘戶之民, 則每戶所納, 不至甚多。 此先輩戶布之論, 而均役之策, 亶在於此。 若其闕伍, 則只當隨闕隨補, 錄其姓名, 庸備赴戰之用, 而更無徵布之苦, 則此實補弊蘇民之一大政, 而見方上下俱困, 瘡痍未完, 不當以此時, 捽用更張之論, 此臣有意而不敢爲者也。 臣府流民之自畿甸與他道歸者, 摠爲六戶, 而其中二人有身役, 自當依朝令減布, 而其餘自近境還集者, 初聞有聖旨, 無不雀躍, 謂可以得生。 臣方一一賙賑, 此皆名載軍籍者也。 若一切減布, 則各營公用, 亦無可支之勢, 若依舊侵徵於此輩, 則塡壑易而納錢難。 臣欲私自減給, 推移充數, 則殘廩已竭, 措手沒策。 倘我聖上, 更賜曲憐, 特以某樣錢四五千兩, 限三年許貸, 則臣當以此立一庫, 方便生殖, 以補各樣軍民之弊, 可減者減, 可恤者恤, 雖臣遞歸之後, 俾得依此遵行, 則積弊稍蘇, 殘局賴保。 其三曰正穀簿。 臣府還穀中, 有所謂唐米者, 蓋自壬戌大歉之後, 變爲皮唐。 名雖米而, 實則皮穀也。 惟其名是唐米也, 故凡諸用下之法, 與田米無異。 每當歉歲, 唐米告熟, 則不獲已許以代捧。 若論其價, 則唐與豆粟, 不甚懸殊, 而其所代捧, 則或倍於唐, 又或倍而有餘, 哀彼殘氓, 其何能倍價以納乎? 今若就唐米條, 量減折米之規, 俾與田米, 大有差等, 則名實始相符, 惠澤將下究。 其四曰除峽弊。 臣府地方, 殆近數百里, 分社爲二十一, 各於二三社之內, 設置一倉, 蓋欲使民, 便於糶糴也。 其中有曰交濟倉者, 臨海設倉, 以補荒年移粟之資。 論其事體, 比他尤別, 且其所儲之穀, 永爲二留一分之規, 穀品斗量, 最稱精實, 石繩包裹, 十分用力, 故從前使一府之民, 平均分受, 俾無偏苦之患。 但倉去本府, 爲四十里, 近峽三四社, 則又距本府或百餘里, 春糶秋糴之時, 必費五六日之勞。 竊念, 三南移粟之擧, 或間五六年, 或間十餘年, 雖當此時, 一倉之穀, 亦未必全數移轉。 若以此穀之半, 儲置於該倉, 又於近峽中半之地, 別設一倉, 以藏此穀之本, 若値移粟之時, 則自山倉移海倉, 不過一時之勞。 比諸山氓逐年春秋之苦, 優劣誠判異。 今若許臣別立一倉, 亦名曰交濟, 俾除山氓往來之費。 當其移粟也, 使其民一齊移納於海倉, 俾爲轉運之地, 則公私兩便, 山海均幸, 乞令廟堂稟處焉。
批曰: "北關民事, 爲寢寐關心之端, 際見爾疏。 第一條之京納錢稍緩期限, 在京司無所損, 在北民爲大益, 特爲許施。 第二條之請鑄兩錢, 不須遽議, 而計口貿米, 爾說甚好。 更與道伯, 面議書質, 爛漫停當, 仍令道伯, 論理狀聞。 第三條之公都會, 依他道例兼試《小學》, 必有補於牖蒙, 下該曹稟處。 第四條之嚴武備, 最爲本道當務之先。 況忠武學設施之本意, 到今蔑如, 爲弊至此, 則其所奬拔興勸, 寧容少忽? 年前繡衣之只論關以北科岐, 獨漏以南, 殊未可知。 第五條之布軍痼瘼, 聞甚切矜。 見今軍役之弊, 何道不然, 而爾邑捄弊, 果有其策, 則何靳何惜? 亦須就議道伯, 俾卽詳陳意見便否。 至於今春流民還集之類, 身布還穀, 自在勿論之中, 而觀於疏辭, 似有區別取捨者何也? 第六條之代捧之弊, 第七條之別立交濟山倉, 許令廟堂稟處。 大抵北靑之民, 暫弛宵旰之念, 意謂主倅之得其人, 隨事惕念, 以副前下褒嘉之諭。" 仍命知養準瓜後仍任。 備邊司、禮曹覆奏請, 公都會講《小學》事, 依道啓, 一年則南試小學, 北試四書; 一年則南試四書, 北試《小學》。 計口貿米事、布軍事、唐米代捧事、交濟倉事, 竝寢之, 忠武學事, 命道臣論理更聞。"
-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