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26권, 정조 12년 7월 27일 丁亥 2/2 기사 / 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내각 제학 김종수와 함께 홍국영의 사건과 형정·김치인의 보좌에 관해 논의하다
국역
내각 제학 김종수(金鍾秀)를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을 춘방(春坊)에서 만난 뒤부터 맺은 교분이 이미 깊었으니 경은 거의 나의 본심을 알 것이다. 내가 경과 더불어 강론한 것은 의리였고 부식(扶植)한 것은 사론(士論)이었으니, 그 귀취(歸趣)를 요약하면 시비를 밝히고 호오(好惡)를 공정히 하여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울타리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일이 마음과 같지 않아 별 성과없이 무기력하게 오늘에 이르렀다.
일전에 빈대(賓對)한 자리에서 비로소 그 단서를 약간 드러내었더니, 영상으로서도 일일이 깨닫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의 기색을 살피건대 흘러간 과거의 이야기로 여겨 자못 주의해 들으려는 뜻이 없는 듯하였다. 선대왕께서 50년 동안 행하신 건극(建極)의 정치는 공화(功化)가 크고 성과도 많으셨다. 그러나 80세가 되신 이후로는 총괄하는 정사에 자연 게으른 마음이 없지 않으셨다. 그러자 권신(權臣)과 중신(重臣)들이 다시 국가가 있는 줄은 모르고 저의 편으로 들어오는 자는 높이고 나가는 자는 천시하여 위복(威福)을 멋대로 부려, 드디어 을미년에 시사(時事)를 대리 청정(代理廳政)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병신·정유 두 해의 역모 사건이 생기기까지 하였으므로, 나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은 중한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두를 주벌해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리들이 제거된 뒤에는 바로 한 번 변하면 도에 이를[一變至道] 계기(契機)가 되었으나 또 홍국영(洪國榮)의 일이 생겼다. 국영이 패망한 뒤에도 또 무언가를 해 볼 만한 기회였으나 보필(輔弼)하는 사람이 없어 일에 구애됨이 많았다. 두 차례의 국면(局面)이 사람들마다 모두 임금을 가지고 놀려는 때였으니 무슨 괴상한 일인들 없었겠는가. 내가 영상을 물러나 있은 지 15년 만에 기용(起用)한 것은 그 뜻이 어찌 공연한 것이었겠는가. 대개 그에게 선상(先相)131) 의 일을 맡겨 훌륭하게 이루도록 하려 함이었다. 그런데 영상의 일을 본 지 3년이 되는데도 다만 풍파가 번갈아 일어나서 영상이 크게 곤경을 겪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대체로 근래 고치기 어려운 폐습(弊習)이 두 가지 있으니, 그것은 저 사람은 이 사람을 역적이라 하고, 이 사람은 저 사람을 역적이라 하는 폐습인데, 이는 반드시 한 번 징계한 뒤에야 비로소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벼슬길 막기를 주장하는 자는 막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막고자 하고, 벼슬길 열기를 주장하는 자는 여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열고자 한다. 막기를 주장하는 것도 제방(隄防)을 엄격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열기를 주장하는 것도 다만 은혜를 파는 밑천으로 삼으려는 것일 뿐이니, 모두 자기 일신을 위한 계책이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방도로는 다른 것이 없다. 다만 이 사람이 역적이라고 하는 자를 저 사람도 역적이라고 하고, 저 사람이 벼슬길을 막아야 한다고 하는 자를 이 사람도 막아야 한다고 하게 된다면 공론이 유행하여 사람들은 이견이 없고 원기(元氣)가 굳건하여 외부의 간사함이 물리쳐져서 마침내 조정의 상하가 협심하여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10년 동안 자나깨나 잊지 못해 하며 어떻게 하면 선대왕께서 고심하시던 것을 본받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을 거의 조금이나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임은 전적으로 영상에게 있다.
내가 즉위한 뒤로 국영(國榮)이 살아 있었을 때는 진실로 논할 것도 없거니와, 국영이 죽은 뒤에도 조정의 신하들이 근신(近臣)에 연줄을 대어 임금의 뜻을 엿보아 코앞에 닥친 일이나 미봉할 생각만을 하였을 뿐이었으므로 10여 년 이래로 대신(大臣)이 용관(冗官)이 되었으니, 이러고서야 나라가 어찌 나라꼴이 되겠는가. 오늘 이후로 나는 대신의 도로써 영상에게 책임지워 국가의 정사를 모두 대신이 관장하도록 할 것이니, 대신의 책무가 이제서야 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드시 거조(擧措)가 사리에 맞아 인심이 복종하고, 선자와 악자가 구별되어 국세(國勢)가 존중되며, 사류(士類)가 주인이 되도록 하여 사사롭고 잗다랗고 난잡한 무리들이 자연히 사라져 없어지게 되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안정이 된 뒤에야 비로소 실패의 국면을 정돈하여 세도(世道)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을 경은 모름지기 영상을 면대해 전하라. 그리고 영상을 돕는 방도는 경 또한 그 책임을 사양할 수 없을 것이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오늘 내리신 전교는 참으로 만세를 위해 태평(太平)을 여는 분부라 할 수 있습니다. 모두를 함께 잘살게 하시려는 것이 바로 우리 성상의 한 덩어리 고심(苦心)이시므로 비록 역적의 옥사(獄事)가 한창 펼쳐지고 있는 중에서도 이런 뜻이 함께 행해져서 어그러지지 않았던 것을 신은 종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합 대화(保合大和)의 도는 성상의 마음을 수고롭혀 조화(造化)132) 를 허비한 지가 이미 오래이었으되 아직까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니, 이는 성상의 뜻을 잘 받들어 따르지 못한 신하들의 죄입니다마는 또한 신하들이 오히려 성상의 마음이 확고하게 정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한 연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상께서 이 마음 지키시기를 금석(金石)처럼 굳게 하시고 사시(四時)처럼 미덥게 하시어 오래도록 행하고 조금도 물러나거나 의욕이 꺾이심이 없으면 신하들은 자연히 믿게 되어 효유해서 독려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스스로 믿고 감동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하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은 실로 나의 탓이다. 그러나 괴이한 것은 신하들이 임금의 뜻을 엿보아 받들어 따르고 영합(迎合)하기만 하는 것이 근년에 큰 병폐가 되고 있는 점이다. 평소 고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귀에 대고 일러주고 얼굴을 대해 명한 것이 간곡할 뿐만이 아니었는데도 믿음을 받는 효과가 없으니 어찌 괴이하지 않겠는가. 용렬하고 어두운 임금이 되고 싶지 않은 나의 본심은 경이 동궁의 관료로 있을 때부터 알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온갖 사변을 겪으면서 10여 년 세월을 허송하다 보니 내 나이도 많아져서 때때로 흰머리가 나타나는 것을 볼 적마다 놀라 괴이쩍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만약 다시 한결같이 무기력하게 세월만 보낸다면 끝내는 어둡고 용렬한 임금이 되고 말 것이니,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여 의지와 기개를 분발하여 규모를 정립(定立)하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생각을 항상 갖겠다. 나는 후손들에게 안전을 끼쳐주는 계책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모든 일에 있어 바야흐로 경영하고 계획할 때에는 충분하고 자세하게 토의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지만 일단 마음에 결단을 본 뒤에는 단숨에 구성(構成)하려는 생각이 없지 않다. 내가 지금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신하들로 하여금 나의 뜻을 분명히 알아서 모두 구습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기를 도모하여 함께 왕실을 도울 방도를 생각하게 하고자 해서이다. 내가 이와 같이 말한 뒤에도 만약 여전히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형법(刑法)으로 위엄을 보여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조시위(趙時偉)의 일이 생긴 뒤에 사람들은 ‘이것은 한쪽 편 사람을 다 죽이려는 계획이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신이 병오년 가을에 내각(內閣)에서 한 동료 관원에게 이르기를 ‘죄가 있다면 죽어야 하겠지만 죄가 없는 자라면 어찌 죽겠는가. 만일 감히 한 사람으로 인해 한쪽 편 사람을 다 죽이려는 마음을 내는 자가 있다면 천리(天理)가 매우 밝고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니, 그 계획을 이룰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가 반드시 먼저 죽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감히 남이 나를 믿어주기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도리가 이러하기 때문에 공공연히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본래부터 가진 마음과 주장하는 의논이 이와 같으나 아는 자가 적다. 이점이 바로 내가 일찍이 경을 위해 깊이 근심하고 세인을 위해 깊이 개탄한 바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면
원문
○召見內閣提學金鍾秀。 上曰: "予自得卿于春坊, 託契已深, 卿則庶幾知予本意矣。 予與卿, 所講者義理, 所扶者士論, 而要其歸, 則在於明是非公好惡, 使一世之人, 咸囿於大公至正之中, 而事與心違, 因循至今。 日昨賓筵, 始微發其端, 而雖領相, 未易一一領會, 觀諸臣氣色, 似認以爲過去說話, 殊無諦聽之意矣。 先大王五十年建極之治, 功化嵬蕩, 收效亦多, 而大耋以後, 摠攬之政, 自不無倦勤。 於是乎權重之臣, 不復知有國家, 入主出奴, 作威作福, 遂至有乙未代聽時事, 而丙申、丁酉兩年逆獄出矣。 予以刑亂國、用重典之意, 遂不得不盡分誅鋤。 此輩誅鋤之後, 則政屬一變至道之機, 而又有國榮焉。 國榮敗後, 又屬有爲之會, 而承弼無人, 事多礙掣。 二箇局面, 人人皆欲簸弄之際, 亦何怪之不有邪? 予之起領相於十五年之後者, 其意豈徒然哉? 蓋將責之以先相之事, 而行及三年, 但見風波迭起, 領相飽受困境。 大抵近來弊風之難醫者, 有二事。 彼謂此爲逆, 此謂彼爲逆之弊。 此須用一番懲創, 然後方可以捄革矣。 主枳塞者, 不計其當枳與否, 而欲一切枳之, 主疏通者, 不計其當通與否, 而欲一切通之。 主枳者非出嚴隄防之意, 主通者適足爲市恩之資, 皆所以爲一己計也, 非出於爲國之心也。 爲今之道, 無他道。 但得此以爲逆者, 彼亦以爲逆, 彼以爲當枳者, 此亦以爲當枳, 則公論流行, 人無異見, 元氣旣固, 外邪退聽, 卒至於同寅協恭, 偕之大道, 則予之十餘年寤寐耿耿, 思所以仰體先大王苦心者, 庶可以少酬矣。 此責專在領相矣。 嗣服以後, 國榮在時則固無論, 雖國榮死後, 廷臣但欲夤緣近臣, 窺覘上意, 爲目下彌縫計, 則十餘年來, 大臣爲冗官矣。 如是而國其爲國乎? 從今以往, 予將以大臣之道, 責領相, 國家政事, 皆令大臣句管, 大臣之責, 於是乎重矣。 必須擧措得宜, 人心厭服, 淑慝彙分, 國勢尊重, 使士流爲主人, 而私瑣猥雜之類, 自然消融, 妥帖於不知不覺之中, 然後方可以整頓敗局, 維持世道。 此意卿須面傳于領相, 而其所以補助領相之道, 則卿亦不得辭其責矣。" 鍾秀曰: "聖上今日下敎, 眞可謂爲萬世開太平也。 欲幷生哉, 卽我聖上一團苦心, 雖在逆獄方張之中, 此意則未嘗不幷行不悖者, 臣則從前仰認矣。 到今保合太和之道, 其所以勞聖慮而費造化, 亦已久矣, 而尙未收效, 則不善奉承, 固是群下之罪, 而亦緣群下, 猶不能曉然於聖心之堅定故也。 聖上但執此之心, 堅如金石, 信如四時, 行之以悠久, 無毫髮退沮, 則群下自然信得, (及)不待曉諭糾督, 而自當有孚感之效矣。" 上曰: "群下之不信予, 固予之咎, 而所可怪者, 群下之窺覘上意, 承奉迎合, 爲近年一大痼弊, 而於此平生苦心所在處, 則耳提面命, 不啻諄複, 而猶無見信之效, 豈不怪乎? 予之本心, 不欲爲昏庸之主者, 卿自宮僚, 想或知之, 而歷盡事變, 已虛送十餘年光陰, 予年亦多矣, 時見白髮現形, 未嘗不惕然驚怪。 若更一向因循, 度了時日, 則畢竟當與昏庸同歸。 每念及此, 能不慨然? 予故劃自今日, 始作一初, 必欲奮發志氣, 定立規模, 恒有猶恐不及之意。 予則以爲貽燕裕昆之謨, 亦無出於此。 且予於凡事, 方其經營料度之時, 則固不厭爛漫消詳, 而及其旣斷於心之後, 則不無一氣架成之意。 予今如是言之者, 欲令廷臣, 洞知予意, 皆思革舊圖新, 共奬王室之道也。 予如是言之之後, 若猶有不率敎者, 則當以刑法威之, 斷不饒貸矣。" 鍾秀曰: "趙時偉事出後, 人以爲此是盡殺一邊之計云, 故臣於丙午秋閣中, 語一僚官云: ‘有罪則當死, 無罪者亦豈死乎? 如有敢萌因一人而盡殺一邊之心者, 則天理孔昭, 聖明在上, 不但其計不能售而已, 渠必先死云云。’ 臣非敢期人之信己, 只是道理自如此, 故公共地說出如此矣。" 上曰: "卿之本來秉心持論之如此, 知之者少。 此予之所嘗爲卿深悶, 爲世人深慨者也。"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면
정조 12년 (1788) 7월 27일
정조실록26권, 정조 12년 7월 27일 丁亥 2/2 기사 / 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내각 제학 김종수와 함께 홍국영의 사건과 형정·김치인의 보좌에 관해 논의하다
국역
내각 제학 김종수(金鍾秀)를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을 춘방(春坊)에서 만난 뒤부터 맺은 교분이 이미 깊었으니 경은 거의 나의 본심을 알 것이다. 내가 경과 더불어 강론한 것은 의리였고 부식(扶植)한 것은 사론(士論)이었으니, 그 귀취(歸趣)를 요약하면 시비를 밝히고 호오(好惡)를 공정히 하여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울타리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일이 마음과 같지 않아 별 성과없이 무기력하게 오늘에 이르렀다.
일전에 빈대(賓對)한 자리에서 비로소 그 단서를 약간 드러내었더니, 영상으로서도 일일이 깨닫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의 기색을 살피건대 흘러간 과거의 이야기로 여겨 자못 주의해 들으려는 뜻이 없는 듯하였다. 선대왕께서 50년 동안 행하신 건극(建極)의 정치는 공화(功化)가 크고 성과도 많으셨다. 그러나 80세가 되신 이후로는 총괄하는 정사에 자연 게으른 마음이 없지 않으셨다. 그러자 권신(權臣)과 중신(重臣)들이 다시 국가가 있는 줄은 모르고 저의 편으로 들어오는 자는 높이고 나가는 자는 천시하여 위복(威福)을 멋대로 부려, 드디어 을미년에 시사(時事)를 대리 청정(代理廳政)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병신·정유 두 해의 역모 사건이 생기기까지 하였으므로, 나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은 중한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두를 주벌해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리들이 제거된 뒤에는 바로 한 번 변하면 도에 이를[一變至道] 계기(契機)가 되었으나 또 홍국영(洪國榮)의 일이 생겼다. 국영이 패망한 뒤에도 또 무언가를 해 볼 만한 기회였으나 보필(輔弼)하는 사람이 없어 일에 구애됨이 많았다. 두 차례의 국면(局面)이 사람들마다 모두 임금을 가지고 놀려는 때였으니 무슨 괴상한 일인들 없었겠는가. 내가 영상을 물러나 있은 지 15년 만에 기용(起用)한 것은 그 뜻이 어찌 공연한 것이었겠는가. 대개 그에게 선상(先相)131) 의 일을 맡겨 훌륭하게 이루도록 하려 함이었다. 그런데 영상의 일을 본 지 3년이 되는데도 다만 풍파가 번갈아 일어나서 영상이 크게 곤경을 겪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대체로 근래 고치기 어려운 폐습(弊習)이 두 가지 있으니, 그것은 저 사람은 이 사람을 역적이라 하고, 이 사람은 저 사람을 역적이라 하는 폐습인데, 이는 반드시 한 번 징계한 뒤에야 비로소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벼슬길 막기를 주장하는 자는 막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막고자 하고, 벼슬길 열기를 주장하는 자는 여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열고자 한다. 막기를 주장하는 것도 제방(隄防)을 엄격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열기를 주장하는 것도 다만 은혜를 파는 밑천으로 삼으려는 것일 뿐이니, 모두 자기 일신을 위한 계책이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방도로는 다른 것이 없다. 다만 이 사람이 역적이라고 하는 자를 저 사람도 역적이라고 하고, 저 사람이 벼슬길을 막아야 한다고 하는 자를 이 사람도 막아야 한다고 하게 된다면 공론이 유행하여 사람들은 이견이 없고 원기(元氣)가 굳건하여 외부의 간사함이 물리쳐져서 마침내 조정의 상하가 협심하여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10년 동안 자나깨나 잊지 못해 하며 어떻게 하면 선대왕께서 고심하시던 것을 본받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을 거의 조금이나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임은 전적으로 영상에게 있다.
내가 즉위한 뒤로 국영(國榮)이 살아 있었을 때는 진실로 논할 것도 없거니와, 국영이 죽은 뒤에도 조정의 신하들이 근신(近臣)에 연줄을 대어 임금의 뜻을 엿보아 코앞에 닥친 일이나 미봉할 생각만을 하였을 뿐이었으므로 10여 년 이래로 대신(大臣)이 용관(冗官)이 되었으니, 이러고서야 나라가 어찌 나라꼴이 되겠는가. 오늘 이후로 나는 대신의 도로써 영상에게 책임지워 국가의 정사를 모두 대신이 관장하도록 할 것이니, 대신의 책무가 이제서야 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드시 거조(擧措)가 사리에 맞아 인심이 복종하고, 선자와 악자가 구별되어 국세(國勢)가 존중되며, 사류(士類)가 주인이 되도록 하여 사사롭고 잗다랗고 난잡한 무리들이 자연히 사라져 없어지게 되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안정이 된 뒤에야 비로소 실패의 국면을 정돈하여 세도(世道)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을 경은 모름지기 영상을 면대해 전하라. 그리고 영상을 돕는 방도는 경 또한 그 책임을 사양할 수 없을 것이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오늘 내리신 전교는 참으로 만세를 위해 태평(太平)을 여는 분부라 할 수 있습니다. 모두를 함께 잘살게 하시려는 것이 바로 우리 성상의 한 덩어리 고심(苦心)이시므로 비록 역적의 옥사(獄事)가 한창 펼쳐지고 있는 중에서도 이런 뜻이 함께 행해져서 어그러지지 않았던 것을 신은 종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합 대화(保合大和)의 도는 성상의 마음을 수고롭혀 조화(造化)132) 를 허비한 지가 이미 오래이었으되 아직까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니, 이는 성상의 뜻을 잘 받들어 따르지 못한 신하들의 죄입니다마는 또한 신하들이 오히려 성상의 마음이 확고하게 정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한 연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상께서 이 마음 지키시기를 금석(金石)처럼 굳게 하시고 사시(四時)처럼 미덥게 하시어 오래도록 행하고 조금도 물러나거나 의욕이 꺾이심이 없으면 신하들은 자연히 믿게 되어 효유해서 독려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스스로 믿고 감동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하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은 실로 나의 탓이다. 그러나 괴이한 것은 신하들이 임금의 뜻을 엿보아 받들어 따르고 영합(迎合)하기만 하는 것이 근년에 큰 병폐가 되고 있는 점이다. 평소 고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귀에 대고 일러주고 얼굴을 대해 명한 것이 간곡할 뿐만이 아니었는데도 믿음을 받는 효과가 없으니 어찌 괴이하지 않겠는가. 용렬하고 어두운 임금이 되고 싶지 않은 나의 본심은 경이 동궁의 관료로 있을 때부터 알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온갖 사변을 겪으면서 10여 년 세월을 허송하다 보니 내 나이도 많아져서 때때로 흰머리가 나타나는 것을 볼 적마다 놀라 괴이쩍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만약 다시 한결같이 무기력하게 세월만 보낸다면 끝내는 어둡고 용렬한 임금이 되고 말 것이니,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여 의지와 기개를 분발하여 규모를 정립(定立)하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생각을 항상 갖겠다. 나는 후손들에게 안전을 끼쳐주는 계책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모든 일에 있어 바야흐로 경영하고 계획할 때에는 충분하고 자세하게 토의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지만 일단 마음에 결단을 본 뒤에는 단숨에 구성(構成)하려는 생각이 없지 않다. 내가 지금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신하들로 하여금 나의 뜻을 분명히 알아서 모두 구습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기를 도모하여 함께 왕실을 도울 방도를 생각하게 하고자 해서이다. 내가 이와 같이 말한 뒤에도 만약 여전히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형법(刑法)으로 위엄을 보여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조시위(趙時偉)의 일이 생긴 뒤에 사람들은 ‘이것은 한쪽 편 사람을 다 죽이려는 계획이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신이 병오년 가을에 내각(內閣)에서 한 동료 관원에게 이르기를 ‘죄가 있다면 죽어야 하겠지만 죄가 없는 자라면 어찌 죽겠는가. 만일 감히 한 사람으로 인해 한쪽 편 사람을 다 죽이려는 마음을 내는 자가 있다면 천리(天理)가 매우 밝고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니, 그 계획을 이룰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가 반드시 먼저 죽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감히 남이 나를 믿어주기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도리가 이러하기 때문에 공공연히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본래부터 가진 마음과 주장하는 의논이 이와 같으나 아는 자가 적다. 이점이 바로 내가 일찍이 경을 위해 깊이 근심하고 세인을 위해 깊이 개탄한 바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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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召見內閣提學金鍾秀。 上曰: "予自得卿于春坊, 託契已深, 卿則庶幾知予本意矣。 予與卿, 所講者義理, 所扶者士論, 而要其歸, 則在於明是非公好惡, 使一世之人, 咸囿於大公至正之中, 而事與心違, 因循至今。 日昨賓筵, 始微發其端, 而雖領相, 未易一一領會, 觀諸臣氣色, 似認以爲過去說話, 殊無諦聽之意矣。 先大王五十年建極之治, 功化嵬蕩, 收效亦多, 而大耋以後, 摠攬之政, 自不無倦勤。 於是乎權重之臣, 不復知有國家, 入主出奴, 作威作福, 遂至有乙未代聽時事, 而丙申、丁酉兩年逆獄出矣。 予以刑亂國、用重典之意, 遂不得不盡分誅鋤。 此輩誅鋤之後, 則政屬一變至道之機, 而又有國榮焉。 國榮敗後, 又屬有爲之會, 而承弼無人, 事多礙掣。 二箇局面, 人人皆欲簸弄之際, 亦何怪之不有邪? 予之起領相於十五年之後者, 其意豈徒然哉? 蓋將責之以先相之事, 而行及三年, 但見風波迭起, 領相飽受困境。 大抵近來弊風之難醫者, 有二事。 彼謂此爲逆, 此謂彼爲逆之弊。 此須用一番懲創, 然後方可以捄革矣。 主枳塞者, 不計其當枳與否, 而欲一切枳之, 主疏通者, 不計其當通與否, 而欲一切通之。 主枳者非出嚴隄防之意, 主通者適足爲市恩之資, 皆所以爲一己計也, 非出於爲國之心也。 爲今之道, 無他道。 但得此以爲逆者, 彼亦以爲逆, 彼以爲當枳者, 此亦以爲當枳, 則公論流行, 人無異見, 元氣旣固, 外邪退聽, 卒至於同寅協恭, 偕之大道, 則予之十餘年寤寐耿耿, 思所以仰體先大王苦心者, 庶可以少酬矣。 此責專在領相矣。 嗣服以後, 國榮在時則固無論, 雖國榮死後, 廷臣但欲夤緣近臣, 窺覘上意, 爲目下彌縫計, 則十餘年來, 大臣爲冗官矣。 如是而國其爲國乎? 從今以往, 予將以大臣之道, 責領相, 國家政事, 皆令大臣句管, 大臣之責, 於是乎重矣。 必須擧措得宜, 人心厭服, 淑慝彙分, 國勢尊重, 使士流爲主人, 而私瑣猥雜之類, 自然消融, 妥帖於不知不覺之中, 然後方可以整頓敗局, 維持世道。 此意卿須面傳于領相, 而其所以補助領相之道, 則卿亦不得辭其責矣。" 鍾秀曰: "聖上今日下敎, 眞可謂爲萬世開太平也。 欲幷生哉, 卽我聖上一團苦心, 雖在逆獄方張之中, 此意則未嘗不幷行不悖者, 臣則從前仰認矣。 到今保合太和之道, 其所以勞聖慮而費造化, 亦已久矣, 而尙未收效, 則不善奉承, 固是群下之罪, 而亦緣群下, 猶不能曉然於聖心之堅定故也。 聖上但執此之心, 堅如金石, 信如四時, 行之以悠久, 無毫髮退沮, 則群下自然信得, (及)不待曉諭糾督, 而自當有孚感之效矣。" 上曰: "群下之不信予, 固予之咎, 而所可怪者, 群下之窺覘上意, 承奉迎合, 爲近年一大痼弊, 而於此平生苦心所在處, 則耳提面命, 不啻諄複, 而猶無見信之效, 豈不怪乎? 予之本心, 不欲爲昏庸之主者, 卿自宮僚, 想或知之, 而歷盡事變, 已虛送十餘年光陰, 予年亦多矣, 時見白髮現形, 未嘗不惕然驚怪。 若更一向因循, 度了時日, 則畢竟當與昏庸同歸。 每念及此, 能不慨然? 予故劃自今日, 始作一初, 必欲奮發志氣, 定立規模, 恒有猶恐不及之意。 予則以爲貽燕裕昆之謨, 亦無出於此。 且予於凡事, 方其經營料度之時, 則固不厭爛漫消詳, 而及其旣斷於心之後, 則不無一氣架成之意。 予今如是言之者, 欲令廷臣, 洞知予意, 皆思革舊圖新, 共奬王室之道也。 予如是言之之後, 若猶有不率敎者, 則當以刑法威之, 斷不饒貸矣。" 鍾秀曰: "趙時偉事出後, 人以爲此是盡殺一邊之計云, 故臣於丙午秋閣中, 語一僚官云: ‘有罪則當死, 無罪者亦豈死乎? 如有敢萌因一人而盡殺一邊之心者, 則天理孔昭, 聖明在上, 不但其計不能售而已, 渠必先死云云。’ 臣非敢期人之信己, 只是道理自如此, 故公共地說出如此矣。" 上曰: "卿之本來秉心持論之如此, 知之者少。 此予之所嘗爲卿深悶, 爲世人深慨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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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2년 (1788) 7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