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16권, 정조 7년 12월 5일 壬戌 2/2 기사 / 1783년 청 건륭(乾隆) 48년
옥천인 정윤환이 목멱산 봉수대 근처에 방화하니 잡아 심문하다
국역
이때에 정윤환(鄭潤煥)이라는 옥천(沃川) 사람이 목멱산(木覓山) 봉수대(烽燧臺) 근처에서 방화(放火)했었는데, 병조에서 잡아다가 심문하니, 그의 조부 정시웅(鄭時雄)이 무신년238) 에 군공(軍功)이 있었는데도 상문(上聞)할 길이 없으므로 이런 방화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공칭(供稱)하므로, 형조에 돌리어 조율(照律)하게 했었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마땅히 《속대전(續大典)》에 의하여 일률(一律)을 시행해야 합니다. 교형(絞刑)과 참형(斬刑) 및 대시(待時)와 부대시(不待時)의 구별에 있어서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변사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속대전》 금제조(禁制條)에 ‘송전(松田)에 방화한 자는 일률로 논죄(論罪)한다.’고만 하였고, 또한 교형과 참형을 구별하는 조문은 없습니다. 《대명률(大明律)》 고소인방실조(故燒人房室條)에는 ‘만일에 방화하여 고의로 소각한 것이 관(官)에서 쌓아놓은 물건에 관계된 자는 참대시(斬待時)한다.’고 하였고, 송전(松田)의 방화도 일률(一律)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의로 관(官)에서 쌓아둔 것을 불태운 것도 오히려 또한 대시참(待時斬)한다면, 하물며 이번에 방화한 변은 연대(烟臺)의 3보(步) 이내에서 생긴 것이니, 범한 죄의 무거움이 관계가 얼마나 한 것이겠습니까? 허위로 봉화(烽火)를 올린 것도 연대(烟臺)와 딴 곳을 막론하고 다같이 일률(一律)을 적용하게 되니, 이는 일률의 부대시참(不待時斬)이 되어야 할 것이 의심 없습니다. 다만 방화와 허위 봉화는 매우 차이가 있는 것이어서 마땅히 부대시와 대시의 구별이 있어야 할 것이니, 허위 봉화를 든 것은 마땅히 부대시참으로 해야 하고, 연대 근처에 방화한 것은 대시참으로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마는, 이는 일률의 정제(定制)에 관한 것이므로 삼가 위에서 재량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들의 의논이 옳다. 이렇게 차등을 두는 것이 매우 공편하고 합당할 듯하니 초기(草記)대로 시행해야 하나, 대저 법령은 한 번 창시(創始)되면 영구히 바꾸지 않는 사례가 되어버리는데, 형살(刑殺)에 관한 일이니 마땅히 더욱 진념(軫念)해야 한다. 만일에 아무 정실(情實)도 없고 마음을 쓴 것이 아닌 유(類)에 있어서도 모두 이 율(律)을 인용하게 된다면, 이는 어찌 자아작고(自我作故)와 다르게 되겠느냐? 70년 뒤에는 다시 형극(荊棘)이 열리게 되어질 것을 옛사람도 오히려 또한 난처하게 여겼었으니, 또한 어찌 오늘날에도 유의(留意)해야 할 대목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런 뜻으로 유사(有司)에게 분부하여 즉시 수교(受敎)에다 수록(收錄)하게 하여, 뒷날에 용서할만 하기도 하고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한 경우에 억지로 원용(援用)하게 되지 말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 [註 238]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원문
○時有沃川人鄭潤渙者, 放火于木覔山烽臺近處。 兵曹捕問。 供稱其祖時雄, 有戊申軍功, 無路上聞, 爲此放火之擧。 付刑曹照律。 刑曹啓言: "當依《續大典》, 以一律施行。 而絞、斬與待時、不待時之區別, 請令廟堂稟處。" 備邊司覆啓: "《續大典》 《禁制條》云: ‘松田放火者, 以一律論。’ 亦無絞斬區別之文。 《大明律》 《故燒人房室條》云: ‘若放火故燒, 係官積聚之物者, 斬待時。’ 松田放火, 至爲一律, 故燒官積聚, 猶且待時而斬, 則況今放火之變, 出於烟臺三步之內, 其所犯之重, 何等關係? 僞擧烽火者, 勿論烟臺與他處, 竝用一律, 其一律之爲不待斬無疑也。 但放火與僞烽, 煞有差間, 則當有不待時與待時之別, 擧僞烽者, 當爲不待時斬。 烟臺近處放火者, 似當爲待時斬, 而係是一律定制, 伏惟上裁。" 批曰: "卿等之議是矣。 如是差等, 似甚便當, 依草記施行, 而大抵法令, 一番創始, 永作不易之例。 事係刑殺, 尤所當軫。 若於無情實、不用意之類, 竝引此律, 是何異於自我作古也? 七十年之後, 復開荊棘, 古人猶且難之, 亦豈非今日留意處乎? 竝以此意, 分付有司, 俾卽載之受敎, 後勿勒援於可恕、不可恕之間可也。"
정조 7년 (1783) 12월 5일
국역
이때에 정윤환(鄭潤煥)이라는 옥천(沃川) 사람이 목멱산(木覓山) 봉수대(烽燧臺) 근처에서 방화(放火)했었는데, 병조에서 잡아다가 심문하니, 그의 조부 정시웅(鄭時雄)이 무신년238) 에 군공(軍功)이 있었는데도 상문(上聞)할 길이 없으므로 이런 방화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공칭(供稱)하므로, 형조에 돌리어 조율(照律)하게 했었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마땅히 《속대전(續大典)》에 의하여 일률(一律)을 시행해야 합니다. 교형(絞刑)과 참형(斬刑) 및 대시(待時)와 부대시(不待時)의 구별에 있어서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변사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속대전》 금제조(禁制條)에 ‘송전(松田)에 방화한 자는 일률로 논죄(論罪)한다.’고만 하였고, 또한 교형과 참형을 구별하는 조문은 없습니다. 《대명률(大明律)》 고소인방실조(故燒人房室條)에는 ‘만일에 방화하여 고의로 소각한 것이 관(官)에서 쌓아놓은 물건에 관계된 자는 참대시(斬待時)한다.’고 하였고, 송전(松田)의 방화도 일률(一律)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의로 관(官)에서 쌓아둔 것을 불태운 것도 오히려 또한 대시참(待時斬)한다면, 하물며 이번에 방화한 변은 연대(烟臺)의 3보(步) 이내에서 생긴 것이니, 범한 죄의 무거움이 관계가 얼마나 한 것이겠습니까? 허위로 봉화(烽火)를 올린 것도 연대(烟臺)와 딴 곳을 막론하고 다같이 일률(一律)을 적용하게 되니, 이는 일률의 부대시참(不待時斬)이 되어야 할 것이 의심 없습니다. 다만 방화와 허위 봉화는 매우 차이가 있는 것이어서 마땅히 부대시와 대시의 구별이 있어야 할 것이니, 허위 봉화를 든 것은 마땅히 부대시참으로 해야 하고, 연대 근처에 방화한 것은 대시참으로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마는, 이는 일률의 정제(定制)에 관한 것이므로 삼가 위에서 재량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들의 의논이 옳다. 이렇게 차등을 두는 것이 매우 공편하고 합당할 듯하니 초기(草記)대로 시행해야 하나, 대저 법령은 한 번 창시(創始)되면 영구히 바꾸지 않는 사례가 되어버리는데, 형살(刑殺)에 관한 일이니 마땅히 더욱 진념(軫念)해야 한다. 만일에 아무 정실(情實)도 없고 마음을 쓴 것이 아닌 유(類)에 있어서도 모두 이 율(律)을 인용하게 된다면, 이는 어찌 자아작고(自我作故)와 다르게 되겠느냐? 70년 뒤에는 다시 형극(荊棘)이 열리게 되어질 것을 옛사람도 오히려 또한 난처하게 여겼었으니, 또한 어찌 오늘날에도 유의(留意)해야 할 대목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런 뜻으로 유사(有司)에게 분부하여 즉시 수교(受敎)에다 수록(收錄)하게 하여, 뒷날에 용서할만 하기도 하고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한 경우에 억지로 원용(援用)하게 되지 말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 [註 238]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원문
○時有沃川人鄭潤渙者, 放火于木覔山烽臺近處。 兵曹捕問。 供稱其祖時雄, 有戊申軍功, 無路上聞, 爲此放火之擧。 付刑曹照律。 刑曹啓言: "當依《續大典》, 以一律施行。 而絞、斬與待時、不待時之區別, 請令廟堂稟處。" 備邊司覆啓: "《續大典》 《禁制條》云: ‘松田放火者, 以一律論。’ 亦無絞斬區別之文。 《大明律》 《故燒人房室條》云: ‘若放火故燒, 係官積聚之物者, 斬待時。’ 松田放火, 至爲一律, 故燒官積聚, 猶且待時而斬, 則況今放火之變, 出於烟臺三步之內, 其所犯之重, 何等關係? 僞擧烽火者, 勿論烟臺與他處, 竝用一律, 其一律之爲不待斬無疑也。 但放火與僞烽, 煞有差間, 則當有不待時與待時之別, 擧僞烽者, 當爲不待時斬。 烟臺近處放火者, 似當爲待時斬, 而係是一律定制, 伏惟上裁。" 批曰: "卿等之議是矣。 如是差等, 似甚便當, 依草記施行, 而大抵法令, 一番創始, 永作不易之例。 事係刑殺, 尤所當軫。 若於無情實、不用意之類, 竝引此律, 是何異於自我作古也? 七十年之後, 復開荊棘, 古人猶且難之, 亦豈非今日留意處乎? 竝以此意, 分付有司, 俾卽載之受敎, 後勿勒援於可恕、不可恕之間可也。"
원본
정조 7년 (1783) 1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