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67권, 영조 24년 5월 23일 丙午 3/3 기사 /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금상문에 나아가 호서의 죄인 이지서 등을 친국하다
국역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호서(湖西)의 죄인을 친국(親鞫)하였다. 이지서(李之曙)를 신문하기를,
"호서의 장계(狀啓)를 살펴보건대, 고사리를 캐면서 은(殷)나라 백성을 보호하겠다는 시는 음험하고 참혹하고 망측한 것이어서 이미 말할 수 없는 것이거니와, 기타 수상하여 의심스러운 자취가 한둘이 아니다. 비기(秘記)의 글자를 가지고 연한(年限)을 손가락을 꼽아서 가리켰으며, 도신(道臣)이 추문할 때 혀를 깨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더욱 음험한 데 관계된다. 장전(帳殿)에서 친문(親問)하는 마당에 어찌 감히 숨길 수 있겠는가? 사실대로 직초(直招)하라."
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부(父)·조(祖) 이래 문자를 알지 못합니다. 집에서 수색하여 가지고 온 책에는 여서(女婿) 신치(申㴛)의 책이 있는데, 이 책의 하단에 기재된 잡기(雜記)에는 음험한 말이 없습니다. 고사리를 캔다는 시는, 시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망발한 것이지 어찌 역심이 있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뜻을 펼 수 있다.[意可伸]’는 말은 과거에 급제하여 의기(意氣)를 펴고 싶다는 뜻입니다. 초구(初句)는 과연 망발이었는데, ‘이 세상에서 내가 어디로 귀의하겠는가? [斯世吾安歸]’ 하기가 미안했기 때문에 고친 것입니다. 나무꾼과 목동들도 모두 시비가 있기 때문에 시비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이는 모두 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데 어떻게 감히 숨기겠습니까? 성상께서 삼색(三色)을 공통으로 기용하고 계신데, 신이 어찌 털끝만큼인들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신은 글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장(科場)에 출입한 적이 없었고, 아들이 다섯이므로 과거를 관광(觀光)하기 위해 왕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신의 아들들도 아직 경과(京科)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지시(李之時)가 참수된 뒤에 있었던 토역과(討逆科)를 신 또한 어찌 보지 않았겠습니까?"
하자, 우선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박철택(朴哲澤)을 신문하기를,
"본도(本道)에서 추문할 때 일절(一節)에 대해서는 직초(直招)했지만 지금 친문(親問)하는 마당에 상세히 고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일일이 직초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의 어미가 지난해 3월 사망했기 때문에 금년 소상(小祥)에 신이 제수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조탄(鳥灘)의 시장으로 가는 길에 형강(荊江)을 건너게 되었는데, 배가 고파 요기하는 즈음에 갑자기 박민추(朴敏樞)를 만났습니다. 박민추가 말하기를, ‘도선(道詵)의 비기(秘記)가 있는데 용두(龍頭)와 사미(蛇尾)에 대해 운운한 것이 있다. 용두는 곧 무진년 정월(正月)이고, 사미는 곧 기사년 12월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왜인(倭人)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올라오는데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닌 궁궁(弓弓)이 이롭다고 했다. 그러나 이른바 궁궁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신이 그에게 들은 것은 이것뿐이었으며, 이를 본 고을의 이청(吏廳)에 전하였습니다. 그 뒤에 괘서의 변이 있었으므로 본 고을의 이방과 감영의 군관 이필관(李必寬)이 기찰하기 위해 박민추에게 가서 물어 보았습니다만, 그 뒤 이방이 관령(官令)에 의해 신을 불러 관가로 데리고 들어갔었으며 또 박민추도 불러서 공초를 받았습니다. 그 뒤 신이 시장에 갔더니, 박민추가 신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조탄에서 말한 것은 옛날 이야기인데, 네가 누구에게 전파했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과연 이청(吏廳)에 전하였다.’ 하니, 박민추가 두려운 빛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앞으로는 다시 말하지 말라.’고 운운했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박험백(朴驗白)에게 신문하기를,
"너는 관계되는 것이 없으니, 한결같이 들은대로 직고(直告)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오래도록 병을 앓았는데, 조금 차도가 있어 읍내로 들어갈 즈음 나무꾼의 말이 익명서가 뒷들판에 버려져 있다고 하자, 이름을 모르는 어떤 통인(通引)이 홍세재(洪世在)를 시켜 가 보게 하였는데, 그가 박철택에게 전하였으므로 읍내에 전파되었고 사람들이 모두 찾아보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이청(吏廳)으로 입송(入送)하게 된 것이요 신의 형 박민추는 원래 신과 함께 비기의 일에 대해 수작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김재형(金再炯)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곧 관리입니다. 이방(吏房) 홍천범(洪天範)이 괘서(掛書)를 가지고 와서 보였는데, 그때가 곧 4월 18일이었습니다. 신이 병방·이방과 함께 같이 보았는데, 그 글에 ‘문의 고을의 백성들이 내달 15일에 의당 어육(魚肉)이 될 것이니, 알아서 피하라.’는 내용이 있었고, 또 ‘회덕(懷德)도 그들의 당여이고 회인(懷仁)도 그들의 당여이며 병사(兵使)도 그들의 당여이다.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오는데 물도 이롭지 않고 산도 이롭지 않고 궁궁(弓弓)이 이롭다. 이 고을에 대인(大人)과 명장(名將)이 있다.’고 운운하고서 ‘여기에서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밖에는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글은 5, 6행이었는데, 신이 박철택에게 비기(秘記)에 대해 장의(掌議) 박민추에게서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순세재(順世才)에게 신문하기를,
"오명후(吳命垕)는 어떤 사람인가? 좌수(座首)의 아들이 어찌 역노(驛奴)의 처남이 될 수 있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좌수 오수만(吳遂萬)이 첩을 얻어 딸을 낳았는데, 두 남자를 거쳐 신에게 시집왔습니다."
하였다. 신문하기를,
"이사정(李思正)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신의 고을에 사는 이진사(李進士)의 아들입니다."
하였다. 괘서의 일에 대해 신문하기를,
"너는 오명후에게서 들었다고 하고, 오명후는 너에게서 들었다고 하니, 네가 전파한 것이 아닌가? 이 일절(一節)에 대해 직고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문의의 역노(驛奴)이고, 오명후는 곧 신의 처남입니다. 날짜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4월 사이에 오명후가 이사정의 대상(大祥)에 갔다가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근래 괘서의 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어떠했는가?’ 하기에, 신이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오수만을 신문하기를,
"박민추가 너에게 ‘남방의 봉화(烽火)가 제대로 올려지지 않고, 북쪽 변방의 성책(城柵)을 물렸으니, 오래지 않아 난(亂)이 일어날 것이다. 좌수는 어디로 피할 것인가?’라는 등등의 말을 한 것이 사실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과연 있었습니다. 신이 박민추의 말을 듣고 답하기를, ‘무신년 난리에도 내가 피하지 않았는데 지금 어디로 피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박민추가 말하기를, ‘방(榜)을 내건 일에 대해 들었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관가에서 방을 내건 일이 있기는 하지만 양반이 어떻게 방을 내건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하였습니다. 박민추가 말하기를, ‘궁궁(弓弓)이 이롭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궁궁은 활의 허리[弓腰]를 가리키는 것 같다. 따라서 구부러진 곳[劣處]에 숨으라는 말이다. 【궁요(弓腰)는 속음(俗音)이 열(劣) 자의 뜻을 해석한 것과 같다.】 ’ 하였고, 봉화에 대한 일은, ‘청주(淸州)의 봉화는 사천(泗川)에서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문의(文義)의 동쪽은 전토가 좋고 회인(懷仁)의 북쪽은 산수가 좋아 그리로 옮겨가 살려고 한다.’ 하였으며, 신의 아들 오명후가 비기를 등서(謄書)한 것을 비치한 것이 있었는데, 이지서(李之曙)의 아들 이항연(李恒延)이 가지고 갔습니다. 그것은 신의 아들이 일찍이 그의 처남인 박세렴(朴世濂)에게서 빌려 온 것이었습니다. 이지서가 또 신에게 이르기를, ‘장차 난리가 일어날 것인데 노인은 어떻게 피할 터인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피하여 갈 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오명후를 신문하기를,
"박민추와 수작한 말을 이미 본도(本道)에서 추문(推問)할 적에 직초(直招)하였다. 친문하는 것은 사체가 중한 것이니, 다시 하나 둘 숨김없이 말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이지서의 집에 갔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근일 날씨가 청명한데도 봉화를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들의 말에 흉흉한 것이 많아서 어떤 사람은 왜인이 온다고 하기도 하지만, 실은 왜인이 아니고 거짓 왜인의 모양을 꾸며가지고 오는데 이들은 무신년066) 의 여당(餘黨)들로서 해도(海島)에 가 있던 자들이다.’ 하므로, 신이 묻기를, ‘어떻게 그런 줄 알았는가?’ 하니, 말하기를, ‘단지 결과만 살펴보면 된다.’ 하였습니다. 4월 초에 이지서가 또 와서 말하기를, ‘봉화를 지금까지 들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일이 났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3월에 서로 만났을 적에는 이지서가 말하기를, ‘만일 난리가 일어나면 일찍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뒤에 신이 또 이지서의 집에 갔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변란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으며, 그 뒤에 이지서가 또 용두(龍頭)와 사미(蛇尾) 등의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반드시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함께 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궁궁은 무슨 뜻인가?’ 하니, 말하기를, ‘광활하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뒤에 신이 또 이지서의 집에 갔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신사(信使)도 또한 들어가지 못하고 있고, 지금의 소식도 자못 소요스러우니, 난리가 일어나려면 속히 일어나는 것이 시원하겠다.’ 하고, 이항연(李恒延)은 말하기를, ‘비기에 이르기를, 「무진년의 일은 알 수 있고, 경오년에는 즐거움이 당당하다.」고 하였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말하기를, ‘사(事) 자는 난리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뜻이고, 낙(樂) 자는 즐거운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비기책을 이 항연이 가지고 가서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는데, 그 안에 이런 구어(句語)가 있었습니다. 박민추가 수감된 뒤 신이 들어가서 물어 보니, 답하기를, ‘일찍이 박철택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는데, 그 때문에 수감된 것이다.’ 했습니다. 금년 3월 이지서가 와서 도정(都政)의 일에 대해 말하기를, ‘이런 하늘 밑에서 남인(南人)이 어떻게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이어 투서의 일에 대해 말하기를, ‘지난번 어떤 사람이 선전 관청(宣傳官廳)에 투서하였는데, 그 글에 「남쪽은 왜(倭)와 접해 있고 북쪽은 호(胡)와 접해 있다.」고 했으며, 투서한 사람은 방금 체포하여 수감하였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자, 형추(刑推)하라고 명하여 다섯 대를 친 다음 형장을 정지시키고 막에 내렸다. 박민추를 신문하기를,
"국년(國年)을 손가락을 꼽아서 가리킨 것은 그 의도가 음험하고 참혹한 데 관계가 된다. ‘봉화를 들지 않는 것은 왜인이 오는 것 같고 북쪽 또한 위태로워 지금 막 성책(城柵)을 물리고 나자 칙사(勅使)가 나왔다.’고 한 말은 더욱 망측한 것으로, 무슨 심장을 지녔기에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과 함께 난만하게 주무(綢繆)하였는가? 일일이 직초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곧 교생(校生)으로 서얼(庶孽) 동생 박험백(朴驗白)이 있는데, 본도에 전후 납초(納招)한 것이 모두 이미 올라왔을 것이니, 참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기(秘記)에 대한 일은 이지서의 아들 이영손(李榮孫)을 길가의 나무 밑에서 만났는데, 이영손이 말하기를, ‘용두(龍頭)와 사미(蛇尾)에 대한 말은 용은 곧 진(辰)이고 사는 곧 사(巳)이며, 두(頭)는 정월(正月)이고 미(尾)는 곧 납월(臘月)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괘서가 나온 뒤에 신이 마음속으로 이지서가 했는가 의심하여 가서 이지서를 만났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네가 와서 나를 만나는 것이 수상하다. 전일 네가 괘서의 글씨가 잘 써진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은 잘 써져 있다.’ 하였으므로, 신이 이 때문에 더욱 이지서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이영손이 전에 한 말을 가지고 물어 보았더니, 이지서가 사미(蛇尾)라는 글자를 사반(蛇盤)으로 고쳐 말하였고, 궁궁(弓弓)은 광활하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 말이 어느 책에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비기에 있는데 그 책이 오명후의 집에 있다.’고 하기에, 신이 오명후의 집에 갔었습니다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달 초닷샛날 또 가서 보게 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오명후가 끝내 내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역년(歷年)에 대한 일은 오수만이 신에게 말하여 주었는데, 신은 명을 재촉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영손을 신문하기를,
"너의 형이 비기를 등서하여 비치했다는 이야기를 오명후가 이미 말하였다. 본도(本道)에서 추문할 때 네가 박민추에게서 들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오명후에게 들었다고 핑계 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네가 과연 오명후에게 듣고서 박민추에게 말하였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3월에 오명후가 신의 형에게 말하기를, ‘비기에 운운했다.’고 했으므로, 신이 박민추에게 전했는데, 본도에서 추문할 때에는 안정(顔情)에 구애되어 오명후가 와서 고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자, 형추(刑推)하라고 명하여 두 대를 치고 나서 형장을 정지하게 하였다. 이항연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박민추가 와서 말하기를, ‘근일 봉화를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전일 정진하(鄭震夏)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비기에 용두(龍頭)·사미(蛇尾)·궁궁(弓弓) 등의 글이 있는데, 용사(龍蛇)는 진사(辰巳)를 가리킨 것이고 궁궁은 활활(闊闊)을 가리킨 것 같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절대 낭설을 하지 말라. 만일 진실한 이야기가 있으면 모쪼록 상세히 알려 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오명후의 죄에 대해서 청컨대 신이 아뢰겠습니다. 그의 아비가 여러 해 동안 문의에서 좌수를 지냈으므로 권세가 한 고을을 뒤흔들었는데, 소요스런 이야기를 만들어 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양반의 권세를 의지하지 말라. 의당 귀한 자가 천하게 되고 천한 자가 귀하게 되는 세상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금년 정월에 오명후의 아비가 술을 따라 신에게 권하면서 말하기를, ‘양반의 교만한 기세를 부리는 짓을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4월에 신이 처조부의 회장(會葬)에 갔다가 두루 거쳐 오명후의 아비를 만나 보았는데, 말하기를, ‘읍내의 괘서에 무슨 말이 쓰여 있던가? 나의 사위 순세재(順世才)가 와서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신이 낚시를 하고 돌아가다가 오명후를 만났는데, 말하기를,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 괘서에 5월 15일은 불길하다는 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박민추가 수감된 뒤 오명후가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박민추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영옥(營獄)에 갇혔다고 들었는데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 지 모른다고 한다.’ 하니, 오명후가 말하기를, ‘박민추가 비기 때문에 수감되었는데 괘서도 비기와 같다고 한다. 잘 말하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다. 비기를 보관하고 있는 자는 반드시 이 괘서의 죄를 받게 될 것이니, 비기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오명후와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이항연의 말이 많이 굽혔으므로, 오명후를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다시 이항연을 신문하기를,
"고사리를 캔다는 시는 무슨 뜻인가? 삼부자가 과장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또 무슨 의리인가? 너희 부자가 오래도록 나라를 원망하는 것을 일삼으면서 왜(倭)와 호(胡)가 오기를 기다리기에 이르렀으니, 그 또한 무슨 심장이란 말인가? 본도에 수감될 때 너의 손바닥에 너의 아비가 무슨 글자를 써서 보여 주었는가? 소요스러운 괘서의 근본은 곧 이 비기인데 이것이 모두 너에게 있으니, 소요스런 괘서를 낸 것이 네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대궐에 투서한 것이 문의에서의 괘서와 같은 맥락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간증(看證)이 이미 갖추어져 있고 문서를 압수했으니, 어떻게 감히 숨길 수 있겠는가? 하나하나 직초하라."
하고, 형추하여 세 대를 치니, 공초하기를,
"신의 삼부자가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것은 글을 하지 못한 소치인 것입니다. 소요스런 말을 듣기를 즐겨한 것은 노부모를 데리고 피란할 계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자, 형추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오명후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지서가 항상 말하기를, ‘울릉도 건너편에 황진기(黃鎭紀) 등 무신년의 여당(餘黨)이 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황진기가 죽지 않았으면 반드시 나올 것이다.’ 했기 때문에, 신이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아는가?’ 하니, 이지서가 언근(言根)은 말하지 않고 단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단지 말초(末梢)를 살펴볼 뿐이다.’ 하였습니다. 이지서가 묵정동(墨井洞)에 가서 투서에 대한 일을 듣고 와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선전관 관소(官所)에 투서하고 도망갔는데, 그 물색(物色)을 본 사람이 수염이 있고 얼굴이 검다고 했기 때문에 포청(捕廳)의 군사가 어떤 고개에서 만나서 체포했다고 한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근래 일고 있는 소요스러운 일이 어찌 모두 근거가 있는 것이겠는가? 청주(淸州) 우규장(禹圭章)의 일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자기 첩의 아우의 혼사를 속히 이루게 하기 위하여 그가 돈 10냥을 받아 먹었는데 혼사가 오래되면 이루어지지 않게 생겼기 때문에 이렇게 소요스러운 일을 일으켜 공연히 전파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다시 이지서를 신문하기를,
"황적(黃賊)이 아직도 영남의 큰 섬에 둔취(屯聚)해 있으니 의당 한 번 소동을 일으키기 위해 나올 것이라고 했으며, 곧 대궐에서의 익명서 내용의 한 가지 일인 이른바 큰 섬이라는 것은 곧 울릉도 건너편의 큰 섬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적과 마음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투서의 내용은 조사(朝士)라 할지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문데, 네가 이른바 남쪽의 왜(倭), 북쪽의 호(胡), 서쪽의 달(韃)이라고 한 말은 또한 투서 내용의 어의(語意)와 똑같다. 왜복(倭服)을 입고 일을 일으킨다고 한 것도 또한 그런 뜻이다. 대궐에 투서한 것, 청주에서 소요를 일으킨 것, 문의에서의 괘서가 여지없이 탄로가 났으며, 또 장전(帳殿)에서 친문(親問)할 때의 한두 구어(句語)는 부도하다고 이를 만하다. 더구나 시구 가운데 한두 구어는 음험하고 참담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 이항연의 팔뚝에 써 준 것 또한 음험하고 참혹한 데 관계되는 것이다. 이른바 스스로 맹세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은밀히 현착(現捉)되기를 기다려 스스로 부도스런 말을 한 여러가지 증거가 갖추어졌는데 이런 등등의 음모는 결단코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니, 공모한 사람이 누구인가? 이른바 해도(海島)라는 것은 그 이름이 또한 무엇인가? 서로 내통하지 않았으면 결단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무신년의 여당 가운데 둔취해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 먼저 대궐에 투서하고 나서 비기의 내용을 창언하였으며, 또 소요를 일으켰고 끝에 가서는 괘서를 냈으니, 반드시 경영하여 배포한 경로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하나하나 직초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초엿샛날 이른 아침에 박민추가 찾아와서 ‘봉화를 들지 않고 있는데 전의 사서(史書)에도 이런 예가 있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전의 사서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손바닥에 써서 보인 일은, 신의 뜻은 이 일을 발명(發明)하지 못하면 죽어도 더러운 귀신이 되어 버릴 것이니 아비의 분묘옆에 묻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울릉도에 대한 이야기는 만일 혹시 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가서 의뢰할 수 있겠습니까? 역적은 반드시 이사성(李思晟)·남태징(南泰徵) 같은 자들과 손을 잡은 연후에야 거사할 수 있는 것인데, 사자(士子)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박민추에 대해서는 또 한가지 일이 있는데, 그의 사촌 박취문(朴就文)과 처남 이태위(李泰渭)는 모두 무신년 역적에 들었다가 도망한 사람들입니다."
하자, 형문하여 일곱 대를 치고 나서 형장을 정지시킨 다음 막에 내리게 하였다. 다시 박민추를 신문하기를,
"소요스런 내용으로 괘서를 내기 전에 먼저 박철택(朴哲澤) 등에게 전포(傳布)한 것은 이미 수상한 일에 관계가 된다. 비기의 내용을 이지서에게 듣고 오명후에게서도 들었는데, 사람을 만날 적마다 뜻을 알려고 한 것은 더욱 음험하고 참혹한 데에 관계가 된다. 비기 안의 3백 80년이라는 이야기를 손가락을 꼽아 연수(年數)를 계산하여 오수만과 오명후에게 말하고서도 이제 체포된 것을 인하여는 이지서에게 미루기도 하고 오명후에게 미루기도 하여 마치 가리켜 고발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또한 음휼한 데 관계가 된다. 너와 이지서·오명후는 똑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는데, 더구나 이지서의 공초에 너의 사촌과 처남이 무신년 역적에 들었다가 도망한 자들이라고 했는데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사이의 사상(事狀)을 숨김없이 직고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이지서가 혼자서 하였고 신은 본디 함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자, 형문하여 열한 대를 치고 나서 형장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친국(親鞫)을 우선 파하고 내일 아침을 기다려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92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변란-정변(政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출판-서책(書冊)
- [註 066]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원문
○上御金商門, 親鞫湖西罪人。 問李之曙曰: "以湖西狀啓觀之, 作採薇保殷民之詩, 陰慘叵測, 已不可言, 其他殊常可疑之迹, 不一。 以秘記, 屈指年限, 道臣推問之時, 嚼舌不語, 尤涉陰慘。 帳殿親問, 焉敢隱諱? 從實直招。" 供: "臣自父祖以來, 不解文字。 家中搜來之冊, 又有女壻申㴛之冊, 而此冊下雜記, 無陰險之語。 採薇之詩, 不解詩, 故妄發, 豈有逆心而爲此乎? 意可伸之語, 欲登科而伸意氣也。 初句果是妄發, 斯世吾安歸未安, 故改之, 樵童、牧竪, 皆有是非, 故有是非之語。 皆不成語, 何敢隱諱乎? 聖上通三色用之, 臣豈有毫末怨國之心? 臣無文, 未嘗出入科場, 而有五子, 故觀光往來甚難。 臣之子亦未見京科。 之時斬後討逆科, 臣亦豈不見乎?" 命姑下幕。 問朴哲澤曰: "本道推問時一節, 其雖直招, 今於親問之下, 不可不詳告。 一一直招。" 供: "臣母上年三月身死, 今年小祥, 臣爲備祭需, 親往鳥灘市, 將渡荊江, 療飢之際, 忽逢朴敏樞, 則敏樞曰, ‘道詵有秘記矣, 龍頭蛇尾云云。 龍頭, 卽戊辰正月, 蛇尾, 卽己巳臘月。’ 又曰: ‘似倭非倭, 自南而來, 非山非水, 利於弓弓。 所謂弓弓, 未可知也。’ 臣所聞於渠者只此, 而傳于本官吏廳矣。 其後有掛書事, 本官吏房及監營軍官李必寬譏察往問於朴敏樞, 則敏樞所言與前同。 其後吏房以官令, 招臣入官家, 又招敏樞捧供。 後臣到場市, 則敏樞語臣曰, ‘向於鳥灘說古談矣, 汝向誰傳之。’ 答曰, ‘果傳于吏廳矣。’ 敏樞有懼色, 曰, ‘後勿復言云云。’ 命下幕。 問朴驗白曰: "爾無所關, 一從所聞直告。" 供: "臣久病而差, 入邑內之際, 樵軍言, 有匿名書, 棄在後野, 通引不知名者, 使令洪世在見之, 持傳於哲澤, 邑內傳播, 人皆覓見。 故入送吏廳, 而臣之兄敏樞, 元無與臣酬酢秘記事矣。" 命下幕。 問金再炯, 供: "臣卽官吏也。 吏房洪天範持示掛書, 時則四月十八日也。 臣與兵房、吏房同見之, 其文有曰, ‘文義邑底民人, 來月十五日, 當爲魚肉, 知而避之。’ 又曰, ‘懷德其黨, 懷仁其黨, 兵使亦其黨。 似倭非倭, 自南而來, 不利於水, 不利於山, 利於弓弓。 此邑有大人、名將’ 之云云, ‘若不出於此, 則其禍必大矣。 此外不能記得。 文可五六行, 而臣言哲澤聞秘記於朴掌議敏樞處云云矣。" 命下幕。 問順世才曰: "吳命垕何許人? 座首之子, 豈爲驛奴之妻娚乎?" 供: "吳座首遂萬得妾生女, 而經二夫, 歸於臣矣。" 問: "李思正何如人?" 供: "臣邑中李進士子也。" 問掛書事, "汝則聞於命垕, 命垕則聞於汝, 無乃汝之傳播耶? 此一節直告。" 供: "臣卽文義驛奴, 吳命垕, 卽臣妻娚也。 日不記四月間, 命垕往見李思正大祥, 而來見臣曰, ‘吾聞近有掛書, 其中說話何如?’ 臣答以不知。" 命下幕。 問吳遂萬曰: "敏樞語汝云, ‘南方烽火不擧, 北邊退柵, 非久亂作。 座首何處避之?’ 等說, 果然乎?" 供: "果有之矣。 臣聞敏樞語, 答以 ‘戊申之亂, 吾不避矣, 今何避乎? 敏樞曰, ‘掛榜事聞之否?’ 答以 ‘官家雖有掛榜事, 兩班豈可言掛榜事乎?’ 敏樞曰, ‘利於弓弓之說云, 何?’ 臣曰, ‘弓弓, 似指弓腰也。 藏於劣處之謂也。 【弓腰俗音與劣字釋義同。】 烽火事, ‘淸州烽火, 自泗川入來’ 云矣。 臣又曰, ‘文義之東, 田土好, 懷仁之北, 山水好, 思欲移居,’ 臣子命垕有秘記謄置者, 之曙之子恒延取去。 臣之子曾所借來於渠之妻娚朴世濂者也。 之曙又謂臣曰, ‘亂離將作, 老人何以避之?’ 臣曰: ‘吾則無避去之意’ 矣。" 命下幕。 問吳命垕曰: "與敏樞酬酢之語, 已爲直招於本道推問。 親問體重, 更爲一二無隱。" 供: "臣往李之曙家, 之曙曰, ‘近日淸明, 烽火不擧, 何也? 人言多洶洶, 或言倭來, 而實非倭也, 假作倭樣而來, 此蓋戊申餘黨之在海島者也。’ 臣問, ‘何以知之?’ 曰, ‘但觀末終可也。’ 四月初之曙又來言曰, ‘烽火至今不擧, 事必出矣。’ 且三月相見之時, 之曙曰, ‘若亂作, 則早出好矣。’ 後臣又往之曙家, 之曙曰, ‘變必作矣。’ 其後, 之曙又擧龍頭蛇尾等說而曰, ‘必有亂作, 偕往爲宜。’ 臣曰, ‘弓弓何意?’ 曰, ‘廣闊之意也。’ 後臣又往之曙家, 則之曙曰, ‘信使亦不得入去, 時奇頗騷屑, 亂如作則速作爲快。’ 恒延曰, ‘秘記云 「戊辰事可知, 庚午樂堂堂」,’ 臣曰, ‘何謂也?’ 曰, ‘事字亂必作也, 樂字有可樂之事也。’ 秘記冊, 恒延持去, 尙未推還, 而其中有此句語矣。 敏樞就囚後, 臣入問, 則答云, ‘曾於哲澤處有此說話矣, 因此而見囚矣。’ 今三月之曙來言都政事曰, ‘此天之下, 南人豈得爲官乎?’ 仍言投書事曰, ‘頃者有人投書於宣傳官廳, 其書曰, 「南接倭, 北接胡,」 投書人, 今方捉囚,’ 云矣。" 命刑推五度, 停刑下幕。 問朴敏樞曰: ‘屈指國年, 意涉陰慘。 ‘烽火不擧, 似是倭來, 北亦殆矣, 今方退柵, 勑使來’ 云者, 尤爲叵測。 有何心腸, 而與怨國之徒, 爛漫綢繆乎? 一一直招。" 供: "臣卽校生, 而有孽同生名驗白, 本道前後納招, 皆已上來, 可以參酌矣。 秘記事, 逢之曙子榮孫於路傍樹下, 榮孫曰, ‘龍頭、蛇尾之語, 龍卽辰, 蛇卽巳, 頭卽正月, 尾卽臘月,’ 云矣。 掛書出後, 臣心疑之曙爲之, 往見之曙, 則之曙以爲 ‘汝之來見我殊常。 前日汝以爲掛書不善書矣, 今則果善書, 矣。 以此臣益疑之曙。 仍以榮孫前所言者問之, 則之曙以蛇尾字變爲蛇盤, 以弓弓爲廣闊之意。 臣曰, ‘此語在何書?’ 答曰, ‘在秘記, 而冊在命垕家。’ 臣往命垕家, 不遇。 今月初五日, 又往求見, 而命垕終不出示矣。 歷年事, 遂萬言於臣, 臣以爲有促命之人矣。" 命下幕。 問榮孫曰: "汝兄秘記謄置之說, 命垕已言之。 本道之推, 汝聞於敏樞云, 而今者推諉於命垕, 何也? 汝果聞於命垕而言於敏樞乎?" 供: "三月, 命垕言於臣兄曰, ‘秘記云云,’ 臣傳之敏樞, 而本道推問時, 拘於顔情, 不告命垕之來言矣。" 命刑推二度, 停刑。 問恒延, 供: "敏樞來言, ‘近日烽火不擧, 何也? 前日聞鄭震夏, 秘記有龍頭、蛇尾、弓弓等文, 龍蛇指辰巳年也, 弓弓似指闊闊也,’ 臣曰, ‘切勿浪說。 如有眞的說話, 須詳報也。’ 命垕之罪, 臣請白之。 其父多年爲文義座首, 權動一邑, 造爲騷屑而語臣曰, ‘君勿藉兩班之勢。 當有貴者賤, 賤者貴之世矣,’ 今正月, 命垕之父, 酌酒勸臣曰, ‘勿爲兩班之驕氣也。’ 四月, 臣往妻祖會葬, 歷見命垕之父, 則曰, ‘邑內掛書, 何語也? 吾之壻世才來言矣?’ 其後, 臣釣魚歸路, 逢命垕, 則曰, ‘似將有甚事。 掛書有五月十五日不吉之語’ 云矣。 敏樞被囚後, 命垕來見臣曰, ‘敏樞之事, 如何?’ 臣曰, ‘聞囚營獄, 將至何境,’ 命垕曰, ‘敏樞以秘記就囚, 而掛書與秘記同云。 不善言則死矣。 秘記藏置者, 必當此掛書之罪, 勿言秘記之在我’ 也。" 命與命垕面質, 恒延語多屈, 命命垕下幕。 更問恒延曰: "採薇之詩, 抑何意也? 三父子不入科場, 又何義耶? 汝之父子, 長事怨國, 至俟倭、胡之來, 亦何心腸? 本道就囚時, 汝之掌中, 汝父以何字書示? 騷屑掛書之根, 卽此秘記, 而俱在於汝, 騷屑掛書, 非汝而誰? 闕門投書, 與文義掛書一串貫來, 今則看證已具, 文書見捉, 焉敢隱諱? 一一直招。" 刑推三度, 供: "臣之三父子不赴擧, 不文之致也。 喜聞騷屑, 爲率老父母避亂之計也。" 命停刑。 更問命垕, 供: "之曙常言, ‘鬱陵島越邊, 有鎭紀等戊申餘黨,’ 又曰, ‘鎭紀不死, 必當出來’ 云, 故臣曰, ‘汝何以知之?’ 之曙不言言根, 但曰 ‘自然知之矣’。 又曰, ‘但觀末稍而已。’ 之曙往墨井洞, 聞投書事, 來言曰: ‘有人投書於宣傳官所而逃去, 見其物色者, 有髯而面鐵, 故捕廳軍士, 逢着於某峴而捉之,’ 云, 又曰, ‘近來騷屑, 豈皆有根乎? 雖以淸州 禹圭章事觀之, 欲使其妾弟婚事速成, 而渠食十兩錢, 婚事久則不成, 故作此騷屑, 空然傳播’ 矣。" 命下幕。 更問之曙曰: "黃賊尙在屯聚嶺南大島中, 當一番騷動而來云, 卽闕中匿名書中一事, 所謂大島, 卽鬱陵島越邊大島云。 若非與賊同心, 何以知之? 投書措語, 雖朝士知之者鮮矣。 汝所謂南倭、北胡、西韃之語, 亦一投書中語意也。 以倭服起事云者, 亦其意也。 闕門投書、淸州騷屑、文義掛書, 綻露無餘, 且帳殿親問時, 一二句語, 可謂不道。 況詩句中一二句語, 陰慘叵測, 書恒延之臂者, 亦涉陰慘。 所謂自誓, 抑何意思? 陰待現捉, 自言不道, 諸證俱備, 此等陰謀, 決非獨判, 共謀何人? 所謂海島, 其名亦何? 若不相通, 決無可知。 戊申餘黨之屯聚者, 其果誰某? 先投書於闕中, 倡言秘記, 又起騷屑, 末來掛書, 必有經營排布。 一一直招。" 供: "初六日早朝, 敏樞來見 ‘烽火不擧, 前史亦有此否?’ 答曰, ‘前史豈有乎?’ 掌中書示之事, 臣意若不發明此事, 則死當爲汚鬼, 勿埋於父墳云。 鬱陵島之說, 若或知之何可抵賴乎? 逆賊必挾思晟、泰徵然後擧事, 士子何能爲乎? 敏樞又有一事, 其四寸就文及妻娚李泰渭, 皆入於戊申賊而逃躱矣。" 刑問第七度, 命停刑, 下幕。 更問敏樞曰: "騷屑掛書之前, 先爲傳布於哲澤等, 已涉殊常。 秘記中語, 聞於之曙, 聞於命垕, 逢人輒問, 欲爲解意者, 尤涉陰慘。 秘記中三百八十年之說, 屈指計年, 言于遂萬, 言于命垕, 而今囚被捉, 或推之曙, 或推命垕, 有若指告者然, 亦涉陰譎。 汝及曙、垕卽一心腸, 況之曙招中, 汝之四寸及妻娚, 入於戊申諸賊而逃躱云。 其間事狀, 無隱直告。" 供: "之曙專爲之, 臣本不同入矣。" 刑問十一度, 命停刑。 命親鞫姑罷, 待明朝擧行。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92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변란-정변(政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출판-서책(書冊)
영조 24년 (1748) 5월 23일
영조실록67권, 영조 24년 5월 23일 丙午 3/3 기사 /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금상문에 나아가 호서의 죄인 이지서 등을 친국하다
국역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호서(湖西)의 죄인을 친국(親鞫)하였다. 이지서(李之曙)를 신문하기를,
"호서의 장계(狀啓)를 살펴보건대, 고사리를 캐면서 은(殷)나라 백성을 보호하겠다는 시는 음험하고 참혹하고 망측한 것이어서 이미 말할 수 없는 것이거니와, 기타 수상하여 의심스러운 자취가 한둘이 아니다. 비기(秘記)의 글자를 가지고 연한(年限)을 손가락을 꼽아서 가리켰으며, 도신(道臣)이 추문할 때 혀를 깨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더욱 음험한 데 관계된다. 장전(帳殿)에서 친문(親問)하는 마당에 어찌 감히 숨길 수 있겠는가? 사실대로 직초(直招)하라."
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부(父)·조(祖) 이래 문자를 알지 못합니다. 집에서 수색하여 가지고 온 책에는 여서(女婿) 신치(申㴛)의 책이 있는데, 이 책의 하단에 기재된 잡기(雜記)에는 음험한 말이 없습니다. 고사리를 캔다는 시는, 시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망발한 것이지 어찌 역심이 있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뜻을 펼 수 있다.[意可伸]’는 말은 과거에 급제하여 의기(意氣)를 펴고 싶다는 뜻입니다. 초구(初句)는 과연 망발이었는데, ‘이 세상에서 내가 어디로 귀의하겠는가? [斯世吾安歸]’ 하기가 미안했기 때문에 고친 것입니다. 나무꾼과 목동들도 모두 시비가 있기 때문에 시비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이는 모두 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데 어떻게 감히 숨기겠습니까? 성상께서 삼색(三色)을 공통으로 기용하고 계신데, 신이 어찌 털끝만큼인들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신은 글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장(科場)에 출입한 적이 없었고, 아들이 다섯이므로 과거를 관광(觀光)하기 위해 왕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신의 아들들도 아직 경과(京科)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지시(李之時)가 참수된 뒤에 있었던 토역과(討逆科)를 신 또한 어찌 보지 않았겠습니까?"
하자, 우선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박철택(朴哲澤)을 신문하기를,
"본도(本道)에서 추문할 때 일절(一節)에 대해서는 직초(直招)했지만 지금 친문(親問)하는 마당에 상세히 고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일일이 직초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의 어미가 지난해 3월 사망했기 때문에 금년 소상(小祥)에 신이 제수를 준비하기 위해 직접 조탄(鳥灘)의 시장으로 가는 길에 형강(荊江)을 건너게 되었는데, 배가 고파 요기하는 즈음에 갑자기 박민추(朴敏樞)를 만났습니다. 박민추가 말하기를, ‘도선(道詵)의 비기(秘記)가 있는데 용두(龍頭)와 사미(蛇尾)에 대해 운운한 것이 있다. 용두는 곧 무진년 정월(正月)이고, 사미는 곧 기사년 12월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왜인(倭人)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올라오는데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닌 궁궁(弓弓)이 이롭다고 했다. 그러나 이른바 궁궁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신이 그에게 들은 것은 이것뿐이었으며, 이를 본 고을의 이청(吏廳)에 전하였습니다. 그 뒤에 괘서의 변이 있었으므로 본 고을의 이방과 감영의 군관 이필관(李必寬)이 기찰하기 위해 박민추에게 가서 물어 보았습니다만, 그 뒤 이방이 관령(官令)에 의해 신을 불러 관가로 데리고 들어갔었으며 또 박민추도 불러서 공초를 받았습니다. 그 뒤 신이 시장에 갔더니, 박민추가 신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조탄에서 말한 것은 옛날 이야기인데, 네가 누구에게 전파했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과연 이청(吏廳)에 전하였다.’ 하니, 박민추가 두려운 빛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앞으로는 다시 말하지 말라.’고 운운했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박험백(朴驗白)에게 신문하기를,
"너는 관계되는 것이 없으니, 한결같이 들은대로 직고(直告)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오래도록 병을 앓았는데, 조금 차도가 있어 읍내로 들어갈 즈음 나무꾼의 말이 익명서가 뒷들판에 버려져 있다고 하자, 이름을 모르는 어떤 통인(通引)이 홍세재(洪世在)를 시켜 가 보게 하였는데, 그가 박철택에게 전하였으므로 읍내에 전파되었고 사람들이 모두 찾아보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이청(吏廳)으로 입송(入送)하게 된 것이요 신의 형 박민추는 원래 신과 함께 비기의 일에 대해 수작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김재형(金再炯)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곧 관리입니다. 이방(吏房) 홍천범(洪天範)이 괘서(掛書)를 가지고 와서 보였는데, 그때가 곧 4월 18일이었습니다. 신이 병방·이방과 함께 같이 보았는데, 그 글에 ‘문의 고을의 백성들이 내달 15일에 의당 어육(魚肉)이 될 것이니, 알아서 피하라.’는 내용이 있었고, 또 ‘회덕(懷德)도 그들의 당여이고 회인(懷仁)도 그들의 당여이며 병사(兵使)도 그들의 당여이다.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오는데 물도 이롭지 않고 산도 이롭지 않고 궁궁(弓弓)이 이롭다. 이 고을에 대인(大人)과 명장(名將)이 있다.’고 운운하고서 ‘여기에서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밖에는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글은 5, 6행이었는데, 신이 박철택에게 비기(秘記)에 대해 장의(掌議) 박민추에게서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순세재(順世才)에게 신문하기를,
"오명후(吳命垕)는 어떤 사람인가? 좌수(座首)의 아들이 어찌 역노(驛奴)의 처남이 될 수 있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좌수 오수만(吳遂萬)이 첩을 얻어 딸을 낳았는데, 두 남자를 거쳐 신에게 시집왔습니다."
하였다. 신문하기를,
"이사정(李思正)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신의 고을에 사는 이진사(李進士)의 아들입니다."
하였다. 괘서의 일에 대해 신문하기를,
"너는 오명후에게서 들었다고 하고, 오명후는 너에게서 들었다고 하니, 네가 전파한 것이 아닌가? 이 일절(一節)에 대해 직고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문의의 역노(驛奴)이고, 오명후는 곧 신의 처남입니다. 날짜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4월 사이에 오명후가 이사정의 대상(大祥)에 갔다가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근래 괘서의 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어떠했는가?’ 하기에, 신이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오수만을 신문하기를,
"박민추가 너에게 ‘남방의 봉화(烽火)가 제대로 올려지지 않고, 북쪽 변방의 성책(城柵)을 물렸으니, 오래지 않아 난(亂)이 일어날 것이다. 좌수는 어디로 피할 것인가?’라는 등등의 말을 한 것이 사실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과연 있었습니다. 신이 박민추의 말을 듣고 답하기를, ‘무신년 난리에도 내가 피하지 않았는데 지금 어디로 피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박민추가 말하기를, ‘방(榜)을 내건 일에 대해 들었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관가에서 방을 내건 일이 있기는 하지만 양반이 어떻게 방을 내건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하였습니다. 박민추가 말하기를, ‘궁궁(弓弓)이 이롭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궁궁은 활의 허리[弓腰]를 가리키는 것 같다. 따라서 구부러진 곳[劣處]에 숨으라는 말이다. 【궁요(弓腰)는 속음(俗音)이 열(劣) 자의 뜻을 해석한 것과 같다.】 ’ 하였고, 봉화에 대한 일은, ‘청주(淸州)의 봉화는 사천(泗川)에서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문의(文義)의 동쪽은 전토가 좋고 회인(懷仁)의 북쪽은 산수가 좋아 그리로 옮겨가 살려고 한다.’ 하였으며, 신의 아들 오명후가 비기를 등서(謄書)한 것을 비치한 것이 있었는데, 이지서(李之曙)의 아들 이항연(李恒延)이 가지고 갔습니다. 그것은 신의 아들이 일찍이 그의 처남인 박세렴(朴世濂)에게서 빌려 온 것이었습니다. 이지서가 또 신에게 이르기를, ‘장차 난리가 일어날 것인데 노인은 어떻게 피할 터인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피하여 갈 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오명후를 신문하기를,
"박민추와 수작한 말을 이미 본도(本道)에서 추문(推問)할 적에 직초(直招)하였다. 친문하는 것은 사체가 중한 것이니, 다시 하나 둘 숨김없이 말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이지서의 집에 갔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근일 날씨가 청명한데도 봉화를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들의 말에 흉흉한 것이 많아서 어떤 사람은 왜인이 온다고 하기도 하지만, 실은 왜인이 아니고 거짓 왜인의 모양을 꾸며가지고 오는데 이들은 무신년066) 의 여당(餘黨)들로서 해도(海島)에 가 있던 자들이다.’ 하므로, 신이 묻기를, ‘어떻게 그런 줄 알았는가?’ 하니, 말하기를, ‘단지 결과만 살펴보면 된다.’ 하였습니다. 4월 초에 이지서가 또 와서 말하기를, ‘봉화를 지금까지 들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일이 났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3월에 서로 만났을 적에는 이지서가 말하기를, ‘만일 난리가 일어나면 일찍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뒤에 신이 또 이지서의 집에 갔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변란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으며, 그 뒤에 이지서가 또 용두(龍頭)와 사미(蛇尾) 등의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반드시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함께 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궁궁은 무슨 뜻인가?’ 하니, 말하기를, ‘광활하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뒤에 신이 또 이지서의 집에 갔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신사(信使)도 또한 들어가지 못하고 있고, 지금의 소식도 자못 소요스러우니, 난리가 일어나려면 속히 일어나는 것이 시원하겠다.’ 하고, 이항연(李恒延)은 말하기를, ‘비기에 이르기를, 「무진년의 일은 알 수 있고, 경오년에는 즐거움이 당당하다.」고 하였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말하기를, ‘사(事) 자는 난리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뜻이고, 낙(樂) 자는 즐거운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비기책을 이 항연이 가지고 가서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는데, 그 안에 이런 구어(句語)가 있었습니다. 박민추가 수감된 뒤 신이 들어가서 물어 보니, 답하기를, ‘일찍이 박철택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는데, 그 때문에 수감된 것이다.’ 했습니다. 금년 3월 이지서가 와서 도정(都政)의 일에 대해 말하기를, ‘이런 하늘 밑에서 남인(南人)이 어떻게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이어 투서의 일에 대해 말하기를, ‘지난번 어떤 사람이 선전 관청(宣傳官廳)에 투서하였는데, 그 글에 「남쪽은 왜(倭)와 접해 있고 북쪽은 호(胡)와 접해 있다.」고 했으며, 투서한 사람은 방금 체포하여 수감하였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자, 형추(刑推)하라고 명하여 다섯 대를 친 다음 형장을 정지시키고 막에 내렸다. 박민추를 신문하기를,
"국년(國年)을 손가락을 꼽아서 가리킨 것은 그 의도가 음험하고 참혹한 데 관계가 된다. ‘봉화를 들지 않는 것은 왜인이 오는 것 같고 북쪽 또한 위태로워 지금 막 성책(城柵)을 물리고 나자 칙사(勅使)가 나왔다.’고 한 말은 더욱 망측한 것으로, 무슨 심장을 지녔기에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과 함께 난만하게 주무(綢繆)하였는가? 일일이 직초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곧 교생(校生)으로 서얼(庶孽) 동생 박험백(朴驗白)이 있는데, 본도에 전후 납초(納招)한 것이 모두 이미 올라왔을 것이니, 참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기(秘記)에 대한 일은 이지서의 아들 이영손(李榮孫)을 길가의 나무 밑에서 만났는데, 이영손이 말하기를, ‘용두(龍頭)와 사미(蛇尾)에 대한 말은 용은 곧 진(辰)이고 사는 곧 사(巳)이며, 두(頭)는 정월(正月)이고 미(尾)는 곧 납월(臘月)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괘서가 나온 뒤에 신이 마음속으로 이지서가 했는가 의심하여 가서 이지서를 만났더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네가 와서 나를 만나는 것이 수상하다. 전일 네가 괘서의 글씨가 잘 써진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은 잘 써져 있다.’ 하였으므로, 신이 이 때문에 더욱 이지서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이영손이 전에 한 말을 가지고 물어 보았더니, 이지서가 사미(蛇尾)라는 글자를 사반(蛇盤)으로 고쳐 말하였고, 궁궁(弓弓)은 광활하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 말이 어느 책에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비기에 있는데 그 책이 오명후의 집에 있다.’고 하기에, 신이 오명후의 집에 갔었습니다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달 초닷샛날 또 가서 보게 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오명후가 끝내 내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역년(歷年)에 대한 일은 오수만이 신에게 말하여 주었는데, 신은 명을 재촉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영손을 신문하기를,
"너의 형이 비기를 등서하여 비치했다는 이야기를 오명후가 이미 말하였다. 본도(本道)에서 추문할 때 네가 박민추에게서 들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오명후에게 들었다고 핑계 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네가 과연 오명후에게 듣고서 박민추에게 말하였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3월에 오명후가 신의 형에게 말하기를, ‘비기에 운운했다.’고 했으므로, 신이 박민추에게 전했는데, 본도에서 추문할 때에는 안정(顔情)에 구애되어 오명후가 와서 고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자, 형추(刑推)하라고 명하여 두 대를 치고 나서 형장을 정지하게 하였다. 이항연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박민추가 와서 말하기를, ‘근일 봉화를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전일 정진하(鄭震夏)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비기에 용두(龍頭)·사미(蛇尾)·궁궁(弓弓) 등의 글이 있는데, 용사(龍蛇)는 진사(辰巳)를 가리킨 것이고 궁궁은 활활(闊闊)을 가리킨 것 같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절대 낭설을 하지 말라. 만일 진실한 이야기가 있으면 모쪼록 상세히 알려 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오명후의 죄에 대해서 청컨대 신이 아뢰겠습니다. 그의 아비가 여러 해 동안 문의에서 좌수를 지냈으므로 권세가 한 고을을 뒤흔들었는데, 소요스런 이야기를 만들어 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양반의 권세를 의지하지 말라. 의당 귀한 자가 천하게 되고 천한 자가 귀하게 되는 세상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금년 정월에 오명후의 아비가 술을 따라 신에게 권하면서 말하기를, ‘양반의 교만한 기세를 부리는 짓을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4월에 신이 처조부의 회장(會葬)에 갔다가 두루 거쳐 오명후의 아비를 만나 보았는데, 말하기를, ‘읍내의 괘서에 무슨 말이 쓰여 있던가? 나의 사위 순세재(順世才)가 와서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신이 낚시를 하고 돌아가다가 오명후를 만났는데, 말하기를,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 괘서에 5월 15일은 불길하다는 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박민추가 수감된 뒤 오명후가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박민추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영옥(營獄)에 갇혔다고 들었는데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 지 모른다고 한다.’ 하니, 오명후가 말하기를, ‘박민추가 비기 때문에 수감되었는데 괘서도 비기와 같다고 한다. 잘 말하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다. 비기를 보관하고 있는 자는 반드시 이 괘서의 죄를 받게 될 것이니, 비기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오명후와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이항연의 말이 많이 굽혔으므로, 오명후를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다시 이항연을 신문하기를,
"고사리를 캔다는 시는 무슨 뜻인가? 삼부자가 과장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또 무슨 의리인가? 너희 부자가 오래도록 나라를 원망하는 것을 일삼으면서 왜(倭)와 호(胡)가 오기를 기다리기에 이르렀으니, 그 또한 무슨 심장이란 말인가? 본도에 수감될 때 너의 손바닥에 너의 아비가 무슨 글자를 써서 보여 주었는가? 소요스러운 괘서의 근본은 곧 이 비기인데 이것이 모두 너에게 있으니, 소요스런 괘서를 낸 것이 네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대궐에 투서한 것이 문의에서의 괘서와 같은 맥락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간증(看證)이 이미 갖추어져 있고 문서를 압수했으니, 어떻게 감히 숨길 수 있겠는가? 하나하나 직초하라."
하고, 형추하여 세 대를 치니, 공초하기를,
"신의 삼부자가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것은 글을 하지 못한 소치인 것입니다. 소요스런 말을 듣기를 즐겨한 것은 노부모를 데리고 피란할 계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자, 형추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오명후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지서가 항상 말하기를, ‘울릉도 건너편에 황진기(黃鎭紀) 등 무신년의 여당(餘黨)이 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황진기가 죽지 않았으면 반드시 나올 것이다.’ 했기 때문에, 신이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아는가?’ 하니, 이지서가 언근(言根)은 말하지 않고 단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단지 말초(末梢)를 살펴볼 뿐이다.’ 하였습니다. 이지서가 묵정동(墨井洞)에 가서 투서에 대한 일을 듣고 와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선전관 관소(官所)에 투서하고 도망갔는데, 그 물색(物色)을 본 사람이 수염이 있고 얼굴이 검다고 했기 때문에 포청(捕廳)의 군사가 어떤 고개에서 만나서 체포했다고 한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근래 일고 있는 소요스러운 일이 어찌 모두 근거가 있는 것이겠는가? 청주(淸州) 우규장(禹圭章)의 일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자기 첩의 아우의 혼사를 속히 이루게 하기 위하여 그가 돈 10냥을 받아 먹었는데 혼사가 오래되면 이루어지지 않게 생겼기 때문에 이렇게 소요스러운 일을 일으켜 공연히 전파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자, 막(幕)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다시 이지서를 신문하기를,
"황적(黃賊)이 아직도 영남의 큰 섬에 둔취(屯聚)해 있으니 의당 한 번 소동을 일으키기 위해 나올 것이라고 했으며, 곧 대궐에서의 익명서 내용의 한 가지 일인 이른바 큰 섬이라는 것은 곧 울릉도 건너편의 큰 섬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적과 마음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투서의 내용은 조사(朝士)라 할지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문데, 네가 이른바 남쪽의 왜(倭), 북쪽의 호(胡), 서쪽의 달(韃)이라고 한 말은 또한 투서 내용의 어의(語意)와 똑같다. 왜복(倭服)을 입고 일을 일으킨다고 한 것도 또한 그런 뜻이다. 대궐에 투서한 것, 청주에서 소요를 일으킨 것, 문의에서의 괘서가 여지없이 탄로가 났으며, 또 장전(帳殿)에서 친문(親問)할 때의 한두 구어(句語)는 부도하다고 이를 만하다. 더구나 시구 가운데 한두 구어는 음험하고 참담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 이항연의 팔뚝에 써 준 것 또한 음험하고 참혹한 데 관계되는 것이다. 이른바 스스로 맹세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은밀히 현착(現捉)되기를 기다려 스스로 부도스런 말을 한 여러가지 증거가 갖추어졌는데 이런 등등의 음모는 결단코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니, 공모한 사람이 누구인가? 이른바 해도(海島)라는 것은 그 이름이 또한 무엇인가? 서로 내통하지 않았으면 결단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무신년의 여당 가운데 둔취해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 먼저 대궐에 투서하고 나서 비기의 내용을 창언하였으며, 또 소요를 일으켰고 끝에 가서는 괘서를 냈으니, 반드시 경영하여 배포한 경로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하나하나 직초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초엿샛날 이른 아침에 박민추가 찾아와서 ‘봉화를 들지 않고 있는데 전의 사서(史書)에도 이런 예가 있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전의 사서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손바닥에 써서 보인 일은, 신의 뜻은 이 일을 발명(發明)하지 못하면 죽어도 더러운 귀신이 되어 버릴 것이니 아비의 분묘옆에 묻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울릉도에 대한 이야기는 만일 혹시 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가서 의뢰할 수 있겠습니까? 역적은 반드시 이사성(李思晟)·남태징(南泰徵) 같은 자들과 손을 잡은 연후에야 거사할 수 있는 것인데, 사자(士子)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박민추에 대해서는 또 한가지 일이 있는데, 그의 사촌 박취문(朴就文)과 처남 이태위(李泰渭)는 모두 무신년 역적에 들었다가 도망한 사람들입니다."
하자, 형문하여 일곱 대를 치고 나서 형장을 정지시킨 다음 막에 내리게 하였다. 다시 박민추를 신문하기를,
"소요스런 내용으로 괘서를 내기 전에 먼저 박철택(朴哲澤) 등에게 전포(傳布)한 것은 이미 수상한 일에 관계가 된다. 비기의 내용을 이지서에게 듣고 오명후에게서도 들었는데, 사람을 만날 적마다 뜻을 알려고 한 것은 더욱 음험하고 참혹한 데에 관계가 된다. 비기 안의 3백 80년이라는 이야기를 손가락을 꼽아 연수(年數)를 계산하여 오수만과 오명후에게 말하고서도 이제 체포된 것을 인하여는 이지서에게 미루기도 하고 오명후에게 미루기도 하여 마치 가리켜 고발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또한 음휼한 데 관계가 된다. 너와 이지서·오명후는 똑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는데, 더구나 이지서의 공초에 너의 사촌과 처남이 무신년 역적에 들었다가 도망한 자들이라고 했는데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사이의 사상(事狀)을 숨김없이 직고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이지서가 혼자서 하였고 신은 본디 함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자, 형문하여 열한 대를 치고 나서 형장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친국(親鞫)을 우선 파하고 내일 아침을 기다려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92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변란-정변(政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출판-서책(書冊)
- [註 066]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원문
○上御金商門, 親鞫湖西罪人。 問李之曙曰: "以湖西狀啓觀之, 作採薇保殷民之詩, 陰慘叵測, 已不可言, 其他殊常可疑之迹, 不一。 以秘記, 屈指年限, 道臣推問之時, 嚼舌不語, 尤涉陰慘。 帳殿親問, 焉敢隱諱? 從實直招。" 供: "臣自父祖以來, 不解文字。 家中搜來之冊, 又有女壻申㴛之冊, 而此冊下雜記, 無陰險之語。 採薇之詩, 不解詩, 故妄發, 豈有逆心而爲此乎? 意可伸之語, 欲登科而伸意氣也。 初句果是妄發, 斯世吾安歸未安, 故改之, 樵童、牧竪, 皆有是非, 故有是非之語。 皆不成語, 何敢隱諱乎? 聖上通三色用之, 臣豈有毫末怨國之心? 臣無文, 未嘗出入科場, 而有五子, 故觀光往來甚難。 臣之子亦未見京科。 之時斬後討逆科, 臣亦豈不見乎?" 命姑下幕。 問朴哲澤曰: "本道推問時一節, 其雖直招, 今於親問之下, 不可不詳告。 一一直招。" 供: "臣母上年三月身死, 今年小祥, 臣爲備祭需, 親往鳥灘市, 將渡荊江, 療飢之際, 忽逢朴敏樞, 則敏樞曰, ‘道詵有秘記矣, 龍頭蛇尾云云。 龍頭, 卽戊辰正月, 蛇尾, 卽己巳臘月。’ 又曰: ‘似倭非倭, 自南而來, 非山非水, 利於弓弓。 所謂弓弓, 未可知也。’ 臣所聞於渠者只此, 而傳于本官吏廳矣。 其後有掛書事, 本官吏房及監營軍官李必寬譏察往問於朴敏樞, 則敏樞所言與前同。 其後吏房以官令, 招臣入官家, 又招敏樞捧供。 後臣到場市, 則敏樞語臣曰, ‘向於鳥灘說古談矣, 汝向誰傳之。’ 答曰, ‘果傳于吏廳矣。’ 敏樞有懼色, 曰, ‘後勿復言云云。’ 命下幕。 問朴驗白曰: "爾無所關, 一從所聞直告。" 供: "臣久病而差, 入邑內之際, 樵軍言, 有匿名書, 棄在後野, 通引不知名者, 使令洪世在見之, 持傳於哲澤, 邑內傳播, 人皆覓見。 故入送吏廳, 而臣之兄敏樞, 元無與臣酬酢秘記事矣。" 命下幕。 問金再炯, 供: "臣卽官吏也。 吏房洪天範持示掛書, 時則四月十八日也。 臣與兵房、吏房同見之, 其文有曰, ‘文義邑底民人, 來月十五日, 當爲魚肉, 知而避之。’ 又曰, ‘懷德其黨, 懷仁其黨, 兵使亦其黨。 似倭非倭, 自南而來, 不利於水, 不利於山, 利於弓弓。 此邑有大人、名將’ 之云云, ‘若不出於此, 則其禍必大矣。 此外不能記得。 文可五六行, 而臣言哲澤聞秘記於朴掌議敏樞處云云矣。" 命下幕。 問順世才曰: "吳命垕何許人? 座首之子, 豈爲驛奴之妻娚乎?" 供: "吳座首遂萬得妾生女, 而經二夫, 歸於臣矣。" 問: "李思正何如人?" 供: "臣邑中李進士子也。" 問掛書事, "汝則聞於命垕, 命垕則聞於汝, 無乃汝之傳播耶? 此一節直告。" 供: "臣卽文義驛奴, 吳命垕, 卽臣妻娚也。 日不記四月間, 命垕往見李思正大祥, 而來見臣曰, ‘吾聞近有掛書, 其中說話何如?’ 臣答以不知。" 命下幕。 問吳遂萬曰: "敏樞語汝云, ‘南方烽火不擧, 北邊退柵, 非久亂作。 座首何處避之?’ 等說, 果然乎?" 供: "果有之矣。 臣聞敏樞語, 答以 ‘戊申之亂, 吾不避矣, 今何避乎? 敏樞曰, ‘掛榜事聞之否?’ 答以 ‘官家雖有掛榜事, 兩班豈可言掛榜事乎?’ 敏樞曰, ‘利於弓弓之說云, 何?’ 臣曰, ‘弓弓, 似指弓腰也。 藏於劣處之謂也。 【弓腰俗音與劣字釋義同。】 烽火事, ‘淸州烽火, 自泗川入來’ 云矣。 臣又曰, ‘文義之東, 田土好, 懷仁之北, 山水好, 思欲移居,’ 臣子命垕有秘記謄置者, 之曙之子恒延取去。 臣之子曾所借來於渠之妻娚朴世濂者也。 之曙又謂臣曰, ‘亂離將作, 老人何以避之?’ 臣曰: ‘吾則無避去之意’ 矣。" 命下幕。 問吳命垕曰: "與敏樞酬酢之語, 已爲直招於本道推問。 親問體重, 更爲一二無隱。" 供: "臣往李之曙家, 之曙曰, ‘近日淸明, 烽火不擧, 何也? 人言多洶洶, 或言倭來, 而實非倭也, 假作倭樣而來, 此蓋戊申餘黨之在海島者也。’ 臣問, ‘何以知之?’ 曰, ‘但觀末終可也。’ 四月初之曙又來言曰, ‘烽火至今不擧, 事必出矣。’ 且三月相見之時, 之曙曰, ‘若亂作, 則早出好矣。’ 後臣又往之曙家, 之曙曰, ‘變必作矣。’ 其後, 之曙又擧龍頭蛇尾等說而曰, ‘必有亂作, 偕往爲宜。’ 臣曰, ‘弓弓何意?’ 曰, ‘廣闊之意也。’ 後臣又往之曙家, 則之曙曰, ‘信使亦不得入去, 時奇頗騷屑, 亂如作則速作爲快。’ 恒延曰, ‘秘記云 「戊辰事可知, 庚午樂堂堂」,’ 臣曰, ‘何謂也?’ 曰, ‘事字亂必作也, 樂字有可樂之事也。’ 秘記冊, 恒延持去, 尙未推還, 而其中有此句語矣。 敏樞就囚後, 臣入問, 則答云, ‘曾於哲澤處有此說話矣, 因此而見囚矣。’ 今三月之曙來言都政事曰, ‘此天之下, 南人豈得爲官乎?’ 仍言投書事曰, ‘頃者有人投書於宣傳官廳, 其書曰, 「南接倭, 北接胡,」 投書人, 今方捉囚,’ 云矣。" 命刑推五度, 停刑下幕。 問朴敏樞曰: ‘屈指國年, 意涉陰慘。 ‘烽火不擧, 似是倭來, 北亦殆矣, 今方退柵, 勑使來’ 云者, 尤爲叵測。 有何心腸, 而與怨國之徒, 爛漫綢繆乎? 一一直招。" 供: "臣卽校生, 而有孽同生名驗白, 本道前後納招, 皆已上來, 可以參酌矣。 秘記事, 逢之曙子榮孫於路傍樹下, 榮孫曰, ‘龍頭、蛇尾之語, 龍卽辰, 蛇卽巳, 頭卽正月, 尾卽臘月,’ 云矣。 掛書出後, 臣心疑之曙爲之, 往見之曙, 則之曙以爲 ‘汝之來見我殊常。 前日汝以爲掛書不善書矣, 今則果善書, 矣。 以此臣益疑之曙。 仍以榮孫前所言者問之, 則之曙以蛇尾字變爲蛇盤, 以弓弓爲廣闊之意。 臣曰, ‘此語在何書?’ 答曰, ‘在秘記, 而冊在命垕家。’ 臣往命垕家, 不遇。 今月初五日, 又往求見, 而命垕終不出示矣。 歷年事, 遂萬言於臣, 臣以爲有促命之人矣。" 命下幕。 問榮孫曰: "汝兄秘記謄置之說, 命垕已言之。 本道之推, 汝聞於敏樞云, 而今者推諉於命垕, 何也? 汝果聞於命垕而言於敏樞乎?" 供: "三月, 命垕言於臣兄曰, ‘秘記云云,’ 臣傳之敏樞, 而本道推問時, 拘於顔情, 不告命垕之來言矣。" 命刑推二度, 停刑。 問恒延, 供: "敏樞來言, ‘近日烽火不擧, 何也? 前日聞鄭震夏, 秘記有龍頭、蛇尾、弓弓等文, 龍蛇指辰巳年也, 弓弓似指闊闊也,’ 臣曰, ‘切勿浪說。 如有眞的說話, 須詳報也。’ 命垕之罪, 臣請白之。 其父多年爲文義座首, 權動一邑, 造爲騷屑而語臣曰, ‘君勿藉兩班之勢。 當有貴者賤, 賤者貴之世矣,’ 今正月, 命垕之父, 酌酒勸臣曰, ‘勿爲兩班之驕氣也。’ 四月, 臣往妻祖會葬, 歷見命垕之父, 則曰, ‘邑內掛書, 何語也? 吾之壻世才來言矣?’ 其後, 臣釣魚歸路, 逢命垕, 則曰, ‘似將有甚事。 掛書有五月十五日不吉之語’ 云矣。 敏樞被囚後, 命垕來見臣曰, ‘敏樞之事, 如何?’ 臣曰, ‘聞囚營獄, 將至何境,’ 命垕曰, ‘敏樞以秘記就囚, 而掛書與秘記同云。 不善言則死矣。 秘記藏置者, 必當此掛書之罪, 勿言秘記之在我’ 也。" 命與命垕面質, 恒延語多屈, 命命垕下幕。 更問恒延曰: "採薇之詩, 抑何意也? 三父子不入科場, 又何義耶? 汝之父子, 長事怨國, 至俟倭、胡之來, 亦何心腸? 本道就囚時, 汝之掌中, 汝父以何字書示? 騷屑掛書之根, 卽此秘記, 而俱在於汝, 騷屑掛書, 非汝而誰? 闕門投書, 與文義掛書一串貫來, 今則看證已具, 文書見捉, 焉敢隱諱? 一一直招。" 刑推三度, 供: "臣之三父子不赴擧, 不文之致也。 喜聞騷屑, 爲率老父母避亂之計也。" 命停刑。 更問命垕, 供: "之曙常言, ‘鬱陵島越邊, 有鎭紀等戊申餘黨,’ 又曰, ‘鎭紀不死, 必當出來’ 云, 故臣曰, ‘汝何以知之?’ 之曙不言言根, 但曰 ‘自然知之矣’。 又曰, ‘但觀末稍而已。’ 之曙往墨井洞, 聞投書事, 來言曰: ‘有人投書於宣傳官所而逃去, 見其物色者, 有髯而面鐵, 故捕廳軍士, 逢着於某峴而捉之,’ 云, 又曰, ‘近來騷屑, 豈皆有根乎? 雖以淸州 禹圭章事觀之, 欲使其妾弟婚事速成, 而渠食十兩錢, 婚事久則不成, 故作此騷屑, 空然傳播’ 矣。" 命下幕。 更問之曙曰: "黃賊尙在屯聚嶺南大島中, 當一番騷動而來云, 卽闕中匿名書中一事, 所謂大島, 卽鬱陵島越邊大島云。 若非與賊同心, 何以知之? 投書措語, 雖朝士知之者鮮矣。 汝所謂南倭、北胡、西韃之語, 亦一投書中語意也。 以倭服起事云者, 亦其意也。 闕門投書、淸州騷屑、文義掛書, 綻露無餘, 且帳殿親問時, 一二句語, 可謂不道。 況詩句中一二句語, 陰慘叵測, 書恒延之臂者, 亦涉陰慘。 所謂自誓, 抑何意思? 陰待現捉, 自言不道, 諸證俱備, 此等陰謀, 決非獨判, 共謀何人? 所謂海島, 其名亦何? 若不相通, 決無可知。 戊申餘黨之屯聚者, 其果誰某? 先投書於闕中, 倡言秘記, 又起騷屑, 末來掛書, 必有經營排布。 一一直招。" 供: "初六日早朝, 敏樞來見 ‘烽火不擧, 前史亦有此否?’ 答曰, ‘前史豈有乎?’ 掌中書示之事, 臣意若不發明此事, 則死當爲汚鬼, 勿埋於父墳云。 鬱陵島之說, 若或知之何可抵賴乎? 逆賊必挾思晟、泰徵然後擧事, 士子何能爲乎? 敏樞又有一事, 其四寸就文及妻娚李泰渭, 皆入於戊申賊而逃躱矣。" 刑問第七度, 命停刑, 下幕。 更問敏樞曰: "騷屑掛書之前, 先爲傳布於哲澤等, 已涉殊常。 秘記中語, 聞於之曙, 聞於命垕, 逢人輒問, 欲爲解意者, 尤涉陰慘。 秘記中三百八十年之說, 屈指計年, 言于遂萬, 言于命垕, 而今囚被捉, 或推之曙, 或推命垕, 有若指告者然, 亦涉陰譎。 汝及曙、垕卽一心腸, 況之曙招中, 汝之四寸及妻娚, 入於戊申諸賊而逃躱云。 其間事狀, 無隱直告。" 供: "之曙專爲之, 臣本不同入矣。" 刑問十一度, 命停刑。 命親鞫姑罷, 待明朝擧行。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92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변란-정변(政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출판-서책(書冊)
원본
영조 24년 (1748) 5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