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67권, 영조 24년 3월 10일 甲午 4/5 기사 /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영정을 봉안할 때 지낸 제사에 관한 공조 판서 이기진의 상소
국역
공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 진연(診筵)에서 삼가 성상께서 직접 하사하신 어시(御詩)를 받았는데, 은하수가 밝게 빛나듯 용한(龍翰)이 찬란하여 총광(寵光)을 한 몸에 입으니, 보고 듣는 이가 모두 용동(聳動)되었습니다. 천의(天意)가 애연(藹然)한 가운데 옥음이 부드럽고도 자상하였는데, 성상께서 신을 돌보고 신을 면려하신 것이 어찌 신을 선조(先朝)의 구물(舊物)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신이 회포가 있는데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 구신(舊臣)으로서의 의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피건대 성상의 성효(誠孝)와 지덕(至德)은 천성에서 나온 것으로 신서(臣庶)들만 흠복(欽服)할 뿐만이 아니라, 실로 천지의 신기(神祇)가 함께 감림(監臨)하신 바입니다. 무릇 봉선(奉先)하는 일과 추원(追遠)하는 예에 대해 마땅히 아름다움에 부합되어 감동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도 지난번에 음산한 무지개가 달을 가로질렀고, 근래에는 눈·우박·지진의 변이가 마침 재전(齋殿)에 임어하기 위해 대가(大駕)가 행행하던 날에 있었으니,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정신이 혼동되어 의혹에 젖은 것이 여러 날이었으나,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삼가 《서경(書經)》을 상고하건대, 고종(高宗)이 융제(肜祭)를 지내는 날에 꿩이 울자 그 신하 조기(祖己)가 임금을 훈계하여 〈백성들이〉 덕을 따르지 않고 죄를 승복하지 않게 됩니다.’고 경계하고, 끝에 가서는 ‘예묘(禰廟)041) 에만 풍성하게 제사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고 하였습니다. 고종과 같은 임금은 은(殷)나라의 현성(賢聖)한 임금입니다. 3년 동안 양음(亮陰)한 것은 천고에 한 번 있었던 일이었으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도를 생각하였던 탓으로 천제가 훌륭한 보필을 내려 주었으니, 효도에 돈독한 행실과 하늘을 섬기는 정성을 곧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융(肜)은 예제(禰祭)042) 인 것으로 다음날 또 지내는 제사 이름인데, 조금 풍성하게 하는 것이 있자 재이가 곧 뒤따랐으니 하늘과 사람이 함께 하는 기미가 메아리보다도 더 빠른 것입니다. 때문에 선유(先儒)들이 해석하기를, ‘훌륭한 임금은 본디 하늘과 통하는 것이므로 재이가 응하는 것이 항상 빠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종은 후하게 하는 데 지나쳤지만 그 또한 잘못한 것입니다. 잘못이 조금 드러나자마자 하늘이 갑자기 경고하였으니,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저 고종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이 점에 대해 수성(修省)할 줄을 몰랐겠습니까마는, 조기가 이에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한 것은, 임금이 때마침 우연한 것으로 여겨 스스로를 용서하여 재앙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 경우 하늘이 반드시 멸절시키게 될 것을 염려해서인 것입니다. 이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지만 그러나 조기로 하여금 이처럼 심각하고 절실하게 끝까지 숨김없이 다 말하게 한 점이 바로 고종이 고종다운 이유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영고(寧考)의 어정(御幀)을 진전(眞殿)에 제봉(躋奉)한 것은 이것이 더할 수 없는 성전(盛典)이요, 욕의(縟儀)인 것입니다. 그러나 태묘(太廟)에 부묘(附廟)하는 예(禮)에 견준다면 사체가 조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대사례(大祀禮)를 하루에 두 번 행하는 것은 이미 고종(高宗)의 융제(肜祭)보다 더한 점이 있는데, 더구나 봉안한 뒤에 음악을 연주하면서 연회를 즐겼는데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이것은 부묘례(附廟禮) 가운데에서 특별히 삭제시키라고 명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묘알(廟謁)하는 절차에 이르러서는 효성이 극진하여 수시로 정(情)을 펴는 것이 예에 있어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만, 길일이 세 번이나 있어 물리거나 앞당기는 것에 대비할 수 있으니, 조금 더디게 하고 조금 빠르게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갑자기 성인(聖人)이 병을 삼가라는 경계를 소홀히 여겨 여러 신하들이 걱정하여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거스르면서 눈보라를 무릅쓰고 기필코 행하고야 마셨습니다. 이것이 성덕(聖德)에 있어서는 돈후하게 하는 데 잘못된 것에 불과하지만 하늘이 우리 임금을 인애하는 것이 본래 지극하였으니, 어찌 일에 따라 견고(譴告)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경고하고 또 경고하여 간절히 하기를 마지 않는 것에서 성상께서 하늘을 감동시킨 덕이 고종과 부합된 점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유독 한스러운 것은 전하의 조정 신하 가운데 조기처럼 임금을 간하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 그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뭇 신하들의 죄인 것입니다만, 또한 전하께서도 스스로 반성해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기의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지 못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였는데, 우리 성상의 덕행이 혹 고종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을 신은 또한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이 듣건대 효도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천자(天子)·국군(國君)·대부(大夫)·사서(士庶)의 효도가 같지 않기 때문에 공성(孔聖)이 대순(大舜)의 대효(大孝)를 일컬으면서 반드시 ‘성인(聖人)의 덕을 지녔다.’고 하였고, 무왕(武王)의 달효(達孝)를 찬송하면서 ‘잘 계술(繼述)하였다.’고 한 말은 은미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효도를 행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려 하신다면 반드시 선왕(先王)의 지사(志事)를 잘 준수하고 선왕의 헌장(憲章)을 잘 따르는 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고서,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어 무궁하게 전하여 가게 함과 동시에 후손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남겨 줌으로써 천하 후세로 하여금 선왕의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을 추모하는 것이 오랠수록 더욱 깊어지게 하는 것이 실상은 성효(聖孝) 가운데 가장 큰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구구하게 기원하는 것입니다.
신이 소장을 완성한 후 삼가 듣건대 성가(聖駕)가 황단(皇壇)에서 환궁하는 길에 또 육상묘(毓祥廟)에 거둥하였다고 합니다. 성상께서 일생 동안 끝없이 사모하는 마음에 있어 날마다 전성(展省)한다고 해도 어찌 흡족할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정(情)은 무궁하지만 예(禮)에는 절한(節限)이 있다는 것이 옛사람의 훈계인 것입니다. 혹 성상께서 이 점에 대해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까? 보필하는 지위와 근밀한 반열에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경계하고 일깨우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신은 더욱 개탄스럽고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지만 앞으로의 일은 그래도 고칠 수가 있으니, 아울러 성명(聖明)께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소장을 봉입(奉入)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불효하기는 하지만 공판(工判)이 차마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영정(影幀)을 봉안할 때 제사지내는 예를 고종이 융제를 지낸 것에 견주는 것은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닌가? 황단(皇壇)에서 돌아올 때 사묘(私廟)에 들러 배알한 것은 진실로 인정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그 다음날은 곧 나의 사친(私親)의 기신(忌辰)이니, 잠시 전알하는 것이 어찌 방해됨이 있겠는가? 이 기진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 기해년043) 시위 때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난번 선정전(宣政殿)에서 ‘강주(江州) 사마(司馬)의 청삼(靑衫)이 젖었다.’는 하교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제사지냈다는 이야기를 하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그날 음악을 진설한 일은 곧 상하가 함께 즐긴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내가 곧 이어 너무 즐기는 데 대한 경계를 하였었다. 그리고 옥당(玉堂)의 차자도 있었는데, 그치지 않고 중언 부언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85면
원문
○工曹判書李箕鎭上疏, 略曰:
臣於頃日診筵, 伏蒙聖上親賜御詩, 雲漢昭回, 龍翰爛燁, 寵光所被, 瞻聆俱聳。 天意藹然, 玉音溫諄, 聖上所以眷臣而勉臣者, 豈非以臣爲先朝舊物而然歟? 臣若有懷不言, 烏在乎舊臣之義也? 臣伏見聖上誠孝至德, 出於天性, 不惟臣庶之欽服, 實天地神祇所共監臨。 凡係奉先之事、追遠之禮, 宜若允孚于休, 罔有不格, 而向來陰虹貫月之變, 近者雪、雹、地震之異, 適在於齋臨之時駕行之日, 此其故何哉? 臣誠迷昧疑惑, 歷累日而不釋也。 臣謹按《書傳》, 高宗肜日, 越有雊雉, 其臣祖己訓于王, 戒之以 ‘不若德不聽罪’, 終之曰, ‘無豐于昵。’ 若高宗有殷賢聖之君也。 三年亮陰, 千古一有, 而恭默思道, 帝賚良弼, 則其篤孝之行, 對越之誠, 卽可見已。 肜是禰祭, 明日又祭之名, 少有豐焉, 災輒隨之, 天人相與之機, 其捷如響。 故先儒釋之曰, ‘賢君素與天通, 災異之應常速。’ 高宗雖過於厚, 亦過也。 過失微形, 天遽警之, 可見上天愛君之至也。 夫以高宗寅畏之心, 豈不知修省于此, 而祖己所謂乃曰其如台者, 蓋恐其君, 謂之適然而自恕, 以爲孽祥其如我, 則天必絶之矣。 其言無已過乎? 然使祖己, 盡言無諱, 若是深切者, 此高宗所以爲高宗也。 今我寧考御幀之躋奉眞殿, 何等盛典, 何等縟儀。 而然視太廟祔禮, 則事體稍間。 而大祀禮之一日再行, 旣有加於高宗之肜, 況奉安後擧樂作歡? 又是祔廟禮中特命刪去者乎? 至於廟謁之節, 孝思攸切, 以時伸情, 於禮固當, 而涓日有三, 可備進退, 則差遲差速, 有何關係? 乃殿下忽聖人愼疾之戒, 咈諸臣憂悶之情, 衝冒風雪, 必行乃已。 此在聖德, 不過失諸厚, 而天之於吾君, 仁愛素至, 安得不隨事而譴告之乎? 警之又警, 惓惓不已者, 有以見聖上動天之德, 同符於高宗, 而獨恨殿下廷臣, 未聞有祖己格王之言。 此固群下之罪, 亦豈非殿下自反處耶? 古人云, ‘恥其君不及堯 舜’, 以我聖上之德之行, 或不及於高宗, 亦臣之所恥也。 且臣聞孝有許多般焉。 天子、國君、大夫、士庶, 其孝不同, 孔聖所以稱大舜之大孝, 必曰 ‘德爲聖人’, 讃武王達孝, 曰 ‘善繼善述’ 者, 其旨微矣。 惟我聖上, 苟欲盡爲孝之道, 則必以克遵先王之志事, 遹追先王之憲章爲第一義, 于以明天理正人心, 垂之無窮, 貽厥孫謨, 使天下後世, 慕先王之盛德至善, 愈久而愈深, 實聖孝之大者。 此臣區區所禱祝也。 臣於疏成之後, 伏聞聖駕自皇壇還宮之路, 又幸毓祥廟。 以聖上不匱之思, 終身之慕, 雖鎭日展省, 寧有恔乎, 而情無窮而禮有節, 卽古人之訓也。 或恐聖上未暇念及於此耶? 輔弼之地、近密之班, 無一人爲殿下警效者, 臣尤慨惜。 事雖已遂, 來猶可追, 竝願聖明之留意焉。
疏入, 上曰: "予雖不孝, 工判何忍發此言耶? 且以影幀奉安時祭祀之禮, 比之於高宗肜日, 不亦過乎? 皇壇歸路, 歷拜私廟, 固人情之所不可已者, 況其翌日, 卽予私親之忌辰, 則暫爲展謁, 有何所妨? 箕鎭以先朝之舊臣, 曾參己亥侍衛, 故予頃於宣政殿, 有江州司馬靑衫濕之敎矣。 今有此再祭之說, 良可慨也。 其日陳樂之擧, 卽出於上下同樂之意, 而予旋有太康之戒。 且有玉堂之箚, 則亦何必重言復言, 齗齗不已耶?"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85면
영조실록67권, 영조 24년 3월 10일 甲午 4/5 기사 /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영정을 봉안할 때 지낸 제사에 관한 공조 판서 이기진의 상소
국역
공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 진연(診筵)에서 삼가 성상께서 직접 하사하신 어시(御詩)를 받았는데, 은하수가 밝게 빛나듯 용한(龍翰)이 찬란하여 총광(寵光)을 한 몸에 입으니, 보고 듣는 이가 모두 용동(聳動)되었습니다. 천의(天意)가 애연(藹然)한 가운데 옥음이 부드럽고도 자상하였는데, 성상께서 신을 돌보고 신을 면려하신 것이 어찌 신을 선조(先朝)의 구물(舊物)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신이 회포가 있는데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 구신(舊臣)으로서의 의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피건대 성상의 성효(誠孝)와 지덕(至德)은 천성에서 나온 것으로 신서(臣庶)들만 흠복(欽服)할 뿐만이 아니라, 실로 천지의 신기(神祇)가 함께 감림(監臨)하신 바입니다. 무릇 봉선(奉先)하는 일과 추원(追遠)하는 예에 대해 마땅히 아름다움에 부합되어 감동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도 지난번에 음산한 무지개가 달을 가로질렀고, 근래에는 눈·우박·지진의 변이가 마침 재전(齋殿)에 임어하기 위해 대가(大駕)가 행행하던 날에 있었으니,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정신이 혼동되어 의혹에 젖은 것이 여러 날이었으나,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삼가 《서경(書經)》을 상고하건대, 고종(高宗)이 융제(肜祭)를 지내는 날에 꿩이 울자 그 신하 조기(祖己)가 임금을 훈계하여 〈백성들이〉 덕을 따르지 않고 죄를 승복하지 않게 됩니다.’고 경계하고, 끝에 가서는 ‘예묘(禰廟)041) 에만 풍성하게 제사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고 하였습니다. 고종과 같은 임금은 은(殷)나라의 현성(賢聖)한 임금입니다. 3년 동안 양음(亮陰)한 것은 천고에 한 번 있었던 일이었으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도를 생각하였던 탓으로 천제가 훌륭한 보필을 내려 주었으니, 효도에 돈독한 행실과 하늘을 섬기는 정성을 곧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융(肜)은 예제(禰祭)042) 인 것으로 다음날 또 지내는 제사 이름인데, 조금 풍성하게 하는 것이 있자 재이가 곧 뒤따랐으니 하늘과 사람이 함께 하는 기미가 메아리보다도 더 빠른 것입니다. 때문에 선유(先儒)들이 해석하기를, ‘훌륭한 임금은 본디 하늘과 통하는 것이므로 재이가 응하는 것이 항상 빠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종은 후하게 하는 데 지나쳤지만 그 또한 잘못한 것입니다. 잘못이 조금 드러나자마자 하늘이 갑자기 경고하였으니,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저 고종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이 점에 대해 수성(修省)할 줄을 몰랐겠습니까마는, 조기가 이에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한 것은, 임금이 때마침 우연한 것으로 여겨 스스로를 용서하여 재앙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 경우 하늘이 반드시 멸절시키게 될 것을 염려해서인 것입니다. 이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지만 그러나 조기로 하여금 이처럼 심각하고 절실하게 끝까지 숨김없이 다 말하게 한 점이 바로 고종이 고종다운 이유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영고(寧考)의 어정(御幀)을 진전(眞殿)에 제봉(躋奉)한 것은 이것이 더할 수 없는 성전(盛典)이요, 욕의(縟儀)인 것입니다. 그러나 태묘(太廟)에 부묘(附廟)하는 예(禮)에 견준다면 사체가 조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대사례(大祀禮)를 하루에 두 번 행하는 것은 이미 고종(高宗)의 융제(肜祭)보다 더한 점이 있는데, 더구나 봉안한 뒤에 음악을 연주하면서 연회를 즐겼는데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이것은 부묘례(附廟禮) 가운데에서 특별히 삭제시키라고 명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묘알(廟謁)하는 절차에 이르러서는 효성이 극진하여 수시로 정(情)을 펴는 것이 예에 있어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만, 길일이 세 번이나 있어 물리거나 앞당기는 것에 대비할 수 있으니, 조금 더디게 하고 조금 빠르게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갑자기 성인(聖人)이 병을 삼가라는 경계를 소홀히 여겨 여러 신하들이 걱정하여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거스르면서 눈보라를 무릅쓰고 기필코 행하고야 마셨습니다. 이것이 성덕(聖德)에 있어서는 돈후하게 하는 데 잘못된 것에 불과하지만 하늘이 우리 임금을 인애하는 것이 본래 지극하였으니, 어찌 일에 따라 견고(譴告)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경고하고 또 경고하여 간절히 하기를 마지 않는 것에서 성상께서 하늘을 감동시킨 덕이 고종과 부합된 점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유독 한스러운 것은 전하의 조정 신하 가운데 조기처럼 임금을 간하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 그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뭇 신하들의 죄인 것입니다만, 또한 전하께서도 스스로 반성해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기의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지 못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였는데, 우리 성상의 덕행이 혹 고종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을 신은 또한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이 듣건대 효도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천자(天子)·국군(國君)·대부(大夫)·사서(士庶)의 효도가 같지 않기 때문에 공성(孔聖)이 대순(大舜)의 대효(大孝)를 일컬으면서 반드시 ‘성인(聖人)의 덕을 지녔다.’고 하였고, 무왕(武王)의 달효(達孝)를 찬송하면서 ‘잘 계술(繼述)하였다.’고 한 말은 은미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효도를 행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려 하신다면 반드시 선왕(先王)의 지사(志事)를 잘 준수하고 선왕의 헌장(憲章)을 잘 따르는 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고서,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어 무궁하게 전하여 가게 함과 동시에 후손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남겨 줌으로써 천하 후세로 하여금 선왕의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을 추모하는 것이 오랠수록 더욱 깊어지게 하는 것이 실상은 성효(聖孝) 가운데 가장 큰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구구하게 기원하는 것입니다.
신이 소장을 완성한 후 삼가 듣건대 성가(聖駕)가 황단(皇壇)에서 환궁하는 길에 또 육상묘(毓祥廟)에 거둥하였다고 합니다. 성상께서 일생 동안 끝없이 사모하는 마음에 있어 날마다 전성(展省)한다고 해도 어찌 흡족할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정(情)은 무궁하지만 예(禮)에는 절한(節限)이 있다는 것이 옛사람의 훈계인 것입니다. 혹 성상께서 이 점에 대해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까? 보필하는 지위와 근밀한 반열에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경계하고 일깨우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신은 더욱 개탄스럽고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지만 앞으로의 일은 그래도 고칠 수가 있으니, 아울러 성명(聖明)께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소장을 봉입(奉入)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불효하기는 하지만 공판(工判)이 차마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영정(影幀)을 봉안할 때 제사지내는 예를 고종이 융제를 지낸 것에 견주는 것은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닌가? 황단(皇壇)에서 돌아올 때 사묘(私廟)에 들러 배알한 것은 진실로 인정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그 다음날은 곧 나의 사친(私親)의 기신(忌辰)이니, 잠시 전알하는 것이 어찌 방해됨이 있겠는가? 이 기진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 기해년043) 시위 때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난번 선정전(宣政殿)에서 ‘강주(江州) 사마(司馬)의 청삼(靑衫)이 젖었다.’는 하교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제사지냈다는 이야기를 하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그날 음악을 진설한 일은 곧 상하가 함께 즐긴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내가 곧 이어 너무 즐기는 데 대한 경계를 하였었다. 그리고 옥당(玉堂)의 차자도 있었는데, 그치지 않고 중언 부언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85면
원문
○工曹判書李箕鎭上疏, 略曰:
臣於頃日診筵, 伏蒙聖上親賜御詩, 雲漢昭回, 龍翰爛燁, 寵光所被, 瞻聆俱聳。 天意藹然, 玉音溫諄, 聖上所以眷臣而勉臣者, 豈非以臣爲先朝舊物而然歟? 臣若有懷不言, 烏在乎舊臣之義也? 臣伏見聖上誠孝至德, 出於天性, 不惟臣庶之欽服, 實天地神祇所共監臨。 凡係奉先之事、追遠之禮, 宜若允孚于休, 罔有不格, 而向來陰虹貫月之變, 近者雪、雹、地震之異, 適在於齋臨之時駕行之日, 此其故何哉? 臣誠迷昧疑惑, 歷累日而不釋也。 臣謹按《書傳》, 高宗肜日, 越有雊雉, 其臣祖己訓于王, 戒之以 ‘不若德不聽罪’, 終之曰, ‘無豐于昵。’ 若高宗有殷賢聖之君也。 三年亮陰, 千古一有, 而恭默思道, 帝賚良弼, 則其篤孝之行, 對越之誠, 卽可見已。 肜是禰祭, 明日又祭之名, 少有豐焉, 災輒隨之, 天人相與之機, 其捷如響。 故先儒釋之曰, ‘賢君素與天通, 災異之應常速。’ 高宗雖過於厚, 亦過也。 過失微形, 天遽警之, 可見上天愛君之至也。 夫以高宗寅畏之心, 豈不知修省于此, 而祖己所謂乃曰其如台者, 蓋恐其君, 謂之適然而自恕, 以爲孽祥其如我, 則天必絶之矣。 其言無已過乎? 然使祖己, 盡言無諱, 若是深切者, 此高宗所以爲高宗也。 今我寧考御幀之躋奉眞殿, 何等盛典, 何等縟儀。 而然視太廟祔禮, 則事體稍間。 而大祀禮之一日再行, 旣有加於高宗之肜, 況奉安後擧樂作歡? 又是祔廟禮中特命刪去者乎? 至於廟謁之節, 孝思攸切, 以時伸情, 於禮固當, 而涓日有三, 可備進退, 則差遲差速, 有何關係? 乃殿下忽聖人愼疾之戒, 咈諸臣憂悶之情, 衝冒風雪, 必行乃已。 此在聖德, 不過失諸厚, 而天之於吾君, 仁愛素至, 安得不隨事而譴告之乎? 警之又警, 惓惓不已者, 有以見聖上動天之德, 同符於高宗, 而獨恨殿下廷臣, 未聞有祖己格王之言。 此固群下之罪, 亦豈非殿下自反處耶? 古人云, ‘恥其君不及堯 舜’, 以我聖上之德之行, 或不及於高宗, 亦臣之所恥也。 且臣聞孝有許多般焉。 天子、國君、大夫、士庶, 其孝不同, 孔聖所以稱大舜之大孝, 必曰 ‘德爲聖人’, 讃武王達孝, 曰 ‘善繼善述’ 者, 其旨微矣。 惟我聖上, 苟欲盡爲孝之道, 則必以克遵先王之志事, 遹追先王之憲章爲第一義, 于以明天理正人心, 垂之無窮, 貽厥孫謨, 使天下後世, 慕先王之盛德至善, 愈久而愈深, 實聖孝之大者。 此臣區區所禱祝也。 臣於疏成之後, 伏聞聖駕自皇壇還宮之路, 又幸毓祥廟。 以聖上不匱之思, 終身之慕, 雖鎭日展省, 寧有恔乎, 而情無窮而禮有節, 卽古人之訓也。 或恐聖上未暇念及於此耶? 輔弼之地、近密之班, 無一人爲殿下警效者, 臣尤慨惜。 事雖已遂, 來猶可追, 竝願聖明之留意焉。
疏入, 上曰: "予雖不孝, 工判何忍發此言耶? 且以影幀奉安時祭祀之禮, 比之於高宗肜日, 不亦過乎? 皇壇歸路, 歷拜私廟, 固人情之所不可已者, 況其翌日, 卽予私親之忌辰, 則暫爲展謁, 有何所妨? 箕鎭以先朝之舊臣, 曾參己亥侍衛, 故予頃於宣政殿, 有江州司馬靑衫濕之敎矣。 今有此再祭之說, 良可慨也。 其日陳樂之擧, 卽出於上下同樂之意, 而予旋有太康之戒。 且有玉堂之箚, 則亦何必重言復言, 齗齗不已耶?"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8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