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60권, 영조 20년 12월 25일 戊辰 3/3 기사 / 1744년 청 건륭(乾隆) 9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다. 향군, 공물 금납제, 강속전, 관방 등에 대해 의논하다
국역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향군(鄕軍)에게 폐단을 줄이는 방법을 물어 보게 하였는데, 호남 지방의 상번군(上番軍)이 진상(進上)하는 산돼지를 능히 잡아서 바칠 수가 없으면, 돈으로써 대신 바치게 하는 폐단을 우러러 대답하니, 비국에 품신하여 처리하라 명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막중한 토공(土貢)을 민간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것은 일이 지극히 잘못되었다고 하여, 임금이 돈으로서 대신 받는 습관을 엄하게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호남 지방에서 강속전(降續田)의 5년 동안 기한을 정하는 법을 중지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경자년284) 에 양전(量田)한 뒤에 진전(陳田)에서 백징(白徴)하는 폐단이 있어서 도신이 장계하여 청하였으므로, 속전(續田)의 예에 의하여 기경(起耕)하면 세금을 받고, 묵히면 세금을 받지 않게 하였었다. 그 뒤에 백성들 가운데 혹은 기경하거나 개간하여도 조세를 바치지 아니하는 자가 있으니, 도신이 또 장계하여 강속전으로 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간사한 폐단을 염려하여, 연한을 정하여서 감독하고 문책하려는 뜻을 엄하게 보였었다. 그 연한이 장차 차게 되면, 세목이 텅 빈 가운데 다시 기경하는 폐단이 있기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원경하(元景夏)가 호남 지방의 도백(道伯)이 되었을 때에 장계하여 이것을 혁파하도록 청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품지하여 기경하는 대로 그 즉시 조세를 거두고 연한을 정하지 말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이어서 원경하로 하여금 그 바로잡는 일을 관장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신 등이 비국의 자리를 외람되게 차지한 지 거의 20년이 되었습니다. 근력은 비록 쇠약하더라도 지력는 점점 커지니, 나이 어린 때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금일에 보산(寶算)이 비록 높으시지만, 예지(睿智)가 더욱 높아지고 성학(聖學)이 더욱 높아지니, 이것은 바로 군신 상하가 급급하게 일을 할 수가 있는 때입니다. 바로 지금 《속대전(續大典)》과 《속오례의(續五禮儀)》를 찬집하여 완성한 것도 또한 전하께서 대도(大道)를 후세에 남겨 주고 먼 후일을 경영하시려는 뜻입니다. ‘능히 일을 이미 마쳤다.’고 하교하시지 마시고 더욱더 권면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재자관(䝴咨官)의 말을 들으니, 황제가 심양(瀋陽)에 행차한 뒤에 사냥을 나가서 혹은 3백 리나 혹은 4백 리를 순행(巡行)하는데, 그 반유(盤遊)하는 것이 법도가 없으며, 금산사(金山寺)를 짖는데 그 제도가 보통과 다르며, 또 남부 여대(南負女戴)하여 길을 가는 자가 도로에 서로 잇따랐으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성중의 무뢰한들로 하여금 나가서 백두산(白頭山) 근처를 지키게 한다.’라고 하였다 하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정확히 어떤 곳을 지키는 지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모두 중국[中州]과 혼돈되어 있으니, 내가 혹시 보지 못하더라도 천하의 일은 저절로 알 수가 있다. 바로 지금 관방(關防)에는 믿을 만한 것이 없는데,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김약로(金若魯)가 기백(箕伯)285) 이 되었을 때에 장문(狀聞)하기를, ‘관서 지방의 강변 일대에 있는 일곱 고을은 그 앞이 두만강에 맞닿고 배후에 한두 고개가 있어서 모두 적로(賊路)에 해당하는데, 만약 나라의 위급한 때를 만난다면, 강변의 일곱 고을은 마땅히 이 고개를 수비하여 적들로 하여금 고개를 넘지 말게 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삭주(朔州)로 말하더라도 그 곳에서 창성(昌城)을 관할 하기 때문에 난시(亂時)에는 마땅히 뒤에 있는 고개를 내버리고 도리어 다른 고을로 갈 것이니, 방어의 허술하기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유의(留意)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66면
원문
○上引見大臣、備堂。 先是命承旨, 詢減瘼于鄕軍, 湖南上番軍, 以進上山猪, 不能捉納, 則以錢代捧之弊仰對, 命備局稟處, 至是, 上以莫重土貢, 收斂民間, 事極非矣, 命嚴禁捧錢之習。 命停湖南降續田五年定限之法, 先是, 庚子量田後, 陳田有白徵之患, 道臣狀請, 依續田例, 起則有稅, 陳則無稅。 其後民或有起墾, 而不納稅者, 道臣又狀請降續, 而慮其奸弊, 定爲年限, 嚴示督責。 及其年限將滿, 至有空中還起之弊, 故元景夏爲湖南伯時, 狀請革罷, 至是左議政宋寅明, 稟請隨起隨稅, 勿定年限, 允之。 寅明仍請令元景夏句管釐正, 從之。 寅明又曰: "臣等之忝居備局, 殆二十年。 筋力雖衰, 智慮漸長, 截異少年時。今日寶算雖高, 而睿智益高, 聖學益高, 此正君臣上下汲汲可有爲之時也。 卽今《續大典》、《續五禮》之纂成, 亦殿下垂裕經遠之意也。 勿以能事已畢爲敎, 益加勉勵焉。" 上納之。 右議政趙顯命曰: "聞齎咨官之言, 則皇帝瀋行後, 出獵巡行, 或三百里, 或四百里, 盤遊無度, 作金山寺, 制度異常, 且男負女戴而往者相續道路, 問之則使城中無賴漢, 出戌白頭山近處云, 未知其故。 而亦未知的戌何處矣。 上曰: "今則竝與中州而混沌, 予則或不見, 而天下事自可知矣。 卽今關防無可恃者, 將若之何?" 顯命曰: "金若魯爲箕伯時, 狀聞以爲, ‘關西江邊一帶七邑, 前當豆滿, 背後有一二嶺, 皆當賊路, 若値緩急, 則江邊七邑, 當守此嶺, 勿令賊踰嶺, 而以朔州言之, 以其管轄於昌城, 故亂時則當委棄後嶺, 反往他邑, 踈虞如此。’ 此不可不及今留意也。"
-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66면
영조 20년 (1744) 12월 25일
영조실록60권, 영조 20년 12월 25일 戊辰 3/3 기사 / 1744년 청 건륭(乾隆) 9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다. 향군, 공물 금납제, 강속전, 관방 등에 대해 의논하다
국역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향군(鄕軍)에게 폐단을 줄이는 방법을 물어 보게 하였는데, 호남 지방의 상번군(上番軍)이 진상(進上)하는 산돼지를 능히 잡아서 바칠 수가 없으면, 돈으로써 대신 바치게 하는 폐단을 우러러 대답하니, 비국에 품신하여 처리하라 명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막중한 토공(土貢)을 민간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것은 일이 지극히 잘못되었다고 하여, 임금이 돈으로서 대신 받는 습관을 엄하게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호남 지방에서 강속전(降續田)의 5년 동안 기한을 정하는 법을 중지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경자년284) 에 양전(量田)한 뒤에 진전(陳田)에서 백징(白徴)하는 폐단이 있어서 도신이 장계하여 청하였으므로, 속전(續田)의 예에 의하여 기경(起耕)하면 세금을 받고, 묵히면 세금을 받지 않게 하였었다. 그 뒤에 백성들 가운데 혹은 기경하거나 개간하여도 조세를 바치지 아니하는 자가 있으니, 도신이 또 장계하여 강속전으로 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간사한 폐단을 염려하여, 연한을 정하여서 감독하고 문책하려는 뜻을 엄하게 보였었다. 그 연한이 장차 차게 되면, 세목이 텅 빈 가운데 다시 기경하는 폐단이 있기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원경하(元景夏)가 호남 지방의 도백(道伯)이 되었을 때에 장계하여 이것을 혁파하도록 청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품지하여 기경하는 대로 그 즉시 조세를 거두고 연한을 정하지 말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이어서 원경하로 하여금 그 바로잡는 일을 관장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신 등이 비국의 자리를 외람되게 차지한 지 거의 20년이 되었습니다. 근력은 비록 쇠약하더라도 지력는 점점 커지니, 나이 어린 때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금일에 보산(寶算)이 비록 높으시지만, 예지(睿智)가 더욱 높아지고 성학(聖學)이 더욱 높아지니, 이것은 바로 군신 상하가 급급하게 일을 할 수가 있는 때입니다. 바로 지금 《속대전(續大典)》과 《속오례의(續五禮儀)》를 찬집하여 완성한 것도 또한 전하께서 대도(大道)를 후세에 남겨 주고 먼 후일을 경영하시려는 뜻입니다. ‘능히 일을 이미 마쳤다.’고 하교하시지 마시고 더욱더 권면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재자관(䝴咨官)의 말을 들으니, 황제가 심양(瀋陽)에 행차한 뒤에 사냥을 나가서 혹은 3백 리나 혹은 4백 리를 순행(巡行)하는데, 그 반유(盤遊)하는 것이 법도가 없으며, 금산사(金山寺)를 짖는데 그 제도가 보통과 다르며, 또 남부 여대(南負女戴)하여 길을 가는 자가 도로에 서로 잇따랐으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성중의 무뢰한들로 하여금 나가서 백두산(白頭山) 근처를 지키게 한다.’라고 하였다 하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정확히 어떤 곳을 지키는 지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모두 중국[中州]과 혼돈되어 있으니, 내가 혹시 보지 못하더라도 천하의 일은 저절로 알 수가 있다. 바로 지금 관방(關防)에는 믿을 만한 것이 없는데,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김약로(金若魯)가 기백(箕伯)285) 이 되었을 때에 장문(狀聞)하기를, ‘관서 지방의 강변 일대에 있는 일곱 고을은 그 앞이 두만강에 맞닿고 배후에 한두 고개가 있어서 모두 적로(賊路)에 해당하는데, 만약 나라의 위급한 때를 만난다면, 강변의 일곱 고을은 마땅히 이 고개를 수비하여 적들로 하여금 고개를 넘지 말게 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삭주(朔州)로 말하더라도 그 곳에서 창성(昌城)을 관할 하기 때문에 난시(亂時)에는 마땅히 뒤에 있는 고개를 내버리고 도리어 다른 고을로 갈 것이니, 방어의 허술하기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유의(留意)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66면
원문
○上引見大臣、備堂。 先是命承旨, 詢減瘼于鄕軍, 湖南上番軍, 以進上山猪, 不能捉納, 則以錢代捧之弊仰對, 命備局稟處, 至是, 上以莫重土貢, 收斂民間, 事極非矣, 命嚴禁捧錢之習。 命停湖南降續田五年定限之法, 先是, 庚子量田後, 陳田有白徵之患, 道臣狀請, 依續田例, 起則有稅, 陳則無稅。 其後民或有起墾, 而不納稅者, 道臣又狀請降續, 而慮其奸弊, 定爲年限, 嚴示督責。 及其年限將滿, 至有空中還起之弊, 故元景夏爲湖南伯時, 狀請革罷, 至是左議政宋寅明, 稟請隨起隨稅, 勿定年限, 允之。 寅明仍請令元景夏句管釐正, 從之。 寅明又曰: "臣等之忝居備局, 殆二十年。 筋力雖衰, 智慮漸長, 截異少年時。今日寶算雖高, 而睿智益高, 聖學益高, 此正君臣上下汲汲可有爲之時也。 卽今《續大典》、《續五禮》之纂成, 亦殿下垂裕經遠之意也。 勿以能事已畢爲敎, 益加勉勵焉。" 上納之。 右議政趙顯命曰: "聞齎咨官之言, 則皇帝瀋行後, 出獵巡行, 或三百里, 或四百里, 盤遊無度, 作金山寺, 制度異常, 且男負女戴而往者相續道路, 問之則使城中無賴漢, 出戌白頭山近處云, 未知其故。 而亦未知的戌何處矣。 上曰: "今則竝與中州而混沌, 予則或不見, 而天下事自可知矣。 卽今關防無可恃者, 將若之何?" 顯命曰: "金若魯爲箕伯時, 狀聞以爲, ‘關西江邊一帶七邑, 前當豆滿, 背後有一二嶺, 皆當賊路, 若値緩急, 則江邊七邑, 當守此嶺, 勿令賊踰嶺, 而以朔州言之, 以其管轄於昌城, 故亂時則當委棄後嶺, 反往他邑, 踈虞如此。’ 此不可不及今留意也。"
-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66면
원본
영조 20년 (1744) 1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