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43권, 영조 13년 4월 29일 丁亥 1/2 기사 / 1737년 청 건륭(乾隆) 2년
김재로가 이현필의 일이 커지자 죄를 정하자 하니 다른 갈등을 염려하여 윤허하지 않다
국역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이현필의 일은 언의(言議)가 갈수록 더욱 시끄럽습니다만, 이제 와서 때가 지난 뒤에 직접 정죄(定罪)하는 것은 불편한 점이 있으니, 마땅히 아래의 공론(公論)에 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신은 식견이 명석하지 못하니 뒷날 당상(堂上)들과 삼사(三司)에서 모두 입시하였을 때 상의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경력(經歷)한 일이 많은데 이현필의 일쯤은 말할 것도 없다. 선유(先儒)들의 말에, ‘부모(父母)의 하는 일은 옳게 여기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는데, 옳지 않은 곳을 본다는 것은 이것이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닌 것이다. 무신년과 신축년의 일이 어디서부터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기는 하지만 사람은 모두 이륜(彛倫)을 크게 지키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임금의 거조(擧措)가 옳으면 기뻐하고 옳지 않으면 걱정하는 것은 진실로 아랫사람의 상정(常情)인 것이다. 내가 그르게 여기는 것은 대소 정신(廷臣)들이 면대해서 나의 잘못을 진달하려 하지 않고 물러가서 몰래 이를 시비(是非)하는 것이다. 포의(布衣)의 선비들도 무엇을 보면 일 만들기를 좋아하여 고담 준론(高談峻論)함으로써 스스로 명사(名士)인 양 여기는데 시골 사람들도 따라서 이를 본받고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근일의 폐습(弊習)이다. 내가 비록 이현필을 용서하여 주더라도 여러 신하들이 이현필을 보는 시각은 의당 이관후(李觀厚)에게 한 것과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진실로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여 죄주려 한다면 가부(可否)를 의논하는 사이에 또 장차 허다한 갈등이 발생하게 될 것이니, 눈감아 주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동지사 김시형(金始炯)과 이조 판서 정석오(鄭錫五) 등도 이현필의 죄상을 대단하게 말하였는데, 김재로가 말하기를,
"방출(榜出)한 뒤 신이 조현명과 조용히 만났었는데, 그의 말이 곧바로 뉘우쳤으나 이미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제학의 소장에 단지 성세(盛世)라는 것만 있는 줄 알고 이 글을 선발하여 뽑았다고 한 것은 이 일에 대해서 매우 눈감아 준 것 같은데, 그의 말은 순실(純實)한 것이다."
하였다.
원문
○丁亥/上引見大臣、備堂。 左議政金在魯曰: "以李顯弼事, 言議轉益紛紜, 到今過時之後, 親自定罪, 有所不便。 當付在下之公論, 而臣識見不明, 待後日諸堂及三司齊入, 商確定罪爲宜。" 上曰: "予所經歷者多, 顯弼事, 何足道也。 先儒云: ‘無不是底父母。’ 蓋見其有不是處者, 非一朝一夕之故。 戊申與辛丑之事, 自何而成乎? 雖然, 人皆有秉彝之心, 君上擧措是則喜, 非則憂, 此誠在下之常情。 予所非者, 大小廷臣, 不肯面陳予失, 退而竊是非之。 布衣之士, 看作好事, 高談峻論, 自以爲名士, 而鄕人隨而效之, 此固近日弊習。 予雖容恕顯弼, 而諸臣之視顯弼, 則當如觀厚。 苟欲詢諸臣罪之, 則其可否之間, 又將生出許多葛藤, 不如闊略之矣。" 同知金始烱、吏曹參判鄭錫五等, 亦盛言顯弼罪狀, 在魯曰: "榜出之後, 臣與趙顯命從容相見, 渠謂旋卽悔之, 而已無可及矣。" 上曰: "大提學疏中, 徒知有盛際, 而選取此文云者, 於此事頗闊略, 而其言純實矣。"
영조 13년 (1737) 4월 29일
영조실록43권, 영조 13년 4월 29일 丁亥 1/2 기사 / 1737년 청 건륭(乾隆) 2년
김재로가 이현필의 일이 커지자 죄를 정하자 하니 다른 갈등을 염려하여 윤허하지 않다
국역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이현필의 일은 언의(言議)가 갈수록 더욱 시끄럽습니다만, 이제 와서 때가 지난 뒤에 직접 정죄(定罪)하는 것은 불편한 점이 있으니, 마땅히 아래의 공론(公論)에 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신은 식견이 명석하지 못하니 뒷날 당상(堂上)들과 삼사(三司)에서 모두 입시하였을 때 상의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경력(經歷)한 일이 많은데 이현필의 일쯤은 말할 것도 없다. 선유(先儒)들의 말에, ‘부모(父母)의 하는 일은 옳게 여기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는데, 옳지 않은 곳을 본다는 것은 이것이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닌 것이다. 무신년과 신축년의 일이 어디서부터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기는 하지만 사람은 모두 이륜(彛倫)을 크게 지키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임금의 거조(擧措)가 옳으면 기뻐하고 옳지 않으면 걱정하는 것은 진실로 아랫사람의 상정(常情)인 것이다. 내가 그르게 여기는 것은 대소 정신(廷臣)들이 면대해서 나의 잘못을 진달하려 하지 않고 물러가서 몰래 이를 시비(是非)하는 것이다. 포의(布衣)의 선비들도 무엇을 보면 일 만들기를 좋아하여 고담 준론(高談峻論)함으로써 스스로 명사(名士)인 양 여기는데 시골 사람들도 따라서 이를 본받고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근일의 폐습(弊習)이다. 내가 비록 이현필을 용서하여 주더라도 여러 신하들이 이현필을 보는 시각은 의당 이관후(李觀厚)에게 한 것과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진실로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여 죄주려 한다면 가부(可否)를 의논하는 사이에 또 장차 허다한 갈등이 발생하게 될 것이니, 눈감아 주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동지사 김시형(金始炯)과 이조 판서 정석오(鄭錫五) 등도 이현필의 죄상을 대단하게 말하였는데, 김재로가 말하기를,
"방출(榜出)한 뒤 신이 조현명과 조용히 만났었는데, 그의 말이 곧바로 뉘우쳤으나 이미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제학의 소장에 단지 성세(盛世)라는 것만 있는 줄 알고 이 글을 선발하여 뽑았다고 한 것은 이 일에 대해서 매우 눈감아 준 것 같은데, 그의 말은 순실(純實)한 것이다."
하였다.
원문
○丁亥/上引見大臣、備堂。 左議政金在魯曰: "以李顯弼事, 言議轉益紛紜, 到今過時之後, 親自定罪, 有所不便。 當付在下之公論, 而臣識見不明, 待後日諸堂及三司齊入, 商確定罪爲宜。" 上曰: "予所經歷者多, 顯弼事, 何足道也。 先儒云: ‘無不是底父母。’ 蓋見其有不是處者, 非一朝一夕之故。 戊申與辛丑之事, 自何而成乎? 雖然, 人皆有秉彝之心, 君上擧措是則喜, 非則憂, 此誠在下之常情。 予所非者, 大小廷臣, 不肯面陳予失, 退而竊是非之。 布衣之士, 看作好事, 高談峻論, 自以爲名士, 而鄕人隨而效之, 此固近日弊習。 予雖容恕顯弼, 而諸臣之視顯弼, 則當如觀厚。 苟欲詢諸臣罪之, 則其可否之間, 又將生出許多葛藤, 不如闊略之矣。" 同知金始烱、吏曹參判鄭錫五等, 亦盛言顯弼罪狀, 在魯曰: "榜出之後, 臣與趙顯命從容相見, 渠謂旋卽悔之, 而已無可及矣。" 上曰: "大提學疏中, 徒知有盛際, 而選取此文云者, 於此事頗闊略, 而其言純實矣。"
원본
영조 13년 (1737) 4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