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42권, 영조 12년 8월 11일 壬申 4/4 기사 / 1736년 청 건륭(乾隆) 1년
우찬성 세자 이사인 정제두의 졸기
국역
우찬성 세자 이사(世子貳師)인 정제두(鄭齊斗)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몹시 애도하여 슬퍼하는 윤음(綸音)을 내리고, 장제(葬祭)의 비용을 하사하였으며,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문강(文康)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제두는 자(字)가 사앙(士仰)으로서,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고, 고(故) 상신(相臣) 정유성(鄭維城)의 손자인데 타고난 자질이 영위(英偉)하고 명수(明粹)하였다. 일찍이 도(道)에 뜻을 두었으므로, 과거 공부를 폐기하고 정도와 진리를 지켰다. 그의 학문은 간이(簡易)함과 독실(篤實)함을 주로 하고 있는데, 정사(政事)에 미루어 치란(治亂)의 연혁을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환하였으며, 갑병(甲兵)과 전곡(錢穀), 백가(百家)의 술수(術數)까지도 널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화도(江華島)에 복거(卜居)하고 있었는데, 숙종조(肅宗朝) 때 천거에 의하여 곧바로 6품의 관직을 제수받았었다. 여러번 대성(臺省)과 방백(方伯)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간혹 군읍(郡邑)에는 부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특이한 치적을 남겼다. 성상께서 임어(臨御)함에 이르러서는 예우가 더욱 융숭하였고, 사림(士林)에서 존중하고 흠앙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88세이다. 세상에서는 하곡 선생(霞谷先生)이라고 불렀다. 정제두는 젊어서는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을 좋아했었는데 선배와 사우(士友)들이 서찰을 보내어 규책(規責)한 탓으로 마침내 정주(程朱)의 법문(法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평생 강설(講說)을 일삼지 않았고 논저(論著)를 즐겨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실록42권, 영조 12년 8월 11일 壬申 4/4 기사 / 1736년 청 건륭(乾隆) 1년
우찬성 세자 이사인 정제두의 졸기
국역
우찬성 세자 이사(世子貳師)인 정제두(鄭齊斗)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몹시 애도하여 슬퍼하는 윤음(綸音)을 내리고, 장제(葬祭)의 비용을 하사하였으며,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문강(文康)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제두는 자(字)가 사앙(士仰)으로서,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고, 고(故) 상신(相臣) 정유성(鄭維城)의 손자인데 타고난 자질이 영위(英偉)하고 명수(明粹)하였다. 일찍이 도(道)에 뜻을 두었으므로, 과거 공부를 폐기하고 정도와 진리를 지켰다. 그의 학문은 간이(簡易)함과 독실(篤實)함을 주로 하고 있는데, 정사(政事)에 미루어 치란(治亂)의 연혁을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환하였으며, 갑병(甲兵)과 전곡(錢穀), 백가(百家)의 술수(術數)까지도 널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화도(江華島)에 복거(卜居)하고 있었는데, 숙종조(肅宗朝) 때 천거에 의하여 곧바로 6품의 관직을 제수받았었다. 여러번 대성(臺省)과 방백(方伯)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간혹 군읍(郡邑)에는 부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특이한 치적을 남겼다. 성상께서 임어(臨御)함에 이르러서는 예우가 더욱 융숭하였고, 사림(士林)에서 존중하고 흠앙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88세이다. 세상에서는 하곡 선생(霞谷先生)이라고 불렀다. 정제두는 젊어서는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을 좋아했었는데 선배와 사우(士友)들이 서찰을 보내어 규책(規責)한 탓으로 마침내 정주(程朱)의 법문(法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평생 강설(講說)을 일삼지 않았고 논저(論著)를 즐겨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