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28권, 영조 6년 11월 2일 丁卯 1/4 기사 / 1730년 청 옹정(雍正) 8년
경종 원년의 당화와 김일경이 지은 교문의 죄와 이인좌 난에 대한 전 참판 김유경의 상소
국역
전 참판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우리 나라의 당론(黨論)은 실로 나라를 멸망시킬 고질적인 폐단이지만, 신축년489) 의 당화(黨禍)에 이르러서는 어찌 당론으로써 논하겠습니까? 아! 선왕(先王)께서 불행하게도 질병이 있으시자 군간(群奸)들은 틈을 타서 흉심(凶心)을 풀어보려고 환관(宦官)·궁첩(宮妾)과 짜고 권병(權柄)을 도득(圖得)하려 하였는데, 그 용심(用心)과 계획이 다만 전하를 불리하게 하는 데 있어서 모사(謀事)의 배포(排布)를 차례대로 실천했으니, 위험하고 두려운 말은 이미 잠저(潛邸)에 계실 때 나왔었고, 착오(錯誤)를 규정(糾正)하는 논의는 또 위호(位號)를 정한 뒤에 나왔습니다. 김일경(金一鏡)의 상소가 밖에서 창도(唱導)하고 박상검(朴尙儉)의 고변(告變)이 안에서 응하더니, 마침내는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책봉 사신(冊封使臣)의 선래(先來)가 나온 이튿날에 앞세워 무망(誣罔)하고 핍박하는 말이 과연 흉악한 입에서 나왔으니, 신하된 자가 누군들 피눈물을 뿌리고 울음을 삼키며 시원스럽게 변명코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에 도리어 옥사(獄辭)가 동궁(東宮)에 관련된 것은 문안(文案)에 쓰지 말 것을 청하면서 즉시 정국(庭鞫)을 그만두고 본부(本府)490) 로 옮겨서 마치 어떠한 사정이 그 속에 숨어 있기나 하는 듯이 숨겨서 허실(虛實)과 의사(疑似)의 경지에 둠으로써 위에서 듣게 됨을 현혹시키려 했으니, 그 음흉한 계략과 교묘한 모사는 익히 연습하고 미리 짜놓은 것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후 사태가 갈수록 위급해지자 권익관(權益寬)의 상소가 먼저 나왔는데, 그 속셈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옥당(玉堂)의 차자(箚子)가 뒤이어 나와 터놓고 지척(指斥)을 가하더니, 마침내 교문(敎文)491) 이 지어져 흉역(凶逆)의 심보가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그 시종의 실정은 불을 보듯이 환하게 살필 수가 있는데도 지금에 와서 천죄(千罪) 만악(萬惡)이 전부 한 사람의 김일경에게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흉서(凶書)나 역격(逆檄)이 모두 교문에서 원유(源由)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문의 지극히 흉악한 점은 처음부터 알기 어려운 바가 아니었는데, 어찌하여 대정(大庭)에서 선독(宣讀)할 때는 조정에 가득한 백관(百官)들이 모두 귀를 기울여 듣고 손을 잡으려 하례할 따름으로 한 사람도 마음에 놀라고 뼈에 사무쳐 성죄(聲罪) 청토(請討)한 자가 없었음은 또한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아! 통탄스럽습니다.
만일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으로써 처단(處斷)한다면, 그날의 제신(諸臣)들 중 능히 조돈(趙盾)492) 과 허지(許止)493) 의 필주(筆誅)를 면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 관대하고 지나치게 용서하는 논리로 따져본다면 혹시 경중(輕重)과 천심(淺深)을 구별할 바도 없지 않으니, 말이 비록 길어지더라도 그 설명을 마치려고 합니다. 대저 김일경을 지휘하여 그의 모주(謀主)가 되었던 자가 있었고, 김일경에게 붙어서 그의 심부름꾼이 되었던 자도 있었으며, 안으로는 실제로 찬조하면서 밖으로는 의견이 틀린 것처럼 보인 자도 더러 있었으니, 그의 계교를 알고 성패(成敗)를 앉아서 보기만 한 자는 모두 세태의 형세에 따라가며 그렇게 하였습니다. 마음으로는 그것이 역적(逆賊)이 되는 줄 알면서도 당사(黨私)에 끌리어 이해(利害)를 따지고 두려워 주저하여 입으로 감히 말하지 않은 자는 몇 사람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그 당시에는 한 시대의 명망과 평론이 김일경에게 돌아갔기에, 사직(社禝)을 도운 공신(功臣)으로써 칭찬하고 팔좌(八座)494) 의 열(列)에 뽑히는 등 추허(推許)와 장발(奬拔)이 지극치 않음이 없었으며, 귀양을 간 뒤에도 오히려 구해(救解)하는 말을 올렸고 사형(死刑)을 당한 후에도 적몰(籍沒)의 형벌을 청하지 않았으니, 교문(敎文)을 죄로 여기지 않았음이 어찌 명백하고 증험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무신년495) 칭병(稱兵)496) 한 뒤에는 대역(大逆)의 괴수라고 포고(布告)의 맨앞에 썼으니, 죄는 매한가지로서 옛날이라고 더 작은 것이 아니고 지금이라고 더 큰 것이 아닌데도 무신년의 앞과 뒤에 경중(輕重)이 아주 다르게 되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대개 김일경으로 하여금 전일의 죄를 혼자 담당케 했더라면 자신들은 혹시 수사(收司)497) 되는 형률을 면할까 하여서 그런 것이겠지만, 되레 심장(心腸)과 수족(手足)이 더욱 드러난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가소롭고 가련합니다. 신이 《감란록(戡亂錄)》을 보니 정상을 알았다 해서 죽음을 당한 자도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무릇 김일경을 이인좌(李麟佐)의 괴수라 하면서 이인좌의 정상을 알았던 자는 법에 죽고 김일경의 정상을 알았던 자는 버젓이 날뛰며, 정상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어울려 죄악을 같이 행한 자도 현용(顯用)되고 있으니, 만약 김일경을 역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마는, 역적으로 여긴다면 천하에 어찌 이러한 법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죄가 유봉휘(柳鳳輝)와 같으면서도 관계(官階)는 전과 같고 죄악이 권익관과 같으면서도 자리에 누워 편안히 죽었으며, 당차(堂箚)498) 의 제적(諸賊)들도 나란히 요직(要職)을 차지하고 있고 김일경을 발탁한 자는 권우(眷遇)가 유달리 지극하며 김일경을 신구(伸救)한 자는 내외(內外)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있습니다. 그밖에 죄범(罪犯)이 지극히 무겁고 실상이 다 드러난 자도 한정이 없지만, 전하께서는 통틀어 용서하고 아직껏 죄를 바루지 않으시니, 처분이 상경(常經)과 배치되고 정형(政刑)이 정당(正當)에 어긋나서 국강(國綱)은 이미 해이해졌고 인심은 날로 무너져 군부(君父)를 가벼이 보기를 초개(草芥)와 같이 하고 난역(亂逆)을 돕는 것을 예사로 알아, 원흉(元兇)과 거악(巨惡)이 중외(中外)에 꽉 차고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전후로 잇달아 일어나서 고변(蠱變)과 구화(構禍)까지 있기에 이르렀고, 역적놈이 대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으니, 다시 여지(餘地)가 없게 되었습니다. 강상(綱常)은 무너지고 의리는 막혀 임금은 임금의 도를 하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하지 못하여 결국 3백년 예의(禮義)의 나라를 암흑 천지로 만들어 점점 빠르게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니, 견식이 있는 사람의 심우(深憂) 호탄(浩歎)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탕평(蕩平)의 의논은 더욱 세도(世道)의 큰 해독(害毒)이 되어 역적의 절반은 충신이 되고 충신의 절반은 역적이 되며, 옳은 것도 아주 옳은 것이 되지 않고 그른 것도 전적으로 그른 것이 되지 않아서 주의(注擬)499) 할 때에도 다만 절반만 참여시키려 하고 출척(黜陟)할 즈음에도 반드시 상대(相對)를 구하여 기구(崎嶇)하고 간신(艱辛)하여 억지로 만들고 강제로 성사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바로 이는 주자(朱子)의 이른바 자연스런 탕평과는 아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서 훈유(薰蕕)와 빙탄(氷炭)을 한 그릇 속에 뒤섞으면서도 옛것을 타파하고 새것을 도모한다 이르고는, 전일에 관계된 일들은 일체를 지나간 옛날의 것으로 넘겨 버리려 합니다. 아! 전일 다투었던 바는 다만 갑(甲)과 을(乙)의 시비(是非)이고 저쪽과 이쪽의 장단(長短)에 관한 것일 뿐이고 원래 국가의 흥망이나 조정의 이해(利害)에 관계된 것이 아니었으니, 참으로 지공(至公)으로써 인도하고 지성으로써 면려하여 양쪽이 다 은수(恩讐)를 잊고 일심으로 협조케 한다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도 보합(保合)할 수가 있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도 뭉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군신(君臣)의 대의(大義)와 대륜(大倫)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하늘에서 얻어 자기 본성(本性)에 타고나 천지를 지탱하고 고금을 통하여 변경할 수 없는 상도(常道)가 되어 있으니, 비록 천백번 세상이 바뀐다 해도 결단코 세상과 더불어 변천되고 시대에 따라 변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전하의 신하로서 어떻게 차마 전하의 역신(逆臣)과 어깨를 맞대고 발꿈치를 맞추며 반열(班列)에 달려 다니면서 언의(言議)나 우모(訏謨)의 틈새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주선(周旋)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신하들을 경시(輕視)하심은 본래부터의 병통이었지만, 당론(黨論)이 있었던 뒤로는 갑자기 나왔다가 갑자기 물러갔다가 하면서 번복(翻覆)이 일정함이 없으며, 벼슬을 얻기만을 바라고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여 염치는 흔적도 없어졌고 풍습은 아주 무너졌으며 기절(氣節)은 전혀 없어져, 집에서는 자기 행실을 닦고 나와서는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자중(自重)할 줄 아는 선비가 별로 없었으니, 그들이 임금에게 모멸을 받는 것도 또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전하의 마음은 오로지 탕평(蕩平)에 있었기에 폐기(廢棄)된 자를 기용하고 침체된 자를 올려 주는 등 널리 수소(收召)를 베푸셨으나, 다만 작록(爵祿)으로써 미끼를 주어 꾀고 분의(分義)로써 어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신은 비록 보잘것없지만, 일찍이 옛사람들의 임금 섬기는 도리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에 있어서 오직 의리에 합당한가만을 따져, 만약 그것이 의리일 때는 비록 탕화(湯火) 속에 뛰어든다 해도 낙지(樂地)로 여겼고, 그것이 의리에 어긋나면 비록 천사(千駟)의 부(富)나 만종(萬鍾)의 많은 녹(祿)을 주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신하를 이익으로써 부리고 의리로써 부리지 아니하여, 물리칠 때에는 개나 돼지를 내쫓듯 하시고 임용할 때에는 소나 말을 잡아매듯 하여서, 위노(威怒)로써 으름장을 놓고 견벌(譴罰)로써 위협하여 조금만 뜻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꾸짖고 내쫓아 비록 소회(所懷)가 있더라도 말할 수 없게 하니, 뜻은 막히고 기상은 풀이 죽어 있습니다. 이러고서도 중정(衆情)을 염복(厭服)시키고 온 세상을 변화시켜 무편 무당(無偏無黨)의 다스림을 이루기를 바라고 계신데, 그것이 되겠습니까? 아! 당론(黨論)이 발생한 것은 오래 되었습니다. 그것이 분열(分裂)된 초기에는 비록 사정(邪正)의 구별이 있었지만, 말류(末流)에 있어서의 서로서로 당벌(黨伐)500) 하고 오로지 경알(傾軋)만 일삼는 일을 신이 항상 마음속으로 미워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일을 논할 적에는 오직 옳고 그름만 따졌고 사람과 사귐에는 색목(色目)에 구애(拘碍)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소견을 지나치게 믿고 세상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적었으므로, 포의(布衣) 때부터 비방을 받음이 많았고, 벼슬길에 오른 뒤로는 저어(齟齬)가 더욱 심하여 사적(仕籍)에 통한 것이 20여 년이 되었으나 서울에서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수삼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이 진취(進取)에 서둘지 않음과 언론에 편파적이 아님은 실로 온 조정이 다 아는 바인데, 백수(白首)로 죽음이 임박한 나이로 또 온갖 생각이 다 식어버린 처지에 무슨 심장(心腸)으로 짐짓 괴격(乖激)한 말을 해서 전하의 청문(聽聞)을 거슬리게 하겠습니까? 다만 구구(區區)한 의견을 위와 같이 진달하는 것은 성질이 본디 한 번 집착(執着)하면 능히 고치지 못하여서입니다. 임금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임금의 무참(誣譖)을 풀어 드리지 못하면 신은 비록 거친 음식을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단코 사진(仕進)할 계획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읽어보고 매우 노하여 전교하기를,
"아! 나의 뜻이 아주 정해졌는데, 오늘날에 북면(北面)하는 자로서 어찌 감히 나의 마음을 흔들려 하는가? 이는 신하의 절개가 없는 것이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김유경의 응지(應旨)를 핑계한 한 편의 상소는 그 버릇을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다. 말의 두서없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는가? 그 중에 더욱 해괴한 것을 내가 차마 들추어 말하지 아니한 것은 그의 뜻에 영합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소는 되돌려 주기만 해서는 안된다. 만약 철저히 다스리면 이것도 또한 그의 뜻에 맞춰 주어 한층 격동을 더할 것이다. 즉시 전정(殿庭)에서 불살라 나의 참소를 미워하는 뜻을 보여라."
하였다.
- [註 48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490] 본부(本府) : 의금부(義禁府).
- [註 491] 교문(敎文) : 경종 2년(1722)에 김일경이 지은 교문임.
- [註 492] 조돈(趙盾) :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진나라의 영공(靈公)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달아났는데, 국경을 넘어서지 않아 조천(趙穿)이 영공을 죽였음. 이에 조돈은 돌아와 성공(成公)을 세웠는데, 당시의 역사가는 "조돈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썼음.
- [註 493] 허지(許止) : 허(許)나라의 세자 지(止). 허나라 도공(悼公)이 학질(瘧疾)을 앓다가 그의 세자(世子) 지(止)가 주는 약을 먹고 졸(卒)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세자가 그 약을 미리 맛보지 않았으니, 그 책임은 세자에게 있다 하여, 《춘추(春秋)》 소공(昭公)편에서 "허(許)의 세자(世子) 지(止)가 그의 임금 매(買)를 시해(弑害)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을 말함.
- [註 494] 팔좌(八座) : 한대(漢代)에 육조(六曹)의 상서(尙書)와 일령(一令)·일복(一僕)을 일컫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육조(六曹)에 해당되는 정2품 반열의 벼슬을 말함.
- [註 495]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496] 칭병(稱兵) : 이인좌의 난을 가리킴.
- [註 497] 수사(收司) : 남의 죄에 걸려듦.
- [註 498] 당차(堂箚) : 옥당(玉堂)의 차자(箚子).
- [註 499] 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사람[三望]을 정하여 임금께 올리는 일.
- [註 500] 당벌(黨伐) : 당동벌이(黨同伐異).
원문
○丁卯/前參判金有慶上疏, 略曰:
噫! 我朝黨論, 實爲亡國之痼弊, 而至於辛丑之禍, 豈可以黨論論之哉? 嗚呼! 先王不幸有疾, 群奸乘機逞凶, 交結宦妾, 圖竊權柄, 而其用意設心, 惟在於不利殿下, 經營排布, 次第造出, 危怕之言, 已發於在潛邸之時, 駁正之論, 又出於定位號之後。 鏡疏唱之於外, 儉變應之於內, 末乃粧出逆虎於冊封使臣先來出來之翌日, 誣逼之語, 果發於凶口, 其爲臣子者, 孰不欲沫血飮泣, 痛覈明卞? 而乃反以獄辭之凡干於春宮者, 勿書文案爲請, 而卽撤庭鞫, 移設本府, 有若何樣事情, 隱在其中, 闇然置之於虛實疑似之間, 以爲眩惑聽聞之地, 其陰凶之計, 巧密之謀, 如非熟講素定, 能如是乎? 其後機事轉益危急, 益寬之疏始發, 而旨意叵測, 玉堂之箚繼起, 而顯加指斥, 終而敎文作, 而凶肚逆腸, 畢露無餘矣。 其首尾情節, 灼若觀火, 而到今千罪萬惡, 盡歸於一一鏡之後, 始乃謂凶書、逆檄, 皆源於敎文。 然則敎文之至凶至惡, 初不難知, 而奈之何大庭宣讀之日, 滿朝臣僚, 皆莫不側耳而聽, 交手而賀而已, 無一人爲之驚心痛骨, 聲罪請討者,抑何意也? 嘻噫! 痛矣。 若以春秋之法斷之, 則當日諸臣, 能免於趙盾、許止之誅者, 幾人哉? 第以太寬過恕之論, 論之, 或不無輕重、淺深之可別, 言之雖長, 請畢其說。 蓋指揮一鏡, 爲其謀主者有之, 趨附一鏡, 爲其使令者有之, 內實贊助, 而外示崖異者, 亦或有之, 知其計謀而坐, 觀成敗者, 滔滔皆是。 心知其爲逆, 而牽制黨私, 較量利害, 怵畏趑趄, 口不敢言者, 不過若而人而止耳。 當是之時, 一時望論, 同歸於一鏡, 贊之以社稷之功, 擢之以八座之列, 推許奬拔, 靡不用極。 而至於被謫之初, 猶進救解之言, 伏誅之後, 不請孥籍之典, 則其不以敎文爲罪者, 豈非明且驗也? 而及夫戊申稱兵之後, 乃以大逆之魁, 書之於播告之首, 罪則一也, 昔不加小, 今不加大, 而戊申前後, 輕重判異, 其故何也? 蓋以爲若使一鏡, 獨當前日之罪, 則或可免收司之律, 而反不覺心腸手脚之愈益彰露, 誠可笑也, 亦可哀也。 臣得見《戡亂錄》, 則以知情伏法, 亦多有之。 夫以一鏡爲麟佐之魁, 而知麟佐之情者, 死於法, 知一鏡之情者, 晏然翺翔, 非止知情, 與之爛熳同惡者, 亦蒙顯用。 如不以一鏡爲逆則已, 如以爲逆, 則天下, 安有如許法理? 不特此也。 罪如鳳輝, 而官秩如舊, 惡如益寬, 而臥席而死。 堂箚諸賊, 竝居華顯, 奬拔一鏡者, 眷遇偏至, 伸救一鏡者, 歷揚內外。 其他干犯至重, 情迹盡露者, 亦何限, 而殿下一倂容貸, 尙不正罪。 處分反常, 政刑乖當, 王綱已解, 人心日壞, 視君父輕如草芥, 爲亂逆恬若尋常, 元凶巨惡, 布滿中外, 亂臣賊子, 相繼前後, 以至蠱變搆禍, 逆竪入闕, 而無復餘地矣。 倫常斁絶, 義理晦塞, 君不爲君, 臣不爲臣, 遂使三百年禮義之邦, 便作長夜乾坤, 駸駸然將至於夷狄禽獸之域, 有識之深憂浩歎, 曷有其極? 而不幸蕩平之論, 尤爲世道之大害, 逆半爲忠, 忠半爲逆, 是者不爲全是, 非者不爲全非, 注擬之間, 惟務參半, 黜陟之際, 必求其對, 崎嶇艱辛, 硬做勒成, 正是朱子所謂自然之平, 大相反戾。 蕕薰氷炭, 混雜於一器之中, 而謂之以革舊圖新, 凡係前日事者, 一切付之於先天。 噫! 前日所爭, 只是甲乙之是非, 彼此之長短而已, 元不關於國家之興喪, 朝政之利害者, 誠能以至公導之, 至誠勉之, 使之兩忘恩讎, 一心寅協, 則東西可保合也, 老少可消瀜也。 而至如君臣之大義、大倫, 人皆得之於天, 而賦之於性, 撑天地亘古今, 作爲不易之常理, 則雖閱千百世界, 決不可與世而推移, 隨時而變通者也。 爲今日之臣子, 豈忍與殿下之逆臣, 比肩接武, 馳逐班行, 上下周旋於言議訏謨之間哉? 噫! 殿下之輕視臣隣, 自是本來病痛, 而自有黨論以來, 乍進乍退, 飜覆無常, 患得患失, 廉隅掃地, 風習大壞, 氣節全消, 居而行己, 出而事君, 鮮有自重之士, 則其見侮於君上, 亦有由矣。 近者聖意, 專在於蕩平, 起廢興滯, 廣加收召, 而惟以爵祿啗之, 分義怵之。 臣雖無似, 亦嘗聞古人事君之道矣。 出處進退, 惟義是視, 如其義也, 雖赴湯火, 如視樂地, 如非其義, 雖千駟之富、萬鍾之厚, 亦或有不顧者矣。 奈何, 殿下之使臣以利, 不以義, 其退之也如逐犬豕, 其進之也如縶馬牛, 震之以威怒, 脅之以譴罰, 少有拂意, 則詬叱之斥逐之, 雖有所懷, 使不敢言。 情志阻隔, 氣象愁沮。 如是而欲望厭服群心變化一世, 以做無偏無黨之治, 其可得乎? 噫! 黨論之生久矣。 其分裂之初, 雖有邪正之判, 而至如末流之互相黨伐, 專事傾軋者, 臣心常惡之。 故論事惟循是非, 交人不拘色目, 偏信己見, 與時寡諧, 自在韋布, 誚謗已多。 及登仕路, 齟齬益甚, 通籍餘二十年, 而在京從宦, 不過數三歲矣。 臣之不急於進取, 不偏於言議, 實是通朝之所共知者, 而乃於白首垂死之年, 萬念俱灰之餘, 抑何心腸, 故爲乖激之言, 以忤聖明之聽哉? 第區區意見, 如上所陳, 性本執滯, 不能變改。 若君讎終未討, 聖誣終未辨, 則臣雖飯蔬沒齒, 決不敢爲冒進之計矣。
上覽之, 怒甚, 敎曰: "噫! 予志大定, 北面於今日者, 其敢欲搖颺予心? 是無臣節也。 行副司直金有慶托以應旨, 一篇疏語, 其習不忍正視。 言之無倫, 胡至此哉? 其中尤可駭者, 予不忍提說中其意也。 此等之疏, 非還給而止者也。 若加痛治, 是亦中其意, 乃層激也。 卽火于殿庭, 以示予堲讒之意焉。"
영조실록28권, 영조 6년 11월 2일 丁卯 1/4 기사 / 1730년 청 옹정(雍正) 8년
경종 원년의 당화와 김일경이 지은 교문의 죄와 이인좌 난에 대한 전 참판 김유경의 상소
국역
전 참판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우리 나라의 당론(黨論)은 실로 나라를 멸망시킬 고질적인 폐단이지만, 신축년489) 의 당화(黨禍)에 이르러서는 어찌 당론으로써 논하겠습니까? 아! 선왕(先王)께서 불행하게도 질병이 있으시자 군간(群奸)들은 틈을 타서 흉심(凶心)을 풀어보려고 환관(宦官)·궁첩(宮妾)과 짜고 권병(權柄)을 도득(圖得)하려 하였는데, 그 용심(用心)과 계획이 다만 전하를 불리하게 하는 데 있어서 모사(謀事)의 배포(排布)를 차례대로 실천했으니, 위험하고 두려운 말은 이미 잠저(潛邸)에 계실 때 나왔었고, 착오(錯誤)를 규정(糾正)하는 논의는 또 위호(位號)를 정한 뒤에 나왔습니다. 김일경(金一鏡)의 상소가 밖에서 창도(唱導)하고 박상검(朴尙儉)의 고변(告變)이 안에서 응하더니, 마침내는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책봉 사신(冊封使臣)의 선래(先來)가 나온 이튿날에 앞세워 무망(誣罔)하고 핍박하는 말이 과연 흉악한 입에서 나왔으니, 신하된 자가 누군들 피눈물을 뿌리고 울음을 삼키며 시원스럽게 변명코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에 도리어 옥사(獄辭)가 동궁(東宮)에 관련된 것은 문안(文案)에 쓰지 말 것을 청하면서 즉시 정국(庭鞫)을 그만두고 본부(本府)490) 로 옮겨서 마치 어떠한 사정이 그 속에 숨어 있기나 하는 듯이 숨겨서 허실(虛實)과 의사(疑似)의 경지에 둠으로써 위에서 듣게 됨을 현혹시키려 했으니, 그 음흉한 계략과 교묘한 모사는 익히 연습하고 미리 짜놓은 것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후 사태가 갈수록 위급해지자 권익관(權益寬)의 상소가 먼저 나왔는데, 그 속셈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옥당(玉堂)의 차자(箚子)가 뒤이어 나와 터놓고 지척(指斥)을 가하더니, 마침내 교문(敎文)491) 이 지어져 흉역(凶逆)의 심보가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그 시종의 실정은 불을 보듯이 환하게 살필 수가 있는데도 지금에 와서 천죄(千罪) 만악(萬惡)이 전부 한 사람의 김일경에게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흉서(凶書)나 역격(逆檄)이 모두 교문에서 원유(源由)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문의 지극히 흉악한 점은 처음부터 알기 어려운 바가 아니었는데, 어찌하여 대정(大庭)에서 선독(宣讀)할 때는 조정에 가득한 백관(百官)들이 모두 귀를 기울여 듣고 손을 잡으려 하례할 따름으로 한 사람도 마음에 놀라고 뼈에 사무쳐 성죄(聲罪) 청토(請討)한 자가 없었음은 또한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아! 통탄스럽습니다.
만일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으로써 처단(處斷)한다면, 그날의 제신(諸臣)들 중 능히 조돈(趙盾)492) 과 허지(許止)493) 의 필주(筆誅)를 면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 관대하고 지나치게 용서하는 논리로 따져본다면 혹시 경중(輕重)과 천심(淺深)을 구별할 바도 없지 않으니, 말이 비록 길어지더라도 그 설명을 마치려고 합니다. 대저 김일경을 지휘하여 그의 모주(謀主)가 되었던 자가 있었고, 김일경에게 붙어서 그의 심부름꾼이 되었던 자도 있었으며, 안으로는 실제로 찬조하면서 밖으로는 의견이 틀린 것처럼 보인 자도 더러 있었으니, 그의 계교를 알고 성패(成敗)를 앉아서 보기만 한 자는 모두 세태의 형세에 따라가며 그렇게 하였습니다. 마음으로는 그것이 역적(逆賊)이 되는 줄 알면서도 당사(黨私)에 끌리어 이해(利害)를 따지고 두려워 주저하여 입으로 감히 말하지 않은 자는 몇 사람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그 당시에는 한 시대의 명망과 평론이 김일경에게 돌아갔기에, 사직(社禝)을 도운 공신(功臣)으로써 칭찬하고 팔좌(八座)494) 의 열(列)에 뽑히는 등 추허(推許)와 장발(奬拔)이 지극치 않음이 없었으며, 귀양을 간 뒤에도 오히려 구해(救解)하는 말을 올렸고 사형(死刑)을 당한 후에도 적몰(籍沒)의 형벌을 청하지 않았으니, 교문(敎文)을 죄로 여기지 않았음이 어찌 명백하고 증험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무신년495) 칭병(稱兵)496) 한 뒤에는 대역(大逆)의 괴수라고 포고(布告)의 맨앞에 썼으니, 죄는 매한가지로서 옛날이라고 더 작은 것이 아니고 지금이라고 더 큰 것이 아닌데도 무신년의 앞과 뒤에 경중(輕重)이 아주 다르게 되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대개 김일경으로 하여금 전일의 죄를 혼자 담당케 했더라면 자신들은 혹시 수사(收司)497) 되는 형률을 면할까 하여서 그런 것이겠지만, 되레 심장(心腸)과 수족(手足)이 더욱 드러난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가소롭고 가련합니다. 신이 《감란록(戡亂錄)》을 보니 정상을 알았다 해서 죽음을 당한 자도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무릇 김일경을 이인좌(李麟佐)의 괴수라 하면서 이인좌의 정상을 알았던 자는 법에 죽고 김일경의 정상을 알았던 자는 버젓이 날뛰며, 정상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어울려 죄악을 같이 행한 자도 현용(顯用)되고 있으니, 만약 김일경을 역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마는, 역적으로 여긴다면 천하에 어찌 이러한 법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죄가 유봉휘(柳鳳輝)와 같으면서도 관계(官階)는 전과 같고 죄악이 권익관과 같으면서도 자리에 누워 편안히 죽었으며, 당차(堂箚)498) 의 제적(諸賊)들도 나란히 요직(要職)을 차지하고 있고 김일경을 발탁한 자는 권우(眷遇)가 유달리 지극하며 김일경을 신구(伸救)한 자는 내외(內外)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있습니다. 그밖에 죄범(罪犯)이 지극히 무겁고 실상이 다 드러난 자도 한정이 없지만, 전하께서는 통틀어 용서하고 아직껏 죄를 바루지 않으시니, 처분이 상경(常經)과 배치되고 정형(政刑)이 정당(正當)에 어긋나서 국강(國綱)은 이미 해이해졌고 인심은 날로 무너져 군부(君父)를 가벼이 보기를 초개(草芥)와 같이 하고 난역(亂逆)을 돕는 것을 예사로 알아, 원흉(元兇)과 거악(巨惡)이 중외(中外)에 꽉 차고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전후로 잇달아 일어나서 고변(蠱變)과 구화(構禍)까지 있기에 이르렀고, 역적놈이 대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으니, 다시 여지(餘地)가 없게 되었습니다. 강상(綱常)은 무너지고 의리는 막혀 임금은 임금의 도를 하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하지 못하여 결국 3백년 예의(禮義)의 나라를 암흑 천지로 만들어 점점 빠르게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니, 견식이 있는 사람의 심우(深憂) 호탄(浩歎)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탕평(蕩平)의 의논은 더욱 세도(世道)의 큰 해독(害毒)이 되어 역적의 절반은 충신이 되고 충신의 절반은 역적이 되며, 옳은 것도 아주 옳은 것이 되지 않고 그른 것도 전적으로 그른 것이 되지 않아서 주의(注擬)499) 할 때에도 다만 절반만 참여시키려 하고 출척(黜陟)할 즈음에도 반드시 상대(相對)를 구하여 기구(崎嶇)하고 간신(艱辛)하여 억지로 만들고 강제로 성사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바로 이는 주자(朱子)의 이른바 자연스런 탕평과는 아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서 훈유(薰蕕)와 빙탄(氷炭)을 한 그릇 속에 뒤섞으면서도 옛것을 타파하고 새것을 도모한다 이르고는, 전일에 관계된 일들은 일체를 지나간 옛날의 것으로 넘겨 버리려 합니다. 아! 전일 다투었던 바는 다만 갑(甲)과 을(乙)의 시비(是非)이고 저쪽과 이쪽의 장단(長短)에 관한 것일 뿐이고 원래 국가의 흥망이나 조정의 이해(利害)에 관계된 것이 아니었으니, 참으로 지공(至公)으로써 인도하고 지성으로써 면려하여 양쪽이 다 은수(恩讐)를 잊고 일심으로 협조케 한다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도 보합(保合)할 수가 있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도 뭉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군신(君臣)의 대의(大義)와 대륜(大倫)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하늘에서 얻어 자기 본성(本性)에 타고나 천지를 지탱하고 고금을 통하여 변경할 수 없는 상도(常道)가 되어 있으니, 비록 천백번 세상이 바뀐다 해도 결단코 세상과 더불어 변천되고 시대에 따라 변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전하의 신하로서 어떻게 차마 전하의 역신(逆臣)과 어깨를 맞대고 발꿈치를 맞추며 반열(班列)에 달려 다니면서 언의(言議)나 우모(訏謨)의 틈새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주선(周旋)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신하들을 경시(輕視)하심은 본래부터의 병통이었지만, 당론(黨論)이 있었던 뒤로는 갑자기 나왔다가 갑자기 물러갔다가 하면서 번복(翻覆)이 일정함이 없으며, 벼슬을 얻기만을 바라고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여 염치는 흔적도 없어졌고 풍습은 아주 무너졌으며 기절(氣節)은 전혀 없어져, 집에서는 자기 행실을 닦고 나와서는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자중(自重)할 줄 아는 선비가 별로 없었으니, 그들이 임금에게 모멸을 받는 것도 또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전하의 마음은 오로지 탕평(蕩平)에 있었기에 폐기(廢棄)된 자를 기용하고 침체된 자를 올려 주는 등 널리 수소(收召)를 베푸셨으나, 다만 작록(爵祿)으로써 미끼를 주어 꾀고 분의(分義)로써 어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신은 비록 보잘것없지만, 일찍이 옛사람들의 임금 섬기는 도리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에 있어서 오직 의리에 합당한가만을 따져, 만약 그것이 의리일 때는 비록 탕화(湯火) 속에 뛰어든다 해도 낙지(樂地)로 여겼고, 그것이 의리에 어긋나면 비록 천사(千駟)의 부(富)나 만종(萬鍾)의 많은 녹(祿)을 주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신하를 이익으로써 부리고 의리로써 부리지 아니하여, 물리칠 때에는 개나 돼지를 내쫓듯 하시고 임용할 때에는 소나 말을 잡아매듯 하여서, 위노(威怒)로써 으름장을 놓고 견벌(譴罰)로써 위협하여 조금만 뜻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꾸짖고 내쫓아 비록 소회(所懷)가 있더라도 말할 수 없게 하니, 뜻은 막히고 기상은 풀이 죽어 있습니다. 이러고서도 중정(衆情)을 염복(厭服)시키고 온 세상을 변화시켜 무편 무당(無偏無黨)의 다스림을 이루기를 바라고 계신데, 그것이 되겠습니까? 아! 당론(黨論)이 발생한 것은 오래 되었습니다. 그것이 분열(分裂)된 초기에는 비록 사정(邪正)의 구별이 있었지만, 말류(末流)에 있어서의 서로서로 당벌(黨伐)500) 하고 오로지 경알(傾軋)만 일삼는 일을 신이 항상 마음속으로 미워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일을 논할 적에는 오직 옳고 그름만 따졌고 사람과 사귐에는 색목(色目)에 구애(拘碍)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소견을 지나치게 믿고 세상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적었으므로, 포의(布衣) 때부터 비방을 받음이 많았고, 벼슬길에 오른 뒤로는 저어(齟齬)가 더욱 심하여 사적(仕籍)에 통한 것이 20여 년이 되었으나 서울에서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수삼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이 진취(進取)에 서둘지 않음과 언론에 편파적이 아님은 실로 온 조정이 다 아는 바인데, 백수(白首)로 죽음이 임박한 나이로 또 온갖 생각이 다 식어버린 처지에 무슨 심장(心腸)으로 짐짓 괴격(乖激)한 말을 해서 전하의 청문(聽聞)을 거슬리게 하겠습니까? 다만 구구(區區)한 의견을 위와 같이 진달하는 것은 성질이 본디 한 번 집착(執着)하면 능히 고치지 못하여서입니다. 임금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임금의 무참(誣譖)을 풀어 드리지 못하면 신은 비록 거친 음식을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단코 사진(仕進)할 계획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읽어보고 매우 노하여 전교하기를,
"아! 나의 뜻이 아주 정해졌는데, 오늘날에 북면(北面)하는 자로서 어찌 감히 나의 마음을 흔들려 하는가? 이는 신하의 절개가 없는 것이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김유경의 응지(應旨)를 핑계한 한 편의 상소는 그 버릇을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다. 말의 두서없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는가? 그 중에 더욱 해괴한 것을 내가 차마 들추어 말하지 아니한 것은 그의 뜻에 영합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소는 되돌려 주기만 해서는 안된다. 만약 철저히 다스리면 이것도 또한 그의 뜻에 맞춰 주어 한층 격동을 더할 것이다. 즉시 전정(殿庭)에서 불살라 나의 참소를 미워하는 뜻을 보여라."
하였다.
- [註 48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490] 본부(本府) : 의금부(義禁府).
- [註 491] 교문(敎文) : 경종 2년(1722)에 김일경이 지은 교문임.
- [註 492] 조돈(趙盾) :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진나라의 영공(靈公)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달아났는데, 국경을 넘어서지 않아 조천(趙穿)이 영공을 죽였음. 이에 조돈은 돌아와 성공(成公)을 세웠는데, 당시의 역사가는 "조돈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썼음.
- [註 493] 허지(許止) : 허(許)나라의 세자 지(止). 허나라 도공(悼公)이 학질(瘧疾)을 앓다가 그의 세자(世子) 지(止)가 주는 약을 먹고 졸(卒)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세자가 그 약을 미리 맛보지 않았으니, 그 책임은 세자에게 있다 하여, 《춘추(春秋)》 소공(昭公)편에서 "허(許)의 세자(世子) 지(止)가 그의 임금 매(買)를 시해(弑害)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을 말함.
- [註 494] 팔좌(八座) : 한대(漢代)에 육조(六曹)의 상서(尙書)와 일령(一令)·일복(一僕)을 일컫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육조(六曹)에 해당되는 정2품 반열의 벼슬을 말함.
- [註 495]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496] 칭병(稱兵) : 이인좌의 난을 가리킴.
- [註 497] 수사(收司) : 남의 죄에 걸려듦.
- [註 498] 당차(堂箚) : 옥당(玉堂)의 차자(箚子).
- [註 499] 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사람[三望]을 정하여 임금께 올리는 일.
- [註 500] 당벌(黨伐) : 당동벌이(黨同伐異).
원문
○丁卯/前參判金有慶上疏, 略曰:
噫! 我朝黨論, 實爲亡國之痼弊, 而至於辛丑之禍, 豈可以黨論論之哉? 嗚呼! 先王不幸有疾, 群奸乘機逞凶, 交結宦妾, 圖竊權柄, 而其用意設心, 惟在於不利殿下, 經營排布, 次第造出, 危怕之言, 已發於在潛邸之時, 駁正之論, 又出於定位號之後。 鏡疏唱之於外, 儉變應之於內, 末乃粧出逆虎於冊封使臣先來出來之翌日, 誣逼之語, 果發於凶口, 其爲臣子者, 孰不欲沫血飮泣, 痛覈明卞? 而乃反以獄辭之凡干於春宮者, 勿書文案爲請, 而卽撤庭鞫, 移設本府, 有若何樣事情, 隱在其中, 闇然置之於虛實疑似之間, 以爲眩惑聽聞之地, 其陰凶之計, 巧密之謀, 如非熟講素定, 能如是乎? 其後機事轉益危急, 益寬之疏始發, 而旨意叵測, 玉堂之箚繼起, 而顯加指斥, 終而敎文作, 而凶肚逆腸, 畢露無餘矣。 其首尾情節, 灼若觀火, 而到今千罪萬惡, 盡歸於一一鏡之後, 始乃謂凶書、逆檄, 皆源於敎文。 然則敎文之至凶至惡, 初不難知, 而奈之何大庭宣讀之日, 滿朝臣僚, 皆莫不側耳而聽, 交手而賀而已, 無一人爲之驚心痛骨, 聲罪請討者,抑何意也? 嘻噫! 痛矣。 若以春秋之法斷之, 則當日諸臣, 能免於趙盾、許止之誅者, 幾人哉? 第以太寬過恕之論, 論之, 或不無輕重、淺深之可別, 言之雖長, 請畢其說。 蓋指揮一鏡, 爲其謀主者有之, 趨附一鏡, 爲其使令者有之, 內實贊助, 而外示崖異者, 亦或有之, 知其計謀而坐, 觀成敗者, 滔滔皆是。 心知其爲逆, 而牽制黨私, 較量利害, 怵畏趑趄, 口不敢言者, 不過若而人而止耳。 當是之時, 一時望論, 同歸於一鏡, 贊之以社稷之功, 擢之以八座之列, 推許奬拔, 靡不用極。 而至於被謫之初, 猶進救解之言, 伏誅之後, 不請孥籍之典, 則其不以敎文爲罪者, 豈非明且驗也? 而及夫戊申稱兵之後, 乃以大逆之魁, 書之於播告之首, 罪則一也, 昔不加小, 今不加大, 而戊申前後, 輕重判異, 其故何也? 蓋以爲若使一鏡, 獨當前日之罪, 則或可免收司之律, 而反不覺心腸手脚之愈益彰露, 誠可笑也, 亦可哀也。 臣得見《戡亂錄》, 則以知情伏法, 亦多有之。 夫以一鏡爲麟佐之魁, 而知麟佐之情者, 死於法, 知一鏡之情者, 晏然翺翔, 非止知情, 與之爛熳同惡者, 亦蒙顯用。 如不以一鏡爲逆則已, 如以爲逆, 則天下, 安有如許法理? 不特此也。 罪如鳳輝, 而官秩如舊, 惡如益寬, 而臥席而死。 堂箚諸賊, 竝居華顯, 奬拔一鏡者, 眷遇偏至, 伸救一鏡者, 歷揚內外。 其他干犯至重, 情迹盡露者, 亦何限, 而殿下一倂容貸, 尙不正罪。 處分反常, 政刑乖當, 王綱已解, 人心日壞, 視君父輕如草芥, 爲亂逆恬若尋常, 元凶巨惡, 布滿中外, 亂臣賊子, 相繼前後, 以至蠱變搆禍, 逆竪入闕, 而無復餘地矣。 倫常斁絶, 義理晦塞, 君不爲君, 臣不爲臣, 遂使三百年禮義之邦, 便作長夜乾坤, 駸駸然將至於夷狄禽獸之域, 有識之深憂浩歎, 曷有其極? 而不幸蕩平之論, 尤爲世道之大害, 逆半爲忠, 忠半爲逆, 是者不爲全是, 非者不爲全非, 注擬之間, 惟務參半, 黜陟之際, 必求其對, 崎嶇艱辛, 硬做勒成, 正是朱子所謂自然之平, 大相反戾。 蕕薰氷炭, 混雜於一器之中, 而謂之以革舊圖新, 凡係前日事者, 一切付之於先天。 噫! 前日所爭, 只是甲乙之是非, 彼此之長短而已, 元不關於國家之興喪, 朝政之利害者, 誠能以至公導之, 至誠勉之, 使之兩忘恩讎, 一心寅協, 則東西可保合也, 老少可消瀜也。 而至如君臣之大義、大倫, 人皆得之於天, 而賦之於性, 撑天地亘古今, 作爲不易之常理, 則雖閱千百世界, 決不可與世而推移, 隨時而變通者也。 爲今日之臣子, 豈忍與殿下之逆臣, 比肩接武, 馳逐班行, 上下周旋於言議訏謨之間哉? 噫! 殿下之輕視臣隣, 自是本來病痛, 而自有黨論以來, 乍進乍退, 飜覆無常, 患得患失, 廉隅掃地, 風習大壞, 氣節全消, 居而行己, 出而事君, 鮮有自重之士, 則其見侮於君上, 亦有由矣。 近者聖意, 專在於蕩平, 起廢興滯, 廣加收召, 而惟以爵祿啗之, 分義怵之。 臣雖無似, 亦嘗聞古人事君之道矣。 出處進退, 惟義是視, 如其義也, 雖赴湯火, 如視樂地, 如非其義, 雖千駟之富、萬鍾之厚, 亦或有不顧者矣。 奈何, 殿下之使臣以利, 不以義, 其退之也如逐犬豕, 其進之也如縶馬牛, 震之以威怒, 脅之以譴罰, 少有拂意, 則詬叱之斥逐之, 雖有所懷, 使不敢言。 情志阻隔, 氣象愁沮。 如是而欲望厭服群心變化一世, 以做無偏無黨之治, 其可得乎? 噫! 黨論之生久矣。 其分裂之初, 雖有邪正之判, 而至如末流之互相黨伐, 專事傾軋者, 臣心常惡之。 故論事惟循是非, 交人不拘色目, 偏信己見, 與時寡諧, 自在韋布, 誚謗已多。 及登仕路, 齟齬益甚, 通籍餘二十年, 而在京從宦, 不過數三歲矣。 臣之不急於進取, 不偏於言議, 實是通朝之所共知者, 而乃於白首垂死之年, 萬念俱灰之餘, 抑何心腸, 故爲乖激之言, 以忤聖明之聽哉? 第區區意見, 如上所陳, 性本執滯, 不能變改。 若君讎終未討, 聖誣終未辨, 則臣雖飯蔬沒齒, 決不敢爲冒進之計矣。
上覽之, 怒甚, 敎曰: "噫! 予志大定, 北面於今日者, 其敢欲搖颺予心? 是無臣節也。 行副司直金有慶托以應旨, 一篇疏語, 其習不忍正視。 言之無倫, 胡至此哉? 其中尤可駭者, 予不忍提說中其意也。 此等之疏, 非還給而止者也。 若加痛治, 是亦中其意, 乃層激也。 卽火于殿庭, 以示予堲讒之意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