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24권, 영조 5년 9월 4일 乙亥 2/4 기사 / 1729년 청 옹정(雍正) 7년
이광좌를 척출하도록 간한 수찬 유겸명의 상소문
국역
수찬 유겸명(柳謙明)의 상소를 합문(閤門) 밖에서 불태워버리도록 명하였다. 유겸명의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예로부터 신하된 사람으로서 과연 염치(廉恥)를 상실하고 기탄(忌憚)함이 없는데 능히 신하의 절조(節操)를 보존하게 된 사람을 보셨습니까? 저 이광좌(李光佐)가 진 죄명(罪名)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전일에 이양신(李亮臣)이 열거(列擧)한 12조항은 신하된 사람의 지극한 죄상 아닌 것이 없었거니와, 그 뒤에 삼사(三司)의 제신(諸臣)들이 죄를 들어 성토(聲討)한 것이 또한 몇 사람이었습니까? 한번이라도 혹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이미 천지(天地)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지나치게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벌을 가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가 진실로 일분(一分)이라도 인간의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버젓이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아 조금도 징계하고 두려워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그는 몰래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흉악한 논을 주장하여 지난해의 변란을 빚어냈고 역적들의 공초(供招) 내용에 나온 제적(諸賊)들을 극력 비호(庇護)하여 뒷날의 화근(禍根)을 심었으며, 그 밖에 천만 가지 흉악을 하나 하나 들 수도 없습니다. 또 이번의 처분 때에 연석(筵席)에서 분부하신 것으로 보더라도 그의 죄안(罪案)은 낭자(狼藉)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진실로 국가의 전법(典法)이 행해진다면 그가 어찌 지금까지 버젓이 방 안에서 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이제는 연명하여 올린 차자(箚子)에 의리가 다시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지경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고 보면, 평소에 사신(四臣)의 차자가 반역을 한 것이라는 논을 주창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했던 사람들은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비록 위충현(魏忠賢)648) 같은 위권(威權)과 김안로(金安老) 같은 방자함으로도 죄명(罪名)이 드러나게 되고 공론이 이미 발동한 다음에 당해서는 오히려 또한 두려워하여 떨면서 죄를 받으며 죽음을 면하려고 하기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광좌에 있어서는 죄상을 성토하는 글이 관서(官署)에 잇달게 되고 미안스럽게 여기시는 분부를 연석(筵席)에서 내리시게 되었는데도 태연히 마음 쓰지 않으며 오히려 으르렁거리는 짓을 마구 했습니다. 당초에 비록 도성(都城)에서 나섰다고 했었지만 강 위쪽에서 배회(徘徊)하여 마치 기다리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하였으니, 지극히 불측스러운 일입니다. 이번에 처분이 내리는 날에 당하여는 죄상(罪狀)이 더욱 드러나게 되자 대명(待命)한다고 핑계하고서 어느새 돌연(突然)히 들어왔으니, 신(臣)은 무슨 꼴이 이런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도성 안 사람들의 심정이 그가 장차 들어온다는 것을 듣고서는 놀라워하고 의아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분주하게 서로들 하는 말이 ‘이광좌가 온다.’고 했으며, 더러는 ‘안온다.’고 하기도 하고, 또한 ‘이광좌 가 과연 들어왔다.’고 했으며, 더러는 ‘필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전일에는 종백(宗伯)649) 을 보내어 수서(手書)를 내리어도 오지 않던 사람이 이번에는 어찌하여 까닭도 없이 올라왔으며, 전일에는 고을의 감옥에서 석고 대죄(席藁待罪)하던 사람이 오늘에는 어찌하여 금부(禁府)에서 대명(待命)하는 것입니까? 진실로 풍병(風病)이 들어 천성(天性)을 잃어버렸거나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단코 이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까 보건대, 한 대신이 고자세(高姿勢)로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거드름 피우면서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과연 이광좌이었습니다. 거리의 아이들이 손가락질하고 저자의 사람들이 타기(唾棄)하기를 마치 하나의 큰 변괴를 보듯이 하였고, 허허하며 탄식하는 사람의 말이 ‘대신으로서 이처럼 염치(廉恥)가 없게 되었으니, 지난 봄의 변란(變亂)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아! 이광좌에게 염치를 책망함은 또한 너무나 용서해 주는 것인데 환득 환실(患得患失)하여 하지 못할 짓이 없었으니, 작게는 종기(腫氣)를 빨고 치질(痔疾)을 핥으며 크게는 변란을 일으켜 반역하게 되는 짓이 모두가 염치가 없는 가운데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광좌가 입대(入對)할 적에는 여혜경(呂惠卿)650) 의 체읍(涕泣)을 가장하여 군부(君父)께서 애련(哀憐)해 주기를 얻어내고, 조정에 있을 때에는 이임보(李林甫)651) 처럼 흉악한 간계를 농간하여 온 세상을 견제(牽制)해 가는 술수(術數)를 부리고 있었으니, 그의 평생에 재주 부리는 심술(心術)이 본래부터 이와 같았습니다. 이번에 방자하게 마구 들어왔음도 또한 반드시 위로는 군부를 우롱(愚弄)하고 아래로는 조정의 공론을 억눌러, 그의 화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마음을 이루어 가려는 것입니다. 그의 거조(擧措)를 보면 염치를 가지고 논할 수가 없고 그의 두세(頭勢)를 보면 또한 탄핵(彈劾)으로는 제어할 수가 없으니, 어찌 어그러진 것이 아니고, 어찌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이번 행동은 진실로 그의 꾀가 작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보면 비록 온 나라가 일어나 공격한다 하더라도 단정코 그가 조금도 동념(動念)하지 않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臣)이 권흉(權凶)은 방자해지고 주세(主勢)는 외롭고 위태함을 목격(目擊)하고서 충성과 분개가 격렬해지기에 대략 이와 같이 논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혁연(赫然)히 분발하시고 확연(廓然)히 건단(乾斷)을 내리시되, 우선 그를 척출(斥黜)하여 눈앞의 근심거리가 풀리게 하소서."
하였다. 이광좌가 금오(金吾)652) 에서 대명(待命)하고 있었으므로, 임금이 승지를 보내며 가서 효유(曉諭)하여 그와 함께 오도록 하니, 이광좌가 그대로 도성(都城)에서 나가버렸다. 유겸명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니, 유겸명이 입대(入對)하여 우러러보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우러러보는 사람들을 엄중하게 신칙하도록 했었는데도 승정원에서 신칙하지 않은 것이냐?"
하매, 승지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신칙하도록 하신 영이 조지(朝紙)에 났었는데, 어찌 승정원에서 신칙하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일찍이 시종(侍從)으로서 드나들었거니와, 네 마음에 국가가 보존하게 되는 것이 좋겠느냐 국가가 멸망하게 되는 것이 좋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성심으로 국가가 하루라도 더 부지(扶持)하게 되기를 바라 왔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국가가 중요하냐 당론(黨論)이 중요하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국가와 당은 경중(輕重)을 어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마음에도 또한 국가가 당보다 중요함을 알고 있느냐? 피차가 노론(老論)이니 소론(少論)이니 하는 논은 필경에는 마땅히 군부(君父)를 시해(弑害)하게 되고야 말 것이다. 내가 반드시 탕평(蕩平)에 힘써 세도(世道)를 조정(調停)해 가려고 하는데도 너희들이 마침내 그대로 받들지 아니하여 내가 병이 나게 된다면, 너희들의 마음에 편안하겠느냐?"
하매, 서종옥이 아뢰기를,
"만일에 교회(敎誨)하고 책망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면 마땅히 조용하게 개유(開諭)하셔야 하고, 말씀하시는 사이에 있어 마땅히 이렇게 하지 않으셔야 할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말이 비록 그렇게 되기는 했다마는, 당초에 언성(言聲)과 기색(氣色)을 높이려 한 것은 아니다. 옛사람의 말이 ‘진정표(陳情表)653) 를 읽고도 울지 않는 사람은 효자(孝子)가 아니요, 출사표(出師表)654) 를 보고도 울지 않는 사람은 충신(忠臣)이 아니라.’고 하였다. 내가 전일에 영상(領相)에게 말하기를, ‘내가 심력(心力)을 허비하게 하지 말아 달라.’고 했었거니와, 유겸명만이 아니라 피차(彼此)를 막론하고 군부(君父)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그 편당하는 풍습을 고치지 않은 것은 군부를 친애(親愛)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벼슬을 얻지 못해서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잃게 될까 근심하느니라.’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주해하기를, ‘작게는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게 되며 크게는 부모와 임금을 시해(弑害)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으니, 성현(聖賢)들의 교훈이 과격한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대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전번에 이양신(李亮臣)의 상소에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였으니, 역시 하나의 급서(急書)이었었다. 그때에 내가 국문(鞫問)하려고 하다가 옥당(玉堂)의 제신(諸臣)들이 모두 나서 극력 간쟁(諫爭)했기 때문에 실현하지 못했었다. 이번에 네가 진달한 말을 마땅히 조목조목 하문(下問)하겠는데, 네가 능히 분명하게 답변을 한다면 남을 무함한 율(律)을 면하게 될 것이거니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게 되면 마땅히 남을 무함한 율을 받게 될 것이다. 너의 상소에 ‘국가의 안전과 위태로운 기틀에 관계된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영중추부사가 들어온 것이 무슨 국가가 위태로워질 것이 있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분부가 더없이 준엄하시어 거의 국문(鞫問)과 같으니, 소신(小臣)이 황송하여 진달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신은 생각에 군자와 소인의 진퇴(進退)와 소장(消長)은 국가의 안전과 위태로움에 관계가 있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누가 군자이고 누가 소인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광좌는 소인이고 신들은 군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군자도 또한 등분(等分)이 있는데, 너처럼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무슨 군자이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옛적에 좌웅(左雄)655) 이 서숙(徐淑)에게 강박하여 묻기를, ‘안연(顔淵)은 한 가지를 듣고는 열가지를 알았었다. 효렴(孝廉)656) 은 한 가지를 들으면 몇 가지를 알게 되는가?’라고 하매, 서숙이 답변하지 못했었습니다. 성상께서 이처럼 강박하여 하문하시니, 소신이 다시는 진달할 것이 없게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大臣)은 한 사람의 아래이고 만 사람의 위이기에 그의 이름만을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영중추부사의 관작(官爵)이 그대로 있고 죄를 가한 일이 없었는데, 어찌 성(姓)을 써 넣을 수 없는 악역(惡逆)이 있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중니(仲尼)의 문하에서는 삼척 동자(三尺童子)들도 오패(五霸)를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겼었습니다. 노론(老論)의 가문에서는 비록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광좌’라고 부르는 일이 없고 혹은 ‘광좌’라고 하거나 혹은 ‘광’이라고 합니다. 신도 역시 집을 있을 적에는 항시 광좌라고 해왔으므로 이번에 군부(君父)께 말씀드릴 적에도 또한 평소에 말해 오던 대로 말씀드리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군부(君父)의 앞에서 어찌 노론들의 사사로이 편당하는 풍습을 그대로 앙달(仰達)할 수 있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옛사람도 또한 ‘필단(筆端)은 부월(鈇鉞)과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전후에 광좌를 논척(論斥)한 사람이 유독 신(臣)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은 그전과는 다르다. 이양신(李亮臣)이 말한 12조목을 너도 모두 옳다고 여기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은 감히 이양신의 12조목을 조목마다 명백하게 되었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른바 ‘몰래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흉악한 논을 주장했다.’고 한 말은 급서(急書)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김일경과 박필몽의 논은 곧 광좌의 논이고, 광좌의 논은 곧 김일경과 박필몽의 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역적들의 공초(供招) 내용에 나온 제적(諸賊)들을 극력 비호했다.’는 말은 누구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이명언(李明彦)·이진유(李眞儒)·홍계일(洪啓一)·남태적(南泰績)과 같은 무리들이 이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남태적도 또한 영중추부사가 안치(按治)할 때의 일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가 당국(當國)한 대신이고 위관(委官)이 된 몸으로서 엄하게 다스리지도 끝까지 핵실(覈實)하지도 못했고 보면 의금부의 당상(堂上)이 역적들을 비호하여 느슨하게 다스리는 것을 또한 어찌 하나하나 나무라고 책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신축년657) 과 임인년658) 의 옥사(獄事)는 단련(鍛鍊)해서 구성한 것으로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오직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기에, 지금에 와서는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지난해의 일에 있어서는 내가 이렇게 될까 염려되기에 피로한 것도 잊어버리고서 한여름에 친국(親鞫)을 했었다. 임금이 친국을 하는 것은 천고(千古)에 드문 일이고, 옥사의 실정을 처음에서 끝까지 하나하나 친히 안찰(按察)하여 한 것인데, 네가 감히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협잡한 것이라고 여겨, 군부(君父)가 친국한 것에 있어서도 의심을 하며 느슨해진 옥사라고 하는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 자신이 위관(委官)이 되었으니, 군부(君父)께서 비록 혹시 느슨하게 다스리시더라도 만일 그가 구핵(究覈)하여 통렬하게 다스렸었다면 무슨 안될 것이 있겠습니까? 권익관(權益寬)을 짐작하여 처결한 것이 또한 어찌 역적을 비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권익관의 일에 있어서는 영중추부사가 너희의 무리들에게 쫓겨난 뒤의 일이었다. ‘강 위쪽에서 배회(徘徊)하고 있어 불측스럽다.’고 했는데, 어떻게 차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만일에 광좌가 과연 칭병(稱兵)하여 대궐을 범하게 되었었다면 신이 마땅히 곧장 대궐 안으로 들어가 상변(上變)했었을 것입니다. 무엇하러 ‘염치(廉恥)를 상실했다’ 느니 ‘기탄(忌憚)이 없었다’ 느니 하는 등의 말들로 항소(抗疏)를 올려 탄핵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기다렸다.’는 것은 무슨 일이고, ‘불측스럽다.’고 한 것은 무슨 일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가 낮이나 밤이나 기다리고 있던 바는 곧 도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번에 돌연(突然)히 들어오게 된 것도 기다리고 있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마음은 진실로 불측스러운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조태구(趙泰耉)가 북문(北門)으로 가만히 들어왔을 적에 박상검(朴尙儉)과 서로 호응한 일이 있었다. 이번에 영중추부사도 군상(君上)과 서로 호응하게 된 것이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의 죄명(罪名)이 저러하므로 결단코 들어올 수 없는데, 까닭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돌연히 들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까닭이 없은 것이 아니다. 이번에 처분이 있은 다음에 자신이 과오를 알아차리고서 들어온 것이다. 대개 각오(覺悟)가 있은 것인데, 어찌하여 돌연히 들어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합문(閤門)을 닫으셨던 날에 당하여 ‘대죄(待罪)하기 위하여 왔다.’고 했다면 오히려 혹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마는, 이번에 졸연(卒然)히 들어온 것은 무슨 의거한 데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찌하여 돌연히 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없겠습니까? 궐한(厥漢)659) 은 오직 환득(患得)하고 환실(患失)하며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꾸짖기를,
"네가 어찌 감히 대신을 ‘궐한’이라고 하는 것이냐?"
하매, 서종옥이 아뢰기를,
"대신은 죄가 있어도 그 죄만 논하고 말아야 하는 법인데, ‘궐한’이라고 하기까지 하였음은 지극히 무엄(無嚴)한 짓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른바 ‘도성 안의 인심이 경동(驚動)하고 의구(疑懼)하여 분주하게 움직인다.’고 한 것은 도적들이 어디에서 오게 된다는 것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광좌가 몸에 허다한 죄명(罪名)을 짊어지고 있어 정상(情狀)이 편안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합문(閤門)을 닫으셨을 때에도 마침내 들어오지 않았다가 이번에 돌연히 들어오자 인심이 괴이하고 놀랍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어, 모두들 하는 말이 ‘그 정승이 또한 들어왔다는 말인가?’라고 했습니다. 전후에 사람들의 말이 어떠하였는데 오히려 들어왔으니, 전혀 염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미워하지 않는 대신은 비록 이러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네가 반드시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비록 신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일에 이러한 일이 있게 된다면, 어찌 신이 말하지 않겠습니까? 노론(老論)에는 원래 이런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앞에서 어찌 노론이나 소론의 명칭을 거론하는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말은 성상께서 내리신 분부에도 또한 있었기에 신도 역시 말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죄를 주지 않게 된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불울(拂鬱)해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언성을 높여 이르기를,
"불울하게 되기 때문에 역적이 생기게 된 것인데, 네가 어찌 감히 군부의 앞에서 ‘불울’ 두 글자를 내놓는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들이야 어찌 반역하는 짓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천기(李天紀)와 김용택(金龍澤)의 무리를 벗어나게 하려고 한 것은 반역하는 짓이 아니겠느냐? 임금의 위세(威勢)를 어찌하여 ‘외롭고 위태하다.’라고 한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인주(人主)가 묘연(眇然)한 몸 하나를 만백성의 위에 의탁하고 있으면서 무슨 기력(氣力)과 위세로 천하의 만백성을 총제(摠制)해 갈 수 있겠습니까마는, 대개 도리(道理)란 것이 있고 기강(紀綱)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대부(士大夫)들이 염우(廉隅)를 지키고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여 의리가 아닌 일은 비록 죽게 되더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기강이 세워지게 되어, 임금이 능히 만백성을 총제해 가며 외롭거나 위태로운 염려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광좌처럼 염치도 없고 비웃음과 욕설도 돌아보지 않으며 권력(權力)을 탐하고 세도(勢道)를 좋아하여 방자하고 기탄도 없이 돌연히 들어오기를 일삼게 된다면, 장차 하지 못할 짓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다른 신하들도 모두 이렇게 된다면 임금이 믿고 힘입을 데가 없을 것이니, 어찌 외롭고도 위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너와 말을 하기는 목석(木石)이나 허수아비와 말을 하기나 다를 것이 없다마는, 내가 마땅히 처음부터 끝까지 말을 하겠으니, 네가 잘 들어보아라. 이번에 연석(筵席)에서 말한 것을 보았었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저께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을 보러 갔다가 연석에서 한 말 1통을 구득해 놓았기에 신이 비로소 보기는 했습니다마는, 조용히 심역(尋繹)해 보지 못하여 대략만 알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소위 피차(彼此)의 당목(黨目)이 이미 생긴 뒤에는 서로 의심이 생기게 되었다. 지난날의 유봉휘(柳鳳輝)의 일을 오늘날은 처분을 한 뒤이기에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소론들은 노론이 경종(景宗)에게 해를 끼칠 것으로 의심했기 때문에 유봉휘도 또한 그렇게 의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론이나 소론이나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겠느냐? 노론과 소론이 시기와 의심을 쌓아가며 갈수록 서로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무함하기 때문에, 내가 또한 그대로 용서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봉휘의 일에 있어서는 주벌(誅罰)하기를 청한 것이 또한 의리가 있는 것이었고, 건저(建儲)의 초두(初頭)에 당해서는 조정의 사체에 있어서 진실로 마땅히 이렇게 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경여(李敬輿)에 비하면 어찌 서로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에는 오히려 원손(元孫)이 있었기 때문에 인조(仁祖)께서 처분하여 벌을 내리셨어도 치우친 논이 되지 않았지만, 이는 당론(黨論)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효종(孝宗)께서 이경여를 대우한 일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경종 때에는 유봉휘를 베도록 논쟁하는 것이 옳았겠지만 나에게 이르러서는 옳지 못한 것이니, 너희들도 이 일에 있어서는 오히려 의거할 데가 있을 것이다. 지난날에 대신들을 남김없이 도륙(屠戮)했었다. 그들은 비록 이러했었지만 너희들은 어찌 차마 다시 그럴 수 있겠는가?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을 처음에는 내가 조금 좋게 여겼었는데, 끝에 와서 보건대, 혼모(昏耄)가 심했었다. 그러나 또한 어찌 반역을 하겠는가? 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은 갑술년660) 의 일에 불만이 있었고, 최석정(崔錫鼎)과 윤지완(尹趾完)은 신사년661) 의 일을 부족하게 여겨, 출향(黜享)하기를 발론(發論)하기까지 하였음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목호룡(睦虎蘢)이 처음에는 노론에 들어갔다가 다시 소론에 붙었엇다. 그러나 유래한 근본이 있은 것이니, 어찌 공중(空中)에서 나오게 된 것이겠느냐? 너희들은 또한 을사년662) 과 병오년663) 이후에 이런 무리들을 잘라내어 버리고 다만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하기를 청한 것으로써 말했다면, 어찌 당당한 정론(正論)이 아니었겠느냐? 조태구와 최석항이 죄가 없지 않기 때문에 추탈(追奪)하였으며, 영중추부사 이광좌(李光佐)와 판중추부사 조태억(趙泰億)도 마침내 김일경(金一鏡)을 잘라내어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특별히 삭출(削黜)하게 되었음은 이래서이었다. 지난해의 변란 때에 심유현(沈維賢)의 음흉한 말이 진실로 흉악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김성절(金盛節)과 서덕수(徐德修)도 또한 어찌 흉악한 말이 없었느냐? 이의천(李倚天)이 이천기(李天紀)의 무리에게 추증(追贈)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노론들의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정호(鄭澔)도 역시 혼모(昏耄)하여 을사년 초두에 먼저 서덕수를 신설(伸雪)해 주기를 청하였고,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은 또한 편당하는 논이 심하여 서덕수를 신설해 주었을 때에 ‘전하께서 내리신 처분은 진실로 합당하나 서종일(徐宗一)이 진달한 상소는 외월(猥越)한 것이다.’라고 했었으니, 내가 영중추부사 민진원의 심사(心事)를 알게 된 것은 여기에 있다고 여겼었다. 소하(疏下)의 오적(五賊)664) 중에 박필몽(朴弼夢)은 이미 복주(伏誅)되었고 이명의(李明誼)는 형장(刑杖)에 죽었다. 나도 또한 이진유(李進儒)를 미워했으니 너희들이 베려고 했던 것이 진실로 옳기는 했지마는, 내가 또한 그렇게 하려는 심술(心術)은 바르게 여기지 않았었다. 이진유를 잡아 왔다가 도로 놓아 주었던 것은 또한 영중추부사가 그를 애석하게 여겨서가 아니고 실제는 내가 놓아 주게 했던 것이다. 나 역시 이진유가 치우친 논을 하는 것은 미웠지만, 반역한 자가 아닌데 어찌 반역으로 논죄(論罪)할 수가 있겠는가? 서종하(徐宗廈)와 윤성시(尹聖時)는 진실로 족히 책망할 것이 없었거니와, 이명언(李明彦)도 역시 글렀었으니 소견이 넓지 못했었다. 그러나 또한 반역을 한 사람은 아닌데도 너희들이 기필코 반역한 사람 속에 넣어 죽이려고 했으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다. 요망한 박상검(朴尙儉)의 일이 드러난 다음에 너희들이 의심을 가지는 것을 내가 또한 그르게 여기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소론들이 이미 노론을 의심하고 있으니 노론들이 소론을 의심하는 것은 또한 이상할 것이 없어서 이다. 지난해의 변란 이후에는 영중추부사가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는 여부(與否)를 알게 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보지 못했지만 보게 된 사람이 또한 많을 것이다. 이번에 돌연히 들어온 것도 또한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연석(筵席)에서의 말이 이미 나간 다음에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알아차리고서 도성(都城) 동쪽에서 대명(待命)하고 있다가 그대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가 처음에는 연명하여 올린 차자(箚子)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한 말이 쓰임받지 못했기 때문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본시 고집스러운 사람인데 한 말이 쓰임받지 못했으니 어찌 한 걸음의 땅이라도 들어오려고 했겠는가마는, 오늘날 들어온 것은 또한 스스로 깜짝 놀라 깨우치게 된 것이니, 그렇게 짐작해야 한다. 대저 사람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반복(反覆)해서 성찰(省察)하며 깨달아 간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는 법이니, 사람들이 모두 그렇기만 한 것이라면 옛사람들이 무엇하러 오자(悟字)를 만들었겠는가? 너희들의 방법은 가져다가 비유할 만한 것이 있으니, 강도와 절도가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같이하는 것과 같은 유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충성과 믿음이 있고 편당하지 않으나 소인은 편당을 하고 충성과 믿음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편당만 하고 충성과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네가 ‘노론에는 역적이 없지만 소론에는 역적이 있다.’고 하는데, 네가 그 근본을 생각해 보라. 노론에도 또한 어찌 역적이 없었느냐? 목호룡(睦虎龍)과 이천기(李天紀)의 무리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어찌 노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 만석군(萬石君)665) 이 밥상을 대하여 먹지 않으매 모든 아들들이 복죄(服罪)했었고, 한연수(韓延壽)666) 가 합문(閤門)을 닫고서 잘못을 생각하고 있으매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복종(服從)하였다. 내가 비록 믿고서 감동되게 하는 정성이 없기는 했다마는, 너희들이 어찌 차마 다시 편당하는 논을 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또한 전생(前生)의 일로 알고 다시는 편당하는 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있어서 또한 곡진하게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미 관작(官爵)을 복구해 주었고 두 사람에 대해서는 비록 관작을 복구하지 않았지만, 저번에 내가 영상(領相)에게 말하기를, ‘들어온 다음에 하더라도 늦지 않다.’고 했었으니, 너도 또한 반드시 듣게 되었을 것인데, 너희들이 지금도 오히려 밖에 그대로 있어, 의를 펴게 된 다음에도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음은 무슨 까닭이냐? 너희들 자신이 성무(聖誣)667) 를 가려야 된다고 하면서도 반대로 도리어 성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노론이나 소론이나 다 같이 난역(亂逆)을 했다고 여기십니다마는 심유현(沈維賢)과 이유익(李有翼)의 무리가 김성절(金盛節)과 서덕수(徐德修)의 공초(供招)로써 구실(口實)을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지난봄의 변란도 또한 김성절과 서덕수에게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부 김성절과 서덕수에게서 나왔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김일경(金一鏡)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하였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당론(黨論)만 하고 몸은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소신(小臣)이 또한 노모(老母)가 있고 독신으로 형제간도 없습니다마는, 의리의 관두(關頭)나 국가의 안전과 위태로움에 관계가 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비록 죽게 된다 하더라도 돌아 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당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축년과 임인년의 옥사(獄事)에 대해서 신이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에 단련하여 무옥(誣獄)이 이루어졌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모두 단련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에 한 가지 옥사가 3년 동안이나 연장되었었으니 진실로 단련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게 되었지마는, 다만 바로 단련한 것이라고만 해도 안된다. 을사년과 병오년에는 노론들의 일이 혼란했었고, 신축년과 임인년에는 소론들의 일이 혼란스러웠다. 이는 바로 속담에 ‘내 코가 석 자나 빠졌다.’고 하는 말과 같게 된 것인데, 너희들이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의 일을 논할 수 있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소신이 아뢴 말들은 소신 혼자만의 소견이 아니고 모두 신(臣)의 제배(儕輩)들 사이에서 공언(公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언성을 높여 이르기를,
"내가 이미 반복해서 회유(誨諭)했는데도 네가 또 노론이니 소론이니 제배들이니 하는 말을 감히 내 앞에서 하는 것이냐?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말을 감히 군부(君父)의 앞에서 하는 자는 반드시 군부를 시해(弑害)하게 될 사람이다."
하고, 드디어 손으로 탁자를 치면서 이르기를,
"네가 감히 마음먹고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이석효(李錫孝)의 말이 동조(東朝)께 미친 뒤인데, 네가 또한 감히 제배들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이냐? 네가 언제 일찍이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편당하는 풍습 때문에 군부(君父)와 태후(太后)에게 욕이 미치게 되는 일을 보았었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분부를 하시는 것입니까? 이석효는 이인엽(李寅燁)의 팔촌(八寸) 친족이기에 자연히 소론들 중에서 모의(謀議)한 흉악한 말을 가지고 공초(供招)하게 된 것인데, 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너희들의 거조(擧措)가 그러하므로 이석효가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상방 참마검(尙方斬馬劍)668) 을 너와 같은 자에게 써야 한다. 내가 너를 베어도 되고 너를 귀양 보내도 되는데, 너희들은 당을 위해 죽으려고 하여 절도(絶島)나 아주 먼 변방을 마치 낙지(樂地)에 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네가 처음에 이런 상소를 올릴 적에 기필코 벌을 받으려고 하여 왔을 것이다. 만일에 지금 죄를 준다면 네가 반드시 달갑게 여기며 소원대로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죄주지 않는다. 내가 벌주려고 하여 너를 부른 것이 아니다. 선조조(宣祖朝)에 일찍이 ‘공신(功臣)이라도 또한 베겠다.’는 분부가 있었는데, 내가 오늘날 한편으로는 동조(東朝)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종사(宗社)를 위하여 어찌 사람 하나를 베이지 못하겠는가? 이렇게 분부를 내린 뒤에도 다시 당론(黨論)을 하는 자는 시급히 국가의 전형(典刑)대로 하여 물리쳐버려야 할 것이니, 물러가 너의 제배들에게 말을 하여 전일처럼 하지 말도록 하라. 한갓 이익만 없게 될 것이니, 다시는 지난날처럼 하지 말아야 한다."
하고, 임금이 손수 유겸명의 상소를 말아 서종옥(徐宗玉)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이 상소를 내가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거나 혹은 도로 주어버릴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마는, 만일에 이 상소를 그대로 둔다면 올린 사람을 죄주지 않을 수 없으니 차라리 이를 불태워 없애버려야 한다. 승선(承宣)은 이 상소를 사관(史官)에게 주어 합문(閤門) 밖에서 불태워버리도록 해야 한다. 나 역시 지나친 거조(擧措)임을 알고 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24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5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 [註 648] 위충현(魏忠賢) : 명 희종(明憙宗) 때의 환관(宦官). 젊어서 무뢰(無賴)하였는데 뽑혀 입궁(入宮)한 뒤 희종의 유모(乳母)였던 객씨(客氏)와 내통하여 조정(朝政)을 마음대로 하며 기탄(忌憚)함이 없자, 어사(御史) 양연(楊漣)이 24건의 대죄(大罪)를 들어 탄핵하다가 도리어 그의 무함으로 죽음을 당했음. 의종(毅宗)이 즉위하여 폄찬(貶竄)시키자 자살하므로 그의 시체를 찢으라고 명을 내림.
- [註 649] 종백(宗伯) : 예판(禮判).
- [註 650] 여혜경(呂惠卿) : 송 신종(宋神宗) 때 사람으로 왕안석(王安石)의 추천을 받아 입조(入朝)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는데, 왕안석을 극력 배척하다가 도로 밀려나 외직(外職)에 전전하며 일생을 마쳤음.
- [註 651] 이임보(李林甫) : 당(唐)나라 종실(宗室). 성질이 아첨하고 간사하였으며, 현종(玄宗) 후기에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환관(宦官)·비빈(妃嬪)들과 결탁하여 임금의 동정(動靜)을 살펴 영합(迎合)하고 정사(政事)를 마음대로 하였음.
- [註 652] 금오(金吾) : 의금부(義禁府).
- [註 653] 진정표(陳情表) : 진무제(晉武帝) 때 이밀(李密)은 일찍 아비를 여의고 어미가 개가(改嫁)하여 조모 유씨(劉氏)의 손에서 성장하였는데, 무제가 태자 세마(太子洗馬)를 제수하여 누차 불렀으나 조모를 봉양해야 된다는 내용으로 간곡하게 진정한 표문(表文).
- [註 654] 출사표(出師表) : 촉한(蜀漢)의 소열 황제(昭烈皇帝)가 죽은 뒤 제갈 공명(諸葛孔明)이 출진(出陣)에 앞서 후주(後主)에게 충선(忠善)한 장상(將相)의 말을 신임하고 대소사(大小事)를 반드시 자문(諮問)하라는 전·후의 표문(表文).
- [註 655] 좌웅(左雄) :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사람.
- [註 656] 효렴(孝廉) : 한무제(漢武帝) 때부터 주(州)에서 수재(秀才)를, 군(郡)에서는 효행(孝行)이 있고 청렴한 사람[孝廉]을 천거하게 하여 관리로 임용한 일. 또는 그 사람.
- [註 65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658]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659] 궐한(厥漢) : 그놈.
- [註 660]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 [註 661] 신사년 : 1701 숙종 27년.
- [註 662]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663] 병오년 : 1726 영조 2년.
- [註 664] 소하(疏下)의 오적(五賊) : 경종(景宗) 원년(1721) 김일경(金一鏡)의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을 탄핵하는 상소에 연명(聯名)한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廈)·이명의(李明誼)를 가리킴.
- [註 665] 만석군(萬石君) : 한 경제(漢景帝) 때 사람. 석분(石奮)을 이름.
- [註 666] 한연수(韓延壽) :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
- [註 667] 성무(聖誣) : 임금에 대한 무함.
- [註 668] 상방 참마검(尙方斬馬劍) : 상방은 한(漢)나라 때 임금의 일상 용품을 보관해 두는 곳으로, 참마검(斬馬劍)이 있는데, 그 칼이 예리하여 말도 벨 수 있다고 함. 《한서(漢書)》 주운전(朱雲傳)에 "원컨대 상방의 참마검을 내려 주시면 영신(佞臣) 한 사람의 머리를 베겠습니다."라고 하였음.
원문
殿下, 試觀自古爲人臣者, 其果有喪廉恥無忌憚, 而能保其臣節者耶? 彼光佐之負罪名何如也? 前日李亮臣之所臚列十二條, 莫非人臣之極罪, 其後三司諸臣, 聲罪致討者, 亦幾人哉? 一或遭此, 已難容於覆載之間。 殿下過於寬貸, 雖不加誅, 而渠苟有一分人心, 則豈敢悍然不顧, 略無懲畏耶? 蓋渠陰主鏡、夢之凶論, 釀成昨年之變亂, 力護逆招中諸賊, 以植後日之禍根, 其他千凶萬惡, 不可毛擧。 而且以今番處分時筵敎觀之, 渠之罪案, 不啻狼藉, 國家典法苟行, 渠豈能至今偃息於牖下哉? 矧今聯箚, 義理復返乎光明正大之域, 則其平日唱爲四箚爲逆之論, 終始主張者, 其將如何也? 雖以魏忠賢之威權, 金安老之縱恣, 及其罪名彰著, 公議旣發之後, 則猶且惶怖受罪, 救死不暇。 而若光佐則討罪之章, 連續於公車, 未安之敎, 至發於筵席, 而恬不爲意, 猶肆咆喝。 當初雖曰出城, 徘徊江上, 若有所待者, 已極叵測。 而今當處分之日, 罪狀益著, 而托以待命, 倐然突入, 臣未知此何象也。 都下人情, 聞其將入, 莫不驚疑, 奔走相告曰: "光佐來矣。" 或曰: "不來矣。" 又曰: "光佐果入矣。" 或曰: "必不入矣。" 前日之遣宗伯, 宣手書而不來者, 今豈無端來乎? 前日之席藁於州獄者, 今何爲胥命於金吾乎? 苟非病風喪性, 若包藏禍心者, 決不若此也。 俄見一大臣高倚平轎, 晏晏然徐驅, 則果光佐也。 街童指點, 市人唾罵, 視若一大變怪。 至有噓唏歎息者曰: "爲大臣而無廉恥至此, 前春變亂, 無足怪者。" 噫! 廉恥責光佐者, 其亦太恕, 而患得患失, 無所不至, 小則吮舐, 大則亂逆, 皆從無廉恥中出來。 光佐之入對也, 則假作惠卿之涕泣, 以取君父之哀憐, 在朝也, 則閃弄林甫之凶譎, 以售一世之鉗制, 其平生心術伎倆, 本自如此, 則今此肆然闖入, 亦必出於上以愚弄君父, 下以脅持朝論, 以濟其樂禍之心也。 觀其擧措, 不可以廉恥論也, 其頭勢, 亦不可彈劾制也, 豈不悖哉, 豈不懼哉? 彼之此行, 固知其計之不小, 則雖擧一國而攻之, 決知其無一毫動念。 而臣目見權凶之放肆, 主勢之孤危, 忠憤所激, 略論如此。 伏願聖明, 赫然奮發, 廓揮乾斷, 姑先斥黜, 以紓目前之憂, 光佐待命于金吾, 上遣承旨往諭, 使與之偕來, 光佐仍出城。 命謙明入侍, 謙明入對, 仰瞻, 上曰: "頃者嚴飭仰視者矣, 政院不申飭乎?" 承旨徐宗玉曰: "申飭之令, 出於朝紙, 奚待政院之申飭乎?" 上曰: "爾曾出入侍從, 於汝心, 國存則好乎, 國亡則好乎?" 謙明曰: "小臣誠願國家之一日扶持, 故有此言耳。" 上曰: "國重乎, 黨重乎?" 謙明曰: "國與黨輕重, 何可言乎?" 上曰: "汝心亦知國重於黨乎? 彼此老少之論, 必當弑君父而後已。 予必欲務爲蕩平, 調劑世道, 而爾輩終不奉承, 使予成疾, 則於汝心安乎?" 宗玉曰: "若有誨責之事, 則當從容開諭, 辭令之間, 恐不當若是矣。" 上曰: "予言雖如此, 而初非以聲氣相加也。 古人云: ‘讀陳情表而不泣者, 非孝子也;覽出師表而不泣者, 非忠臣也。’ 予於向時, 語領相以毋使我費心力, 非但謙明, 無論彼此, 君父之言如此, 而不改其習者, 非愛君父之意也。 孔子曰: ‘其未得之,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朱子註之曰: ‘小則吮癕, 大則弑父與君。’ 聖賢之訓, 非過激之辭也。 予於領府事, 非愛惜之也。 向者李亮臣之疏, 誣人惡逆, 亦一急書。 其時予欲鞫問, 而玉堂諸臣, 皆力爭, 故不果矣。 今爾所陳, 當逐條下問, 爾能明對則免陷人之律, 一毫囁嚅, 則當被誣人之律。 爾疏有關於國家安危之機云者, 領府事之入來, 有何國家之可危乎?" 謙明曰: "上敎嚴截, 殆同鞫問, 小臣惶恐不知所達, 而臣則以爲, 君子小人進退消長, 有關於安危矣。" 上曰: "誰爲君子, 誰爲小人乎?" 謙明曰: "光佐則小人, 臣等則君子矣。" 上曰: "君子亦有等分, 汝所自矜者, 何等君子耶?" 謙明曰: "昔左雄, 迫問徐淑, 以顔淵聞一知十, 孝廉聞一知幾, 徐淑不能對。 聖敎之迫問至此, 小臣更無所達矣。" 上曰: "大臣者, 一人之下, 萬人之上, 不可只呼其名。 今領府事官爵尙存, 而無加罪之事, 豈有不可書姓之惡逆乎?"
謙明曰: "仲尼之門, 三尺之童, 羞稱五覇。 老論家則雖童騃輩, 無呼以李光佐者, 或曰光佐, 或曰光。 臣亦在家, 常以光佐稱之, 故今於告君之際, 亦以平日所稱者, 告之矣。" 上曰: "君父之前, 何可以老論私黨之習, 仰達乎?" 謙明曰: "古人亦有筆端鈇鉞之說。 前後論斥光佐者, 非獨臣一人矣。" 上曰: "今番則異於前矣。 李亮臣十二條, 爾以爲盡是乎?" 謙明曰: "臣則敢以李亮臣十二條, 爲條條明白矣。" 上曰: "所謂陰主鏡、夢之凶論者, 此非急書而何?" 謙明曰: "鏡、夢之論, 卽光佐之論, 光佐之論, 卽鏡、夢之論也。" 上曰: "力護逆招中諸賊云者, 指誰某而言耶?" 謙明曰: "如明彦、眞儒、啓一、泰績輩是也。" 上曰: "泰績亦領府事按治時事乎?" 謙明曰: "渠以當國大臣, 身爲委官, 不能嚴治窮覈, 則禁府堂上, 護逆緩治者, 又何可一一咎責乎?" 上曰: "辛壬年獄事, 鍛鍊搆成, 在下者惟意所欲, 則到今疑之者, 固無足怪。 而至若昨年, 則予爲慮其如此, 忘其疲勞, 盛夏親鞫。 人君親鞫, 千古罕有, 而首尾獄情, 一一親按, 爾敢以私意挾雜, 致疑於君父親鞫, 而謂之緩獄乎?" 謙明曰: "身爲委官, 君父雖或緩治, 渠若究覈而痛治, 則有何不可乎? 益寬之酌處, 亦豈非護逆乎?" 上曰: "益寬則領府事見逐於汝輩之後矣。 徘徊江上叵測云者, 何忍爲此言乎?" 謙明曰: "光佐若果稱兵犯闕, 則臣當直入闕中上變。 何必以喪廉恥、無忌憚等語, 抗疏彈劾乎?" 上曰: "所待者何事, 叵測者何事?" 謙明曰: "渠之日夜所待者, 乃是復入也。 如向來突入者, 非所待而何? 其心誠爲叵測矣。" 上曰: "向者泰耉之北門潛入, 有與尙儉相應之事。 今則領府事與君上相應乎?" 謙明曰: "渠之罪名如彼, 決不可入來, 而無端入來者, 豈非突入乎?" 上曰: "非無端也。 今番處分後, 自知其過而來。 蓋有覺悟矣, 何可謂之突入乎?" 謙明曰: "頃當閉閤之日, 爲待罪而來云爾, 則猶或成說, 今番之卒然入來, 有何所據乎? 安可不謂之突入也? 厥漢惟患得失, 放肆無忌。" 語未畢, 上叱曰: "汝何敢以大臣, 稱厥漢乎?" 宗玉曰: "大臣有罪, 則論其罪而已, 至稱以厥漢, 極爲無嚴矣。" 上曰: "所謂都下人心, 驚疑奔走云者, 以爲盜賊, 自何來乎?" 謙明曰: "光佐身負許多罪名, 情跡難安, 故閉閤之時, 終不入來, 今者突然入來, 人心莫不怪駭, 咸曰: ‘此政丞亦入來耶?’ 前後人言何如, 而猶入來, 可謂全無廉恥矣。" 上曰: "汝所不嫉之大臣, 雖有如此之事, 爾必不言矣。" 謙明曰: "雖臣所不嫉者, 若有此等事, 則臣豈不言乎? 老論元無若此者矣。" 上曰: "君父之前, 何可擧論老少之名?" 謙明曰: "老論、少論之說, 上敎亦有之, 故臣亦爲之矣。 終不罪之, 則人心拂鬱矣。" 上大聲曰: "拂鬱故逆賊出矣, 汝何敢於今日君父之前, 出拂鬱二字乎?" 謙明曰: "臣等豈爲逆乎?" 上曰: "欲脫天紀、龍澤輩者, 非逆乎? 主勢則何謂之孤危耶?" 謙明曰: "人主以眇然一身, 托于萬衆之上, 有何氣力威勢, 可以摠制天下萬衆乎? 蓋有道理, 有紀綱焉故也。 士大夫守其廉隅, 顧其身名, 非義之事, 雖死不爲, 故紀綱由是而立焉, 所以人君, 能摠制萬衆, 而無孤危之患也。 若如光佐之不有廉恥, 不顧笑罵, 貪權樂勢, 放肆無忌, 以突入爲事, 則將無所不至。 他臣皆若此, 則人君無所恃賴, 豈不孤且危歟?" 上曰: "與汝語, 無異與木石、偶人語, 而予當言其首尾, 爾試聽之。 今番筵說見之乎?" 謙明曰: "再昨日往見領議政洪致中, 則得置筵說一通矣, 臣始得見, 而未能從容尋繹, 大略則知之矣。" 上曰: "所謂彼此黨目旣生之後, 互生疑心。 向來柳鳳輝事, 今日處分之後, 不可不明言少論疑老論之害於景廟, 故鳳輝亦以此疑之。 老少於予, 有何干涉耶? 老少積成猜疑, 轉相搆捏, 故予亦以此恕之矣。 然鳳輝之事, 則請以誅罰, 亦有義焉, 當建儲之初, 朝廷事體, 固當若是矣。 若比之李敬輿, 豈不大相異乎? 其時則元孫猶在, 故仁廟處分施罰, 而非出於偏論, 此則出於黨論矣, 亦有異於孝廟待敬輿之事矣。 景廟時, 則以誅鳳輝爭之可矣, 至於予則不可也, 爾等此事則猶有可據者矣。 向日大臣, 屠戮無餘。 渠輩雖若是, 爾等豈忍復爲乎? 趙泰耉、崔錫恒, 初則予稍可之, 末後見之, 則昏耄甚矣。 然亦豈爲逆乎? 南奉朝賀, 則不滿於甲戌年事, 崔錫鼎、尹趾完, 則以辛巳事, 爲未足, 至發黜享之論, 尤爲過矣。 虎龍初入老論, 復附少論。
然根本則有之矣, 豈自空中出來耶? 爾等亦於乙丙以後, 割去此輩, 而只以建儲代理爲言, 則豈非堂堂正論乎? 泰耉、錫恒, 不爲無罪, 故追奪, 而李領府事、趙判府事, 終不能割去一鏡, 故特爲削黜者, 此也。 昨年變亂, 維賢凶言, 固爲凶惡, 而盛節、德修, 亦豈無凶言乎? 李倚天, 至請追贈天紀輩, 老論不亦愧乎? 鄭澔, 亦昏耄, 乙巳初, 先以伸德修爲請, 閔領府事黨論亦甚, 而伸德修之時, 以爲殿下處分, 則誠得宜, 而徐宗一之陳疏, 則爲猥越云, 予以爲知閔領府事心事處在此也。 疏下五賊, 夢已伏法, 明誼杖斃。 予亦嫉眞儒, 爾等之欲誅者, 誠是矣, 而予亦不韙其心術。 眞儒之拿來還放者, 亦非領府事愛惜之也, 予實放之矣。 予亦嫉眞儒之偏論, 而非逆者, 何可論以逆乎? 徐宗厦、尹聖時, 固不足責, 李明彦亦非矣, 所見不廣。 然亦非爲逆之人, 汝輩必欲納諸逆而殺之, 此爾等之過也。 妖儉事出之後, 爾輩之致疑, 予亦不以爲非。 何也, 少旣疑老, 則老之疑少, 亦不異矣。 昨年變亂之後, 則領府事之有逆心與否, 有可以知者。 爾則不見, 而見之者亦多矣。 今番突入, 亦非不召而自來也。 筵說旣出之後, 始乃自知其過, 待命於東城, 而仍爲入來矣。 初則以聯箚爲逆, 而言不見用, 故不爲入來。 其人素固執, 言不見用, 則豈肯入一步地, 而今日入來, 亦自驚悟則斟酌可也。 夫人移心易慮, 反復省悟而後, 乃可爲人, 人皆如此, 則古人何以作悟字乎? 爾等之法, 有可取比者, 强竊盜同心同力之類也。 孔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此非比而不周乎? 爾則曰: ‘老論無逆, 少論有逆。’ 而爾思其本。 老論亦豈無逆乎? 虎龍、天紀輩, 出於何處? 豈不出於老論乎? 萬石君對案不食, 而諸子服罪, 韓延壽閉閤思過, 而一郡髡鉗。 予雖無孚感之誠, 爾等豈忍復黨論乎? 爾等亦以前生事知之, 更勿爲黨論可也。 予於爾輩, 亦曲盡矣。 二人旣已復官, 二人雖不復官, 而向予語領相, 以入來後爲之未晩, 爾亦必聞之矣。 爾等, 今猶在外, 伸得義理之後, 尙不入來, 何也? 爾等自謂卞聖誣, 而反爲反聖誣矣。" 謙明曰: "殿下以爲老少同爲亂逆, 而維賢、有翼輩, 藉口於盛節、德修之招, 則昨春變亂, 亦出於盛節、德修耶?" 上曰: "非以爲專出於盛節、德修, 出於一鏡也。" 謙明曰: "臣豈爲黨論, 而不顧身乎? 小臣亦有老母, 單獨無兄弟, 而至於義理關頭, 國家安危所係處, 雖死不暇顧矣。" 上曰: "爾何謂非黨論乎?" 謙明曰: "辛壬獄事, 則臣有所懷矣。" 上曰: "非謂其時鍜鍊誣獄耶?" 謙明曰: "皆出於鍜鍊矣。" 上曰: "其時一獄, 延及三年, 固不可謂不鍜鍊, 而但直謂之鍛鍊則不可。 乙丙年則老論之事, 淆亂, 辛壬年, 則少論之事淆亂。 此正諺所謂, 吾鼻三尺垂者也。 爾等何暇論他人之事乎?" 謙明曰: "小臣所言, 非臣獨得之見, 皆臣儕輩間公言之者矣。" 上高聲曰: "予旣反復誨諭, 而汝又以老論、少論儕輩等說, 敢發於予前乎? 老論、少論之言, 敢發於君父之前者, 必弑君父之人也。" 遂以手拍案曰: "爾敢生心發此言乎? 李錫孝語及東朝之後, 爾敢爲儕輩之言乎? 汝曷嘗見自古以來, 以黨習而辱及於君父太后者乎?" 謙明曰: "殿下何爲而發此敎也? 錫孝以李寅燁八寸親, 自以其少論中謀議之凶言, 納招, 何干於臣等乎?" 上曰: "爾等之擧措如此, 故錫孝爲此言矣。 尙方斬馬劍, 可用於如爾者矣。 予誅汝可也, 竄汝可也, 而爾等爲黨而死, 視絶島極邊, 如赴樂地。 爾之初呈此疏, 期以被罰而來矣。 今若罪之, 則爾必樂之而適中其願。 予故不罪焉。 予非欲用罰而召汝也。 宣廟朝, 曾有功臣, 亦斬之敎, 予今日, 上爲東朝, 下爲宗社, 豈不能斬一人乎? 如是下敎之後, 復爲黨論者, 亟正邦刑, 退去可也, 退而語爾等儕流, 毋若前日之爲也。 徒無益也, 更無若前日之爲也。" 上手卷謙明之疏, 授宗玉曰: "此疏, 予非不知留中或還給, 而若留此疏, 則不可不罪其人, 寧燒此以去之。 承宣其以此, 付于史官, 使之燒于閤門外可也。 予亦知爲過擧矣。"
- 【태백산사고본】 19책 24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5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영조 5년 (1729) 9월 4일
영조실록24권, 영조 5년 9월 4일 乙亥 2/4 기사 / 1729년 청 옹정(雍正) 7년
이광좌를 척출하도록 간한 수찬 유겸명의 상소문
국역
수찬 유겸명(柳謙明)의 상소를 합문(閤門) 밖에서 불태워버리도록 명하였다. 유겸명의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예로부터 신하된 사람으로서 과연 염치(廉恥)를 상실하고 기탄(忌憚)함이 없는데 능히 신하의 절조(節操)를 보존하게 된 사람을 보셨습니까? 저 이광좌(李光佐)가 진 죄명(罪名)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전일에 이양신(李亮臣)이 열거(列擧)한 12조항은 신하된 사람의 지극한 죄상 아닌 것이 없었거니와, 그 뒤에 삼사(三司)의 제신(諸臣)들이 죄를 들어 성토(聲討)한 것이 또한 몇 사람이었습니까? 한번이라도 혹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이미 천지(天地)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지나치게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벌을 가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가 진실로 일분(一分)이라도 인간의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버젓이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아 조금도 징계하고 두려워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그는 몰래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흉악한 논을 주장하여 지난해의 변란을 빚어냈고 역적들의 공초(供招) 내용에 나온 제적(諸賊)들을 극력 비호(庇護)하여 뒷날의 화근(禍根)을 심었으며, 그 밖에 천만 가지 흉악을 하나 하나 들 수도 없습니다. 또 이번의 처분 때에 연석(筵席)에서 분부하신 것으로 보더라도 그의 죄안(罪案)은 낭자(狼藉)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진실로 국가의 전법(典法)이 행해진다면 그가 어찌 지금까지 버젓이 방 안에서 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이제는 연명하여 올린 차자(箚子)에 의리가 다시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지경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고 보면, 평소에 사신(四臣)의 차자가 반역을 한 것이라는 논을 주창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했던 사람들은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비록 위충현(魏忠賢)648) 같은 위권(威權)과 김안로(金安老) 같은 방자함으로도 죄명(罪名)이 드러나게 되고 공론이 이미 발동한 다음에 당해서는 오히려 또한 두려워하여 떨면서 죄를 받으며 죽음을 면하려고 하기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광좌에 있어서는 죄상을 성토하는 글이 관서(官署)에 잇달게 되고 미안스럽게 여기시는 분부를 연석(筵席)에서 내리시게 되었는데도 태연히 마음 쓰지 않으며 오히려 으르렁거리는 짓을 마구 했습니다. 당초에 비록 도성(都城)에서 나섰다고 했었지만 강 위쪽에서 배회(徘徊)하여 마치 기다리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하였으니, 지극히 불측스러운 일입니다. 이번에 처분이 내리는 날에 당하여는 죄상(罪狀)이 더욱 드러나게 되자 대명(待命)한다고 핑계하고서 어느새 돌연(突然)히 들어왔으니, 신(臣)은 무슨 꼴이 이런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도성 안 사람들의 심정이 그가 장차 들어온다는 것을 듣고서는 놀라워하고 의아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분주하게 서로들 하는 말이 ‘이광좌가 온다.’고 했으며, 더러는 ‘안온다.’고 하기도 하고, 또한 ‘이광좌 가 과연 들어왔다.’고 했으며, 더러는 ‘필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전일에는 종백(宗伯)649) 을 보내어 수서(手書)를 내리어도 오지 않던 사람이 이번에는 어찌하여 까닭도 없이 올라왔으며, 전일에는 고을의 감옥에서 석고 대죄(席藁待罪)하던 사람이 오늘에는 어찌하여 금부(禁府)에서 대명(待命)하는 것입니까? 진실로 풍병(風病)이 들어 천성(天性)을 잃어버렸거나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단코 이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까 보건대, 한 대신이 고자세(高姿勢)로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거드름 피우면서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과연 이광좌이었습니다. 거리의 아이들이 손가락질하고 저자의 사람들이 타기(唾棄)하기를 마치 하나의 큰 변괴를 보듯이 하였고, 허허하며 탄식하는 사람의 말이 ‘대신으로서 이처럼 염치(廉恥)가 없게 되었으니, 지난 봄의 변란(變亂)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아! 이광좌에게 염치를 책망함은 또한 너무나 용서해 주는 것인데 환득 환실(患得患失)하여 하지 못할 짓이 없었으니, 작게는 종기(腫氣)를 빨고 치질(痔疾)을 핥으며 크게는 변란을 일으켜 반역하게 되는 짓이 모두가 염치가 없는 가운데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광좌가 입대(入對)할 적에는 여혜경(呂惠卿)650) 의 체읍(涕泣)을 가장하여 군부(君父)께서 애련(哀憐)해 주기를 얻어내고, 조정에 있을 때에는 이임보(李林甫)651) 처럼 흉악한 간계를 농간하여 온 세상을 견제(牽制)해 가는 술수(術數)를 부리고 있었으니, 그의 평생에 재주 부리는 심술(心術)이 본래부터 이와 같았습니다. 이번에 방자하게 마구 들어왔음도 또한 반드시 위로는 군부를 우롱(愚弄)하고 아래로는 조정의 공론을 억눌러, 그의 화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마음을 이루어 가려는 것입니다. 그의 거조(擧措)를 보면 염치를 가지고 논할 수가 없고 그의 두세(頭勢)를 보면 또한 탄핵(彈劾)으로는 제어할 수가 없으니, 어찌 어그러진 것이 아니고, 어찌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이번 행동은 진실로 그의 꾀가 작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보면 비록 온 나라가 일어나 공격한다 하더라도 단정코 그가 조금도 동념(動念)하지 않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臣)이 권흉(權凶)은 방자해지고 주세(主勢)는 외롭고 위태함을 목격(目擊)하고서 충성과 분개가 격렬해지기에 대략 이와 같이 논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혁연(赫然)히 분발하시고 확연(廓然)히 건단(乾斷)을 내리시되, 우선 그를 척출(斥黜)하여 눈앞의 근심거리가 풀리게 하소서."
하였다. 이광좌가 금오(金吾)652) 에서 대명(待命)하고 있었으므로, 임금이 승지를 보내며 가서 효유(曉諭)하여 그와 함께 오도록 하니, 이광좌가 그대로 도성(都城)에서 나가버렸다. 유겸명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니, 유겸명이 입대(入對)하여 우러러보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우러러보는 사람들을 엄중하게 신칙하도록 했었는데도 승정원에서 신칙하지 않은 것이냐?"
하매, 승지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신칙하도록 하신 영이 조지(朝紙)에 났었는데, 어찌 승정원에서 신칙하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일찍이 시종(侍從)으로서 드나들었거니와, 네 마음에 국가가 보존하게 되는 것이 좋겠느냐 국가가 멸망하게 되는 것이 좋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성심으로 국가가 하루라도 더 부지(扶持)하게 되기를 바라 왔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국가가 중요하냐 당론(黨論)이 중요하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국가와 당은 경중(輕重)을 어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마음에도 또한 국가가 당보다 중요함을 알고 있느냐? 피차가 노론(老論)이니 소론(少論)이니 하는 논은 필경에는 마땅히 군부(君父)를 시해(弑害)하게 되고야 말 것이다. 내가 반드시 탕평(蕩平)에 힘써 세도(世道)를 조정(調停)해 가려고 하는데도 너희들이 마침내 그대로 받들지 아니하여 내가 병이 나게 된다면, 너희들의 마음에 편안하겠느냐?"
하매, 서종옥이 아뢰기를,
"만일에 교회(敎誨)하고 책망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면 마땅히 조용하게 개유(開諭)하셔야 하고, 말씀하시는 사이에 있어 마땅히 이렇게 하지 않으셔야 할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말이 비록 그렇게 되기는 했다마는, 당초에 언성(言聲)과 기색(氣色)을 높이려 한 것은 아니다. 옛사람의 말이 ‘진정표(陳情表)653) 를 읽고도 울지 않는 사람은 효자(孝子)가 아니요, 출사표(出師表)654) 를 보고도 울지 않는 사람은 충신(忠臣)이 아니라.’고 하였다. 내가 전일에 영상(領相)에게 말하기를, ‘내가 심력(心力)을 허비하게 하지 말아 달라.’고 했었거니와, 유겸명만이 아니라 피차(彼此)를 막론하고 군부(君父)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그 편당하는 풍습을 고치지 않은 것은 군부를 친애(親愛)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벼슬을 얻지 못해서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잃게 될까 근심하느니라.’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주해하기를, ‘작게는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게 되며 크게는 부모와 임금을 시해(弑害)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으니, 성현(聖賢)들의 교훈이 과격한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대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전번에 이양신(李亮臣)의 상소에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였으니, 역시 하나의 급서(急書)이었었다. 그때에 내가 국문(鞫問)하려고 하다가 옥당(玉堂)의 제신(諸臣)들이 모두 나서 극력 간쟁(諫爭)했기 때문에 실현하지 못했었다. 이번에 네가 진달한 말을 마땅히 조목조목 하문(下問)하겠는데, 네가 능히 분명하게 답변을 한다면 남을 무함한 율(律)을 면하게 될 것이거니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게 되면 마땅히 남을 무함한 율을 받게 될 것이다. 너의 상소에 ‘국가의 안전과 위태로운 기틀에 관계된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영중추부사가 들어온 것이 무슨 국가가 위태로워질 것이 있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분부가 더없이 준엄하시어 거의 국문(鞫問)과 같으니, 소신(小臣)이 황송하여 진달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신은 생각에 군자와 소인의 진퇴(進退)와 소장(消長)은 국가의 안전과 위태로움에 관계가 있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누가 군자이고 누가 소인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광좌는 소인이고 신들은 군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군자도 또한 등분(等分)이 있는데, 너처럼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무슨 군자이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옛적에 좌웅(左雄)655) 이 서숙(徐淑)에게 강박하여 묻기를, ‘안연(顔淵)은 한 가지를 듣고는 열가지를 알았었다. 효렴(孝廉)656) 은 한 가지를 들으면 몇 가지를 알게 되는가?’라고 하매, 서숙이 답변하지 못했었습니다. 성상께서 이처럼 강박하여 하문하시니, 소신이 다시는 진달할 것이 없게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大臣)은 한 사람의 아래이고 만 사람의 위이기에 그의 이름만을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영중추부사의 관작(官爵)이 그대로 있고 죄를 가한 일이 없었는데, 어찌 성(姓)을 써 넣을 수 없는 악역(惡逆)이 있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중니(仲尼)의 문하에서는 삼척 동자(三尺童子)들도 오패(五霸)를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겼었습니다. 노론(老論)의 가문에서는 비록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광좌’라고 부르는 일이 없고 혹은 ‘광좌’라고 하거나 혹은 ‘광’이라고 합니다. 신도 역시 집을 있을 적에는 항시 광좌라고 해왔으므로 이번에 군부(君父)께 말씀드릴 적에도 또한 평소에 말해 오던 대로 말씀드리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군부(君父)의 앞에서 어찌 노론들의 사사로이 편당하는 풍습을 그대로 앙달(仰達)할 수 있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옛사람도 또한 ‘필단(筆端)은 부월(鈇鉞)과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전후에 광좌를 논척(論斥)한 사람이 유독 신(臣)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은 그전과는 다르다. 이양신(李亮臣)이 말한 12조목을 너도 모두 옳다고 여기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은 감히 이양신의 12조목을 조목마다 명백하게 되었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른바 ‘몰래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흉악한 논을 주장했다.’고 한 말은 급서(急書)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김일경과 박필몽의 논은 곧 광좌의 논이고, 광좌의 논은 곧 김일경과 박필몽의 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역적들의 공초(供招) 내용에 나온 제적(諸賊)들을 극력 비호했다.’는 말은 누구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이명언(李明彦)·이진유(李眞儒)·홍계일(洪啓一)·남태적(南泰績)과 같은 무리들이 이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남태적도 또한 영중추부사가 안치(按治)할 때의 일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가 당국(當國)한 대신이고 위관(委官)이 된 몸으로서 엄하게 다스리지도 끝까지 핵실(覈實)하지도 못했고 보면 의금부의 당상(堂上)이 역적들을 비호하여 느슨하게 다스리는 것을 또한 어찌 하나하나 나무라고 책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신축년657) 과 임인년658) 의 옥사(獄事)는 단련(鍛鍊)해서 구성한 것으로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오직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기에, 지금에 와서는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지난해의 일에 있어서는 내가 이렇게 될까 염려되기에 피로한 것도 잊어버리고서 한여름에 친국(親鞫)을 했었다. 임금이 친국을 하는 것은 천고(千古)에 드문 일이고, 옥사의 실정을 처음에서 끝까지 하나하나 친히 안찰(按察)하여 한 것인데, 네가 감히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협잡한 것이라고 여겨, 군부(君父)가 친국한 것에 있어서도 의심을 하며 느슨해진 옥사라고 하는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 자신이 위관(委官)이 되었으니, 군부(君父)께서 비록 혹시 느슨하게 다스리시더라도 만일 그가 구핵(究覈)하여 통렬하게 다스렸었다면 무슨 안될 것이 있겠습니까? 권익관(權益寬)을 짐작하여 처결한 것이 또한 어찌 역적을 비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권익관의 일에 있어서는 영중추부사가 너희의 무리들에게 쫓겨난 뒤의 일이었다. ‘강 위쪽에서 배회(徘徊)하고 있어 불측스럽다.’고 했는데, 어떻게 차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만일에 광좌가 과연 칭병(稱兵)하여 대궐을 범하게 되었었다면 신이 마땅히 곧장 대궐 안으로 들어가 상변(上變)했었을 것입니다. 무엇하러 ‘염치(廉恥)를 상실했다’ 느니 ‘기탄(忌憚)이 없었다’ 느니 하는 등의 말들로 항소(抗疏)를 올려 탄핵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기다렸다.’는 것은 무슨 일이고, ‘불측스럽다.’고 한 것은 무슨 일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가 낮이나 밤이나 기다리고 있던 바는 곧 도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번에 돌연(突然)히 들어오게 된 것도 기다리고 있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마음은 진실로 불측스러운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조태구(趙泰耉)가 북문(北門)으로 가만히 들어왔을 적에 박상검(朴尙儉)과 서로 호응한 일이 있었다. 이번에 영중추부사도 군상(君上)과 서로 호응하게 된 것이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의 죄명(罪名)이 저러하므로 결단코 들어올 수 없는데, 까닭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돌연히 들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까닭이 없은 것이 아니다. 이번에 처분이 있은 다음에 자신이 과오를 알아차리고서 들어온 것이다. 대개 각오(覺悟)가 있은 것인데, 어찌하여 돌연히 들어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합문(閤門)을 닫으셨던 날에 당하여 ‘대죄(待罪)하기 위하여 왔다.’고 했다면 오히려 혹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마는, 이번에 졸연(卒然)히 들어온 것은 무슨 의거한 데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찌하여 돌연히 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없겠습니까? 궐한(厥漢)659) 은 오직 환득(患得)하고 환실(患失)하며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꾸짖기를,
"네가 어찌 감히 대신을 ‘궐한’이라고 하는 것이냐?"
하매, 서종옥이 아뢰기를,
"대신은 죄가 있어도 그 죄만 논하고 말아야 하는 법인데, ‘궐한’이라고 하기까지 하였음은 지극히 무엄(無嚴)한 짓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른바 ‘도성 안의 인심이 경동(驚動)하고 의구(疑懼)하여 분주하게 움직인다.’고 한 것은 도적들이 어디에서 오게 된다는 것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광좌가 몸에 허다한 죄명(罪名)을 짊어지고 있어 정상(情狀)이 편안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합문(閤門)을 닫으셨을 때에도 마침내 들어오지 않았다가 이번에 돌연히 들어오자 인심이 괴이하고 놀랍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어, 모두들 하는 말이 ‘그 정승이 또한 들어왔다는 말인가?’라고 했습니다. 전후에 사람들의 말이 어떠하였는데 오히려 들어왔으니, 전혀 염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미워하지 않는 대신은 비록 이러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네가 반드시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비록 신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일에 이러한 일이 있게 된다면, 어찌 신이 말하지 않겠습니까? 노론(老論)에는 원래 이런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앞에서 어찌 노론이나 소론의 명칭을 거론하는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말은 성상께서 내리신 분부에도 또한 있었기에 신도 역시 말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죄를 주지 않게 된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불울(拂鬱)해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언성을 높여 이르기를,
"불울하게 되기 때문에 역적이 생기게 된 것인데, 네가 어찌 감히 군부의 앞에서 ‘불울’ 두 글자를 내놓는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들이야 어찌 반역하는 짓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천기(李天紀)와 김용택(金龍澤)의 무리를 벗어나게 하려고 한 것은 반역하는 짓이 아니겠느냐? 임금의 위세(威勢)를 어찌하여 ‘외롭고 위태하다.’라고 한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인주(人主)가 묘연(眇然)한 몸 하나를 만백성의 위에 의탁하고 있으면서 무슨 기력(氣力)과 위세로 천하의 만백성을 총제(摠制)해 갈 수 있겠습니까마는, 대개 도리(道理)란 것이 있고 기강(紀綱)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대부(士大夫)들이 염우(廉隅)를 지키고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여 의리가 아닌 일은 비록 죽게 되더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기강이 세워지게 되어, 임금이 능히 만백성을 총제해 가며 외롭거나 위태로운 염려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광좌처럼 염치도 없고 비웃음과 욕설도 돌아보지 않으며 권력(權力)을 탐하고 세도(勢道)를 좋아하여 방자하고 기탄도 없이 돌연히 들어오기를 일삼게 된다면, 장차 하지 못할 짓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다른 신하들도 모두 이렇게 된다면 임금이 믿고 힘입을 데가 없을 것이니, 어찌 외롭고도 위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너와 말을 하기는 목석(木石)이나 허수아비와 말을 하기나 다를 것이 없다마는, 내가 마땅히 처음부터 끝까지 말을 하겠으니, 네가 잘 들어보아라. 이번에 연석(筵席)에서 말한 것을 보았었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저께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을 보러 갔다가 연석에서 한 말 1통을 구득해 놓았기에 신이 비로소 보기는 했습니다마는, 조용히 심역(尋繹)해 보지 못하여 대략만 알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소위 피차(彼此)의 당목(黨目)이 이미 생긴 뒤에는 서로 의심이 생기게 되었다. 지난날의 유봉휘(柳鳳輝)의 일을 오늘날은 처분을 한 뒤이기에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소론들은 노론이 경종(景宗)에게 해를 끼칠 것으로 의심했기 때문에 유봉휘도 또한 그렇게 의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론이나 소론이나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겠느냐? 노론과 소론이 시기와 의심을 쌓아가며 갈수록 서로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무함하기 때문에, 내가 또한 그대로 용서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봉휘의 일에 있어서는 주벌(誅罰)하기를 청한 것이 또한 의리가 있는 것이었고, 건저(建儲)의 초두(初頭)에 당해서는 조정의 사체에 있어서 진실로 마땅히 이렇게 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경여(李敬輿)에 비하면 어찌 서로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에는 오히려 원손(元孫)이 있었기 때문에 인조(仁祖)께서 처분하여 벌을 내리셨어도 치우친 논이 되지 않았지만, 이는 당론(黨論)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효종(孝宗)께서 이경여를 대우한 일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경종 때에는 유봉휘를 베도록 논쟁하는 것이 옳았겠지만 나에게 이르러서는 옳지 못한 것이니, 너희들도 이 일에 있어서는 오히려 의거할 데가 있을 것이다. 지난날에 대신들을 남김없이 도륙(屠戮)했었다. 그들은 비록 이러했었지만 너희들은 어찌 차마 다시 그럴 수 있겠는가?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을 처음에는 내가 조금 좋게 여겼었는데, 끝에 와서 보건대, 혼모(昏耄)가 심했었다. 그러나 또한 어찌 반역을 하겠는가? 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은 갑술년660) 의 일에 불만이 있었고, 최석정(崔錫鼎)과 윤지완(尹趾完)은 신사년661) 의 일을 부족하게 여겨, 출향(黜享)하기를 발론(發論)하기까지 하였음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목호룡(睦虎蘢)이 처음에는 노론에 들어갔다가 다시 소론에 붙었엇다. 그러나 유래한 근본이 있은 것이니, 어찌 공중(空中)에서 나오게 된 것이겠느냐? 너희들은 또한 을사년662) 과 병오년663) 이후에 이런 무리들을 잘라내어 버리고 다만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하기를 청한 것으로써 말했다면, 어찌 당당한 정론(正論)이 아니었겠느냐? 조태구와 최석항이 죄가 없지 않기 때문에 추탈(追奪)하였으며, 영중추부사 이광좌(李光佐)와 판중추부사 조태억(趙泰億)도 마침내 김일경(金一鏡)을 잘라내어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특별히 삭출(削黜)하게 되었음은 이래서이었다. 지난해의 변란 때에 심유현(沈維賢)의 음흉한 말이 진실로 흉악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김성절(金盛節)과 서덕수(徐德修)도 또한 어찌 흉악한 말이 없었느냐? 이의천(李倚天)이 이천기(李天紀)의 무리에게 추증(追贈)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노론들의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정호(鄭澔)도 역시 혼모(昏耄)하여 을사년 초두에 먼저 서덕수를 신설(伸雪)해 주기를 청하였고,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은 또한 편당하는 논이 심하여 서덕수를 신설해 주었을 때에 ‘전하께서 내리신 처분은 진실로 합당하나 서종일(徐宗一)이 진달한 상소는 외월(猥越)한 것이다.’라고 했었으니, 내가 영중추부사 민진원의 심사(心事)를 알게 된 것은 여기에 있다고 여겼었다. 소하(疏下)의 오적(五賊)664) 중에 박필몽(朴弼夢)은 이미 복주(伏誅)되었고 이명의(李明誼)는 형장(刑杖)에 죽었다. 나도 또한 이진유(李進儒)를 미워했으니 너희들이 베려고 했던 것이 진실로 옳기는 했지마는, 내가 또한 그렇게 하려는 심술(心術)은 바르게 여기지 않았었다. 이진유를 잡아 왔다가 도로 놓아 주었던 것은 또한 영중추부사가 그를 애석하게 여겨서가 아니고 실제는 내가 놓아 주게 했던 것이다. 나 역시 이진유가 치우친 논을 하는 것은 미웠지만, 반역한 자가 아닌데 어찌 반역으로 논죄(論罪)할 수가 있겠는가? 서종하(徐宗廈)와 윤성시(尹聖時)는 진실로 족히 책망할 것이 없었거니와, 이명언(李明彦)도 역시 글렀었으니 소견이 넓지 못했었다. 그러나 또한 반역을 한 사람은 아닌데도 너희들이 기필코 반역한 사람 속에 넣어 죽이려고 했으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다. 요망한 박상검(朴尙儉)의 일이 드러난 다음에 너희들이 의심을 가지는 것을 내가 또한 그르게 여기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소론들이 이미 노론을 의심하고 있으니 노론들이 소론을 의심하는 것은 또한 이상할 것이 없어서 이다. 지난해의 변란 이후에는 영중추부사가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는 여부(與否)를 알게 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보지 못했지만 보게 된 사람이 또한 많을 것이다. 이번에 돌연히 들어온 것도 또한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연석(筵席)에서의 말이 이미 나간 다음에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알아차리고서 도성(都城) 동쪽에서 대명(待命)하고 있다가 그대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가 처음에는 연명하여 올린 차자(箚子)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한 말이 쓰임받지 못했기 때문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본시 고집스러운 사람인데 한 말이 쓰임받지 못했으니 어찌 한 걸음의 땅이라도 들어오려고 했겠는가마는, 오늘날 들어온 것은 또한 스스로 깜짝 놀라 깨우치게 된 것이니, 그렇게 짐작해야 한다. 대저 사람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반복(反覆)해서 성찰(省察)하며 깨달아 간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는 법이니, 사람들이 모두 그렇기만 한 것이라면 옛사람들이 무엇하러 오자(悟字)를 만들었겠는가? 너희들의 방법은 가져다가 비유할 만한 것이 있으니, 강도와 절도가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같이하는 것과 같은 유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충성과 믿음이 있고 편당하지 않으나 소인은 편당을 하고 충성과 믿음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편당만 하고 충성과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네가 ‘노론에는 역적이 없지만 소론에는 역적이 있다.’고 하는데, 네가 그 근본을 생각해 보라. 노론에도 또한 어찌 역적이 없었느냐? 목호룡(睦虎龍)과 이천기(李天紀)의 무리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어찌 노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 만석군(萬石君)665) 이 밥상을 대하여 먹지 않으매 모든 아들들이 복죄(服罪)했었고, 한연수(韓延壽)666) 가 합문(閤門)을 닫고서 잘못을 생각하고 있으매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복종(服從)하였다. 내가 비록 믿고서 감동되게 하는 정성이 없기는 했다마는, 너희들이 어찌 차마 다시 편당하는 논을 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또한 전생(前生)의 일로 알고 다시는 편당하는 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있어서 또한 곡진하게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미 관작(官爵)을 복구해 주었고 두 사람에 대해서는 비록 관작을 복구하지 않았지만, 저번에 내가 영상(領相)에게 말하기를, ‘들어온 다음에 하더라도 늦지 않다.’고 했었으니, 너도 또한 반드시 듣게 되었을 것인데, 너희들이 지금도 오히려 밖에 그대로 있어, 의를 펴게 된 다음에도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음은 무슨 까닭이냐? 너희들 자신이 성무(聖誣)667) 를 가려야 된다고 하면서도 반대로 도리어 성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노론이나 소론이나 다 같이 난역(亂逆)을 했다고 여기십니다마는 심유현(沈維賢)과 이유익(李有翼)의 무리가 김성절(金盛節)과 서덕수(徐德修)의 공초(供招)로써 구실(口實)을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지난봄의 변란도 또한 김성절과 서덕수에게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부 김성절과 서덕수에게서 나왔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김일경(金一鏡)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하였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당론(黨論)만 하고 몸은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소신(小臣)이 또한 노모(老母)가 있고 독신으로 형제간도 없습니다마는, 의리의 관두(關頭)나 국가의 안전과 위태로움에 관계가 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비록 죽게 된다 하더라도 돌아 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당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축년과 임인년의 옥사(獄事)에 대해서 신이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에 단련하여 무옥(誣獄)이 이루어졌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모두 단련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에 한 가지 옥사가 3년 동안이나 연장되었었으니 진실로 단련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게 되었지마는, 다만 바로 단련한 것이라고만 해도 안된다. 을사년과 병오년에는 노론들의 일이 혼란했었고, 신축년과 임인년에는 소론들의 일이 혼란스러웠다. 이는 바로 속담에 ‘내 코가 석 자나 빠졌다.’고 하는 말과 같게 된 것인데, 너희들이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의 일을 논할 수 있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소신이 아뢴 말들은 소신 혼자만의 소견이 아니고 모두 신(臣)의 제배(儕輩)들 사이에서 공언(公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언성을 높여 이르기를,
"내가 이미 반복해서 회유(誨諭)했는데도 네가 또 노론이니 소론이니 제배들이니 하는 말을 감히 내 앞에서 하는 것이냐?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말을 감히 군부(君父)의 앞에서 하는 자는 반드시 군부를 시해(弑害)하게 될 사람이다."
하고, 드디어 손으로 탁자를 치면서 이르기를,
"네가 감히 마음먹고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이석효(李錫孝)의 말이 동조(東朝)께 미친 뒤인데, 네가 또한 감히 제배들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이냐? 네가 언제 일찍이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편당하는 풍습 때문에 군부(君父)와 태후(太后)에게 욕이 미치게 되는 일을 보았었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분부를 하시는 것입니까? 이석효는 이인엽(李寅燁)의 팔촌(八寸) 친족이기에 자연히 소론들 중에서 모의(謀議)한 흉악한 말을 가지고 공초(供招)하게 된 것인데, 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너희들의 거조(擧措)가 그러하므로 이석효가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상방 참마검(尙方斬馬劍)668) 을 너와 같은 자에게 써야 한다. 내가 너를 베어도 되고 너를 귀양 보내도 되는데, 너희들은 당을 위해 죽으려고 하여 절도(絶島)나 아주 먼 변방을 마치 낙지(樂地)에 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네가 처음에 이런 상소를 올릴 적에 기필코 벌을 받으려고 하여 왔을 것이다. 만일에 지금 죄를 준다면 네가 반드시 달갑게 여기며 소원대로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죄주지 않는다. 내가 벌주려고 하여 너를 부른 것이 아니다. 선조조(宣祖朝)에 일찍이 ‘공신(功臣)이라도 또한 베겠다.’는 분부가 있었는데, 내가 오늘날 한편으로는 동조(東朝)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종사(宗社)를 위하여 어찌 사람 하나를 베이지 못하겠는가? 이렇게 분부를 내린 뒤에도 다시 당론(黨論)을 하는 자는 시급히 국가의 전형(典刑)대로 하여 물리쳐버려야 할 것이니, 물러가 너의 제배들에게 말을 하여 전일처럼 하지 말도록 하라. 한갓 이익만 없게 될 것이니, 다시는 지난날처럼 하지 말아야 한다."
하고, 임금이 손수 유겸명의 상소를 말아 서종옥(徐宗玉)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이 상소를 내가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거나 혹은 도로 주어버릴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마는, 만일에 이 상소를 그대로 둔다면 올린 사람을 죄주지 않을 수 없으니 차라리 이를 불태워 없애버려야 한다. 승선(承宣)은 이 상소를 사관(史官)에게 주어 합문(閤門) 밖에서 불태워버리도록 해야 한다. 나 역시 지나친 거조(擧措)임을 알고 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24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5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 [註 648] 위충현(魏忠賢) : 명 희종(明憙宗) 때의 환관(宦官). 젊어서 무뢰(無賴)하였는데 뽑혀 입궁(入宮)한 뒤 희종의 유모(乳母)였던 객씨(客氏)와 내통하여 조정(朝政)을 마음대로 하며 기탄(忌憚)함이 없자, 어사(御史) 양연(楊漣)이 24건의 대죄(大罪)를 들어 탄핵하다가 도리어 그의 무함으로 죽음을 당했음. 의종(毅宗)이 즉위하여 폄찬(貶竄)시키자 자살하므로 그의 시체를 찢으라고 명을 내림.
- [註 649] 종백(宗伯) : 예판(禮判).
- [註 650] 여혜경(呂惠卿) : 송 신종(宋神宗) 때 사람으로 왕안석(王安石)의 추천을 받아 입조(入朝)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는데, 왕안석을 극력 배척하다가 도로 밀려나 외직(外職)에 전전하며 일생을 마쳤음.
- [註 651] 이임보(李林甫) : 당(唐)나라 종실(宗室). 성질이 아첨하고 간사하였으며, 현종(玄宗) 후기에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환관(宦官)·비빈(妃嬪)들과 결탁하여 임금의 동정(動靜)을 살펴 영합(迎合)하고 정사(政事)를 마음대로 하였음.
- [註 652] 금오(金吾) : 의금부(義禁府).
- [註 653] 진정표(陳情表) : 진무제(晉武帝) 때 이밀(李密)은 일찍 아비를 여의고 어미가 개가(改嫁)하여 조모 유씨(劉氏)의 손에서 성장하였는데, 무제가 태자 세마(太子洗馬)를 제수하여 누차 불렀으나 조모를 봉양해야 된다는 내용으로 간곡하게 진정한 표문(表文).
- [註 654] 출사표(出師表) : 촉한(蜀漢)의 소열 황제(昭烈皇帝)가 죽은 뒤 제갈 공명(諸葛孔明)이 출진(出陣)에 앞서 후주(後主)에게 충선(忠善)한 장상(將相)의 말을 신임하고 대소사(大小事)를 반드시 자문(諮問)하라는 전·후의 표문(表文).
- [註 655] 좌웅(左雄) :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사람.
- [註 656] 효렴(孝廉) : 한무제(漢武帝) 때부터 주(州)에서 수재(秀才)를, 군(郡)에서는 효행(孝行)이 있고 청렴한 사람[孝廉]을 천거하게 하여 관리로 임용한 일. 또는 그 사람.
- [註 65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658]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659] 궐한(厥漢) : 그놈.
- [註 660]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 [註 661] 신사년 : 1701 숙종 27년.
- [註 662]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663] 병오년 : 1726 영조 2년.
- [註 664] 소하(疏下)의 오적(五賊) : 경종(景宗) 원년(1721) 김일경(金一鏡)의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을 탄핵하는 상소에 연명(聯名)한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廈)·이명의(李明誼)를 가리킴.
- [註 665] 만석군(萬石君) : 한 경제(漢景帝) 때 사람. 석분(石奮)을 이름.
- [註 666] 한연수(韓延壽) :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
- [註 667] 성무(聖誣) : 임금에 대한 무함.
- [註 668] 상방 참마검(尙方斬馬劍) : 상방은 한(漢)나라 때 임금의 일상 용품을 보관해 두는 곳으로, 참마검(斬馬劍)이 있는데, 그 칼이 예리하여 말도 벨 수 있다고 함. 《한서(漢書)》 주운전(朱雲傳)에 "원컨대 상방의 참마검을 내려 주시면 영신(佞臣) 한 사람의 머리를 베겠습니다."라고 하였음.
원문
殿下, 試觀自古爲人臣者, 其果有喪廉恥無忌憚, 而能保其臣節者耶? 彼光佐之負罪名何如也? 前日李亮臣之所臚列十二條, 莫非人臣之極罪, 其後三司諸臣, 聲罪致討者, 亦幾人哉? 一或遭此, 已難容於覆載之間。 殿下過於寬貸, 雖不加誅, 而渠苟有一分人心, 則豈敢悍然不顧, 略無懲畏耶? 蓋渠陰主鏡、夢之凶論, 釀成昨年之變亂, 力護逆招中諸賊, 以植後日之禍根, 其他千凶萬惡, 不可毛擧。 而且以今番處分時筵敎觀之, 渠之罪案, 不啻狼藉, 國家典法苟行, 渠豈能至今偃息於牖下哉? 矧今聯箚, 義理復返乎光明正大之域, 則其平日唱爲四箚爲逆之論, 終始主張者, 其將如何也? 雖以魏忠賢之威權, 金安老之縱恣, 及其罪名彰著, 公議旣發之後, 則猶且惶怖受罪, 救死不暇。 而若光佐則討罪之章, 連續於公車, 未安之敎, 至發於筵席, 而恬不爲意, 猶肆咆喝。 當初雖曰出城, 徘徊江上, 若有所待者, 已極叵測。 而今當處分之日, 罪狀益著, 而托以待命, 倐然突入, 臣未知此何象也。 都下人情, 聞其將入, 莫不驚疑, 奔走相告曰: "光佐來矣。" 或曰: "不來矣。" 又曰: "光佐果入矣。" 或曰: "必不入矣。" 前日之遣宗伯, 宣手書而不來者, 今豈無端來乎? 前日之席藁於州獄者, 今何爲胥命於金吾乎? 苟非病風喪性, 若包藏禍心者, 決不若此也。 俄見一大臣高倚平轎, 晏晏然徐驅, 則果光佐也。 街童指點, 市人唾罵, 視若一大變怪。 至有噓唏歎息者曰: "爲大臣而無廉恥至此, 前春變亂, 無足怪者。" 噫! 廉恥責光佐者, 其亦太恕, 而患得患失, 無所不至, 小則吮舐, 大則亂逆, 皆從無廉恥中出來。 光佐之入對也, 則假作惠卿之涕泣, 以取君父之哀憐, 在朝也, 則閃弄林甫之凶譎, 以售一世之鉗制, 其平生心術伎倆, 本自如此, 則今此肆然闖入, 亦必出於上以愚弄君父, 下以脅持朝論, 以濟其樂禍之心也。 觀其擧措, 不可以廉恥論也, 其頭勢, 亦不可彈劾制也, 豈不悖哉, 豈不懼哉? 彼之此行, 固知其計之不小, 則雖擧一國而攻之, 決知其無一毫動念。 而臣目見權凶之放肆, 主勢之孤危, 忠憤所激, 略論如此。 伏願聖明, 赫然奮發, 廓揮乾斷, 姑先斥黜, 以紓目前之憂, 光佐待命于金吾, 上遣承旨往諭, 使與之偕來, 光佐仍出城。 命謙明入侍, 謙明入對, 仰瞻, 上曰: "頃者嚴飭仰視者矣, 政院不申飭乎?" 承旨徐宗玉曰: "申飭之令, 出於朝紙, 奚待政院之申飭乎?" 上曰: "爾曾出入侍從, 於汝心, 國存則好乎, 國亡則好乎?" 謙明曰: "小臣誠願國家之一日扶持, 故有此言耳。" 上曰: "國重乎, 黨重乎?" 謙明曰: "國與黨輕重, 何可言乎?" 上曰: "汝心亦知國重於黨乎? 彼此老少之論, 必當弑君父而後已。 予必欲務爲蕩平, 調劑世道, 而爾輩終不奉承, 使予成疾, 則於汝心安乎?" 宗玉曰: "若有誨責之事, 則當從容開諭, 辭令之間, 恐不當若是矣。" 上曰: "予言雖如此, 而初非以聲氣相加也。 古人云: ‘讀陳情表而不泣者, 非孝子也;覽出師表而不泣者, 非忠臣也。’ 予於向時, 語領相以毋使我費心力, 非但謙明, 無論彼此, 君父之言如此, 而不改其習者, 非愛君父之意也。 孔子曰: ‘其未得之,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朱子註之曰: ‘小則吮癕, 大則弑父與君。’ 聖賢之訓, 非過激之辭也。 予於領府事, 非愛惜之也。 向者李亮臣之疏, 誣人惡逆, 亦一急書。 其時予欲鞫問, 而玉堂諸臣, 皆力爭, 故不果矣。 今爾所陳, 當逐條下問, 爾能明對則免陷人之律, 一毫囁嚅, 則當被誣人之律。 爾疏有關於國家安危之機云者, 領府事之入來, 有何國家之可危乎?" 謙明曰: "上敎嚴截, 殆同鞫問, 小臣惶恐不知所達, 而臣則以爲, 君子小人進退消長, 有關於安危矣。" 上曰: "誰爲君子, 誰爲小人乎?" 謙明曰: "光佐則小人, 臣等則君子矣。" 上曰: "君子亦有等分, 汝所自矜者, 何等君子耶?" 謙明曰: "昔左雄, 迫問徐淑, 以顔淵聞一知十, 孝廉聞一知幾, 徐淑不能對。 聖敎之迫問至此, 小臣更無所達矣。" 上曰: "大臣者, 一人之下, 萬人之上, 不可只呼其名。 今領府事官爵尙存, 而無加罪之事, 豈有不可書姓之惡逆乎?"
謙明曰: "仲尼之門, 三尺之童, 羞稱五覇。 老論家則雖童騃輩, 無呼以李光佐者, 或曰光佐, 或曰光。 臣亦在家, 常以光佐稱之, 故今於告君之際, 亦以平日所稱者, 告之矣。" 上曰: "君父之前, 何可以老論私黨之習, 仰達乎?" 謙明曰: "古人亦有筆端鈇鉞之說。 前後論斥光佐者, 非獨臣一人矣。" 上曰: "今番則異於前矣。 李亮臣十二條, 爾以爲盡是乎?" 謙明曰: "臣則敢以李亮臣十二條, 爲條條明白矣。" 上曰: "所謂陰主鏡、夢之凶論者, 此非急書而何?" 謙明曰: "鏡、夢之論, 卽光佐之論, 光佐之論, 卽鏡、夢之論也。" 上曰: "力護逆招中諸賊云者, 指誰某而言耶?" 謙明曰: "如明彦、眞儒、啓一、泰績輩是也。" 上曰: "泰績亦領府事按治時事乎?" 謙明曰: "渠以當國大臣, 身爲委官, 不能嚴治窮覈, 則禁府堂上, 護逆緩治者, 又何可一一咎責乎?" 上曰: "辛壬年獄事, 鍛鍊搆成, 在下者惟意所欲, 則到今疑之者, 固無足怪。 而至若昨年, 則予爲慮其如此, 忘其疲勞, 盛夏親鞫。 人君親鞫, 千古罕有, 而首尾獄情, 一一親按, 爾敢以私意挾雜, 致疑於君父親鞫, 而謂之緩獄乎?" 謙明曰: "身爲委官, 君父雖或緩治, 渠若究覈而痛治, 則有何不可乎? 益寬之酌處, 亦豈非護逆乎?" 上曰: "益寬則領府事見逐於汝輩之後矣。 徘徊江上叵測云者, 何忍爲此言乎?" 謙明曰: "光佐若果稱兵犯闕, 則臣當直入闕中上變。 何必以喪廉恥、無忌憚等語, 抗疏彈劾乎?" 上曰: "所待者何事, 叵測者何事?" 謙明曰: "渠之日夜所待者, 乃是復入也。 如向來突入者, 非所待而何? 其心誠爲叵測矣。" 上曰: "向者泰耉之北門潛入, 有與尙儉相應之事。 今則領府事與君上相應乎?" 謙明曰: "渠之罪名如彼, 決不可入來, 而無端入來者, 豈非突入乎?" 上曰: "非無端也。 今番處分後, 自知其過而來。 蓋有覺悟矣, 何可謂之突入乎?" 謙明曰: "頃當閉閤之日, 爲待罪而來云爾, 則猶或成說, 今番之卒然入來, 有何所據乎? 安可不謂之突入也? 厥漢惟患得失, 放肆無忌。" 語未畢, 上叱曰: "汝何敢以大臣, 稱厥漢乎?" 宗玉曰: "大臣有罪, 則論其罪而已, 至稱以厥漢, 極爲無嚴矣。" 上曰: "所謂都下人心, 驚疑奔走云者, 以爲盜賊, 自何來乎?" 謙明曰: "光佐身負許多罪名, 情跡難安, 故閉閤之時, 終不入來, 今者突然入來, 人心莫不怪駭, 咸曰: ‘此政丞亦入來耶?’ 前後人言何如, 而猶入來, 可謂全無廉恥矣。" 上曰: "汝所不嫉之大臣, 雖有如此之事, 爾必不言矣。" 謙明曰: "雖臣所不嫉者, 若有此等事, 則臣豈不言乎? 老論元無若此者矣。" 上曰: "君父之前, 何可擧論老少之名?" 謙明曰: "老論、少論之說, 上敎亦有之, 故臣亦爲之矣。 終不罪之, 則人心拂鬱矣。" 上大聲曰: "拂鬱故逆賊出矣, 汝何敢於今日君父之前, 出拂鬱二字乎?" 謙明曰: "臣等豈爲逆乎?" 上曰: "欲脫天紀、龍澤輩者, 非逆乎? 主勢則何謂之孤危耶?" 謙明曰: "人主以眇然一身, 托于萬衆之上, 有何氣力威勢, 可以摠制天下萬衆乎? 蓋有道理, 有紀綱焉故也。 士大夫守其廉隅, 顧其身名, 非義之事, 雖死不爲, 故紀綱由是而立焉, 所以人君, 能摠制萬衆, 而無孤危之患也。 若如光佐之不有廉恥, 不顧笑罵, 貪權樂勢, 放肆無忌, 以突入爲事, 則將無所不至。 他臣皆若此, 則人君無所恃賴, 豈不孤且危歟?" 上曰: "與汝語, 無異與木石、偶人語, 而予當言其首尾, 爾試聽之。 今番筵說見之乎?" 謙明曰: "再昨日往見領議政洪致中, 則得置筵說一通矣, 臣始得見, 而未能從容尋繹, 大略則知之矣。" 上曰: "所謂彼此黨目旣生之後, 互生疑心。 向來柳鳳輝事, 今日處分之後, 不可不明言少論疑老論之害於景廟, 故鳳輝亦以此疑之。 老少於予, 有何干涉耶? 老少積成猜疑, 轉相搆捏, 故予亦以此恕之矣。 然鳳輝之事, 則請以誅罰, 亦有義焉, 當建儲之初, 朝廷事體, 固當若是矣。 若比之李敬輿, 豈不大相異乎? 其時則元孫猶在, 故仁廟處分施罰, 而非出於偏論, 此則出於黨論矣, 亦有異於孝廟待敬輿之事矣。 景廟時, 則以誅鳳輝爭之可矣, 至於予則不可也, 爾等此事則猶有可據者矣。 向日大臣, 屠戮無餘。 渠輩雖若是, 爾等豈忍復爲乎? 趙泰耉、崔錫恒, 初則予稍可之, 末後見之, 則昏耄甚矣。 然亦豈爲逆乎? 南奉朝賀, 則不滿於甲戌年事, 崔錫鼎、尹趾完, 則以辛巳事, 爲未足, 至發黜享之論, 尤爲過矣。 虎龍初入老論, 復附少論。
然根本則有之矣, 豈自空中出來耶? 爾等亦於乙丙以後, 割去此輩, 而只以建儲代理爲言, 則豈非堂堂正論乎? 泰耉、錫恒, 不爲無罪, 故追奪, 而李領府事、趙判府事, 終不能割去一鏡, 故特爲削黜者, 此也。 昨年變亂, 維賢凶言, 固爲凶惡, 而盛節、德修, 亦豈無凶言乎? 李倚天, 至請追贈天紀輩, 老論不亦愧乎? 鄭澔, 亦昏耄, 乙巳初, 先以伸德修爲請, 閔領府事黨論亦甚, 而伸德修之時, 以爲殿下處分, 則誠得宜, 而徐宗一之陳疏, 則爲猥越云, 予以爲知閔領府事心事處在此也。 疏下五賊, 夢已伏法, 明誼杖斃。 予亦嫉眞儒, 爾等之欲誅者, 誠是矣, 而予亦不韙其心術。 眞儒之拿來還放者, 亦非領府事愛惜之也, 予實放之矣。 予亦嫉眞儒之偏論, 而非逆者, 何可論以逆乎? 徐宗厦、尹聖時, 固不足責, 李明彦亦非矣, 所見不廣。 然亦非爲逆之人, 汝輩必欲納諸逆而殺之, 此爾等之過也。 妖儉事出之後, 爾輩之致疑, 予亦不以爲非。 何也, 少旣疑老, 則老之疑少, 亦不異矣。 昨年變亂之後, 則領府事之有逆心與否, 有可以知者。 爾則不見, 而見之者亦多矣。 今番突入, 亦非不召而自來也。 筵說旣出之後, 始乃自知其過, 待命於東城, 而仍爲入來矣。 初則以聯箚爲逆, 而言不見用, 故不爲入來。 其人素固執, 言不見用, 則豈肯入一步地, 而今日入來, 亦自驚悟則斟酌可也。 夫人移心易慮, 反復省悟而後, 乃可爲人, 人皆如此, 則古人何以作悟字乎? 爾等之法, 有可取比者, 强竊盜同心同力之類也。 孔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此非比而不周乎? 爾則曰: ‘老論無逆, 少論有逆。’ 而爾思其本。 老論亦豈無逆乎? 虎龍、天紀輩, 出於何處? 豈不出於老論乎? 萬石君對案不食, 而諸子服罪, 韓延壽閉閤思過, 而一郡髡鉗。 予雖無孚感之誠, 爾等豈忍復黨論乎? 爾等亦以前生事知之, 更勿爲黨論可也。 予於爾輩, 亦曲盡矣。 二人旣已復官, 二人雖不復官, 而向予語領相, 以入來後爲之未晩, 爾亦必聞之矣。 爾等, 今猶在外, 伸得義理之後, 尙不入來, 何也? 爾等自謂卞聖誣, 而反爲反聖誣矣。" 謙明曰: "殿下以爲老少同爲亂逆, 而維賢、有翼輩, 藉口於盛節、德修之招, 則昨春變亂, 亦出於盛節、德修耶?" 上曰: "非以爲專出於盛節、德修, 出於一鏡也。" 謙明曰: "臣豈爲黨論, 而不顧身乎? 小臣亦有老母, 單獨無兄弟, 而至於義理關頭, 國家安危所係處, 雖死不暇顧矣。" 上曰: "爾何謂非黨論乎?" 謙明曰: "辛壬獄事, 則臣有所懷矣。" 上曰: "非謂其時鍜鍊誣獄耶?" 謙明曰: "皆出於鍜鍊矣。" 上曰: "其時一獄, 延及三年, 固不可謂不鍜鍊, 而但直謂之鍛鍊則不可。 乙丙年則老論之事, 淆亂, 辛壬年, 則少論之事淆亂。 此正諺所謂, 吾鼻三尺垂者也。 爾等何暇論他人之事乎?" 謙明曰: "小臣所言, 非臣獨得之見, 皆臣儕輩間公言之者矣。" 上高聲曰: "予旣反復誨諭, 而汝又以老論、少論儕輩等說, 敢發於予前乎? 老論、少論之言, 敢發於君父之前者, 必弑君父之人也。" 遂以手拍案曰: "爾敢生心發此言乎? 李錫孝語及東朝之後, 爾敢爲儕輩之言乎? 汝曷嘗見自古以來, 以黨習而辱及於君父太后者乎?" 謙明曰: "殿下何爲而發此敎也? 錫孝以李寅燁八寸親, 自以其少論中謀議之凶言, 納招, 何干於臣等乎?" 上曰: "爾等之擧措如此, 故錫孝爲此言矣。 尙方斬馬劍, 可用於如爾者矣。 予誅汝可也, 竄汝可也, 而爾等爲黨而死, 視絶島極邊, 如赴樂地。 爾之初呈此疏, 期以被罰而來矣。 今若罪之, 則爾必樂之而適中其願。 予故不罪焉。 予非欲用罰而召汝也。 宣廟朝, 曾有功臣, 亦斬之敎, 予今日, 上爲東朝, 下爲宗社, 豈不能斬一人乎? 如是下敎之後, 復爲黨論者, 亟正邦刑, 退去可也, 退而語爾等儕流, 毋若前日之爲也。 徒無益也, 更無若前日之爲也。" 上手卷謙明之疏, 授宗玉曰: "此疏, 予非不知留中或還給, 而若留此疏, 則不可不罪其人, 寧燒此以去之。 承宣其以此, 付于史官, 使之燒于閤門外可也。 予亦知爲過擧矣。"
- 【태백산사고본】 19책 24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5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원본
영조 5년 (1729) 9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