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6월 29일 戊申 2/4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전 목천 현감 윤취은 등을 처벌하도록 하다
국역
사간(司諫) 강필경(姜必慶)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접때 호서(湖西)의 역란(逆亂)을 당하였을 때에 전 목천 현감(木川縣監) 윤취은(尹就殷)은 혹 직산(稷山)에 피하여 있었다고도 하고 공주(公州)에 가서 머물렀다고도 하나, 고을에 남아 있는 향소(鄕所)498) 에서 뜻대로 군사를 징발하여 방자하게 역적에게 화응(和應)하였는데, 그가 고을에 돌아와서는 간략하게 곤벌(棍罰)을 보였습니다. 향소는 이미 처형되었더라도 윤취은은 홀로 편안하니, 이는 나라에 법이 없는 것입니다. 역적 고응량(高應良)·김수종(金守宗)이 부안(扶安)에 살면서 읍내(邑內)의 여러 사람과 체결하여 함께 반란하고, 역적의 괴수 박필몽(朴弼夢)이 수십 인을 거느리고 무장(茂長)에서 바다에 건너 김수종의 집에 이르러 난만하게 모의한 자취를 숨기기 어려운데도 전 부안 현감(扶安縣監) 이문표(李文標)는 흐릿하여 몰랐습니다. 알고도 고하지 않았으면 또한 나라를 저버린 죄가 있을 것입니다. 악을 징계하는 도리로서 결코 버려두고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윤취은·이문표를 모두 나문(拿問)하여 엄히 핵사(覈査)하여 그 죄로 죄주소서. 목천의 향소에서 군사를 모을 때에 군사들이 다 모르고 와서 모였으나 출발할 즈음에 비로소 깨닫고는 뭇사람이 다 분노하여 말하기를, ‘우리를 시켜 역적을 친다면 옳겠으나, 어찌 차마 나라를 저버리고 역적에게 화응할 수 있겠는가?’ 하고 한꺼번에 흩어져 가고 하나도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충의(忠義)의 의기가 반신(叛臣)으로 하여금 부끄러워 죽게 할 만하였으니, 도신(道臣)을 시켜 그 맨 먼저 창의(唱義)한 자를 조사해 내어 쌀과 베를 넉넉히 주는 일은 권장하는 도리로서 결코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황익재(黃翼再)·권만(權萬)은 이미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으므로 곧 나국(拿鞫)하여 그 허실(虛實)을 상세히 살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번번이 영남(嶺南)이기 때문에 일체 버려두시고 대계(臺啓)도 아울러 윤허를 아끼시어, 여러 사람을 반신반의의 어두운 지경에 섞어 두어 천지 사이에 스스로 설 수 없게 하십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윤취은·이문표의 일과 창의한 사람에게 쌀과 베를 주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황익재·권만의 일은 이미 묻지 말게 하였는데 이제 어찌하여 다시 거론하는가?"
하였다.
- [註 498] 향소(鄕所) : 각 고을 수령의 자문 기관으로서 수령을 보좌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鄕吏)의 부정을 규찰하며 국가의 정령(政令)을 민간(民間)에 전달하고 민정(民情)을 대표하는 자치 기구. 임원에는 향정(鄕正) 또는 좌수(座首)한 사람과 별감(別監) 약간인을 두었음. 향청(鄕廳). 유향소(留鄕所).
원문
○司諫姜必慶上疏, 略曰:
頃當湖西逆亂之時, 木川前縣監尹就殷, 或云避在稷山, 或云往留公州, 而留官鄕所, 任意發兵, 肆然應賊, 及其還官, 略示棍罰。 鄕所雖已伏法, 就殷獨爲晏然, 則是國無法也。 逆賊應良、金守宗, 居在扶安, 締結邑內諸人, 相與叛亂, 逆魁弼夢率數十人, 自茂長越海到守宗家, 爛熳謀議, 蹤跡難掩, 而扶安前縣監李文標, 瞢然不知。 知而不告, 則罪不容誅, 不知而不告, 則又有負國之罪。 其在懲惡之道, 決不可置而勿問, 尹就殷、李文標, 幷宜拿問嚴覈, 以其罪罪之。 木川鄕所聚兵時, 兵皆不知而來會, 及其臨發, 始皆覺得, 衆皆憤怒曰: "以我繫賊則可, 豈忍背國而應賊乎?" 一時散去, 無一留者。 忠義之氣, 足令叛臣愧死, 宜使道臣査得其首先倡義者, 優給米布, 其在奬觀之道, 斷不可已也。 黃翼再、權萬, 旣出逆招, 宜卽拿鞫, 詳覈其虛實, 而殿下每以嶺南之故, 一切置之, 竝與臺啓而靳允, 使諸人, 混置於疑信黯黮之境, 不得自立於天地之間。 伏願速賜處分。
批曰: "尹就殷、李文標事, 及倡義人給米布事, 依施。 黃翼再、權萬事, 旣已勿問, 今何更擧?"
영조 4년 (1728) 6월 29일
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6월 29일 戊申 2/4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전 목천 현감 윤취은 등을 처벌하도록 하다
국역
사간(司諫) 강필경(姜必慶)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접때 호서(湖西)의 역란(逆亂)을 당하였을 때에 전 목천 현감(木川縣監) 윤취은(尹就殷)은 혹 직산(稷山)에 피하여 있었다고도 하고 공주(公州)에 가서 머물렀다고도 하나, 고을에 남아 있는 향소(鄕所)498) 에서 뜻대로 군사를 징발하여 방자하게 역적에게 화응(和應)하였는데, 그가 고을에 돌아와서는 간략하게 곤벌(棍罰)을 보였습니다. 향소는 이미 처형되었더라도 윤취은은 홀로 편안하니, 이는 나라에 법이 없는 것입니다. 역적 고응량(高應良)·김수종(金守宗)이 부안(扶安)에 살면서 읍내(邑內)의 여러 사람과 체결하여 함께 반란하고, 역적의 괴수 박필몽(朴弼夢)이 수십 인을 거느리고 무장(茂長)에서 바다에 건너 김수종의 집에 이르러 난만하게 모의한 자취를 숨기기 어려운데도 전 부안 현감(扶安縣監) 이문표(李文標)는 흐릿하여 몰랐습니다. 알고도 고하지 않았으면 또한 나라를 저버린 죄가 있을 것입니다. 악을 징계하는 도리로서 결코 버려두고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윤취은·이문표를 모두 나문(拿問)하여 엄히 핵사(覈査)하여 그 죄로 죄주소서. 목천의 향소에서 군사를 모을 때에 군사들이 다 모르고 와서 모였으나 출발할 즈음에 비로소 깨닫고는 뭇사람이 다 분노하여 말하기를, ‘우리를 시켜 역적을 친다면 옳겠으나, 어찌 차마 나라를 저버리고 역적에게 화응할 수 있겠는가?’ 하고 한꺼번에 흩어져 가고 하나도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충의(忠義)의 의기가 반신(叛臣)으로 하여금 부끄러워 죽게 할 만하였으니, 도신(道臣)을 시켜 그 맨 먼저 창의(唱義)한 자를 조사해 내어 쌀과 베를 넉넉히 주는 일은 권장하는 도리로서 결코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황익재(黃翼再)·권만(權萬)은 이미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으므로 곧 나국(拿鞫)하여 그 허실(虛實)을 상세히 살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번번이 영남(嶺南)이기 때문에 일체 버려두시고 대계(臺啓)도 아울러 윤허를 아끼시어, 여러 사람을 반신반의의 어두운 지경에 섞어 두어 천지 사이에 스스로 설 수 없게 하십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윤취은·이문표의 일과 창의한 사람에게 쌀과 베를 주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황익재·권만의 일은 이미 묻지 말게 하였는데 이제 어찌하여 다시 거론하는가?"
하였다.
- [註 498] 향소(鄕所) : 각 고을 수령의 자문 기관으로서 수령을 보좌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鄕吏)의 부정을 규찰하며 국가의 정령(政令)을 민간(民間)에 전달하고 민정(民情)을 대표하는 자치 기구. 임원에는 향정(鄕正) 또는 좌수(座首)한 사람과 별감(別監) 약간인을 두었음. 향청(鄕廳). 유향소(留鄕所).
원문
○司諫姜必慶上疏, 略曰:
頃當湖西逆亂之時, 木川前縣監尹就殷, 或云避在稷山, 或云往留公州, 而留官鄕所, 任意發兵, 肆然應賊, 及其還官, 略示棍罰。 鄕所雖已伏法, 就殷獨爲晏然, 則是國無法也。 逆賊應良、金守宗, 居在扶安, 締結邑內諸人, 相與叛亂, 逆魁弼夢率數十人, 自茂長越海到守宗家, 爛熳謀議, 蹤跡難掩, 而扶安前縣監李文標, 瞢然不知。 知而不告, 則罪不容誅, 不知而不告, 則又有負國之罪。 其在懲惡之道, 決不可置而勿問, 尹就殷、李文標, 幷宜拿問嚴覈, 以其罪罪之。 木川鄕所聚兵時, 兵皆不知而來會, 及其臨發, 始皆覺得, 衆皆憤怒曰: "以我繫賊則可, 豈忍背國而應賊乎?" 一時散去, 無一留者。 忠義之氣, 足令叛臣愧死, 宜使道臣査得其首先倡義者, 優給米布, 其在奬觀之道, 斷不可已也。 黃翼再、權萬, 旣出逆招, 宜卽拿鞫, 詳覈其虛實, 而殿下每以嶺南之故, 一切置之, 竝與臺啓而靳允, 使諸人, 混置於疑信黯黮之境, 不得自立於天地之間。 伏願速賜處分。
批曰: "尹就殷、李文標事, 及倡義人給米布事, 依施。 黃翼再、權萬事, 旣已勿問, 今何更擧?"
원본
영조 4년 (1728) 6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