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5월 16일 丙寅 2/9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민덕효 공초
국역
민덕효(閔德孝)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민덕효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안성(安城) 진중(陣中)에 갔다가 싸움에 패한 뒤에 용인(龍仁)으로 돌아가 복병(伏兵) 때문에 길이 막혀서 충주(忠州)로 돌아가지 못하였고, 신의 형은 흰 무명으로 군복(軍服) 30여 건을 만들고 화약(火藥) 대여섯 봉(封)에 각각 대여 섯 근을 담아서 안성(安城) 군진(軍陣)에 갔었는데, 용인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이 실패한 것은 천운(天運)이다. 그 적(賊)은 다 용렬하여 성세(聲勢)를 허장(虛張)할 뿐이고 관군(官軍)을 만나면 다 군기(軍器)가 없어서 패배하였다. 이는 다 이인좌(李麟佐)가 용렬하여 꾀가 없는 탓이다. 처음에는 이인좌가 대장(大將)이 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갔는데, 가서 보니 이인좌였다. 처음에 박필현(朴弼顯)으로 갈았더라면 이처럼 용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인좌는 단지 공명(功名)에 도취하여 스스로 하였을 뿐이고, 당초에 이사성(李思晟)을 대장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가 평병(平兵)446) 에 있으므로 미치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의 형은 군사가 패한 뒤에 서울에 들어가 역적질하려 하였으나, 복병(伏兵)이 파수(把守)하므로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경중(京中)에서 호응하는 자는 조동규(趙東奎)·조덕규(趙德奎)이었는데, 조덕규가 그때 도망하였으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상을 안 것은 사실입니다."
하니,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 [註 446] 평병(平兵) : 평안 병영(平安兵營).
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5월 16일 丙寅 2/9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민덕효 공초
국역
민덕효(閔德孝)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민덕효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안성(安城) 진중(陣中)에 갔다가 싸움에 패한 뒤에 용인(龍仁)으로 돌아가 복병(伏兵) 때문에 길이 막혀서 충주(忠州)로 돌아가지 못하였고, 신의 형은 흰 무명으로 군복(軍服) 30여 건을 만들고 화약(火藥) 대여섯 봉(封)에 각각 대여 섯 근을 담아서 안성(安城) 군진(軍陣)에 갔었는데, 용인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이 실패한 것은 천운(天運)이다. 그 적(賊)은 다 용렬하여 성세(聲勢)를 허장(虛張)할 뿐이고 관군(官軍)을 만나면 다 군기(軍器)가 없어서 패배하였다. 이는 다 이인좌(李麟佐)가 용렬하여 꾀가 없는 탓이다. 처음에는 이인좌가 대장(大將)이 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갔는데, 가서 보니 이인좌였다. 처음에 박필현(朴弼顯)으로 갈았더라면 이처럼 용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인좌는 단지 공명(功名)에 도취하여 스스로 하였을 뿐이고, 당초에 이사성(李思晟)을 대장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가 평병(平兵)446) 에 있으므로 미치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의 형은 군사가 패한 뒤에 서울에 들어가 역적질하려 하였으나, 복병(伏兵)이 파수(把守)하므로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경중(京中)에서 호응하는 자는 조동규(趙東奎)·조덕규(趙德奎)이었는데, 조덕규가 그때 도망하였으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상을 안 것은 사실입니다."
하니,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 [註 446] 평병(平兵) : 평안 병영(平安兵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