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5월 2일 壬子 2/10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박사수가 고 영남 감사 황선을 녹훈할 것을 청하다
국역
도승지(都承旨) 박사수(朴師洙)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삼가 듣건대, 간원(諫院)에서 아뢰어 고(故) 영남 감사(嶺南監司) 황선(黃璿)은 공이 있으므로 녹훈(錄勳)해야 한다고 논하였는데, 원훈 중신(元勳重臣)은 탑전(榻前)에서 ‘그가 분발하여 적을 치지 못하였다.’고 매우 배척하였다 합니다. 신도 새로 영외(嶺外)에서 왔습니다만, 어찌하여 중신이 본 바가 신이 들은 바와 다릅니까? 신이 듣건대, 이 적이 안음(安陰)에서 처음 일어난 것은 3월 20일이고 이정필(李廷弼)이 합천(陜川)을 버린 것은 26일이며 그 전 합천에서는 이미 군사를 모아 진을 쳤는데 그 모은 군사는 다 황선의 전령(傳令)에 따른 것이었으니, 중신이 이른바 수령(守令)이 망설이고 감히 군사를 모으지 못하였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여 나온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변이 일어난 뒤에 황선이 이시번(李時蕃)을 시켜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으나 이시번이 따르지 않았고, 이석복(李碩復)을 시켜 적을 치게 하였으나 이석복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보혁(李普赫)·정양빈(鄭暘賓)을 시켜 좌우에서 나아가 치게 하고, 박필건(朴弼健)을 시켜 북상하는 길을 굳게 지키게 하고, 한날(韓㻋)·김정상(金鼎相)을 시켜 길을 나누어 잇달아 원조하게 하고, 또 그 군관(軍官) 김진옥(金振玉)을 시켜 대구(大丘)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독전(督戰)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지휘하고 조치하는 것을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으니, 신은 참으로 그 공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 충성에 감동됩니다. 다만 황선은 관망(觀望)한 장수와 도망하여 숨은 수령을 감싸지 못하고 아뢰는 서장(書狀)에 여러 번 나타냈을 뿐인데, 이것이 또한 무슨 나라를 저버린 것이겠습니까? 공을 정하고 상을 주는 것은 예전부터 공평하기 어렵습니다. 단청(丹靑)402) ·대려(帶礪)403) 의 영화가 더구나 이미 죽은 뒤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마는, 신이 슬퍼하고 아까워하는 것은 공이 있는 자에게 보답하지 않고 따라서 뒤미처 허물하는 의논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중외(中外)를 획책(畫策)한 대신(大臣)도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도신(道臣)이 한때 지휘한 것을 어찌 논공(論功)까지 하겠는가?"
하였다.
- [註 402] 단청(丹靑) : 채색하여 그린 그림.
- [註 403] 대려(帶礪) : 임금이 공신(功臣)의 집안을 영구히 변치 않고 대접한다는 맹세의 말.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봉작(封爵)한 서사(書辭)에,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평지가 되도록 나라에서 영구 보존하리라.[使黃河如帶 泰山如礪 國以永存]’ 한 데에서 나온 말.
원문
○都承旨朴師洙上疏, 略曰:
臣伏聞諫院啓論, 嶺南故監司黃璿, 有功當錄, 而元勳重臣, 乃於榻前, 盛斥其不能奮發討賊云。 臣亦新從嶺外來, 何重臣之所見, 與臣所聞者異也? 臣聞此賊之始起安陰, 在於三月二十日, 而李廷弼之棄陜川, 在於二十六日, 其前陜川已聚軍結陣, 其所聚軍, 皆因璿之傳令, 則重臣所謂守令遲疑, 不敢聚軍者, 臣未知何所據而發也。 變起之後, 璿令李時蕃發兵, 而時蕃不應, 令李碩復討賊, 而碩復不前。 令李普赫、鄭暘賓, 左右進討, 令朴弼健, 拒守北上之路, 令韓㻋、金鼎相, 分路繼援, 又令其軍官金振玉, 率大丘兵, 前往督戰。 其所指揮措置, 至死不已, 臣實嘉其功而感其忠。 但璿不能庇護觀望之帥、逃匿之倅, 屢形於奏狀耳, 是又何負於國哉? 定功行賞, 從古難平。 丹靑、帶礪之榮, 尤何關於旣骨之後, 而臣所惋惜者, 有功者不報, 而又從以有追咎之議也。
批曰: "劃策中外之大臣, 亦不預焉, 道臣之一時指揮, 何至論功乎?"
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5월 2일 壬子 2/10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박사수가 고 영남 감사 황선을 녹훈할 것을 청하다
국역
도승지(都承旨) 박사수(朴師洙)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삼가 듣건대, 간원(諫院)에서 아뢰어 고(故) 영남 감사(嶺南監司) 황선(黃璿)은 공이 있으므로 녹훈(錄勳)해야 한다고 논하였는데, 원훈 중신(元勳重臣)은 탑전(榻前)에서 ‘그가 분발하여 적을 치지 못하였다.’고 매우 배척하였다 합니다. 신도 새로 영외(嶺外)에서 왔습니다만, 어찌하여 중신이 본 바가 신이 들은 바와 다릅니까? 신이 듣건대, 이 적이 안음(安陰)에서 처음 일어난 것은 3월 20일이고 이정필(李廷弼)이 합천(陜川)을 버린 것은 26일이며 그 전 합천에서는 이미 군사를 모아 진을 쳤는데 그 모은 군사는 다 황선의 전령(傳令)에 따른 것이었으니, 중신이 이른바 수령(守令)이 망설이고 감히 군사를 모으지 못하였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여 나온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변이 일어난 뒤에 황선이 이시번(李時蕃)을 시켜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으나 이시번이 따르지 않았고, 이석복(李碩復)을 시켜 적을 치게 하였으나 이석복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보혁(李普赫)·정양빈(鄭暘賓)을 시켜 좌우에서 나아가 치게 하고, 박필건(朴弼健)을 시켜 북상하는 길을 굳게 지키게 하고, 한날(韓㻋)·김정상(金鼎相)을 시켜 길을 나누어 잇달아 원조하게 하고, 또 그 군관(軍官) 김진옥(金振玉)을 시켜 대구(大丘)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독전(督戰)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지휘하고 조치하는 것을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으니, 신은 참으로 그 공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 충성에 감동됩니다. 다만 황선은 관망(觀望)한 장수와 도망하여 숨은 수령을 감싸지 못하고 아뢰는 서장(書狀)에 여러 번 나타냈을 뿐인데, 이것이 또한 무슨 나라를 저버린 것이겠습니까? 공을 정하고 상을 주는 것은 예전부터 공평하기 어렵습니다. 단청(丹靑)402) ·대려(帶礪)403) 의 영화가 더구나 이미 죽은 뒤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마는, 신이 슬퍼하고 아까워하는 것은 공이 있는 자에게 보답하지 않고 따라서 뒤미처 허물하는 의논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중외(中外)를 획책(畫策)한 대신(大臣)도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도신(道臣)이 한때 지휘한 것을 어찌 논공(論功)까지 하겠는가?"
하였다.
- [註 402] 단청(丹靑) : 채색하여 그린 그림.
- [註 403] 대려(帶礪) : 임금이 공신(功臣)의 집안을 영구히 변치 않고 대접한다는 맹세의 말.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봉작(封爵)한 서사(書辭)에,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평지가 되도록 나라에서 영구 보존하리라.[使黃河如帶 泰山如礪 國以永存]’ 한 데에서 나온 말.
원문
○都承旨朴師洙上疏, 略曰:
臣伏聞諫院啓論, 嶺南故監司黃璿, 有功當錄, 而元勳重臣, 乃於榻前, 盛斥其不能奮發討賊云。 臣亦新從嶺外來, 何重臣之所見, 與臣所聞者異也? 臣聞此賊之始起安陰, 在於三月二十日, 而李廷弼之棄陜川, 在於二十六日, 其前陜川已聚軍結陣, 其所聚軍, 皆因璿之傳令, 則重臣所謂守令遲疑, 不敢聚軍者, 臣未知何所據而發也。 變起之後, 璿令李時蕃發兵, 而時蕃不應, 令李碩復討賊, 而碩復不前。 令李普赫、鄭暘賓, 左右進討, 令朴弼健, 拒守北上之路, 令韓㻋、金鼎相, 分路繼援, 又令其軍官金振玉, 率大丘兵, 前往督戰。 其所指揮措置, 至死不已, 臣實嘉其功而感其忠。 但璿不能庇護觀望之帥、逃匿之倅, 屢形於奏狀耳, 是又何負於國哉? 定功行賞, 從古難平。 丹靑、帶礪之榮, 尤何關於旣骨之後, 而臣所惋惜者, 有功者不報, 而又從以有追咎之議也。
批曰: "劃策中外之大臣, 亦不預焉, 道臣之一時指揮, 何至論功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