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5월 1일 辛亥 4/6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인정문에서 친국하고 이사로와 임환을 대질시키다
국역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이사로(李師魯)·임환(任環)을 대질(對質)시켰다. 임환이 말하기를,
"내가 책을 빌리기 위하여 이유익(李有翼)의 집에 갔더니, 은영자(銀纓子)를 한 손님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이야기하다가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싫어하는 기색이 있으므로, 나는 책을 빌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니, 이사로가 말하기를,
"내가 이유익의 집에 갔더니, 네가 이유익의 상을 보고 ‘너는 화청안(火晴眼)·봉암미(鳳巖眉)이니 중정(中頂)이 낮지 않으면 일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 않았는가? 이유익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요망한 말을 하는가?’ 하지 않았는가? 이유익이 또 내 상을 가리켜 ‘과연 어떠한가?’ 하니, 네가 말하기를 ‘네 눈썹은 추미(箒眉)이니 골몰(汨沒)할 상이다.’ 하지 않았는가? 정시현(鄭始顯)의 아우 정태현(鄭泰顯)과 원만주(元萬周)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또한 너에게 상을 논하니, 네가 말하기를, ‘살벌(殺伐)한 기운이 많으니 반드시 이것을 벗고 나서야 좋아질 것이다.’ 하지 않았는가? 원만주가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군사를 모으므로 네 말이 그러한 것이다.’ 하였고, 이유익이 너를 평안 병사(平安兵使)에게 보내려 한다 하였는데 이하(李河)가 서얼(庶孽)은 깔보이기 쉬우므로 안 된다 하니, 이유익이 또 말하기를, ‘황부(黃溥)의 아들을 보낼 만하나 수원(水原)에 있는데 그 집을 모르므로 임환을 보내어 불러오려 한다.’ 하였다."
하였다. 임환이 말하기를,
"낯이 여위고 눈이 누런 자가 이유익의 집에 있었는데 나를 보면 싫어하지 않았는가?"
하니, 이사로가 말하기를,
"그때 은영자를 한 손은 어느 사람인지 잘 모르겠으나, 무릇 모여 앉았을 때에 네가 오면 이유익이 반드시 매우 기뻐하고 은밀히 말하였는데 꺼리려 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황부의 아들은 네가 어찌 천문(天文)·지리(地理)·검술(劍術)을 안다 하고는 데려오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임환이 말하기를,
"나는 황부의 아들을 모른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말이 막혀서 맞대면에서 꺾이나 장전(帳殿)에서 고할 일이 있다."
하니, 임금이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물러서게 하고 말하기를,
"이들은 우두머리이니 대신(大臣)과 금당(禁堂)385) 이 상세히 물으라."
하였다. 임환이 고하기를,
"이세우(李世遇)는 참으로 큰 역적입니다."
하였는데, 다시 임환을 추문(推問)하니, 임환이 공초(供招)하기를,
"신(臣)과 이유익은 서로 아는데, 이유익이 악역(惡逆)으로 신을 꾀었습니다. 그 사람됨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굳세고 사나우며 말을 하지 않으나,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 뜻에 맞는 사람이 있으면 진심을 털어놓는데, 남태징(南泰徵)과 이사주(李思周)가 내응(內應)한다고 늘 말하고는 했습니다. 대개 갑진년386) 부터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이 비로소 마음먹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유익의 집에 갔더니 이사로·이헌민(李獻民)도 모여 앉아 있었는데, 이유익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점 잘 보는 사람을 얻겠는가?’ 하니, 박필현이 말하기를, ‘영남(嶺南)에 소강절(邵康節)387) 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이윤사(李允師)이다.’ 하였습니다. 이유익이 사람을 보내려고 의논하다가 신이 눈살을 찡그리고 싫은 기색을 한 것은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여서입니다. 을사년388) 봄에 박필현과 이유익이 가산(家産)을 처분하고 삼남(三南)에 출몰하여 혹은 둑을 쌓는다고도 하고 혹은 집을 짓는다고도 하였습니다. 박필현은 상주(尙州)에 가서 한세홍(韓世弘)을 주인으로 삼았다가 괴산(槐山)으로 옮겨 가서 이인좌(李麟佐) 4형제와 결탁하였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이인좌가 장사(將士)이기는 하나 그 아우만 못하다.’ 하였으나, 박필현이 말하기를, ‘호남 병사(湖南兵使)는 이인좌가 맡도록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임징하(任徵夏)의 소(疏)가 나온 뒤에 박필현이 시골에서 달려와 낙중(洛中)389) 의 친구를 찾아 보고 말하기를, ‘이제 때가 바뀌었으나 임징하가 대행 대왕(大行大王)을 범하여 능멸하므로 인심이 요란해질 것이다.’ 하였는데, 그 뜻은 임징하를 죽이지 않으면 한 가지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미년390) 7월 1일에 일이 일어나고 8, 9월쯤에 박필현과 한세홍이 이유익의 집에 모여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론(老論)이 아직 있으면 일이 쉬울 것인데, 지금은 소론(少論)이 뜻밖에 다시 들어갔다. 비록 들어간 자는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이긴 하나 준절(峻切)한 소론에게는 희망이 있다. 무릇 인심이 조금 누그러져서 자못 영도(榮塗)에 들어가면 미운 마음도 많이 풀릴 것이니, 이제는 낙중의 우리들이 손을 거두고 관망해야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미년 겨울 석 달 동안은 그들이 다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무신년391) 정월에 한세홍과 양명하(梁命夏)가 이유익 등을 겁주어 말하기를, ‘삼남에서 처결한 자는 녹림(綠林)392) 의 무리이니, 지금은 편안히 앉아 있더라도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이가(李哥)에게 전하여 사흘 동안 치재(致齋)하고 분향(焚香)하고서 척점(擲占)393) 하게 하였더니 점사(占辭)에 ‘처음에는 3, 4월 사이에 반드시 막히고 실패하는 일이 있을 것이고 뒤에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동쪽에서 잃은 것을 서쪽에서 거둔다는 것입니다. 영남의 군사가 이른바 도원수(都元帥)·부원수(副元帥)는 누구누구라는 말은 그것이 귓속말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사자(士子) 1천여 인이 처음에 큰 절에서 모이고 다시 산속에서 모인 것은 대개 3월 13, 14일인데, ‘보름 이전에 호남 군사가 서방에 응하여 일어나고, 민관효(閔觀孝) 등의 이천(利川)·여주(驪州) 군사가 중간에서 일어나고, 성안이 소란하면 이유익·남태징이 이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을 소탕할 것이니, 일이 쉬울 것이다.’라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들이 상의할 때에 이유익이 번번이 눈살을 찡그리고 말하기를, ‘환국(換局)하지 않았으면 일이 석권(席卷)하듯이 쉬울 것인데, 긴요하지 않은 환국이 있었기 때문에 살육할 즈음에 죄 없는 자가 많이 억울하게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을 가리킨 것입니다. 3월 9일에 훈장(訓將)394) ·어장(御將)395) ·영상(領相) 집에 장사(壯士)를 몰래 들여보내어 죄다 막되 만약에 동요하면 쳐죽인다 하였으니, 이사로의 서찰의 말도 근거가 있습니다. 3월 3일에 한세홍과 민관효 등이 이유익의 집에 모였는데, 와서 모인 자 30여 인 중에는 혹 문 안에 말을 매어 둔 자도 있고 걸어서 간 자도 있었으며 이사로도 그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신이 마침 가서 그 이름을 물었더니, 이유익 등이 다 숨기고 혹 자(字)로 부르는데 윤관보(尹寬甫)가 곧 윤덕유(尹德裕)였습니다. 한세홍이 말하기를, ‘녹림 군사가 이제 태인현(泰仁縣)에 모였으므로 일이 장차 일어날 것이고, 양성(陽城) 군사도 모였으므로 중지할 수 없는 형세이니, 이 뜻을 평안 병사에게 알려서 빨리 군사를 일으키게 해야 하겠다.’ 하고, 한세홍(韓世弘)이 또 말하기를, ‘일은 이미 급해졌는데 평안 병사에게 알리면 왕래할 즈음에 고변하는 일이 있을 듯하다. 이뒤로는 모든 의논을 길가에다 집을 짓듯이 하지 말고, 밤에 잡아서 거사하면 일이 쉽고 편할 것이다. 서원수(西元帥)에게 알릴 것 없으니, 서로(西路)에 가는 것은 중지하는 것이 옳겠다.’ 하니, 그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말하기를, ‘무릇 일은 대장(大將)이 영을 낸 뒤이라면 변경하는 연유를 모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한세홍이 비를 무릅쓰고 서로로 달려갔습니다. 그뒤 7, 8일쯤에 양성에서 한 서찰이 왔는데, 이유익이 말하기를, ‘양성 적중(賊中)에서 온 서찰이 있는데, 지금 차례로 군사를 일으키니 낙중의 친구도 전에 약속한 것과 같이 빨리 주선하라 하였으니, 이 뜻도 평안 병사에게 알리려 한다.’ 하였습니다. 이럴 즈음에 군관(軍官) 안추(安樞)가 마침 왔으므로 이 기별을 알리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그들이 신이 상변(上變)할까 염려하여 한순(韓洵)의 집에 가두어 두었으므로, 신이 상변하려 하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해 8, 9월쯤에 한유(韓游)·이하(李河)·이사성(李思晟)이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과 청남(淸南)396) 을 죄다 죽이려는 모의를 하였다 합니다. 한세홍이 지난해 겨울에 평안 병영(平安兵營)에서 이사성의 말을 전해 왔는데, 그는 말하기를,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과 청남이 보합(保合)하여 어가(御駕)를 보호하고 팔로(八路)에서 군사를 징발하는데, 죄다 근왕(勤王)397) 하지는 않더라도 근왕하는 자도 반은 될 것인데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였으나, 이사성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여기서 군사를 일으켜 나가면 도성(都城)의 군사가 죄다 나갈 것이고 삼남(三南)의 남은 자도 적을 것이니, 한 번 쳐서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청남은 거론하지 않고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은 죄다 죽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대개 청남은 자연히 근본으로 돌아가고 노론의 완화책을 취하는 자와 소론의 완화책을 취하는 자도 앞으로 보답할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 [註 385] 금당(禁堂) :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
- [註 386] 갑진년 : 1724 경종 4년.
- [註 387] 소강절(邵康節) : 송대의 학자인 소옹(邵雍). 강절은 시호.
- [註 388]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389] 낙중(洛中) : 서울안.
- [註 390] 정미년 : 1727 영조 3년.
- [註 391]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392] 녹림(綠林) : 도둑.
- [註 393] 척점(擲占) : 쇠붙이의 돈을 던져서 그 드러나는 표리(表裏)를 따라 길흉을 점치는 일.
- [註 394] 훈장(訓將) : 훈련 대장(訓鍊大將).
- [註 395] 어장(御將) : 어영 대장(御營大將).
- [註 396] 청남(淸南) : 남인(南人)의 한 갈래.
- [註 397] 근왕(勤王) : 임금이나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함.
원문
○上御仁政門, 親鞫。 令李師魯、任環面質, 環曰: "吾爲借冊, 往有翼家, 則有銀纓子客在座, 有所說話, 見我之入, 有厭苦之色, 吾則不得借冊而還矣。" 師魯曰: "吾往有翼家, 則汝不相, 有翼曰: "汝火晴眼、鳳巖眉, 若中頂不陷, 則甚事不做。’ 云乎? 有翼不曰: ‘汝何爲妖妄之言?’ 云乎? 有翼又指吾相曰: ‘果如何?’ 汝不曰: ‘汝眉, 乃箒眉, 汨沒之相。’ 云乎? 鄭始顯之弟泰顯、元萬周在座, 亦向汝論相, 汝不曰: ‘多殺伐之氣, 須脫此而後爲好。’ 云乎? 萬周曰: ‘吾方聚兵, 故汝言如此。’ 云矣, 有翼云: ‘欲送汝, 於平兵。’ 而河以爲庶孽, 易見輕, 故下可云, 則有翼又云: ‘黃溥之子可送, 而在水原, 不知其家, 欲送任環招來。’ 云矣。" 環曰: "有面瘦眼黃者在有翼家, 而見我則不爲厭苦乎?" 師魯曰: "其時銀纓子客, 未詳何人, 而凡會坐時, 汝來則有翼必大喜密語, 豈有欲諱之事? 黃溥之子, 汝豈不以爲解天文、地理、劍術, 而仍爲率來乎?" 環曰: "吾不知黃溥之子。" 仍曰: "吾語屈, 屈於面質, 而有告於帳殿之事。" 上命侍衛諸臣退立曰: "此輩是窩主, 大臣、禁堂細問之。" 環告曰: "李世遇, 眞大賊也。" 更推環, 環供: "臣與有翼相知, 有翼以惡逆誘臣。 其爲人, 非飮酒則强悍不語, 飮好酒有合意人, 則畢罄肝膽, 每言泰徵、李思周爲內應。 蓋自甲辰年, 弼顯、有翼, 始生心臣。 嘗往有翼家, 則李師魯、李獻民, 會坐有翼云: ‘何以則得善占人?’ 弼顯曰: ‘嶺南有一邵康節, 其名李允師。’ 有翼議欲送人而見, 臣皺眉有厭色, 或慮言洩。 乙巳春, 弼顯與有翼擺脫家産, 出沒三南, 或稱築堰, 或稱作家。 弼顯往尙州, 以韓世弘爲主人, 轉到槐山, 結麟佐四兄弟, 渠等言: ‘麟佐雖是壯士, 不如其弟。’ 云, 弼顯曰: ‘湖兵當使麟佐主之。’ 任徵夏疏出後, 弼顯自鄕馳來, 尋見洛中親舊曰: ‘今時易然, 徵夏侵凌大行大王, 故人心應至擾亂。’ 其意以爲, 不殺徵夏則爲一助。 丁未七月初一日事出, 八九月間弼顯、世弘會有翼家, 大驚曰: ‘事不成矣。 老論若尙在, 事可易矣, 卽今少論, 意外復入。 入者雖緩少, 而峻少猶有希望。 凡人心少歇, 而頗入榮塗, 則惡心多解散, 今則洛中吾輩, 斂手觀望, 方可以免禍矣。’ 丁未三冬, 渠輩皆杜門斂跡。 戊申正月, 世弘、命夏恐動有翼輩云: ‘三南締結者, 是綠林之徒, 今則雖安坐, 不能免禍。’ 且傳李哥, 三日致齋, 焚香擲占, 則占辭以爲: ‘初頭三四月間, 必有沮敗之事, 後當更起。’ 此所謂失之東隅, 收之桑楡。 嶺兵所謂都元帥、副元帥某某之說, 以其附耳語, 故不聞其名。 士子千餘人, 初會于大刹, 再會于山中, 蓋在三月十三四矣, 約以望前, 湖兵應西而起, 觀孝輩利川、驪州軍, 從中而起, 城中騷亂, 則有翼、泰徵乘此時率軍掃蕩, 城中事可易矣。 渠輩相議之際, 有翼每蹙眉曰: ‘若不換局, 事易席卷, 而不緊換局之故, 殺戮之際, 無罪者必多枉死。’ 此則指緩少也。 三月初九日, 潛入壯士於訓將、御將、領相家, 盡爲遮攔, 若動搖則椎殺之云, 李師魯書札之說, 亦有據矣。 三月初三日, 世弘與觀孝輩, 會有翼家, 來會者三十餘人, 或繫馬於門內, 或有步往者, 師魯亦在其中。 臣適往問其名, 則有翼輩, 皆諱之, 或以字稱, 尹寬甫, 卽德裕也。 世弘云: ‘綠林兵, 今會于泰仁縣, 事將出矣, 陽城軍, 亦團聚, 勢未能中止, 此意當通平兵使, 速起兵。’ 世弘又曰: ‘事已急矣, 若通于平兵, 則往來之際, 似有告變之事。 自今以後, 諸議勿如路傍作舍, 卜夜擧事, 則事當輕便。 不必通于西元帥西路之行, 中止可也。’ 其中一人曰: ‘凡事大將出令後, 則更變之由, 不可使不知。’ 云, 故世弘冒雨馳往西路。 其後初七八日間, 陽城一札來到, 有翼言: ‘陽城賊中, 有來札, 卽今次次起兵, 洛中親舊, 如前約斯速周旋, 此意亦欲通於平兵。’ 如是之際, 軍官安樞適來到, 故使報此奇。 此際渠輩恐臣上變, 守置於韓洵家, 臣雖欲上變, 不可得矣。 聞上年八九月間, 韓游、李河、思晟, 有緩少、淸南盡殺之謀。 世弘, 前年冬, 自平安兵營, 來傅思晟言, 而以爲渠則曰: ‘緩少與淸南保合, 保護御駕, 徵兵八路, 雖未必盡爲勤王, 而勤王者, 亦必居半, 將奈何?’ 思晟曰: ‘不然。 吾雖老矣, 自此起兵而出, 則都兵盡出, 三南餘者必少, 一皷可定。 淸南不爲擧論, 緩少當盡殺。’ 云。 蓋淸南, 自然反本, 老論之緩者, 與少論之緩者, 亦將保合矣。"
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5월 1일 辛亥 4/6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인정문에서 친국하고 이사로와 임환을 대질시키다
국역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이사로(李師魯)·임환(任環)을 대질(對質)시켰다. 임환이 말하기를,
"내가 책을 빌리기 위하여 이유익(李有翼)의 집에 갔더니, 은영자(銀纓子)를 한 손님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이야기하다가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싫어하는 기색이 있으므로, 나는 책을 빌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니, 이사로가 말하기를,
"내가 이유익의 집에 갔더니, 네가 이유익의 상을 보고 ‘너는 화청안(火晴眼)·봉암미(鳳巖眉)이니 중정(中頂)이 낮지 않으면 일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 않았는가? 이유익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요망한 말을 하는가?’ 하지 않았는가? 이유익이 또 내 상을 가리켜 ‘과연 어떠한가?’ 하니, 네가 말하기를 ‘네 눈썹은 추미(箒眉)이니 골몰(汨沒)할 상이다.’ 하지 않았는가? 정시현(鄭始顯)의 아우 정태현(鄭泰顯)과 원만주(元萬周)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또한 너에게 상을 논하니, 네가 말하기를, ‘살벌(殺伐)한 기운이 많으니 반드시 이것을 벗고 나서야 좋아질 것이다.’ 하지 않았는가? 원만주가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군사를 모으므로 네 말이 그러한 것이다.’ 하였고, 이유익이 너를 평안 병사(平安兵使)에게 보내려 한다 하였는데 이하(李河)가 서얼(庶孽)은 깔보이기 쉬우므로 안 된다 하니, 이유익이 또 말하기를, ‘황부(黃溥)의 아들을 보낼 만하나 수원(水原)에 있는데 그 집을 모르므로 임환을 보내어 불러오려 한다.’ 하였다."
하였다. 임환이 말하기를,
"낯이 여위고 눈이 누런 자가 이유익의 집에 있었는데 나를 보면 싫어하지 않았는가?"
하니, 이사로가 말하기를,
"그때 은영자를 한 손은 어느 사람인지 잘 모르겠으나, 무릇 모여 앉았을 때에 네가 오면 이유익이 반드시 매우 기뻐하고 은밀히 말하였는데 꺼리려 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황부의 아들은 네가 어찌 천문(天文)·지리(地理)·검술(劍術)을 안다 하고는 데려오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임환이 말하기를,
"나는 황부의 아들을 모른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말이 막혀서 맞대면에서 꺾이나 장전(帳殿)에서 고할 일이 있다."
하니, 임금이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물러서게 하고 말하기를,
"이들은 우두머리이니 대신(大臣)과 금당(禁堂)385) 이 상세히 물으라."
하였다. 임환이 고하기를,
"이세우(李世遇)는 참으로 큰 역적입니다."
하였는데, 다시 임환을 추문(推問)하니, 임환이 공초(供招)하기를,
"신(臣)과 이유익은 서로 아는데, 이유익이 악역(惡逆)으로 신을 꾀었습니다. 그 사람됨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굳세고 사나우며 말을 하지 않으나,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 뜻에 맞는 사람이 있으면 진심을 털어놓는데, 남태징(南泰徵)과 이사주(李思周)가 내응(內應)한다고 늘 말하고는 했습니다. 대개 갑진년386) 부터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이 비로소 마음먹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유익의 집에 갔더니 이사로·이헌민(李獻民)도 모여 앉아 있었는데, 이유익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점 잘 보는 사람을 얻겠는가?’ 하니, 박필현이 말하기를, ‘영남(嶺南)에 소강절(邵康節)387) 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이윤사(李允師)이다.’ 하였습니다. 이유익이 사람을 보내려고 의논하다가 신이 눈살을 찡그리고 싫은 기색을 한 것은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여서입니다. 을사년388) 봄에 박필현과 이유익이 가산(家産)을 처분하고 삼남(三南)에 출몰하여 혹은 둑을 쌓는다고도 하고 혹은 집을 짓는다고도 하였습니다. 박필현은 상주(尙州)에 가서 한세홍(韓世弘)을 주인으로 삼았다가 괴산(槐山)으로 옮겨 가서 이인좌(李麟佐) 4형제와 결탁하였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이인좌가 장사(將士)이기는 하나 그 아우만 못하다.’ 하였으나, 박필현이 말하기를, ‘호남 병사(湖南兵使)는 이인좌가 맡도록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임징하(任徵夏)의 소(疏)가 나온 뒤에 박필현이 시골에서 달려와 낙중(洛中)389) 의 친구를 찾아 보고 말하기를, ‘이제 때가 바뀌었으나 임징하가 대행 대왕(大行大王)을 범하여 능멸하므로 인심이 요란해질 것이다.’ 하였는데, 그 뜻은 임징하를 죽이지 않으면 한 가지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미년390) 7월 1일에 일이 일어나고 8, 9월쯤에 박필현과 한세홍이 이유익의 집에 모여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론(老論)이 아직 있으면 일이 쉬울 것인데, 지금은 소론(少論)이 뜻밖에 다시 들어갔다. 비록 들어간 자는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이긴 하나 준절(峻切)한 소론에게는 희망이 있다. 무릇 인심이 조금 누그러져서 자못 영도(榮塗)에 들어가면 미운 마음도 많이 풀릴 것이니, 이제는 낙중의 우리들이 손을 거두고 관망해야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미년 겨울 석 달 동안은 그들이 다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무신년391) 정월에 한세홍과 양명하(梁命夏)가 이유익 등을 겁주어 말하기를, ‘삼남에서 처결한 자는 녹림(綠林)392) 의 무리이니, 지금은 편안히 앉아 있더라도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이가(李哥)에게 전하여 사흘 동안 치재(致齋)하고 분향(焚香)하고서 척점(擲占)393) 하게 하였더니 점사(占辭)에 ‘처음에는 3, 4월 사이에 반드시 막히고 실패하는 일이 있을 것이고 뒤에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동쪽에서 잃은 것을 서쪽에서 거둔다는 것입니다. 영남의 군사가 이른바 도원수(都元帥)·부원수(副元帥)는 누구누구라는 말은 그것이 귓속말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사자(士子) 1천여 인이 처음에 큰 절에서 모이고 다시 산속에서 모인 것은 대개 3월 13, 14일인데, ‘보름 이전에 호남 군사가 서방에 응하여 일어나고, 민관효(閔觀孝) 등의 이천(利川)·여주(驪州) 군사가 중간에서 일어나고, 성안이 소란하면 이유익·남태징이 이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을 소탕할 것이니, 일이 쉬울 것이다.’라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들이 상의할 때에 이유익이 번번이 눈살을 찡그리고 말하기를, ‘환국(換局)하지 않았으면 일이 석권(席卷)하듯이 쉬울 것인데, 긴요하지 않은 환국이 있었기 때문에 살육할 즈음에 죄 없는 자가 많이 억울하게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을 가리킨 것입니다. 3월 9일에 훈장(訓將)394) ·어장(御將)395) ·영상(領相) 집에 장사(壯士)를 몰래 들여보내어 죄다 막되 만약에 동요하면 쳐죽인다 하였으니, 이사로의 서찰의 말도 근거가 있습니다. 3월 3일에 한세홍과 민관효 등이 이유익의 집에 모였는데, 와서 모인 자 30여 인 중에는 혹 문 안에 말을 매어 둔 자도 있고 걸어서 간 자도 있었으며 이사로도 그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신이 마침 가서 그 이름을 물었더니, 이유익 등이 다 숨기고 혹 자(字)로 부르는데 윤관보(尹寬甫)가 곧 윤덕유(尹德裕)였습니다. 한세홍이 말하기를, ‘녹림 군사가 이제 태인현(泰仁縣)에 모였으므로 일이 장차 일어날 것이고, 양성(陽城) 군사도 모였으므로 중지할 수 없는 형세이니, 이 뜻을 평안 병사에게 알려서 빨리 군사를 일으키게 해야 하겠다.’ 하고, 한세홍(韓世弘)이 또 말하기를, ‘일은 이미 급해졌는데 평안 병사에게 알리면 왕래할 즈음에 고변하는 일이 있을 듯하다. 이뒤로는 모든 의논을 길가에다 집을 짓듯이 하지 말고, 밤에 잡아서 거사하면 일이 쉽고 편할 것이다. 서원수(西元帥)에게 알릴 것 없으니, 서로(西路)에 가는 것은 중지하는 것이 옳겠다.’ 하니, 그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말하기를, ‘무릇 일은 대장(大將)이 영을 낸 뒤이라면 변경하는 연유를 모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한세홍이 비를 무릅쓰고 서로로 달려갔습니다. 그뒤 7, 8일쯤에 양성에서 한 서찰이 왔는데, 이유익이 말하기를, ‘양성 적중(賊中)에서 온 서찰이 있는데, 지금 차례로 군사를 일으키니 낙중의 친구도 전에 약속한 것과 같이 빨리 주선하라 하였으니, 이 뜻도 평안 병사에게 알리려 한다.’ 하였습니다. 이럴 즈음에 군관(軍官) 안추(安樞)가 마침 왔으므로 이 기별을 알리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그들이 신이 상변(上變)할까 염려하여 한순(韓洵)의 집에 가두어 두었으므로, 신이 상변하려 하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해 8, 9월쯤에 한유(韓游)·이하(李河)·이사성(李思晟)이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과 청남(淸南)396) 을 죄다 죽이려는 모의를 하였다 합니다. 한세홍이 지난해 겨울에 평안 병영(平安兵營)에서 이사성의 말을 전해 왔는데, 그는 말하기를,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과 청남이 보합(保合)하여 어가(御駕)를 보호하고 팔로(八路)에서 군사를 징발하는데, 죄다 근왕(勤王)397) 하지는 않더라도 근왕하는 자도 반은 될 것인데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였으나, 이사성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여기서 군사를 일으켜 나가면 도성(都城)의 군사가 죄다 나갈 것이고 삼남(三南)의 남은 자도 적을 것이니, 한 번 쳐서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청남은 거론하지 않고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은 죄다 죽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대개 청남은 자연히 근본으로 돌아가고 노론의 완화책을 취하는 자와 소론의 완화책을 취하는 자도 앞으로 보답할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 [註 385] 금당(禁堂) :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
- [註 386] 갑진년 : 1724 경종 4년.
- [註 387] 소강절(邵康節) : 송대의 학자인 소옹(邵雍). 강절은 시호.
- [註 388]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389] 낙중(洛中) : 서울안.
- [註 390] 정미년 : 1727 영조 3년.
- [註 391]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392] 녹림(綠林) : 도둑.
- [註 393] 척점(擲占) : 쇠붙이의 돈을 던져서 그 드러나는 표리(表裏)를 따라 길흉을 점치는 일.
- [註 394] 훈장(訓將) : 훈련 대장(訓鍊大將).
- [註 395] 어장(御將) : 어영 대장(御營大將).
- [註 396] 청남(淸南) : 남인(南人)의 한 갈래.
- [註 397] 근왕(勤王) : 임금이나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함.
원문
○上御仁政門, 親鞫。 令李師魯、任環面質, 環曰: "吾爲借冊, 往有翼家, 則有銀纓子客在座, 有所說話, 見我之入, 有厭苦之色, 吾則不得借冊而還矣。" 師魯曰: "吾往有翼家, 則汝不相, 有翼曰: "汝火晴眼、鳳巖眉, 若中頂不陷, 則甚事不做。’ 云乎? 有翼不曰: ‘汝何爲妖妄之言?’ 云乎? 有翼又指吾相曰: ‘果如何?’ 汝不曰: ‘汝眉, 乃箒眉, 汨沒之相。’ 云乎? 鄭始顯之弟泰顯、元萬周在座, 亦向汝論相, 汝不曰: ‘多殺伐之氣, 須脫此而後爲好。’ 云乎? 萬周曰: ‘吾方聚兵, 故汝言如此。’ 云矣, 有翼云: ‘欲送汝, 於平兵。’ 而河以爲庶孽, 易見輕, 故下可云, 則有翼又云: ‘黃溥之子可送, 而在水原, 不知其家, 欲送任環招來。’ 云矣。" 環曰: "有面瘦眼黃者在有翼家, 而見我則不爲厭苦乎?" 師魯曰: "其時銀纓子客, 未詳何人, 而凡會坐時, 汝來則有翼必大喜密語, 豈有欲諱之事? 黃溥之子, 汝豈不以爲解天文、地理、劍術, 而仍爲率來乎?" 環曰: "吾不知黃溥之子。" 仍曰: "吾語屈, 屈於面質, 而有告於帳殿之事。" 上命侍衛諸臣退立曰: "此輩是窩主, 大臣、禁堂細問之。" 環告曰: "李世遇, 眞大賊也。" 更推環, 環供: "臣與有翼相知, 有翼以惡逆誘臣。 其爲人, 非飮酒則强悍不語, 飮好酒有合意人, 則畢罄肝膽, 每言泰徵、李思周爲內應。 蓋自甲辰年, 弼顯、有翼, 始生心臣。 嘗往有翼家, 則李師魯、李獻民, 會坐有翼云: ‘何以則得善占人?’ 弼顯曰: ‘嶺南有一邵康節, 其名李允師。’ 有翼議欲送人而見, 臣皺眉有厭色, 或慮言洩。 乙巳春, 弼顯與有翼擺脫家産, 出沒三南, 或稱築堰, 或稱作家。 弼顯往尙州, 以韓世弘爲主人, 轉到槐山, 結麟佐四兄弟, 渠等言: ‘麟佐雖是壯士, 不如其弟。’ 云, 弼顯曰: ‘湖兵當使麟佐主之。’ 任徵夏疏出後, 弼顯自鄕馳來, 尋見洛中親舊曰: ‘今時易然, 徵夏侵凌大行大王, 故人心應至擾亂。’ 其意以爲, 不殺徵夏則爲一助。 丁未七月初一日事出, 八九月間弼顯、世弘會有翼家, 大驚曰: ‘事不成矣。 老論若尙在, 事可易矣, 卽今少論, 意外復入。 入者雖緩少, 而峻少猶有希望。 凡人心少歇, 而頗入榮塗, 則惡心多解散, 今則洛中吾輩, 斂手觀望, 方可以免禍矣。’ 丁未三冬, 渠輩皆杜門斂跡。 戊申正月, 世弘、命夏恐動有翼輩云: ‘三南締結者, 是綠林之徒, 今則雖安坐, 不能免禍。’ 且傳李哥, 三日致齋, 焚香擲占, 則占辭以爲: ‘初頭三四月間, 必有沮敗之事, 後當更起。’ 此所謂失之東隅, 收之桑楡。 嶺兵所謂都元帥、副元帥某某之說, 以其附耳語, 故不聞其名。 士子千餘人, 初會于大刹, 再會于山中, 蓋在三月十三四矣, 約以望前, 湖兵應西而起, 觀孝輩利川、驪州軍, 從中而起, 城中騷亂, 則有翼、泰徵乘此時率軍掃蕩, 城中事可易矣。 渠輩相議之際, 有翼每蹙眉曰: ‘若不換局, 事易席卷, 而不緊換局之故, 殺戮之際, 無罪者必多枉死。’ 此則指緩少也。 三月初九日, 潛入壯士於訓將、御將、領相家, 盡爲遮攔, 若動搖則椎殺之云, 李師魯書札之說, 亦有據矣。 三月初三日, 世弘與觀孝輩, 會有翼家, 來會者三十餘人, 或繫馬於門內, 或有步往者, 師魯亦在其中。 臣適往問其名, 則有翼輩, 皆諱之, 或以字稱, 尹寬甫, 卽德裕也。 世弘云: ‘綠林兵, 今會于泰仁縣, 事將出矣, 陽城軍, 亦團聚, 勢未能中止, 此意當通平兵使, 速起兵。’ 世弘又曰: ‘事已急矣, 若通于平兵, 則往來之際, 似有告變之事。 自今以後, 諸議勿如路傍作舍, 卜夜擧事, 則事當輕便。 不必通于西元帥西路之行, 中止可也。’ 其中一人曰: ‘凡事大將出令後, 則更變之由, 不可使不知。’ 云, 故世弘冒雨馳往西路。 其後初七八日間, 陽城一札來到, 有翼言: ‘陽城賊中, 有來札, 卽今次次起兵, 洛中親舊, 如前約斯速周旋, 此意亦欲通於平兵。’ 如是之際, 軍官安樞適來到, 故使報此奇。 此際渠輩恐臣上變, 守置於韓洵家, 臣雖欲上變, 不可得矣。 聞上年八九月間, 韓游、李河、思晟, 有緩少、淸南盡殺之謀。 世弘, 前年冬, 自平安兵營, 來傅思晟言, 而以爲渠則曰: ‘緩少與淸南保合, 保護御駕, 徵兵八路, 雖未必盡爲勤王, 而勤王者, 亦必居半, 將奈何?’ 思晟曰: ‘不然。 吾雖老矣, 自此起兵而出, 則都兵盡出, 三南餘者必少, 一皷可定。 淸南不爲擧論, 緩少當盡殺。’ 云。 蓋淸南, 自然反本, 老論之緩者, 與少論之緩者, 亦將保合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