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17권, 영조 4년 4월 14일 甲午 12/12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박사관 공초
국역
박사관(朴師寬)에게 신문하였으니, 박사관은 박필몽(朴弼夢)의 맏아들이다. 두차례 형벌하니, 박사관이 공초하기를,
"무장(茂長)으로 가는 길에 태인(泰仁)에 들렸더니, 관아(官衙)의 문에 결진(結陣)하고 있었습니다. 박필현(朴弼顯)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감영(監營)에서 급한 관문(關文)이 방금 이르러 군병을 올려보내라고 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모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내가 전주(全州)에서 오는데, 급한 관문으로 군사를 올려보내라는 일을 듣지 못하였다. 어찌 급한 관문이 있다고 말하는가?’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네가 어찌 알겠는가? 우선 무장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머무르라.’고 하면서 신을 만류했습니다. 박필현이 군사를 거느려 나오고 이어 내행(內行)318) 을 거느렸는데, 박필현이 말하기를, ‘전주(全州)로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금구(金溝)의 길로 가지 않고 귀산(龜山)의 소로(小路)를 따라 갔으므로, 신은 그제야 몸을 피하여 도망하였습니다. 신의 아비는 무장에 있었고 신은 전주에 있었으므로, 전주에서 무장까지의 거리가 2백 리이니, 전주에서 태인(泰仁)으로 간 것은 신의 아비가 보낸 것이 아닙니다. 이하(李河)는 다른 사람 집에서 한번 만나 보았을 뿐입니다. 청주(淸州)의 변란이 발생하기 전에 박필현이 신에게 ‘오래지 않아 호서(湖西)에 마땅히 변란이 있을 것이다.’고 하고, 또 ‘경기(京畿) 사람이 충청도(忠淸道)에서 일어나 장차 청주를 칠 것인데, 청주에서 변란이 이미 발생한다면 대구(大丘)와 안동(安東)에서 반드시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19일에 신이 청주에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길에서 듣고 태인으로 들어갔는데, 박필현이 ‘내 말이 어떠한가? 비단 호서(湖西)뿐만이 아니라, 영남(嶺南)의 변보(變報)도 또한 장차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기에, 신이 ‘우리집이 세상의 그물에 걸리어 3년 동안이나 변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찌 이런 말을 하나?’라고 하였으니, 신이 어찌 박필현과 이하의 반역을 도모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박필현과 이하는 ‘너는 죄화(罪禍)를 입은 집 사람이니 들어오기를 권할 필요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박필현이 신에게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는 곧 너의 지친(至親)이다.’라고 하였으니, 정사효는 신의 어미와 4촌이 되기 때문에 지친이라고 한 것이며, 그가 태인에 와서 정사효로 하여금 그 반역을 도모하는 일을 알게 하려고 하여 신으로 하여금 가서 전하게 하였으나 정사효는 매우 정밀(精密)한 사람이니 어찌 감히 이 말을 꺼냈겠습니까? 맨 먼저 반역을 도모하는 의논을 꺼낸 것은 곧 이하입니다. 이하는 주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이미 흉계(凶計)를 냈으니, 밀풍군(密豐君)과 집을 연이어 살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이 계책을 낸 것이며, 김일경(金一鏡)의 외손(外孫)이 이하의 사위가 되는데, 김일경이 주상을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말을 수없이 하였기 때문에 이하가 이 계획을 한 것입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4면
- [註 318] 내행(內行) : 부인의 여행.
원문
○問朴師寬, 師寬, 弼夢之長子也。 刑二次, 師寬供: "茂長去路, 歷入泰仁, 則結陣官門。 問于弼顯, 答以監營急關纔到, 使之上送軍兵, 故聚軍矣。 臣曰: ‘吾自全州來, 未聞急關, 上兵之事。 何謂有急關?’ 答曰: ‘汝何以知之? 姑勿往茂長, 留此所。’ 挽留臣。 弼顯率軍出, 仍率內行, 弼顯曰: ‘同往全州可也。’ 不由金溝路, 從龜山小路以往, 臣於是逃躱。 臣父在茂長, 臣在全州, 自全州距茂長二百里, 從全州往泰仁, 非臣父之所遣。 李河, 他人家一面而已。 淸州變出之前, 弼顯謂臣曰: ‘非久湖西當有變。’ 云, 又曰: ‘京畿人起於忠淸道, 將攻淸州, 淸州之變已出, 大丘、安東, 想必同起矣。’ 十九日, 臣聞淸州變報於路上, 入去泰仁, 則弼顯曰: ‘吾言何如? 不特湖西、嶺南變報亦將至矣。’ 臣曰: ‘吾家罹世網, 三年待變, 何爲此言?’ 臣豈不知弼顯、河謀逆之事耶? 弼顯、河以爲: ‘臣則禍家人, 不必勸入也。’ 弼顯謂臣曰: ‘全羅監司鄭思孝, 卽汝至親。’ 思孝與臣母爲四寸, 故謂之至親, 渠來泰仁, 欲使思孝, 聞其謀逆之事, 使臣往傳之, 而思孝甚精之人, 豈敢發此言耶? 首發謀逆之議, 卽河也。 河自上卽位之初, 已生凶計, 與密豐君連家, 因此而生此計, 一鏡之外孫, 爲河之壻, 一鏡誣上不道之言, 無數爲之, 故河爲此謀。 謀逆是實。" 處斬, 孥籍如法。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4면
영조실록17권, 영조 4년 4월 14일 甲午 12/12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박사관 공초
국역
박사관(朴師寬)에게 신문하였으니, 박사관은 박필몽(朴弼夢)의 맏아들이다. 두차례 형벌하니, 박사관이 공초하기를,
"무장(茂長)으로 가는 길에 태인(泰仁)에 들렸더니, 관아(官衙)의 문에 결진(結陣)하고 있었습니다. 박필현(朴弼顯)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감영(監營)에서 급한 관문(關文)이 방금 이르러 군병을 올려보내라고 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모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내가 전주(全州)에서 오는데, 급한 관문으로 군사를 올려보내라는 일을 듣지 못하였다. 어찌 급한 관문이 있다고 말하는가?’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네가 어찌 알겠는가? 우선 무장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머무르라.’고 하면서 신을 만류했습니다. 박필현이 군사를 거느려 나오고 이어 내행(內行)318) 을 거느렸는데, 박필현이 말하기를, ‘전주(全州)로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금구(金溝)의 길로 가지 않고 귀산(龜山)의 소로(小路)를 따라 갔으므로, 신은 그제야 몸을 피하여 도망하였습니다. 신의 아비는 무장에 있었고 신은 전주에 있었으므로, 전주에서 무장까지의 거리가 2백 리이니, 전주에서 태인(泰仁)으로 간 것은 신의 아비가 보낸 것이 아닙니다. 이하(李河)는 다른 사람 집에서 한번 만나 보았을 뿐입니다. 청주(淸州)의 변란이 발생하기 전에 박필현이 신에게 ‘오래지 않아 호서(湖西)에 마땅히 변란이 있을 것이다.’고 하고, 또 ‘경기(京畿) 사람이 충청도(忠淸道)에서 일어나 장차 청주를 칠 것인데, 청주에서 변란이 이미 발생한다면 대구(大丘)와 안동(安東)에서 반드시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19일에 신이 청주에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길에서 듣고 태인으로 들어갔는데, 박필현이 ‘내 말이 어떠한가? 비단 호서(湖西)뿐만이 아니라, 영남(嶺南)의 변보(變報)도 또한 장차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기에, 신이 ‘우리집이 세상의 그물에 걸리어 3년 동안이나 변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찌 이런 말을 하나?’라고 하였으니, 신이 어찌 박필현과 이하의 반역을 도모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박필현과 이하는 ‘너는 죄화(罪禍)를 입은 집 사람이니 들어오기를 권할 필요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박필현이 신에게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는 곧 너의 지친(至親)이다.’라고 하였으니, 정사효는 신의 어미와 4촌이 되기 때문에 지친이라고 한 것이며, 그가 태인에 와서 정사효로 하여금 그 반역을 도모하는 일을 알게 하려고 하여 신으로 하여금 가서 전하게 하였으나 정사효는 매우 정밀(精密)한 사람이니 어찌 감히 이 말을 꺼냈겠습니까? 맨 먼저 반역을 도모하는 의논을 꺼낸 것은 곧 이하입니다. 이하는 주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이미 흉계(凶計)를 냈으니, 밀풍군(密豐君)과 집을 연이어 살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이 계책을 낸 것이며, 김일경(金一鏡)의 외손(外孫)이 이하의 사위가 되는데, 김일경이 주상을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말을 수없이 하였기 때문에 이하가 이 계획을 한 것입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4면
- [註 318] 내행(內行) : 부인의 여행.
원문
○問朴師寬, 師寬, 弼夢之長子也。 刑二次, 師寬供: "茂長去路, 歷入泰仁, 則結陣官門。 問于弼顯, 答以監營急關纔到, 使之上送軍兵, 故聚軍矣。 臣曰: ‘吾自全州來, 未聞急關, 上兵之事。 何謂有急關?’ 答曰: ‘汝何以知之? 姑勿往茂長, 留此所。’ 挽留臣。 弼顯率軍出, 仍率內行, 弼顯曰: ‘同往全州可也。’ 不由金溝路, 從龜山小路以往, 臣於是逃躱。 臣父在茂長, 臣在全州, 自全州距茂長二百里, 從全州往泰仁, 非臣父之所遣。 李河, 他人家一面而已。 淸州變出之前, 弼顯謂臣曰: ‘非久湖西當有變。’ 云, 又曰: ‘京畿人起於忠淸道, 將攻淸州, 淸州之變已出, 大丘、安東, 想必同起矣。’ 十九日, 臣聞淸州變報於路上, 入去泰仁, 則弼顯曰: ‘吾言何如? 不特湖西、嶺南變報亦將至矣。’ 臣曰: ‘吾家罹世網, 三年待變, 何爲此言?’ 臣豈不知弼顯、河謀逆之事耶? 弼顯、河以爲: ‘臣則禍家人, 不必勸入也。’ 弼顯謂臣曰: ‘全羅監司鄭思孝, 卽汝至親。’ 思孝與臣母爲四寸, 故謂之至親, 渠來泰仁, 欲使思孝, 聞其謀逆之事, 使臣往傳之, 而思孝甚精之人, 豈敢發此言耶? 首發謀逆之議, 卽河也。 河自上卽位之初, 已生凶計, 與密豐君連家, 因此而生此計, 一鏡之外孫, 爲河之壻, 一鏡誣上不道之言, 無數爲之, 故河爲此謀。 謀逆是實。" 處斬, 孥籍如法。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