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17권, 영조 4년 4월 14일 甲午 9/12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안엽 공초
국역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친국(親鞫)하였다. 안엽(安燁)을 두 차례 형벌하니, 안엽이 공초하기를,
"신이 평안 병영(平安兵營)으로 갈 때, 정세윤(鄭世胤)이 ‘평안 병사를 보고 반역을 도모하는 일을 말하여 은(銀) 수백 냥을 얻는다면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하고, 신으로 하여금 이사성(李思晟)에게 부탁하기를, ‘세상이 어지럽기 이와 같으니 녹림(綠林)313) 의 군사를 모아 아무 곳으로 가서 일을 일으키려 한다. 정세윤이 화적(火賊)의 무리를 거두어 모았던 것이 이미 여러 해 되었으며 그가 매양 병서(兵書)를 안다고 칭찬하면서 임인년314) ·계묘년315) 이래로 이미 이 말이 있었는데, 갑진년316) 에 이 계획이 크게 전파되더니, 근래에 비로소 원백주(元百周)·이호(李昈)·최경우(崔擎宇)·정세윤의 아우 정계윤(鄭季胤) 등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녹림병(綠林兵) 몇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필경 거의 6, 7백 명에 이르렀으므로, 삼남(三南) 중에서 그 웅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웅거하려고 했는데, 전라도(全羅道)에서는 정세윤이 주장하여서 나숭대(羅崇大)가 녹림병 수백 명을 모아 이에 응(應)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갑진년 3월에 신이 가서 정세윤을 보고 적변(賊變)을 물었더니,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끝에 가서 이호가 신에게 자세히 말하기를, ‘처음에는 초구(草寇)317) 의 계책을 하였으나 도당(徒黨)이 이미 많아졌고 얻은 바도 또한 많아졌으므로, 비로소 반역을 도모할 마음을 일으켰다.’고 하였습니다. 가서 나숭대를 만났더니 호남에 웅거할 계책을 한다고 하였으며, 정세윤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신에게 다시 이사성과 의논하기를 요구하기에, 장차 평안 병영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적변(賊變)이 이미 일어났음을 듣고는 가는 것이 무익하였기 때문에 이내 원주(原州)로 옮겨 피하였습니다. 평안 병영에서 수작(酬酌)한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세윤이 이사성에게 ‘내가 군사 5, 6백 명이 있고 최경우도 또한 5, 6백 명이 있으니, 반드시 은화(銀貨)를 얻는다면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이사성이 ‘은화는 이 뒤에 마땅히 보내 주겠으며, 4, 5월에 벼슬이 갈려 돌아간다면 내응(內應)할 수 있다.’고 하고, 또 ‘나의 팔자(八字)를 본다면 4월 무렵에 서울로 올라갈 운수(運數)가 있으니, 훈련 대장(訓鍊大將)은 비록 쉽지 않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군문(軍門)의 대장이 된다면 도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서로 응할 수 있을 것이다. 도적이 일어난다면 나라에서 반드시 마땅히 나를 시켜 이를 치게 할 것이니, 안에서 응할 수 있고, 남태징(南泰徵)도 또한 나와 모의(謀議)를 같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평상시에 이사성을 기이(奇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일마다 이사성의 말이면 따랐습니다. 이사성이 정세윤에게 ‘군병을 많이 얻을 필요는 없다. 만약 적변(賊變)을 듣는다면 나라에서 반드시 나를 시켜 군사를 거느려 치게 할 것이니, 이때를 타서 군사를 합친다면 쉽사리 원조가 될 수 있다.’고 하고, 또 ‘4월에 만약 벼슬이 갈리지 않는다면 어찌 대각(臺閣) 안의 한 사람을 얻지 못하겠는가? 탄핵하는 글을 만들어 내가 써 보낼 것이니, 만약 탄핵으로 벼슬이 갈리게 된다면 서울로 올라가서 정세윤과 화응(和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다른 계책이 없었으므로 혹은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상종(相從)하였는데, 이사성이 천문(天文)·지리(地理)에 통달하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믿고서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4면
- [註 313] 녹림(綠林) : 후한(後漢) 말기의 왕망(王莽) 때 왕광(王匡)·왕봉(王鳳) 등이 백성을 모아 녹림산(綠林山)을 근거지로 하여 도둑질하며 관군(官軍)에 대항하였던 것을 말함.
- [註 314]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315] 계묘년 : 1723 경종 3년.
- [註 316]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 [註 317] 초구(草寇) : 좀도둑.
원문
○上御仁政門, 親鞫。 刑安熀二次, 熀供: "臣往平安兵營時, 鄭世胤以爲: ‘見平兵言謀逆事, 要得銀數百兩, 可以成事。’ 使臣囑思晟曰: ‘世亂如此, 聚綠林兵, 往某處作事。 世胤之收聚火黨, 已有年所, 渠每稱知兵書, 蓋自壬寅、癸卯以來, 已有此言, 甲辰以後, 此謀大播, 近來始識元百周、李昈、崔擎宇、世胤之弟季胤等矣。 初則不過綠林兵若干, 而畢竟幾至六七百人, 欲於三南中, 擇其可據處據之, 全羅道則世胤主張, 而羅崇大聚綠林數百名, 欲應之。’ 甲辰三月, 臣往見世胤, 而問賊變, 則以爲果有此事, 終則李昈詳言於臣曰: ‘初爲草寇之計, 徒黨旣衆, 所得又多, 始生謀逆之心。’ 往見崇大, 以爲竊據湖南之計, 世胤未返, 要臣更議於思晟, 將往平安兵營矣, 聞賊變已出, 往之無益, 仍轉避于原州。 平營酬酢事。 世胤謂思晟曰: ‘吾有軍五六百名, 擎宇亦有五六百名, 必得銀貨, 可以做事。’ 思晟以爲: ‘銀貨則從當送之, 四五月, 若遞歸, 則可以內應。’ 又以爲: ‘觀吾八字, 則四月間, 有上京之數, 訓將雖未易, 若爲他軍門, 則待賊起, 可以相應。 賊起, 國家必當使吾擊之, 從中可應, 而南泰徵亦與同謀。’ 云。 臣常時, 以思晟爲奇, 故每事惟思晟是從。 思晟謂世胤曰: ‘不必多得軍兵。 若聞賊變, 國家必以我將兵擊之, 乘此時, 合兵可易爲力。’ 又言: ‘四月若未遞, 則豈不得臺閣中一人耶? 彈文措語, 吾當書送, 若得劾遞, 則可以上京, 與世胤和應。’ 臣無他策, 或以從事官相從, 聞思晟通天文、地理, 故以此爲恃, 謀逆是實。" 處斬, 孥籍如法。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4면
영조실록17권, 영조 4년 4월 14일 甲午 9/12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안엽 공초
국역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친국(親鞫)하였다. 안엽(安燁)을 두 차례 형벌하니, 안엽이 공초하기를,
"신이 평안 병영(平安兵營)으로 갈 때, 정세윤(鄭世胤)이 ‘평안 병사를 보고 반역을 도모하는 일을 말하여 은(銀) 수백 냥을 얻는다면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하고, 신으로 하여금 이사성(李思晟)에게 부탁하기를, ‘세상이 어지럽기 이와 같으니 녹림(綠林)313) 의 군사를 모아 아무 곳으로 가서 일을 일으키려 한다. 정세윤이 화적(火賊)의 무리를 거두어 모았던 것이 이미 여러 해 되었으며 그가 매양 병서(兵書)를 안다고 칭찬하면서 임인년314) ·계묘년315) 이래로 이미 이 말이 있었는데, 갑진년316) 에 이 계획이 크게 전파되더니, 근래에 비로소 원백주(元百周)·이호(李昈)·최경우(崔擎宇)·정세윤의 아우 정계윤(鄭季胤) 등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녹림병(綠林兵) 몇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필경 거의 6, 7백 명에 이르렀으므로, 삼남(三南) 중에서 그 웅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웅거하려고 했는데, 전라도(全羅道)에서는 정세윤이 주장하여서 나숭대(羅崇大)가 녹림병 수백 명을 모아 이에 응(應)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갑진년 3월에 신이 가서 정세윤을 보고 적변(賊變)을 물었더니,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끝에 가서 이호가 신에게 자세히 말하기를, ‘처음에는 초구(草寇)317) 의 계책을 하였으나 도당(徒黨)이 이미 많아졌고 얻은 바도 또한 많아졌으므로, 비로소 반역을 도모할 마음을 일으켰다.’고 하였습니다. 가서 나숭대를 만났더니 호남에 웅거할 계책을 한다고 하였으며, 정세윤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신에게 다시 이사성과 의논하기를 요구하기에, 장차 평안 병영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적변(賊變)이 이미 일어났음을 듣고는 가는 것이 무익하였기 때문에 이내 원주(原州)로 옮겨 피하였습니다. 평안 병영에서 수작(酬酌)한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세윤이 이사성에게 ‘내가 군사 5, 6백 명이 있고 최경우도 또한 5, 6백 명이 있으니, 반드시 은화(銀貨)를 얻는다면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이사성이 ‘은화는 이 뒤에 마땅히 보내 주겠으며, 4, 5월에 벼슬이 갈려 돌아간다면 내응(內應)할 수 있다.’고 하고, 또 ‘나의 팔자(八字)를 본다면 4월 무렵에 서울로 올라갈 운수(運數)가 있으니, 훈련 대장(訓鍊大將)은 비록 쉽지 않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군문(軍門)의 대장이 된다면 도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서로 응할 수 있을 것이다. 도적이 일어난다면 나라에서 반드시 마땅히 나를 시켜 이를 치게 할 것이니, 안에서 응할 수 있고, 남태징(南泰徵)도 또한 나와 모의(謀議)를 같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평상시에 이사성을 기이(奇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일마다 이사성의 말이면 따랐습니다. 이사성이 정세윤에게 ‘군병을 많이 얻을 필요는 없다. 만약 적변(賊變)을 듣는다면 나라에서 반드시 나를 시켜 군사를 거느려 치게 할 것이니, 이때를 타서 군사를 합친다면 쉽사리 원조가 될 수 있다.’고 하고, 또 ‘4월에 만약 벼슬이 갈리지 않는다면 어찌 대각(臺閣) 안의 한 사람을 얻지 못하겠는가? 탄핵하는 글을 만들어 내가 써 보낼 것이니, 만약 탄핵으로 벼슬이 갈리게 된다면 서울로 올라가서 정세윤과 화응(和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다른 계책이 없었으므로 혹은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상종(相從)하였는데, 이사성이 천문(天文)·지리(地理)에 통달하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믿고서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4면
- [註 313] 녹림(綠林) : 후한(後漢) 말기의 왕망(王莽) 때 왕광(王匡)·왕봉(王鳳) 등이 백성을 모아 녹림산(綠林山)을 근거지로 하여 도둑질하며 관군(官軍)에 대항하였던 것을 말함.
- [註 314]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315] 계묘년 : 1723 경종 3년.
- [註 316]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 [註 317] 초구(草寇) : 좀도둑.
원문
○上御仁政門, 親鞫。 刑安熀二次, 熀供: "臣往平安兵營時, 鄭世胤以爲: ‘見平兵言謀逆事, 要得銀數百兩, 可以成事。’ 使臣囑思晟曰: ‘世亂如此, 聚綠林兵, 往某處作事。 世胤之收聚火黨, 已有年所, 渠每稱知兵書, 蓋自壬寅、癸卯以來, 已有此言, 甲辰以後, 此謀大播, 近來始識元百周、李昈、崔擎宇、世胤之弟季胤等矣。 初則不過綠林兵若干, 而畢竟幾至六七百人, 欲於三南中, 擇其可據處據之, 全羅道則世胤主張, 而羅崇大聚綠林數百名, 欲應之。’ 甲辰三月, 臣往見世胤, 而問賊變, 則以爲果有此事, 終則李昈詳言於臣曰: ‘初爲草寇之計, 徒黨旣衆, 所得又多, 始生謀逆之心。’ 往見崇大, 以爲竊據湖南之計, 世胤未返, 要臣更議於思晟, 將往平安兵營矣, 聞賊變已出, 往之無益, 仍轉避于原州。 平營酬酢事。 世胤謂思晟曰: ‘吾有軍五六百名, 擎宇亦有五六百名, 必得銀貨, 可以做事。’ 思晟以爲: ‘銀貨則從當送之, 四五月, 若遞歸, 則可以內應。’ 又以爲: ‘觀吾八字, 則四月間, 有上京之數, 訓將雖未易, 若爲他軍門, 則待賊起, 可以相應。 賊起, 國家必當使吾擊之, 從中可應, 而南泰徵亦與同謀。’ 云。 臣常時, 以思晟爲奇, 故每事惟思晟是從。 思晟謂世胤曰: ‘不必多得軍兵。 若聞賊變, 國家必以我將兵擊之, 乘此時, 合兵可易爲力。’ 又言: ‘四月若未遞, 則豈不得臺閣中一人耶? 彈文措語, 吾當書送, 若得劾遞, 則可以上京, 與世胤和應。’ 臣無他策, 或以從事官相從, 聞思晟通天文、地理, 故以此爲恃, 謀逆是實。" 處斬, 孥籍如法。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