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17권, 영조 4년 4월 10일 庚寅 1/3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정의련 공초
국역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정의련(鄭宜璉)을 친국(親鞫)하였다. 정의련이 공초하기를,
"지난 겨울에 신의 아재비가 상인(喪人)으로서 문경(聞慶) 송면(松面)의 이인좌(李麟佐)가 있는 곳에 갔습니다. 이인좌·이웅좌(李熊佐)의 무리는 아재비와 서로 친하여서 김홍수(金弘壽)·한세홍(韓世弘)·나만치(羅晩致)의 무리와 더불어 불궤(不軌)를 하였습니다. 서울 안에서는 윤연(尹㝚)·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의 부자(父子)와 이명언(李明彦)도 또한 역모(逆謀)에 들어갔다고 하며, 이명언은 지금 바야흐로 중국에 사신갔으니, 나올 때에 평안도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명언이 역모에 들어갔다는 말은 이인좌가 와서 신의 아재비 최필웅(崔必雄)에게 말하여서 전하였습니다. 종실(宗室)은 밀풍군(密豐君)이 있다고 하였으며, 전라도의 괘서(掛書)는 나만치(羅晩致)가 만들었습니다. 이인좌와 이웅좌는 갑진년281) 이후부터 흉언(凶言)을 하였습니다. 지난해 8월에 신이 안음(安陰)에 갔다가 10월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인좌가 와서 ‘내년 3월에 그 일을 할 것이다.’고 하였으며, 이웅좌는 예천(醴泉)에 왔다가 3월 10일 뒤에 크게 성내어 돌아가면서 ‘안동(安東) 놈들 때문에 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처음에 이정소(李廷熽)를 목베어 안동을 통일하려고 하였는데, 안동 사람이 크게 꾸짖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였으므로, 이웅좌가 이 말 때문에 성내어 떠나갔던 것입니다. 서사촌(庶四寸) 정의숙(鄭宜琡)은 안음 옛고을에 사는데, ‘의성 현령(義城縣令) 한사억(韓師億)도 또한 역모에 들었으니, 한사억은 곧 일찍이 경상도(慶尙道)의 수령(守令)을 지낸 이사상(李師尙)의 사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웅좌의 무리가 흉언을 지어내어 소론(少論)의 강경파가 그 안에 많이 들었으므로, 윤성시(尹聖時)도 또한 그 중에 들었습니다."
하였다. 한차례 형벌하였으나, 공사(供辭)는 전과 같았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면
- [註 281]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원문
○庚寅/上御仁政門, 親鞫鄭宜璉。 宜璉供: "前冬, 臣叔以喪人, 往聞慶 松面 李麟佐處。 麟佐、熊佐輩, 與叔相親, 而與金弘壽、韓世弘、羅晩致輩, 爲不軌。 京中則尹㝚、朴弼夢ㆍ弼顯父子、李明彦亦入云, 明彦, 今方奉使, 出來時可以爲之於平安道云。 明彦入之之說, 麟佐來言于臣叔崔必雄傳之。 宗室, 則有密豐君云, 全羅道掛書, 羅晩致爲之。 麟佐、熊佐, 自甲辰以後, 爲凶言。 前年八月, 臣往安陰, 十月上來, 麟佐來言: ‘來年三月, 爲其事。’ 熊佐來醴泉, 三月旬後, 發大憤歸去曰: ‘因安東漢, 吾事不成。’ 初則欲斬李廷熽, 統一安東, 而安東人大叱曰: ‘何爲此言耶?’ 熊佐以此發憤而去。 孽四寸鄭宜琡, 居安陰古縣, 言: ‘義城縣令韓師億, 亦入之, 師億, 卽曾經慶尙道守令, 而李師尙之壻。’ 云。 熊佐輩, 做作凶言, 少論峻者多入其中, 尹聖時亦入之。" 刑一次, 供如前。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면
영조 4년 (1728) 4월 10일
영조실록17권, 영조 4년 4월 10일 庚寅 1/3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정의련 공초
국역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정의련(鄭宜璉)을 친국(親鞫)하였다. 정의련이 공초하기를,
"지난 겨울에 신의 아재비가 상인(喪人)으로서 문경(聞慶) 송면(松面)의 이인좌(李麟佐)가 있는 곳에 갔습니다. 이인좌·이웅좌(李熊佐)의 무리는 아재비와 서로 친하여서 김홍수(金弘壽)·한세홍(韓世弘)·나만치(羅晩致)의 무리와 더불어 불궤(不軌)를 하였습니다. 서울 안에서는 윤연(尹㝚)·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의 부자(父子)와 이명언(李明彦)도 또한 역모(逆謀)에 들어갔다고 하며, 이명언은 지금 바야흐로 중국에 사신갔으니, 나올 때에 평안도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명언이 역모에 들어갔다는 말은 이인좌가 와서 신의 아재비 최필웅(崔必雄)에게 말하여서 전하였습니다. 종실(宗室)은 밀풍군(密豐君)이 있다고 하였으며, 전라도의 괘서(掛書)는 나만치(羅晩致)가 만들었습니다. 이인좌와 이웅좌는 갑진년281) 이후부터 흉언(凶言)을 하였습니다. 지난해 8월에 신이 안음(安陰)에 갔다가 10월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인좌가 와서 ‘내년 3월에 그 일을 할 것이다.’고 하였으며, 이웅좌는 예천(醴泉)에 왔다가 3월 10일 뒤에 크게 성내어 돌아가면서 ‘안동(安東) 놈들 때문에 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처음에 이정소(李廷熽)를 목베어 안동을 통일하려고 하였는데, 안동 사람이 크게 꾸짖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였으므로, 이웅좌가 이 말 때문에 성내어 떠나갔던 것입니다. 서사촌(庶四寸) 정의숙(鄭宜琡)은 안음 옛고을에 사는데, ‘의성 현령(義城縣令) 한사억(韓師億)도 또한 역모에 들었으니, 한사억은 곧 일찍이 경상도(慶尙道)의 수령(守令)을 지낸 이사상(李師尙)의 사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웅좌의 무리가 흉언을 지어내어 소론(少論)의 강경파가 그 안에 많이 들었으므로, 윤성시(尹聖時)도 또한 그 중에 들었습니다."
하였다. 한차례 형벌하였으나, 공사(供辭)는 전과 같았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면
- [註 281]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원문
○庚寅/上御仁政門, 親鞫鄭宜璉。 宜璉供: "前冬, 臣叔以喪人, 往聞慶 松面 李麟佐處。 麟佐、熊佐輩, 與叔相親, 而與金弘壽、韓世弘、羅晩致輩, 爲不軌。 京中則尹㝚、朴弼夢ㆍ弼顯父子、李明彦亦入云, 明彦, 今方奉使, 出來時可以爲之於平安道云。 明彦入之之說, 麟佐來言于臣叔崔必雄傳之。 宗室, 則有密豐君云, 全羅道掛書, 羅晩致爲之。 麟佐、熊佐, 自甲辰以後, 爲凶言。 前年八月, 臣往安陰, 十月上來, 麟佐來言: ‘來年三月, 爲其事。’ 熊佐來醴泉, 三月旬後, 發大憤歸去曰: ‘因安東漢, 吾事不成。’ 初則欲斬李廷熽, 統一安東, 而安東人大叱曰: ‘何爲此言耶?’ 熊佐以此發憤而去。 孽四寸鄭宜琡, 居安陰古縣, 言: ‘義城縣令韓師億, 亦入之, 師億, 卽曾經慶尙道守令, 而李師尙之壻。’ 云。 熊佐輩, 做作凶言, 少論峻者多入其中, 尹聖時亦入之。" 刑一次, 供如前。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1면
원본
영조 4년 (1728) 4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