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17권, 영조 4년 4월 1일 辛巳 10/10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경상 감사 황선이 그간의 초토사를 계문하다
국역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이 다섯 길로 진병(進兵)하기를 아뢰어 말하기를,
"합천(陜川)·삼가(三嘉)에서 군병(軍兵)을 모아 고을을 파수(把守)하다가 한번 적보(賊報)를 듣고는 처음부터 교봉(交鋒)230) 하지 못하고 수재(守宰)는 벌벌기며 멀리 달아났으니, 이로써 인심(人心)의 파탕(波盪)한 것이 일마다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신의 병영(兵營)은 안음(安陰)·거창(居昌)과 이틀길이고, 진주 병영(晉州兵營)과 사흘길이니, 안음에서 기찰(譏察)·탐지하여 병영에 알려 왔을 경우, 가령 성화(聖火)처럼 거행한다 하더라도 자칫하면 사나흘은 허비하게 되며, 변고(變故)가 진주 영장(晉州營將)의 관할 안에서 일어났다면 상거(相距)가 또한 이틀길에 불과합니다. 용병(用兵)의 법은 일이 급하다면 비록 백부(百夫)231) 의 우두머리일지라도 미처 승품(承稟)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호령(號令)을 세우게 됩니다. 이제 이 흉적(凶賊)은 졸도(卒徒)의 다과(多寡)를 논할 것 없이 실로 하늘에 통하는 대역(大逆)이니, 오늘의 신자(臣子)된 자는 마땅히 피를 흘리고 울음을 삼켜 성토(聲討)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변고가 문장(門墻) 안에서 일어나 그 형세가 또 급한데도, 병사와 영장은 줄곧 관망만 하고 앉아서 역적의 세력을 치성(熾盛)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이 도적들이 변변찮은 좀도둑으로서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토포(討捕)하는 장교(將校)를 시켜 묶어 오게 할 것이고, 만약 여러 성(城)을 연결하고 큰 고을을 점거해 다른 도적에 비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즉시 토벌하여 그 세력이 퍼지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인데도, 이 두 가지에 있어 조금도 유념하지 않고 조정(朝廷)의 명령이 없다고 말하면서 군대를 움직일 뜻이 없습니다. 신이 여러 번 재촉하여 사자(使者)가 길 위에서 서로 잇닿은 뒤에야 비로소 느릿느릿 군대를 일으키면서도 또한 여러 고을의 뒤에 있습니다.
신이 스스로 생각건대, 적세(賊勢)가 회오리바람이나 세찬 비와도 같음이 있어 날로 점점 커지며, 흉서(凶書) 속에 시일(時日)을 기약하여 북상(北上)한다는 말이 있으므로, 마음을 썩이며 통완(痛惋)해 함이 극도에 이른 나머지 결코 수신(帥臣)의 처치(處置)를 기다릴 수 없어서 변고가 생긴 뒤 즉시 각 고을에 전령(傳令)하여 협력해 초토(勦討)케 하였습니다.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을 우방장(右防將)으로 삼고, 초계 군수(草溪郡守) 정양빈(鄭暘賓)·고령 현감(高靈縣監) 유언철(柳彦哲)은 그 군사를 거느리고 어제 합천의 도적의 소혈(巢穴)에서 5리(里) 남짓되는 금양역(金陽驛)에 진박(進薄)232) 하고, 대구 영장(大丘營將) 하옥(河沃)은 파직(罷職) 중에 풍병(風病)이 또 중(重)하여 말을 통하지 못하므로, 신의 병영 군관(軍官) 김진옥(金振玉)을 독전장(督戰將)으로 명칭하여 가영장(假營將)을 겸차(兼差)하여서 정병(精兵) 3초(哨)를 가려 주고 또 고령·현풍(玄風)의 군사를 덧붙이어 협력하여 가서 토벌하게 하고, 금산(金山)·개령(開寧)·지례(知禮) 세 고을의 군병은 우두치(牛頭峙)의 요해처(要害處)를 방수(防守)하여 북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게 하고, 원병(援兵) 중의 선산 부사(善山府使)는 1기(起)가 되고 상주 영장(尙州營將)은 2기가 되고 안동 영장(安東營將)은 3기가 되어 뒤를 잇게 하고, 진주 영장(晉州營將)은 지난달 27일에 단성로(丹城路)로 진병(進兵)하고, 우병사(右兵使)는 지난달 그믐날 삼가로(三嘉路)로 나아가서 무릇 다섯 길로 진병(進兵)하였으며, 함양 군수(咸陽郡守)는 전라도의 운봉 현감(雲峰縣監)과 함께 팔량치(八良峙)를 협력하여 지키니, 도적의 무리가 이미 제로(諸路)의 군병이 나란히 나아감을 듣고 매우 곤궁하여 움츠려드는 세(勢)가 있습니다. 그 사이의 초토(勦討)의 일의 정상(情狀)을 탐지(探知)하여 계문(啓聞)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5면
원문
○慶尙監司黃璿奏五路進兵曰: "陜川、三嘉, 聚待軍兵, 把守邑底, 一聞賊報, 初不交鋒, 守宰匍匐遠遁, 以此人心波蕩, 節節可慮。 自臣營距安陰、居昌二日程, 距晋州兵營三日程, 譏探於安陰, 知委兵營之際, 假使星火擧行, 動費三四日, 變出於晋州營將所管之內, 相距亦不過二日程。 用兵之法, 事急則雖是百夫之長, 未及承稟, 自立號令。 今此凶賊, 勿論卒徒之多寡, 實是通天之大逆, 爲今日臣子者, 所當沫血飮泣, 聲討之不暇, 變起門墻之內, 其勢且急, 兵使營將, 一向觀望, 坐使逆勢熾大, 若曰: ‘此賊等, 是蕞爾草竊, 有不足畏。’ 則當令討捕將校, 束縛而來, 若曰: ‘連城據邑, 有非他賊之比。’ 則所當登時勦擊, 勿令滋蔓, 而於斯二者, 略不留念, 謂無朝令, 無意動兵。 臣累度催促, 伻使相望於道, 然後始乃緩緩起兵, 而亦在於列邑之後。 臣自念賊勢, 有若飄風疾雨, 日漸滋大, 凶書中有指日北上之語, 腐心痛惋之極, 決不可等待, 帥臣變生之後, 卽爲傳令各邑, 協力勦討。 星州牧使李普赫爲右防將, 草溪郡守鄭暘賓、高靈縣監兪彦哲率其兵, 昨日進薄陜川賊藪五里許金陽驛, 大丘營將河沃, 罷職之中, 風病又重, 不通言語, 臣營軍官金振玉, 督戰將爲號, 兼差假營將, 抄給精兵三哨, 又添高靈、玄風之兵, 使之協力往討, 金山、開寧、知禮三邑軍兵防守牛頭峙要害處, 以遏北上之路, 援兵中善山府使, 爲一起, 尙州營將爲二起, 安東營將爲三起, 使之繼後, 晋州營將, 去月二十七日進兵丹城路, 右兵使, 去月晦日進住三嘉路, 凡五路進兵, 咸陽郡守與全羅道 雲峰縣監, 協守八良峙, 賊輩旣聞諸路兵竝進, 頗有窮蹙之勢。 其間勦討事狀, 探知啓聞。"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5면
영조실록17권, 영조 4년 4월 1일 辛巳 10/10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경상 감사 황선이 그간의 초토사를 계문하다
국역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이 다섯 길로 진병(進兵)하기를 아뢰어 말하기를,
"합천(陜川)·삼가(三嘉)에서 군병(軍兵)을 모아 고을을 파수(把守)하다가 한번 적보(賊報)를 듣고는 처음부터 교봉(交鋒)230) 하지 못하고 수재(守宰)는 벌벌기며 멀리 달아났으니, 이로써 인심(人心)의 파탕(波盪)한 것이 일마다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신의 병영(兵營)은 안음(安陰)·거창(居昌)과 이틀길이고, 진주 병영(晉州兵營)과 사흘길이니, 안음에서 기찰(譏察)·탐지하여 병영에 알려 왔을 경우, 가령 성화(聖火)처럼 거행한다 하더라도 자칫하면 사나흘은 허비하게 되며, 변고(變故)가 진주 영장(晉州營將)의 관할 안에서 일어났다면 상거(相距)가 또한 이틀길에 불과합니다. 용병(用兵)의 법은 일이 급하다면 비록 백부(百夫)231) 의 우두머리일지라도 미처 승품(承稟)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호령(號令)을 세우게 됩니다. 이제 이 흉적(凶賊)은 졸도(卒徒)의 다과(多寡)를 논할 것 없이 실로 하늘에 통하는 대역(大逆)이니, 오늘의 신자(臣子)된 자는 마땅히 피를 흘리고 울음을 삼켜 성토(聲討)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변고가 문장(門墻) 안에서 일어나 그 형세가 또 급한데도, 병사와 영장은 줄곧 관망만 하고 앉아서 역적의 세력을 치성(熾盛)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이 도적들이 변변찮은 좀도둑으로서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토포(討捕)하는 장교(將校)를 시켜 묶어 오게 할 것이고, 만약 여러 성(城)을 연결하고 큰 고을을 점거해 다른 도적에 비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즉시 토벌하여 그 세력이 퍼지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인데도, 이 두 가지에 있어 조금도 유념하지 않고 조정(朝廷)의 명령이 없다고 말하면서 군대를 움직일 뜻이 없습니다. 신이 여러 번 재촉하여 사자(使者)가 길 위에서 서로 잇닿은 뒤에야 비로소 느릿느릿 군대를 일으키면서도 또한 여러 고을의 뒤에 있습니다.
신이 스스로 생각건대, 적세(賊勢)가 회오리바람이나 세찬 비와도 같음이 있어 날로 점점 커지며, 흉서(凶書) 속에 시일(時日)을 기약하여 북상(北上)한다는 말이 있으므로, 마음을 썩이며 통완(痛惋)해 함이 극도에 이른 나머지 결코 수신(帥臣)의 처치(處置)를 기다릴 수 없어서 변고가 생긴 뒤 즉시 각 고을에 전령(傳令)하여 협력해 초토(勦討)케 하였습니다.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을 우방장(右防將)으로 삼고, 초계 군수(草溪郡守) 정양빈(鄭暘賓)·고령 현감(高靈縣監) 유언철(柳彦哲)은 그 군사를 거느리고 어제 합천의 도적의 소혈(巢穴)에서 5리(里) 남짓되는 금양역(金陽驛)에 진박(進薄)232) 하고, 대구 영장(大丘營將) 하옥(河沃)은 파직(罷職) 중에 풍병(風病)이 또 중(重)하여 말을 통하지 못하므로, 신의 병영 군관(軍官) 김진옥(金振玉)을 독전장(督戰將)으로 명칭하여 가영장(假營將)을 겸차(兼差)하여서 정병(精兵) 3초(哨)를 가려 주고 또 고령·현풍(玄風)의 군사를 덧붙이어 협력하여 가서 토벌하게 하고, 금산(金山)·개령(開寧)·지례(知禮) 세 고을의 군병은 우두치(牛頭峙)의 요해처(要害處)를 방수(防守)하여 북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게 하고, 원병(援兵) 중의 선산 부사(善山府使)는 1기(起)가 되고 상주 영장(尙州營將)은 2기가 되고 안동 영장(安東營將)은 3기가 되어 뒤를 잇게 하고, 진주 영장(晉州營將)은 지난달 27일에 단성로(丹城路)로 진병(進兵)하고, 우병사(右兵使)는 지난달 그믐날 삼가로(三嘉路)로 나아가서 무릇 다섯 길로 진병(進兵)하였으며, 함양 군수(咸陽郡守)는 전라도의 운봉 현감(雲峰縣監)과 함께 팔량치(八良峙)를 협력하여 지키니, 도적의 무리가 이미 제로(諸路)의 군병이 나란히 나아감을 듣고 매우 곤궁하여 움츠려드는 세(勢)가 있습니다. 그 사이의 초토(勦討)의 일의 정상(情狀)을 탐지(探知)하여 계문(啓聞)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5면
원문
○慶尙監司黃璿奏五路進兵曰: "陜川、三嘉, 聚待軍兵, 把守邑底, 一聞賊報, 初不交鋒, 守宰匍匐遠遁, 以此人心波蕩, 節節可慮。 自臣營距安陰、居昌二日程, 距晋州兵營三日程, 譏探於安陰, 知委兵營之際, 假使星火擧行, 動費三四日, 變出於晋州營將所管之內, 相距亦不過二日程。 用兵之法, 事急則雖是百夫之長, 未及承稟, 自立號令。 今此凶賊, 勿論卒徒之多寡, 實是通天之大逆, 爲今日臣子者, 所當沫血飮泣, 聲討之不暇, 變起門墻之內, 其勢且急, 兵使營將, 一向觀望, 坐使逆勢熾大, 若曰: ‘此賊等, 是蕞爾草竊, 有不足畏。’ 則當令討捕將校, 束縛而來, 若曰: ‘連城據邑, 有非他賊之比。’ 則所當登時勦擊, 勿令滋蔓, 而於斯二者, 略不留念, 謂無朝令, 無意動兵。 臣累度催促, 伻使相望於道, 然後始乃緩緩起兵, 而亦在於列邑之後。 臣自念賊勢, 有若飄風疾雨, 日漸滋大, 凶書中有指日北上之語, 腐心痛惋之極, 決不可等待, 帥臣變生之後, 卽爲傳令各邑, 協力勦討。 星州牧使李普赫爲右防將, 草溪郡守鄭暘賓、高靈縣監兪彦哲率其兵, 昨日進薄陜川賊藪五里許金陽驛, 大丘營將河沃, 罷職之中, 風病又重, 不通言語, 臣營軍官金振玉, 督戰將爲號, 兼差假營將, 抄給精兵三哨, 又添高靈、玄風之兵, 使之協力往討, 金山、開寧、知禮三邑軍兵防守牛頭峙要害處, 以遏北上之路, 援兵中善山府使, 爲一起, 尙州營將爲二起, 安東營將爲三起, 使之繼後, 晋州營將, 去月二十七日進兵丹城路, 右兵使, 去月晦日進住三嘉路, 凡五路進兵, 咸陽郡守與全羅道 雲峰縣監, 協守八良峙, 賊輩旣聞諸路兵竝進, 頗有窮蹙之勢。 其間勦討事狀, 探知啓聞。"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