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16권, 영조 4년 3월 17일 丁卯 6/12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안익태·안박 공초
국역
안익태를 문초하니, 안익태가 공초하기를,
"신이 안박의 협박을 받아 거짓으로 함께 모의하면서 인하여 그 곡절을 자세히 물었더니, 안박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경영해 온 지 이미 4, 5년이 되며, 장흠(張欽)·장용(張鏞)·장전(張錪)·장성징(張聖澄)·허간(許侃)이 모두 들어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 몇 사람으로 어떻게 준비하겠는가?’ 하니, 안박이 말하기를, ‘먼 곳 사람도 많이 그 가운데 들어 있는데 모두 알지는 못하며, 상한(常漢)들에게는 많은 돈과 재물을 주었다. 혹은 13일에 가천(加川) 최진사(崔進士)에게로 가서 호군(犒軍) 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구만리(九萬里) 권서봉(權瑞鳳)에게로 가서 호군하여 전진한다고 하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어디로 향하는가 물었더니, 답하기를, ‘청주 병영(兵營)으로 가서 병사를 죽이고 그 군사를 거느리고 상경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정관빈(鄭觀賓)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정관빈이 신으로 하여금 다시 한두 문자(文字)를 얻어 그 실정을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장흠의 아들 장성징을 불러 묻기를, ‘너희 무리가 큰일을 하고자 하면서 나에게 숨김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장성징이 말하기를, ‘그대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최가(崔哥)가 무리를 얼마나 모았으며 권서봉은 무리를 얼마나 모았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하고도 성사할 수 있겠는가?’ 하니, 장성징이 말하기를, ‘영남의 군사가 응당 8만 명은 될 것이고 전라도의 대진(大陣)이 또 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삼남이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지만 국가에 어찌 서로(西路)의 군사가 없겠는가?’ 하니, 장성징이 말하기를, ‘안추(安樞)가 평안도에서 와 이곳 일을 알고 난 후 돌아가고자 하니, 그 후에는 관서(關西)의 대군이 장차 오게 되면 관서의 일은 걱정할 것이 없다.’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안박과 안박의 조카 안여악(安如岳)에게 물었더니, 그 말이 장성징과 같았고, 안박이 또 말하기를, ‘안추가 적 가운데 들어가 형세를 살피고 곧 평양 병영 막하로 돌아간다.’ 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정관빈을 만나 의논했더니, 정관빈이 말하기를, ‘적의 무리가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너와 함께 여주(驪州)로 가 홍상(洪相)159) 을 만나 말하자.’ 하기에 신 역시 그렇게 서로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적도들이 매양 그 무리로 끌어들이고자 하여 안박이 또 신을 보고 말하기를, ‘왜 모임에 오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장흠 등이 먼저 가면서 말하기를, ‘만약 술 1석(石) 남짓을 받으면 마땅히 동행하는 공(功)이 있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럴 즈음에 정관빈이 말을 전해 동행할 것을 요구했는데, 안박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못하고 몰래 정관빈에게 말을 전해 먼저 가서 고변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안박을 문초하니, 안박이 공술하기를,
"이달 초아흐렛날 안익태가 신을 찾아왔기에 신이 말하기를, ‘장흠이 전답을 팔아 8, 90냥의 돈을 얻어 군사 1명마다 1냥씩을 주고는 가천에서 모이도록 요구하고 있다.’라고 했으나, 4, 5년 동안 경영했다는 말은 신이 실로 전하지 않았으며, 모의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를 센 일은 과연 실상입니다. 권서봉과 최진사는 신이 실제 몰랐고 장흠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충청 병사를 격살(擊殺)한다는 일 역시 장흠에게서 듣고 전했으며, 장흠이 또 말하기를, ‘평안 병사가 마땅히 군사로써 서로 도울 것이다.’ 하였습니다. 장전(張錪)은 말하기를, ‘안추(安樞)가 보검(寶劍)과 군복(軍服)을 우리에게 준다.’ 하였는데, 안추는 또 말하기를, 평안 병사가 천은(天銀) 50냥으로 달마(達馬)160) 를 사서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안추는 봉조하(奉朝賀)의 마을에 살고 있는데, 일찍이 경상도 병마 우후(兵馬虞候)를 지냈습니다. 장흠이 또 말하기를, ‘이 달 16일, 17일 사이에 상소하는 자가 있게 되면 마땅히 알 만한 일이 있을 것이고 서울 안에서도 역시 호응할 자가 있을 것이니, 상소가 들어가기를 기다려서 상경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장흠은 적의 졸개에 불과한데도 그가 말하기를, ‘경상도에 대군을 거느릴 만한 자가 있고 우리는 대장(隊將)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장흠에게 묻기를, ‘네가 비록 장수의 지략이 있다 하더라도 좀스러운 유생(儒生)에 불과하고, 또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이런 일을 능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장흠이 말하기를, ‘어찌 시골뿐이었겠는가? 서울에 있는 자 또한 많다. 영남의 7만 명이 2월 보름날 청주로 들어가기로 약속했는데 진위(振威)의 정계윤(鄭季胤)이 이를 알고 있고 또 그 사촌 정종윤(鄭宗胤)과 함께 중간에서 주선하고 있는데 양성(陽城)과 직산(稷山) 두 고을 사이에 있는 염통리(念通里)에서 서로 모여 영남의 군사가 넘어오기를 기다려야 하고 호남 군사도 오면 길을 나누어 상경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장흠이 또 말하기를, ‘영은문(迎恩門)철삭(鐵索)161) 을 꺾은 8장사(將士) 가운데 4장사와의 체결을 얻어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1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9면
원문
○問安益泰, 益泰供: "臣被安鑮所脅, 佯與同謀, 仍詳問曲折, 鑮言: ‘此事經營, 已四五年, 張欽、張鏞、張錪、張聖澄、許侃皆入之。’ 臣曰: ‘此數人, 何能辦得?’ 鑮曰: ‘遠外人多入其中, 皆不可知, 常漢則多給錢財。 或云十三日向加川 崔進士處犒軍, 或云向九萬里 權瑞鳳處, 犒軍前進。’ 臣問向何處, 答云: ‘向淸州兵營, 殺兵使, 領軍上京。 臣以此語鄭觀賓, 觀賓敎臣, 更得一二文字, 探其情實。 臣更招張欽子聖澄, 問曰: ‘汝輩欲爲大事, 而諱我, 何也?’ 聖澄曰: ‘未知君心, 故不能言。’ 臣又曰: ‘未知崔哥聚衆幾何, 權瑞鳳聚衆幾何, 如此而能成事乎?’ 聖澄曰: ‘嶺南軍當爲八萬, 全羅道大陣又來, 何事不做?’ 臣曰: ‘三南軍雖多, 國家豈無西路兵乎?’ 聖澄曰: ‘安樞自平安道來, 欲知此中事後還歸, 此後關西大兵將至, 關西事無患矣。’ 臣更問安鑮及鑮侄如岳處, 其言與聖澄同, 鑮又言: ‘安樞入賊中, 觀形勢將還平安兵營幕下。’ 臣更見觀賓議之, 觀賓言: ‘俟賊黨離發後, 與臣同往驪州, 見洪相言之。’ 臣亦以此相約歸家, 而賊徒每欲拖入其黨, 安鑮又見臣言曰: ‘何不赴會?’ 張欽輩先行, 以爲: ‘若釀酒石餘, 可以當同行之功。’ 如是之際, 觀賓送言, 要與同行, 而安鑮在座, 故不敢發, 密送言於觀賓, 令先往告之。" 云。 問安鑮, 鑮供: "今月初九日, 安益泰來見臣, 臣言: ‘張欽賣田得八、九十兩錢, 給軍士, 每名一兩, 要會加川。’ 而四五年經營之說, 臣實不傳, 參謀人歷數事, 果是實狀。 權瑞鳳、崔進士, 臣實不知, 而聞於張欽。 擊殺忠淸兵使事, 亦聞於張欽而傳之, 欽又言: ‘平安兵使, 當以軍相助。’ 張錪以爲: ‘安樞, 以寶劍軍服給我。’ 而樞又言: ‘平兵以天銀五十兩, 買給橽馬。’ 樞居奉朝賀里中, 而曾經慶尙兵虞候。 張欽又言: ‘今月十六、七日間, 有上疏者, 則當有可知事, 京中亦有應之者, 待疏入可以上京。’ 云。 欽不過賊之卒徒, 而其言以爲: ‘慶尙道, 有可領大軍者, 我輩不過隊將。’ 臣問欽曰: ‘汝雖有將略, 不過蠧儒, 且生鄕曲, 何能作此事?’ 欽曰: ‘奚特鄕曲? 在京者亦多。 嶺南七萬人, 約以二月望日, 入淸州, 振威 鄭季胤知之, 又與其四寸宗胤, 居中周旋, 陽城、稷山兩邑間念通里, 當相會, 以待嶺南兵越來, 湖南軍亦來, 分路上京。’ 欽又言: ‘迎恩門折鐵索八壯士中, 得結四壯士。"云。
- 【태백산사고본】 13책 1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9면
영조실록16권, 영조 4년 3월 17일 丁卯 6/12 기사 /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안익태·안박 공초
국역
안익태를 문초하니, 안익태가 공초하기를,
"신이 안박의 협박을 받아 거짓으로 함께 모의하면서 인하여 그 곡절을 자세히 물었더니, 안박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경영해 온 지 이미 4, 5년이 되며, 장흠(張欽)·장용(張鏞)·장전(張錪)·장성징(張聖澄)·허간(許侃)이 모두 들어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 몇 사람으로 어떻게 준비하겠는가?’ 하니, 안박이 말하기를, ‘먼 곳 사람도 많이 그 가운데 들어 있는데 모두 알지는 못하며, 상한(常漢)들에게는 많은 돈과 재물을 주었다. 혹은 13일에 가천(加川) 최진사(崔進士)에게로 가서 호군(犒軍) 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구만리(九萬里) 권서봉(權瑞鳳)에게로 가서 호군하여 전진한다고 하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어디로 향하는가 물었더니, 답하기를, ‘청주 병영(兵營)으로 가서 병사를 죽이고 그 군사를 거느리고 상경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정관빈(鄭觀賓)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정관빈이 신으로 하여금 다시 한두 문자(文字)를 얻어 그 실정을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장흠의 아들 장성징을 불러 묻기를, ‘너희 무리가 큰일을 하고자 하면서 나에게 숨김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장성징이 말하기를, ‘그대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최가(崔哥)가 무리를 얼마나 모았으며 권서봉은 무리를 얼마나 모았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하고도 성사할 수 있겠는가?’ 하니, 장성징이 말하기를, ‘영남의 군사가 응당 8만 명은 될 것이고 전라도의 대진(大陣)이 또 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삼남이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지만 국가에 어찌 서로(西路)의 군사가 없겠는가?’ 하니, 장성징이 말하기를, ‘안추(安樞)가 평안도에서 와 이곳 일을 알고 난 후 돌아가고자 하니, 그 후에는 관서(關西)의 대군이 장차 오게 되면 관서의 일은 걱정할 것이 없다.’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안박과 안박의 조카 안여악(安如岳)에게 물었더니, 그 말이 장성징과 같았고, 안박이 또 말하기를, ‘안추가 적 가운데 들어가 형세를 살피고 곧 평양 병영 막하로 돌아간다.’ 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정관빈을 만나 의논했더니, 정관빈이 말하기를, ‘적의 무리가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너와 함께 여주(驪州)로 가 홍상(洪相)159) 을 만나 말하자.’ 하기에 신 역시 그렇게 서로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적도들이 매양 그 무리로 끌어들이고자 하여 안박이 또 신을 보고 말하기를, ‘왜 모임에 오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장흠 등이 먼저 가면서 말하기를, ‘만약 술 1석(石) 남짓을 받으면 마땅히 동행하는 공(功)이 있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럴 즈음에 정관빈이 말을 전해 동행할 것을 요구했는데, 안박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못하고 몰래 정관빈에게 말을 전해 먼저 가서 고변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안박을 문초하니, 안박이 공술하기를,
"이달 초아흐렛날 안익태가 신을 찾아왔기에 신이 말하기를, ‘장흠이 전답을 팔아 8, 90냥의 돈을 얻어 군사 1명마다 1냥씩을 주고는 가천에서 모이도록 요구하고 있다.’라고 했으나, 4, 5년 동안 경영했다는 말은 신이 실로 전하지 않았으며, 모의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를 센 일은 과연 실상입니다. 권서봉과 최진사는 신이 실제 몰랐고 장흠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충청 병사를 격살(擊殺)한다는 일 역시 장흠에게서 듣고 전했으며, 장흠이 또 말하기를, ‘평안 병사가 마땅히 군사로써 서로 도울 것이다.’ 하였습니다. 장전(張錪)은 말하기를, ‘안추(安樞)가 보검(寶劍)과 군복(軍服)을 우리에게 준다.’ 하였는데, 안추는 또 말하기를, 평안 병사가 천은(天銀) 50냥으로 달마(達馬)160) 를 사서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안추는 봉조하(奉朝賀)의 마을에 살고 있는데, 일찍이 경상도 병마 우후(兵馬虞候)를 지냈습니다. 장흠이 또 말하기를, ‘이 달 16일, 17일 사이에 상소하는 자가 있게 되면 마땅히 알 만한 일이 있을 것이고 서울 안에서도 역시 호응할 자가 있을 것이니, 상소가 들어가기를 기다려서 상경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장흠은 적의 졸개에 불과한데도 그가 말하기를, ‘경상도에 대군을 거느릴 만한 자가 있고 우리는 대장(隊將)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장흠에게 묻기를, ‘네가 비록 장수의 지략이 있다 하더라도 좀스러운 유생(儒生)에 불과하고, 또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이런 일을 능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장흠이 말하기를, ‘어찌 시골뿐이었겠는가? 서울에 있는 자 또한 많다. 영남의 7만 명이 2월 보름날 청주로 들어가기로 약속했는데 진위(振威)의 정계윤(鄭季胤)이 이를 알고 있고 또 그 사촌 정종윤(鄭宗胤)과 함께 중간에서 주선하고 있는데 양성(陽城)과 직산(稷山) 두 고을 사이에 있는 염통리(念通里)에서 서로 모여 영남의 군사가 넘어오기를 기다려야 하고 호남 군사도 오면 길을 나누어 상경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장흠이 또 말하기를, ‘영은문(迎恩門)철삭(鐵索)161) 을 꺾은 8장사(將士) 가운데 4장사와의 체결을 얻어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1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9면
원문
○問安益泰, 益泰供: "臣被安鑮所脅, 佯與同謀, 仍詳問曲折, 鑮言: ‘此事經營, 已四五年, 張欽、張鏞、張錪、張聖澄、許侃皆入之。’ 臣曰: ‘此數人, 何能辦得?’ 鑮曰: ‘遠外人多入其中, 皆不可知, 常漢則多給錢財。 或云十三日向加川 崔進士處犒軍, 或云向九萬里 權瑞鳳處, 犒軍前進。’ 臣問向何處, 答云: ‘向淸州兵營, 殺兵使, 領軍上京。 臣以此語鄭觀賓, 觀賓敎臣, 更得一二文字, 探其情實。 臣更招張欽子聖澄, 問曰: ‘汝輩欲爲大事, 而諱我, 何也?’ 聖澄曰: ‘未知君心, 故不能言。’ 臣又曰: ‘未知崔哥聚衆幾何, 權瑞鳳聚衆幾何, 如此而能成事乎?’ 聖澄曰: ‘嶺南軍當爲八萬, 全羅道大陣又來, 何事不做?’ 臣曰: ‘三南軍雖多, 國家豈無西路兵乎?’ 聖澄曰: ‘安樞自平安道來, 欲知此中事後還歸, 此後關西大兵將至, 關西事無患矣。’ 臣更問安鑮及鑮侄如岳處, 其言與聖澄同, 鑮又言: ‘安樞入賊中, 觀形勢將還平安兵營幕下。’ 臣更見觀賓議之, 觀賓言: ‘俟賊黨離發後, 與臣同往驪州, 見洪相言之。’ 臣亦以此相約歸家, 而賊徒每欲拖入其黨, 安鑮又見臣言曰: ‘何不赴會?’ 張欽輩先行, 以爲: ‘若釀酒石餘, 可以當同行之功。’ 如是之際, 觀賓送言, 要與同行, 而安鑮在座, 故不敢發, 密送言於觀賓, 令先往告之。" 云。 問安鑮, 鑮供: "今月初九日, 安益泰來見臣, 臣言: ‘張欽賣田得八、九十兩錢, 給軍士, 每名一兩, 要會加川。’ 而四五年經營之說, 臣實不傳, 參謀人歷數事, 果是實狀。 權瑞鳳、崔進士, 臣實不知, 而聞於張欽。 擊殺忠淸兵使事, 亦聞於張欽而傳之, 欽又言: ‘平安兵使, 當以軍相助。’ 張錪以爲: ‘安樞, 以寶劍軍服給我。’ 而樞又言: ‘平兵以天銀五十兩, 買給橽馬。’ 樞居奉朝賀里中, 而曾經慶尙兵虞候。 張欽又言: ‘今月十六、七日間, 有上疏者, 則當有可知事, 京中亦有應之者, 待疏入可以上京。’ 云。 欽不過賊之卒徒, 而其言以爲: ‘慶尙道, 有可領大軍者, 我輩不過隊將。’ 臣問欽曰: ‘汝雖有將略, 不過蠧儒, 且生鄕曲, 何能作此事?’ 欽曰: ‘奚特鄕曲? 在京者亦多。 嶺南七萬人, 約以二月望日, 入淸州, 振威 鄭季胤知之, 又與其四寸宗胤, 居中周旋, 陽城、稷山兩邑間念通里, 當相會, 以待嶺南兵越來, 湖南軍亦來, 分路上京。’ 欽又言: ‘迎恩門折鐵索八壯士中, 得結四壯士。"云。
- 【태백산사고본】 13책 1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