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보궐정오60권, 숙종 43년 9월 2일 癸丑 2/2 기사 / 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헌납 곽만적의 세자 청정에 관한 상소문
국역
헌납(獻納) 곽만적(郭萬績)이 상소(上疏)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성후(聖候)가 미령(未寧)하신 지가 이제 5년에 이르렀는데 안질(眼疾)이 더욱 극심하여 수작(酬酢)에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신민(臣民)들이 초조하게 애태운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특별히 성교(聖敎)를 내려 춘궁(春宮)으로 하여금 수고로움을 대신하게 하여 청정(聽政)토록 하였으니, 성궁(聖躬)의 섭양(攝養)을 전일하게 할 수 있고 국사의 재결(裁決)이 지체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얼마나 경행(慶幸)스런 일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청정(聽政)하게 한 거조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의절(儀節)에 있어서 대단한 흠전(欠典)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가 하면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정월 초하룻날 문조(文祖)에게 선위(禪位)받았다.’ 했는데, 동씨(董氏)가 해석하기를, ‘요제(堯帝)가 늙어서 순제(舜帝)가 섭정(攝政)하는 것인데 요제의 제위(帝位)는 그대로이다. 이는 섭정(攝政)하는 것을 고하는 것인데도 선위(禪位)받았다고 한 것은 순제(舜帝)의 책임을 중시(重視)하여서인 것이다.’ 했습니다. 오늘날의 이 거조가 수고로움을 대신시키고 번거로움을 덜게 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신료(臣僚)들을 접견하고 정무(政務)를 재결(裁決)하는 것은 모두가 군주의 일을 섭행(攝行)하는 것이니 바로 순제(舜帝)가 섭행했던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껏 섭정한다는 것을 고하자는 의논이 없었으니, 이것이 큰 결례(缺禮)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고례(古禮)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만 일이 있으면 고한다는 것이 《예경(禮經)》에 기재되어 있으니, 오직 이 청정(聽政)에 대한 한 가지 일도 폐지한 채 고하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성후(聖候)가 오랫동안 미령하심으로 인하여 부득이 이런 거조가 있었으니 경사(慶事)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원량(元良)073) 이 있어 만기(萬機)를 대신 다스림으로써 위로 성심(聖心)의 걱정을 늦추어드리고 아래로 서무(庶務)의 번잡스러움이 없게 되었으니, 국가의 큰 일은 의당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일이 있으면 고한다는 데에다 비교할 그런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신의 의견에는 마땅히 먼저 태묘(太廟)에 경건히 고하고 나서 중외(中外)에 교서를 반포하여 국체(國體)가 지중(至重)하다는 것을 밝히고 민지(民志)가 안정되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소장을 묘당(廟堂)에 내리시어 널리 의논하게 한 다음 거행케 하셨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춘궁(春宮) 저하(邸下)께서 춘추(春秋)가 한창 젊으시고 예학(睿學)074) 을 바야흐로 힘써야 하니, 마땅히 날마다 서연(書筵)에 나가서 경전(經傳)을 강론하여 때로 힘써서 날로 향상(向上)되는 공효(功效)를 거두어야 할 것인데도, 오래도록 시탕(侍湯)하는 걱정으로 인하여 서연(書筵)을 여는 의식을 거행할 겨를이 없었던 지가 이제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는 신료(臣僚)들의 안타까운 걱정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성상(聖上)께서도 진념(軫念)하고 계신 것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서정(庶政)을 청단(聽斷)하는 이런 때에 더욱 고금의 치란(治亂)의 사적을 토론하여 대소(大小)의 정령(政令)에 보탬이 되게 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춘궁(春宮)의 효성스런 마음에 잠시도 곁을 떠날 수 없기는 하지만 만일 성후(聖候)가 조금 차도를 보일 때에는 반드시 틈틈이 서연(書筵)을 열어 궁료(宮僚)를 인접(引接)함으로써 전에 배운 것을 다시 익히고 연마하여 오랫동안 경서(經書)에 대한 담론을 폐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해서 치도(治道)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면 학문에 뜻을 두고 치도(治道)를 강론하는 도리에 있어 크게 유익한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유념하여 신칙(申飭)시키소서. 또 삼가 생각하건대, 이번에 청정(聽政)하는 거조는 이것이 수고로움을 대신시키고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재단(裁斷)하고 수응(酬應)하는 의절(儀節)은 또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는 춘궁(春宮)께서 처음 정무에 임하는 것이니 양궁(兩宮)075) 께서 주고받으시는 즈음에 반드시 분명하고 정중(鄭重)하게 해야 하는 것이요 초초(草草)하게 하고 그쳐서는 안됩니다. 춘궁께서 올린 처음 소장에 대한 비답에서 이르기를, ‘공경과 태만의 구분에서 나라의 흥망(興亡)이 판가름나는 것이니 두려워하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셨고, 또 이르기를, ‘《서경(書經)》에도 생각을 시종 학문에 두라고 하였으니, 너는 마땅히 힘써야 된다.’ 하셨으니, 말은 정밀지만 뜻은 깊고 용공(用功)은 간략하지만 효험은 넓다고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두번의 분부는 모두가 정일집중(精一執中)에서 나온 것으로 스스로 이는 전하(殿下)의 가법(家法)인 것입니다. 지금도 이것으로 더욱 면려시킨다면 누군들 ‘훌륭하구나, 왕의 말씀이여! 순수하구나, 왕의 마음이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춘궁의 두 번째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이르기를, ‘근일에 있었던 일은 처분(處分)이 올바르고 시비(是非)가 분명하여 백세(百世)뒤에도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등의 말로 분부하셨습니다. 신의 우견(愚見)으로 살펴본다면 이른바 근일의 일이라는 것은 당초 국가의 존망(存亡)과 세도의 흥폐(興廢)에 관계된 것이 아니므로 사가(私家)에서 쟁변(爭辨)하는 단서에 불과한 것이니, 이는 원래 군주가 참여하여 주장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끝내 미루어 조정(朝廷)으로 옮기었으므로 수십 년 이래 시비(是非)가 서로 뒤바뀌고 취사(取捨)가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득 일세(一世)의 큰 풍파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전하께서 중도(中道)를 잡아 나라의 근본 법칙을 세우는 공부에 미진한 점이 있어 끝내는 협공(協恭)하고 화충(和衷)하는 지경에 이르지 못하게 된데 연유한 것이니, 오늘날 전수(傳授)하는 즈음에 있어 전하께서는 오직 마땅히 조정(調停)하여 평윤(平允)하게 하는 도리로 자상하게 고계(告戒)하여 탕탕평평(蕩蕩平平)한 지경으로 귀결되도록 힘써야 됩니다. 그런데 도리어 사가(私家)에서 서로 시끄럽게 하면서 귀일시키지 못하는 일을 가지고 오늘날 후손(後孫)을 위한 계책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있으니, 신은 조종조(祖宗朝)에서 서로 전해오면서 계술(繼述)하였던 도리에 부족함이 있는 것인가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훈회(訓誨)할 즈음에 반드시 중도(中道)를 잡아 나라의 근본 법칙을 세우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 시비(是非)는 공정(公正)한 데로 귀일토록 힘쓰고 취사(取捨)는 반드시 일방적으로 치우치게 되는 것을 경계하여 거듭 면려시켜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게 함으로써 조정으로 하여금 독후(篤厚)한 기풍(氣風)을 키워나게 하고 국가로 하여금 화평한 복을 누리게 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독대(獨對)한 한 가지 일은 곧 좌상(左相)076) 이 당한 불행이지만 이는 실로 전하(殿下)께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당초 들어와 진찰할 적에 수상(首相)077) 은 비록 병고(病告)중에 있었지만 원임(原任) 3대신(三大臣)이 있었는데 다만 좌상(左相)만 독대(獨對)하게 하였고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은 따라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독대(獨對)할 때의 연설(筵說)도 또한 기록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중외(中外)의 의혹을 자아내게 했으며, 좌상에게 있어서도 한없이 불안한 단서를 만들었습니다. 독대(獨對)할 때에 있었던 성교(聖敎)에 대해서는 비록 사의(辭意)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그 뒤 좌상(左相)의 소장(疏章)에 대한 비답에서 이르기를, ‘독대할 때 경(卿)이 정성을 다하여 광구(匡救)한 것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다’고 분부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과실(過失)이 있은 뒤에야 바야흐로 광구(匡救)하게 되는 것인데 좌상(左相)의 광구가 정성을 다하는 데 이르렀다면 전하의 과실이 미세한 정보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러러 미루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하(上下)의 문답(問答)을 끝내 드러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놀라고 의혹스런 마음에 두려워하는 모습들을 하고 있으면서 각기 사사의 의견으로 함부로 서로 의의(議擬)함에 있어 못하는 말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임금의 분부가 이와 같았으니, 좌상의 대답은 저와 같지 않았겠는가?’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임금의 분부가 저와 같았으니 좌상의 대답이 이와 같지 않았겠는가.’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보통 사람들은 비록 부자(父子) 사이에도 너그럽고 엄숙하고 화평하고 굳센 기질(氣質)을 타고 나는 것이 혹 다르기도 하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늘 가까이 지내다 보면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이에 저절로 의상(意尙)에 차이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춘궁(春宮)의 덕성(德性)이 매우 깊어 희노(喜怒)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데 혹 가까이서 모실 적에 의상(意尙)에 차이가 나서 성심(聖心)에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릇 필부(匹夫)가 부자(父子)사이에 처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오직 모든 일을 잘하여 나가기를 바라는 도리에 있어 간혹 꾸짖을 때가 많은 법인데, 이는 실로 지나치게 사랑하는 데에서 연유된 것이요 본디 매우 미워하는 예에서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남을 대하는 즈음에서는 문득 아들을 위하여 숨기는 의리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제왕가(帝王家)에서 저이(儲貳)078) 를 배양하는 도리는 더욱 절대로 필부(匹夫)의 경우와는 별다른 점이 있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요순(堯舜) 이외에 매사를 모두 선(善)하게 한다는 것은 실로 쉽사리 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설령 춘궁에 대해 성심(聖心)에 조금 미흡한 점이 있었으면 엄중하게 꾸짖어 가르치는 것도 불가 할 것이 없는데 이제 대신(大臣)을 인접(引接)하여 쉽사리 발설(發說)하였으니, 앞으로 선후책(善後策)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는 이미 서로 숨겨준다는 의리에 어긋났는데다 또 밖에 선시(宣示)하려 하지 않으니 대중의 마음에 의혹을 품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고 성심(聖心)의 소재를 이해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소인(小人)의 마음으로 망령되이 억측한 바가 있게 된 것이다. 그 뒤 비망기(備忘記)의 사의(辭意)에 나타난 개오(開悟)와 춘궁의 소장에 대한 비답의 근간(懃懇)한 것으로써 살펴본다면 또한 중상의 뜻이 과연 진실로 지나치게 사랑한 데서 연유된 것이요 본디 매우 미워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러러 헤아릴 수가 있다. 이로부터 중외(中外)의 의혹을 풀 수 있고 국세(國勢)를 태산(泰山)처럼 튼튼한 데로 옮겨놓을 수 있으니, 이토록 지나치게 걱정 할 것이 뭐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것은 그러하다. 그러나 군하(群下)의 마음에 아직도 남은 두려움이 있어 은우(隱憂)079) 를 지나치게 품고 있는 것은 대개 춘궁(春宮)께서 처해 있는 처지를 위하여 실로 견제되는 단서가 많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만일 일에 따라 번번이 품(稟)하게 하여 스스로 전단(專斷)하지 못하게 하려면 이는 자못 수고로움을 대신시키게 하는 뜻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매사를 스스로 결단하게 하려고 한다면 비록 모두 최선을 다하더라도 마땅히 병통이 생길 우려가 있는 것인데 더구나 서사(庶事)가 총집(叢集)되어 재단(裁斷)이 지극히 번거로우니, 어떻게 백번 한 일이 백번 다 성상(聖上)의 뜻에 맞게 될 것을 보장할 수가 있겠는가? 만일 지나치게 사랑하고 모든 일을 잘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촉발(觸發)되어 다시 털끝만큼이라도 성충(聖衷)에 걸리는 것이 있게 되면 춘궁의 불안함이 전보다 배가 될 뿐만이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전하의 측근에 있는 무식한 무리들이 성인(聖人)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는 모두 지성스럽고 가엾게 여겨서 화내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데에서 나온 성교(盛敎)라는 것을 모르고 망령되이 서로 억측하여 혹은 주상의 마음을 엿보는 일이 있게 된다면, 이는 진실로 크게 걱정스러운 것이다. 유독 알 수 없는 것은 우리 주상의 자애(慈愛)하는 덕이 경각(頃刻)사이에도 여기에 소홀히 하는 것이 없어서 곡진히 보호(保護)할 계책을 세우고 있느냐 하는 그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런 등류의 가항(街巷)의 말들이 부산하게 그치지 않고 있으니, 천만 가지 걱정이 중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연석(筵席)에서의 분부를 환하게 게시(揭示)하시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국가의 뜻을 쉽게 깨닫는데도 오히려 이렇게 동요되고 있는데, 더구나 저 외방(外方)에서 전해 들은 소문은 누가 가가 호호(家家戶戶) 돌아다니면서 낱낱이 금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초야(草野)에 은거(隱居)한 노상(老相)080) 이 처음 이 소식을 듣고 경황(驚惶)하여 집 사람들과 결별(訣別)하고 허겁지겁 달려와서 혈성(血誠)을 쏟아 봉장(封章)을 했는데, 말에 규각(圭角)이 많았던 것은 대개 걱정이 깊었기 때문에 그 말이 과했던 것입니다. 좌상(左相)의 불행이 여기에서 한층 가중되었는데 노상(老相)의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이 또 매우 엄준하였으니, 이는 또 더욱 노상(老相)의 불행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따져보면 모두가 연설(筵說)이 일반에게 발표되지 않은 탓인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어찌하여 밝게 게시하여 두 정승의 불행을 풀어주지 않고 이에 괴란(壞亂)시킨다느니 배알(排軋)한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노상(老相)을 의심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 노상(老相)은 평소 조정의 의논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믿을 수 없는 의논에 동요되지도 않았으므로 온 세상이 존앙(尊仰)하는 바이니, 전하께서 의중(倚重)하시는 것이 어떠하셨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옳지 않다는 지목을 가하여 아예 말단의 서관(庶官)만도 못하게 대우하였으니, 어찌 많은 사람들의 소망을 너무도 어긋나게 한 처사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피건대, 지난번 비망기(備忘記)에 ‘이런 등류의 소장(疏章)은 이 뒤로는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고, 계속해서 노상(老相)의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의 엄절(嚴切)함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난번 사적으로 서로 놀라고 의심스러워하면서 함부로 억측하였던 사람들이 또 다시 서로 말하기를, ‘우리 주상께서 미안스럽게 여기고 있는 뜻이 아직도 다 제거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다.’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이 떠들썩하여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대개 이는 인심(人心)이 겁을 먹은 것이 화살에 다친 새가 활만 보면 놀라는 것과 같은 격인 것입니다.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타고 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에 대한 염려가 비록 지나치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역시 척연(慽然)한 점이 있습니다. 전하(殿下)께서 만약 연석(筵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환하게 게시(揭示)하여 척연(惕然)히 뉘우쳐 깨닫고 시원하게 의심을 풀어주려는 뜻을 보이지 않으신다면, 좌상(左相)에게 비록 해를 꿰뚫는 충심(忠心)이 있더라도 끝내 암매(暗昧)한 결과가 되기 마련이고, 노상(老相)에게 비록 괴란(壞亂)시켰다는 견책이 있더라도 끝내 충직(忠直)하다는 명성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의 입장에서 말씀드리건대, 전하의 심사(心事)를 갠 하늘의 밝은 태양처럼 환하게 한다면 많은 백성이 모두 장차 눈을 씻고서 우러러보게 될 것이고 손뼉을 치면서 축하하게 될 것이며 좌상(左相)이 광구(匡救)한 힘도 이로부터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니, 노상(老相)의 말은 저절로 헛된 우려(憂慮)에 불과하였다는 것이 되고 말 것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드러내어 보이지 않고 이렇게 구차스럽게 하고 계십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사람이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 고치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때의 독대(獨對)는 상하(上下)가 모두 잘못한 것이니, 노상(老相)의 말이 비록 중도에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성상(聖上)과 대신(大臣)이 허물이 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본래 손상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위험(危險)이라느니 괴란(壞亂)이라느니 통치(痛治)라느니 하는 등류의 분부를 내려 엄중한 말로 준절히 지척(指斥)한 것은 노성인(老成人)은 업신여겨서는 안된다는 의리에 어긋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중심(衆心)의 의혹은 이 때문에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聖意)를 세 번 생각하시는 데 돌리시고 성스러운 도량을 확충하여 널리 보이심으로써 전후 노상(老相)에게 내렸던 미안한 비답(批答)을 환수(還收)하소서. 그리고 근시(近侍)를 보내어 뉘우치고 있다는 뜻을 선유(宣諭)하여 상하(上下)사이에 털끝만큼도 걸리는 것이 없다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찌 대성인(大聖人)의 하는 일은 보통 사람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한 뒤에야 중외(中外)의 의혹이 풀리고 노상(老相)의 걱정도 풀리고 혹자(或者)들의 시끄러운 말도 변명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타파되고 공거문(公車文)081) 은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
하니, 답하기를,
"윗 조항에 운운(云云)하였는데, 【위에 보인다.】 그 다음에 진달한 것은 춘궁(春宮)을 위하고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이 단락(段落)은 품처(稟處)라고 한 아래에 있는 말인데 나머지도 모두 위에 보인다.】
하였다. 다음날 곽만적(郭萬績)이 인피(引避)하기를,
"엊그제 올린 한 장의 상소에 신의 어리석은 정성을 대략 바쳤는데, 삼가 성비(聖批)를 받들건대 반은 따르고 반은 따르지 않았으므로 봉독(奉讀)한 이래 한편 감격스럽기도 하고 한편 송구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신은 재주가 거칠고 성품도 졸렬하여 일찍이 피차(彼此)가 논의하는 마당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고, 이해(利害) 때문에 남을 따라 부앙(俯仰)한 형상이 없다는 것은 온 조정이 다같이 아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외람되이 변변찮은 글을 올려 언책(言責)을 메웠는데 성명(聖明)께서 바로 현란(眩亂)시킨다느니 신구(伸救)한다느니 하는 책망을 가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황공스럽고 부끄러워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또한 전하(殿下)께서 아직도 중도를 잡고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세우는 도리에 미진함이 있는 것인가 염려스러웠기 때문에 외람되고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다 진달하겠습니다. 아!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전수(傳授)할 즈음에는 반드시 요순(堯舜)의 집중(執中)으로써 으뜸을 삼았는데, 오직 우리 조종(祖宗)의 가법(家法)도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40년 동안 수용(受用)한 것에 이 가법(家法)을 극진히 시행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춘궁에게 전수(傳授)한 것은 그저 사장(私場)에서 서로 시끄럽게 떠드는 일인데 이것을 가지도 후손(後孫)을 위한 중요한 계책으로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른바 근일(近日)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 뿌리가 매우 길고 덩굴이 매우 번성한 것이어서 신(臣)이 소급해서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개 문자(文字)와 서찰(書札)로 인하여 서로 쟁변(爭辨)하는 과정에 생긴 일로서 처음에는 작은 일에서 비롯된 것인데 점차 사림(士林)의 사이에 다른 시비(是非)로 되는 데에 이른 것이고, 처음에는 사사(私事)에서 야기된 것인데 끝에 가서는 조정의 석상에서 큰 풍파(風波)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쪽에서는 우리가 옳고 저들은 그르다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우리가 잘했고 저들은 잘못했다고 하여 드디어 서로 다투는 논쟁의 장소를 만든 것으로 늘 결론이 나지 않은 안건(案件)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위에 있는 분들은 마땅히 공정하게 듣고서 포괄적으로 살피며 피아(彼我)의 차별이 없이 대하여 치우침이 없게 하여 저쪽의 잘한 것은 취하고 잘못한 것은 버리며 이쪽이 옳은 것은 쓰고 그른 것은 버림으로써 조정(調停)하여 화평(和平)하게 하는 처지를 만들어야만 중도를 세우는 도리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殿下)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혹은 변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치우치기도 합니다. 더구나 사랑해서 임용할 적에는 한쪽을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올바른 것이다.’ 하다가도, 미워하여 버릴 적에 이르러서는 한쪽을 모두 싸잡아 말하기를, ‘이것이 간사한 것이다.’ 하십니다. 그리하여 간사하다고도 하고 올바르다고 하여 또한 마음속에 일정(一定)한 것이 없기 때문에 금년에 이쪽을 부추기고 저쪽을 억제할 적에는 ‘아예 어진이를 높이고 사도(斯道)를 보위(保衛)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명년에 이쪽을 부추기고 저쪽을 억제할 적에는 또한 ‘아예 어진이를 높이고 사도(斯道)를 보위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다 같은 한 사람이고 다 같은 한 가지 일인데 어찌 금년에는 간사한 사람이 되다가 명년에는 올바른 사람이 되며, 금년에는 올바른 사람이 되다가 명년에는 간사한 사람이 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덕을 지키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이치를 살핀 것이 철저하지 못하여 도리어 공평하게 청단(聽斷)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표준을 세우는 도리에 있어 미흡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른바 어진이를 높이고 사도(斯道)를 보위한다는 것이 끝내는 어진이를 박대(薄待)하고 사도(斯道)를 해친 결과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시험삼아 과거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폄박(貶薄)을 죄로 삼아 고묘(告廟)해야 한다는 청이 있기에 이르렀는데, 【갑인년(甲寅年) 이후 당인(黨人)이 송시열(宋時烈)의 일을 논한 것을 가리킨다.】 전하께서 처음에는 날조하여 무함한 것이라 하여 내쳤지만 끝내는 참화(慘禍)를 면할 수 없다 하여 죄를 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천하의 지극히 원통한 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 신구(申球)의 소장(疏章)이 나왔을 적에도 대신(大臣)의 차자(箚子)에 말하기를, ‘본심(本心)은 무함하고 헐뜯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였고, 성비(聖批)에서도 이르기를, ‘어찌 무함하여 헐뜯는다는 죄목을 가하여 망측한 죄과(罪科)에 바로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 한 승지(承旨)의 소청(疏請)으로 갑자기 추삭(推削)하는 형률(刑律)을 시행하였으니, 그것이 지극히 원통한 일이 되기는 피차(彼此)가 일반인데 전하께서는 돌보아 생각하지 않고 계십니다. 전후의 처분(處分)이 이렇게 큰 차이(差異)가 있는데도 어진이를 높이고도 사도(斯道)를 보위한다고 하시니, 신은 진실로 황공(惶恐)합니다마는, 감히 그렇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갈수록 더욱 격화되어 나라를 병들게 하고 일을 해치는 일이 끝없이 발생하여 장차 나라를 망치고서야 그만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전하께서 이른바 나라의 급무(急務)라는 것은 신으로서는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조정의 의논이 마구 결렬(決裂)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양시 양비(兩是兩非)의 논설을 제기하여 조화(調和)시키려는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의 말에 ‘피차(彼此) 모두가 사류(士類)이니 마땅히 화해(和解)시켜야 된다.’ 하였는데, 지금의 이 논쟁도 양시 양비(兩是兩非)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비록 1백년이 되어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니 일시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이 이른바 서로 떠들면서 귀일시키지 못한 것이라고 한 것은 삼가 스스로 선정(先正)의 뜻과 마음을 같이하여 전하께서 조정(調停)시키고 화해시키는 방법을 도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감히 피차(彼此)에 주선(周旋)하면서 털끝만큼인들 현란(眩亂)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독대(獨對)한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선왕조(先王朝)에서도 있었던 것이고, 비밀스런 계책을 전차시켜서는 안된다는 데에서 나온 조처이므로, 진실로 오늘날에는 전례로 원용(援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독대(獨對)는 이미 전파해서는 안 될 단서가 없는 것인데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듣지 못하였고 일록(日錄)에 기재되지도 않았으므로, 중외(中外) 인심의 의혹이 비등(沸騰)하여 모두 독대한 것을 가지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방에 있는 노상(老相)이 갑자기 전파된 말을 듣고 보호(保護)하는 방도에 대해 깊이 걱정한 나머지 말을 만드는 즈음에 있어 비록 혹시 과격한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본의(本意)를 구명(究明)한다면 진실로 나라 일을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성실하여 딴 마음이 없는 것이니, 당초 어찌 조금이라도 경알(傾軋)시키려는 마음과 괴란(壞亂)시키려는 계책이 있었겠습니까? 노상이 이른바 사인(私人)이라고 한 말은 이것이 좌상(左相)이 대단히 불안해 하는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그날 대사(大事)를 의논하려 하면서 두세 대신(大臣)을 모두 부르지 않고 승지(承旨)와 사관(史官)도 입시(入侍)하지 못하게 하고 연석(筵席)에서 있었던 수작(酬酢)도 또한 선시(宣示)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가인(家人)이 사적인 일을 논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전하께서 깊이 생각지 않은 점입니다. 좌상(左相)은 비록 창졸하고 급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물러나 나아가지 않으면서 반드시 승지와 사관(史官)이 함께 입시(入侍)하기를 기다렸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으니, 비록 그의 말이 모두 힘을 다해 광구(匡救)하려는 데에서 나왔을지라도 노상(老相)의 말을 또한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대저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90세의 노신(老臣)이 그 사이에 무슨 사적인 이해(利害)가 있다고 고의로 위험(危險)한 말을 만들어 괴란(乖亂)시킬 계책을 부리려 했겠습니까? 지금에 와서 해야 될 방도는 오직 마땅히 연설(筵說)을 환하게 게시하여 노상(老相)을 위유(慰諭)하고 좌상(左相)을 권기(勸起)하게 할 길을 열게 해야 하는데, 이에 신을 심각하게 탓한다고 의심하고 사리에 어긋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신은 여기에서 두려움을 견딜 수가 없었고 이어 부끄럽고 송구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체직(遞職)시키도록 처치(處置)하였다. 【내용은 위에 보인다.】 곽만적(郭萬績)은 성품이 청정(淸正)하고 강직(强直)하여 평생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기묘년082) 파방과(罷榜科)에 들어 있던 사람이었는데 10년 뒤에 복과(復科)되었으나 나이가 이미 노쇠하였다. 동방(同榜)인 김유(金楺) 등이 바야흐로 극구 말려마지 않았으니, 만일 이때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형통한 사로(仕路)가 앞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문(斯文)의 송사(訟事)에 대한 마음이 공평했고 종사(宗社)에 대한 충심이 격동(激動)되어 한 몸의 이해(利害)를 계교하지 않고 소장을 올리고 나서 피혐하였는데, 그 말이 더욱 명확하여 개절(剴切)083) 했으므로 근래의 장소(章疏)가운데 제일로 인정되었다 김유(金楺)가 소장을 보고 대단히 노하여 청심환(淸心丸) 한 알을 보냈는데 곽만적은 웃으면서 이를 되돌려보냈다. 이로부터 당인(黨人)들의 고색(錮塞)이 더욱 강력하여졌으므로 폐기되어 궁하게 살았으나 태연하게 처신하였기 때문에 공의(公議)가 모두들 훌륭하게 여겼다.
- [註 073] 원량(元良) : 왕세자.
- [註 074] 예학(睿學) : 왕세자가 배우는 학문.
- [註 075] 양궁(兩宮) : 임금과 세자.
- [註 076] 좌상(左相) : 이이명(李頤命).
- [註 077] 수상(首相) : 김창집(金昌集).
- [註 078] 저이(儲貳) : 세자(世子).
- [註 079] 은우(隱憂) : 남이 알지 못하는 근신.
- [註 080] 노상(老相) : 윤지완(尹趾完).
- [註 081] 공거문(公車文) : 소장을 가리킴.
- [註 082] 기묘년 : 1699 숙종 25년.
- [註 083] 개절(剴切) : 아주 적절(適切)함.
원문
○獻納郭萬績上疏曰:
臣竊伏念聖候違豫, 迄今五載, 眼患益甚, 酬酢有難, 臣民焦煎, 有不可勝言。 乃者, 特下聖敎, 使春宮代勞而聽政, 聖躬之攝養斯專, 國事之裁斷無滯, 其爲慶幸, 爲如何哉? 第伏念聽政之擧, 何等重事, 而儀節之間, 有大段欠闕之典? 何者, 《書》曰: "正月上日, 受終于文祖。" 蕫氏釋之曰: "堯老舜攝, 而堯之爲帝自若也。 此爲告攝而謂之受終者, 蓋以重舜之責也。" 今日之擧, 雖出於代勞制煩之意, 而參見臣僚, 裁決政務, 無非攝行君事也, 正與舜攝無異也, 而迄無告攝之議, 豈非缺禮之大者乎? 我朝古禮, 雖未詳知, 而有事則告, 《禮經》所載, 則惟此聽政一事, 其不可廢而勿告也明矣。 今因聖候之彌留, 不得已有此擧, 則不可謂之慶, 而國有元良, 代理萬幾, 則上弛聖心之憂勤, 下無庶務之叢脞, 國家大事, 宜無大於此者。 此豈有事則告而已之比也? 臣意則宜先虔告太廟, 頒敎中外, 以明國體之至重, 以示民志之有定, 所不可已者也。 伏願下臣此疏, 于廟堂博議而擧行幸甚。 且伏念春宮邸下, 春秋鼎盛, 睿學方懋, 政宜日臨書筵, 講論經傳, 以收時敏日將之功, 而久因侍湯之憂, 不遑開筵之儀者, 今至累載, 非但臣僚之憂悶, 抑亦聖上之所軫念處也。 況此聽斷庶政之日, 尤宜討論於古今治亂之跡, 資益於大小政令之間, 則此誠今日之急先務也。 雖以春宮止孝之誠, 不可暫時離側, 而如有聖候稍間之時, 必令間開書筵, 引接宮僚, 尋溫舊學, 俾不至於久廢談經, 俾資治道, 則其於典學講治之道, 大有所益也。 伏願加意而申勉焉。 且伏念今此聽政之擧, 出於代勞省煩之意, 然其所裁斷酬應之節, 亦自不少。 此卽春宮之一初也, 兩宮受授之際, 必宜丁寧鄭重, 不可草草而止耳。 春宮初疏之批, 有曰: "敬怠之分, 興喪斯判, 可不懼哉, 可不愼哉?" 又曰: "《書》曰念終始典于學, 汝宜勉旃。" 可謂語精而旨深, 工約而效廣。 惟此兩敎, 無非精一執中中出來, 自是殿下家法, 而今又以此加勉, 孰不曰大哉王言, 一哉王心, 而及至春宮再疏之批, 乃以近日事, 處分正而是非明, 可以不惑於百世等語, 爲敎。 以臣愚意觀之, 所謂近日事, 初非關係於國家之存亡, 世道之興廢, 而不過私家辨爭之端, 則元非人君所可參涉主張事, 而終乃推而上之於朝廷, 數十年來是非, 互換取舍無常, 便作一世之大風波, 至於今日而極矣。 此實由於殿下執中建極之功, 有所未盡, 終未臻於協恭和衷之域, 則在今傳授之際, 殿下惟當以調劑平允之道, 諄諄告戒, 務歸於蕩蕩平平之地, 而乃反以私家互鬧未一之事, 爲今日貽燕之第一義, 臣恐有歉於祖宗朝相傳繼述之道也。 伏願繼自今, 凡於訓誨之際, 必以執中建極爲本, 是非務歸於公正, 取舍必戒其偏倚, 勉勉申申, 無少間斷, 俾令朝著, 長篤厚之風, 國家享和平之福, 豈不休哉? 且臣竊伏念, 獨對一事, 卽左相所遭之不幸, 而此實殿下之所使然也。 當初入診之日, 首相雖在病告, 當有原任三大臣, 而只令左相獨對, 不許承、史隨入, 獨對筵說, 又使勿錄, 以至中外之疑惑, 爲左相無限不安之端。 獨對時聖敎, 雖未知辭意之如何, 而其後答左相疏批, "以獨對時卿之端誠匡救, 可質神明" 爲敎。 凡事有過失, 然後方可以匡救, 而左相之匡救, 乃至竭誠, 則殿下過失之不啻微細, 可推而仰認, 而上下問答, 終不露示, 故群情驚惑, 萬目瞿瞿, 各以私臆, 妄相擬議, 無所不至。 或者曰: "無乃上敎如此, 左相之對如彼耶?" 或者曰: "無乃上敎如彼, 左相之對如此耶?" 或者曰: "凡人雖父子之間, 寬肅和毅, 稟氣或異, 故朝夕昵處, 言辭作爲之間, 自不得不意尙之差異。 無乃春宮德性淵深, 喜怒不形, 或於昵侍之際, 意尙差異, 有所不槪於聖心者耶?" 或者曰: "夫以匹夫之處父子間者言之, 惟其責備之道, 或多呵責之時, 此實由於過愛, 本非出於深惡, 故若其對人之際, 輒有爲子隱之之義。 況帝王家養儲貳之道, 尤有萬萬有別於匹夫者乎? 且堯、舜之外, 每事盡善, 實未易得, 則設令春宮, 有些不槪於聖心, 嚴呵之、誨責之, 無所不可, 而今乃引接大臣, 容易發說, 將何以善其後耶? 此旣有失於相隱之義, 又不欲宣示於外, 則無怪乎衆心之疑惑, 莫曉聖心之所在也。" 或者曰: "是皆以小人之腹, 妄有所測度也。 以其後備忘辭意之開悟, 春宮疏批之懃懇觀之, 亦可以仰揣主上之意, 果實由於過愛, 本非出於深惡。 自此可以解中外之疑惑, 可以措國勢於泰山, 何其過慮之至此耶?" 或者曰: "是則然矣。 群下之心, 猶有餘悸, 過懷隱憂者, 蓋爲春宮所處之地, 實多牽掣之端。 今若隨事輒稟, 而不欲自專, 則殊非代勞之意。 若欲每事自斷, 則雖皆盡善, 而當有生疣之慮。 況此庶事叢沓, 裁斷至繁, 安保其百發而百當於主上之意乎? 如或有過愛責備之心, 觸發於不知不覺之中, 復有所纖毫芥滯於淵衷, 則非但春宮之不安有倍於前, 萬一一有左右無識之輩, 不知聖人之一動一言, 皆出於至誠惻怛, 匪怒伊敎之盛敎, 妄相測度, 或有所窺測淺深, 則此誠大可憂者。 獨未知我主上止慈之德, 未嘗頃刻而有忽於此, 以思曲爲之圖耶?" 此等街談巷議, 紛紜不已, 千憂萬慮, 無所止泊, 無他, 筵敎不爲昭揭之致也。 京輦之人, 易曉國家之意, 尙且撓颺如此。 況彼流聞外方, 孰能家喩戶說, 逐一而禁止乎? 玆故, 遜荒老相, 始聞驚惶, 與家人訣, 顚倒走來, 瀝血封章, 語多圭角, 蓋其憂之也深, 故其言之也過矣。 左相之不幸, 於此又加, 而老相疏批, 又極嚴切, 則此尤老相之不幸也。 究厥所由, 莫非筵說之不出也。 殿下何不昭揭, 以解兩相之不幸, 乃以壞亂排軋等語, 致疑於老相? 噫! 老相平生, 不與朝論, 不撓浮議, 一世之所尊仰, 殿下之所倚重, 爲如何矣, 一朝加之以不韙之目, 待之不曾若末僚庶官, 豈不甚失於輿人之望耶? 臣竊伏見頃日備忘, 有此等疏今後勿捧之命, 繼而有老相疏批之嚴切。 向之私相驚疑而妄揣者, 又復相謂曰: "竊恐我主上未安之意, 尙未盡祛耶?" 如此爲說, 譁然不已。 蓋人心之怯, 有同傷弓! 愛君之誠, 出於秉彝。 其慮雖過, 其情亦慼矣。 殿下若不昭揭筵說, 以示惕然悔悟, 渙然消釋之意, 則左相雖有貫日之忠, 終爲暗昧之歸, 老相雖有壞亂之責, 終不失忠直之名。 若如臣言, 則殿下之心事, 如靑天白日, 萬姓皆將拭目而覩, 抃手而賀, 而左相匡救之力, 亦自此益著, 則老相之言, 自不過爲浪憂虛慮之歸而已, 殿下何憚而不爲, 直爲此泄泄也? 傳曰: "人孰無過? 改之爲貴。" 蓋伊日獨對, 上下俱失, 則老相之言, 雖曰過中, 聖上與大臣, 受以爲過, 本自無損, 乃反以危險壞亂痛治等敎, 嚴辭峻斥者, 有乖於無侮老成之義, 姑捨勿論, 衆心之疑惑, 以此轉深。 伏願殿下, 回聖意於三思, 擴睿量而示廣, 收還老相前後未安之批。 且遣近侍, 宣諭悔恨之意, 以示上下無一毫芥滯之意, 此豈非大聖人所作爲, 出尋常萬萬者乎? 夫然後中外之惑解, 老相之憂釋, 或者之紛紜, 不待辨而自破, 公車之章奏, 不待禁而自止矣。
答曰: "上款云云, 【見上。】 其次所陳, 出於爲春宮憂愛之忱, 深庸嘉尙。" 【此段在稟處下。 餘竝見上。】 翌日, 萬績引避曰: "昨上一疏, 略貢愚忱, 伏承聖批, 半從半違, 奉讀以來, 一感一悚。 臣才疎性拙, 曾不染跡於彼此言議之場, 不以利害, 隨人俯仰之狀, 通朝所共知也。 猥將芻蕘, 以塞言責, 不料聖明, 徑加以眩亂伸救之責。 惶恐慙恧, 不知所出, 而亦恐殿下, 尙有未盡於執中建極之道, 故不避煩猥, 冒死畢陳焉。 噫! 自古帝王, 傳授之際, 必以堯、舜之執中爲首, 惟我祖宗家法, 亦未嘗不在於此, 而深恐殿下四十年來所受用者, 有未能盡行此法, 而至於今日所傳授於春宮者, 只以私場互鬧之事, 以爲詒燕之謨者, 何哉? 所謂近日事, 根委甚長, 葛藤甚繁, 臣不欲溯論, 而蓋因文字、書札, 互相爭辨, 始源於細故, 而轉至爲士林間大是非, 初起於私事, 而末乃爲朝廷上大風波。 一則曰我長而彼短, 一則曰我是而彼非, 遂作互鬨之場, 常爲未了之案。 在上者只宜公聽而竝觀, 一視而無偏, 彼之長者取之, 短者去之, 此之是者用之, 非者舍之, 以爲調停和平之地, 方可合於建中之道, 而今者殿下則不然, 愛惡或變, 取舍亦偏。 況其愛而取之也, 擧一邊而曰: ‘是正也。’ 及其惡而舍之也, 竝一邊而曰: ‘是邪也。’ 或邪或正, 亦不能一定於心, 今年扶此而抑彼, 未嘗不曰: ‘尊賢而衛道也。’ 明年抑此而扶彼, 亦未嘗不曰: ‘尊賢而衛道也。’ 同是一人, 同是一事, 則豈有今年爲邪, 明年爲正, 今年爲正, 明年爲邪之理乎? 此殿下所以執德靡常, 燭理未究, 反有歉於公聽建中之道, 故所謂尊賢而衛道者, 終未免爲薄發爲害道之歸。 試以昔年事言之, 以貶薄爲罪, 至有告廟之請, 【指甲寅後黨人論宋時烈事。】 殿下始則謂之構誣而斥之, 終則未免慘禍而加之, 人皆知天下之至冤也, 而向者球疏之出也, 大臣之箚曰: ‘本心非出於誣毁。’ 聖批亦曰: ‘何可以誣毁之目, 直驅於罔測之科耶?’ 後因一承宣之疏請, 遽施追削之律, 其爲至冤, 彼此一般, 而殿下莫之恤焉。 前後處分, 若是逕庭, 而猶謂之尊賢而衛道, 臣誠死罪, 不敢謂之然也。 因此一事, 轉輾層激, 所以病國而害事者, 罔有紀極, 將至亡人國而後已。 殿下所謂有國之急務, 非臣之所敢知也。 昔先正臣李珥, 憫朝議之橫決, 乃出兩是兩非之說, 以爲調劑之計, 有曰: ‘彼此俱是士流, 但當和解之可也。’ 今此所爭, 亦可謂兩是兩非。 雖百年而未決, 非一時之可了, 則臣所謂互鬧未一云者, 竊自附於先正之意, 欲以贊殿下調劑和解之道。 豈敢有左右彼此, 一毫眩亂之意也? 至於獨對一事, 先王朝蓋有之, 而密勿之謨, 有不可傳播者, 則固非今日之所可援例也。 今此獨對之擧, 旣無不可傳播之端, 而承、史之所不聞, 日錄之所不載, 人心之疑惑, 中外之鼎沸, 莫不以獨對爲言, 則在外老相, 猝聞傳播之言, 深軫保護之道, 遣辭之際, 雖或過激, 而原其本意, 亶出憂愛, 斷斷無他, 則初豈有一分傾軋之心, 壞亂之計哉? 其所謂私人之說, 是爲左相大段不安之端。 殿下於伊日, 將議大事, 而二三大臣, 不爲竝招, 承旨、史官, 勿令入侍, 筵中酬酢, 又不宣示, 有若與家人論私事者然。 此則殿下未之深思處也。 左相雖當倉卒急遽之際, 固當却立不前, 必待承、史之偕入, 而不能辦此, 則雖其言皆出於竭力匡救, 而老相之言, 亦不可謂無所據也。 夫以九十無所求之老臣, 有何私利害於其間, 故爲危險之言, 以售乖亂之計哉? 爲今之道, 惟當昭示筵說, 慰諭老相, 俾開左相勸起之路, 而乃疑臣以深咎, 責臣以謬戾。 臣於此不勝瞿然, 而繼之以慙悚。" 處置駁遞。 【見上】 萬績, 性孤介白直, 平生不喜黨論。 初以己卯罷榜中人, 復科於十餘年後, 年已衰矣。 同榜金楺等, 方推挽不已, 儻隱默於此際, 亨路在前, 而心公於斯文之訟, 忠激於宗社之慮, 不較一身利害, 旣疏且避, 語益明確剴切, 爲近來章疏第一。 金楺見疏大恚恨, 遺以淸心丸一枚, 萬績笑而還之。 自是黨人, 錮塞益力, 閒廢窮居, 而處之夷然, 公議莫不韙之。
숙종 43년 (1717) 9월 2일
숙종실록보궐정오60권, 숙종 43년 9월 2일 癸丑 2/2 기사 / 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헌납 곽만적의 세자 청정에 관한 상소문
국역
헌납(獻納) 곽만적(郭萬績)이 상소(上疏)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성후(聖候)가 미령(未寧)하신 지가 이제 5년에 이르렀는데 안질(眼疾)이 더욱 극심하여 수작(酬酢)에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신민(臣民)들이 초조하게 애태운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특별히 성교(聖敎)를 내려 춘궁(春宮)으로 하여금 수고로움을 대신하게 하여 청정(聽政)토록 하였으니, 성궁(聖躬)의 섭양(攝養)을 전일하게 할 수 있고 국사의 재결(裁決)이 지체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얼마나 경행(慶幸)스런 일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청정(聽政)하게 한 거조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의절(儀節)에 있어서 대단한 흠전(欠典)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가 하면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정월 초하룻날 문조(文祖)에게 선위(禪位)받았다.’ 했는데, 동씨(董氏)가 해석하기를, ‘요제(堯帝)가 늙어서 순제(舜帝)가 섭정(攝政)하는 것인데 요제의 제위(帝位)는 그대로이다. 이는 섭정(攝政)하는 것을 고하는 것인데도 선위(禪位)받았다고 한 것은 순제(舜帝)의 책임을 중시(重視)하여서인 것이다.’ 했습니다. 오늘날의 이 거조가 수고로움을 대신시키고 번거로움을 덜게 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신료(臣僚)들을 접견하고 정무(政務)를 재결(裁決)하는 것은 모두가 군주의 일을 섭행(攝行)하는 것이니 바로 순제(舜帝)가 섭행했던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껏 섭정한다는 것을 고하자는 의논이 없었으니, 이것이 큰 결례(缺禮)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고례(古禮)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만 일이 있으면 고한다는 것이 《예경(禮經)》에 기재되어 있으니, 오직 이 청정(聽政)에 대한 한 가지 일도 폐지한 채 고하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성후(聖候)가 오랫동안 미령하심으로 인하여 부득이 이런 거조가 있었으니 경사(慶事)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원량(元良)073) 이 있어 만기(萬機)를 대신 다스림으로써 위로 성심(聖心)의 걱정을 늦추어드리고 아래로 서무(庶務)의 번잡스러움이 없게 되었으니, 국가의 큰 일은 의당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일이 있으면 고한다는 데에다 비교할 그런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신의 의견에는 마땅히 먼저 태묘(太廟)에 경건히 고하고 나서 중외(中外)에 교서를 반포하여 국체(國體)가 지중(至重)하다는 것을 밝히고 민지(民志)가 안정되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소장을 묘당(廟堂)에 내리시어 널리 의논하게 한 다음 거행케 하셨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춘궁(春宮) 저하(邸下)께서 춘추(春秋)가 한창 젊으시고 예학(睿學)074) 을 바야흐로 힘써야 하니, 마땅히 날마다 서연(書筵)에 나가서 경전(經傳)을 강론하여 때로 힘써서 날로 향상(向上)되는 공효(功效)를 거두어야 할 것인데도, 오래도록 시탕(侍湯)하는 걱정으로 인하여 서연(書筵)을 여는 의식을 거행할 겨를이 없었던 지가 이제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는 신료(臣僚)들의 안타까운 걱정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성상(聖上)께서도 진념(軫念)하고 계신 것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서정(庶政)을 청단(聽斷)하는 이런 때에 더욱 고금의 치란(治亂)의 사적을 토론하여 대소(大小)의 정령(政令)에 보탬이 되게 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춘궁(春宮)의 효성스런 마음에 잠시도 곁을 떠날 수 없기는 하지만 만일 성후(聖候)가 조금 차도를 보일 때에는 반드시 틈틈이 서연(書筵)을 열어 궁료(宮僚)를 인접(引接)함으로써 전에 배운 것을 다시 익히고 연마하여 오랫동안 경서(經書)에 대한 담론을 폐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해서 치도(治道)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면 학문에 뜻을 두고 치도(治道)를 강론하는 도리에 있어 크게 유익한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유념하여 신칙(申飭)시키소서. 또 삼가 생각하건대, 이번에 청정(聽政)하는 거조는 이것이 수고로움을 대신시키고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재단(裁斷)하고 수응(酬應)하는 의절(儀節)은 또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는 춘궁(春宮)께서 처음 정무에 임하는 것이니 양궁(兩宮)075) 께서 주고받으시는 즈음에 반드시 분명하고 정중(鄭重)하게 해야 하는 것이요 초초(草草)하게 하고 그쳐서는 안됩니다. 춘궁께서 올린 처음 소장에 대한 비답에서 이르기를, ‘공경과 태만의 구분에서 나라의 흥망(興亡)이 판가름나는 것이니 두려워하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셨고, 또 이르기를, ‘《서경(書經)》에도 생각을 시종 학문에 두라고 하였으니, 너는 마땅히 힘써야 된다.’ 하셨으니, 말은 정밀지만 뜻은 깊고 용공(用功)은 간략하지만 효험은 넓다고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두번의 분부는 모두가 정일집중(精一執中)에서 나온 것으로 스스로 이는 전하(殿下)의 가법(家法)인 것입니다. 지금도 이것으로 더욱 면려시킨다면 누군들 ‘훌륭하구나, 왕의 말씀이여! 순수하구나, 왕의 마음이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춘궁의 두 번째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이르기를, ‘근일에 있었던 일은 처분(處分)이 올바르고 시비(是非)가 분명하여 백세(百世)뒤에도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등의 말로 분부하셨습니다. 신의 우견(愚見)으로 살펴본다면 이른바 근일의 일이라는 것은 당초 국가의 존망(存亡)과 세도의 흥폐(興廢)에 관계된 것이 아니므로 사가(私家)에서 쟁변(爭辨)하는 단서에 불과한 것이니, 이는 원래 군주가 참여하여 주장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끝내 미루어 조정(朝廷)으로 옮기었으므로 수십 년 이래 시비(是非)가 서로 뒤바뀌고 취사(取捨)가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득 일세(一世)의 큰 풍파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전하께서 중도(中道)를 잡아 나라의 근본 법칙을 세우는 공부에 미진한 점이 있어 끝내는 협공(協恭)하고 화충(和衷)하는 지경에 이르지 못하게 된데 연유한 것이니, 오늘날 전수(傳授)하는 즈음에 있어 전하께서는 오직 마땅히 조정(調停)하여 평윤(平允)하게 하는 도리로 자상하게 고계(告戒)하여 탕탕평평(蕩蕩平平)한 지경으로 귀결되도록 힘써야 됩니다. 그런데 도리어 사가(私家)에서 서로 시끄럽게 하면서 귀일시키지 못하는 일을 가지고 오늘날 후손(後孫)을 위한 계책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있으니, 신은 조종조(祖宗朝)에서 서로 전해오면서 계술(繼述)하였던 도리에 부족함이 있는 것인가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훈회(訓誨)할 즈음에 반드시 중도(中道)를 잡아 나라의 근본 법칙을 세우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 시비(是非)는 공정(公正)한 데로 귀일토록 힘쓰고 취사(取捨)는 반드시 일방적으로 치우치게 되는 것을 경계하여 거듭 면려시켜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게 함으로써 조정으로 하여금 독후(篤厚)한 기풍(氣風)을 키워나게 하고 국가로 하여금 화평한 복을 누리게 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독대(獨對)한 한 가지 일은 곧 좌상(左相)076) 이 당한 불행이지만 이는 실로 전하(殿下)께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당초 들어와 진찰할 적에 수상(首相)077) 은 비록 병고(病告)중에 있었지만 원임(原任) 3대신(三大臣)이 있었는데 다만 좌상(左相)만 독대(獨對)하게 하였고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은 따라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독대(獨對)할 때의 연설(筵說)도 또한 기록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중외(中外)의 의혹을 자아내게 했으며, 좌상에게 있어서도 한없이 불안한 단서를 만들었습니다. 독대(獨對)할 때에 있었던 성교(聖敎)에 대해서는 비록 사의(辭意)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그 뒤 좌상(左相)의 소장(疏章)에 대한 비답에서 이르기를, ‘독대할 때 경(卿)이 정성을 다하여 광구(匡救)한 것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다’고 분부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과실(過失)이 있은 뒤에야 바야흐로 광구(匡救)하게 되는 것인데 좌상(左相)의 광구가 정성을 다하는 데 이르렀다면 전하의 과실이 미세한 정보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러러 미루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하(上下)의 문답(問答)을 끝내 드러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놀라고 의혹스런 마음에 두려워하는 모습들을 하고 있으면서 각기 사사의 의견으로 함부로 서로 의의(議擬)함에 있어 못하는 말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임금의 분부가 이와 같았으니, 좌상의 대답은 저와 같지 않았겠는가?’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임금의 분부가 저와 같았으니 좌상의 대답이 이와 같지 않았겠는가.’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보통 사람들은 비록 부자(父子) 사이에도 너그럽고 엄숙하고 화평하고 굳센 기질(氣質)을 타고 나는 것이 혹 다르기도 하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늘 가까이 지내다 보면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이에 저절로 의상(意尙)에 차이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춘궁(春宮)의 덕성(德性)이 매우 깊어 희노(喜怒)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데 혹 가까이서 모실 적에 의상(意尙)에 차이가 나서 성심(聖心)에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릇 필부(匹夫)가 부자(父子)사이에 처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오직 모든 일을 잘하여 나가기를 바라는 도리에 있어 간혹 꾸짖을 때가 많은 법인데, 이는 실로 지나치게 사랑하는 데에서 연유된 것이요 본디 매우 미워하는 예에서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남을 대하는 즈음에서는 문득 아들을 위하여 숨기는 의리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제왕가(帝王家)에서 저이(儲貳)078) 를 배양하는 도리는 더욱 절대로 필부(匹夫)의 경우와는 별다른 점이 있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요순(堯舜) 이외에 매사를 모두 선(善)하게 한다는 것은 실로 쉽사리 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설령 춘궁에 대해 성심(聖心)에 조금 미흡한 점이 있었으면 엄중하게 꾸짖어 가르치는 것도 불가 할 것이 없는데 이제 대신(大臣)을 인접(引接)하여 쉽사리 발설(發說)하였으니, 앞으로 선후책(善後策)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는 이미 서로 숨겨준다는 의리에 어긋났는데다 또 밖에 선시(宣示)하려 하지 않으니 대중의 마음에 의혹을 품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고 성심(聖心)의 소재를 이해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소인(小人)의 마음으로 망령되이 억측한 바가 있게 된 것이다. 그 뒤 비망기(備忘記)의 사의(辭意)에 나타난 개오(開悟)와 춘궁의 소장에 대한 비답의 근간(懃懇)한 것으로써 살펴본다면 또한 중상의 뜻이 과연 진실로 지나치게 사랑한 데서 연유된 것이요 본디 매우 미워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러러 헤아릴 수가 있다. 이로부터 중외(中外)의 의혹을 풀 수 있고 국세(國勢)를 태산(泰山)처럼 튼튼한 데로 옮겨놓을 수 있으니, 이토록 지나치게 걱정 할 것이 뭐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것은 그러하다. 그러나 군하(群下)의 마음에 아직도 남은 두려움이 있어 은우(隱憂)079) 를 지나치게 품고 있는 것은 대개 춘궁(春宮)께서 처해 있는 처지를 위하여 실로 견제되는 단서가 많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만일 일에 따라 번번이 품(稟)하게 하여 스스로 전단(專斷)하지 못하게 하려면 이는 자못 수고로움을 대신시키게 하는 뜻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매사를 스스로 결단하게 하려고 한다면 비록 모두 최선을 다하더라도 마땅히 병통이 생길 우려가 있는 것인데 더구나 서사(庶事)가 총집(叢集)되어 재단(裁斷)이 지극히 번거로우니, 어떻게 백번 한 일이 백번 다 성상(聖上)의 뜻에 맞게 될 것을 보장할 수가 있겠는가? 만일 지나치게 사랑하고 모든 일을 잘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촉발(觸發)되어 다시 털끝만큼이라도 성충(聖衷)에 걸리는 것이 있게 되면 춘궁의 불안함이 전보다 배가 될 뿐만이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전하의 측근에 있는 무식한 무리들이 성인(聖人)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는 모두 지성스럽고 가엾게 여겨서 화내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데에서 나온 성교(盛敎)라는 것을 모르고 망령되이 서로 억측하여 혹은 주상의 마음을 엿보는 일이 있게 된다면, 이는 진실로 크게 걱정스러운 것이다. 유독 알 수 없는 것은 우리 주상의 자애(慈愛)하는 덕이 경각(頃刻)사이에도 여기에 소홀히 하는 것이 없어서 곡진히 보호(保護)할 계책을 세우고 있느냐 하는 그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런 등류의 가항(街巷)의 말들이 부산하게 그치지 않고 있으니, 천만 가지 걱정이 중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연석(筵席)에서의 분부를 환하게 게시(揭示)하시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국가의 뜻을 쉽게 깨닫는데도 오히려 이렇게 동요되고 있는데, 더구나 저 외방(外方)에서 전해 들은 소문은 누가 가가 호호(家家戶戶) 돌아다니면서 낱낱이 금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초야(草野)에 은거(隱居)한 노상(老相)080) 이 처음 이 소식을 듣고 경황(驚惶)하여 집 사람들과 결별(訣別)하고 허겁지겁 달려와서 혈성(血誠)을 쏟아 봉장(封章)을 했는데, 말에 규각(圭角)이 많았던 것은 대개 걱정이 깊었기 때문에 그 말이 과했던 것입니다. 좌상(左相)의 불행이 여기에서 한층 가중되었는데 노상(老相)의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이 또 매우 엄준하였으니, 이는 또 더욱 노상(老相)의 불행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따져보면 모두가 연설(筵說)이 일반에게 발표되지 않은 탓인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어찌하여 밝게 게시하여 두 정승의 불행을 풀어주지 않고 이에 괴란(壞亂)시킨다느니 배알(排軋)한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노상(老相)을 의심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 노상(老相)은 평소 조정의 의논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믿을 수 없는 의논에 동요되지도 않았으므로 온 세상이 존앙(尊仰)하는 바이니, 전하께서 의중(倚重)하시는 것이 어떠하셨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옳지 않다는 지목을 가하여 아예 말단의 서관(庶官)만도 못하게 대우하였으니, 어찌 많은 사람들의 소망을 너무도 어긋나게 한 처사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피건대, 지난번 비망기(備忘記)에 ‘이런 등류의 소장(疏章)은 이 뒤로는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고, 계속해서 노상(老相)의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의 엄절(嚴切)함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난번 사적으로 서로 놀라고 의심스러워하면서 함부로 억측하였던 사람들이 또 다시 서로 말하기를, ‘우리 주상께서 미안스럽게 여기고 있는 뜻이 아직도 다 제거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다.’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이 떠들썩하여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대개 이는 인심(人心)이 겁을 먹은 것이 화살에 다친 새가 활만 보면 놀라는 것과 같은 격인 것입니다.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타고 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에 대한 염려가 비록 지나치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역시 척연(慽然)한 점이 있습니다. 전하(殿下)께서 만약 연석(筵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환하게 게시(揭示)하여 척연(惕然)히 뉘우쳐 깨닫고 시원하게 의심을 풀어주려는 뜻을 보이지 않으신다면, 좌상(左相)에게 비록 해를 꿰뚫는 충심(忠心)이 있더라도 끝내 암매(暗昧)한 결과가 되기 마련이고, 노상(老相)에게 비록 괴란(壞亂)시켰다는 견책이 있더라도 끝내 충직(忠直)하다는 명성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의 입장에서 말씀드리건대, 전하의 심사(心事)를 갠 하늘의 밝은 태양처럼 환하게 한다면 많은 백성이 모두 장차 눈을 씻고서 우러러보게 될 것이고 손뼉을 치면서 축하하게 될 것이며 좌상(左相)이 광구(匡救)한 힘도 이로부터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니, 노상(老相)의 말은 저절로 헛된 우려(憂慮)에 불과하였다는 것이 되고 말 것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드러내어 보이지 않고 이렇게 구차스럽게 하고 계십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사람이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 고치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때의 독대(獨對)는 상하(上下)가 모두 잘못한 것이니, 노상(老相)의 말이 비록 중도에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성상(聖上)과 대신(大臣)이 허물이 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본래 손상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위험(危險)이라느니 괴란(壞亂)이라느니 통치(痛治)라느니 하는 등류의 분부를 내려 엄중한 말로 준절히 지척(指斥)한 것은 노성인(老成人)은 업신여겨서는 안된다는 의리에 어긋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중심(衆心)의 의혹은 이 때문에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聖意)를 세 번 생각하시는 데 돌리시고 성스러운 도량을 확충하여 널리 보이심으로써 전후 노상(老相)에게 내렸던 미안한 비답(批答)을 환수(還收)하소서. 그리고 근시(近侍)를 보내어 뉘우치고 있다는 뜻을 선유(宣諭)하여 상하(上下)사이에 털끝만큼도 걸리는 것이 없다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찌 대성인(大聖人)의 하는 일은 보통 사람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한 뒤에야 중외(中外)의 의혹이 풀리고 노상(老相)의 걱정도 풀리고 혹자(或者)들의 시끄러운 말도 변명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타파되고 공거문(公車文)081) 은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
하니, 답하기를,
"윗 조항에 운운(云云)하였는데, 【위에 보인다.】 그 다음에 진달한 것은 춘궁(春宮)을 위하고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이 단락(段落)은 품처(稟處)라고 한 아래에 있는 말인데 나머지도 모두 위에 보인다.】
하였다. 다음날 곽만적(郭萬績)이 인피(引避)하기를,
"엊그제 올린 한 장의 상소에 신의 어리석은 정성을 대략 바쳤는데, 삼가 성비(聖批)를 받들건대 반은 따르고 반은 따르지 않았으므로 봉독(奉讀)한 이래 한편 감격스럽기도 하고 한편 송구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신은 재주가 거칠고 성품도 졸렬하여 일찍이 피차(彼此)가 논의하는 마당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고, 이해(利害) 때문에 남을 따라 부앙(俯仰)한 형상이 없다는 것은 온 조정이 다같이 아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외람되이 변변찮은 글을 올려 언책(言責)을 메웠는데 성명(聖明)께서 바로 현란(眩亂)시킨다느니 신구(伸救)한다느니 하는 책망을 가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황공스럽고 부끄러워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또한 전하(殿下)께서 아직도 중도를 잡고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세우는 도리에 미진함이 있는 것인가 염려스러웠기 때문에 외람되고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다 진달하겠습니다. 아!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전수(傳授)할 즈음에는 반드시 요순(堯舜)의 집중(執中)으로써 으뜸을 삼았는데, 오직 우리 조종(祖宗)의 가법(家法)도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40년 동안 수용(受用)한 것에 이 가법(家法)을 극진히 시행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춘궁에게 전수(傳授)한 것은 그저 사장(私場)에서 서로 시끄럽게 떠드는 일인데 이것을 가지도 후손(後孫)을 위한 중요한 계책으로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른바 근일(近日)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 뿌리가 매우 길고 덩굴이 매우 번성한 것이어서 신(臣)이 소급해서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개 문자(文字)와 서찰(書札)로 인하여 서로 쟁변(爭辨)하는 과정에 생긴 일로서 처음에는 작은 일에서 비롯된 것인데 점차 사림(士林)의 사이에 다른 시비(是非)로 되는 데에 이른 것이고, 처음에는 사사(私事)에서 야기된 것인데 끝에 가서는 조정의 석상에서 큰 풍파(風波)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쪽에서는 우리가 옳고 저들은 그르다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우리가 잘했고 저들은 잘못했다고 하여 드디어 서로 다투는 논쟁의 장소를 만든 것으로 늘 결론이 나지 않은 안건(案件)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위에 있는 분들은 마땅히 공정하게 듣고서 포괄적으로 살피며 피아(彼我)의 차별이 없이 대하여 치우침이 없게 하여 저쪽의 잘한 것은 취하고 잘못한 것은 버리며 이쪽이 옳은 것은 쓰고 그른 것은 버림으로써 조정(調停)하여 화평(和平)하게 하는 처지를 만들어야만 중도를 세우는 도리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殿下)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혹은 변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치우치기도 합니다. 더구나 사랑해서 임용할 적에는 한쪽을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올바른 것이다.’ 하다가도, 미워하여 버릴 적에 이르러서는 한쪽을 모두 싸잡아 말하기를, ‘이것이 간사한 것이다.’ 하십니다. 그리하여 간사하다고도 하고 올바르다고 하여 또한 마음속에 일정(一定)한 것이 없기 때문에 금년에 이쪽을 부추기고 저쪽을 억제할 적에는 ‘아예 어진이를 높이고 사도(斯道)를 보위(保衛)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명년에 이쪽을 부추기고 저쪽을 억제할 적에는 또한 ‘아예 어진이를 높이고 사도(斯道)를 보위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다 같은 한 사람이고 다 같은 한 가지 일인데 어찌 금년에는 간사한 사람이 되다가 명년에는 올바른 사람이 되며, 금년에는 올바른 사람이 되다가 명년에는 간사한 사람이 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덕을 지키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이치를 살핀 것이 철저하지 못하여 도리어 공평하게 청단(聽斷)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표준을 세우는 도리에 있어 미흡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른바 어진이를 높이고 사도(斯道)를 보위한다는 것이 끝내는 어진이를 박대(薄待)하고 사도(斯道)를 해친 결과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시험삼아 과거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폄박(貶薄)을 죄로 삼아 고묘(告廟)해야 한다는 청이 있기에 이르렀는데, 【갑인년(甲寅年) 이후 당인(黨人)이 송시열(宋時烈)의 일을 논한 것을 가리킨다.】 전하께서 처음에는 날조하여 무함한 것이라 하여 내쳤지만 끝내는 참화(慘禍)를 면할 수 없다 하여 죄를 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천하의 지극히 원통한 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 신구(申球)의 소장(疏章)이 나왔을 적에도 대신(大臣)의 차자(箚子)에 말하기를, ‘본심(本心)은 무함하고 헐뜯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였고, 성비(聖批)에서도 이르기를, ‘어찌 무함하여 헐뜯는다는 죄목을 가하여 망측한 죄과(罪科)에 바로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 한 승지(承旨)의 소청(疏請)으로 갑자기 추삭(推削)하는 형률(刑律)을 시행하였으니, 그것이 지극히 원통한 일이 되기는 피차(彼此)가 일반인데 전하께서는 돌보아 생각하지 않고 계십니다. 전후의 처분(處分)이 이렇게 큰 차이(差異)가 있는데도 어진이를 높이고도 사도(斯道)를 보위한다고 하시니, 신은 진실로 황공(惶恐)합니다마는, 감히 그렇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갈수록 더욱 격화되어 나라를 병들게 하고 일을 해치는 일이 끝없이 발생하여 장차 나라를 망치고서야 그만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전하께서 이른바 나라의 급무(急務)라는 것은 신으로서는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조정의 의논이 마구 결렬(決裂)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양시 양비(兩是兩非)의 논설을 제기하여 조화(調和)시키려는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의 말에 ‘피차(彼此) 모두가 사류(士類)이니 마땅히 화해(和解)시켜야 된다.’ 하였는데, 지금의 이 논쟁도 양시 양비(兩是兩非)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비록 1백년이 되어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니 일시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이 이른바 서로 떠들면서 귀일시키지 못한 것이라고 한 것은 삼가 스스로 선정(先正)의 뜻과 마음을 같이하여 전하께서 조정(調停)시키고 화해시키는 방법을 도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감히 피차(彼此)에 주선(周旋)하면서 털끝만큼인들 현란(眩亂)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독대(獨對)한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선왕조(先王朝)에서도 있었던 것이고, 비밀스런 계책을 전차시켜서는 안된다는 데에서 나온 조처이므로, 진실로 오늘날에는 전례로 원용(援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독대(獨對)는 이미 전파해서는 안 될 단서가 없는 것인데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듣지 못하였고 일록(日錄)에 기재되지도 않았으므로, 중외(中外) 인심의 의혹이 비등(沸騰)하여 모두 독대한 것을 가지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방에 있는 노상(老相)이 갑자기 전파된 말을 듣고 보호(保護)하는 방도에 대해 깊이 걱정한 나머지 말을 만드는 즈음에 있어 비록 혹시 과격한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본의(本意)를 구명(究明)한다면 진실로 나라 일을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성실하여 딴 마음이 없는 것이니, 당초 어찌 조금이라도 경알(傾軋)시키려는 마음과 괴란(壞亂)시키려는 계책이 있었겠습니까? 노상이 이른바 사인(私人)이라고 한 말은 이것이 좌상(左相)이 대단히 불안해 하는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그날 대사(大事)를 의논하려 하면서 두세 대신(大臣)을 모두 부르지 않고 승지(承旨)와 사관(史官)도 입시(入侍)하지 못하게 하고 연석(筵席)에서 있었던 수작(酬酢)도 또한 선시(宣示)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가인(家人)이 사적인 일을 논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전하께서 깊이 생각지 않은 점입니다. 좌상(左相)은 비록 창졸하고 급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물러나 나아가지 않으면서 반드시 승지와 사관(史官)이 함께 입시(入侍)하기를 기다렸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으니, 비록 그의 말이 모두 힘을 다해 광구(匡救)하려는 데에서 나왔을지라도 노상(老相)의 말을 또한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대저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90세의 노신(老臣)이 그 사이에 무슨 사적인 이해(利害)가 있다고 고의로 위험(危險)한 말을 만들어 괴란(乖亂)시킬 계책을 부리려 했겠습니까? 지금에 와서 해야 될 방도는 오직 마땅히 연설(筵說)을 환하게 게시하여 노상(老相)을 위유(慰諭)하고 좌상(左相)을 권기(勸起)하게 할 길을 열게 해야 하는데, 이에 신을 심각하게 탓한다고 의심하고 사리에 어긋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신은 여기에서 두려움을 견딜 수가 없었고 이어 부끄럽고 송구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체직(遞職)시키도록 처치(處置)하였다. 【내용은 위에 보인다.】 곽만적(郭萬績)은 성품이 청정(淸正)하고 강직(强直)하여 평생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기묘년082) 파방과(罷榜科)에 들어 있던 사람이었는데 10년 뒤에 복과(復科)되었으나 나이가 이미 노쇠하였다. 동방(同榜)인 김유(金楺) 등이 바야흐로 극구 말려마지 않았으니, 만일 이때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형통한 사로(仕路)가 앞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문(斯文)의 송사(訟事)에 대한 마음이 공평했고 종사(宗社)에 대한 충심이 격동(激動)되어 한 몸의 이해(利害)를 계교하지 않고 소장을 올리고 나서 피혐하였는데, 그 말이 더욱 명확하여 개절(剴切)083) 했으므로 근래의 장소(章疏)가운데 제일로 인정되었다 김유(金楺)가 소장을 보고 대단히 노하여 청심환(淸心丸) 한 알을 보냈는데 곽만적은 웃으면서 이를 되돌려보냈다. 이로부터 당인(黨人)들의 고색(錮塞)이 더욱 강력하여졌으므로 폐기되어 궁하게 살았으나 태연하게 처신하였기 때문에 공의(公議)가 모두들 훌륭하게 여겼다.
- [註 073] 원량(元良) : 왕세자.
- [註 074] 예학(睿學) : 왕세자가 배우는 학문.
- [註 075] 양궁(兩宮) : 임금과 세자.
- [註 076] 좌상(左相) : 이이명(李頤命).
- [註 077] 수상(首相) : 김창집(金昌集).
- [註 078] 저이(儲貳) : 세자(世子).
- [註 079] 은우(隱憂) : 남이 알지 못하는 근신.
- [註 080] 노상(老相) : 윤지완(尹趾完).
- [註 081] 공거문(公車文) : 소장을 가리킴.
- [註 082] 기묘년 : 1699 숙종 25년.
- [註 083] 개절(剴切) : 아주 적절(適切)함.
원문
○獻納郭萬績上疏曰:
臣竊伏念聖候違豫, 迄今五載, 眼患益甚, 酬酢有難, 臣民焦煎, 有不可勝言。 乃者, 特下聖敎, 使春宮代勞而聽政, 聖躬之攝養斯專, 國事之裁斷無滯, 其爲慶幸, 爲如何哉? 第伏念聽政之擧, 何等重事, 而儀節之間, 有大段欠闕之典? 何者, 《書》曰: "正月上日, 受終于文祖。" 蕫氏釋之曰: "堯老舜攝, 而堯之爲帝自若也。 此爲告攝而謂之受終者, 蓋以重舜之責也。" 今日之擧, 雖出於代勞制煩之意, 而參見臣僚, 裁決政務, 無非攝行君事也, 正與舜攝無異也, 而迄無告攝之議, 豈非缺禮之大者乎? 我朝古禮, 雖未詳知, 而有事則告, 《禮經》所載, 則惟此聽政一事, 其不可廢而勿告也明矣。 今因聖候之彌留, 不得已有此擧, 則不可謂之慶, 而國有元良, 代理萬幾, 則上弛聖心之憂勤, 下無庶務之叢脞, 國家大事, 宜無大於此者。 此豈有事則告而已之比也? 臣意則宜先虔告太廟, 頒敎中外, 以明國體之至重, 以示民志之有定, 所不可已者也。 伏願下臣此疏, 于廟堂博議而擧行幸甚。 且伏念春宮邸下, 春秋鼎盛, 睿學方懋, 政宜日臨書筵, 講論經傳, 以收時敏日將之功, 而久因侍湯之憂, 不遑開筵之儀者, 今至累載, 非但臣僚之憂悶, 抑亦聖上之所軫念處也。 況此聽斷庶政之日, 尤宜討論於古今治亂之跡, 資益於大小政令之間, 則此誠今日之急先務也。 雖以春宮止孝之誠, 不可暫時離側, 而如有聖候稍間之時, 必令間開書筵, 引接宮僚, 尋溫舊學, 俾不至於久廢談經, 俾資治道, 則其於典學講治之道, 大有所益也。 伏願加意而申勉焉。 且伏念今此聽政之擧, 出於代勞省煩之意, 然其所裁斷酬應之節, 亦自不少。 此卽春宮之一初也, 兩宮受授之際, 必宜丁寧鄭重, 不可草草而止耳。 春宮初疏之批, 有曰: "敬怠之分, 興喪斯判, 可不懼哉, 可不愼哉?" 又曰: "《書》曰念終始典于學, 汝宜勉旃。" 可謂語精而旨深, 工約而效廣。 惟此兩敎, 無非精一執中中出來, 自是殿下家法, 而今又以此加勉, 孰不曰大哉王言, 一哉王心, 而及至春宮再疏之批, 乃以近日事, 處分正而是非明, 可以不惑於百世等語, 爲敎。 以臣愚意觀之, 所謂近日事, 初非關係於國家之存亡, 世道之興廢, 而不過私家辨爭之端, 則元非人君所可參涉主張事, 而終乃推而上之於朝廷, 數十年來是非, 互換取舍無常, 便作一世之大風波, 至於今日而極矣。 此實由於殿下執中建極之功, 有所未盡, 終未臻於協恭和衷之域, 則在今傳授之際, 殿下惟當以調劑平允之道, 諄諄告戒, 務歸於蕩蕩平平之地, 而乃反以私家互鬧未一之事, 爲今日貽燕之第一義, 臣恐有歉於祖宗朝相傳繼述之道也。 伏願繼自今, 凡於訓誨之際, 必以執中建極爲本, 是非務歸於公正, 取舍必戒其偏倚, 勉勉申申, 無少間斷, 俾令朝著, 長篤厚之風, 國家享和平之福, 豈不休哉? 且臣竊伏念, 獨對一事, 卽左相所遭之不幸, 而此實殿下之所使然也。 當初入診之日, 首相雖在病告, 當有原任三大臣, 而只令左相獨對, 不許承、史隨入, 獨對筵說, 又使勿錄, 以至中外之疑惑, 爲左相無限不安之端。 獨對時聖敎, 雖未知辭意之如何, 而其後答左相疏批, "以獨對時卿之端誠匡救, 可質神明" 爲敎。 凡事有過失, 然後方可以匡救, 而左相之匡救, 乃至竭誠, 則殿下過失之不啻微細, 可推而仰認, 而上下問答, 終不露示, 故群情驚惑, 萬目瞿瞿, 各以私臆, 妄相擬議, 無所不至。 或者曰: "無乃上敎如此, 左相之對如彼耶?" 或者曰: "無乃上敎如彼, 左相之對如此耶?" 或者曰: "凡人雖父子之間, 寬肅和毅, 稟氣或異, 故朝夕昵處, 言辭作爲之間, 自不得不意尙之差異。 無乃春宮德性淵深, 喜怒不形, 或於昵侍之際, 意尙差異, 有所不槪於聖心者耶?" 或者曰: "夫以匹夫之處父子間者言之, 惟其責備之道, 或多呵責之時, 此實由於過愛, 本非出於深惡, 故若其對人之際, 輒有爲子隱之之義。 況帝王家養儲貳之道, 尤有萬萬有別於匹夫者乎? 且堯、舜之外, 每事盡善, 實未易得, 則設令春宮, 有些不槪於聖心, 嚴呵之、誨責之, 無所不可, 而今乃引接大臣, 容易發說, 將何以善其後耶? 此旣有失於相隱之義, 又不欲宣示於外, 則無怪乎衆心之疑惑, 莫曉聖心之所在也。" 或者曰: "是皆以小人之腹, 妄有所測度也。 以其後備忘辭意之開悟, 春宮疏批之懃懇觀之, 亦可以仰揣主上之意, 果實由於過愛, 本非出於深惡。 自此可以解中外之疑惑, 可以措國勢於泰山, 何其過慮之至此耶?" 或者曰: "是則然矣。 群下之心, 猶有餘悸, 過懷隱憂者, 蓋爲春宮所處之地, 實多牽掣之端。 今若隨事輒稟, 而不欲自專, 則殊非代勞之意。 若欲每事自斷, 則雖皆盡善, 而當有生疣之慮。 況此庶事叢沓, 裁斷至繁, 安保其百發而百當於主上之意乎? 如或有過愛責備之心, 觸發於不知不覺之中, 復有所纖毫芥滯於淵衷, 則非但春宮之不安有倍於前, 萬一一有左右無識之輩, 不知聖人之一動一言, 皆出於至誠惻怛, 匪怒伊敎之盛敎, 妄相測度, 或有所窺測淺深, 則此誠大可憂者。 獨未知我主上止慈之德, 未嘗頃刻而有忽於此, 以思曲爲之圖耶?" 此等街談巷議, 紛紜不已, 千憂萬慮, 無所止泊, 無他, 筵敎不爲昭揭之致也。 京輦之人, 易曉國家之意, 尙且撓颺如此。 況彼流聞外方, 孰能家喩戶說, 逐一而禁止乎? 玆故, 遜荒老相, 始聞驚惶, 與家人訣, 顚倒走來, 瀝血封章, 語多圭角, 蓋其憂之也深, 故其言之也過矣。 左相之不幸, 於此又加, 而老相疏批, 又極嚴切, 則此尤老相之不幸也。 究厥所由, 莫非筵說之不出也。 殿下何不昭揭, 以解兩相之不幸, 乃以壞亂排軋等語, 致疑於老相? 噫! 老相平生, 不與朝論, 不撓浮議, 一世之所尊仰, 殿下之所倚重, 爲如何矣, 一朝加之以不韙之目, 待之不曾若末僚庶官, 豈不甚失於輿人之望耶? 臣竊伏見頃日備忘, 有此等疏今後勿捧之命, 繼而有老相疏批之嚴切。 向之私相驚疑而妄揣者, 又復相謂曰: "竊恐我主上未安之意, 尙未盡祛耶?" 如此爲說, 譁然不已。 蓋人心之怯, 有同傷弓! 愛君之誠, 出於秉彝。 其慮雖過, 其情亦慼矣。 殿下若不昭揭筵說, 以示惕然悔悟, 渙然消釋之意, 則左相雖有貫日之忠, 終爲暗昧之歸, 老相雖有壞亂之責, 終不失忠直之名。 若如臣言, 則殿下之心事, 如靑天白日, 萬姓皆將拭目而覩, 抃手而賀, 而左相匡救之力, 亦自此益著, 則老相之言, 自不過爲浪憂虛慮之歸而已, 殿下何憚而不爲, 直爲此泄泄也? 傳曰: "人孰無過? 改之爲貴。" 蓋伊日獨對, 上下俱失, 則老相之言, 雖曰過中, 聖上與大臣, 受以爲過, 本自無損, 乃反以危險壞亂痛治等敎, 嚴辭峻斥者, 有乖於無侮老成之義, 姑捨勿論, 衆心之疑惑, 以此轉深。 伏願殿下, 回聖意於三思, 擴睿量而示廣, 收還老相前後未安之批。 且遣近侍, 宣諭悔恨之意, 以示上下無一毫芥滯之意, 此豈非大聖人所作爲, 出尋常萬萬者乎? 夫然後中外之惑解, 老相之憂釋, 或者之紛紜, 不待辨而自破, 公車之章奏, 不待禁而自止矣。
答曰: "上款云云, 【見上。】 其次所陳, 出於爲春宮憂愛之忱, 深庸嘉尙。" 【此段在稟處下。 餘竝見上。】 翌日, 萬績引避曰: "昨上一疏, 略貢愚忱, 伏承聖批, 半從半違, 奉讀以來, 一感一悚。 臣才疎性拙, 曾不染跡於彼此言議之場, 不以利害, 隨人俯仰之狀, 通朝所共知也。 猥將芻蕘, 以塞言責, 不料聖明, 徑加以眩亂伸救之責。 惶恐慙恧, 不知所出, 而亦恐殿下, 尙有未盡於執中建極之道, 故不避煩猥, 冒死畢陳焉。 噫! 自古帝王, 傳授之際, 必以堯、舜之執中爲首, 惟我祖宗家法, 亦未嘗不在於此, 而深恐殿下四十年來所受用者, 有未能盡行此法, 而至於今日所傳授於春宮者, 只以私場互鬧之事, 以爲詒燕之謨者, 何哉? 所謂近日事, 根委甚長, 葛藤甚繁, 臣不欲溯論, 而蓋因文字、書札, 互相爭辨, 始源於細故, 而轉至爲士林間大是非, 初起於私事, 而末乃爲朝廷上大風波。 一則曰我長而彼短, 一則曰我是而彼非, 遂作互鬨之場, 常爲未了之案。 在上者只宜公聽而竝觀, 一視而無偏, 彼之長者取之, 短者去之, 此之是者用之, 非者舍之, 以爲調停和平之地, 方可合於建中之道, 而今者殿下則不然, 愛惡或變, 取舍亦偏。 況其愛而取之也, 擧一邊而曰: ‘是正也。’ 及其惡而舍之也, 竝一邊而曰: ‘是邪也。’ 或邪或正, 亦不能一定於心, 今年扶此而抑彼, 未嘗不曰: ‘尊賢而衛道也。’ 明年抑此而扶彼, 亦未嘗不曰: ‘尊賢而衛道也。’ 同是一人, 同是一事, 則豈有今年爲邪, 明年爲正, 今年爲正, 明年爲邪之理乎? 此殿下所以執德靡常, 燭理未究, 反有歉於公聽建中之道, 故所謂尊賢而衛道者, 終未免爲薄發爲害道之歸。 試以昔年事言之, 以貶薄爲罪, 至有告廟之請, 【指甲寅後黨人論宋時烈事。】 殿下始則謂之構誣而斥之, 終則未免慘禍而加之, 人皆知天下之至冤也, 而向者球疏之出也, 大臣之箚曰: ‘本心非出於誣毁。’ 聖批亦曰: ‘何可以誣毁之目, 直驅於罔測之科耶?’ 後因一承宣之疏請, 遽施追削之律, 其爲至冤, 彼此一般, 而殿下莫之恤焉。 前後處分, 若是逕庭, 而猶謂之尊賢而衛道, 臣誠死罪, 不敢謂之然也。 因此一事, 轉輾層激, 所以病國而害事者, 罔有紀極, 將至亡人國而後已。 殿下所謂有國之急務, 非臣之所敢知也。 昔先正臣李珥, 憫朝議之橫決, 乃出兩是兩非之說, 以爲調劑之計, 有曰: ‘彼此俱是士流, 但當和解之可也。’ 今此所爭, 亦可謂兩是兩非。 雖百年而未決, 非一時之可了, 則臣所謂互鬧未一云者, 竊自附於先正之意, 欲以贊殿下調劑和解之道。 豈敢有左右彼此, 一毫眩亂之意也? 至於獨對一事, 先王朝蓋有之, 而密勿之謨, 有不可傳播者, 則固非今日之所可援例也。 今此獨對之擧, 旣無不可傳播之端, 而承、史之所不聞, 日錄之所不載, 人心之疑惑, 中外之鼎沸, 莫不以獨對爲言, 則在外老相, 猝聞傳播之言, 深軫保護之道, 遣辭之際, 雖或過激, 而原其本意, 亶出憂愛, 斷斷無他, 則初豈有一分傾軋之心, 壞亂之計哉? 其所謂私人之說, 是爲左相大段不安之端。 殿下於伊日, 將議大事, 而二三大臣, 不爲竝招, 承旨、史官, 勿令入侍, 筵中酬酢, 又不宣示, 有若與家人論私事者然。 此則殿下未之深思處也。 左相雖當倉卒急遽之際, 固當却立不前, 必待承、史之偕入, 而不能辦此, 則雖其言皆出於竭力匡救, 而老相之言, 亦不可謂無所據也。 夫以九十無所求之老臣, 有何私利害於其間, 故爲危險之言, 以售乖亂之計哉? 爲今之道, 惟當昭示筵說, 慰諭老相, 俾開左相勸起之路, 而乃疑臣以深咎, 責臣以謬戾。 臣於此不勝瞿然, 而繼之以慙悚。" 處置駁遞。 【見上】 萬績, 性孤介白直, 平生不喜黨論。 初以己卯罷榜中人, 復科於十餘年後, 年已衰矣。 同榜金楺等, 方推挽不已, 儻隱默於此際, 亨路在前, 而心公於斯文之訟, 忠激於宗社之慮, 不較一身利害, 旣疏且避, 語益明確剴切, 爲近來章疏第一。 金楺見疏大恚恨, 遺以淸心丸一枚, 萬績笑而還之。 自是黨人, 錮塞益力, 閒廢窮居, 而處之夷然, 公議莫不韙之。
원본
숙종 43년 (1717) 9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