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보궐정오41권, 숙종 31년 3월 10일 甲辰 1/1 기사 / 1705년 청 강희(康熙) 44년
김덕기·한영휘·이동언을 논핵하는 정언 조태억의 상소문
국역
정언(正言) 조태억(趙泰億)이 상소하여 김덕기(金德基) 등 세 사람의 일을 논핵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김덕기 등이 사정을 하소연한 것은, 비록 모두 수식(修飾)하고 회피[抵頼]한 말이 있지마는 그들이 자백한 것도 낭자(狼藉)하다고 하겠습니다. 쌀 전대[米帒]와 장원의 돈[莊錢]은 비록 친가[親庭]로 보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일이 명백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의 의혹이 더욱 많습니다. 8건(件)의 비단 이불은 이미 전부 친가에 보냈다고 핑계대기가 어려운 일이니, 절반을 숨겼다는 것은 저절로 둔사(遁辭)018) 가 되는데, 그는 이에 어버이를 위하여 더러운 비난을 감수하겠다고 스스로 핑계하고 있고, 또 ‘과실을 보면 어짊을 알 수 있다.[觀過而知仁]’019) 는 것으로 허여(許與)하였습니다.
견사(繭絲)를 할당하여 독촉한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김덕기 자신의 공초(供招)를 가지고 보더라도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하는 일과는 관련이 없는데, 언주(讞奏)020) 하는 신하가 어버이를 위한 것이라고 혼동하여 말했습니다. 이런 것은 범죄 가운데에서 아주 미미한 것인데도 왜곡하여 억지로 갖다 붙였으니, 하물며 중차대한 일일 경우이겠습니까? 한유(韓愈)021) 가 말하기를, ‘법리(法吏)는 일체 법에 따라 집행하고 경술(經術)을 갖춘 선비는 경(經)을 인용하여 의논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가령 김덕기가 범한 죄가 다 어버이를 위한 일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법리(法吏)가 된 사람은 다만 마땅히 그 죄를 밝혀서 그 법률을 적용하여 주상의 처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더구나 여러 가지의 죄목(罪目)들이 다만 어버이를 위한 일이 아닐 뿐만이 아니니, 어찌 교동(膠東)의 색부(嗇夫)가 옷을 가지고 와서 자책(自責)한 것022) 과 비교하여 똑같이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일의 긍경(肯綮)023) 을 쥐고 있는 것은 다만 유씨(柳氏) 성(姓)을 가진 두 아전에게 있는데, 원래 수의(繡衣)024) 등의 말이 없었으니, 아주 어긋난 단서(端緖)입니다. 그렇다면 사관(査官)025) 이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어야 한다고 한것이 일의 대체에 당연한 것인데도 도신(道臣)이 즉시 석방하도록 한 것은 매우 괴이한 일입니다.
의언(議讞)026) 하는 중신(重臣)에 대해서도 원래 염문(廉問)027) 한 일이 없었다는 등의 말로써 상소하여 변명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조사하는 일로 사실을 알아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말똥 벽돌[馬屎甓]과 방죽둑풀[隄堰草]의 사건과 같은 경미한 일에 있어서는 모두 다 사실을 자백하였고, 누룩속의 은[麯中銀]과 왜관의 재화[倭館貨]와 같이 죄상이 중대한 것들에 대해서는 번번이 다 완강하게 숨겼으니, 어찌 신이 들은 바 가운데 경미한 것은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중대한 것은 다 빈말이겠습니까? 예전부터 왜인(倭人)이 동래부(東萊府)에 글을 보낼 때에는 으레 ‘동래 부사 대인 합하(東萊府使大人閤下)’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김덕기(金德基)의 탐도(貪饕)028) 함이 낭자(狼藉)하여 원망과 비방이 길에 가득하니, 왜관(倭館)에 있는 왜인(倭人)이 이에 왕래하는 편지에서 곧 ‘대인(大人)’이란 두 글자를 빼어 버렸습니다. 수류(殊類)029) 들도 오히려 탐오(貪汚)한 것을 천하게 여겨 미워할 줄 알고서 으레 쓰는 존칭(尊稱)도 사용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는데, 이에 맑은 조정[淸朝]의 악을 제거하는 형법을 이와 같은 사람에게 시행하지 못한다면, 이는 이른바 이웃 나라에 알려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영휘(韓永徽)의 일은 신이 또한 그 백탈(白脫)030) 함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피해가 승려의 무리에게 미쳤다는 한 가지 사항에 있어서는, 사장(査狀) 가운데에 지가(紙價)를 정한 한도 외에 더 준 것을 가지고 원통하다고 말하는 단서로 삼았는데, 가령 정한 한도 외에 더 준 것이 한결같이 사장(査狀)과 같다 하더라도 값을 더 준 혜택은 미세하고 부당하게 징수한 정사는 포학하니, 승려의 무리가 어찌 원망하고 괴로와하지 않겠습니까? 사장(査狀) 가운데 도신(道臣)의 결론(結論)에 이르기를, ‘4백여 결(結)이 장부에서 숨겨 누락된 것은, 어버이의 병(病)으로 근심스러워서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에서 나온 것인지 간교한 꾀를 써서 숨겨 누락시켜 자기를 살찌우는 자료로 삼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인지 그간의 실정은 밝혀내기 어려움이 있으나 소홀한 죄는 진실로 놀랄 만한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한영휘(韓永徽)가 참으로 간교한 꾀를 써서 자기를 살찌우려 한 자취가 없음을 분명히 알게 했더라면, 어찌 이처럼 의심스러운 말로써 두 갈래의 설명을 하였겠습니까? 더구나 읍비(邑婢)를 몰래 간통한 것은 본래 해당되는 형률이 있는데, 이에 ‘상중(喪中)에 있어 복제(服制)를 마쳤으므로 추후로 죄줄 수 없다.’는 등의 말로써 부당하게 미봉(彌縫)하였습니다. 국가에서 상중에 상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진념(軫念)하여 상(喪)을 당하기 전의 일을 처벌하지 말도록 한 경우는 있지만, 사건이 상복을 끝마친 뒤에 발생하였는데도 상을 당하기 전의 죄를 적용하지 말라는 전례가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관기(官妓)의 일은 전주(全州)·여산(礪山)의 사이에 심지어 ‘기생이 곡(哭)을 하니 계집종[女卑]이 너울[羅兀]을 깔아 주었다.’는 말까지 이곳저곳에 전파되어 마치 가요(歌謠)처럼 되어 있으므로, 처음부터 의심할 만한 자취가 없었다면 사람들의 말하는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도신(道臣)의 사장(査狀)이 비록 그다지 명쾌하지는 못하지만 또한 전연 숨겨질 수 없으므로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는 사이에 두었습니다. 법부(法府)의 의언(議讞)은 비록 말감(末減)031) 시켰지만, 본래 거기에 적용할 형률이 있는데도 이제 이에 모조리 깨끗이 해소시켜서 전연 과오가 없는 것으로 처리했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군중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욕이 가묘(家廟)에 미친 일은, 한영휘(韓永徽)의 공초(供招)에서 자신을 모욕한 것 중의 하나이며, 나무 조각에는 분면(粉面)032) ·방제(傍題)033) 가 없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말이 조금도 사리(事理)에 맞지 않습니다. 과연 분면·방제가 없었다면 도신(道臣)이 그것이 한영휘 집의 신주(神主)인지 어떻게 억측하여 알고서 정인서(鄭麟瑞)에게 비밀히 주어 한영휘에게 몰래 전달하도록 하였겠습니까? 지금 만일 그 당시의 도신(道臣)에게 물어보신다면 반드시 감히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정인서도 일찍이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 분명하게 말을 하였었는데 치대(置對)할 때 모호(模糊)하게 설명하였으니, 이는 위협과 제압에 겁을 내어 그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로 큰 집[大宅]을 지은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재료와 인력을 스스로 마련했다는 말은 그럴 듯한 방법으로 속일 수 있고, 땅을 가지고 다투어서 형제가 원수진 일은 조사하여 적발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독 괴상한 것은, 큰 길거리의 웅장한 집은 모든 사람이 눈으로 쳐다보는 바이므로 비록 어두운 가운데에서 더듬어 찾더라도 그것이 웅장하고 화려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조사해서 적발하는 낭관(郞官)이 이에 웅장하지도 않고 사치하지도 않다는 등의 말로 제멋대로 속여서 고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도 이와 같은데, 다른 일이야 더 무엇을 논하겠습니까?
이동언(李東彦)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매우 근거가 없습니다. 조사하는 벼슬아치가 규례(規例)를 마음에 두지 않고 전지(傳旨) 가운데 열거한 대계(臺啓)의 조어(措語)를 전혀 제시하여 논하지 않고서 한결같이 수인(囚人)의 공사(供辭)를 가지고 문목(問目)034) 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그 생각에 대개 각 사람의 대답하는 말이 혹시 차질(蹉跌)이 있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먼저 죄수가 밝힌 말을 가지고 부당하게 인도한 것입니다. 죄인들에게서 공초(供招)를 받을 때에도 전혀 세밀하게 캐묻는 일이 없고, 다만 각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바를 적어서 올리도록 하였으니, 고금 천하에 어디 이와 같은 조사가 있겠습니까? 대저 수인(囚人)들은 바로 각 사람의 옛 원[舊倅]의 아들이고, 각 사람들은 또한 수인(囚人)이 지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엄중하게 심문하여 끝까지 조사하게 한다 하더라도 저들은 바야흐로 안정(顔情)035) 에 구애되고 위세(威勢)에 짓눌려서, 바른대로 고하면 원한이 반드시 이르게 될 것이고 굳게 숨기면 형신(刑訊)의 두려움이 없을 것이니, 그들이 사실에 따라 바른대고 고하려 하지 않는 것은 형세가 그런 것이며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조사하는 관원이 말하기를, ‘이동언(李東彦)이 팔뚝을 찔러 피를 내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하니, 각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네.’ 하였고, 조사하는 관원이 말하기를, ‘이동언이 관아에 묵고 있을 때에 관아의 종[衙奴]도 있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하니, 각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네.’ 하였습니다. 한 가지 일에 이와 같이 하고 두 가지 일에도 이와 같이 하여, 심문하는 것은 모두 이동언이 스스로 해명한 말이고 답변한 것은 다만 그가 심문한 것에 대해서 더 부연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신의 계사(啓辭) 가운데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끝내 제시(提示)하여 언급한 일이 없었습니다. 비록 이미 조사를 했다고 하지만, 조사한 것은 신의 계사(啓辭)의 내용이 아니었으며 또한 전지(傳旨) 가운데 조사하라고 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도 조사를 시행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 이동언의 파주(坡州)의 일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3천 7백 호(戶)가 엽전(葉錢) 50전씩을 바쳤으니, 그 사이에 설혹 유망(流亡)하거나 전염병에 걸린 백성으로서 돈을 내지 못한 자가 있었더라도 백성에게서 거둔 것이 또한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읍민(邑民)이 부조(賻助)를 하는 것은 진실로 그 준례가 있으니, 준례에 따라 초상을 치른다면 누군들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상사(喪事)로 인하여 제멋대로 거두어 들이기를 이렇게까지 많이 하였으니, 온 고을이 원망하고 욕하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반함(飯含)을 대신시킨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과연 말하기 어려운 일인데도 파주(坡州)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공공연히 말하여 전파하였고 신이 들은 바도 이미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급하게 찾아내어서 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사(啓辭) 가운데서는 또한 바로 말할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차마 들지 못할 말이 있습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자진(自盡)036) 하여야 할 곳에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다가 김만근(金萬謹)이 신더러 모함한다고 말하게 된 후에야 들었던 바를 가지고 피사(避辭) 가운데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간에 해괴한 말이 또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지만 또한 다 아뢰고자 하지 않았으니, 신더러 일필(一筆)로 단정하여 조금도 지난(持難)037)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신의 본뜻을 아는 자가 아닙니다.
신의 계사(啓辭)가 처음 나왔을 때 파주(坡州)에서 호상(護喪)을 했던 사람이 신의 계사(啓辭)가 하나도 사실과 다름이 없다는 말로써 진신(搢紳)038) 들 사이에서 질정(質正)해 말하여, 그 말이 크게 전파되어서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습니다. 파주 사람은 조사가 엄중하지 않아서 사실대로 답변하지 않은 뒤에 와서는 또다시 조사하는 일이 있게 될까 두려워 서울에 올라와서 탐색하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는데, 신이 우연히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무릇 여기에 ‘이러이러하다.’는 말은 온세상 사람이 누군들 모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 사건이 사소한 문제가 아니므로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인데 유독 신이 이것을 말하였으니, 이는 신이 어리석고 경솔해서 들은 대로 즉시 아뢰고는 다시 생각하지 않는 병통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간혹 말이 너무 박절(迫切)하다고 신을 꾸짖고, 다른 사람의 좋지 못한 점을 말한다고 신을 경계한다면, 신은 진실로 번민하며 충심으로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무함(誣陷)이니 불위(不韙)니 하는 등의 명목은 모두 신을 억제하고 신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마치 저들은 이런 일이 없는데도 신이 이에 지어내고 남들은 듣지 못했는데 도신이 이에 처음으로 말한 것처럼 하는 점이 있으니, 신은 저으기 놀랍게 여기고 이어서 몹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동언이 스스로 말하기를, ‘원한을 맺은 일이 너무 많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일이 시끄럽게 전파된 것은 이미 그가 사헌부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일이니, 그가 말한 바는 더욱이 한 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박권(朴權)의 상소에 이른바 ‘돈독하고 후(厚)한 기풍(氣風)을 손상시키고 과격하게 적발하는 풍습을 조장시켰다.’고 한 것은 더욱 비웃을 만한 일입니다. 돈독하고 후한 기풍을 분명 서경(西京)039) 보다 나은 적이 없는데, 서경에서 숨상한 것은 효행(孝行)과 염치(廉耻) 뿐입니다.
지금 이러한 무리들을 규탄하고 조사하는 것은 바로 불효하고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 풍교(風敎)를 손상시키고 무너뜨릴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니, 반드시 풍교를 손상시킨 사람들을 부식(扶植)한다고 하여야만 바야흐로 과격하게 적발한다는 지목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지나간 일을 굳이 소급하여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답하였다.
- [註 018] 둔사(遁辭) : 빠져나가려고 꾸며대는 말.
- [註 019] ‘과실을 보면 어짊을 알 수 있다.[觀過而知仁]’ : 사람이 설사 과오를 범했더라도 그가 범한 과오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어진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임.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에, "사람의 허물은 각기 그 유(類)에 따라 이루어지니, 허물을 보면 이에 인(仁)을 알 수 있다."고 한 데서 나온 말. 주자(朱子)의 집주(集注)에, 사람의 허물은 종류에 따라 다르니, 군자(君子)는 항상 후(厚)한 면에서 실수를 범하고 소인(小人)은 항상 야박한 면에서 실수가 생기며, 군자는 애정이 지나친 데에서 과오가 생기고 소인은 몰인정함이 지나친 데에서 과오가 생기니, 여기서 보면 사람이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음.
- [註 020] 언주(讞奏) : 죄를 논하여 처벌 방법을 아룀.
- [註 021] 한유(韓愈) : 당(唐)나라의 문장가.
- [註 022] 교동(膠東)의 색부(嗇夫)가 옷을 가지고 와서 자책(自責)한 것 : 《후한서(後漢書)》 64권을 보면, 후한(後漢)의 오우(吳祐)가 순제(順帝) 때에 교동 후(膠東侯)의 상(相)이 되어 인정(仁政)을 펴며 솔선 수범하니, 이인(吏人)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한 번은 색부(嗇夫) 손성(孫性)이 사사로이 백성의 돈을 거두어 옷을 사다가 그 아버지에게 드리니, 아버지가 그것을 받고 노(怒)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상관이 있는데 어찌 차마 속일 수 있겠느냐?" 하고는 돌아가서 죄를 자백하도록 재촉하였다. 손성이 부끄럽고 두려운 나머지 관가에 옷[衣]을 가지고 자백하니, 오우가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그 까닭을 물었다. 손성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자, 오우가 말하기를, "아버지로 인해서 더러운 누명을 감수하니, 이른바 ‘허물을 보면 인(仁)을 안다’는 것이다." 하고, 돌아가서 그 아버지께 사죄하도록 하였으며, 그 옷은 도로 돌려주었다는 고사를 말함. 색부(嗇夫)는 소리(小吏).
- [註 023] 긍경(肯綮) : 가장 중요한 대목.
- [註 024] 수의(繡衣) : 암행 어사(暗行御史).
- [註 025] 사관(査官) : 검사를 맡은 관원.
- [註 026] 의언(議讞) : 죄의 정상을 의논함.
- [註 027] 염문(廉問) : 남모르게 사정을 물어봄.
- [註 028] 탐도(貪饕) : 재물과 음식을 몹시 탐냄.
- [註 029] 수류(殊類) : 오랑캐를 말함.
- [註 030] 백탈(白脫) : 아무 죄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나타남.
- [註 031] 말감(末減) :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함.
- [註 032] 분면(粉面) : 신주(神主)의 분을 바른 앞쪽.
- [註 033] 방제(傍題) : 신주 아래의 왼쪽에 쓴 제사를 받드는 사람의 이름.
- [註 034] 문목(問目) : 죄인을 신문하는 조목.
- [註 035] 안정(顔情) : 여러 차례 대면하여 일어나는 정.
- [註 036] 자진(自盡) : 외부적인 작용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하는 것.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어버이의 상(喪)은 진실로 스스로 마음을 다 써야 된다"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임.
- [註 037] 지난(持難) : 일을 어렵게 여겨 미루는 것.
- [註 038] 진신(搢紳) : 관직에 있는 사대부.
- [註 039] 서경(西京) : 서도(西都)를 말함. 서한(西漢)은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는데, 동한(東漢)이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뒤로부터 장안을 서경이라 일컬었음.
원문
德基等原情, 雖皆有修飾抵賴之辭, 而其所自服, 亦可謂狼藉矣。 米帒(莊)〔藏〕 錢, 雖曰送饋親庭, 而事不光明, 人滋疑惑。 八件錦衾, 旣難盡諉之遺親, 則諱其一半, 自是遁辭, 而渠乃自托於爲親而受汚議者, 又許以觀過而知仁, 至於課督繭絲一事, 以德基自招見之, 亦無與於孝養之節, 而讞奏之臣, 混謂之爲親。 此其罪犯中至微者, 亦且曲爲之傅會, 況大且重者乎? 韓愈之言曰: "法吏一切於法, 經術之士, 得引經而議。" 藉令德基所犯, 悉出於爲親, 爲法吏者, 只當明其罪擬其律, 以竢上處分, 而況其種種罪目, 不亶爲親之事, 則何可與膠東嗇夫持衣自訟者, 比而同之耶? 若其抱事肯綮, 只在於柳姓兩吏, 而元無繡衣等語, 大是違端, 則査官之姑待仍囚, 事體當然, 而道臣之卽令放送, 極是怪事。 至於議讞之重臣, 亦以元無廉問等語, 至有疏辨。 如是而其能望査事之得實乎? 至於馬屎甓隄堰草之事係輕微者, 竝皆首實, 如麯中銀、倭館貨之罪關重大者, 輒皆牢諱, 豈臣所聞輕微者, 皆實跡, 而重大者, 皆虛語也耶? 自前倭人之致書東萊府, 例書東萊府使大人閤下矣。 德基貪饕狼藉, 怨謗載路, 倭人之處館者, 乃於往來書牘, 輒去大人二字。 殊類尙知賤惡其貪汚, 羞用例書之尊稱, 乃以淸朝激濁之典, 不得加諸如此之人, 此所謂不可使聞於隣國者也。 韓永徽事, 臣又未見其白脫也。 害及僧徒一款, 査狀中乃以加給紙價, 爲稱冤之端。 縱令加給, 一如査狀, 加價之惠, 細, 橫徵之政, 虐, 僧徒安得不怨苦哉? 査狀中道臣結辭有曰: "四百餘結之隱漏, 出於親病憂擾, 不能致察之致乎? 出於用奸隱漏, 欲爲肥己之資乎? 其間實情, 有難鉤得, 而踈漏之罪, 誠爲可駭" 云。 向使道臣, 明知永徽眞無用奸肥己之跡, 則豈肯以此等疑晦之辭, 爲此兩岐之說乎? 況其邑婢潛奸, 自有當律, 乃以居憂服闋, 不可追罪等語, 曲爲彌縫。 在國家軫念憂服之人, 使之勿罪前事則有之矣, 未聞有事發於服闋之後, 而亦有喪前罪勿用之例也。 官妓事, 全、礪之間, 至以妓哭婢布羅兀之說, 狼藉傳播, 有同歌謠, 初無可疑之迹, 人之爲言, 何至此耶? 道臣査狀, 雖甚未快, 亦不能全然掩諱, 置之疑信之間。 法府議讞, 雖末減, 自有當勘之律, 而今乃一倂淸脫, 置之全然無過之地。 如是而其能服衆情乎? 辱及家廟事, 永徽之招, 謂之辱。 渠之一片木, 無粉面、傍題, 此不成說。 果無粉面、傍題, 則道臣何由臆知其爲永徽家神主, 而密付鄭麟瑞, 使之潛傳於永徽乎? 今若詢問於其時道臣, 則必不敢有所容隱也。 麟瑞亦嘗明言於士夫家, 而置對之際, 糢糊爲說。 此不過怵於威制而然矣。 至於新起大宅一事, 材力自辦之說, 可欺以其方, 爭地鬩墻之事, 非摘奸可知, 而獨怪夫通衢大第, 萬目所覩, 雖使暗中摸索, 亦可知其宏麗, 而摘奸郞官, 乃以不宏不侈等語, 恣意瞞告。 此事如此, 他尙何論? 至於李東彦事, 尤極無據。 査官不有規例, 傳旨中所擧臺啓措語, 全不提論, 一以囚人供辭爲問目。 此其意, 蓋慮各人所對之言, 或有蹉跌, 先以囚人發明之辭, 曲爲開導, 及其捧招之際, 全無盤詰之事, 只令各人, 書呈所懷。 古今天下, 安有如此査覈乎? 夫囚人, 卽各人舊倅之子, 各人, 又囚人所援之人。 雖使嚴問而窮覈之, 彼方拘於顔情, 迫於威勢, 直告則有怨毒之必至, 牢諱則無刑訊之可畏, 其不肯從實而直告, 勢也, 無足怪也。 査官曰: "東彦剌臂出血之說是乎?" 各人曰唯唯, 査官曰: "東彦衙客, 在衙奴亦在之說, 是乎? 各人曰唯唯。 一事而如此, 二事而如此, 所問者皆東彦自明之辭, 所答者不過就其問而增衍之, 臣之啓辭中一言半辭, 終無提及之事。 雖曰已査, 所査者非臣之啓, 亦非傳旨中所命査者。 如此而謂之行査可乎? 噫! 東彦 坡州之事, 可勝言哉? 三千七百戶之捧五十孔方, 其間雖或有流亡癘疫不能出錢者, 而其所收者, 亦不知其幾何矣。 邑民賻助, 誠有其例, 循例治喪, 誰曰不可, 而因喪橫斂, 至此夥然, 闔境怨罵, 烏得免乎? 至於替含一款, 果是難言之事, 而坡州往來之人, 公傳道之, 臣之所聞, 亦已多矣。 猶不欲遽爾索言, 啓辭中亦不能直言, 初則曰有不忍聞之說, 又曰不能無憾於所自盡之地, 及夫金萬謹, 謂臣以構成然後, 不得不以所聞之言, 略及於避辭中, 而其間可駭可怪之說, 又不止此, 亦不欲畢陳, 則謂臣一筆句斷, 曾不持難者, 非知臣本意者也。 臣啓初發之時, 坡州護喪人, 有以臣啓辭, 無一爽實之語, 質言於搢紳之間, 其言大播, 有耳皆聞。 坡人及至抱査不嚴, 不以實對之後, 又恐有更査之擧, 至有上京探伺者, 臣偶然目見之矣。 凡此云云之言, 一世之人, 孰有不知? 特以其事係非細, 莫有言之者, 而獨臣言之, 是則臣樸愚妄率, 隨聞直陳, 不復較量之病也。 人或責臣以辭太迫切, 戒臣以言人不善, 則臣固懣然心服, 而若其誣陷不韙等目, 無非抑勒臣脅持臣者, 有若彼無此事, 而臣乃做出, 人所不聞, 而臣乃創言者然, 臣竊駭然, 繼之以痛歎也。 東彦自以謂: "結怨甚多, 以至此境", 而此事喧播, 已在於渠未入臺之前, 其所爲言, 尤不滿一哂也。 朴權疏所謂: "傷篤厚之風, 長激訐之習" 云者, 尤可笑也。 篤厚之風, 宜莫尙於西京, 而西京所崇用者, 曰孝曰廉而已。 今之糾覈此輩, 正恐不孝不廉者之傷敗風敎耳。 必曰扶植傷敗風敎之人, 然後方可免於激訐之目耶云云。
上以旣往之事, 不必追提爲答。
숙종 31년 (1705) 3월 10일
숙종실록보궐정오41권, 숙종 31년 3월 10일 甲辰 1/1 기사 / 1705년 청 강희(康熙) 44년
김덕기·한영휘·이동언을 논핵하는 정언 조태억의 상소문
국역
정언(正言) 조태억(趙泰億)이 상소하여 김덕기(金德基) 등 세 사람의 일을 논핵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김덕기 등이 사정을 하소연한 것은, 비록 모두 수식(修飾)하고 회피[抵頼]한 말이 있지마는 그들이 자백한 것도 낭자(狼藉)하다고 하겠습니다. 쌀 전대[米帒]와 장원의 돈[莊錢]은 비록 친가[親庭]로 보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일이 명백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의 의혹이 더욱 많습니다. 8건(件)의 비단 이불은 이미 전부 친가에 보냈다고 핑계대기가 어려운 일이니, 절반을 숨겼다는 것은 저절로 둔사(遁辭)018) 가 되는데, 그는 이에 어버이를 위하여 더러운 비난을 감수하겠다고 스스로 핑계하고 있고, 또 ‘과실을 보면 어짊을 알 수 있다.[觀過而知仁]’019) 는 것으로 허여(許與)하였습니다.
견사(繭絲)를 할당하여 독촉한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김덕기 자신의 공초(供招)를 가지고 보더라도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하는 일과는 관련이 없는데, 언주(讞奏)020) 하는 신하가 어버이를 위한 것이라고 혼동하여 말했습니다. 이런 것은 범죄 가운데에서 아주 미미한 것인데도 왜곡하여 억지로 갖다 붙였으니, 하물며 중차대한 일일 경우이겠습니까? 한유(韓愈)021) 가 말하기를, ‘법리(法吏)는 일체 법에 따라 집행하고 경술(經術)을 갖춘 선비는 경(經)을 인용하여 의논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가령 김덕기가 범한 죄가 다 어버이를 위한 일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법리(法吏)가 된 사람은 다만 마땅히 그 죄를 밝혀서 그 법률을 적용하여 주상의 처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더구나 여러 가지의 죄목(罪目)들이 다만 어버이를 위한 일이 아닐 뿐만이 아니니, 어찌 교동(膠東)의 색부(嗇夫)가 옷을 가지고 와서 자책(自責)한 것022) 과 비교하여 똑같이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일의 긍경(肯綮)023) 을 쥐고 있는 것은 다만 유씨(柳氏) 성(姓)을 가진 두 아전에게 있는데, 원래 수의(繡衣)024) 등의 말이 없었으니, 아주 어긋난 단서(端緖)입니다. 그렇다면 사관(査官)025) 이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어야 한다고 한것이 일의 대체에 당연한 것인데도 도신(道臣)이 즉시 석방하도록 한 것은 매우 괴이한 일입니다.
의언(議讞)026) 하는 중신(重臣)에 대해서도 원래 염문(廉問)027) 한 일이 없었다는 등의 말로써 상소하여 변명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조사하는 일로 사실을 알아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말똥 벽돌[馬屎甓]과 방죽둑풀[隄堰草]의 사건과 같은 경미한 일에 있어서는 모두 다 사실을 자백하였고, 누룩속의 은[麯中銀]과 왜관의 재화[倭館貨]와 같이 죄상이 중대한 것들에 대해서는 번번이 다 완강하게 숨겼으니, 어찌 신이 들은 바 가운데 경미한 것은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중대한 것은 다 빈말이겠습니까? 예전부터 왜인(倭人)이 동래부(東萊府)에 글을 보낼 때에는 으레 ‘동래 부사 대인 합하(東萊府使大人閤下)’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김덕기(金德基)의 탐도(貪饕)028) 함이 낭자(狼藉)하여 원망과 비방이 길에 가득하니, 왜관(倭館)에 있는 왜인(倭人)이 이에 왕래하는 편지에서 곧 ‘대인(大人)’이란 두 글자를 빼어 버렸습니다. 수류(殊類)029) 들도 오히려 탐오(貪汚)한 것을 천하게 여겨 미워할 줄 알고서 으레 쓰는 존칭(尊稱)도 사용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는데, 이에 맑은 조정[淸朝]의 악을 제거하는 형법을 이와 같은 사람에게 시행하지 못한다면, 이는 이른바 이웃 나라에 알려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영휘(韓永徽)의 일은 신이 또한 그 백탈(白脫)030) 함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피해가 승려의 무리에게 미쳤다는 한 가지 사항에 있어서는, 사장(査狀) 가운데에 지가(紙價)를 정한 한도 외에 더 준 것을 가지고 원통하다고 말하는 단서로 삼았는데, 가령 정한 한도 외에 더 준 것이 한결같이 사장(査狀)과 같다 하더라도 값을 더 준 혜택은 미세하고 부당하게 징수한 정사는 포학하니, 승려의 무리가 어찌 원망하고 괴로와하지 않겠습니까? 사장(査狀) 가운데 도신(道臣)의 결론(結論)에 이르기를, ‘4백여 결(結)이 장부에서 숨겨 누락된 것은, 어버이의 병(病)으로 근심스러워서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에서 나온 것인지 간교한 꾀를 써서 숨겨 누락시켜 자기를 살찌우는 자료로 삼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인지 그간의 실정은 밝혀내기 어려움이 있으나 소홀한 죄는 진실로 놀랄 만한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한영휘(韓永徽)가 참으로 간교한 꾀를 써서 자기를 살찌우려 한 자취가 없음을 분명히 알게 했더라면, 어찌 이처럼 의심스러운 말로써 두 갈래의 설명을 하였겠습니까? 더구나 읍비(邑婢)를 몰래 간통한 것은 본래 해당되는 형률이 있는데, 이에 ‘상중(喪中)에 있어 복제(服制)를 마쳤으므로 추후로 죄줄 수 없다.’는 등의 말로써 부당하게 미봉(彌縫)하였습니다. 국가에서 상중에 상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진념(軫念)하여 상(喪)을 당하기 전의 일을 처벌하지 말도록 한 경우는 있지만, 사건이 상복을 끝마친 뒤에 발생하였는데도 상을 당하기 전의 죄를 적용하지 말라는 전례가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관기(官妓)의 일은 전주(全州)·여산(礪山)의 사이에 심지어 ‘기생이 곡(哭)을 하니 계집종[女卑]이 너울[羅兀]을 깔아 주었다.’는 말까지 이곳저곳에 전파되어 마치 가요(歌謠)처럼 되어 있으므로, 처음부터 의심할 만한 자취가 없었다면 사람들의 말하는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도신(道臣)의 사장(査狀)이 비록 그다지 명쾌하지는 못하지만 또한 전연 숨겨질 수 없으므로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는 사이에 두었습니다. 법부(法府)의 의언(議讞)은 비록 말감(末減)031) 시켰지만, 본래 거기에 적용할 형률이 있는데도 이제 이에 모조리 깨끗이 해소시켜서 전연 과오가 없는 것으로 처리했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군중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욕이 가묘(家廟)에 미친 일은, 한영휘(韓永徽)의 공초(供招)에서 자신을 모욕한 것 중의 하나이며, 나무 조각에는 분면(粉面)032) ·방제(傍題)033) 가 없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말이 조금도 사리(事理)에 맞지 않습니다. 과연 분면·방제가 없었다면 도신(道臣)이 그것이 한영휘 집의 신주(神主)인지 어떻게 억측하여 알고서 정인서(鄭麟瑞)에게 비밀히 주어 한영휘에게 몰래 전달하도록 하였겠습니까? 지금 만일 그 당시의 도신(道臣)에게 물어보신다면 반드시 감히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정인서도 일찍이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 분명하게 말을 하였었는데 치대(置對)할 때 모호(模糊)하게 설명하였으니, 이는 위협과 제압에 겁을 내어 그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로 큰 집[大宅]을 지은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재료와 인력을 스스로 마련했다는 말은 그럴 듯한 방법으로 속일 수 있고, 땅을 가지고 다투어서 형제가 원수진 일은 조사하여 적발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독 괴상한 것은, 큰 길거리의 웅장한 집은 모든 사람이 눈으로 쳐다보는 바이므로 비록 어두운 가운데에서 더듬어 찾더라도 그것이 웅장하고 화려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조사해서 적발하는 낭관(郞官)이 이에 웅장하지도 않고 사치하지도 않다는 등의 말로 제멋대로 속여서 고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도 이와 같은데, 다른 일이야 더 무엇을 논하겠습니까?
이동언(李東彦)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매우 근거가 없습니다. 조사하는 벼슬아치가 규례(規例)를 마음에 두지 않고 전지(傳旨) 가운데 열거한 대계(臺啓)의 조어(措語)를 전혀 제시하여 논하지 않고서 한결같이 수인(囚人)의 공사(供辭)를 가지고 문목(問目)034) 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그 생각에 대개 각 사람의 대답하는 말이 혹시 차질(蹉跌)이 있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먼저 죄수가 밝힌 말을 가지고 부당하게 인도한 것입니다. 죄인들에게서 공초(供招)를 받을 때에도 전혀 세밀하게 캐묻는 일이 없고, 다만 각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바를 적어서 올리도록 하였으니, 고금 천하에 어디 이와 같은 조사가 있겠습니까? 대저 수인(囚人)들은 바로 각 사람의 옛 원[舊倅]의 아들이고, 각 사람들은 또한 수인(囚人)이 지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엄중하게 심문하여 끝까지 조사하게 한다 하더라도 저들은 바야흐로 안정(顔情)035) 에 구애되고 위세(威勢)에 짓눌려서, 바른대로 고하면 원한이 반드시 이르게 될 것이고 굳게 숨기면 형신(刑訊)의 두려움이 없을 것이니, 그들이 사실에 따라 바른대고 고하려 하지 않는 것은 형세가 그런 것이며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조사하는 관원이 말하기를, ‘이동언(李東彦)이 팔뚝을 찔러 피를 내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하니, 각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네.’ 하였고, 조사하는 관원이 말하기를, ‘이동언이 관아에 묵고 있을 때에 관아의 종[衙奴]도 있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하니, 각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네.’ 하였습니다. 한 가지 일에 이와 같이 하고 두 가지 일에도 이와 같이 하여, 심문하는 것은 모두 이동언이 스스로 해명한 말이고 답변한 것은 다만 그가 심문한 것에 대해서 더 부연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신의 계사(啓辭) 가운데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끝내 제시(提示)하여 언급한 일이 없었습니다. 비록 이미 조사를 했다고 하지만, 조사한 것은 신의 계사(啓辭)의 내용이 아니었으며 또한 전지(傳旨) 가운데 조사하라고 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도 조사를 시행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 이동언의 파주(坡州)의 일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3천 7백 호(戶)가 엽전(葉錢) 50전씩을 바쳤으니, 그 사이에 설혹 유망(流亡)하거나 전염병에 걸린 백성으로서 돈을 내지 못한 자가 있었더라도 백성에게서 거둔 것이 또한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읍민(邑民)이 부조(賻助)를 하는 것은 진실로 그 준례가 있으니, 준례에 따라 초상을 치른다면 누군들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상사(喪事)로 인하여 제멋대로 거두어 들이기를 이렇게까지 많이 하였으니, 온 고을이 원망하고 욕하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반함(飯含)을 대신시킨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과연 말하기 어려운 일인데도 파주(坡州)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공공연히 말하여 전파하였고 신이 들은 바도 이미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급하게 찾아내어서 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사(啓辭) 가운데서는 또한 바로 말할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차마 들지 못할 말이 있습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자진(自盡)036) 하여야 할 곳에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다가 김만근(金萬謹)이 신더러 모함한다고 말하게 된 후에야 들었던 바를 가지고 피사(避辭) 가운데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간에 해괴한 말이 또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지만 또한 다 아뢰고자 하지 않았으니, 신더러 일필(一筆)로 단정하여 조금도 지난(持難)037)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신의 본뜻을 아는 자가 아닙니다.
신의 계사(啓辭)가 처음 나왔을 때 파주(坡州)에서 호상(護喪)을 했던 사람이 신의 계사(啓辭)가 하나도 사실과 다름이 없다는 말로써 진신(搢紳)038) 들 사이에서 질정(質正)해 말하여, 그 말이 크게 전파되어서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습니다. 파주 사람은 조사가 엄중하지 않아서 사실대로 답변하지 않은 뒤에 와서는 또다시 조사하는 일이 있게 될까 두려워 서울에 올라와서 탐색하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는데, 신이 우연히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무릇 여기에 ‘이러이러하다.’는 말은 온세상 사람이 누군들 모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 사건이 사소한 문제가 아니므로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인데 유독 신이 이것을 말하였으니, 이는 신이 어리석고 경솔해서 들은 대로 즉시 아뢰고는 다시 생각하지 않는 병통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간혹 말이 너무 박절(迫切)하다고 신을 꾸짖고, 다른 사람의 좋지 못한 점을 말한다고 신을 경계한다면, 신은 진실로 번민하며 충심으로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무함(誣陷)이니 불위(不韙)니 하는 등의 명목은 모두 신을 억제하고 신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마치 저들은 이런 일이 없는데도 신이 이에 지어내고 남들은 듣지 못했는데 도신이 이에 처음으로 말한 것처럼 하는 점이 있으니, 신은 저으기 놀랍게 여기고 이어서 몹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동언이 스스로 말하기를, ‘원한을 맺은 일이 너무 많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일이 시끄럽게 전파된 것은 이미 그가 사헌부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일이니, 그가 말한 바는 더욱이 한 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박권(朴權)의 상소에 이른바 ‘돈독하고 후(厚)한 기풍(氣風)을 손상시키고 과격하게 적발하는 풍습을 조장시켰다.’고 한 것은 더욱 비웃을 만한 일입니다. 돈독하고 후한 기풍을 분명 서경(西京)039) 보다 나은 적이 없는데, 서경에서 숨상한 것은 효행(孝行)과 염치(廉耻) 뿐입니다.
지금 이러한 무리들을 규탄하고 조사하는 것은 바로 불효하고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 풍교(風敎)를 손상시키고 무너뜨릴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니, 반드시 풍교를 손상시킨 사람들을 부식(扶植)한다고 하여야만 바야흐로 과격하게 적발한다는 지목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지나간 일을 굳이 소급하여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답하였다.
- [註 018] 둔사(遁辭) : 빠져나가려고 꾸며대는 말.
- [註 019] ‘과실을 보면 어짊을 알 수 있다.[觀過而知仁]’ : 사람이 설사 과오를 범했더라도 그가 범한 과오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어진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임.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에, "사람의 허물은 각기 그 유(類)에 따라 이루어지니, 허물을 보면 이에 인(仁)을 알 수 있다."고 한 데서 나온 말. 주자(朱子)의 집주(集注)에, 사람의 허물은 종류에 따라 다르니, 군자(君子)는 항상 후(厚)한 면에서 실수를 범하고 소인(小人)은 항상 야박한 면에서 실수가 생기며, 군자는 애정이 지나친 데에서 과오가 생기고 소인은 몰인정함이 지나친 데에서 과오가 생기니, 여기서 보면 사람이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음.
- [註 020] 언주(讞奏) : 죄를 논하여 처벌 방법을 아룀.
- [註 021] 한유(韓愈) : 당(唐)나라의 문장가.
- [註 022] 교동(膠東)의 색부(嗇夫)가 옷을 가지고 와서 자책(自責)한 것 : 《후한서(後漢書)》 64권을 보면, 후한(後漢)의 오우(吳祐)가 순제(順帝) 때에 교동 후(膠東侯)의 상(相)이 되어 인정(仁政)을 펴며 솔선 수범하니, 이인(吏人)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한 번은 색부(嗇夫) 손성(孫性)이 사사로이 백성의 돈을 거두어 옷을 사다가 그 아버지에게 드리니, 아버지가 그것을 받고 노(怒)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상관이 있는데 어찌 차마 속일 수 있겠느냐?" 하고는 돌아가서 죄를 자백하도록 재촉하였다. 손성이 부끄럽고 두려운 나머지 관가에 옷[衣]을 가지고 자백하니, 오우가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그 까닭을 물었다. 손성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자, 오우가 말하기를, "아버지로 인해서 더러운 누명을 감수하니, 이른바 ‘허물을 보면 인(仁)을 안다’는 것이다." 하고, 돌아가서 그 아버지께 사죄하도록 하였으며, 그 옷은 도로 돌려주었다는 고사를 말함. 색부(嗇夫)는 소리(小吏).
- [註 023] 긍경(肯綮) : 가장 중요한 대목.
- [註 024] 수의(繡衣) : 암행 어사(暗行御史).
- [註 025] 사관(査官) : 검사를 맡은 관원.
- [註 026] 의언(議讞) : 죄의 정상을 의논함.
- [註 027] 염문(廉問) : 남모르게 사정을 물어봄.
- [註 028] 탐도(貪饕) : 재물과 음식을 몹시 탐냄.
- [註 029] 수류(殊類) : 오랑캐를 말함.
- [註 030] 백탈(白脫) : 아무 죄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나타남.
- [註 031] 말감(末減) :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함.
- [註 032] 분면(粉面) : 신주(神主)의 분을 바른 앞쪽.
- [註 033] 방제(傍題) : 신주 아래의 왼쪽에 쓴 제사를 받드는 사람의 이름.
- [註 034] 문목(問目) : 죄인을 신문하는 조목.
- [註 035] 안정(顔情) : 여러 차례 대면하여 일어나는 정.
- [註 036] 자진(自盡) : 외부적인 작용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하는 것.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어버이의 상(喪)은 진실로 스스로 마음을 다 써야 된다"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임.
- [註 037] 지난(持難) : 일을 어렵게 여겨 미루는 것.
- [註 038] 진신(搢紳) : 관직에 있는 사대부.
- [註 039] 서경(西京) : 서도(西都)를 말함. 서한(西漢)은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는데, 동한(東漢)이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뒤로부터 장안을 서경이라 일컬었음.
원문
德基等原情, 雖皆有修飾抵賴之辭, 而其所自服, 亦可謂狼藉矣。 米帒(莊)〔藏〕 錢, 雖曰送饋親庭, 而事不光明, 人滋疑惑。 八件錦衾, 旣難盡諉之遺親, 則諱其一半, 自是遁辭, 而渠乃自托於爲親而受汚議者, 又許以觀過而知仁, 至於課督繭絲一事, 以德基自招見之, 亦無與於孝養之節, 而讞奏之臣, 混謂之爲親。 此其罪犯中至微者, 亦且曲爲之傅會, 況大且重者乎? 韓愈之言曰: "法吏一切於法, 經術之士, 得引經而議。" 藉令德基所犯, 悉出於爲親, 爲法吏者, 只當明其罪擬其律, 以竢上處分, 而況其種種罪目, 不亶爲親之事, 則何可與膠東嗇夫持衣自訟者, 比而同之耶? 若其抱事肯綮, 只在於柳姓兩吏, 而元無繡衣等語, 大是違端, 則査官之姑待仍囚, 事體當然, 而道臣之卽令放送, 極是怪事。 至於議讞之重臣, 亦以元無廉問等語, 至有疏辨。 如是而其能望査事之得實乎? 至於馬屎甓隄堰草之事係輕微者, 竝皆首實, 如麯中銀、倭館貨之罪關重大者, 輒皆牢諱, 豈臣所聞輕微者, 皆實跡, 而重大者, 皆虛語也耶? 自前倭人之致書東萊府, 例書東萊府使大人閤下矣。 德基貪饕狼藉, 怨謗載路, 倭人之處館者, 乃於往來書牘, 輒去大人二字。 殊類尙知賤惡其貪汚, 羞用例書之尊稱, 乃以淸朝激濁之典, 不得加諸如此之人, 此所謂不可使聞於隣國者也。 韓永徽事, 臣又未見其白脫也。 害及僧徒一款, 査狀中乃以加給紙價, 爲稱冤之端。 縱令加給, 一如査狀, 加價之惠, 細, 橫徵之政, 虐, 僧徒安得不怨苦哉? 査狀中道臣結辭有曰: "四百餘結之隱漏, 出於親病憂擾, 不能致察之致乎? 出於用奸隱漏, 欲爲肥己之資乎? 其間實情, 有難鉤得, 而踈漏之罪, 誠爲可駭" 云。 向使道臣, 明知永徽眞無用奸肥己之跡, 則豈肯以此等疑晦之辭, 爲此兩岐之說乎? 況其邑婢潛奸, 自有當律, 乃以居憂服闋, 不可追罪等語, 曲爲彌縫。 在國家軫念憂服之人, 使之勿罪前事則有之矣, 未聞有事發於服闋之後, 而亦有喪前罪勿用之例也。 官妓事, 全、礪之間, 至以妓哭婢布羅兀之說, 狼藉傳播, 有同歌謠, 初無可疑之迹, 人之爲言, 何至此耶? 道臣査狀, 雖甚未快, 亦不能全然掩諱, 置之疑信之間。 法府議讞, 雖末減, 自有當勘之律, 而今乃一倂淸脫, 置之全然無過之地。 如是而其能服衆情乎? 辱及家廟事, 永徽之招, 謂之辱。 渠之一片木, 無粉面、傍題, 此不成說。 果無粉面、傍題, 則道臣何由臆知其爲永徽家神主, 而密付鄭麟瑞, 使之潛傳於永徽乎? 今若詢問於其時道臣, 則必不敢有所容隱也。 麟瑞亦嘗明言於士夫家, 而置對之際, 糢糊爲說。 此不過怵於威制而然矣。 至於新起大宅一事, 材力自辦之說, 可欺以其方, 爭地鬩墻之事, 非摘奸可知, 而獨怪夫通衢大第, 萬目所覩, 雖使暗中摸索, 亦可知其宏麗, 而摘奸郞官, 乃以不宏不侈等語, 恣意瞞告。 此事如此, 他尙何論? 至於李東彦事, 尤極無據。 査官不有規例, 傳旨中所擧臺啓措語, 全不提論, 一以囚人供辭爲問目。 此其意, 蓋慮各人所對之言, 或有蹉跌, 先以囚人發明之辭, 曲爲開導, 及其捧招之際, 全無盤詰之事, 只令各人, 書呈所懷。 古今天下, 安有如此査覈乎? 夫囚人, 卽各人舊倅之子, 各人, 又囚人所援之人。 雖使嚴問而窮覈之, 彼方拘於顔情, 迫於威勢, 直告則有怨毒之必至, 牢諱則無刑訊之可畏, 其不肯從實而直告, 勢也, 無足怪也。 査官曰: "東彦剌臂出血之說是乎?" 各人曰唯唯, 査官曰: "東彦衙客, 在衙奴亦在之說, 是乎? 各人曰唯唯。 一事而如此, 二事而如此, 所問者皆東彦自明之辭, 所答者不過就其問而增衍之, 臣之啓辭中一言半辭, 終無提及之事。 雖曰已査, 所査者非臣之啓, 亦非傳旨中所命査者。 如此而謂之行査可乎? 噫! 東彦 坡州之事, 可勝言哉? 三千七百戶之捧五十孔方, 其間雖或有流亡癘疫不能出錢者, 而其所收者, 亦不知其幾何矣。 邑民賻助, 誠有其例, 循例治喪, 誰曰不可, 而因喪橫斂, 至此夥然, 闔境怨罵, 烏得免乎? 至於替含一款, 果是難言之事, 而坡州往來之人, 公傳道之, 臣之所聞, 亦已多矣。 猶不欲遽爾索言, 啓辭中亦不能直言, 初則曰有不忍聞之說, 又曰不能無憾於所自盡之地, 及夫金萬謹, 謂臣以構成然後, 不得不以所聞之言, 略及於避辭中, 而其間可駭可怪之說, 又不止此, 亦不欲畢陳, 則謂臣一筆句斷, 曾不持難者, 非知臣本意者也。 臣啓初發之時, 坡州護喪人, 有以臣啓辭, 無一爽實之語, 質言於搢紳之間, 其言大播, 有耳皆聞。 坡人及至抱査不嚴, 不以實對之後, 又恐有更査之擧, 至有上京探伺者, 臣偶然目見之矣。 凡此云云之言, 一世之人, 孰有不知? 特以其事係非細, 莫有言之者, 而獨臣言之, 是則臣樸愚妄率, 隨聞直陳, 不復較量之病也。 人或責臣以辭太迫切, 戒臣以言人不善, 則臣固懣然心服, 而若其誣陷不韙等目, 無非抑勒臣脅持臣者, 有若彼無此事, 而臣乃做出, 人所不聞, 而臣乃創言者然, 臣竊駭然, 繼之以痛歎也。 東彦自以謂: "結怨甚多, 以至此境", 而此事喧播, 已在於渠未入臺之前, 其所爲言, 尤不滿一哂也。 朴權疏所謂: "傷篤厚之風, 長激訐之習" 云者, 尤可笑也。 篤厚之風, 宜莫尙於西京, 而西京所崇用者, 曰孝曰廉而已。 今之糾覈此輩, 正恐不孝不廉者之傷敗風敎耳。 必曰扶植傷敗風敎之人, 然後方可免於激訐之目耶云云。
上以旣往之事, 不必追提爲答。
원본
숙종 31년 (1705) 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