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62권, 숙종 44년 11월 26일 庚子 2/2 기사 / 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의성 현령 이진망이 전정 환정의 폐해에 대해 상소하다
국역
의성 현령(義城縣令) 이진망(李眞望)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영남(嶺南)은 금년에 비록 조금 풍년이 들었다고 말하나, 상도(上道)의 여러 군(郡)은 재해(災害)를 입은 것이 모두 혹독합니다. 의성(義城)이 조금 충실한 편에 들어가지만, 실제로는 역시 흉년입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하건대, 백성들을 비록 구휼해야 한다 하더라도 국가를 풍족하게 하는 수용(需用)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적곡(糴穀)을 받아들이고 세금을 징수하며 밤낮으로 독촉하고, 굶주리고 야윈 이들에게 차마 채찍을 가하지는 못하고 위엄과 협박을 억지로 가하여 전지의 소출과 집안의 것을 모두 내게 하니, 소에 싣거나 사람이 지고서 넘어지는 온갖 형성은 눈에 보이는 것이 걱정스럽고 참혹합니다. 대체로 여기에서 관아와 민간의 심력(心力)이 모두 바닥이 났는데, 옛날의 환상(還上)을 추가하여 바치라는 영(令)을 또 내렸습니다. 신이 초가을 고을에 부임하여 언제나 길가에 파종(播種)하지 않은 전지가 있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그 전지의 주인이 죽었다고 말하였으며, 파종하고서 김을 매지 않은 것이 있어 물었더니, 그 주인이 병이 들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산마루에 시체를 거적에 싸서 장사지낸 것과 도랑과 구렁에 버려진 시체 등과 전야(田野)와 마을에서 신음하는 부류와 고아(孤兒)·과부(寡婦)가 가슴을 치며 우는 소리는 비록 전쟁으로 살해한 참화(慘禍)라 하더라도 이처럼 혹독한 적은 있지 않았습니다. 저 백성들은 죽지 않았으면 병이 들었으니, 경작하거나 파종한 자는 진실로 10명에 3, 4명도 되지 못하고, 그것도 가뭄에 마르거나 큰물에 잠겨서 그 자신도 먹을 수 없는데, 더구나 조세[征搖]와 부역(賦役)이겠습니까? 금년의 조세와 부역도 오히려 장만할 수 없는데, 더구나 구년(舊年)의 묵은 포곡(逋穀)이겠습니까? 지금 전염병 기운이 다시 발생하여 곳곳에서 치성하므로 이임(里任)이 병자(病者)를 보고하는 글과 상사(上司)에서 포곡을 독촉하는 관문(關文)이 좌우(左右)로 번갈아 이르니, 돌아보건대 어느 사람에게 물으려 하겠으며 어느 곳에다 책임지우려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각양(各樣)의 신포(身布)나 여러해 동안의 포세(逋稅)526) 는 이와 같은 것이 매우 많으므로, 여러 고을에서의 첩소(牒訴)와 여러 도(道)에서의 장문(狀聞)이 절실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이 일체 막고 있습니다. 저 묘당의 신하들 역시 일찍이 수령(守令)이 되고 감사(監司)가 되었었는데, 어떻게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렇게 못하는 것은 실제로 국가의 경용(經用)을 위해서입니다. 이 때문에 유사(有司)가 된 자는 오로지 토산물을 다 바치지 않아서 백성이 재력(財力)이 여유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백성의 단속을 강도(强盜)보다 엄중하게 하고, 포흠(逋欠)의 독촉을 풍화(風火)보다 급하게 합니다. 그래서 옛날 송(宋)나라 사람이 그 임금에게 고(告)하기를, ‘풍년(豐年)이 흉년(凶年)만 못합니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슬퍼하고 괴로와하는 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영지(令旨)를 내려 독촉하는 옛날의 환상(還上)을 맨 먼저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고, 그 나머지 여러 도(道)의 여러 해 동안 쌓인 포곡(逋穀)을 점차로 덜어 주어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소서. 양전(量田)은 옛날의 경계(經界)를 정하는 정치로서, 맹자(孟子)가 왕도(王道) 정치를 논함에 있어 반드시 경계를 우선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주자(朱子)가 군(郡)을 다스리면서 역시 일찍이 양전법(量田法)을 시행하도록 의논하였으니, 양전하는 법을 누가 감히 의논하겠습니까? 그러나 법이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것을 행하는 데에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마땅한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는데, 마땅한 사람을 얻는 것이 오히려 적당한 시기를 얻는 것만 못합니다. 어떤 경우를 마땅한 사람을 얻었다고 말하겠습니까? 사람은 반드시 총명하게 사물을 관찰하고 인자하게 남을 용서하는 두 가지 덕(德)을 구비(具備)한 후에야 일을 성취할 수 있고, 소루하고 잔인하여 각박한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 같은 것은 또한 반드시 천재(天災)가 일어나지 않고 농사가 자주 풍년이 들어서 사방의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게 지내며 무사(無事)한 후에 큰 역사를 일으켜 시행해야만 뒷날의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감히 조정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알지는 못하나, 명(命)을 받아 주관(主管)하는 자를 진실로 마땅한 사람을 얻었다고 하겠습니까? 여러 해 동안 큰물과 가뭄이 든 나머지에다 해마다 전염병을 겪은 뒤이므로, 경작하고 파종하는 일을 할 수 없었고, 생산[生殖]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집마다 한 해 동안의 식량을 내놓아야 하고, 집집마다 갑절이나 되는 이자 돈을 내놓아야 하는데, 더러 죽은 사람을 염습(斂襲)하여 장사지내거나 더러 병든 사람을 구료(救療)해야 하니, 말을 하려면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일을 집행하는 자는 도리어 함부로 큰 역사를 일으켜 사방을 거듭 소란스럽게 하며 굶주린 남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분명(奔命)527) 하는 데에서 괴롭히고, 귀록(鬼錄)528) 에 빠져 헐떡이는 이를 다시 가혹하게 침탈하는 데에서 피곤하게 하니, 마음으로써 말한다면 어질지 못한 데 가깝고 일로써 말한다면 상서롭지 못한 데 관계되지 않겠습니까? 신에게 천식(賤息)529) 이 있는데, 일찍이 매우 어여쁘게 여겼으나, 불행하게도 금년에 모두 독한 전염병에 걸려 지금까지 근육과 뼈가 완전하지 못하고, 기혈(氣血)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신이 감히 그들에게 괴로운 낯빛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근심하고 놀라 편안하지 못할까 두려워서이고, 감히 큰 소리로 꾸짖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두려워하여 안정하지 못할까 두려워서이고, 감히 중한 노역(勞役)을 요구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피로하여 불안(不安)해 할까 두려워서이니, 근심하면서 언제나 그들이 죽음의 지역으로 다시 떨어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방에서 굶주려 야위고 병들어 쇠약한 것이 어찌 신의 자식과 다름이 있겠으며, 조정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어찌 신이 천식(賤息)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말하는 자가 오히려 ‘상심(傷心)할 것이 없다.’고 말하니, 신은 매우 미혹됩니다. 호적(戶籍)에 편입된 백성은 생활하는 도리가 본래 박(薄)하여 그들이 공사(公私) 간에 출납(出納)의 비용과 처자(妻子)의 의복과 음식의 모두를 계산하면, 대개 결복(結卜)530) 사이를 넘지 않는데, 만에 하나라도 차질(蹉跌)이 생겨 높은 등급에 잘못 들게 된다면 열 식구의 목숨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전부(田夫)와 농부(農夫)에게 어찌 왕도(王道) 정치에서의 경계(經界)를 정하는 뜻과 맹자(孟子)·주자(朱子)의 글을 모두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침탈하게 되면 원망하고, 동요시키면 비방하고, 격앙(激昻)하면 갑자기 노하는 것은 돌아보건대, 사람마다 모두 잘하는 바입니다. 당(唐)나라 개원(開元)531) 무렵에 배관(裵寬) 등을 나누어 보내어 천하의 전호(田戶)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의 원망이 크게 일어났고, 잇따라 안녹산(安祿山)의 난(亂)532) 이 일어났으며, 송(宋)나라 선화(宣和)533) 말기(末期)에 일찍이 사신을 보내어 하북(河北)과 연경(燕京) 동서로(東西路)의 민전(民田)을 조사 정리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정강(靖康)의 화(禍)534) 가 일어났으며, 도종(度宗) 때에 또 제로(諸路)의 민전을 개량(改量)하였었는데 그때 원(元)나라 군사가 이미 악주(卾州)와 번성(樊城)을 넘어 양양(襄陽)을 포위하였었습니다. 그래서 ‘다만 산하(山河)를 가지고 조각조각 측량한다.’는 말이 지금까지 사람의 마음과 뼈골을 슬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옛날의 군자(君子)는 장차 일을 행하고자 하면, 법제(法制)의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은 것을 논하지 않고, 반드시 먼저 시기와 형세가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은가를 살폈던 것입니다. 신이 감히 양전법(量田法)을 헐뜯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양전을 시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원하건대, 국가에서 정직한 사람을 거용(擧用)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을 물리치며, 시기를 헤아리고 형세를 살펴 장관(長官)이 청렴하고 태수(太守)가 훌륭하여 농사는 풍년이 들고 백성의 살림이 풍족하게 된다면, 그 후에 양전법과 같은 것이 비록 천백(千百) 가지의 조목으로 멋대로 의논하는 자가 행하려고 하는 바를 행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천하에서 지극히 고통스러운 것은 인족(隣族)의 부역(賦役)을 대신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며, 천하에서 지극히 원통한 것은 백골(白骨)의 징포(徵布)보다 더 지나친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군병(軍兵)이 도망하면 만 10년, 시노비(寺奴婢)가 도망하면 만 15년이 되어야 비로소 징수하지 말도록 허락하는 것이 국가의 정해진 법입니다. 신이 호서(湖西)의 〈재해(災害)를〉 조사하러 나갔을 때에 일찍이 군병으로 도망한 자들을 위하여 연한(年限)을 줄이도록 청하였지만, 사람이 보잘것 없고 언론이 가벼운 까닭에 채택하여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고을로 옴에 이르러 시노비(寺奴婢)의 원통하고 고통스러움이 특히 심한 것을 보고, 신이 신의 고을 인구(人口)를 조사해 보니 모두 5만 6천 남짓한데, 그 가운데 2만 1천여 구(口)가 모두 시노비였습니다. 그리고 2만 1천여 구(口) 가운데 또 수천구(數千口)가 모두 유리(流離)하거나 도망하여 인족(隣族)으로 하여금 〈부역을〉 대신 감당하게 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이 고을 인구의 절반이 시노비이고, 시노비의 인족이 되는 자가 또한 고을 인구의 절반이 되니, 온 고을이 시노(寺奴)의 구실에 시달리지 않는 자가 대체로 얼마 안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관문(關文)이 빠르게 하달되면 온 고을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며 수령이 된 자는 해유(解由)535) 하는 데 끌리고, 아전들은 추론(推論)하는 데 겁을 내어 새벽에 일어나 안찰하고 열람하는 것은 모두 시노(寺奴)의 장부를 조사하고 마감하는 일이며, 뜰에 가득하게 채찍으로 매질하는 것은 모두 시노(寺奴)들의 구실을 징수하도록 독촉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한 사람이라도 혹시 빠뜨릴까 두려워하여 엄중한 관문이 다시 이르게 되면, 그 유리(流離)했거나 도망한 자의 호적에서 그 파계(派系)와 친족을 상고하여 그 인보(隣保)536) 를 추포(追捕)하게 하니, 굶주리고 추위에 얼어 병들고 야윈 형상은 귀물(鬼物)과 같습니다. 그 자신은 옷이 없으면서 손에는 면포를 가지고 겹겹으로 뜰아래 나열하여 꿇어앉아 있는데, 힐문(詰問)해 보면 더러 처당(妻黨)의 인척(姻戚) 집안이거나, 더러 며느리의 먼 친척이기도 하고, 더러 성명(姓命)은 모르지만 십수 년(十數年)전에 마침 같은 동리(洞里)에 살았던 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민(小民)들은 본래 예의(禮義)가 없어서 그들의 공시(功緦)537) 이하의 친족인 경우 얼굴도 알지 못하는데, 지금 바로 처당(妻黨)의 인척 집이나 며느리의 먼 친척과 10년 전에 마침 같이 살았던 동리의 사람을 위해서 부당한 비용을 거듭 갚은 것이 15년이나 오래 되기에 이르렀으니, 그 고통은 이미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모두 오래 살 수 없으니, 사람이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사이에 강건(强健)하게 힘껏 일할 수 있는 시기를 계산해 보면, 15년의 햇수를 잘 채울 수 있는 자가 많이 없습니다. 이는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애써 부지런히 일하여 대신 부역하는 것이니, 그 원통함 또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또 무고(無故)한 평민(平民)이 아닌 양인(良人)은 반드시 군적(軍籍)에 예속되고, 천인(賤人)은 반드시 사적(私籍)에 계속(係屬)되는 것과 부처(夫妻)와 자녀(子女)가 모두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이 된 자가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굶주림과 추위를 참아가며 빛을 내고 이자를 빌어 그의 신포(身布)538) 는 이미 다행히 판비(辦備)하면, 그 처자(妻子)에 대한 구실의 징수가 잇따라 이르게 되고, 처자에 대한 구실을 이미 마치면 인족에 대한 몫의 침탈이 또 어지럽게 일어나게 되니, 전지(田地)가 있는 자는 전지를 팔게 되고, 소[牛]가 있는 자는 소를 팔게 되며, 전지와 소를 이미 다 팔고 나면 문득 버리고 다른 지경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고을의 아전이 또 부득이 그 사람의 구실까지 그 이웃과 친족에게 옮기고, 서로 그 기한을 언급하되, 또 15년으로 합니다. 그리고 처음에 조정에서 징수하는 바는 단지 한 사람의 인족에게 하였는데, 그것이 끝에 가서는 한 지경에 거의 미치게 되었으며, 처음에 조정에서 기한한 것은 15년에 지나지 않았은데, 끝에 가서는 장차 수백 년에 걸쳐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邸下)께서는 특별히 숨겨진 폐단을 진념(軫念)하셔서 무릇 인족으로서 침해를 당하는 자에 대해 비록 하루아침에 모두 개혁(改革)시킬 수는 없겠지만, 우선 그 연한을 줄여 다시 10년으로 정하여 한 푼이라도 조금 너그럽게 하는 바탕을 삼으소서."
하였는데, 세자(世子)가 그 글을 묘당(廟堂)에 내렸으나, 끝내 채택하여 시행한 일이 없었다.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4면
- 【분류】신분-천인(賤人) / 군사-군역(軍役) / 역사-고사(故事)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농업-양전(量田)
- [註 526] 포세(逋稅) : 납부하지 않은 세금.
- [註 527] 분명(奔命) : 명을 받들기에 분주함.
- [註 528] 귀록(鬼錄) :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는 장부.
- [註 529] 천식(賤息) : 자기 자식의 겸칭.
- [註 530] 결복(結卜) : 결과 복. 곧 전지(田地)의 단위 면적. 양전척(量田尺)으로 1척 평방(平方)을 파(把:줌)라 하고, 10파를 1속(束:뭇)으로, 10속을 1부(負 또는 卜:짐)로, 1백 부를 1결(結:목)이라 함. 결복은 전지의 면적 또는 전세(田稅)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됨.
- [註 531] 개원(開元) :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연호.
- [註 532] 안녹산(安祿山)의 난(亂) :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755)에 안녹산이 어양(漁陽)에서 일으킨 반란을 말함.
- [註 533] 선화(宣和) : 송(宋)나라 휘종(徽宗)의 연호.
- [註 534] 정강(靖康)의 화(禍) : 정강은 송나라 흠종(欽宗)의 연호. 북송(北宋) 정강 2년(1127)에 금(金)나라 군사가 남하(南下)하여 송도(宋都)인 변경(汴京)을 함락시키고, 휘종(徽宗)과 흠종 부자(父子)를 포로로 붙잡아간 사실을 말함.
- [註 535] 해유(解由) : 관원들이 전직(轉職)할 때 재직중(在職中)의 희계·물품·출납에 대한 책임을 해제받던 일. 인수 인계가 끝나고 호조나 병조에 보고하여 이상이 없으면 이조에 통지하여 해유 문자(解由文字)를 발급하였음.
- [註 536] 인보(隣保) : 조선조 때의 자치 조직(自治組織)의 하나. 이것은 백성의 생활화 인구(人口)의 실태를 파악하고, 수화(水火)를 구제(救濟)하고 유이(流移)와 도둑을 방지하여 서로 보호하고 지키게 함으로써 풍속(風俗)을 이루게 한다는 목적에서 조직된 것으로 10호(戶) 3, 4호(戶)로써 한 인보(隣保)를 삼고, 그 중에서 항산(恒産)이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을 택하여 정장(正長)으로 삼아, 인보(隣保) 내의 인구를 기록하여 주장(主掌)하게 하였음.
- [註 537] 공시(功緦) : 대공복(大功服)·소공복(小功服)과 시마복(緦麻服)에 해당하는 친족.
- [註 538] 신포(身布) : 신공(身貢) 대신 바치는 베.
원문
○義城縣令李眞望上書。 略曰:
嶺南, 今年雖曰稍稔, 上道諸郡, 被災擧酷。 義城入於稍實, 而其實亦凶年耳。 然臣以爲民雖可恤, 而足國之需, 不可不念。 捧糴徵稅, 日夜督迫, 忍鞭飢羸, 强加威喝, 殫地竭廬, 牛載人負, 顚頓萬狀, 滿目傷慘。 蓋於是官民之心力俱竭, 而舊還上追捧之令, 又下。 臣秋初到官, 每於沿路, 見有田而不種者, 問之則曰: "其主死矣。" 有種而不耨者, 問之, 則曰: "其主病矣。" 山椒之藁葬, 溝壑之僵尸, 田野閭井呻吟之類、孤兒、寡婦哭擗之聲, 雖干戈殺伐之禍, 未有若是烈也。 彼百姓者, 不死則病, 耕且種者, 固不能什三四。 而槁於旱乾, 浸於水潦, 其身且不得食, 況於征徭、賦役乎? 今年之征徭、賦役, 尙不得辦, 況於舊年之宿逋乎? 見今癘氣復發, 在在熾盛, 里任報病之狀, 上司督逋之關, 左右互至, 顧欲問諸何人, 責諸何地也? 且夫各樣身布, 積年逋稅, 如此者甚多, 列邑之牒訴, 諸路之狀聞, 不爲不切, 而廟堂諸臣, 一切防塞。 彼廟堂之臣, 亦嘗爲守令爲監司, 豈不知生民之艱難哉? 然而不然者, 實爲國家之經用耳。 是以, 爲有司者, 惟恐土出之未盡, 民力之有餘, 束百姓嚴於强盜, 討逋欠急於風火。 昔宋人告其君曰: "豐年不如凶年。" 此誠悲苦之辭也。 伏乞特降令旨, 所督舊還上, 首先蕩減, 其餘諸道累年積逋, 漸次蠲除, 以固邦本焉。 量田, 古經界之政, 孟子論王政, 必以經界爲先, 朱子爲郡, 亦嘗議行量田法, 量田之法, 誰敢議之? 然法非不善, 行之有道。 其道在於得人, 而得人猶未若得時。 何謂得人? 人必聰察仁恕, 二德備具, 然後可以集事, 而無踈漏殘刻之弊矣, 若其時, 則又必天災不作, 年穀屢豐, 四方百姓, 皆安樂無事, 然後可以興行大役, 而無後弊矣。 臣不敢知, 朝廷之爲此擧也, 受命主管者, 誠得其人, 而積年又旱之餘, 連歲癘疫之後, 民旣耕種無得, 生殖不遂, 而家捐卒歲之糧, 戶出倍息之錢, 或歛送死者, 或救療病人, 言之涕下, 而執事者, 反欲橫興大役, 重擾四方, 使翳桑之餘生, 復困於奔命, 鬼錄之漏喘, 再疲於苛侵者, 無乃以心則近於不仁, 而以事則涉於不祥也? 臣有賤息, 亦嘗甚憐之, 不幸今年, 竝罹毒疫, 至今筋骨未完, 氣血未復。 臣不敢示之以苦色, 恐其憂怛而不寧也; 不敢呵之以大聲, 恐其忷悸而不定也; 不敢責之以重役, 恐其勞憊而不安也。 恤恤焉常恐其復阽於死域。 目今四方之餓羸病殘, 何異於臣之子, 而朝家之愛民, 亦何異於臣之愛賤息, 而說者猶曰無傷也, 臣甚惑之。 編戶之民, 生理本薄, 計其公私出入之費, 妻子衣食之具, 大都不踰於結卜之間, 而萬一蹉跌, 枉入高等, 則十口之命畢矣。 田夫、農夫, 何能盡講於王政經界之義, 孟子、朱子之書, 而至於侵之則怨, 撓之則謗, 激之則勃然怒者, 顧人人皆能也。 唐 開元中, 分遣裵寬等, 檢天下田戶, 民怨大起, 繼以祿山之亂; 宋 宣和末, 嘗遣使括河北、京東西路民田, 未幾靖康之禍作; 度宗時, 又改量諸路田, 其時元師已踰鄂、樊, 而圍襄陽矣。 惟把山河寸寸量之語, 至今愴人心骨。 是故, 古之君子, 將欲行事, 無論法制之善不善, 必先觀時勢之當不當。 臣非敢詆量田法, 亦非以量田爲不可行。 惟願國家擧直而錯枉, 量時而審勢, 長官淸而太守好, 年穀登而百姓足, 然後如量田法者, 雖千百其條, 恣議者所欲行而行之, 實未爲妨也。 天下之至苦, 莫甚於隣族之替役; 天下之至冤, 莫過於白骨之徵布。 夫軍兵逃亡, 滿十年, 寺奴婢逃亡, 滿十五年, 始許勿徵者, 國家定法。 臣之廉問湖西也, 嘗爲軍兵逃亡者, 請減年限, 而人微言輕, 未見採施, 及來是邑, 見寺奴婢之冤苦特甚。 臣按臣邑人口, 凡五萬六千有奇, 其中二萬一千餘口, 皆寺奴婢也, 二萬一千餘口之中, 又數千口, 皆流離逃亡, 使隣族替當者也。 是半縣爲寺奴婢, 而爲寺奴婢之隣族者, 又將半縣, 則擧一縣, 而不困於寺奴之役者, 蓋無幾矣。 每關文電馳, 闔縣風慴。 爲令者牽於解由, 爲吏者㤼於推論, 晨興而按閱者, 皆査勘寺奴之簿也, 滿庭之鞭撻者, 皆徵督寺奴之事也。 復恐其一人之或漏, 嚴關之復到也, 則就其流離逃亡者, 籍考其派族, 追捕其隣保, 飢凍病羸, 狀如鬼物。 其身則無衣, 其手則持布, 纍纍然羅跪於庭下, 詰之則或妻黨之姻家也, 或子婦之遠屬也, 或不知姓名, 十數年前, 適住於同里者也。 此等小民, 本無禮義, 自其功、緦以下之親, 則不識面孔, 而今乃爲妻黨姻家, 子婦遠屬, 與十數年前適住同里者, 橫費重償, 至於十五年之久者, 其苦已無量, 而人命不能皆壽, 生老病死之間, 計其强健力作之時, 能滿十五年數者無多, 則是一生勤苦, 爲他人替役也, 其冤又豈有涯耶? 且皆非無故平民, 良必隷於軍籍, 賤必係於私籍, 及夫妻子女, 皆爲公私賤者甚衆。 忍飢耐寒, 出債貸利, 其身布旣幸辦矣, 徵其妻子之役者, 繼至, 妻子之役旣畢, 隣族之侵, 又紛然而作焉。 有田者賣田, 有牛者賣牛, 田牛旣盡, 輒捨而去之他境, 則爲縣吏者, 又不得已, 而竝與其人之役而移之, 其隣若族, 互及其限, 又爲十五年。 其始則朝家所徵, 只是一人之隣族, 而其末則殆遍於一境矣; 其始則朝家所限, 不過十五年, 而其末則將連跨數百年而無窮極矣。 伏願邸下, 特軫隱弊, 凡隣族之見侵者, 雖不可一朝盡革, 而姑減其限, 更定十年, 以爲差寬一分之地。
世子下其書于廟堂, 卒無採施者。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4면
- 【분류】신분-천인(賤人) / 군사-군역(軍役) / 역사-고사(故事)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농업-양전(量田)
숙종 44년 (1718) 11월 26일
숙종실록62권, 숙종 44년 11월 26일 庚子 2/2 기사 / 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의성 현령 이진망이 전정 환정의 폐해에 대해 상소하다
국역
의성 현령(義城縣令) 이진망(李眞望)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영남(嶺南)은 금년에 비록 조금 풍년이 들었다고 말하나, 상도(上道)의 여러 군(郡)은 재해(災害)를 입은 것이 모두 혹독합니다. 의성(義城)이 조금 충실한 편에 들어가지만, 실제로는 역시 흉년입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하건대, 백성들을 비록 구휼해야 한다 하더라도 국가를 풍족하게 하는 수용(需用)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적곡(糴穀)을 받아들이고 세금을 징수하며 밤낮으로 독촉하고, 굶주리고 야윈 이들에게 차마 채찍을 가하지는 못하고 위엄과 협박을 억지로 가하여 전지의 소출과 집안의 것을 모두 내게 하니, 소에 싣거나 사람이 지고서 넘어지는 온갖 형성은 눈에 보이는 것이 걱정스럽고 참혹합니다. 대체로 여기에서 관아와 민간의 심력(心力)이 모두 바닥이 났는데, 옛날의 환상(還上)을 추가하여 바치라는 영(令)을 또 내렸습니다. 신이 초가을 고을에 부임하여 언제나 길가에 파종(播種)하지 않은 전지가 있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그 전지의 주인이 죽었다고 말하였으며, 파종하고서 김을 매지 않은 것이 있어 물었더니, 그 주인이 병이 들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산마루에 시체를 거적에 싸서 장사지낸 것과 도랑과 구렁에 버려진 시체 등과 전야(田野)와 마을에서 신음하는 부류와 고아(孤兒)·과부(寡婦)가 가슴을 치며 우는 소리는 비록 전쟁으로 살해한 참화(慘禍)라 하더라도 이처럼 혹독한 적은 있지 않았습니다. 저 백성들은 죽지 않았으면 병이 들었으니, 경작하거나 파종한 자는 진실로 10명에 3, 4명도 되지 못하고, 그것도 가뭄에 마르거나 큰물에 잠겨서 그 자신도 먹을 수 없는데, 더구나 조세[征搖]와 부역(賦役)이겠습니까? 금년의 조세와 부역도 오히려 장만할 수 없는데, 더구나 구년(舊年)의 묵은 포곡(逋穀)이겠습니까? 지금 전염병 기운이 다시 발생하여 곳곳에서 치성하므로 이임(里任)이 병자(病者)를 보고하는 글과 상사(上司)에서 포곡을 독촉하는 관문(關文)이 좌우(左右)로 번갈아 이르니, 돌아보건대 어느 사람에게 물으려 하겠으며 어느 곳에다 책임지우려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각양(各樣)의 신포(身布)나 여러해 동안의 포세(逋稅)526) 는 이와 같은 것이 매우 많으므로, 여러 고을에서의 첩소(牒訴)와 여러 도(道)에서의 장문(狀聞)이 절실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이 일체 막고 있습니다. 저 묘당의 신하들 역시 일찍이 수령(守令)이 되고 감사(監司)가 되었었는데, 어떻게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렇게 못하는 것은 실제로 국가의 경용(經用)을 위해서입니다. 이 때문에 유사(有司)가 된 자는 오로지 토산물을 다 바치지 않아서 백성이 재력(財力)이 여유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백성의 단속을 강도(强盜)보다 엄중하게 하고, 포흠(逋欠)의 독촉을 풍화(風火)보다 급하게 합니다. 그래서 옛날 송(宋)나라 사람이 그 임금에게 고(告)하기를, ‘풍년(豐年)이 흉년(凶年)만 못합니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슬퍼하고 괴로와하는 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영지(令旨)를 내려 독촉하는 옛날의 환상(還上)을 맨 먼저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고, 그 나머지 여러 도(道)의 여러 해 동안 쌓인 포곡(逋穀)을 점차로 덜어 주어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소서. 양전(量田)은 옛날의 경계(經界)를 정하는 정치로서, 맹자(孟子)가 왕도(王道) 정치를 논함에 있어 반드시 경계를 우선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주자(朱子)가 군(郡)을 다스리면서 역시 일찍이 양전법(量田法)을 시행하도록 의논하였으니, 양전하는 법을 누가 감히 의논하겠습니까? 그러나 법이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것을 행하는 데에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마땅한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는데, 마땅한 사람을 얻는 것이 오히려 적당한 시기를 얻는 것만 못합니다. 어떤 경우를 마땅한 사람을 얻었다고 말하겠습니까? 사람은 반드시 총명하게 사물을 관찰하고 인자하게 남을 용서하는 두 가지 덕(德)을 구비(具備)한 후에야 일을 성취할 수 있고, 소루하고 잔인하여 각박한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 같은 것은 또한 반드시 천재(天災)가 일어나지 않고 농사가 자주 풍년이 들어서 사방의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게 지내며 무사(無事)한 후에 큰 역사를 일으켜 시행해야만 뒷날의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감히 조정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알지는 못하나, 명(命)을 받아 주관(主管)하는 자를 진실로 마땅한 사람을 얻었다고 하겠습니까? 여러 해 동안 큰물과 가뭄이 든 나머지에다 해마다 전염병을 겪은 뒤이므로, 경작하고 파종하는 일을 할 수 없었고, 생산[生殖]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집마다 한 해 동안의 식량을 내놓아야 하고, 집집마다 갑절이나 되는 이자 돈을 내놓아야 하는데, 더러 죽은 사람을 염습(斂襲)하여 장사지내거나 더러 병든 사람을 구료(救療)해야 하니, 말을 하려면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일을 집행하는 자는 도리어 함부로 큰 역사를 일으켜 사방을 거듭 소란스럽게 하며 굶주린 남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분명(奔命)527) 하는 데에서 괴롭히고, 귀록(鬼錄)528) 에 빠져 헐떡이는 이를 다시 가혹하게 침탈하는 데에서 피곤하게 하니, 마음으로써 말한다면 어질지 못한 데 가깝고 일로써 말한다면 상서롭지 못한 데 관계되지 않겠습니까? 신에게 천식(賤息)529) 이 있는데, 일찍이 매우 어여쁘게 여겼으나, 불행하게도 금년에 모두 독한 전염병에 걸려 지금까지 근육과 뼈가 완전하지 못하고, 기혈(氣血)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신이 감히 그들에게 괴로운 낯빛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근심하고 놀라 편안하지 못할까 두려워서이고, 감히 큰 소리로 꾸짖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두려워하여 안정하지 못할까 두려워서이고, 감히 중한 노역(勞役)을 요구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피로하여 불안(不安)해 할까 두려워서이니, 근심하면서 언제나 그들이 죽음의 지역으로 다시 떨어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방에서 굶주려 야위고 병들어 쇠약한 것이 어찌 신의 자식과 다름이 있겠으며, 조정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어찌 신이 천식(賤息)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말하는 자가 오히려 ‘상심(傷心)할 것이 없다.’고 말하니, 신은 매우 미혹됩니다. 호적(戶籍)에 편입된 백성은 생활하는 도리가 본래 박(薄)하여 그들이 공사(公私) 간에 출납(出納)의 비용과 처자(妻子)의 의복과 음식의 모두를 계산하면, 대개 결복(結卜)530) 사이를 넘지 않는데, 만에 하나라도 차질(蹉跌)이 생겨 높은 등급에 잘못 들게 된다면 열 식구의 목숨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전부(田夫)와 농부(農夫)에게 어찌 왕도(王道) 정치에서의 경계(經界)를 정하는 뜻과 맹자(孟子)·주자(朱子)의 글을 모두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침탈하게 되면 원망하고, 동요시키면 비방하고, 격앙(激昻)하면 갑자기 노하는 것은 돌아보건대, 사람마다 모두 잘하는 바입니다. 당(唐)나라 개원(開元)531) 무렵에 배관(裵寬) 등을 나누어 보내어 천하의 전호(田戶)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의 원망이 크게 일어났고, 잇따라 안녹산(安祿山)의 난(亂)532) 이 일어났으며, 송(宋)나라 선화(宣和)533) 말기(末期)에 일찍이 사신을 보내어 하북(河北)과 연경(燕京) 동서로(東西路)의 민전(民田)을 조사 정리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정강(靖康)의 화(禍)534) 가 일어났으며, 도종(度宗) 때에 또 제로(諸路)의 민전을 개량(改量)하였었는데 그때 원(元)나라 군사가 이미 악주(卾州)와 번성(樊城)을 넘어 양양(襄陽)을 포위하였었습니다. 그래서 ‘다만 산하(山河)를 가지고 조각조각 측량한다.’는 말이 지금까지 사람의 마음과 뼈골을 슬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옛날의 군자(君子)는 장차 일을 행하고자 하면, 법제(法制)의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은 것을 논하지 않고, 반드시 먼저 시기와 형세가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은가를 살폈던 것입니다. 신이 감히 양전법(量田法)을 헐뜯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양전을 시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원하건대, 국가에서 정직한 사람을 거용(擧用)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을 물리치며, 시기를 헤아리고 형세를 살펴 장관(長官)이 청렴하고 태수(太守)가 훌륭하여 농사는 풍년이 들고 백성의 살림이 풍족하게 된다면, 그 후에 양전법과 같은 것이 비록 천백(千百) 가지의 조목으로 멋대로 의논하는 자가 행하려고 하는 바를 행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천하에서 지극히 고통스러운 것은 인족(隣族)의 부역(賦役)을 대신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며, 천하에서 지극히 원통한 것은 백골(白骨)의 징포(徵布)보다 더 지나친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군병(軍兵)이 도망하면 만 10년, 시노비(寺奴婢)가 도망하면 만 15년이 되어야 비로소 징수하지 말도록 허락하는 것이 국가의 정해진 법입니다. 신이 호서(湖西)의 〈재해(災害)를〉 조사하러 나갔을 때에 일찍이 군병으로 도망한 자들을 위하여 연한(年限)을 줄이도록 청하였지만, 사람이 보잘것 없고 언론이 가벼운 까닭에 채택하여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고을로 옴에 이르러 시노비(寺奴婢)의 원통하고 고통스러움이 특히 심한 것을 보고, 신이 신의 고을 인구(人口)를 조사해 보니 모두 5만 6천 남짓한데, 그 가운데 2만 1천여 구(口)가 모두 시노비였습니다. 그리고 2만 1천여 구(口) 가운데 또 수천구(數千口)가 모두 유리(流離)하거나 도망하여 인족(隣族)으로 하여금 〈부역을〉 대신 감당하게 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이 고을 인구의 절반이 시노비이고, 시노비의 인족이 되는 자가 또한 고을 인구의 절반이 되니, 온 고을이 시노(寺奴)의 구실에 시달리지 않는 자가 대체로 얼마 안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관문(關文)이 빠르게 하달되면 온 고을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며 수령이 된 자는 해유(解由)535) 하는 데 끌리고, 아전들은 추론(推論)하는 데 겁을 내어 새벽에 일어나 안찰하고 열람하는 것은 모두 시노(寺奴)의 장부를 조사하고 마감하는 일이며, 뜰에 가득하게 채찍으로 매질하는 것은 모두 시노(寺奴)들의 구실을 징수하도록 독촉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한 사람이라도 혹시 빠뜨릴까 두려워하여 엄중한 관문이 다시 이르게 되면, 그 유리(流離)했거나 도망한 자의 호적에서 그 파계(派系)와 친족을 상고하여 그 인보(隣保)536) 를 추포(追捕)하게 하니, 굶주리고 추위에 얼어 병들고 야윈 형상은 귀물(鬼物)과 같습니다. 그 자신은 옷이 없으면서 손에는 면포를 가지고 겹겹으로 뜰아래 나열하여 꿇어앉아 있는데, 힐문(詰問)해 보면 더러 처당(妻黨)의 인척(姻戚) 집안이거나, 더러 며느리의 먼 친척이기도 하고, 더러 성명(姓命)은 모르지만 십수 년(十數年)전에 마침 같은 동리(洞里)에 살았던 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민(小民)들은 본래 예의(禮義)가 없어서 그들의 공시(功緦)537) 이하의 친족인 경우 얼굴도 알지 못하는데, 지금 바로 처당(妻黨)의 인척 집이나 며느리의 먼 친척과 10년 전에 마침 같이 살았던 동리의 사람을 위해서 부당한 비용을 거듭 갚은 것이 15년이나 오래 되기에 이르렀으니, 그 고통은 이미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모두 오래 살 수 없으니, 사람이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사이에 강건(强健)하게 힘껏 일할 수 있는 시기를 계산해 보면, 15년의 햇수를 잘 채울 수 있는 자가 많이 없습니다. 이는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애써 부지런히 일하여 대신 부역하는 것이니, 그 원통함 또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또 무고(無故)한 평민(平民)이 아닌 양인(良人)은 반드시 군적(軍籍)에 예속되고, 천인(賤人)은 반드시 사적(私籍)에 계속(係屬)되는 것과 부처(夫妻)와 자녀(子女)가 모두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이 된 자가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굶주림과 추위를 참아가며 빛을 내고 이자를 빌어 그의 신포(身布)538) 는 이미 다행히 판비(辦備)하면, 그 처자(妻子)에 대한 구실의 징수가 잇따라 이르게 되고, 처자에 대한 구실을 이미 마치면 인족에 대한 몫의 침탈이 또 어지럽게 일어나게 되니, 전지(田地)가 있는 자는 전지를 팔게 되고, 소[牛]가 있는 자는 소를 팔게 되며, 전지와 소를 이미 다 팔고 나면 문득 버리고 다른 지경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고을의 아전이 또 부득이 그 사람의 구실까지 그 이웃과 친족에게 옮기고, 서로 그 기한을 언급하되, 또 15년으로 합니다. 그리고 처음에 조정에서 징수하는 바는 단지 한 사람의 인족에게 하였는데, 그것이 끝에 가서는 한 지경에 거의 미치게 되었으며, 처음에 조정에서 기한한 것은 15년에 지나지 않았은데, 끝에 가서는 장차 수백 년에 걸쳐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邸下)께서는 특별히 숨겨진 폐단을 진념(軫念)하셔서 무릇 인족으로서 침해를 당하는 자에 대해 비록 하루아침에 모두 개혁(改革)시킬 수는 없겠지만, 우선 그 연한을 줄여 다시 10년으로 정하여 한 푼이라도 조금 너그럽게 하는 바탕을 삼으소서."
하였는데, 세자(世子)가 그 글을 묘당(廟堂)에 내렸으나, 끝내 채택하여 시행한 일이 없었다.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4면
- 【분류】신분-천인(賤人) / 군사-군역(軍役) / 역사-고사(故事)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농업-양전(量田)
- [註 526] 포세(逋稅) : 납부하지 않은 세금.
- [註 527] 분명(奔命) : 명을 받들기에 분주함.
- [註 528] 귀록(鬼錄) :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는 장부.
- [註 529] 천식(賤息) : 자기 자식의 겸칭.
- [註 530] 결복(結卜) : 결과 복. 곧 전지(田地)의 단위 면적. 양전척(量田尺)으로 1척 평방(平方)을 파(把:줌)라 하고, 10파를 1속(束:뭇)으로, 10속을 1부(負 또는 卜:짐)로, 1백 부를 1결(結:목)이라 함. 결복은 전지의 면적 또는 전세(田稅)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됨.
- [註 531] 개원(開元) :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연호.
- [註 532] 안녹산(安祿山)의 난(亂) :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755)에 안녹산이 어양(漁陽)에서 일으킨 반란을 말함.
- [註 533] 선화(宣和) : 송(宋)나라 휘종(徽宗)의 연호.
- [註 534] 정강(靖康)의 화(禍) : 정강은 송나라 흠종(欽宗)의 연호. 북송(北宋) 정강 2년(1127)에 금(金)나라 군사가 남하(南下)하여 송도(宋都)인 변경(汴京)을 함락시키고, 휘종(徽宗)과 흠종 부자(父子)를 포로로 붙잡아간 사실을 말함.
- [註 535] 해유(解由) : 관원들이 전직(轉職)할 때 재직중(在職中)의 희계·물품·출납에 대한 책임을 해제받던 일. 인수 인계가 끝나고 호조나 병조에 보고하여 이상이 없으면 이조에 통지하여 해유 문자(解由文字)를 발급하였음.
- [註 536] 인보(隣保) : 조선조 때의 자치 조직(自治組織)의 하나. 이것은 백성의 생활화 인구(人口)의 실태를 파악하고, 수화(水火)를 구제(救濟)하고 유이(流移)와 도둑을 방지하여 서로 보호하고 지키게 함으로써 풍속(風俗)을 이루게 한다는 목적에서 조직된 것으로 10호(戶) 3, 4호(戶)로써 한 인보(隣保)를 삼고, 그 중에서 항산(恒産)이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을 택하여 정장(正長)으로 삼아, 인보(隣保) 내의 인구를 기록하여 주장(主掌)하게 하였음.
- [註 537] 공시(功緦) : 대공복(大功服)·소공복(小功服)과 시마복(緦麻服)에 해당하는 친족.
- [註 538] 신포(身布) : 신공(身貢) 대신 바치는 베.
원문
○義城縣令李眞望上書。 略曰:
嶺南, 今年雖曰稍稔, 上道諸郡, 被災擧酷。 義城入於稍實, 而其實亦凶年耳。 然臣以爲民雖可恤, 而足國之需, 不可不念。 捧糴徵稅, 日夜督迫, 忍鞭飢羸, 强加威喝, 殫地竭廬, 牛載人負, 顚頓萬狀, 滿目傷慘。 蓋於是官民之心力俱竭, 而舊還上追捧之令, 又下。 臣秋初到官, 每於沿路, 見有田而不種者, 問之則曰: "其主死矣。" 有種而不耨者, 問之, 則曰: "其主病矣。" 山椒之藁葬, 溝壑之僵尸, 田野閭井呻吟之類、孤兒、寡婦哭擗之聲, 雖干戈殺伐之禍, 未有若是烈也。 彼百姓者, 不死則病, 耕且種者, 固不能什三四。 而槁於旱乾, 浸於水潦, 其身且不得食, 況於征徭、賦役乎? 今年之征徭、賦役, 尙不得辦, 況於舊年之宿逋乎? 見今癘氣復發, 在在熾盛, 里任報病之狀, 上司督逋之關, 左右互至, 顧欲問諸何人, 責諸何地也? 且夫各樣身布, 積年逋稅, 如此者甚多, 列邑之牒訴, 諸路之狀聞, 不爲不切, 而廟堂諸臣, 一切防塞。 彼廟堂之臣, 亦嘗爲守令爲監司, 豈不知生民之艱難哉? 然而不然者, 實爲國家之經用耳。 是以, 爲有司者, 惟恐土出之未盡, 民力之有餘, 束百姓嚴於强盜, 討逋欠急於風火。 昔宋人告其君曰: "豐年不如凶年。" 此誠悲苦之辭也。 伏乞特降令旨, 所督舊還上, 首先蕩減, 其餘諸道累年積逋, 漸次蠲除, 以固邦本焉。 量田, 古經界之政, 孟子論王政, 必以經界爲先, 朱子爲郡, 亦嘗議行量田法, 量田之法, 誰敢議之? 然法非不善, 行之有道。 其道在於得人, 而得人猶未若得時。 何謂得人? 人必聰察仁恕, 二德備具, 然後可以集事, 而無踈漏殘刻之弊矣, 若其時, 則又必天災不作, 年穀屢豐, 四方百姓, 皆安樂無事, 然後可以興行大役, 而無後弊矣。 臣不敢知, 朝廷之爲此擧也, 受命主管者, 誠得其人, 而積年又旱之餘, 連歲癘疫之後, 民旣耕種無得, 生殖不遂, 而家捐卒歲之糧, 戶出倍息之錢, 或歛送死者, 或救療病人, 言之涕下, 而執事者, 反欲橫興大役, 重擾四方, 使翳桑之餘生, 復困於奔命, 鬼錄之漏喘, 再疲於苛侵者, 無乃以心則近於不仁, 而以事則涉於不祥也? 臣有賤息, 亦嘗甚憐之, 不幸今年, 竝罹毒疫, 至今筋骨未完, 氣血未復。 臣不敢示之以苦色, 恐其憂怛而不寧也; 不敢呵之以大聲, 恐其忷悸而不定也; 不敢責之以重役, 恐其勞憊而不安也。 恤恤焉常恐其復阽於死域。 目今四方之餓羸病殘, 何異於臣之子, 而朝家之愛民, 亦何異於臣之愛賤息, 而說者猶曰無傷也, 臣甚惑之。 編戶之民, 生理本薄, 計其公私出入之費, 妻子衣食之具, 大都不踰於結卜之間, 而萬一蹉跌, 枉入高等, 則十口之命畢矣。 田夫、農夫, 何能盡講於王政經界之義, 孟子、朱子之書, 而至於侵之則怨, 撓之則謗, 激之則勃然怒者, 顧人人皆能也。 唐 開元中, 分遣裵寬等, 檢天下田戶, 民怨大起, 繼以祿山之亂; 宋 宣和末, 嘗遣使括河北、京東西路民田, 未幾靖康之禍作; 度宗時, 又改量諸路田, 其時元師已踰鄂、樊, 而圍襄陽矣。 惟把山河寸寸量之語, 至今愴人心骨。 是故, 古之君子, 將欲行事, 無論法制之善不善, 必先觀時勢之當不當。 臣非敢詆量田法, 亦非以量田爲不可行。 惟願國家擧直而錯枉, 量時而審勢, 長官淸而太守好, 年穀登而百姓足, 然後如量田法者, 雖千百其條, 恣議者所欲行而行之, 實未爲妨也。 天下之至苦, 莫甚於隣族之替役; 天下之至冤, 莫過於白骨之徵布。 夫軍兵逃亡, 滿十年, 寺奴婢逃亡, 滿十五年, 始許勿徵者, 國家定法。 臣之廉問湖西也, 嘗爲軍兵逃亡者, 請減年限, 而人微言輕, 未見採施, 及來是邑, 見寺奴婢之冤苦特甚。 臣按臣邑人口, 凡五萬六千有奇, 其中二萬一千餘口, 皆寺奴婢也, 二萬一千餘口之中, 又數千口, 皆流離逃亡, 使隣族替當者也。 是半縣爲寺奴婢, 而爲寺奴婢之隣族者, 又將半縣, 則擧一縣, 而不困於寺奴之役者, 蓋無幾矣。 每關文電馳, 闔縣風慴。 爲令者牽於解由, 爲吏者㤼於推論, 晨興而按閱者, 皆査勘寺奴之簿也, 滿庭之鞭撻者, 皆徵督寺奴之事也。 復恐其一人之或漏, 嚴關之復到也, 則就其流離逃亡者, 籍考其派族, 追捕其隣保, 飢凍病羸, 狀如鬼物。 其身則無衣, 其手則持布, 纍纍然羅跪於庭下, 詰之則或妻黨之姻家也, 或子婦之遠屬也, 或不知姓名, 十數年前, 適住於同里者也。 此等小民, 本無禮義, 自其功、緦以下之親, 則不識面孔, 而今乃爲妻黨姻家, 子婦遠屬, 與十數年前適住同里者, 橫費重償, 至於十五年之久者, 其苦已無量, 而人命不能皆壽, 生老病死之間, 計其强健力作之時, 能滿十五年數者無多, 則是一生勤苦, 爲他人替役也, 其冤又豈有涯耶? 且皆非無故平民, 良必隷於軍籍, 賤必係於私籍, 及夫妻子女, 皆爲公私賤者甚衆。 忍飢耐寒, 出債貸利, 其身布旣幸辦矣, 徵其妻子之役者, 繼至, 妻子之役旣畢, 隣族之侵, 又紛然而作焉。 有田者賣田, 有牛者賣牛, 田牛旣盡, 輒捨而去之他境, 則爲縣吏者, 又不得已, 而竝與其人之役而移之, 其隣若族, 互及其限, 又爲十五年。 其始則朝家所徵, 只是一人之隣族, 而其末則殆遍於一境矣; 其始則朝家所限, 不過十五年, 而其末則將連跨數百年而無窮極矣。 伏願邸下, 特軫隱弊, 凡隣族之見侵者, 雖不可一朝盡革, 而姑減其限, 更定十年, 以爲差寬一分之地。
世子下其書于廟堂, 卒無採施者。
-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4면
- 【분류】신분-천인(賤人) / 군사-군역(軍役) / 역사-고사(故事)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농업-양전(量田)
원본
숙종 44년 (1718)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