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숙종실록27권, 숙종 20년 7월 4일 庚午 1/3 기사 /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영의정 남구만이 입궐하여 국옥에 대해 논의하고 차자를 올리다.

국역

영의정 남구만이 명을 받고 대궐에 나아오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위로하고 권면했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조정으로 돌아왔으니, 국옥(鞫獄) 일을 마땅히 앞서 명하신 대로 의계(議啓)해야 할 것인데, 글로는 자세하게 하기를 기필할 수 없으니, 신은 청컨대 먼저 진달(陳達)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무릇 국옥(鞫獄)은 고발하는 자가 명백하게 한 다음에야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김인(金寅)은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여, 더러는 처음에 말하지 않은 것을 뒤에 말하기도 하고, 더러는 처음에 말했던 것을 나중에 또한 속인 것이라고 하기도 하니, 허소하다 하겠습니다. 윤희(尹憘)와 성호빈(成虎彬)은 일곱 차례 형신(刑訊)하자 잇달아 죽어 차후로 다시 심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성기(李成夔)는 윤희·성호빈에 비하면 차이가 있지만 부득이 죄를 다스려야 할 것인데 지금 또한 죽어버렸습니다. 육지(陸贄)342) 의 말이 ‘실정이 나타나 자취가 현저해지고 자복하는 말을 하여 사리에 궁해지게 된 다음에야 형벌을 가해야 한다.’고 했으니, 이는 격언(格言)입니다. 또 이번에 옥사(獄事)는 조정 신하들이 진퇴(進退)할 즈음에 일어난 것이어서, 만일 조금이라도 원통하거나 외람된다면 나라의 기맥(氣脈)을 손상시키고 후세에 화를 끼치게 될 것이므로, 반드시 실정과 자취를 참작해 결단코 의심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 다음에야 처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더러 실정은 근사하면서도 자취가 서로 틀리는 것이 있기도 하고 더러는 자취는 서로 같으면서도 실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현일(李玄逸)이 탐시(探試)하려고 했다는 말은 김인(金寅)이 추후에 고발한 것에 민암(閔黯)과 이의징(李義徵)은 장상(將相)으로서 이 일을 주관하였고 이현일은 이조 판서로서 탑전(榻前)에서 진달하였으니, 이 일은 진실로 음흉(陰兇)하기도 하고 위구(危懼)스럽기도 한 것인데, 김인이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가 중간에야 비로소 고발했으니,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렵습니다. 처음에 이미 ‘민암과 이의징이 실지로 이현일을 교사(敎唆)하여 성상(聖上)의 뜻을 떠보게 한 것이다.’라고 하므로, 이현일이 나와서 두 사람에게 말을 하니, 두 사람이 ‘만일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마땅히 큰 일을 일으키겠다.’고 했었는데, 다시 물을 적에 당해서는 ‘이현일이 김원섭(金元燮)의 집에 갔을 때 말한 것이다.’고 하여, 전후의 말이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또 김인 자신이 들은 것이 아니고, ‘성호빈이 듣고서 김인에게 전언(傳言)한 것이다.’고 했는데, 성호빈이 이미 죽어버려 그 말이 전해진 계제(階梯)를 증거대어 물어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대개 이의징은 행신이나 처사가 본시 민암과 다를 것이 없고, 기사년343) 이후부터 나랏일을 그르친 것이 곧 민암과 이의징의 소위이기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는 것이고, 단지 김인의 고발 때문만은 아닙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만일 모역(謀逆)한 자취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어찌 무상(無狀)한 그 사람이 한 말 때문에 그대로 옥사(獄事)를 성립시킬 수 있겠습니까? 김인이 은(銀)과 베를 받은 것은 훈국(訓局)의 문부(文簿)를 고찰해 보건대, 그 수량이 한결같이 김인이 한 말과 같지만 모두 성호빈의 이름으로 빌었습니다. 그래서 김인과 이의징이 함께 만난 것을 알고자 하여 김인에게 두세 차례 물어보니 ‘원래 상면이 없었다.’고 했다가, ‘밤중에 만났다.’ 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번 만났다.’고도 하였습니다. 그 말이 이처럼 이리저리 뒤바뀌었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중에서도 의심스러운 것은 오직 신영원(申英元)이 은 빌린 일이 발각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의징이 기찰(譏察)한 것을 윤희·성호빈이 모두 이미 말했으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신영원이 은을 꾼 것이 역모(逆謀)를 위한 것인지요, 기찰을 위한 것인지요? 신영원이 이미 죽어버려 또한 물을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또 닭을 잡아 놓고 동맹(同盟)했다는 한 가지 일은 변서(變書)와는 같지 않았습니다. 김인은 스스로 ‘윤희를 속임으로써 이의징의 마음을 도발(挑發)하려 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김인의 말이 이미 들쭉날쭉했기 때문에 비록 이의징을 여러 차례 국문하여 다섯 차례나 형신했지만 끝내 그의 자복을 받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신은 이의징의 정상은 본래 살게 될 도리가 없지만 자취에 있어서는 또한 역모(逆謀)했다고 주장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현일이 있어서는 그의 사람됨을 보면 참으로 우소(迂疎)하여 쓸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지난번 사람들이 이 사람을 성상께 천문(薦聞)하여 대총재(大冢宰)의 자리에 두게 하였으니, 그들의 죄가 또한 무겁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시골구석의 소식이나 옛이야기는 매우 생소한 것이어서 비록 화를 만들어내려는 마음을 가진다 하더라도 결코 왕자(王子)에 관한 일로 입고(入告)하게 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런 말은 진실로 누구나가 보통 하는 말인 것입니다. 과연 김인의 말과 같다 하더라도, 이는 민암과 이의징에게 팔려 그런 것이고, 이현일이 흉모(兇謀)에 함께 참여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그가 이미 그런 말을 탑전(榻前)에서 하였으니, 진정(眞情)이 없었는지 있었는지를 어떻게 억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신은 이현일의 일에 자취는 의심스러운 것이 있지만 실정은 혹 용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의징과 이현일은 걸린 죄는 지극히 무거운데 그들의 실정과 자취는 이처럼 같지 않음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이현일은 죄가 또 있습니다. 중궁(中宮)께서 사제(私第)에 계실 때 올린 상소에 한 번은 ‘스스로 하늘과 끊었다[自絶于天]’고 했고, 한 번은 감히 ‘피자(彼字)’를 중궁께 쓰기도 한 것입니다. 접때 사람들은 인륜이 끊어지고 의리에 캄캄하여, 엄외(嚴畏)하고 존경(尊敬)하는 뜻이 있어야 함을 알지 못하여 방자하게 패만(悖慢)한 말을 했으니, 이는 목내선(睦來善)의 ‘불공경(不恭敬)’이란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의 죄는 결코 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본뜻은 딴 궁(宮)에 옮겨 모시고 늠료(廩料)를 후하게 마련하며 시위(侍衛)를 두어 예우(禮遇)하는 방도를 만들게 하려고 지척(指斥)하는 말을 하느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처럼 된 것이니, 이 또한 자취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실정은 침해하려는 뜻이 없었던 것이니, 침해한 사람들과 죄를 같게 한다면 혹 원통하다고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한 옳게 여겼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고발한 자 세 사람이 옥중(獄中)에 있으니, 곧 함이완(咸以完)·이시도(李時棹)·김인(金寅)입니다. 함이완은 비록 민암(閔黯)에게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이미 스스로 고발을 한 것은 곧 모두가 진신(搢紳)들에게 파급되게 하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민암의 경우 본죄(本罪)도 진실로 이미 죽어야 하거니와, 함이완과 함께 상변(上變)을 한 것도 또한 그의 죄입니다. 민암이 죽었으니, 함이완이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시도의 정상은 더욱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처음에 장희재(張希載)의 집에 드나들며 은(銀)과 인삼을 뇌물로 주며 그와 서로 사귀었으니, 도모한 바가 곧 어떤 일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마침내 민장도(閔章道)와 결탁하여 그 사이를 오가며 사세를 보아 거취(去就)하려고 했으니, 그 심술(心術)이 더욱 무상(無狀)합니다. 처음에는 한중혁(韓重爀) 등의 모의(謀議)를 고발하려 했다가 함이완이 먼저 고발하였으므로, 그만 접때 사람들을 치죄(治罪)하는 옥사(獄事)에 잡혀들자 드디어 한중혁·한구(韓構) 등을 모함하는 짓을 하여 요행히 살아가는 길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판국이 이미 뒤바뀌고 국청(鞫廳)이 또한 일변(一變)하자, 포대(布帒)에 관한 말을 함이완과 서로 미루어 핑계대며, 은연중에 그 가운데 있으면서 고발하려 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또 ‘민장도(閔章道)가 장만춘(張萬春)의 집에서 만나기를 청했는데, 장만춘의 말이 「훈련 대장(訓鍊大將)·병조 판서와 수어사(守禦使) 김원섭(金元燮)·이담명(李聃命)의 무리가 이듬해 봄에 거사(擧事)하기로 언약했다.」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시험삼아 민장도와 이시도를 대질(對質)하여 힐문했더니, 이시도는 본시 간악(姦惡)한 사람이고 또한 구변(口辯)이 있었으므로 민장도가 한마디 말도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대개 그의 뜻은 또한 한쪽편 사람들을 많이 고발한다면 살아나는 수가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장만춘은 곧 고유(故儒) 장현광(張顯光)의 후손으로 영남(嶺南)의 대가(大家)인데, 일가라고 하며 장희재(張希載)에게 붙어 조부(祖父)라고 불렀으며 종적(蹤跡)이 패악(悖惡)하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의 말이 자자했습니다. 또 성호빈이 첩(妾)을 잃어버리고 정관(呈官)하려고 할 적에 그 고장(告狀)을 장만춘이 썼습니다. 무릇 이듬해 봄에 거사하기로 한 것에 있어서 이시도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자들은 모두 마땅히 잡아올 것을 청해야 했었는데, 이시도가 한 번 옥(獄)에 들어가서 세 차례나 말을 변경하였으니, 진실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의징(李義徵)·김원섭(金元燮)은 바야흐로 지금 잡혀 있으므로 물어보겠지만, 그 나머지의 모든 사람은 잡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시도가 이랬다저랬다 하였으니, 결코 살 수 없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김인(金寅)이 바친 윤희(尹憘)의 글 3본(本)은 곧 고변(告變)하기 위한 것인데, 윤희의 글 내용에 ‘김생(金生)의 말을 듣고서 자신도 모르게 뼛속이 저리며 마음이 싸늘해졌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이란 곧 닭을 잡아 놓고서 동맹(同盟)했다는 글인데, 끝에서는 또한 ‘그 글은 본시 무함(誣陷)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터무니없는 글을 지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함께 모의(謀議)하고, 이어 다시 그 글을 가지고 상변(上變)한 것이니, 본래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 글의 뜻이 모두가 서인(西人)들을 기찰(譏察)했다가 상고(上告)하려 한 것이지 진실로 그 자신이 모역(謀逆)을 한 것은 아니니, 어떻게 이를 가지고 옥사(獄事)를 성립시킬 수 있겠습니까? 김인이 말한 동맹(同盟)한 두 사람은 하나는 이익화(李益華)이고 하나는 이양중(李養中)인데, 김인은 이익화와 이양중의 집에서 모두 도둑질을 한 적이 있는 자입니다. 이익화 등이 포도청(捕盜廳)에 고발하여 김인을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했으니, 김인이 혐오하는 사람을 속여서 끌어댄 것임을 판연(判然)히 알 수 있습니다. 또 김인은 성호빈(成虎彬)의 첩(妾)을 간음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도망하여 바로 윤희(尹憘)에게로 가서 그의 글을 받아 곧장 상변했습니다. 일마다 이러하여 참으로 천하에 난잡한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인이 말한 모역(謀逆)은 현저한 것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김인의 고발로 형벌을 받다가 죽은 자가 셋이고, 이의징(李義徵)의 무리는 또한 형벌을 받아도 자복하지 않아 마침내 역모(逆謀)한 것을 캐내지 못했습니다. 김인과 같은 부류를 성상께서 만일 밀고(密告)의 길에 방해로움이 있게 될까 하시어 특별히 살려 주라고 명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그의 정상은 결단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함이완(咸以完)은 이미 서인(西人) 진신(搢紳)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가 진신 죽음에 이르러 김인은 뜻을 써서 또한 남인(南人) 진신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 자입니다. 바로 지금은 한편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내쳤으니, 진실로 모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모(逆謀)했다는 말을 가하기는 또한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옥사(獄事)가 성립된다면 김인은 큰 공이 있게 되지만 성립되지 않는다면 김인이 어찌 살게 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이현일(李玄逸)의 행적은 죄주어야 할 것이 두 가지이나 그의 진정(眞情)이 의심스럽고, 이의징의 정상은 죽어야 할 일이 한없이 많고 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된다고 하지만 그 자취가 현저하지 못합니다. 김인은 비록 상변(上變)하기는 했지만 끝내 또한 죽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이 물러가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지난번의 강만태(康晩泰)의 말을 끝내 버려둘 수 없기에, 의계(議啓)한 다음에 즉시 한 장의 차자(箚子)를 올려 진달하려고 선사(繕寫)해 놓고 기다리다가, 미처 의계하지도 못하여 또 유생(儒生)의 상소가 있어 낭패스러워 나가버렸었습니다. 이제라도 어찌 감히 하고 싶었던 말을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기사년344) 의 일을 뒤에 뉘우치시어 중궁(中宮)을 복위(復位)하셨으니, 비록 먼 지방에 사는 하천(下賤)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다 기뻐할 것입니다마는, 다만 강민태의 죄를 아직 감단(勘斷)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방(外方)의 공론이 오히려 통쾌하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옷소매 속에서 차본(箚本)을 내어 올렸다. 그 차자에 이르기를,

"지난 갑인년345) 에 선왕(先王)께서 막 군신(群臣)들을 버리시고 전하께서 처음으로 즉위(卽位)하셔서 춘추(春秋)가 왕성하셨을 적에 이정(李楨)과 이남(李柟)346) 이 궁중(宮中)에 드나들며 액정(掖庭)에서 위세를 부리고 외조(外朝)와 결탁하매 그의 우익(羽翼)이 된 자가 또한 많았습니다. 그때 국세(國勢)의 위태로움이 터럭 하나로 천균(千鈞)의 무게를 매달아 놓은 것 같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전하께서는 더러 미처 다 살피지 못하는 것이 있으셨으므로 군하(群下)로서 마음 섬뜩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진정 이와 같았기 때문에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폐부지친(肺腑之親)으로 중병(中兵)의 자리에 있으면서 비로소 기찰(譏察)하는 일이 있었는데, 경신년347) 의 역모(逆謀)가 이로 인해 발각되자, 허견(許堅)·이남(李柤)이 죄악의 괴수로 복법(伏法)되어,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로와졌다가 다시 안정되었습니다. 비록 그러했으나 이는 곧 몰리어 부득이한 나머지 한 일로서 뒤이어 시행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경신년 이후에 또한 이런 일이 없지 않아 비록 한두 흉도(兇徒)들의 은밀한 정상을 캐내기는 했습니다만, 인심(人心)을 의심스럽게 하고 어지럽히며 세상의 도의를 손상시킨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비록 국가에 충성하기를 바란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 일 자체는 진실로 공론에 배척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기사년에 변경(變更)한 뒤에 와서는 당국(當國)한 사람이 기찰(譏察)을 이전 사람들의 극죄(極罪)로 여겨 과람한 형벌과 혹독한 율을 가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민암(閔黯)이 또한 함이완(咸以完)을 유혹하고 협박해 상변(上變)하게 한 뒤 확대하고 파급시켜, 장차 온 세상 사람 절반을 모두 법망 속에 몰아넣으려고 했었는데, 다행히 밝은 천일(天日)을 힘입어 진신(搢紳)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려는 흉계를 써먹지 못하고 자신만 큰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길이 한 번 열린 다음에는 진실로 막기 어려운 법입니다. 지나간 자취가 서로 이어지며 그대로 풍습을 이루어 시끄럽게 들끓는 소리가 멎는 날이 없습니다. 이는 곧 근원이 경신년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흘러 퍼지게 된 것인데, 매양 한 번 변경될 때마다 그 층(層)과 고비가 더욱 증가되고 있습니다. 이 이후부터 만일 이런 풍습을 엄중하게 끊어 한 번 그전부터의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는 반드시 구제되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이니, 사직(社稷)을 위한 근심이 어찌 다만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데 그치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에 있어서 제일건의 큰 일은 오직 이 길을 일소(一掃)하여 제거하는 데 있으며, 제거하는 방도는 단지 함이완(咸以完)의 무리를 엄중하게 다스리는 데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강만태(康晩泰)·최격(崔格)·이시회(李時檜)·한중혁(韓重爀) 네 사람의 죄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분명하게 구별해 처결하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환히 그들의 정상과 범한 죄의 경중(輕重)을 알게 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대중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고 대중의 심정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는 말이냐 하면, 당초 함이완이 고발한 여러 죄수로서 자복받은 사람은 곧 강만태·최격·이시회 세 사람인데, 모두를 곤위(坤位)의 복위를 도모했다는 것으로 결안(結案)을 했습니다. 이것이 어떠한 일이라고 그들이 감히 도모한단 말입니까? 그들의 이른바 도모라 함은 장차 어디에서 도모하려고 한 것입니까? 하찮은 무뢰한 천사(賤士)로서 감히 이 일에 대해 그런 마음을 먹었으니, 행해 온 바가 어떤지를 논할 것도 없이 그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국세(國勢)가 어찌 낮아지지 않겠으며, 대중의 심정이 어찌 불안하여 뒤흔들리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나, 이 일은 그래도 그들 자신이 대의(大義)에 의탁이라도 한 것이지만, 강만태에 이르러서는 결안(結案) 내용에 있는 이른바, ‘임대(任𡋛)·한구(韓構)가 해상 진인(海上眞人)을 맞아 오기로 의논했다.’는 말은 문목(問目)에서 물은 일도 아닌데, 그가 스스로 대답한 것입니다. 만일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임대·한구와 아울러 대역(大逆)으로 논죄(論罪)해야 할 것이고, 만일에 그 일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이남을 대역으로 모함한 죄를 또한 면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버려둔다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 꼴이 되겠으며, 사람이 어떻게 사람 꼴이 되겠습니까? 한중혁이 함께 가장 친밀하게 사귄 사람은 곧 이시도·장만태 등이고, 모아들인 것은 은화(銀貨)인데 대부분 주식(酒食)·피복(被服)·안마(鞍馬)에 허비하였습니다. 그 사적(事跡)에 대해서는 본시 그가 손수 쓴 서찰(書札)이 있으니, 그가 자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처결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옥관(獄官)이 전후에 바뀌어지기는 했지만, 조정은 본시 똑같은 조정입니다. 범한 죄가 이와 같은데도 유찬(流竄)에 그친다면, 나라 사람들의 의혹이 어찌 더욱 심해지지 않겠습니까? 또한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오늘날 하신 거조(擧措)는 곧 천고(千古)에 없던 일이십니다. 뭇 아랫사람들과 만백성이 기뻐하며 뛰는 것은 단지 중전(中殿)의 복위(復位)만을 경사와 다행으로 여겨서가 아니고, 전하께서 하신 바가 광명(光明)하고 과단성이 있어 마치 해와 달이 새로워져 털끝만큼도 가려진 것이 없음을 큰 경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과연 강만태(康晩泰) 등 여러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곧 중궁의 복위가 조금은 강만태 등에게서 도움받은 것이 아닐 수 없게 되니, 성상의 덕에 누가 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강만태 등은 곧 함이완(咸以完)이 고발한 사람이고 민암(閔黯)이 죽이려고 한 사람이다. 함이완과 민암이 장차 극률(極律)을 받게 되었는데, 강만태 등도 또한 국법(國法)을 면하지 못한다면, 마치 세충(世充)과 건덕(建德)을 위해 원수를 갚은 일처럼 되어버린다.348) ’고 하는데, 이 말은 그럴듯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민암이 강만태를 죽이려고 한 것은 곤전(坤殿)의 복위가 그들에게는 해를 끼치는 것이었기 때문이고, 지금 강만태 등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곤전의 복위를 그들이 도모한 것이라고 한다면 국가에 치욕이 미치고 무함이 성상의 몸에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전자나 후자의 죄명(罪名)이 비록 서로 같은 듯하지만, 용법(用法)의 다름은 진실로 천지처럼 판이한데, 어찌 이전 사람의 소위를 답습(踏襲)하는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지금 접때 체포(逮捕)한 여러 사람들을 아울러 잡아다가 다시 캐묻는다면, 이는 참으로 민암이 한 짓을 옳게 여기는 것이니 결코 할 수 없는 일이고, 만일 그대로 이 네 사람을 버려두고 묻지 않는다면, 이는 곧 악역(惡逆)을 덮어 숨겨 주고 불령한 사람을 용납해 비호하는 것이 되어, 한 시대의 온 나라 사람들의 말과 후세의 공론을 마침내 억제하여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처치해야 할 방도는 먼저 강만태를 잡아다가 흉언(凶言)의 사실 여부를 국문(鞫問)하여 통쾌하게 왕법(王法)대로 시행하고, 최격(崔格)·이시회(李時檜)는 또한 윗사람을 무함한 죄를 다스리며, 한중혁(韓重爀)은 그가 손수 쓴 서찰(書札)을 가지고 본죄(本罪)를 논정(論定)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야 조정의 거조(擧措)가 바야흐로 명백하고 정대(正大)해질 것입니다. 이런 다음에는 기찰(譏察)이라는 말과 사경(私逕)에 대한 의심이 없어지게 되어 안팎이 통하고 풍습이 크게 고쳐져 청명(淸明)하게 다스려지는 세상을 거의 다시 보게 될 것이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또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로 말한다면 그 이름이 여러 죄수들의 공초(供招)에 오르내린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만약 통렬하게 한 번 밝히지 않는다면, 사실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장차 모두 알쏭달쏭한 가운데 의심받고 치욕을 당해 끝내 스스로 해명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의 처지로 말하더라도 또한 이름이 밀지(密旨)를 받은 사람 속에 들어 있지만, 신의 서종제(庶從弟)는 또한 은(銀)을 모은 부류들 속에 끼어 있습니다. 신이 끝내 명백하게 진달(陳達)하여 통쾌한 처분을 받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신도 역시 엄폐(掩蔽)하며 감히 발설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신이 비록 오장을 드러내 보인다 하더라도 어떻게 추악(醜惡)한 치욕을 씻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하찮은 먼지 티끌과 같은 몸으로 오히려 혐의를 털어버리고 자신이 결백해지고 싶음이 이러한데, 하물며 당당(堂堂)하신 성명께서 훤하게 위에 계시면서, 어찌 이를 덮어두고서 어둠침침하게 한다 기롱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다 보고 나서 이르기를,

"경(卿)의 말이 진실로 옳다. 앞서 좌상(左相)의 차자에도 또한 이와 같은 말이 있었다."

하자, 남구만이 ‘그럴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 마땅히 모두를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자, 남구만이 아뢰기를,

"갑인년 이후부터 시사(時事)가 자주 바뀌었는데, 변혁(變革)할 때마다 사리에 닿지 않는 말이 있었으므로, 외부 사람들이 듣고서 또한 더러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하여, 이 때문에 국체(國體)가 존엄하지 못하고 난망(亂亡)이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만일 이런 말을 통렬하게 제거하고 분명하게 배척하지 않는다면 그 끼쳐질 폐해가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처럼 불초한 사람은 말을 할 것도 없고, 비록 큰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더라도 또한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내리신 성상의 분부에도 또한 그렇게 여기셨음은 진실로 국가의 다행입니다. 진실로 좋게 여기는 것과 나쁘게 여기는 것을 통쾌하게 보여주시어, 군하(群下)들이 환하게 성상께서 뜻을 두신 곳을 알아차리게 한다면 진실로 공평하고 밝은 정치가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강만태(康晩泰)의 ‘해상 진인(海上眞人)’이란 말은 매우 요악(妖惡)한 것이니, 먼저 강만태를 잡아다가 끝까지 심문하라."

하였다. 이 말은 한구(韓構)에게서 들은 것이었고, 본시 물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 드디어 강만태의 일은 국청(鞫廳)에 내리고 한중혁(韓重爀) 등 네 사람의 일은 의금부에 내렸다. 남구만이 또 박세채(朴世采)를 권면하여 만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중혁과 김춘택(金春澤)은 평소에 행신이 없어 주색(酒色)을 탐하고 재물을 융통해 쓰기를 잘하며 마음이 부정한 무리들과 결탁하고 아무도 모르는 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모의(謀議)한 일은 사람들이 진실로 알지 못하였으나, 말이 온 나라에 두루 퍼졌으므로 그들의 죄는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취향(趣向)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불량한 부류들이 한중혁과 김춘택을 빙자하여 구실(口實)을 삼았고, 드디어 우리 전하께서 왕후의 자리를 뒤좇아 복구하시어, 한(漢)나라나 송(宋)나라 임금들보다도 월등하게 훌륭한 덕과, 조정 신하들이 윤기를 붙잡아 세우고 난역(亂逆)을 징토(懲討)하는 공정한 공론을 또한 다시 한중혁 등이 혼란하게 만들었다. 남구만(南九萬)이 극력 구핵(究覈)을 청하여 그렇지 않음을 밝히자고 한 것을 대저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마는, 다만 장희재(張希載)·민암(閔黯)·이의징(李義徵)의 무리에 대해서는 비록 그들의 죄가 이미 나타났는데도 한결같이 엄폐하여 덮으며 오직 혹시라도 상하게 할까 우려하고, 유독 한중혁·김춘택에 있어서만 극력 법대로 하자는 의논을 고집했기 때문에 국론(國論)이 정해지지 않고 사람들이 마음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모두들 그의 심술(心術)이 가려진 데가 있음을 알았다.

  • [註 342] 육지(陸贄) : 자는 경여(敬輿), 시호는 선공(宣公). 당 덕종(唐德宗) 때의 명신(名臣). 임금에게 간하는 말이 적절하였기에 후세의 주종(主宗)이 되었고, 그의 《주의(奏議)》가 유명함.
  • [註 343]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344]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345]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 [註 346] 이정(李楨)과 이남(李柟) : 정은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인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둘째 아들 복창군(福昌君). 남은 인평 대군의 셋째 아들 복선군(福善君).
  • [註 347] 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348] 세충(世充)과 건덕(建德)을 위해 원수를 갚은 일처럼 되어버린다. : 당 태종(唐太宗)이 즉위하기 전에 왕세충(王世充)·두건덕(竇建德)을 쳐서 멸하였는데, 뒤에 그의 형제들이 태종을 죽이려 하므로, 태종이 그의 아버지인 고조(高祖)에게 말하기를, "그의 형제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은 세충과 건덕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하였음. 여기서는 강만태·한중혁(韓重爀)·김춘택(金春澤) 등을 죽이는 것이 남인(南人)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이 된다는 뜻임.

원문

○庚午/領議政南九萬承命詣闕。 上引見慰勉之。 九萬曰: "臣旣還朝, 鞫獄當用前命議啓, 而文字未必詳, 臣請先陳之。" 上曰可。 九萬曰: "凡鞫獄, 告者明白然後, 端緖可尋。 今金寅語言反覆, 或有初不言而後言之, 或始言之而終又自稱其誣, 可謂虛踈。 尹憘、成虎彬刑訊七次, 相繼致斃, 此後更無可問。 李成夔比尹ㆍ成有間, 而不得已治之, 今又死矣。 陸贄曰: ‘情見跡著, 辭服理窮然後, 加刑辟焉。’ 此格言也。 且此獄起於朝臣進退之際, 若有一毫冤濫, 則有傷國脈, 流禍後世, 故必欲參其情跡, 決知其無疑然後處之。 而其中或有情則近而跡相左, 跡相似而情不然者, 李玄逸探試之說, 金寅追告, 而黯與義徵, 以將相主其事, 玄逸以吏判, 陳于榻前, 則其事誠陰兇危怕, 而寅始則不告, 乃於中間, 始爲發告, 有難盡信, 初旣曰: ‘黯與義徵, 實敎玄逸, 嘗試上意。’ 玄逸出而言於二人, 二人以爲, 此若不諧, 當擧大事, 及其更問則曰: ‘玄逸往金元燮家言之。’ 前後相左, 且非寅所自聞, 謂虎彬聞之而傳說於寅。 虎彬旣死, 言語階梯, 無可憑問。 蓋義徵行已處事, 本與閔黯無異。 自己巳以後, 誤國事者, 是黯與義徵所爲, 國人皆曰可殺, 不但爲寅所告而已。 雖然謀逆之跡, 若不明, 則何可以其人之無狀, 因以成獄也? 寅之受銀布, 考之訓局文簿, 其數一如寅所告, 而皆以虎彬名貸之, 故欲知寅與義徵相見, 問于寅者再三, 或曰元不相面, 或曰夜中見之, 或曰累見之, 其言之互變, 又如此, 何可信乎? 其中可疑者, 惟申英元貸銀事發則自縊而死也。 然義徵之譏察, 憘、虎彬皆已言之, 則未知英元之貸銀, 爲逆謀耶? 爲譏察耶? 英元旣死, 亦無可問, 且殺鷄同盟一事, 與變書不同, 寅自謂欲謾憘以挑義徵之心矣。 寅言旣參差, 故雖累鞫義徵, 刑訊至五次, 而終難得其自服。 臣謂義徵之情, 本無可生之道, 而跡則亦無可執以爲逆者也。 至若玄逸, 觀其爲人, 儘迂踈無用, 向時人, 以此人薦聞於上, 置之大冡宰, 其罪亦重, 雖然鄕音古談, 太生澁, 雖欲包藏禍心, 決不可得以王子事入告其言, 固人人常談耳。 雖果若寅之言, 似是爲黯ㆍ義徵所賣而然, 非玄逸同預兇謀也。 雖然渠旣以此說, 發之于前席, 無情有情, 何可億逆乎? 故臣謂玄逸, 跡有可疑而情或可原也。 義徵ㆍ玄逸, 所坐極重, 而其情跡之不同, 有如此者。" 上然之。 九萬曰: "玄逸之罪, 又有之。 中宮在私第之時, 所上疏, 一則曰自絶于天。 一則敢以彼字, 加之於中宮。 向時人倫紀斁絶, 義理晦塞, 不知有嚴畏尊敬之意, 肆然爲悖慢之語, 此與睦來善不恭敬之說, 何異? 其罪斷無生理, 第其本意, 欲移奉別宮, 厚廩設衛, 以爲禮待之地, 而遣辭指斥, 自不覺其如此, 此亦跡之可疑者, 而情則無侵害之意, 與侵害者同罪, 則似或稱冤。" 上亦以爲是。 九萬又曰: "告者三人, 在獄中, 卽咸以完、李時棹、金寅也。 以完則雖爲黯所脅, 而旣自發告, 是皆蔓及搢紳計也。 黯則本罪固已當死, 與以完同爲上變, 亦其罪也。 黯死, 以完安得不死? 李時棹情狀, 尤叵測, 始出入希載家, 賂銀蔘與之相接, 未知所圖者, 是何等事, 而終乃締結章道, 往來其間, 欲觀事勢而去就之? 其心術, 尤無狀也。 初欲告韓重爀等之謀, 而爲以完先告, 乃被逮向時人治獄, 則遂構重爀ㆍ構等, 以冀其幸有生道, 及朝局旣換, 鞫廳又一變, 乃以布帒之說, 與以完互相推諉, 隱然欲從中爲告者。 又謂章道, 邀見於張萬春之家, 而萬春言: ‘訓將兵判守禦使金元燮、李聃命輩, 約於明春擧事云。’ 試使章道, 與時棹面質詰問, 則時棹自是姦惡之人, 且有口辯, 使章道不得爲一辭, 蓋其意, 又以爲多告一番人, 則冀其有生道耳。 萬春卽故儒張顯光後也。 是嶺南大家, 而稱以同姓, 附托希載, 呼以祖父, 蹤跡悖惡, 國言藉藉, 且成虎彬失妾, 欲呈官, 其狀萬春書之矣。 凡以明春擧事, 名出時棹之口者, 皆當請拿, 而時棹一入獄, 三變其言, 實不可信。 如義徵ㆍ元燮, 方就囚故問之, 而其餘諸人則不拿耳。" 上曰: "時棹反復, 決不可生。" 九萬曰: "金寅所納尹憘書三本, 卽所以告變者, 而憘書中, 旣曰: ‘卽聞金生之言, 不覺骨驚而心寒。’ 其言卽殺鷄同盟之文, 而終又曰: ‘其文本是誣也。’ 自作虛文, 示人同謀, 仍復持其文上變, 本不足信, 而且其書意, 皆是譏察西人, 欲爲上告者也, 實非自爲謀逆者, 何可以此成獄乎? 寅所謂同盟者二人, 一則李益華, 一則李養中, 而寅於益華ㆍ養中家, 俱有所偸竊者, 益華等告捕廳, 欲捕寅而不得。 寅之誣引有嫌之人, 判然可知。 且寅淫虎彬之妾, 事覺而逃, 直走尹憘所, 受其書仍上變, 事事如此, 眞天下之亂人也。" 上曰: "寅所謂謀逆者, 無顯著之事矣。" 九萬曰: "爲寅所告, 受刑而死三人。 義徵輩, 又受刑而不服, 終未能鉤得逆謀。 如寅之類, 自上若以爲有妨告密之門, 特命活之, 則未知如何, 而其情斷不可貸也。 以完旣以欲盡殺西人, 搢紳當死, 寅之造意, 亦欲盡殺南人搢紳者也。 卽今屛黜一邊之人, 固皆有當被之罪, 然以逆名加之, 亦有所不忍, 獄成則寅有大功, 不成則寅豈能活耶?" 上曰然。 九萬曰: "玄逸之迹, 可罪者爲二, 而其情可疑。 義徵之情, 可死者極多, 且國人皆曰可殺, 而其迹未顯, 寅雖上變而終亦難免於死。" 〔工〕 曰: "卿其退而議啓。" 九萬曰: "前日康晩泰之言, 終不可置之, 故擬於議啓之後, 卽陳一箚, 繕寫以待。 未及議啓, 而又以儒疏, 狼狽而出, 今何敢不盡其所欲言乎? 自上追悔己已事, 中壼復位, 雖在遐方下賤, 擧〔皆〕 懽忭, 只以康晩泰之罪, 未及勘斷, 故外議猶以爲未快, 仍自袖中, 出箚本而進之。 其箚曰: ‘昔在甲寅年, 先王新棄群臣, 殿頭下初卽位, 而富於春秋, 楨、柟出入宮禁, 威行掖庭, 而交結外朝, 爲其羽翼者亦多。’ 其時國勢之懍懍, 不翅千勻之一髮, 殿下或有未及盡察者, 而群下莫不爲之寒心, 惟其如此故, 故淸城府院君 金錫胄, 以肺腑之親, 居中兵之地, 始有詗察之事, 庚申逆節, 因此發覺, 堅、柟以首惡伏法, 宗社幾危而復安, 雖然此乃迫不得已之事, 不可踵而行之者, 而庚申以後, 亦不無此事, 雖鉤得一二兇徒隱伏之狀, 其疑亂人心, 虧傷世道, 可勝言哉? 然則其心雖〔曰〕 願忠於國, 其事固宜見斥於公議, 及至己已變更之後, 當國者以詗察爲前人之極罪, 加之以淫刑酷律, 而及今閔黯, 又誘脅咸以完上變, 張大蔓延, 將擧半一世之人, 驅入罟擭之中, 幸賴天日之明, 不得售其魚肉搢紳之計, 而自陷大戮, 然蹊徑一開之後, 誠難杜塞, 覆轍相尋, 仍成風習, 喧沸之聲, 無時可已。 此乃源開於庚申, 而流漫於今日, 每一變易, 層節益加, 從此以往, 若不痛絶此風, 一變前習, 則國必莫之救以滅, 其爲社稷之憂, 豈但痛哭流涕而止哉? 然則其在今日, 爲第一件大事, 惟在於此逕之一掃而去之。 其去之之道, 不但在於嚴治以完輩而已。 至於康晩泰、崔格、李時檜、韓重爀四人之罪, 亦宜明白區處, 使一國之人, 曉然皆知其情犯之輕重然後, 方可以快衆心而服群情, 何以言之? 當初以完所告中諸囚取服者, 乃是晩泰、格、時檜三人, 而皆以圖復坤位爲結案, 此何等事, 而渠輩敢圖之耶? 其圖之云者, 將欲圖之於何所耶? 以幺麽無賴之賤士, 乃敢生心於此事, 毋論所執之如何, 其罪可得以容貸耶? 人心世道, 至於如此, 國勢安得以不卑, 群情安得以不至於波蕩乎? 雖然此則渠輩猶自依托於大義, 至於晩泰, 則結案中所謂任𡋛ㆍ韓構, 議迎海上眞人之說, 非問目中所問, 而渠自置對, 若以其事爲實, 則當竝與任ㆍ韓而論以大逆, 若以其事爲虛, 則誣人以大逆之罪, 亦不可免。 此而置之, 則國何以爲國, 人何以爲人耶? 至於韓重爀所與交最深密者, 乃是李時棹ㆍ康晩泰等所聚者銀貨, 而多歸之於酒食被服鞍馬之費, 若其事跡則自有渠手筆書札, 不待渠就服而可決。 獄官雖有前後之變易, 朝廷自是一朝廷, 罪犯如此, 而止於流竄, 國人之疑惑, 豈不滋甚乎? 且念殿下, 今日擧措, 乃是千古之所無, 群下億兆所以歡欣踴躍者, 非但以中殿之復位爲慶幸, 以殿下所作爲, 光明夬斷, 如日月之更, 無纖毫之翳, 爲大慶, 若果如晩泰諸人之言, 則是中壼之復, 不能無一分得助於晩泰等也。 其爲聖德之羞累, 何可勝言哉? 或者以爲: ‘晩泰等, 乃以完之所告而黯之所欲殺者也。’ 以完、黯將被極律, 而晩泰等, 亦不免王法, 則有若爲世充、建德報仇者然, 此言似然而實不然, 何也? 黯之欲殺晩泰者, 以其復坤位之有害於渠等也。 今之欲殺晩泰等者, 以坤位之復, 爲渠等之所圖云者, 辱及於國家, 誣歸於上躬故也。 前後罪名, 雖若相似, 而用法之異則實如天壤之判, 何得以襲前人所爲, 爲疑哉? 然今若竝拿其時逮捕諸人, 更加鉤得, 則是眞是黯事, 決不可爲也。 若仍置此四人不問, 則是掩匿惡逆, 容護不逞, 一時國人之言, 後世公議之發, 終不可得以抑止。 在今處之之道, 先拿晩泰, 鞫問其凶言虛實, 快行王誅。 格、時檜亦正其誣上之罪。 重爀則以其手札論定本罪, 斷不可已。 如此然後, 朝家擧措, 方爲明白正大。 此後詗察之說, 私逕之疑, 可得止息, 表裏洞徹, 風習丕變, 而淸明之治, 庶可復見, 豈不痛快矣乎? 且以在朝諸臣論之, 其名之出入諸囚之招者甚多, 若不一爲痛辨, 則毋論虛實, 擧將受疑被衊於有無之間, 終不得自解, 雖以臣身言之, 臣名亦在於受密旨之中, 臣孽從弟, 又在於聚銀之類, 臣終不明白陳達, 快有處分, 則人將謂臣亦掩蔽而不敢發, 臣雖剖心刳肝, 何以洗滌其醜辱耶? 以臣眇末塵土之身, 猶欲遠嫌而自潔如此, 況堂堂聖明, 赫赫在上, 何可掩覆於此而受黯黮之譏耶?" 上覽訖曰: "卿言誠是, 向者左相箚, 亦有此說矣。" 九萬曰: "然"。 上曰: "今當竝賜施行。" 九萬曰: "自甲寅以後, 時事屢換, 變革之際, 每有不近理之說, 外人聽聞, 亦或致疑於眞贗之間, 以此國體不尊, 亂亡無日, 此說若不痛祛而明斥之, 則其流之弊, 有不可言。 如臣不肖, 不足比數, 而雖使能堪大任者當之, 亦末如之何? 今者聖敎, 亦以爲然, 實國家之福也。 苟能快示好惡, 使群下曉然知聖意之所在, 則實有光於平明之治矣。" 上曰: "康晩泰海上眞人之說, 甚是妖惡, 先拿晩泰窮訊之, 是聽於韓構者, 本非所問而言之矣。 遂以晩泰事, 下鞫廳。 重爀等四人事, 下禁府。" 九萬又請勉留朴世采, 上納之。 謹按韓重爀ㆍ金春澤, 素無行, 耽酒色, 通貨財, 締結傾邪之徒, 攀援幽陰之逕, 其所謀議, 人固不知, 而語言流聞, 徧於一國, 其罪不可不誅。 於是異趣之人, 不逞之類, 藉重爀 春澤爲口實, 遂使我殿下, 追復后位, 卓越漢、宋之盛德, 及朝臣扶樹倫紀, 懲討亂逆之正論, 亦復爲重爀等所疑亂。 九萬之力請究覈, 以明其不然者, 夫孰曰不可? 而但於希載、黯、義徵之黨, 則雖其罪已彰, 而一意掩覆, 惟恐其或傷, 獨於重爀ㆍ春澤, 力爲執法之議, 故國論不定, 人心不服, 皆知其心術之有所蔽也。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숙종실록27권, 숙종 20년 7월 4일 庚午 1/3 기사 /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영의정 남구만이 입궐하여 국옥에 대해 논의하고 차자를 올리다.

국역

영의정 남구만이 명을 받고 대궐에 나아오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위로하고 권면했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조정으로 돌아왔으니, 국옥(鞫獄) 일을 마땅히 앞서 명하신 대로 의계(議啓)해야 할 것인데, 글로는 자세하게 하기를 기필할 수 없으니, 신은 청컨대 먼저 진달(陳達)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무릇 국옥(鞫獄)은 고발하는 자가 명백하게 한 다음에야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김인(金寅)은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여, 더러는 처음에 말하지 않은 것을 뒤에 말하기도 하고, 더러는 처음에 말했던 것을 나중에 또한 속인 것이라고 하기도 하니, 허소하다 하겠습니다. 윤희(尹憘)와 성호빈(成虎彬)은 일곱 차례 형신(刑訊)하자 잇달아 죽어 차후로 다시 심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성기(李成夔)는 윤희·성호빈에 비하면 차이가 있지만 부득이 죄를 다스려야 할 것인데 지금 또한 죽어버렸습니다. 육지(陸贄)342) 의 말이 ‘실정이 나타나 자취가 현저해지고 자복하는 말을 하여 사리에 궁해지게 된 다음에야 형벌을 가해야 한다.’고 했으니, 이는 격언(格言)입니다. 또 이번에 옥사(獄事)는 조정 신하들이 진퇴(進退)할 즈음에 일어난 것이어서, 만일 조금이라도 원통하거나 외람된다면 나라의 기맥(氣脈)을 손상시키고 후세에 화를 끼치게 될 것이므로, 반드시 실정과 자취를 참작해 결단코 의심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 다음에야 처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더러 실정은 근사하면서도 자취가 서로 틀리는 것이 있기도 하고 더러는 자취는 서로 같으면서도 실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현일(李玄逸)이 탐시(探試)하려고 했다는 말은 김인(金寅)이 추후에 고발한 것에 민암(閔黯)과 이의징(李義徵)은 장상(將相)으로서 이 일을 주관하였고 이현일은 이조 판서로서 탑전(榻前)에서 진달하였으니, 이 일은 진실로 음흉(陰兇)하기도 하고 위구(危懼)스럽기도 한 것인데, 김인이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가 중간에야 비로소 고발했으니,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렵습니다. 처음에 이미 ‘민암과 이의징이 실지로 이현일을 교사(敎唆)하여 성상(聖上)의 뜻을 떠보게 한 것이다.’라고 하므로, 이현일이 나와서 두 사람에게 말을 하니, 두 사람이 ‘만일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마땅히 큰 일을 일으키겠다.’고 했었는데, 다시 물을 적에 당해서는 ‘이현일이 김원섭(金元燮)의 집에 갔을 때 말한 것이다.’고 하여, 전후의 말이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또 김인 자신이 들은 것이 아니고, ‘성호빈이 듣고서 김인에게 전언(傳言)한 것이다.’고 했는데, 성호빈이 이미 죽어버려 그 말이 전해진 계제(階梯)를 증거대어 물어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대개 이의징은 행신이나 처사가 본시 민암과 다를 것이 없고, 기사년343) 이후부터 나랏일을 그르친 것이 곧 민암과 이의징의 소위이기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는 것이고, 단지 김인의 고발 때문만은 아닙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만일 모역(謀逆)한 자취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어찌 무상(無狀)한 그 사람이 한 말 때문에 그대로 옥사(獄事)를 성립시킬 수 있겠습니까? 김인이 은(銀)과 베를 받은 것은 훈국(訓局)의 문부(文簿)를 고찰해 보건대, 그 수량이 한결같이 김인이 한 말과 같지만 모두 성호빈의 이름으로 빌었습니다. 그래서 김인과 이의징이 함께 만난 것을 알고자 하여 김인에게 두세 차례 물어보니 ‘원래 상면이 없었다.’고 했다가, ‘밤중에 만났다.’ 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번 만났다.’고도 하였습니다. 그 말이 이처럼 이리저리 뒤바뀌었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중에서도 의심스러운 것은 오직 신영원(申英元)이 은 빌린 일이 발각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의징이 기찰(譏察)한 것을 윤희·성호빈이 모두 이미 말했으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신영원이 은을 꾼 것이 역모(逆謀)를 위한 것인지요, 기찰을 위한 것인지요? 신영원이 이미 죽어버려 또한 물을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또 닭을 잡아 놓고 동맹(同盟)했다는 한 가지 일은 변서(變書)와는 같지 않았습니다. 김인은 스스로 ‘윤희를 속임으로써 이의징의 마음을 도발(挑發)하려 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김인의 말이 이미 들쭉날쭉했기 때문에 비록 이의징을 여러 차례 국문하여 다섯 차례나 형신했지만 끝내 그의 자복을 받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신은 이의징의 정상은 본래 살게 될 도리가 없지만 자취에 있어서는 또한 역모(逆謀)했다고 주장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현일이 있어서는 그의 사람됨을 보면 참으로 우소(迂疎)하여 쓸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지난번 사람들이 이 사람을 성상께 천문(薦聞)하여 대총재(大冢宰)의 자리에 두게 하였으니, 그들의 죄가 또한 무겁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시골구석의 소식이나 옛이야기는 매우 생소한 것이어서 비록 화를 만들어내려는 마음을 가진다 하더라도 결코 왕자(王子)에 관한 일로 입고(入告)하게 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런 말은 진실로 누구나가 보통 하는 말인 것입니다. 과연 김인의 말과 같다 하더라도, 이는 민암과 이의징에게 팔려 그런 것이고, 이현일이 흉모(兇謀)에 함께 참여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그가 이미 그런 말을 탑전(榻前)에서 하였으니, 진정(眞情)이 없었는지 있었는지를 어떻게 억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신은 이현일의 일에 자취는 의심스러운 것이 있지만 실정은 혹 용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의징과 이현일은 걸린 죄는 지극히 무거운데 그들의 실정과 자취는 이처럼 같지 않음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이현일은 죄가 또 있습니다. 중궁(中宮)께서 사제(私第)에 계실 때 올린 상소에 한 번은 ‘스스로 하늘과 끊었다[自絶于天]’고 했고, 한 번은 감히 ‘피자(彼字)’를 중궁께 쓰기도 한 것입니다. 접때 사람들은 인륜이 끊어지고 의리에 캄캄하여, 엄외(嚴畏)하고 존경(尊敬)하는 뜻이 있어야 함을 알지 못하여 방자하게 패만(悖慢)한 말을 했으니, 이는 목내선(睦來善)의 ‘불공경(不恭敬)’이란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의 죄는 결코 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본뜻은 딴 궁(宮)에 옮겨 모시고 늠료(廩料)를 후하게 마련하며 시위(侍衛)를 두어 예우(禮遇)하는 방도를 만들게 하려고 지척(指斥)하는 말을 하느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처럼 된 것이니, 이 또한 자취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실정은 침해하려는 뜻이 없었던 것이니, 침해한 사람들과 죄를 같게 한다면 혹 원통하다고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한 옳게 여겼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고발한 자 세 사람이 옥중(獄中)에 있으니, 곧 함이완(咸以完)·이시도(李時棹)·김인(金寅)입니다. 함이완은 비록 민암(閔黯)에게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이미 스스로 고발을 한 것은 곧 모두가 진신(搢紳)들에게 파급되게 하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민암의 경우 본죄(本罪)도 진실로 이미 죽어야 하거니와, 함이완과 함께 상변(上變)을 한 것도 또한 그의 죄입니다. 민암이 죽었으니, 함이완이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시도의 정상은 더욱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처음에 장희재(張希載)의 집에 드나들며 은(銀)과 인삼을 뇌물로 주며 그와 서로 사귀었으니, 도모한 바가 곧 어떤 일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마침내 민장도(閔章道)와 결탁하여 그 사이를 오가며 사세를 보아 거취(去就)하려고 했으니, 그 심술(心術)이 더욱 무상(無狀)합니다. 처음에는 한중혁(韓重爀) 등의 모의(謀議)를 고발하려 했다가 함이완이 먼저 고발하였으므로, 그만 접때 사람들을 치죄(治罪)하는 옥사(獄事)에 잡혀들자 드디어 한중혁·한구(韓構) 등을 모함하는 짓을 하여 요행히 살아가는 길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판국이 이미 뒤바뀌고 국청(鞫廳)이 또한 일변(一變)하자, 포대(布帒)에 관한 말을 함이완과 서로 미루어 핑계대며, 은연중에 그 가운데 있으면서 고발하려 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또 ‘민장도(閔章道)가 장만춘(張萬春)의 집에서 만나기를 청했는데, 장만춘의 말이 「훈련 대장(訓鍊大將)·병조 판서와 수어사(守禦使) 김원섭(金元燮)·이담명(李聃命)의 무리가 이듬해 봄에 거사(擧事)하기로 언약했다.」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시험삼아 민장도와 이시도를 대질(對質)하여 힐문했더니, 이시도는 본시 간악(姦惡)한 사람이고 또한 구변(口辯)이 있었으므로 민장도가 한마디 말도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대개 그의 뜻은 또한 한쪽편 사람들을 많이 고발한다면 살아나는 수가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장만춘은 곧 고유(故儒) 장현광(張顯光)의 후손으로 영남(嶺南)의 대가(大家)인데, 일가라고 하며 장희재(張希載)에게 붙어 조부(祖父)라고 불렀으며 종적(蹤跡)이 패악(悖惡)하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의 말이 자자했습니다. 또 성호빈이 첩(妾)을 잃어버리고 정관(呈官)하려고 할 적에 그 고장(告狀)을 장만춘이 썼습니다. 무릇 이듬해 봄에 거사하기로 한 것에 있어서 이시도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자들은 모두 마땅히 잡아올 것을 청해야 했었는데, 이시도가 한 번 옥(獄)에 들어가서 세 차례나 말을 변경하였으니, 진실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의징(李義徵)·김원섭(金元燮)은 바야흐로 지금 잡혀 있으므로 물어보겠지만, 그 나머지의 모든 사람은 잡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시도가 이랬다저랬다 하였으니, 결코 살 수 없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김인(金寅)이 바친 윤희(尹憘)의 글 3본(本)은 곧 고변(告變)하기 위한 것인데, 윤희의 글 내용에 ‘김생(金生)의 말을 듣고서 자신도 모르게 뼛속이 저리며 마음이 싸늘해졌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이란 곧 닭을 잡아 놓고서 동맹(同盟)했다는 글인데, 끝에서는 또한 ‘그 글은 본시 무함(誣陷)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터무니없는 글을 지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함께 모의(謀議)하고, 이어 다시 그 글을 가지고 상변(上變)한 것이니, 본래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 글의 뜻이 모두가 서인(西人)들을 기찰(譏察)했다가 상고(上告)하려 한 것이지 진실로 그 자신이 모역(謀逆)을 한 것은 아니니, 어떻게 이를 가지고 옥사(獄事)를 성립시킬 수 있겠습니까? 김인이 말한 동맹(同盟)한 두 사람은 하나는 이익화(李益華)이고 하나는 이양중(李養中)인데, 김인은 이익화와 이양중의 집에서 모두 도둑질을 한 적이 있는 자입니다. 이익화 등이 포도청(捕盜廳)에 고발하여 김인을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했으니, 김인이 혐오하는 사람을 속여서 끌어댄 것임을 판연(判然)히 알 수 있습니다. 또 김인은 성호빈(成虎彬)의 첩(妾)을 간음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도망하여 바로 윤희(尹憘)에게로 가서 그의 글을 받아 곧장 상변했습니다. 일마다 이러하여 참으로 천하에 난잡한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인이 말한 모역(謀逆)은 현저한 것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김인의 고발로 형벌을 받다가 죽은 자가 셋이고, 이의징(李義徵)의 무리는 또한 형벌을 받아도 자복하지 않아 마침내 역모(逆謀)한 것을 캐내지 못했습니다. 김인과 같은 부류를 성상께서 만일 밀고(密告)의 길에 방해로움이 있게 될까 하시어 특별히 살려 주라고 명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그의 정상은 결단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함이완(咸以完)은 이미 서인(西人) 진신(搢紳)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가 진신 죽음에 이르러 김인은 뜻을 써서 또한 남인(南人) 진신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 자입니다. 바로 지금은 한편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내쳤으니, 진실로 모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모(逆謀)했다는 말을 가하기는 또한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옥사(獄事)가 성립된다면 김인은 큰 공이 있게 되지만 성립되지 않는다면 김인이 어찌 살게 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이현일(李玄逸)의 행적은 죄주어야 할 것이 두 가지이나 그의 진정(眞情)이 의심스럽고, 이의징의 정상은 죽어야 할 일이 한없이 많고 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된다고 하지만 그 자취가 현저하지 못합니다. 김인은 비록 상변(上變)하기는 했지만 끝내 또한 죽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이 물러가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지난번의 강만태(康晩泰)의 말을 끝내 버려둘 수 없기에, 의계(議啓)한 다음에 즉시 한 장의 차자(箚子)를 올려 진달하려고 선사(繕寫)해 놓고 기다리다가, 미처 의계하지도 못하여 또 유생(儒生)의 상소가 있어 낭패스러워 나가버렸었습니다. 이제라도 어찌 감히 하고 싶었던 말을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기사년344) 의 일을 뒤에 뉘우치시어 중궁(中宮)을 복위(復位)하셨으니, 비록 먼 지방에 사는 하천(下賤)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다 기뻐할 것입니다마는, 다만 강민태의 죄를 아직 감단(勘斷)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방(外方)의 공론이 오히려 통쾌하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옷소매 속에서 차본(箚本)을 내어 올렸다. 그 차자에 이르기를,

"지난 갑인년345) 에 선왕(先王)께서 막 군신(群臣)들을 버리시고 전하께서 처음으로 즉위(卽位)하셔서 춘추(春秋)가 왕성하셨을 적에 이정(李楨)과 이남(李柟)346) 이 궁중(宮中)에 드나들며 액정(掖庭)에서 위세를 부리고 외조(外朝)와 결탁하매 그의 우익(羽翼)이 된 자가 또한 많았습니다. 그때 국세(國勢)의 위태로움이 터럭 하나로 천균(千鈞)의 무게를 매달아 놓은 것 같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전하께서는 더러 미처 다 살피지 못하는 것이 있으셨으므로 군하(群下)로서 마음 섬뜩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진정 이와 같았기 때문에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폐부지친(肺腑之親)으로 중병(中兵)의 자리에 있으면서 비로소 기찰(譏察)하는 일이 있었는데, 경신년347) 의 역모(逆謀)가 이로 인해 발각되자, 허견(許堅)·이남(李柤)이 죄악의 괴수로 복법(伏法)되어,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로와졌다가 다시 안정되었습니다. 비록 그러했으나 이는 곧 몰리어 부득이한 나머지 한 일로서 뒤이어 시행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경신년 이후에 또한 이런 일이 없지 않아 비록 한두 흉도(兇徒)들의 은밀한 정상을 캐내기는 했습니다만, 인심(人心)을 의심스럽게 하고 어지럽히며 세상의 도의를 손상시킨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비록 국가에 충성하기를 바란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 일 자체는 진실로 공론에 배척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기사년에 변경(變更)한 뒤에 와서는 당국(當國)한 사람이 기찰(譏察)을 이전 사람들의 극죄(極罪)로 여겨 과람한 형벌과 혹독한 율을 가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민암(閔黯)이 또한 함이완(咸以完)을 유혹하고 협박해 상변(上變)하게 한 뒤 확대하고 파급시켜, 장차 온 세상 사람 절반을 모두 법망 속에 몰아넣으려고 했었는데, 다행히 밝은 천일(天日)을 힘입어 진신(搢紳)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려는 흉계를 써먹지 못하고 자신만 큰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길이 한 번 열린 다음에는 진실로 막기 어려운 법입니다. 지나간 자취가 서로 이어지며 그대로 풍습을 이루어 시끄럽게 들끓는 소리가 멎는 날이 없습니다. 이는 곧 근원이 경신년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흘러 퍼지게 된 것인데, 매양 한 번 변경될 때마다 그 층(層)과 고비가 더욱 증가되고 있습니다. 이 이후부터 만일 이런 풍습을 엄중하게 끊어 한 번 그전부터의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는 반드시 구제되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이니, 사직(社稷)을 위한 근심이 어찌 다만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데 그치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에 있어서 제일건의 큰 일은 오직 이 길을 일소(一掃)하여 제거하는 데 있으며, 제거하는 방도는 단지 함이완(咸以完)의 무리를 엄중하게 다스리는 데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강만태(康晩泰)·최격(崔格)·이시회(李時檜)·한중혁(韓重爀) 네 사람의 죄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분명하게 구별해 처결하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환히 그들의 정상과 범한 죄의 경중(輕重)을 알게 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대중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고 대중의 심정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는 말이냐 하면, 당초 함이완이 고발한 여러 죄수로서 자복받은 사람은 곧 강만태·최격·이시회 세 사람인데, 모두를 곤위(坤位)의 복위를 도모했다는 것으로 결안(結案)을 했습니다. 이것이 어떠한 일이라고 그들이 감히 도모한단 말입니까? 그들의 이른바 도모라 함은 장차 어디에서 도모하려고 한 것입니까? 하찮은 무뢰한 천사(賤士)로서 감히 이 일에 대해 그런 마음을 먹었으니, 행해 온 바가 어떤지를 논할 것도 없이 그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국세(國勢)가 어찌 낮아지지 않겠으며, 대중의 심정이 어찌 불안하여 뒤흔들리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나, 이 일은 그래도 그들 자신이 대의(大義)에 의탁이라도 한 것이지만, 강만태에 이르러서는 결안(結案) 내용에 있는 이른바, ‘임대(任𡋛)·한구(韓構)가 해상 진인(海上眞人)을 맞아 오기로 의논했다.’는 말은 문목(問目)에서 물은 일도 아닌데, 그가 스스로 대답한 것입니다. 만일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임대·한구와 아울러 대역(大逆)으로 논죄(論罪)해야 할 것이고, 만일에 그 일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이남을 대역으로 모함한 죄를 또한 면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버려둔다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 꼴이 되겠으며, 사람이 어떻게 사람 꼴이 되겠습니까? 한중혁이 함께 가장 친밀하게 사귄 사람은 곧 이시도·장만태 등이고, 모아들인 것은 은화(銀貨)인데 대부분 주식(酒食)·피복(被服)·안마(鞍馬)에 허비하였습니다. 그 사적(事跡)에 대해서는 본시 그가 손수 쓴 서찰(書札)이 있으니, 그가 자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처결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옥관(獄官)이 전후에 바뀌어지기는 했지만, 조정은 본시 똑같은 조정입니다. 범한 죄가 이와 같은데도 유찬(流竄)에 그친다면, 나라 사람들의 의혹이 어찌 더욱 심해지지 않겠습니까? 또한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오늘날 하신 거조(擧措)는 곧 천고(千古)에 없던 일이십니다. 뭇 아랫사람들과 만백성이 기뻐하며 뛰는 것은 단지 중전(中殿)의 복위(復位)만을 경사와 다행으로 여겨서가 아니고, 전하께서 하신 바가 광명(光明)하고 과단성이 있어 마치 해와 달이 새로워져 털끝만큼도 가려진 것이 없음을 큰 경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과연 강만태(康晩泰) 등 여러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곧 중궁의 복위가 조금은 강만태 등에게서 도움받은 것이 아닐 수 없게 되니, 성상의 덕에 누가 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강만태 등은 곧 함이완(咸以完)이 고발한 사람이고 민암(閔黯)이 죽이려고 한 사람이다. 함이완과 민암이 장차 극률(極律)을 받게 되었는데, 강만태 등도 또한 국법(國法)을 면하지 못한다면, 마치 세충(世充)과 건덕(建德)을 위해 원수를 갚은 일처럼 되어버린다.348) ’고 하는데, 이 말은 그럴듯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민암이 강만태를 죽이려고 한 것은 곤전(坤殿)의 복위가 그들에게는 해를 끼치는 것이었기 때문이고, 지금 강만태 등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곤전의 복위를 그들이 도모한 것이라고 한다면 국가에 치욕이 미치고 무함이 성상의 몸에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전자나 후자의 죄명(罪名)이 비록 서로 같은 듯하지만, 용법(用法)의 다름은 진실로 천지처럼 판이한데, 어찌 이전 사람의 소위를 답습(踏襲)하는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지금 접때 체포(逮捕)한 여러 사람들을 아울러 잡아다가 다시 캐묻는다면, 이는 참으로 민암이 한 짓을 옳게 여기는 것이니 결코 할 수 없는 일이고, 만일 그대로 이 네 사람을 버려두고 묻지 않는다면, 이는 곧 악역(惡逆)을 덮어 숨겨 주고 불령한 사람을 용납해 비호하는 것이 되어, 한 시대의 온 나라 사람들의 말과 후세의 공론을 마침내 억제하여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처치해야 할 방도는 먼저 강만태를 잡아다가 흉언(凶言)의 사실 여부를 국문(鞫問)하여 통쾌하게 왕법(王法)대로 시행하고, 최격(崔格)·이시회(李時檜)는 또한 윗사람을 무함한 죄를 다스리며, 한중혁(韓重爀)은 그가 손수 쓴 서찰(書札)을 가지고 본죄(本罪)를 논정(論定)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야 조정의 거조(擧措)가 바야흐로 명백하고 정대(正大)해질 것입니다. 이런 다음에는 기찰(譏察)이라는 말과 사경(私逕)에 대한 의심이 없어지게 되어 안팎이 통하고 풍습이 크게 고쳐져 청명(淸明)하게 다스려지는 세상을 거의 다시 보게 될 것이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또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로 말한다면 그 이름이 여러 죄수들의 공초(供招)에 오르내린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만약 통렬하게 한 번 밝히지 않는다면, 사실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장차 모두 알쏭달쏭한 가운데 의심받고 치욕을 당해 끝내 스스로 해명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의 처지로 말하더라도 또한 이름이 밀지(密旨)를 받은 사람 속에 들어 있지만, 신의 서종제(庶從弟)는 또한 은(銀)을 모은 부류들 속에 끼어 있습니다. 신이 끝내 명백하게 진달(陳達)하여 통쾌한 처분을 받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신도 역시 엄폐(掩蔽)하며 감히 발설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신이 비록 오장을 드러내 보인다 하더라도 어떻게 추악(醜惡)한 치욕을 씻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하찮은 먼지 티끌과 같은 몸으로 오히려 혐의를 털어버리고 자신이 결백해지고 싶음이 이러한데, 하물며 당당(堂堂)하신 성명께서 훤하게 위에 계시면서, 어찌 이를 덮어두고서 어둠침침하게 한다 기롱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다 보고 나서 이르기를,

"경(卿)의 말이 진실로 옳다. 앞서 좌상(左相)의 차자에도 또한 이와 같은 말이 있었다."

하자, 남구만이 ‘그럴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 마땅히 모두를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자, 남구만이 아뢰기를,

"갑인년 이후부터 시사(時事)가 자주 바뀌었는데, 변혁(變革)할 때마다 사리에 닿지 않는 말이 있었으므로, 외부 사람들이 듣고서 또한 더러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하여, 이 때문에 국체(國體)가 존엄하지 못하고 난망(亂亡)이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만일 이런 말을 통렬하게 제거하고 분명하게 배척하지 않는다면 그 끼쳐질 폐해가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처럼 불초한 사람은 말을 할 것도 없고, 비록 큰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더라도 또한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내리신 성상의 분부에도 또한 그렇게 여기셨음은 진실로 국가의 다행입니다. 진실로 좋게 여기는 것과 나쁘게 여기는 것을 통쾌하게 보여주시어, 군하(群下)들이 환하게 성상께서 뜻을 두신 곳을 알아차리게 한다면 진실로 공평하고 밝은 정치가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강만태(康晩泰)의 ‘해상 진인(海上眞人)’이란 말은 매우 요악(妖惡)한 것이니, 먼저 강만태를 잡아다가 끝까지 심문하라."

하였다. 이 말은 한구(韓構)에게서 들은 것이었고, 본시 물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 드디어 강만태의 일은 국청(鞫廳)에 내리고 한중혁(韓重爀) 등 네 사람의 일은 의금부에 내렸다. 남구만이 또 박세채(朴世采)를 권면하여 만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중혁과 김춘택(金春澤)은 평소에 행신이 없어 주색(酒色)을 탐하고 재물을 융통해 쓰기를 잘하며 마음이 부정한 무리들과 결탁하고 아무도 모르는 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모의(謀議)한 일은 사람들이 진실로 알지 못하였으나, 말이 온 나라에 두루 퍼졌으므로 그들의 죄는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취향(趣向)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불량한 부류들이 한중혁과 김춘택을 빙자하여 구실(口實)을 삼았고, 드디어 우리 전하께서 왕후의 자리를 뒤좇아 복구하시어, 한(漢)나라나 송(宋)나라 임금들보다도 월등하게 훌륭한 덕과, 조정 신하들이 윤기를 붙잡아 세우고 난역(亂逆)을 징토(懲討)하는 공정한 공론을 또한 다시 한중혁 등이 혼란하게 만들었다. 남구만(南九萬)이 극력 구핵(究覈)을 청하여 그렇지 않음을 밝히자고 한 것을 대저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마는, 다만 장희재(張希載)·민암(閔黯)·이의징(李義徵)의 무리에 대해서는 비록 그들의 죄가 이미 나타났는데도 한결같이 엄폐하여 덮으며 오직 혹시라도 상하게 할까 우려하고, 유독 한중혁·김춘택에 있어서만 극력 법대로 하자는 의논을 고집했기 때문에 국론(國論)이 정해지지 않고 사람들이 마음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모두들 그의 심술(心術)이 가려진 데가 있음을 알았다.

  • [註 342] 육지(陸贄) : 자는 경여(敬輿), 시호는 선공(宣公). 당 덕종(唐德宗) 때의 명신(名臣). 임금에게 간하는 말이 적절하였기에 후세의 주종(主宗)이 되었고, 그의 《주의(奏議)》가 유명함.
  • [註 343]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344]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345]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 [註 346] 이정(李楨)과 이남(李柟) : 정은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인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둘째 아들 복창군(福昌君). 남은 인평 대군의 셋째 아들 복선군(福善君).
  • [註 347] 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348] 세충(世充)과 건덕(建德)을 위해 원수를 갚은 일처럼 되어버린다. : 당 태종(唐太宗)이 즉위하기 전에 왕세충(王世充)·두건덕(竇建德)을 쳐서 멸하였는데, 뒤에 그의 형제들이 태종을 죽이려 하므로, 태종이 그의 아버지인 고조(高祖)에게 말하기를, "그의 형제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은 세충과 건덕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하였음. 여기서는 강만태·한중혁(韓重爀)·김춘택(金春澤) 등을 죽이는 것이 남인(南人)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이 된다는 뜻임.

원문

○庚午/領議政南九萬承命詣闕。 上引見慰勉之。 九萬曰: "臣旣還朝, 鞫獄當用前命議啓, 而文字未必詳, 臣請先陳之。" 上曰可。 九萬曰: "凡鞫獄, 告者明白然後, 端緖可尋。 今金寅語言反覆, 或有初不言而後言之, 或始言之而終又自稱其誣, 可謂虛踈。 尹憘、成虎彬刑訊七次, 相繼致斃, 此後更無可問。 李成夔比尹ㆍ成有間, 而不得已治之, 今又死矣。 陸贄曰: ‘情見跡著, 辭服理窮然後, 加刑辟焉。’ 此格言也。 且此獄起於朝臣進退之際, 若有一毫冤濫, 則有傷國脈, 流禍後世, 故必欲參其情跡, 決知其無疑然後處之。 而其中或有情則近而跡相左, 跡相似而情不然者, 李玄逸探試之說, 金寅追告, 而黯與義徵, 以將相主其事, 玄逸以吏判, 陳于榻前, 則其事誠陰兇危怕, 而寅始則不告, 乃於中間, 始爲發告, 有難盡信, 初旣曰: ‘黯與義徵, 實敎玄逸, 嘗試上意。’ 玄逸出而言於二人, 二人以爲, 此若不諧, 當擧大事, 及其更問則曰: ‘玄逸往金元燮家言之。’ 前後相左, 且非寅所自聞, 謂虎彬聞之而傳說於寅。 虎彬旣死, 言語階梯, 無可憑問。 蓋義徵行已處事, 本與閔黯無異。 自己巳以後, 誤國事者, 是黯與義徵所爲, 國人皆曰可殺, 不但爲寅所告而已。 雖然謀逆之跡, 若不明, 則何可以其人之無狀, 因以成獄也? 寅之受銀布, 考之訓局文簿, 其數一如寅所告, 而皆以虎彬名貸之, 故欲知寅與義徵相見, 問于寅者再三, 或曰元不相面, 或曰夜中見之, 或曰累見之, 其言之互變, 又如此, 何可信乎? 其中可疑者, 惟申英元貸銀事發則自縊而死也。 然義徵之譏察, 憘、虎彬皆已言之, 則未知英元之貸銀, 爲逆謀耶? 爲譏察耶? 英元旣死, 亦無可問, 且殺鷄同盟一事, 與變書不同, 寅自謂欲謾憘以挑義徵之心矣。 寅言旣參差, 故雖累鞫義徵, 刑訊至五次, 而終難得其自服。 臣謂義徵之情, 本無可生之道, 而跡則亦無可執以爲逆者也。 至若玄逸, 觀其爲人, 儘迂踈無用, 向時人, 以此人薦聞於上, 置之大冡宰, 其罪亦重, 雖然鄕音古談, 太生澁, 雖欲包藏禍心, 決不可得以王子事入告其言, 固人人常談耳。 雖果若寅之言, 似是爲黯ㆍ義徵所賣而然, 非玄逸同預兇謀也。 雖然渠旣以此說, 發之于前席, 無情有情, 何可億逆乎? 故臣謂玄逸, 跡有可疑而情或可原也。 義徵ㆍ玄逸, 所坐極重, 而其情跡之不同, 有如此者。" 上然之。 九萬曰: "玄逸之罪, 又有之。 中宮在私第之時, 所上疏, 一則曰自絶于天。 一則敢以彼字, 加之於中宮。 向時人倫紀斁絶, 義理晦塞, 不知有嚴畏尊敬之意, 肆然爲悖慢之語, 此與睦來善不恭敬之說, 何異? 其罪斷無生理, 第其本意, 欲移奉別宮, 厚廩設衛, 以爲禮待之地, 而遣辭指斥, 自不覺其如此, 此亦跡之可疑者, 而情則無侵害之意, 與侵害者同罪, 則似或稱冤。" 上亦以爲是。 九萬又曰: "告者三人, 在獄中, 卽咸以完、李時棹、金寅也。 以完則雖爲黯所脅, 而旣自發告, 是皆蔓及搢紳計也。 黯則本罪固已當死, 與以完同爲上變, 亦其罪也。 黯死, 以完安得不死? 李時棹情狀, 尤叵測, 始出入希載家, 賂銀蔘與之相接, 未知所圖者, 是何等事, 而終乃締結章道, 往來其間, 欲觀事勢而去就之? 其心術, 尤無狀也。 初欲告韓重爀等之謀, 而爲以完先告, 乃被逮向時人治獄, 則遂構重爀ㆍ構等, 以冀其幸有生道, 及朝局旣換, 鞫廳又一變, 乃以布帒之說, 與以完互相推諉, 隱然欲從中爲告者。 又謂章道, 邀見於張萬春之家, 而萬春言: ‘訓將兵判守禦使金元燮、李聃命輩, 約於明春擧事云。’ 試使章道, 與時棹面質詰問, 則時棹自是姦惡之人, 且有口辯, 使章道不得爲一辭, 蓋其意, 又以爲多告一番人, 則冀其有生道耳。 萬春卽故儒張顯光後也。 是嶺南大家, 而稱以同姓, 附托希載, 呼以祖父, 蹤跡悖惡, 國言藉藉, 且成虎彬失妾, 欲呈官, 其狀萬春書之矣。 凡以明春擧事, 名出時棹之口者, 皆當請拿, 而時棹一入獄, 三變其言, 實不可信。 如義徵ㆍ元燮, 方就囚故問之, 而其餘諸人則不拿耳。" 上曰: "時棹反復, 決不可生。" 九萬曰: "金寅所納尹憘書三本, 卽所以告變者, 而憘書中, 旣曰: ‘卽聞金生之言, 不覺骨驚而心寒。’ 其言卽殺鷄同盟之文, 而終又曰: ‘其文本是誣也。’ 自作虛文, 示人同謀, 仍復持其文上變, 本不足信, 而且其書意, 皆是譏察西人, 欲爲上告者也, 實非自爲謀逆者, 何可以此成獄乎? 寅所謂同盟者二人, 一則李益華, 一則李養中, 而寅於益華ㆍ養中家, 俱有所偸竊者, 益華等告捕廳, 欲捕寅而不得。 寅之誣引有嫌之人, 判然可知。 且寅淫虎彬之妾, 事覺而逃, 直走尹憘所, 受其書仍上變, 事事如此, 眞天下之亂人也。" 上曰: "寅所謂謀逆者, 無顯著之事矣。" 九萬曰: "爲寅所告, 受刑而死三人。 義徵輩, 又受刑而不服, 終未能鉤得逆謀。 如寅之類, 自上若以爲有妨告密之門, 特命活之, 則未知如何, 而其情斷不可貸也。 以完旣以欲盡殺西人, 搢紳當死, 寅之造意, 亦欲盡殺南人搢紳者也。 卽今屛黜一邊之人, 固皆有當被之罪, 然以逆名加之, 亦有所不忍, 獄成則寅有大功, 不成則寅豈能活耶?" 上曰然。 九萬曰: "玄逸之迹, 可罪者爲二, 而其情可疑。 義徵之情, 可死者極多, 且國人皆曰可殺, 而其迹未顯, 寅雖上變而終亦難免於死。" 〔工〕 曰: "卿其退而議啓。" 九萬曰: "前日康晩泰之言, 終不可置之, 故擬於議啓之後, 卽陳一箚, 繕寫以待。 未及議啓, 而又以儒疏, 狼狽而出, 今何敢不盡其所欲言乎? 自上追悔己已事, 中壼復位, 雖在遐方下賤, 擧〔皆〕 懽忭, 只以康晩泰之罪, 未及勘斷, 故外議猶以爲未快, 仍自袖中, 出箚本而進之。 其箚曰: ‘昔在甲寅年, 先王新棄群臣, 殿頭下初卽位, 而富於春秋, 楨、柟出入宮禁, 威行掖庭, 而交結外朝, 爲其羽翼者亦多。’ 其時國勢之懍懍, 不翅千勻之一髮, 殿下或有未及盡察者, 而群下莫不爲之寒心, 惟其如此故, 故淸城府院君 金錫胄, 以肺腑之親, 居中兵之地, 始有詗察之事, 庚申逆節, 因此發覺, 堅、柟以首惡伏法, 宗社幾危而復安, 雖然此乃迫不得已之事, 不可踵而行之者, 而庚申以後, 亦不無此事, 雖鉤得一二兇徒隱伏之狀, 其疑亂人心, 虧傷世道, 可勝言哉? 然則其心雖〔曰〕 願忠於國, 其事固宜見斥於公議, 及至己已變更之後, 當國者以詗察爲前人之極罪, 加之以淫刑酷律, 而及今閔黯, 又誘脅咸以完上變, 張大蔓延, 將擧半一世之人, 驅入罟擭之中, 幸賴天日之明, 不得售其魚肉搢紳之計, 而自陷大戮, 然蹊徑一開之後, 誠難杜塞, 覆轍相尋, 仍成風習, 喧沸之聲, 無時可已。 此乃源開於庚申, 而流漫於今日, 每一變易, 層節益加, 從此以往, 若不痛絶此風, 一變前習, 則國必莫之救以滅, 其爲社稷之憂, 豈但痛哭流涕而止哉? 然則其在今日, 爲第一件大事, 惟在於此逕之一掃而去之。 其去之之道, 不但在於嚴治以完輩而已。 至於康晩泰、崔格、李時檜、韓重爀四人之罪, 亦宜明白區處, 使一國之人, 曉然皆知其情犯之輕重然後, 方可以快衆心而服群情, 何以言之? 當初以完所告中諸囚取服者, 乃是晩泰、格、時檜三人, 而皆以圖復坤位爲結案, 此何等事, 而渠輩敢圖之耶? 其圖之云者, 將欲圖之於何所耶? 以幺麽無賴之賤士, 乃敢生心於此事, 毋論所執之如何, 其罪可得以容貸耶? 人心世道, 至於如此, 國勢安得以不卑, 群情安得以不至於波蕩乎? 雖然此則渠輩猶自依托於大義, 至於晩泰, 則結案中所謂任𡋛ㆍ韓構, 議迎海上眞人之說, 非問目中所問, 而渠自置對, 若以其事爲實, 則當竝與任ㆍ韓而論以大逆, 若以其事爲虛, 則誣人以大逆之罪, 亦不可免。 此而置之, 則國何以爲國, 人何以爲人耶? 至於韓重爀所與交最深密者, 乃是李時棹ㆍ康晩泰等所聚者銀貨, 而多歸之於酒食被服鞍馬之費, 若其事跡則自有渠手筆書札, 不待渠就服而可決。 獄官雖有前後之變易, 朝廷自是一朝廷, 罪犯如此, 而止於流竄, 國人之疑惑, 豈不滋甚乎? 且念殿下, 今日擧措, 乃是千古之所無, 群下億兆所以歡欣踴躍者, 非但以中殿之復位爲慶幸, 以殿下所作爲, 光明夬斷, 如日月之更, 無纖毫之翳, 爲大慶, 若果如晩泰諸人之言, 則是中壼之復, 不能無一分得助於晩泰等也。 其爲聖德之羞累, 何可勝言哉? 或者以爲: ‘晩泰等, 乃以完之所告而黯之所欲殺者也。’ 以完、黯將被極律, 而晩泰等, 亦不免王法, 則有若爲世充、建德報仇者然, 此言似然而實不然, 何也? 黯之欲殺晩泰者, 以其復坤位之有害於渠等也。 今之欲殺晩泰等者, 以坤位之復, 爲渠等之所圖云者, 辱及於國家, 誣歸於上躬故也。 前後罪名, 雖若相似, 而用法之異則實如天壤之判, 何得以襲前人所爲, 爲疑哉? 然今若竝拿其時逮捕諸人, 更加鉤得, 則是眞是黯事, 決不可爲也。 若仍置此四人不問, 則是掩匿惡逆, 容護不逞, 一時國人之言, 後世公議之發, 終不可得以抑止。 在今處之之道, 先拿晩泰, 鞫問其凶言虛實, 快行王誅。 格、時檜亦正其誣上之罪。 重爀則以其手札論定本罪, 斷不可已。 如此然後, 朝家擧措, 方爲明白正大。 此後詗察之說, 私逕之疑, 可得止息, 表裏洞徹, 風習丕變, 而淸明之治, 庶可復見, 豈不痛快矣乎? 且以在朝諸臣論之, 其名之出入諸囚之招者甚多, 若不一爲痛辨, 則毋論虛實, 擧將受疑被衊於有無之間, 終不得自解, 雖以臣身言之, 臣名亦在於受密旨之中, 臣孽從弟, 又在於聚銀之類, 臣終不明白陳達, 快有處分, 則人將謂臣亦掩蔽而不敢發, 臣雖剖心刳肝, 何以洗滌其醜辱耶? 以臣眇末塵土之身, 猶欲遠嫌而自潔如此, 況堂堂聖明, 赫赫在上, 何可掩覆於此而受黯黮之譏耶?" 上覽訖曰: "卿言誠是, 向者左相箚, 亦有此說矣。" 九萬曰: "然"。 上曰: "今當竝賜施行。" 九萬曰: "自甲寅以後, 時事屢換, 變革之際, 每有不近理之說, 外人聽聞, 亦或致疑於眞贗之間, 以此國體不尊, 亂亡無日, 此說若不痛祛而明斥之, 則其流之弊, 有不可言。 如臣不肖, 不足比數, 而雖使能堪大任者當之, 亦末如之何? 今者聖敎, 亦以爲然, 實國家之福也。 苟能快示好惡, 使群下曉然知聖意之所在, 則實有光於平明之治矣。" 上曰: "康晩泰海上眞人之說, 甚是妖惡, 先拿晩泰窮訊之, 是聽於韓構者, 本非所問而言之矣。 遂以晩泰事, 下鞫廳。 重爀等四人事, 下禁府。" 九萬又請勉留朴世采, 上納之。 謹按韓重爀ㆍ金春澤, 素無行, 耽酒色, 通貨財, 締結傾邪之徒, 攀援幽陰之逕, 其所謀議, 人固不知, 而語言流聞, 徧於一國, 其罪不可不誅。 於是異趣之人, 不逞之類, 藉重爀 春澤爲口實, 遂使我殿下, 追復后位, 卓越漢、宋之盛德, 及朝臣扶樹倫紀, 懲討亂逆之正論, 亦復爲重爀等所疑亂。 九萬之力請究覈, 以明其不然者, 夫孰曰不可? 而但於希載、黯、義徵之黨, 則雖其罪已彰, 而一意掩覆, 惟恐其或傷, 獨於重爀ㆍ春澤, 力爲執法之議, 故國論不定, 人心不服, 皆知其心術之有所蔽也。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원본

/ 1
태조-철종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 이동
                                                              고종-순종
                                                              • 이동
                                                                • 이동
                                                                  • 이동
                                                                    태조-철종
                                                                      고종-순종

                                                                        문자입력기

                                                                        한자목록

                                                                        문자영역
                                                                        한자목록 바로가기

                                                                        부수

                                                                        획수

                                                                        한자목록

                                                                        획수

                                                                        한자목록

                                                                        부수

                                                                        획수

                                                                        한자목록

                                                                        영문INDEX

                                                                        한어 병음

                                                                        한자목록

                                                                        영문INDEX

                                                                        일본어 음독

                                                                        한자목록

                                                                        책갈피목록

                                                                        책갈피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