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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 8월 21일 甲寅 1/1 기사 / 1684년 청 강희(康熙) 23년

윤증과 송시열의 일에 관한 관학 유생 조정만 등의 상소와 사건 전말

국역

관학(館學)457) 의 유생(儒生) 조정만(趙正萬) 등이 상소하기를,

"송(宋)나라 말기에 형서(邢恕)458) 란 자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정자(程子)의 문하(門下)에서 나왔으나,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자, 그 스승을 배반하여 공격하니, 마침내 사설(邪說)이 횡행하여 군자(君子)의 도(道)가 사라지고 백년의 화(禍)를 이루게 하였으므로, 신 등은 이에 통한(痛恨)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오늘날 형서의 일이 성명(聖明)의 조정에 다시 나와서 장차 인심이 허물어지고 세도(世道)가 무너져서 어지럽게 되려 하니, 사림(士林)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윤증(尹拯)이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한 지 이제 30여 년에 이르므로, 윤증(尹拯)이 근실하게 복종해 섬긴 것과 송시열이 두텁게 허여(許與)한 것은 진실로 심상한 사제(師弟)에 비할 바가 아닌데, 윤증이 사감(私憾)으로 원망과 노여움을 깊이 쌓아 편지에 드러내어 꾸짖고 무망(誣妄)하기를 기탄없이 하였고, 일이 발단된 뒤에 미쳐서는 또 다시 용장(冗長)한 글과 편지를 직접 사문(師門)에 던져서 마음대로 업신여기고 짓밟는 등 더욱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도리로서 차마 할 바이겠습니까? 대저 윤증의 아비 증 참의(贈參議) 신(臣) 윤선거(尹宣擧)가 강도(江都)의 변란(變亂)459) 을 겪고부터 향리(鄕里)에 물러가 살면서 사우(師友)와 종유(從遊)하고 뜻을 학문에 돈독히 하니, 한때의 사류(士流)가 추중(推重)하여 허여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고, 송시열도 윤선거와 서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같은 때에 적(賊) 윤휴(尹鑴)가 유자(儒者)의 이름을 빌어 사우(士友) 사이에 두루 종유하였는데, 《중용(中庸)》의 주자(朱子)의 집주(輯註)를 고치자, 송시열이 명백하게 분변하여 통렬하게 배척하고, 인하여 서로 절교(絶交)하였습니다. 기해년(己亥年)460) 의례(議禮)의 일이 발생하자, 윤휴가 곧, ‘임금을 낮추고 종통(宗統)을 둘로 한다.’는 말을 만들어 내어 일망타진(一網打盡)할 계책을 쓰고자 하니,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과 같은 여러 사람들도 모두 그 심술(心術)의 음흉함을 알고는 또한 서로 절교하였는데, 오로지 윤선거(尹宣擧)의 뜻은 서로 어긋남이 없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송시열이 세도(世道)를 위해 깊이 근심하여 여러 번 충고(忠告)하였으나, 윤선거가 마침내 따르지 아니하므로, 송시열이 매양 그 사(邪)와 정(正)의 분변이 엄정하지 못함을 탄식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윤증이 갈문(碣文)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는데, 송시열은, 비갈(碑碣)의 글은 사실을 수집해서 기록하여 후세에 전신(傳信)해야 하고, 또 문자(文字)로써 사람에게 사사로운 정(情)을 좇아 구차하게 칭찬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 또한 성실한 도(道)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논찬(論撰)한 것이 한결같이 윤증의 바라는 바와 같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곧 윤증의 감한(感恨)을 일으킨 까닭입니다. 윤증은 오히려 속으로는 원망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품고서도 겉으로는 사제(師弟)의 예(禮)를 행하면서 은밀히 쌓고 간직하고는 얼굴 빛이나 말에는 드러내지 아니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감히 때를 틈타 갑자기 발동하여 헐뜯고 배척함이 이처럼 극단에 이르고 있으니, 대저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연고가 아닙니다. 지난번 최신(崔愼)이 상소하여 비로소 그 꾸짖고 무망하는 말을 배척하고, 대신(大臣)이 이어서 전석(前席)에서 진달하자, 전하께서 그 정상을 밝게 살피시고 전후의 성교(聖敎)가 엄절(嚴截)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윤증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스스로 반성하여 척연(惕然)히 고칠 것을 생각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더욱 패만(悖慢)하여 조금도 기탄함이 없이 편사(偏邪)한 말과 변명하는 말의 사단이 많았으니, 신 등이 그 가운데 한두 가지를 간략히 분변하겠습니다.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지금에 와서 망령된 소견에는 〈선생의〉 본원(本源)의 바탕에 대해 의심스러움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기질(氣質)의 병폐를 교혁(矯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조장하는 바가 있으니, 이것이 참람하게도 망론(妄論)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불평하는 것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입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문자(文字)의 일뿐만 아니라 문하(門下)께서는 비가(鄙家)에 대해서 미세한 한 가지 일이나 의심스러운 한 마디 말이라도 진실로 선인(先人)을 해칠 만한 것이 있으면, 폭양(暴揚)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니, 자식된 마음에 어찌 통각(痛刻)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저의 마음이 통박(痛迫)하여 정(情)이 전일(前日)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하였으면, 그 원독(怨毒)의 깊음을 따라서 알 수 있는데, 도리어 이르기를, ‘불평하는 것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이다.’ 하였습니다. 이미 원독한 마음을 속에 품었다면 대개 가는 곳마다 촉발(觸發)하여 그 말하는 바가 저절로 공정하지 못할 것인데, 비록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에서 나오는 것이다.’고 말하나 그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또 윤증이 송시열을 따른 지가 이와 같이 오래 되었는데, 평소 질의(質疑)할 때에 무엇 때문에 일찍이 일언반사(一言半辭)도 송시열의 도학(道學)에 대해 순정(醇正)한지 허물이 있는지 언급한 바가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비가 죽은 후 문자(文字)를 부탁하는 데 이르렀으면, 존상(尊尙)하고 경복(敬服)하는 바가 또한 지극하다고 이를 만한데, 오로지 갈문(碣文)이 이미 나온 뒤에 곧 본원(本源)과 언행(言行)에 의심할 바가 없지 않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송시열의 본원과 언행이 그 갈문으로 인하여 비로소 의심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대저 윤증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아래로 한 귀절 한 글자가 모두 사감(私憾)에서 나왔기 때문에, 학문을 논한다고 가탁하여 스스로 공의(公議)라고 일컬으면서 사람의 귀와 눈을 가리려는 계책으로 삼은 것입니다. 아아, 예로부터 문하의 제자가 선생과 어른에게 일로 인하여 논변(論辨)한 것은 진실로 많이 있었으나, 일찍이 그 언행(言行)의 전체를 들어서 공공연히 꾸짖고 무망하기를 윤증과 같이 한 자가 있었습니까? 송시열은 평생 동안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행동을 모두 주자(朱子)를 기준으로 삼았으니, 공부의 독실함과 문로(門路)의 정대(正大)함은 선유(先儒)의 정맥(正脈)을 이었고,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이 되었으며, 사람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모두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정직한 데에서 나왔으니, 어찌 일찍이 일호라도 기관(機關)461) 과 권모 술수(權謀術數)가 윤증의 말과 방불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윤선거(尹宣擧)는 늦게야 뜻을 세운 것이 족히 강도(江都)의 일을 덮을 만하였으나, 또 끝내 적(賊) 윤휴(尹鑴)의 악함을 깨닫지 못한 것 또한 어찌 백 번 속임을 받는다는 뜻에 손상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시열은 장차 세도(世道)의 큰 근심이 될 것을 밝게 보고,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윤선거는 뜻[志]이 같고 의(義)가 합하는 사람이었으나, 오로지 이 일에는 의견이 달랐으니, 탄식하고 애석해 하는 마음이 어찌 때로 이야기 가운데 발설하지 아니할 수 있었겠으며, 논찬(論撰)하는 말에 어찌 약간 짐작함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그 아들이 적대시하는 바가 되어 이러한 망극한 구무(構誣)가 있었으니, 군자(君子)가 이러한 세상에 처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윤증이 네 번째 보낸 글에 적(賊) 윤휴를 논급(論及)하여 이르기를, ‘그 사람이 죄로 죽은 뒤에 무슨 다시 논할 일이 있겠는가?’고 하였는데, 이른바, ‘죄로 죽었다.’고 일컫는 것을 흉적(凶賊)의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윤휴가 동조(東朝)462) 를 무욕(誣辱)하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할 것을 꾀한 죄는 흉당(凶黨)에 있어서 우두머리가 되는데, 이제 죄로 죽었다고 지목하는 것은 오로지 무엇 때문입니까? 아아, 송시열의 성품은 본래 강의(剛毅)하여 도리(道理)를 믿어 스스로 지키면서 그 마음에 옳지 못한 것과 의리에 불가한 것은 비록 큰 이해(利害)가 있다 하더라도 일찍이 돌아보거나 꺼려한 적이 없었으니, 그 평생의 경력(經歷)을 살펴보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오로지 세도(世道)를 자임(自任)하여 더욱 엄절함을 이룬 것이 사정(邪正)과 선악(善惡)의 분변에 있었기 때문에, 오로지 저 아첨하고 질투하며 정도(正道)를 미워하는 무리가 때때로 나와서 구훼(構毁)하고 나직(羅織)하는 등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으나, 오히려 감히 학술(學術)로써 허물을 삼지는 못하였는데, 이제 윤증이 현란(眩亂)한 말을 만들어 정대하고 순수(純粹)한 학문을 더럽히고자 하며 한때를 속이고 후세를 속일 수 있다고 이르니, 참으로 세변(世變)은 있지 아니하는 바가 없습니다. 송시열의 도덕과 학문은 진실로 이로써 증손(增損)되는 바가 있지 않을 것이나, 오로지 인심이 함닉(陷溺)하고 의리(義理)가 회색(晦塞)되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의논이 어지럽게 아울러 일어나서 삼조(三朝)463) 에서 예우(禮遇)할 뿐만 아니라, 사림(士林)이 존경하던 이를 모두 허망한 지경으로 돌아가게 할 따름이고, 경원(慶元)464) 때의 위학(僞學)의 비방465) 이 장차 오늘날에 다시 일어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 시류(時流)가 더럽혀질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윤증이 학문을 논한 한 마디 말은 반드시 장차 후일의 재화(災禍)의 빌미가 될 것이니, 어찌 조속히 분변하여 그 싹을 끊어 없애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인심이 함닉(陷溺)하고 의리가 회색(晦塞)되어 평소의 존경하던 사람을 꾸짖고 배척함이 한결같이 이처럼 지극한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어찌 사문(斯文)의 불행일 뿐이겠는가? 진실로 국가의 불행이다. 지난날 상신(相臣)의 진달로 인하여 이미 밝게 분변하여 물리쳐 끊었는데, 너희들이 수선(首善)466) 의 땅에 있으면서 어진 스승의 무함(誣陷)받은 것을 통분하게 여겨 함께 부르짖어 변명하되, 말의 뜻이 엄정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당초에 윤증이 박세채(朴世采)에게 준 글에서 이미 발론하였는데, 송시열이 윤증에게 글을 보내기를,

"고명(高明)이 화숙(和叔)467) 에게 준 편지를 지난 달에 우연히 얻어 보니, 아아, 참으로 약석(藥石)이었네. 대개 어려서부터 망령되게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또 사문(師門)에 종유(從遊)하여 이 일을 얻어 들었으니, 반드시 글을 읽어서 이치를 밝히고 극기(克己)하여 사욕을 없애는 이 두 가지가 바로 실제의 공효(功效)일 것이네.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는 바 아니지만, 기질(氣質)이 편협(偏俠)하고 잡박(雜駁)한데다가 실행에도 힘쓰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털끝만큼도 근사(近似)한 것이 없었네. 이치에 이미 밝지 못하여 이(利)를 의(義)로 여기고, 극기(克己)하지 못하여 물욕이 항상 행해져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온전히 인욕(人欲)에서 나온 것이 많았으니, 자신을 점검(點檢)할 때마다 부끄러움에 옷에 땀이 젖는 것을 깨닫지 못하네. 지금 고명(高明)이 지적한 바는 모두 진실로 병통이나, 의(義)와 이(利)를 함께 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아울러 쓴다는 것은 더욱 지나치게 허여(許與)하고 크게 용서함을 보겠네. 매번 받들어 읽은 후 침으로 몸을 찌르는 것과 같아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경책(警責)하여 새로워지기를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어 많은 은혜를 받았으니, 비유하건대, 병든 사람이 고질이 되어 장차 죽게 되었는데, 갑자기 양의(良醫)가 신묘(神妙)한 약을 주어 살 길을 찾을 수 있었다면, 비록 양의의 본심이 과연 자기를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은혜가 됨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내가 과연 문자(文字)의 과실로 선장(先丈)에게 득죄(得罪)하였으니, 끝내 의혹을 풀 수가 없다면 고명의 도리에 있어서는 주자(朱子)가 말한 것과 같이 의(義)를 좇아서 절교(絶交)를 고해야 마땅할 것이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사제의〉 굴레에 매여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불평(不平)하는 뜻을 마음속에 쌓아두면, 이르는 곳마다 촉발(觸發)하여 제재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니, 군자(君子)가 의(義)를 처리하는 도리(道理)가 과연 이와 같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네. 또 문자(文字)를 초정(草定)한 이래로 고명(高明)이 개정(改正)하게 하려한 것은 받들어 따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득죄(得罪)한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 목천(木川)의 일468) 에 있어서는, 이를 고명이 깊이 노여워하는 바이나, 반복해서 생각해 보건대, 그 일의 허실(虛實)과 그 말의 유무(有無)를 물론하고, 대개 타우(打愚)469) 가 호향(互鄕)470) 의 사람과 더불어 상종(相從)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대개 선장(先丈)을 존상(尊尙)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네. 고명이 논한 바는 바로 정문 일침(頂門一針)으로서, 평생 동안 이를 사우(士友) 사이에 얻은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로써 경계하고 격려하니, 우연히 죽지 아니한다면 거의 조금이나마 상유(桑楡)의 공효가 있을 것이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신(崔愼)이라는 북방(北方)의 무지(無知)한 사람이 갑자기 소장(疏章)에 드러내어 조리가 없고 이치에도 어긋난 말로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다고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황공하고 부끄러워 거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였네. 비록 급히 글로써 질책(叱責)하였으나, 이루어진 일이어서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 무릇 전후의 말한 바가 만약 간폐(肝肺)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하늘이 미워하고 미워할 것이네. 말하고 싶은 것이 이에 그치지 아니하나, 거의 다한 천식(喘息)이 몹시 위태하여 입으로 부르는 것도 접속하지 못하고, 그 구선(究宣)하는 것도 조리가 없으니, 오로지 고명은 가련하게 여겨 살펴 주기 바라네. 사람이 장차 죽으려고 하면 그 말이 선(善)해진다 하였고, 무릇 이에 운운(云云)한 것들은 반드시 거짓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아울러 양지(諒知)하기 바라네."

하였는데, 윤증이 답하기를,

"한 번 권생(權生)이 참람한 논의를 전달(轉達)한 뒤로 항상 황송(惶悚)함이 간절하였는데, 저의 편지가 전해진 것을 듣고는 비록 황송함은 더욱 깊어도 여러 해를 머뭇거리며 감히 아뢰지 못하였던 것을 갖추 듣고 보실 수 있게 되었으니, 또 저윽이 스스로 다행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북인(北人)의 상소(上疏)가 나온 것을 듣고는 마음이 슬퍼서 도모할 바를 몰라 문하(門下)를 위하여 놀라 마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인(先人)에게 욕(辱)이 미치고 저의 마음이 몹시 아플 뿐만 아니라, 부자(父子)가 스승과 벗으로 교유한 지 50여 년 만에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망연(惘然)히 의(義)를 처리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문하께서 다시 거두어 용서하시고 이 글을 내려서 정성스럽게 설명하여 깨우쳐 주시며 말씀이 선해진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보증하시고, 〈거짓이 있으면〉 하늘이 미워한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시고, 조리가 없고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으로써 북인(北人)을 질책(叱責)하셨습니다. 아! 문하의 말씀이 이에 미친 것은 오히려 스스로 경계[畦畛]를 베풀어서 스스로 장자(長者)를 끊게 하시려는 것이니, 문하께서는 윤증(尹拯)을 저버리지 아니하셨으나, 윤증이 진실로 문하를 저버린 것입니다. 이에 하교(下敎)하신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하나 답(答)을 올려 재처(裁處)하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하교하시기를 ‘고명(高明)이 지적한 바는 모두 진실로 병통이나, 이(利)와 의(義)를 같이 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아울러 쓴다고 한 것은 더욱 지나치게 허여(許與)하고 크게 용서하는 것이다.’ 하셨으나, 이는 단지 대강(大綱)을 말씀하신 것뿐이고, 그 자세한 것은 진실로 신유년471) 의 의서(擬書)472) 에 있는데, 이제까지 감히 올리지 못한 것은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한 죄입니다. 선인(先人)께서는 문하께 진실로 지극한 정성이 있어서 의심할 만한 곳이 있음을 보면 모두 기질(氣質)의 병통으로 돌리시고, 본원(本源)에는 일찍이 의심하지 아니하셨으나, 오늘에 이르러 망령된 소견으로는 본원의 바탕에 의심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기질의 병폐를 교혁(矯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조장(助長)하고 계시니 이것이 참람한 망론(妄論)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문하께서 담부(擔負)하신 바가 어떠하십니까? 훗날의 과오는 호리(毫釐)에서 비롯되고, 구인(九仞)473) 의 높은 산을 쌓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면 완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훗날 논하는 자로 하여금 또한 윤증과 같이 망론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크게 통석(痛惜)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제지받아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고, 권생(權生)474) 과 논한 것은 단지 제(齊)나라 사람의 처첩(妻妾)이 안 뜰에서 원망하는 것475) 과 같은 것이었는데, 전전하여 득죄(得罪)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모두 식견(識見)이 어두운 죄입니다. 양의(良醫)의 본심이 자기를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하교는 또한 감히 해명할 수는 없으나 이는 옛사람이 ‘믿지 아니함이 있으면 곧 자기를 비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교훈입니다. 하교하시기를, ‘내가 문자(文字)의 과실로 선장(先丈)에게 득죄(得罪)하였으니, 의혹을 풀 수가 없다면 고명은 마땅히 의(義)를 좇아서 절교(絶交)를 고해야 할 것이네.’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도리어 얽매여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불평하는 뜻을 마음속에 쌓아 둔다.’라고 하셨으나, 절교를 고하는 것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범충선(范忠宣)도 구양공(歐陽公)에게 능히 행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무상(無狀)한 자와 문하와의 사이이겠습니까? 대저 정의(情義)가 전과 같지 못한 것으로써 모두 절교해야 한다고 이른다면 세간의 교제에 절교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문하의 말씀이 이에 미치시니, 진실로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화숙(和叔)476) 에게 준 편지를 불평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진실로 윤증(尹拯)의 본정[情]이 아닙니다. 대저 불평하는 것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이니, 이는 단지 망령된 소견이 잘못 들어간 것일 뿐입니다. 하교하시기를, ‘문자(文字)를 초청(草定)한 이래로 고명이 고치게 하려고 한 것은 받들어 따르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고 하셨는데, 대저 위의 글에 하교하신 바, ‘마침내 의혹을 풀수가 없었다.’는 것은 그 총론(總論)을 고치지 아니한 일을 지적하신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또 어찌하여 받들어 따르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는 하교가 있었습니까? 문자(文字)를 고쳐 줄 것을 청한 것이 전후에 모두 세 번 있었는데, 갑인년477) 에는 불초(不肖)가 스스로 청하였고, 병진년478) 에는 문하께서 고쳐 줄 것을 허락하셨으며, 무오년479) 에는 문하께서 다시 올리게 하셨습니다. 처음 고쳐 주실 것을 청하였을 적에는 고쳐 주시는 은혜를 입지 못하였고, 또 이 일은 급급(汲汲)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하교하신 때문에 감히 재차 고쳐 주실 것을 청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또 다소의 왕복이 있었으나, 종말에는 단지, ‘우선 화숙(和叔)이 기록한 바에 의거한다.’라고 하교하시고, 또 ‘약한 것은 강한 것을 대적하지 못한다’, ‘산악(山岳)으로 바꾸어 쓰겠다.’는 등의 희롱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희롱당하였는데, 어찌 감히 세 번 청할 뜻이 있겠습니까? 그후 약간의 글자를 고쳐 주셨으나, ‘보내 온 뜻에 의하여 찬정한다.’는 시교(示敎)가 있었기 때문에 이로써 스스로 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다시 흠결(欠缺)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문자(文字)의 일뿐만 아니라, 문하께서는 비가(鄙家)에 대하여 비록 한 마디 말씀과 한 가지 일이라도 진실로 선인(先人)을 해칠 수 있는 것은 폭양(暴揚)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으니, 또 저의 마음에 통박(痛迫)한 것이 있었습니다. 문하께서 일찍이 김 상서(金尙書)의 말을 인용하여 선인을 가리켜 잔인(殘忍)한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이와 같이 근사하지도 아니한 말을 오히려 허실(虛實)을 가리지도 않은 채 남에게 말씀하셨으니, 자식된 마음에 어찌 통각(痛刻)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교하시기를, ‘목천(木川)의 일은 고명이 깊이 노여워하는 바이나, 대개 타우(打愚)가 호향(互鄕)의 사람들과 상종(相從)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으니, 선장(先丈)을 존숭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네.’ 하였는데, 당시의 일은 선인(先人)의 전후의 상소에 하나하나를 스스로 열거하였고,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도, ‘진동(陳東)480) 이 마침내 윤곡(尹穀)481) 의 죽음을 이루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는 비답(批答)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득실(得失)과 시비(是非)는 자연히 후세의 정론이 있을 것입니다. 또 사람은 각각 견해가 있으니, 만약 의(義)를 처리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를 논하는 데 있어서 시비(是非)를 공정하게 한다면, 비록 자손이라 하더라도 감히 사감(私憾)을 가질 수 없겠지만, 이 말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갑인년482) 에서 신유년483) 까지 8년 사이에 이곳에서나 목천(木川) 부근에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는데, 갑자기 문하로부터 전하여 나왔으니, 생각하건대 문하께 고한 자가 은밀히 선인의 자병(疵病)484) 을 드러내려는 뜻을 품고는 고의로 다른 사람을 칭탁하여 그 말을 퍼뜨리고, 어지럽게 분변하고 힐문(詰問)할 때에 한바탕 욕하고 싸움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이로써 진실로 마음이 아픔을 금하지 못하여 그 말이 나온 곳을 청하려고 글을 써 놓고는 미처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다른 사람이 이미 앙문(仰問)하였는데, 문하께서는 설파(說破)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미안함을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하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여 마침내 감히 올리지 못하였는데, 혜서(惠書)에 허황(許璜)에게 물으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문하께 의심을 두었던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습니다. 옛날 문하께서 화숙(和叔)에게 준 글에 어떤 사람의 성내어 꾸짖은 말을 인용하고, 그 곁에 강도지사(江都之事)라는 네 글자를 썼다가 도로 지웠는데, 만약 이것이 그 사람의 말이라면 이미 썼다가 도로 지운 것은 무엇 때문이며, 지우고도 볼 수 있게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뒤에 초려(草廬)485) 의 손자 이단중(李端中)이 말하기를, ‘선인(先人)이 하세(下世)하신 뒤에 문하가 초려와 회동하였는데, 문하가 묻기를, 「미촌(美村)486) 의 강도(江都)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자, 초려가 답하기를, 「설사 미진함이 있더라도 학문하기 전의 일인데, 어찌 이로써 의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문하께서 곧 옳게 여기고,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이군(李君) 희조(喜朝)가 문하의 말을 한 사우(士友)에게 전한 것이니, 문하의 물음은 초려의 물음이 되었고, 초려의 대답은 문하의 대답이 되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바깥 사람의 알 바가 아니지만, 이 일의 문답(問答)이 있었던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듣건대, 문하께 종유(從遊)하는 자가 가끔 이 일을 가지고 선인(先人)을 허물하는 구실(口實)로 삼고, 혹 제멋대로 말하며 고자(顧藉)487) 하는 바가 없으니, 이와 같으면 설사 그 말이 목천(木川) 사람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또한 문하(門下)를 승망(承望)하는 여론(餘論)일 뿐입니다. 그 뒤에 타우(打愚)가 받들어 물으니, 유수방(柳壽芳)에게서 나온 것 같이 말씀하셨다 하고, 목천 사람이 받들어 물으니 곧 조언(造言)한 것으로써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하셨다 하고, 이곳에 보내신 글에는, ‘허황(許璜)에게 들었다.’고 하셨으며, 마지막으로 태중(泰仲)이 받들어 아뢰니 초려(草廬)에게 들었다고 하셨다 하였습니다. 대저 이와 같으면 미혹(迷惑)된 마음에 비록 의심하지 않으려 하나,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송시열이 두 번째 글에 이르기를,

"보내 온 글을 스스로 볼 수가 없어서 아자(兒子)와 손자로 하여금 읽게 하여 들었는데, 아자(兒子)가 받들어 아뢰니 내가 초려에게서 들었다고 말하였다는 한 가지 절목에 이르러서는 아자가 크게 놀라며 진실로 이러한 일이 없었다고 하였네. 무릇 세간(世間)의 말에 이와 같은 것이 많은데, 비록 낱낱이 답한다 하더라도 말한 자는 한갓 무망(誣罔)한 데로 돌아갈 뿐이고, 듣는 자는 교식(矯飾)한다고 할 것이네. 이러한 까닭에 다시 고명(高明)을 위하여 이 정성스런 마음을 드러낼 뜻을 끊고 다만 이 마음을 품고 땅속에 들어가서 백세(百世)의 공의(公議)를 기다릴 뿐이네."

하였는데, 이에 윤증이 두 번째 답하기를,

"태중(泰仲)이 전하는 말에 갑인년488) 이후에는 문하께서 진실로 초려(草廬)와 회합(會合)하신 때가 없었다고 하므로, 그때에는 진실로 태중(泰仲)이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이른바 선인(先人)의 일은 불초(不肖)의 사사로운 마음으로는 문하(門下)께 바라지 아니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을 다하여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혼매(昏昧)한 견식(見識)에다가 민박(悶迫)한 사정(私情)에 가려져 무릇 망령되게 의혹이 생기는 것들을 어찌 모두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만약 문하께서 구의(舊義)를 미루어 생각하시고, 인정을 굽어 살피셔서 공평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헤아려서 극진하게 애린(哀憐)을 더해 주심을 입으면, 유명(幽明)이 함께 은혜를 받아서 의혹과 맺힌 것이 모두 풀어질 것입니다. 단지 문하의 한 말씀 사이에 달려 있을 뿐인데, 어찌 백세(百世)를 기다릴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송시열이 다시 회답하기를,

"요즈음 가만히 지난번의 서찰의 뜻을 자세하게 살피건대, ‘내가 앞서 한 말을 변개(變改)해서 스스로 무죄(無罪)한 지경에 이르고자 하였기 때문에 거듭 매우 엄중하게 단속하는 것 같이 하였으나, 나는 감히 이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네. 일찍이 선사(先師)에게 가르침을 받고는 안자(顔子)의 범이불교(犯而不較)489) 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마음속으로 원망과 분노를 품고서도 겉으로 겸손한 체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이었네. 사상채(謝上蔡)가 허물을 듣고는 부끄럽고도 두려워서 땀을 흘렸고490) 진소유(秦少游)가 경솔하여 이천(伊川)의 말을 듣고는 얼굴빛이 붉어 졌으니491) , 내가 비록 무상(無狀)하다 하나, 감히 처음에는 교식(矯飾)하였다가 마침내 또 반복(反覆)하지는 아니하네. 당초에 내가 최(崔)의 상소(上疏)를 이치에 어긋난다고 한 것은, 대개 한결같이 섬겨 죽음에 이르는 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스승과 제자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공자(孔子)와 안자(顔子) 같은 바가 있은 후에야 광(匡) 땅에서 난을 당하였을 때의 문답(問答)이 있을 것인데, 이제 추(醜)하고도 어긋난 체단(體段)으로 부자(父子)·군신(君臣)의 대륜(大倫)을 혼동해서 아울러 거론하였기 때문에, 나의 글에 말했던 것이네. 대저 그대의 지난번 글은 말의 뜻이 호건(豪健)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이제 혜서(惠書)를 받아 보니 10에 8, 9 감한 정도가 아니었네. 그러나 지난번 글의 뜻은 끝내 알지 못할 것이 있네. 이미 ‘폭양(暴揚)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부형(父兄)의 원수로 본 것이네. 그런데도 하자(瑕疵)를 지적한 말을 애석(愛惜)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였는데, 이미 통박하고 통각한 마음이 있다면 애석한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오늘날 통박하고 통각하다는 논의는 비록 《춘추(春秋)》·《예경(禮經)》에 이른바, ‘반드시 보복한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나, 의(義)를 좆아서 절교(絶交)를 고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네. 구양수(歐陽脩)와 범중엄(范仲淹)492) 의 정의[契]는 지극히 깊다고 이를 만하나, 범중엄의 비문(碑文)에 구양공이 만약 없는 것을 있다고 하였다면, 주 선생(朱先生)은 말하기를, ‘충선(忠宣)493) 은 마땅히 피눈물을 흘리면서 의(義)를 좆아서 절교를 고했을 것이다.’ 하였네. 오늘날 고명(高明)의 원망하고 노여워할 일이 어찌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한 것뿐이겠는가? 또 지난번 글에 이른바 김 상서(金尙書)494) 라고 한 것은 고명이 어찌 차마 이 말을 제기(提起)하는 것인가? 당시에 김 상서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한 말은 잔인한 사람이라고 한 것뿐만이 아니었으니, 대개 그 동기(同氣)가 조용히 죽을 수 없었던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선장(先丈)이 창도(倡道)한 데에서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의 재량(裁量)할 바를 알지 못해서였던 것이네. 내가 사람들에 대하여 이를 말하였는지 일찍이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혹 내가 몹시 슬퍼하는 그의 지극한 정(情)을 불쌍히 여겨 사람들에게 말하는 즈음에 잘못 선장(先丈)에게 저촉됨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목천(木川)의 일에 이르러서는 듣건대, 고명이 타우(打愚)에게 준 글이 귀원(貴院)에서 목천에 답한 글과는 전연 서로 다른 바가 있고, 또 전일에 그 말을 들은 사람을 보니,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머뭇거린다고 하니, 그 언근(言根)은 자연히 돌아갈 바가 있을 것이네. 그래서 곧 스스로 감당하는 외에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 들으니, 고명의 문하(門下)에서는 내가 말이 궁해졌다고 한다 하니, 나는 마음속으로 저윽이 웃었네. 김 상서와 목천의 일은 내가 이미 인복(引服)하였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고, 평일에 선장(先丈)에게 득죄(得罪)한 것은 오로지 윤휴(尹鑴)의 일에 있었는데, 대개 그 독(毒)을 맞은 것은 내가 가장 먼저이었네. 주자(朱子)를 배척하고 스스로 자기의 학설을 세워 장차 천하의 〈정론을〉 바꾸려는데 미쳐서는 외람되게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피행(詖行)을 막는다는 의(義)에 가탁하여 극력 이를 배척하였으니, 이것이 선장에게 여러 모로 미움을 사게 됨을 면하지 못한 것이네. 내가 선장에게는 비록 일찍이 내 불복(不服)한 적이 없었으나, 또한 사문(斯文)과 세도(世道)를 위하여 근심하고 탄식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네. 윤휴가 흉패(凶悖)하여 복법(伏法)된 뒤에 이르러서는 고명이 선장을 위하여 마땅히 유원규(庾元規)가 소준(蘇峻)에게 한 일495) 과 같이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후에 저윽이 듣건대, 고명이 오히려 타우(打愚)의 음양론(陰陽論)을 배척하고 그를 부호(扶護)하는 뜻이 오히려 있다고 하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한 가지 일은 비록 선장을 위하여 미움을 받으려고 하나, 할 수가 없네. 그 우미(愚迷)함을 용서해 주기 바라네. 대저 오늘날 두 집의 도리(道理)에 있어서 나는 십분(十分) 경책(警策)하여 거의 일반지규(一班之窺)에 있고, 고명에 있어서는 단지 전에 이른바 의(義)를 좆아서 절교(絶交)를 고한다[引義告絶]는 네 자가 진실로 바꿀 수 없는 일이네."

하였는데, 윤증이 또 다시 회답하기를,

"이른바, ‘거듭 매우 엄중하게 단속한다.’는 것은 또 본정(本情) 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전일 하서(下書)에 북인(北人)을 배척하여 조리가 없고 이치에 어긋난다고 하셨으므로, 저의 마음이 감복(感服)하였는데, 이제 도리어 다시 패(悖)자의 뜻을 풀이하시기를 북인을 위해 해명하는 것 같이 하시니, 윤증(尹拯)의 실망뿐 아니라, 듣고 보는 자 또한 문하께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말의 뜻이 호건(豪健)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고 하신 말씀은 더욱 지극히 황공합니다. 지난번의 글은 정(情)이 절박하고 말이 과격(過激)함으로 말미암아 이에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만약 위노(威怒)를 거두시고 굽어 용서하신다면 혹은 가긍하게 여기시고 밉게 여기지는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른바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한 것은 단지 저의 마음이 지극히 위축되고 절박함을 말한 것일 뿐인데, 원수로 여기는 뜻이 있다고 생각하시고 《춘추(春秋)》·《예경(禮經)》까지 끌어서 하교하시니, 몹시 놀랍습니다. ‘통박하고 통각한 마음이 이와 같다면, 애석한 마음이 어디에서 생기겠느냐?’고 하신 하교는 또 문하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신 것인 듯합니다. 평생 동안 스승을 존경해야 하는 처지에 이러한 망령된 의심이 있게 되면, 어찌 개석(慨惜)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목천(木川)의 일은 또 힘써 시교(示敎)하심을 입었으나, 당초 목원(木院)에서 이곳에 통문(通文)할 적에는 무슨 일 무슨 말이라도 말하지 아니하였고, 그때에는 도처에서 향전(鄕戰)으로 벌삭(罰削)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곧, ‘추가로 적발(摘發)하여 처벌(處罰)하는 일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답하였습니다. 그 뒤에 타우(打愚)가 방백(方伯)에게 준 글로 인하여 그 어구(語句)를 들었고, 또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문하께서 전한 바에서 나온 것임을 비로소 알았는데, 그 자세함을 알고자 하여 타우에게 거듭 물었습니다. 그 뒤에 듣건대, 문하께서 통문(通文)에 답한 글을 찾아 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곳에서 그 말이 나온 것을 부끄러워하여 덮어 두고 답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곳 사우(士友)들은 이 하교가 뜻밖에 나왔으므로, 모두 당초에 목천에 답한 글이 생각이 부족하여, 그것이 무슨 말과 무슨 일이 어떤 사람에게 나온 것을 묻지 아니하고, 적발하여 처벌하는 것이 타당하지 못함을 가볍게 말하여 드디어 문하의 의심하시는 바가 되었음을 한하였습니다. 윤휴(尹鑴)의 일에 이르러서는 문하께서 또 이를 제기(提起)하시리라고는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문하께서 병진년496) 에 불초(不肖)에게 답하신 글에, ‘이미 의혹을 풀었다’고 하지 아니하셨습니까? 하물며 그 사람이 죄로 죽은 뒤에 무엇을 다시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유양(庾亮)497) 과 〈같이 하지 못한 죄가〉 과연 선인(先人)에게 해당되는지 마침내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부호(扶護)한다’고 하신 데 이르러서는 역시 ‘귀신을 실은 수레498) [載鬼之車]’입니다. 타우(打愚)의 음양론(陰陽論)은 진실로 살피고 기억하지 못하나, 그 사람의 일은 일찍이 입에 올리지도 아니하였음을 스스로 알고 있는데, 타우의 와전(訛傳)과 문하의 지나친 의심으로써 또한 장차 죄인을 부호(扶護)한 율(律)을 면하지 못하겠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김 상서(金尙書) 운운(云云)한 것은 어찌 차마 이를 제기하느냐의 문책에 극도로 위축되어 용납할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에 송이석(宋彝錫)으로 인하여 이미 문하께서 이 말씀이 있었음을 들었는데, 요즈음 듣건대, 영계(令季) 서산(瑞山)과 문하의 여러 사람들이 도처에서 입에 올려 사설이 망극(罔極)하니, 어찌 한결같이 침묵하고만 있겠습니까? 김장(金丈)의 지극한 정(情)과 통박(痛迫)한 말은 그 누가 이를 비난하겠습니까마는, 김장이 일찍이 계사년(癸巳年)499) 에 한 번 선인(先人)을 찾아 와서 또한 당시의 일을 언급하고, 인책(引責)하여 벼슬살이하지 않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고, 그 동기(同氣)의 불행함을 슬퍼하였으니, 지극한 정(情)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 살신성인(殺身成人)하여 한 집안의 의열(義烈)이 밝게 빛났으니, 죽은 자는 진실로 원망과 후회가 없을 것이고, 살아 있는 사람인들 어찌 진실로 남을 허물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김장이 선인에게 참으로, ‘잔인한 사람[忍人]일 뿐이 아니다.’라고 하는 뜻이 있었다면, 이를 원망하여 매우 깊이 배척할 것인데, 또 어찌하여 손수 추천하는 글을 올려서 우리 임금을 속이고, 때로 존신(存訊)을 더하여 그 마음을 속였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불초(不肖)는 선비(先妣)께서 자결(自決)하셨을 때 선인께서 집 안에 계시지 아니하였던 것을 오히려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어제같이 역력합니다. 선인의 자의(諮議)를 사양하고 진정(陳情)하실 때에 신재 선생(愼齋先生)500) 께 답하는 편지의 한 절목에 이르기를, ‘그때에 모(某)가 여러 사우(士友)와 모여서 처신(處身)할 바를 꾀하였는데, 망처(亡妻)가 일의 급박함을 알고 여종[婢]을 보내어 모를 맞아 오게 하였습니다. 모가 이르자, 말하기를, 「적(賊)에게 죽는 것보다는 자결하는 것만 못하니, 한 번 보고 영결(永訣)하기를 원했다.」고 하므로, 모가 차마 볼 수 없어서 사우(士友)들의 처소로 돌아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선인이 집에 있지 아니한 곡절은 진실로 불초가 기억하는 바와 부합하니 이는 그 실적(實跡)입니다. 비록 김장(金丈)께서 살아 계시다고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이미 눈으로 보지 아니한 일을 가지고 전해 들은 말을 스스로 대답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김장이 이미 죽은 지 몇 해가 되었는데, 무단히 그 말을 끌어 전파하여 선인을 헐뜯고 비방하는 구실로 삼는다면 불초의 지극히 원통한 일이 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문하의 거룩한 덕에도 손상됨이 작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송시열이 또 답하기를,

"당초에 이 일이 발생할 때 내가 듣고도 듣지 못한 것처럼 하고 말았으면 도무지 일이 없었을 것인데, 감히 망령되게 한 글을 지어서 점점 갈등이 생기게 하여 마침내 수습하지 못하는 데 이르렀으니, 내가 일을 알지 못한 소치이네. 비록 뉘우친들 어찌 미치겠는가? 그러나 보내는 글에 이미 많은 허물하여 책망하는 바가 있고, 말뜻의 호건함이 전과 다름이 없으니, 마땅히 감수해야겠지만, 그 가운데에 지극히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간략하게 다시 받들어 질문하는 바이네. 주자(朱子)의 마음을 논한 바가 상세할 뿐만 아니라, 《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에 이르기를, ‘얼굴을 들어 새를 보다가 머리를 돌리니, 사람 응대 잘못되네[仰面貧看鳥 回頭錯應人]’라고 하였는데, 이제 온 글에 이른바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는 것과 이른바, ‘애석(愛惜)하다’고 한 것이 모두 한 마음속에 있는 물건이라고 하면, 주자의 말과 어찌하여 서로 어긋나는가? 비록 그대의 설봉(舌鋒)과 필세(筆勢)로써도 사람을 굴복시킬 수는 없을 듯하네. 대저 전후에 그대가 말 가운데 나의 본원(本源)과 언행(言行)을 배척한 것은 진실로 반성할 만하나, 그 나머지는 구차스럽고도 모순(矛盾)되어 억제하여 변환(變幻)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으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가? 잔인한 사람이란 말에 이르러서는 그대가 무단히 제기하였으므로, 마음속으로 그윽이 괴이하게 여겨 당초에 김 상서(金尙書)의 심사를 대략 진술한 것뿐인데, 이것이 과연 이 사람의 죄인가? 김 상서의 앞뒤의 견해가 다른 것은 또한 어리석은 나로서는 감히 알 바가 아니니, 물가[水濱]에 가서 물어보는 것이 좋겠네. 어찌 또한 오하아몽(吳下阿蒙)501) 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부호(扶護) 두 글자는 그대가 몹시 꺼리고 싫어하는 바이나, 또한 사실이 있네. 기억하건대, 옛날 동학사(東鶴寺)의 모임에서 선장(先丈)께서 분명히 음양(陰陽)·흑백(黑白)의 논설이 있었는데, 그 뒤에 한 가지 일만 지적한 것이지 전체를 지적한 것은 아니라고 하여 나로 하여금 이(李)에게 사과하는 일까지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부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저 윤휴(尹鑴)는 감히 주자(朱子)를 헐뜯고 업신여겼으니, 이는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여 대인(大人)을 경멸하고 성인(聖人)의 말을 모독한 자로서, 흉악한 죄를 저지를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일모일발(一毛一髮)이라도 죄역(罪逆)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매우 우견(愚見)을 선장에게 드렸다가 득죄(得罪)한 것이 몹시 깊었네. 그러나 이를 전혀 한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네. 보내 온 글에 이른바 의혹을 품었다고 한 것은 그 어떠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경신년502) 후로 타우(打愚)의 음양설(陰陽說)을 배척한 것으로 보면 비록 의혹을 풀었다고 하나, 오해(誤解)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네. 타우가 일찍이 나에게 분명히 말하였으니, 나로 하여금 좌우(左右)를 믿고 타우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바가 있네. 온 글 가운데 사(師)라는 한 글자는 지극히 사람으로 하여금 곧 땅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여도 할 수 없는 것이었네. 나로 하여금 이를 감수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북소(北疏)503) 때문이니, 내가 이를 아낌없이 배척하였던 것이네. 만약 그에게 준 글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람을 의심하고 의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 둘 뿐이네. 오로지 보내온 말에 이른바 죄인을 부호(扶護)한 율(律)이라고 운운한 것은 바로 화숙(和叔)에게 준 글에 이른바 ‘화복(禍福)’이라 한 두 글자와 서로 부합하는데, 이로써 사람을 협박하는 자료로 삼으려고 하니, 나는 본래 남에게 화(禍)를 입힐 마음이 없으나, 이른바 그 사람[其人]504) 에게 복습(服習)하여 사람마다 모두 이와 같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썼다가 다시 지웠지만 오히려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한 것에 대하여 지난번의 글에 이를 잊고 답하지 아니하였는데, 이 일은 어느 때의 일인지 기억하지 못하나, 문간 선생(文簡先生)505) 께서 일찍이 《석담일기(石潭日記)》 가운데에 휴암(休菴)506) 에 관한 한 절목[款]을 손수 지우셨으나, 글자마다 오히려 분명하게 보였으니, 이것도 마음을 둠이 있다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선비(先妣)에 대해 운운한 것은 그 성효(誠孝)하는 마음에 있어 어찌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요즈음 김사보(金士輔)로 인하여 듣건대, 그대가 어머니의 죽음이 분명하지 못한 것을 주손(疇孫)507) 의 탓이라고 한다 하니, 그대가 남을 미루어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저윽이 한탄스럽네. 내가 비록 무상(無狀)할지라도 어찌 차마 허물하여 이를 본받겠는가? 대저 보내온 글에 원망과 노여움이 한층 더하여졌으니, 의(義)를 좇아 절교(絶交)를 고하는 것은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되는데, 오히려 운운하고 있으니, 우매한 나로서는 감히 알지 못할 바이네."

하였는데, 이 뒤로는 다시 왕복하지 아니하였다. 대저 윤증이 송시열에게 감원(憾怨)을 품어 온 지 오래 되었는데, 시론(時論)이 분열함을 보자, 마침내 함부로 깃발[幟]을 세우고 박세채(朴世采)에게 글을 보내어 송시열을 욕하고 헐뜯었다. 하물며 이른바, ‘신유 의서(辛酉擬書)라는 것은 【의서(擬書)는 병신년(丙申年) 최석문(崔錫文)의 상소 가운데 자세히 있다.】 극력 죄를 얽어서 기사년508) 사람의 안률론(按律論)과 더불어 한 틀에서 나온 것과 같았으니, 윤증의 견해가 본래 이와 같았다면 수십 년 머리를 숙이고 스승으로 섬긴 것은 무슨 마음이었던가? 그의 뜻이 비록 그 아비의 묘문(墓文) 때문에 원망을 품게 되었다 하나, 그 사사로운 일로 인하여 그 사람의 과실과 죄악을 늘어 놓는 것이 과연 도리이겠는가? 송시열이 그 아비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은 오로지 윤휴의 일에 있었는데, 이를 분명히 말하고 현저하게 배척하여 그 아비의 마음을 밝히지 아니하고, 도리어 송시열의 허물을 낱낱이 들어서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내는 데 여념이 없었으니, 은밀하게 윤휴를 비호하고 송시열을 배반하는 마음을 분변하기가 어럽지 아니하다. 더욱이 송시열에게 함장(函丈)과 문인(門人)의 칭호를 오히려 폐하지 아니한 채 암암리에 박세채에게 헐뜯은 그 마음가짐이 더욱 어떠한가? 송시열의 글에 답함에 미쳐서 제(齊)나라 사람의 처첩(妻妾)을 들어서 후욕(詬辱)하기까지 하였고, 또 스스로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하였으니, 그 의(義)를 처리하는 것을 다시 논할 것이 없다. 그런데 송시열이 두 번째 글에서 답(答)을 갖추지 아니한 채 이를 부치면서 변명하지 아니하니, 윤증은 다시 송시열이 혹 전의 견해를 변경할 것을 생각하여 그 답서(答書)에 애긍(哀矜)하고도 걸련(乞憐)하는 말을 지어, ‘만약 문하께서 구의(舊義)를 미루어 생각하시고, 인정으로 굽어 살피셔서 애련(哀憐)을 더해 주시면, 유명(幽明)이 함께 은혜를 받아서 의혹과 맺힌 것이 함께 풀어질 것이니, 단지 문하의 한 말씀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또 송시열은 첫 번째 글부터 이미 ‘의(義)를 좇아 절교를 고하라.’고 말하였는데, 윤증은 말하기를, ‘절교를 고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입니까? 만약 정의(情義)가 전과 같지 않다 하여 절교(絶交)한다고 이른다면, 세간(世間)의 교제에 절교하지 아니하는 자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얼굴빛과 태도의 음양(陰陽)이 반복(反覆)하는 것을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바가 있다. 비록 왕복한 글을 가지고 보더라도 송시열의 말은 간혹 함축성(含蓄性)이 적은 듯하나, 또한 명백하고 직절(直截)한데, 윤증의 글은 의위(依違)하고 연곡(攣曲)하여 그 정상(情狀)을 스스로 가리울 수가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또한 볼 수 있다.

  • [註 457] 관학(館學) : 성균관과 사학.
  • [註 458] 형서(邢恕) : 송(宋)나라 때 사람으로, 원우(元祐) 초기에 어사(御史)에 임명되고, 여러 차례 벼슬을 옮겨 어사 중승(御史中丞)에 이르렀음. 본래 정호(程顥)에게서 수학(受學)하였는데, 성품이 교활하여 공경(公卿) 사이에 교유하며 성명(聲名)을 얻게 되자, 사마광(司馬光)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곧 사마광을 모함하고 장돈(章惇)을 붙좇았으며, 이어 장돈을 배반하고 채경(蔡京)의 심복이 되었음.
  • [註 459] 강도(江都)의 변란(變亂) : 윤선거(尹宣擧)가 17세 때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청국(淸國)의 사신을 목베자고 상소(上疏)하여 척화(斥和)의 청명(淸名)을 얻었는데, 병자 호란(丙子胡亂)에 강화(江華)에 들어가서 김익겸(金益兼)·권순장(權順長) 등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익겸·권순장 2인은 죽고 그의 처 이씨는 자결(自決)하였으나, 윤선거는 성을 빠져 나와 목숨을 부지한 일을 말함.
  • [註 460] 기해년(己亥年) : 1659 현종 즉위년.
  • [註 461] 기관(機關) :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
  • [註 462] 동조(東朝) : 대비(大妃).
  • [註 463] 삼조(三朝) : 효종·현종·숙종.
  • [註 464] 경원(慶元) : 남송(南宋) 영종(寧宗)의 연호.
  • [註 465] 위학(僞學)의 비방 : 송(宋)나라 영종(寧宗) 때 주자(朱子)가 당시의 권신(權臣) 한탁주(韓侘胄)의 간사함을 탄핵하자, 한탁주가 원한을 품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고 배척하여 주자의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도학을 하는 무리의 등용을 금한 일을 말함. 곧 탐욕과 방종은 사람의 진정이고, 청렴 결백과 수신(修身)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하여 도학을 위학이라고 하였음.
  • [註 466] 수선(首善) : 성균관을 가리킴.
  • [註 467] 화숙(和叔) : 박세채의 자(字).
  • [註 468] 목천(木川)의 일 : 윤선거(尹宣擧)를 이산 서원(尼山書院)에 배향(配享)하는 것을 반대하는 통문(通文)이 있었던 것을 말함. 그 내용 가운데 "강도(江都)의 부노(俘奴)를 어떻게 함께 배향(配享)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있었음.
  • [註 469] 타우(打愚) : 이상(李翔)의 호.
  • [註 470] 호향(互鄕) : 풍속이 나쁜 지방.
  • [註 471] 신유년 : 1681 숙종 7년.
  • [註 472] 의서(擬書) : 윤증(尹拯)이 송시열(宋時烈)의 본원(本源)과 언행(言行)을 배척하여 "의(義)와 이(利)를 같이 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아울러 썼으니, 《대학(大學)》의 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부와 같지 않다." 하였는데, 이 서찰을 써서 박세채(朴世采)에게 보이자, 박세채가 만류하여 부치지 않았음. 이후 송시열의 손자이고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宋淳錫)이 이를 박세채에게서 훔쳐 송시열에게 전하였음.
  • [註 473] 구인(九仞) : 1인(仞)은 8척(尺). 곧 72척을 말함.
  • [註 474] 권생(權生) : 권이정을 말함.
  • [註 475] 제(齊)나라 사람의 처첩(妻妾)이 안 뜰에서 원망하는 것 : 《맹자(孟子)》 이루(離婁) 하(下)에, 제(齊)나라 사람으로 처(妻)와 첩(妾)을 데리고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날마다 나가서 술과 고기를 배부르게 먹고 돌아와서 부귀(富貴)한 사람과 교유하여 함께 먹는다고 자랑하자, 이를 의심한 처가 따라가서 살피니, 성 밖 무덤에서 제사지내는 사람에게 빌어먹고 있으므로 집으로 돌아와 첩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집안 뜰에서 남편을 원망하며 울었다 함. 곧 부귀(富貴)와 영달(榮達)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어, 남이 모르는 줄 알고 저열(低劣)하고 추잡한 짓을 하는 사람을 비유한 것임.
  • [註 476] 화숙(和叔) : 박세채(朴世采)의 자(字).
  • [註 477]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 [註 478] 병진년 : 1676 숙종 2년.
  • [註 479] 무오년 : 1678 숙종 4년.
  • [註 480] 진동(陳東) : 송(宋)나라 단양(丹陽) 사람으로, 성품이 강직하여 조금도 굽히는 바가 없었음.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당시의 권신(權臣)인 채경(蔡京)·동관(童貫) 등을 탄핵하여 죽일 것을 청하고, 황잠선(黃潛善)·왕백언(汪伯彦)을 파출(罷黜)할 것을 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참소를 받아 피살되었음.
  • [註 481] 윤곡(尹穀) : 송(宋)나라 장사(長沙) 사람으로, 염정(廉正)하다는 이름을 얻었음. 몽고병(蒙古兵)이 입구(入寇)하여 담성(潭城)을 포위하였는데, 곧 함락될 위기에 처하니, 윤곡이 처자(妻子)와 이별하고 분사(焚死)하였음.
  • [註 482]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 [註 483] 신유년 : 1681 숙종 7년.
  • [註 484] 자병(疵病) : 결점.
  • [註 485] 초려(草廬) : 이유태(李惟泰)의 호(號).
  • [註 486] 미촌(美村) : 윤선거(尹宣擧)의 호(號).
  • [註 487] 고자(顧藉) : 자중(自重)함.
  • [註 488]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 [註 489] 범이불교(犯而不較) : 상대의 잘못에 대해 그 사람의 불쾌해 하는 안색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른말로 바로잡아 주되 자신과 비교하지 않는 것을 말함.
  • [註 490] 사상채(謝上蔡)가 허물을 듣고는 부끄럽고도 두려워서 땀을 흘렸고 : 사상채(謝上蔡)가 처음 정자(程子)의 문하(門下)에 들어갔을 때 《사기(史記)》의 한 조항에 언급하게 되자, 사상채가 그 전문(全文)을 외었는데, 정자가 완물상지(翫物喪志)라는 것으로 책하니, 사상채가 등에 땀이 흘렀다 함.
  • [註 491] 진소유(秦少游)가 경솔하여 이천(伊川)의 말을 듣고는 얼굴빛이 붉어 졌으니 : 진소유(秦少游)가 지은 탕자와 기녀가 이별하는 별기사(別妓詞) 내용 가운데 하늘을 언급한 것이 있었는데, 정자(程子)가, "어떻게 하늘을 모독할 수 있는가?" 하니, 진소유가 얼굴을 붉혔다 함.
  • [註 492] 범중엄(范仲淹)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의 명신(明臣).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어 정치의 개혁을 꾀하고자 12개조를 상소하였으나, 반대파 때문에 실패하였음.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 [註 493] 충선(忠宣) : 범순인(范純仁)의 시호(諡號).
  • [註 494] 김 상서(金尙書) : 김익희(金益熙)를 가리킴.
  • [註 495] 유원규(庾元規)가 소준(蘇峻)에게 한 일 : 유원규(庾元規)가 소준(蘇峻)과 처음에는 좋은 사이였고, 도간(陶侃)과는 의심스런 사이였는데, 소준이 반(叛)하자, 도간의 힘을 빌어 소준을 섬멸하였음.
  • [註 496] 병진년 : 1676 숙종 2년.
  • [註 497] 유양(庾亮) : 동진(東晋) 때 사람. 자(字)는 원규(元規).
  • [註 498] 귀신을 실은 수레 : 《주역(周易)》 규괘(睽卦)의 ‘재귀일거(載鬼一車)’를 인용한 말로, 근거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임.
  • [註 499] 계사년(癸巳年) : 1653 효종 4년.
  • [註 500] 신재 선생(愼齋先生) : 김집(金集).
  • [註 501] 오하아몽(吳下阿蒙) : 진취(進就)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 오(吳)나라 임금 손권(孫權)이 여몽(呂蒙)에게 학문을 권장했는데, 뒤에 노숙(魯肅)이 여몽을 만나 그의 지식이 진보한 것을 보고, "그대는 오하의 아몽이 아닐세." 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연유한 말임.
  • [註 502] 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503] 북소(北疏) : 최신(崔愼)의 상소를 말함.
  • [註 504] 그 사람[其人] : 윤휴를 가리킴.
  • [註 505] 문간 선생(文簡先生) : 성혼(成渾).
  • [註 506] 휴암(休菴) : 백인걸(白仁傑)의 호.
  • [註 507] 주손(疇孫) : 송시열의 손자인 송주석(宋疇錫)을 가리킴.
  • [註 508] 기사년 : 1627 인조 7년.

원문

○甲寅/館學儒生趙正萬等上疏曰:

宋之季世, 有邢恕者, 初出於程子之門, 及時事大變, 叛攻其師, 遂使邪說橫流, 君子道消, 馴致百年之禍, 臣等未嘗不痛恨於斯。 不意今者, 邢恕之事, 復出於聖明之朝, 將致人心糜潰, 世道壞亂, 士林之憂, 有不可盡言。 尹拯之受業於奉朝賀宋時烈之門, 今至三十餘年, 拯之服事之勤, 時烈許與之厚, 實非尋常師弟之比, 而拯乃以私憾, 深蓄怨怒, 形諸書尺, 詆誣無忌, 及其事發之後, 又復連章累牘, 直投師門, 資意凌踏, 益無所不至, 此豈人理之所忍爲者哉? 蓋拯之父贈參議臣宣擧, 自經江都之變亂, 屛居鄕里, 從遊師友, 篤志爲學, 一時士流, 無不推許, 時烈亦與之相善。 同時賊鑴, 假儒者之名, 遍遊於士友間, 及改《中庸》 朱子輯註, 則時烈爲之明辨痛斥, 仍與之相絶。 逮己亥議禮之事出, 而鑴乃爲 ‘卑主貳宗之說,’ 欲售其網打之計, 如先正臣宋浚吉諸人, 皆知其心術之陰凶, 亦與之相絶, 而獨宣擧之意, 不能無參差者, 故時烈深以世道爲憂, 累爲忠告, 而宣擧終不能從焉。 時烈每歎其不嚴於邪正之辦。 而及其歿也, 拯以碣文, 托於時烈, 時烈以爲, 碑碣之文, 摭實記事, 所以傳信於後世, 又以文字之於人, 循情苟譽, 以悅其心, 亦非誠實之道, 故其所論撰, 不能一如拯之所望, 此拯憾恨之所由起也。 拯猶且內懷怨怒之心, 外執師弟之禮, 陰蓄潛藏, 未嘗形之色辭, 及至今日, 乃敢乘時猝發, 詆毁譏斥, 至於此極, 蓋非一朝一夕之故也。 向者崔愼之疏, 始斥其詆誣之說, 而大臣繼陳於前席, 殿下洞燭其狀, 前後聖敎, 不啻嚴截, 則在拯之道, 宜思自省, 惕然改圖。 而乃反愈肆悖慢, 略無顧忌, 詖辭遁說, 不一其端, 臣等就其中一二略辨之。 拯之抵時烈書曰: ‘到今妄見, 未免致疑於本源之地。 不惟氣質之病, 不能矯革, 反有以長之, 此所以僭有妄論者。’ 又曰: ‘不平者私情也, 論學者公議也。’ 又曰: ‘不但文字事而已, 門下之於鄙家, 雖一事之微細, 一言之疑似, 苟有可害於先人, 則無不暴揚, 人子之心, 安得不痛刻?’ 又曰: ‘私心痛迫, 情不能如前日云。’ 旣曰痛迫痛刻, 則其怨毒之深, 從可知矣。 乃反曰: ‘不平者私情也, 論學者公議也。’ 旣有怨毒之心, 藏於其中, 則蓋將隨處觸發, 其所爲言, 自不能公, 雖曰: ‘論學者出於公議。’ 其誰欺也? 且拯之從時烈也, 如彼其久, 而其平昔質疑之際, 何故曾無一言半辭, 以及於時烈道學之醇疵? 而至以其父身後之文字爲托, 則其尊尙敬服, 亦可謂至矣, 而獨於碣文旣出之後, 乃以不能無疑於本源言行爲言, 豈時烈之本源言行, 因其碣文而始有可疑者耶? 蓋拯書首尾上下, 一句一字, 皆從私憾中出來, 故假托論學, 自稱公議, 以爲掩人耳目之計。 噫! 自古門弟子之於先生長者, 因事論辨則固多有之, 而何嘗有擧其言行之全體, 公肆詆誣如拯者乎? 時烈平生一言一動, 皆以朱子爲準則, 工夫之篤實, 門路之正大, 有以繼先儒之正脈, 爲士林之宗匠, 而至於待人制事, 亦皆出於必誠必直, 則曷嘗有一毫機關權數, 彷彿於拯言者耶? 宣擧末梢樹立, 足以掩江都之事, 且其終未悟賊鑴之惡, 亦何傷於寧受百欺之義? 而時烈則灼見其將爲世道之大患, 不得不痛斥深排, 而宣擧以志同義合之人, 獨於此事, 意見差殊, 則嗟惜之心, 安得不時發於說話, 論撰之辭, 安得不略示其斟酌? 而反致其子之仇視, 有此罔極之構誣, 君子之於斯世, 不其難乎? 拯之第四書, 論及賊鑴, 而有曰: ‘其人罪死之後, 有何更論之事云。’ 所謂 ‘罪死之稱,’ 未聞施之於凶賊之人也。 鑴之誣辱東朝, 謀危宗社之罪, 在凶黨爲首, 則今以罪死目之, 抑獨何哉? 噫! 時烈性本剛毅, 信道自守, 其心之所不是, 義理之所不可, 則雖大利害所存, 曾莫之顧憚, 觀其平生所經歷, 亦可知矣。 惟其以世道自任, 而尤所致嚴者, 在於邪正善惡之辨, 故唯彼媢嫉醜正之徒, 時出而間起, 構毁羅織, 無所不至, 而猶不敢以學術爲疵矣。 今拯乃爲眩亂之說, 欲以衊正大純粹之學, 謂可以誣一時而欺後世, 信乎世變之無所不有也。 時烈道德學問, 固未嘗以此有所增損, 而唯是人心陷溺, 義理晦塞, 雷同和附之論, 紛然而竝起, 不但使三朝之所禮遇, 士林之所尊仰, 盡歸虛地而已, 慶元僞學之謗, 將不免復起於今日, 而其流之漫, 有不可勝言。 拯之論學一語, 必將爲後日之禍祟, 則何可不辨之早, 以絶其萌芽哉?

上答曰: "人心陷溺, 義理晦塞, 乃以平日尊慕之人, 醜詆譏斥, 一至此極, 是豈但斯文之不幸而已哉? 實國家之不幸也。 頃因相臣陳達, 旣已明辨斥絶, 而爾等居首善之地, 痛賢師之被誣, 齊籲伸辨, 辭意嚴正, 予甚嘉尙也。"

初尹拯所與朴世采書旣發, 宋時烈貽書於拯曰: "高明所與和叔書, 前月偶爾得見矣, 噫! 眞藥石也。 蓋自早歲, 妄竊有意於爲已之學, 又從師門, 得聞此事, 必須讀書以明理, 克已以祛私, 此二者, 是其實功。 非不知如此, 而氣質偏駁, 行又不力, 蓋無毫髮近似者。 理旣未明, 以利爲義, 已有未克, 物欲常行, 不知不覺, 全出於人欲者多矣, 每自點檢, 不覺愧汗沾衣。 今高明所指, 皆是實病, 而義利雙行, 王覇竝用者, 尤見其過與而太恕矣。 每奉讀以還, 如鍼箚身, 不覺有警責圖新之意, 其爲受賜多矣, 比如病人, 沈痼將死, 忽有良醫, 投以神丹妙劑, 得尋生路, 則雖未知良醫本心, 果出愛已, 而其爲惠則何可量也? 此漢果以文字之過, 得罪於先丈, 而終不能開惑, 則在高明之道, 當引義告絶, 如朱子之云, 而不此之爲, 顧乃羈縻牽連, 而常以不平之意, 蓄之方寸之間, 隨處觸發, 或不知裁, 未知君子處義之道, 果如是否乎? 且自有文字草定以來, 高明之欲使改正者, 無不奉徇, 未知所以得罪者, 在於何處耶? 至於木川事, 此高明之所深怒者, 然反覆思之, 無論其事之虛實, 其語之有無, 而蓋欲打愚勿與互鄕人相從, 此蓋出於尊尙先丈之意也。 高明所論, 正是頂門上一鍼, 平生得此於士友間, 幾矣, 以此警勵, 庶幾偶然不死, 則庶有一分桑楡之功矣。 不幸有崔愼者, 北方無知人也, 忽然露章, 無倫悖理之言, 無所不至云, 極令人惶恐愧恧, 殆無以擧顔也。 雖亟以書叱責, 然遂事勿說矣, 奈何奈何? 凡此前後所言, 若不出於肝肺, 則天厭之天厭之矣。 所欲言者, 不止此, 而垂盡之喘, 危惙已甚, 口呼不能接續, 其所究宣亦無倫脊, 惟高明憐而察之也。 人之將死, 其言也善, 凡此云云, 必不出於許僞, 竝惟諒之。" 拯答之曰: "一自權生轉達僭論之後, 常切惶悚, 及聞鄙札之轉徹, 雖惶悚彌深, 而積年囁嚅而不敢進者, 得備聽覽, 又竊自幸。 忽聞北人疏出, 則悼心失圖, 爲門下咄咄不已。 不但貽辱先人, 私心痛刻而已, 父子師友, 五十餘年, 竟至此境, 惘然不知處義之道。 不料門下, 復賜收恕, 有此辱覆, 而開示牖發, 至於此勤, 以言善自保, 以天厭自失, 以無倫悖理, 叱責北人。 噫! 門下之言及此, 而猶欲自設畦畛, 以自絶於長者, 則門下不負拯, 而拯實負門下矣。 玆因下敎之言, 一一供答, 以俟裁處。 下敎曰: ‘高明所指, 皆是實病, 雙行竝用, 尤見過與而太恕。’ 此只是大綱說耳, 其詳實在辛酉擬書, 而至今不敢呈者, 誠意淺薄之罪也。 先人之於門下, 實有至誠, 見有可疑處, 皆歸之氣質之病, 而於本源則未曾致疑, 到今妄見, 未免致疑本源之地。 不惟氣質之病, 不能矯革, 而反有以長之, 此所以僭有妄論也。 門下一身之所擔負者如何? 而千里之謬, 始於毫釐, 九仞之高, 虧於一簣, 若使後之論者, 亦有如拯妄論, 則豈非大可痛惜? 而旣已見阻, 不敢發口, 其與權生語者, 只如齊人妻妾之訕於中庭, 而輾轉得罪, 以至於此, 無非見識昏昧之罪也。 良醫本心, 非出愛己之敎, 亦不敢分疏, 此古人所以: "有未信則以爲謗己之訓也。" 下敎曰: "此漢以文字之過, 得罪先丈, 不能開惑, 高明當引義告絶云云。" 又曰: ‘顧乃羈縻率連, 而常以不平之意, 蓄之方寸之間云云。’ 告絶豈容易事耶? 范忠宣不能辦於歐陽公, 則況無狀之於門下耶? 夫以情義之不能如前者, 皆謂之絶, 則世間交際, 不絶者幾希矣。 門下之言及此, 實不知所對也。 然若以與和叔書, 爲出於不平, 則實非拯之情也。 夫不平者私情也, 論學者公議也, 此只是妄見之誤入者耳。 下敎曰: ‘自有文字草定以來, 高明之所欲改者, 無不奉徇。’ 夫上文所敎: ‘終不能開惑者。’ 是指不改其總論之事耶? 若然則又何以有無不奉徇之敎耶? 文字請改, 前後凡三度, 甲寅則不肖自請也, 丙辰則門下許以改賜也, 戊午則門下使之更呈也。 初請改也, 未蒙改惠, 且敎此事不須汲汲, 故不敢再請許改也。 又有多少往復, 而末梢只以: ‘姑依和叔所籤爲敎。’ 且有 ‘弱不敵强。’ ‘山岳遞用等’戲語。 見戲如此, 安敢有三請之意乎? 其後改得若干字, 而 ‘因有依來意竄定’ 之示, 以此自不得不止, 非以爲更無所欠也。 然不但文字事而已, 門下之於鄙家, 雖一事一言, 苟害先人, 無不暴揚, 又有私心痛迫者。 門下嘗引金尙書言, 指先人爲忍人, 如此不近之說, 尙不擇虛實, 轉以語人, 人子之心, 安得不痛刻也? 下敎曰: ‘木川事, 高明之所深怒, 而蓋欲打愚, 勿與互鄕人相從, 出於尊尙先丈之意云云。’ 當時之事, 先人前後之疏, 一一自列, 而孝宗大王, 至有未聞陳東終致尹穀之死’ 之批矣。 然其得失是非, 自有後世。 且人各有見, 若論處義當否, 而公是非之, 則雖子孫, 有不敢私憾, 此言則不然。 自甲寅至辛酉, 八年之間, 自此中及木川隣近之處, 了無所聞, 而忽自門下傳出, 意者, 以告於門下者, 陰懷疵病先人之意, 故托他人, 以播其說, 使之紛然辨詰之際, 作一場詬鬨耳。 以此誠不勝痛心, 欲請其言之所出, 作書未及上。 而聞人已有仰問者, 而門下不賜說破, 反有自當未安之敎云。’ 故不勝惶恐, 竟不敢呈, 而惠書, 有問於許璜之敎矣。 然當初致疑於門下者, 誠有由焉。 昔日門下之與和叔書, 引某人恚詆之說, 而傍書江都事四字而還抹之, 若是其人之言, 則旣書還抹者何也, 抹之而使可見者何也? 其後草廬之孫李端中言: ‘先人下世後, 門下與草廬會, 門下問曰: 「美村江都事, 何以處之?」 草廬答曰: 「設有未盡, 乃學問前事, 何可以此爲疑耶?」 門下卽然而從之云。’ 往年李君喜朝, 傳門下之言於一士友, 則以門下之問, 爲草廬之問, 以草廬之答, 爲門下之答。 此誠非外人之所知, 而其有此事問答則可知。 且聞游於門下者, 往往以此事, 爲疵病先人之口實, 或有肆言而無所顧藉者如此, 則設使其言, 出於木人, 亦承望門下之餘論耳。 其後打愚奉問, 則若以其言, 爲出於柳壽芳者云, 木人奉問則便以造言自當云, 有書於此中則以爲: ‘聞於許璜。’ 而最後泰仲奉稟則以爲: ‘聞諸草廬云。’ 夫如是則迷惑之心, 雖欲無疑, 何可得也?" 時烈再書曰: "來書不能自覩, 使兒子與孫, 讀而聽之, 至兒子奉稟, 則余曰聞之草廬一款, 兒子大警曰: ‘實無此事。’ 凡世間言語如此者多, 雖一一供答, 而言者徒歸誣罔, 而聽者以爲矯开。 以故復絶意於復爲高明, 露此悃愊, 只有抱此入地, 以俟百世之公議而已"。 拯再答曰: "泰仲所傳之言, 甲寅冬以後則門下實無與草廬會合之時, 故其時固疑泰仲之誤聞矣。 所謂先人事則不肖私心, 不能無望於門下, 故不得不罄訴心曲耳。 旣以昏昧之見識, 蔽於悶迫之私情, 凡所妄生疑惑者, 豈皆得正, 若蒙門下追惟舊義, 俯察人情, 平心舒究, 曲加哀憐, 則幽明受賜, 疑結俱釋。 只在門下一言之間耳, 尤有何待於百世之事耶?" 時烈復書曰: "比來竊詳前書之意, 若以愚變改前說, 自致於無罪之地, 故申束甚嚴者, 然愚不敢如是也。 竊嘗受敎於先師, 則以爲顔子犯而不較, 非是內懷怨怒而外爲謙遜, 實出於誠心。 謝上蔡聞過慙惶, 至於汗流, 雖以秦少游之輕佻, 聞伊川說而面色駭然, 愚雖無狀, 不敢始爲矯飾, 終又反覆也。 當初愚以崔疏爲悖者, 夫一事致死何等, 師弟須如孔、顔然後, 乃有畏匡時問答, 而今以醜差體段, 混竝於父子君臣之大倫, 故鄙書云云矣。 大抵尊之前書, 語意豪健, 令人悸怖, 玆承惠書, 不翅減得十八九也。 然前書之意, 終有所不敢知者。 旣曰: ‘無不暴揚。’ 又曰: ‘痛迫痛劾云,’ 則是視以父兄之讎也。 然而以指摘瑕疵之說, 爲出於愛惜, 旣有痛迫痛劾之心, 則愛惜之心, 何從而生乎? 今日迫刻之論, 雖與《春秋》、《禮經》所謂必報者有間, 然引義告絶則決不可已也。 歐、范之契, 可謂至深, 然於范碑, 歐公果若以無爲有, 則朱先生以爲忠宣當沬血飮泣, 引義告絶。 今日高明怨怒之事, 奚但以無爲有而已耶? 且前書所謂金尙書云, 高明何忍提起此說也? 當時金尙書, 每泣血而言者, 不但曰忍人而已, 蓋傷其同氣, 不得從容就盡, 而謂出於先丈之倡之, 故言不知裁。 愚之對人說此, 曾未記得, 豈我或哀其至情痛怛, 而說人之際, 不覺其誤觸先丈耶? 至於木川事, 聞高明與打愚書, 頓與貴院答木之文相左, 而且見前日所從聞之人, 憂恐徊徨, 則其言根, 自有所歸。 故卽便自當, 自當之外, 更有何事? 而聞高明門下謂我言窮, 心竊笑之。 金尙書及木川事, 愚旣引伏, 更無可說, 至於平日得罪於先丈者, 則全在於鐫事, 蓋中其毒者, 此漢最先矣。 及其排斥朱子, 自立己說, 將有以易天下, 則猥托闢邪拒詖之義, 而極力斥之, 此於先丈, 未免有左右佩劍者也。 愚於先丈, 雖未嘗不服, 而亦爲斯文世道, 未嘗不憂歎也。 至於鐫以兇悖伏法之後, 則意謂高明爲先丈當如庾元規之於蘇峻事, 後而竊聞高明, 猶斥打愚陰陽之論, 其扶護之意, 猶在尙復何望? 此一事則雖欲爲先丈受惡, 不可得也。 幸有以恕其愚迷也。 大抵今日兩家道理, 在我十分警策, 以庶幾一斑之窺, 在高明只前所謂引義告絶四字, 實不可易底物事。" 拯又復書曰: "所謂申束甚嚴者, 又出情外。 前日下書, 斥北人以無倫悖理, 私心感服, 今却更釋悖字之義, 似若爲北人分解者然, 非但拯之失望, 聽聞亦不能無疑於門下矣。 語意豪健, 令人悸怖之諭, 尤極惶恐。 前書緣情迫辭激, 不覺至此, 倘霽威怒, 俯賜情恕, 則或以爲可矜而不以爲可惡也。 所謂痛迫痛刻之云, 只言私心隕蹙切迫之至耳。 若謂有讎之之意, 而至引《春秋》、《禮經》爲敎, 則驚愕甚矣。 迫刻之心如此, 則愛惜之心, 何從而生之敎, 又恐門下不諒人心也。 平生尊師之地, 有此妄疑, 則寧無慨惜之心? 乎木川事, 又蒙勤示, 當初木院通文於此中也, 不言某事某言, 而其時到處鄕戰, 罰削紛然, 故卽以追加摘罰事未妥當之意, 回答矣。 其後因打愚之與方伯書, 聞其語句, 而又因人始知出於門下所傳, 欲知其詳, 申叩於打愚矣。 其後聞門下索去答通之文, 以爲: ‘此中惡其言之出, 掩置不答云。’ 此中士友, 以此敎之出於意外, 咸恨當初答木之文, 欠於思量, 不問其爲某語某事, 出於某人, 而徑言摘罰之未妥, 遂爲門下所疑也。 至於尹鑴事, 不料門下, 又以提起也。 門下於丙辰答不肖之書, 不以爲已解疑云耶? 況其人罪死之後, 有何更論? 所謂庾亮之罪, 終未知果當於先人, 而至於扶護之云, 亦是載鬼之車也。 打愚陰陽之論, 實未省記其人事, 自知未嘗掛口, 而徒以打愚之傳訛, 門下之過疑, 亦將不免扶護罪人之律, 豈非命也? 惟是金尙書云云, 何忍提起之責, 隕蹙之極, 若無所容也。 年前因宋彛錫已聞門下有此說, 而近聞令季、瑞山及門下諸人, 到處騰口, 辭說罔極, 安得一向泯默? 金丈至情痛迫之語, 人誰間然? 金丈曾於癸巳, 一訪先人, 亦及當時事, 爲言引咎不仕之太過, 而哀其同己之不幸, 至情可見矣。 噫! 殺身成仁, 一家義烈炳炳, 則死者固無所怨悔, 而生者亦豈眞有尤人之意哉? 金丈之於先人, 眞有不但曰: ‘忍人而已。’ 之意, 則是怨之深斥之甚也。又安有手登薦剡, 以欺吾君, 時加存訊, 以欺其心之理乎? 不肖猶記先妣自決之時, 先人則不在家中, 至今追思, 歷歷如昨。 先人於辭諮議陳情時, 有復於愼齋先生一款曰: ‘其時某與諸士友聚, 謀處身之所, 亡妻知事急急, 遣婢邀某。 某至則曰: 「與死於賊, 不如自決, 願一見而訣耳。」 某不忍見, 走歸士友所云云。’ 其時先人, 不在家中曲折, 實與不肖所追記者合, 此其實跡也。 雖使金丈而在, 亦未必以已不目覩之事, 身質傳聞之說, 況今於金丈已沒後幾年, 無端引播其說, 以爲疵謗先人之口實, 則不但不肖之至冤極痛, 抑恐於門下盛德, 所損非細也。" 時烈又答之曰: "當初此事之發也, 使我聽而不聞而已, 則都無事矣, 而乃敢妄作一書, 以致漸生葛藤, 終至於不可收殺, 則此漢不解事之致也。 雖悔何及? 然來敎旣有許多咎責, 而辭意之健, 無異於前, 只當甘受, 而其中極有不可曉者, 略復奉質焉。 朱子論心不翅詳矣, 而於《大學》正心章曰: ‘仰面貪看鳥, 回頭錯應人。’ 今以來敎所謂: ‘痛迫痛刻’ 與所謂: ‘愛惜云者。’ 爲一心竝有之物, 則與朱子說, 何其相戾耶? 雖以尊之談鋒筆勢, 恐無以服人也。 大抵前後貴說, 其所以斥我本源言行者, 則誠可自省, 而其餘則無非苟且矛盾, 抑勒變幻者, 何爲其然耶? 至於忍人之說, 則自尊無端提起, 心竊怪之, 而略陳當初金尙書之心事而已, 此果此漢之罪耶? 至於尙書之前後異觀, 則亦非愚之所敢知, 問諸水濱可也。 豈亦非復吳下阿蒙之意耶? 扶護二字, 此尊之所甚諱惡, 而亦有事實。 記昔鶴寺之會, 先丈分明有陰陽黑白之說, 而其後乃有指一事而不指全體之云, 使我有謝李之事, 此非扶護而何? 夫鑴也乃敢疵侮朱子, 則是不知天命而狎大人侮聖言者, 不待行凶作惡, 而一毫一髮, 無非罪逆, 故每效其愚於先丈, 而得罪甚深。 然此則全不恨矣。 來敎所謂解釋云者, 不記其如何, 而以庚申後斥打愚陰陽之說觀之, 則雖曰解疑, 而未免於誤解矣。 打愚嘗以明言於愚, 使愚信左右, 不信打愚, 有所不能矣。 來書中師之一字, 極令人直欲鑽地以入而不可得也。 使我受此則實北疏之爲也, 故吾斥之無所惜矣。 若見與渠書可知矣, 人之疑不疑, 任他而已。 惟來諭所謂扶護罪人之律云云, 正與前日所與和叔書, 所謂禍福二字相合, 而欲以此爲持人之資, 愚本無禍人之心, 無乃服習於所謂其人而謂人人皆如是耶? 旣書還抹, 而猶使人見之者, 前書忘未答矣。 此事不記何時事, 然文簡先生, 嘗於《石潭日記》, 手抹休菴一款, 而字字猶鑿鑿分明, 此亦有心而可疑者耶? 至於先妣云云, 其在誠孝, 安得不然? 然日者因金士輔聞尊以母死不明, 持疇孫竊歎, 尊之不能推恕於人, 愚雖無狀, 何忍尤而效之乎? 大抵來書怨怒, 更加一層, 引義告絶, 不宜少緩, 而猶且云云, 此愚昧之所不敢知也。" 自後不復往復。 蓋拯蓄憾於時烈久矣, 及見時論携貳, 遂肆然立幟, 移書朴世采, 詬訾時烈。 而況其所謂 ‘辛酉擬書’ 者, 【疑書詳在丙申崔錫文疏中。】 極口構罪, 與己巳人按律之論, 如脫一模, 拯之見本自如此, 則累十年屈首師事者, 是何心也? 其意雖以其父墓文爲懟, 而因其私事, 臚列其人過惡者, 是果道理耶? 時烈之不滿其父, 專在鑴事, 而不肯明言顯斥, 以白其父之心, 乃反歷擧時烈之過, 構捏無餘, 其陰護鑴而反背時烈之心, 不難辦矣。 況於時烈, 則猶不廢函丈門人之稱, 而暗地訾毁於世采者, 其心尤何如也? 及其答時烈書, 至擧齊人妻妾詬辱之, 又自以爲: ‘痛迫痛刻。’ 則其處義, 無復可論。 而時烈第二書, 不爲供答, 付之無辨, 則拯復意時烈, 或變前見, 其答書, 乃作哀矜乞憐之語, 至以爲: ‘若蒙門下追惟舊義, 俯賜哀憐, 則幽明受賜, 疑結俱釋, 只在門下一言之間。’ 且時烈自初書, 已以引義告絶爲言, 而拯則以爲: ‘告絶豈是容易事? 若以情義不如前而謂之絶, 則世間交際, 不絶者幾希。’ 其色態之陰陽反覆, 有不忍正視。 雖以往復書觀之, 時烈之言, 或以少含蓄, 而亦皆明白直截, 拯書則依違攣曲, 其情狀自不可掩, 卽此而是非邪正, 亦可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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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 8월 21일 甲寅 1/1 기사 / 1684년 청 강희(康熙) 23년

윤증과 송시열의 일에 관한 관학 유생 조정만 등의 상소와 사건 전말

국역

관학(館學)457) 의 유생(儒生) 조정만(趙正萬) 등이 상소하기를,

"송(宋)나라 말기에 형서(邢恕)458) 란 자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정자(程子)의 문하(門下)에서 나왔으나,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자, 그 스승을 배반하여 공격하니, 마침내 사설(邪說)이 횡행하여 군자(君子)의 도(道)가 사라지고 백년의 화(禍)를 이루게 하였으므로, 신 등은 이에 통한(痛恨)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오늘날 형서의 일이 성명(聖明)의 조정에 다시 나와서 장차 인심이 허물어지고 세도(世道)가 무너져서 어지럽게 되려 하니, 사림(士林)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윤증(尹拯)이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한 지 이제 30여 년에 이르므로, 윤증(尹拯)이 근실하게 복종해 섬긴 것과 송시열이 두텁게 허여(許與)한 것은 진실로 심상한 사제(師弟)에 비할 바가 아닌데, 윤증이 사감(私憾)으로 원망과 노여움을 깊이 쌓아 편지에 드러내어 꾸짖고 무망(誣妄)하기를 기탄없이 하였고, 일이 발단된 뒤에 미쳐서는 또 다시 용장(冗長)한 글과 편지를 직접 사문(師門)에 던져서 마음대로 업신여기고 짓밟는 등 더욱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도리로서 차마 할 바이겠습니까? 대저 윤증의 아비 증 참의(贈參議) 신(臣) 윤선거(尹宣擧)가 강도(江都)의 변란(變亂)459) 을 겪고부터 향리(鄕里)에 물러가 살면서 사우(師友)와 종유(從遊)하고 뜻을 학문에 돈독히 하니, 한때의 사류(士流)가 추중(推重)하여 허여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고, 송시열도 윤선거와 서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같은 때에 적(賊) 윤휴(尹鑴)가 유자(儒者)의 이름을 빌어 사우(士友) 사이에 두루 종유하였는데, 《중용(中庸)》의 주자(朱子)의 집주(輯註)를 고치자, 송시열이 명백하게 분변하여 통렬하게 배척하고, 인하여 서로 절교(絶交)하였습니다. 기해년(己亥年)460) 의례(議禮)의 일이 발생하자, 윤휴가 곧, ‘임금을 낮추고 종통(宗統)을 둘로 한다.’는 말을 만들어 내어 일망타진(一網打盡)할 계책을 쓰고자 하니,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과 같은 여러 사람들도 모두 그 심술(心術)의 음흉함을 알고는 또한 서로 절교하였는데, 오로지 윤선거(尹宣擧)의 뜻은 서로 어긋남이 없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송시열이 세도(世道)를 위해 깊이 근심하여 여러 번 충고(忠告)하였으나, 윤선거가 마침내 따르지 아니하므로, 송시열이 매양 그 사(邪)와 정(正)의 분변이 엄정하지 못함을 탄식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윤증이 갈문(碣文)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는데, 송시열은, 비갈(碑碣)의 글은 사실을 수집해서 기록하여 후세에 전신(傳信)해야 하고, 또 문자(文字)로써 사람에게 사사로운 정(情)을 좇아 구차하게 칭찬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 또한 성실한 도(道)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논찬(論撰)한 것이 한결같이 윤증의 바라는 바와 같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곧 윤증의 감한(感恨)을 일으킨 까닭입니다. 윤증은 오히려 속으로는 원망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품고서도 겉으로는 사제(師弟)의 예(禮)를 행하면서 은밀히 쌓고 간직하고는 얼굴 빛이나 말에는 드러내지 아니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감히 때를 틈타 갑자기 발동하여 헐뜯고 배척함이 이처럼 극단에 이르고 있으니, 대저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연고가 아닙니다. 지난번 최신(崔愼)이 상소하여 비로소 그 꾸짖고 무망하는 말을 배척하고, 대신(大臣)이 이어서 전석(前席)에서 진달하자, 전하께서 그 정상을 밝게 살피시고 전후의 성교(聖敎)가 엄절(嚴截)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윤증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스스로 반성하여 척연(惕然)히 고칠 것을 생각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더욱 패만(悖慢)하여 조금도 기탄함이 없이 편사(偏邪)한 말과 변명하는 말의 사단이 많았으니, 신 등이 그 가운데 한두 가지를 간략히 분변하겠습니다.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지금에 와서 망령된 소견에는 〈선생의〉 본원(本源)의 바탕에 대해 의심스러움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기질(氣質)의 병폐를 교혁(矯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조장하는 바가 있으니, 이것이 참람하게도 망론(妄論)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불평하는 것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입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문자(文字)의 일뿐만 아니라 문하(門下)께서는 비가(鄙家)에 대해서 미세한 한 가지 일이나 의심스러운 한 마디 말이라도 진실로 선인(先人)을 해칠 만한 것이 있으면, 폭양(暴揚)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니, 자식된 마음에 어찌 통각(痛刻)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저의 마음이 통박(痛迫)하여 정(情)이 전일(前日)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하였으면, 그 원독(怨毒)의 깊음을 따라서 알 수 있는데, 도리어 이르기를, ‘불평하는 것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이다.’ 하였습니다. 이미 원독한 마음을 속에 품었다면 대개 가는 곳마다 촉발(觸發)하여 그 말하는 바가 저절로 공정하지 못할 것인데, 비록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에서 나오는 것이다.’고 말하나 그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또 윤증이 송시열을 따른 지가 이와 같이 오래 되었는데, 평소 질의(質疑)할 때에 무엇 때문에 일찍이 일언반사(一言半辭)도 송시열의 도학(道學)에 대해 순정(醇正)한지 허물이 있는지 언급한 바가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비가 죽은 후 문자(文字)를 부탁하는 데 이르렀으면, 존상(尊尙)하고 경복(敬服)하는 바가 또한 지극하다고 이를 만한데, 오로지 갈문(碣文)이 이미 나온 뒤에 곧 본원(本源)과 언행(言行)에 의심할 바가 없지 않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송시열의 본원과 언행이 그 갈문으로 인하여 비로소 의심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대저 윤증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아래로 한 귀절 한 글자가 모두 사감(私憾)에서 나왔기 때문에, 학문을 논한다고 가탁하여 스스로 공의(公議)라고 일컬으면서 사람의 귀와 눈을 가리려는 계책으로 삼은 것입니다. 아아, 예로부터 문하의 제자가 선생과 어른에게 일로 인하여 논변(論辨)한 것은 진실로 많이 있었으나, 일찍이 그 언행(言行)의 전체를 들어서 공공연히 꾸짖고 무망하기를 윤증과 같이 한 자가 있었습니까? 송시열은 평생 동안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행동을 모두 주자(朱子)를 기준으로 삼았으니, 공부의 독실함과 문로(門路)의 정대(正大)함은 선유(先儒)의 정맥(正脈)을 이었고,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이 되었으며, 사람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모두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정직한 데에서 나왔으니, 어찌 일찍이 일호라도 기관(機關)461) 과 권모 술수(權謀術數)가 윤증의 말과 방불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윤선거(尹宣擧)는 늦게야 뜻을 세운 것이 족히 강도(江都)의 일을 덮을 만하였으나, 또 끝내 적(賊) 윤휴(尹鑴)의 악함을 깨닫지 못한 것 또한 어찌 백 번 속임을 받는다는 뜻에 손상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시열은 장차 세도(世道)의 큰 근심이 될 것을 밝게 보고,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윤선거는 뜻[志]이 같고 의(義)가 합하는 사람이었으나, 오로지 이 일에는 의견이 달랐으니, 탄식하고 애석해 하는 마음이 어찌 때로 이야기 가운데 발설하지 아니할 수 있었겠으며, 논찬(論撰)하는 말에 어찌 약간 짐작함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그 아들이 적대시하는 바가 되어 이러한 망극한 구무(構誣)가 있었으니, 군자(君子)가 이러한 세상에 처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윤증이 네 번째 보낸 글에 적(賊) 윤휴를 논급(論及)하여 이르기를, ‘그 사람이 죄로 죽은 뒤에 무슨 다시 논할 일이 있겠는가?’고 하였는데, 이른바, ‘죄로 죽었다.’고 일컫는 것을 흉적(凶賊)의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윤휴가 동조(東朝)462) 를 무욕(誣辱)하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할 것을 꾀한 죄는 흉당(凶黨)에 있어서 우두머리가 되는데, 이제 죄로 죽었다고 지목하는 것은 오로지 무엇 때문입니까? 아아, 송시열의 성품은 본래 강의(剛毅)하여 도리(道理)를 믿어 스스로 지키면서 그 마음에 옳지 못한 것과 의리에 불가한 것은 비록 큰 이해(利害)가 있다 하더라도 일찍이 돌아보거나 꺼려한 적이 없었으니, 그 평생의 경력(經歷)을 살펴보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오로지 세도(世道)를 자임(自任)하여 더욱 엄절함을 이룬 것이 사정(邪正)과 선악(善惡)의 분변에 있었기 때문에, 오로지 저 아첨하고 질투하며 정도(正道)를 미워하는 무리가 때때로 나와서 구훼(構毁)하고 나직(羅織)하는 등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으나, 오히려 감히 학술(學術)로써 허물을 삼지는 못하였는데, 이제 윤증이 현란(眩亂)한 말을 만들어 정대하고 순수(純粹)한 학문을 더럽히고자 하며 한때를 속이고 후세를 속일 수 있다고 이르니, 참으로 세변(世變)은 있지 아니하는 바가 없습니다. 송시열의 도덕과 학문은 진실로 이로써 증손(增損)되는 바가 있지 않을 것이나, 오로지 인심이 함닉(陷溺)하고 의리(義理)가 회색(晦塞)되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의논이 어지럽게 아울러 일어나서 삼조(三朝)463) 에서 예우(禮遇)할 뿐만 아니라, 사림(士林)이 존경하던 이를 모두 허망한 지경으로 돌아가게 할 따름이고, 경원(慶元)464) 때의 위학(僞學)의 비방465) 이 장차 오늘날에 다시 일어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 시류(時流)가 더럽혀질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윤증이 학문을 논한 한 마디 말은 반드시 장차 후일의 재화(災禍)의 빌미가 될 것이니, 어찌 조속히 분변하여 그 싹을 끊어 없애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인심이 함닉(陷溺)하고 의리가 회색(晦塞)되어 평소의 존경하던 사람을 꾸짖고 배척함이 한결같이 이처럼 지극한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어찌 사문(斯文)의 불행일 뿐이겠는가? 진실로 국가의 불행이다. 지난날 상신(相臣)의 진달로 인하여 이미 밝게 분변하여 물리쳐 끊었는데, 너희들이 수선(首善)466) 의 땅에 있으면서 어진 스승의 무함(誣陷)받은 것을 통분하게 여겨 함께 부르짖어 변명하되, 말의 뜻이 엄정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당초에 윤증이 박세채(朴世采)에게 준 글에서 이미 발론하였는데, 송시열이 윤증에게 글을 보내기를,

"고명(高明)이 화숙(和叔)467) 에게 준 편지를 지난 달에 우연히 얻어 보니, 아아, 참으로 약석(藥石)이었네. 대개 어려서부터 망령되게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또 사문(師門)에 종유(從遊)하여 이 일을 얻어 들었으니, 반드시 글을 읽어서 이치를 밝히고 극기(克己)하여 사욕을 없애는 이 두 가지가 바로 실제의 공효(功效)일 것이네.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는 바 아니지만, 기질(氣質)이 편협(偏俠)하고 잡박(雜駁)한데다가 실행에도 힘쓰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털끝만큼도 근사(近似)한 것이 없었네. 이치에 이미 밝지 못하여 이(利)를 의(義)로 여기고, 극기(克己)하지 못하여 물욕이 항상 행해져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온전히 인욕(人欲)에서 나온 것이 많았으니, 자신을 점검(點檢)할 때마다 부끄러움에 옷에 땀이 젖는 것을 깨닫지 못하네. 지금 고명(高明)이 지적한 바는 모두 진실로 병통이나, 의(義)와 이(利)를 함께 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아울러 쓴다는 것은 더욱 지나치게 허여(許與)하고 크게 용서함을 보겠네. 매번 받들어 읽은 후 침으로 몸을 찌르는 것과 같아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경책(警責)하여 새로워지기를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어 많은 은혜를 받았으니, 비유하건대, 병든 사람이 고질이 되어 장차 죽게 되었는데, 갑자기 양의(良醫)가 신묘(神妙)한 약을 주어 살 길을 찾을 수 있었다면, 비록 양의의 본심이 과연 자기를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은혜가 됨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내가 과연 문자(文字)의 과실로 선장(先丈)에게 득죄(得罪)하였으니, 끝내 의혹을 풀 수가 없다면 고명의 도리에 있어서는 주자(朱子)가 말한 것과 같이 의(義)를 좇아서 절교(絶交)를 고해야 마땅할 것이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사제의〉 굴레에 매여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불평(不平)하는 뜻을 마음속에 쌓아두면, 이르는 곳마다 촉발(觸發)하여 제재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니, 군자(君子)가 의(義)를 처리하는 도리(道理)가 과연 이와 같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네. 또 문자(文字)를 초정(草定)한 이래로 고명(高明)이 개정(改正)하게 하려한 것은 받들어 따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득죄(得罪)한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 목천(木川)의 일468) 에 있어서는, 이를 고명이 깊이 노여워하는 바이나, 반복해서 생각해 보건대, 그 일의 허실(虛實)과 그 말의 유무(有無)를 물론하고, 대개 타우(打愚)469) 가 호향(互鄕)470) 의 사람과 더불어 상종(相從)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대개 선장(先丈)을 존상(尊尙)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네. 고명이 논한 바는 바로 정문 일침(頂門一針)으로서, 평생 동안 이를 사우(士友) 사이에 얻은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로써 경계하고 격려하니, 우연히 죽지 아니한다면 거의 조금이나마 상유(桑楡)의 공효가 있을 것이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신(崔愼)이라는 북방(北方)의 무지(無知)한 사람이 갑자기 소장(疏章)에 드러내어 조리가 없고 이치에도 어긋난 말로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다고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황공하고 부끄러워 거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였네. 비록 급히 글로써 질책(叱責)하였으나, 이루어진 일이어서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 무릇 전후의 말한 바가 만약 간폐(肝肺)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하늘이 미워하고 미워할 것이네. 말하고 싶은 것이 이에 그치지 아니하나, 거의 다한 천식(喘息)이 몹시 위태하여 입으로 부르는 것도 접속하지 못하고, 그 구선(究宣)하는 것도 조리가 없으니, 오로지 고명은 가련하게 여겨 살펴 주기 바라네. 사람이 장차 죽으려고 하면 그 말이 선(善)해진다 하였고, 무릇 이에 운운(云云)한 것들은 반드시 거짓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아울러 양지(諒知)하기 바라네."

하였는데, 윤증이 답하기를,

"한 번 권생(權生)이 참람한 논의를 전달(轉達)한 뒤로 항상 황송(惶悚)함이 간절하였는데, 저의 편지가 전해진 것을 듣고는 비록 황송함은 더욱 깊어도 여러 해를 머뭇거리며 감히 아뢰지 못하였던 것을 갖추 듣고 보실 수 있게 되었으니, 또 저윽이 스스로 다행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북인(北人)의 상소(上疏)가 나온 것을 듣고는 마음이 슬퍼서 도모할 바를 몰라 문하(門下)를 위하여 놀라 마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인(先人)에게 욕(辱)이 미치고 저의 마음이 몹시 아플 뿐만 아니라, 부자(父子)가 스승과 벗으로 교유한 지 50여 년 만에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망연(惘然)히 의(義)를 처리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문하께서 다시 거두어 용서하시고 이 글을 내려서 정성스럽게 설명하여 깨우쳐 주시며 말씀이 선해진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보증하시고, 〈거짓이 있으면〉 하늘이 미워한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시고, 조리가 없고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으로써 북인(北人)을 질책(叱責)하셨습니다. 아! 문하의 말씀이 이에 미친 것은 오히려 스스로 경계[畦畛]를 베풀어서 스스로 장자(長者)를 끊게 하시려는 것이니, 문하께서는 윤증(尹拯)을 저버리지 아니하셨으나, 윤증이 진실로 문하를 저버린 것입니다. 이에 하교(下敎)하신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하나 답(答)을 올려 재처(裁處)하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하교하시기를 ‘고명(高明)이 지적한 바는 모두 진실로 병통이나, 이(利)와 의(義)를 같이 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아울러 쓴다고 한 것은 더욱 지나치게 허여(許與)하고 크게 용서하는 것이다.’ 하셨으나, 이는 단지 대강(大綱)을 말씀하신 것뿐이고, 그 자세한 것은 진실로 신유년471) 의 의서(擬書)472) 에 있는데, 이제까지 감히 올리지 못한 것은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한 죄입니다. 선인(先人)께서는 문하께 진실로 지극한 정성이 있어서 의심할 만한 곳이 있음을 보면 모두 기질(氣質)의 병통으로 돌리시고, 본원(本源)에는 일찍이 의심하지 아니하셨으나, 오늘에 이르러 망령된 소견으로는 본원의 바탕에 의심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기질의 병폐를 교혁(矯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조장(助長)하고 계시니 이것이 참람한 망론(妄論)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문하께서 담부(擔負)하신 바가 어떠하십니까? 훗날의 과오는 호리(毫釐)에서 비롯되고, 구인(九仞)473) 의 높은 산을 쌓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면 완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훗날 논하는 자로 하여금 또한 윤증과 같이 망론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크게 통석(痛惜)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제지받아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고, 권생(權生)474) 과 논한 것은 단지 제(齊)나라 사람의 처첩(妻妾)이 안 뜰에서 원망하는 것475) 과 같은 것이었는데, 전전하여 득죄(得罪)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모두 식견(識見)이 어두운 죄입니다. 양의(良醫)의 본심이 자기를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하교는 또한 감히 해명할 수는 없으나 이는 옛사람이 ‘믿지 아니함이 있으면 곧 자기를 비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교훈입니다. 하교하시기를, ‘내가 문자(文字)의 과실로 선장(先丈)에게 득죄(得罪)하였으니, 의혹을 풀 수가 없다면 고명은 마땅히 의(義)를 좇아서 절교(絶交)를 고해야 할 것이네.’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도리어 얽매여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불평하는 뜻을 마음속에 쌓아 둔다.’라고 하셨으나, 절교를 고하는 것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범충선(范忠宣)도 구양공(歐陽公)에게 능히 행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무상(無狀)한 자와 문하와의 사이이겠습니까? 대저 정의(情義)가 전과 같지 못한 것으로써 모두 절교해야 한다고 이른다면 세간의 교제에 절교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문하의 말씀이 이에 미치시니, 진실로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화숙(和叔)476) 에게 준 편지를 불평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진실로 윤증(尹拯)의 본정[情]이 아닙니다. 대저 불평하는 것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이니, 이는 단지 망령된 소견이 잘못 들어간 것일 뿐입니다. 하교하시기를, ‘문자(文字)를 초청(草定)한 이래로 고명이 고치게 하려고 한 것은 받들어 따르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고 하셨는데, 대저 위의 글에 하교하신 바, ‘마침내 의혹을 풀수가 없었다.’는 것은 그 총론(總論)을 고치지 아니한 일을 지적하신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또 어찌하여 받들어 따르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는 하교가 있었습니까? 문자(文字)를 고쳐 줄 것을 청한 것이 전후에 모두 세 번 있었는데, 갑인년477) 에는 불초(不肖)가 스스로 청하였고, 병진년478) 에는 문하께서 고쳐 줄 것을 허락하셨으며, 무오년479) 에는 문하께서 다시 올리게 하셨습니다. 처음 고쳐 주실 것을 청하였을 적에는 고쳐 주시는 은혜를 입지 못하였고, 또 이 일은 급급(汲汲)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하교하신 때문에 감히 재차 고쳐 주실 것을 청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또 다소의 왕복이 있었으나, 종말에는 단지, ‘우선 화숙(和叔)이 기록한 바에 의거한다.’라고 하교하시고, 또 ‘약한 것은 강한 것을 대적하지 못한다’, ‘산악(山岳)으로 바꾸어 쓰겠다.’는 등의 희롱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희롱당하였는데, 어찌 감히 세 번 청할 뜻이 있겠습니까? 그후 약간의 글자를 고쳐 주셨으나, ‘보내 온 뜻에 의하여 찬정한다.’는 시교(示敎)가 있었기 때문에 이로써 스스로 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다시 흠결(欠缺)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문자(文字)의 일뿐만 아니라, 문하께서는 비가(鄙家)에 대하여 비록 한 마디 말씀과 한 가지 일이라도 진실로 선인(先人)을 해칠 수 있는 것은 폭양(暴揚)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으니, 또 저의 마음에 통박(痛迫)한 것이 있었습니다. 문하께서 일찍이 김 상서(金尙書)의 말을 인용하여 선인을 가리켜 잔인(殘忍)한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이와 같이 근사하지도 아니한 말을 오히려 허실(虛實)을 가리지도 않은 채 남에게 말씀하셨으니, 자식된 마음에 어찌 통각(痛刻)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교하시기를, ‘목천(木川)의 일은 고명이 깊이 노여워하는 바이나, 대개 타우(打愚)가 호향(互鄕)의 사람들과 상종(相從)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으니, 선장(先丈)을 존숭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네.’ 하였는데, 당시의 일은 선인(先人)의 전후의 상소에 하나하나를 스스로 열거하였고,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도, ‘진동(陳東)480) 이 마침내 윤곡(尹穀)481) 의 죽음을 이루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는 비답(批答)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득실(得失)과 시비(是非)는 자연히 후세의 정론이 있을 것입니다. 또 사람은 각각 견해가 있으니, 만약 의(義)를 처리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를 논하는 데 있어서 시비(是非)를 공정하게 한다면, 비록 자손이라 하더라도 감히 사감(私憾)을 가질 수 없겠지만, 이 말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갑인년482) 에서 신유년483) 까지 8년 사이에 이곳에서나 목천(木川) 부근에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는데, 갑자기 문하로부터 전하여 나왔으니, 생각하건대 문하께 고한 자가 은밀히 선인의 자병(疵病)484) 을 드러내려는 뜻을 품고는 고의로 다른 사람을 칭탁하여 그 말을 퍼뜨리고, 어지럽게 분변하고 힐문(詰問)할 때에 한바탕 욕하고 싸움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이로써 진실로 마음이 아픔을 금하지 못하여 그 말이 나온 곳을 청하려고 글을 써 놓고는 미처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다른 사람이 이미 앙문(仰問)하였는데, 문하께서는 설파(說破)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미안함을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하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여 마침내 감히 올리지 못하였는데, 혜서(惠書)에 허황(許璜)에게 물으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문하께 의심을 두었던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습니다. 옛날 문하께서 화숙(和叔)에게 준 글에 어떤 사람의 성내어 꾸짖은 말을 인용하고, 그 곁에 강도지사(江都之事)라는 네 글자를 썼다가 도로 지웠는데, 만약 이것이 그 사람의 말이라면 이미 썼다가 도로 지운 것은 무엇 때문이며, 지우고도 볼 수 있게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뒤에 초려(草廬)485) 의 손자 이단중(李端中)이 말하기를, ‘선인(先人)이 하세(下世)하신 뒤에 문하가 초려와 회동하였는데, 문하가 묻기를, 「미촌(美村)486) 의 강도(江都)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자, 초려가 답하기를, 「설사 미진함이 있더라도 학문하기 전의 일인데, 어찌 이로써 의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문하께서 곧 옳게 여기고,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이군(李君) 희조(喜朝)가 문하의 말을 한 사우(士友)에게 전한 것이니, 문하의 물음은 초려의 물음이 되었고, 초려의 대답은 문하의 대답이 되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바깥 사람의 알 바가 아니지만, 이 일의 문답(問答)이 있었던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듣건대, 문하께 종유(從遊)하는 자가 가끔 이 일을 가지고 선인(先人)을 허물하는 구실(口實)로 삼고, 혹 제멋대로 말하며 고자(顧藉)487) 하는 바가 없으니, 이와 같으면 설사 그 말이 목천(木川) 사람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또한 문하(門下)를 승망(承望)하는 여론(餘論)일 뿐입니다. 그 뒤에 타우(打愚)가 받들어 물으니, 유수방(柳壽芳)에게서 나온 것 같이 말씀하셨다 하고, 목천 사람이 받들어 물으니 곧 조언(造言)한 것으로써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하셨다 하고, 이곳에 보내신 글에는, ‘허황(許璜)에게 들었다.’고 하셨으며, 마지막으로 태중(泰仲)이 받들어 아뢰니 초려(草廬)에게 들었다고 하셨다 하였습니다. 대저 이와 같으면 미혹(迷惑)된 마음에 비록 의심하지 않으려 하나,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송시열이 두 번째 글에 이르기를,

"보내 온 글을 스스로 볼 수가 없어서 아자(兒子)와 손자로 하여금 읽게 하여 들었는데, 아자(兒子)가 받들어 아뢰니 내가 초려에게서 들었다고 말하였다는 한 가지 절목에 이르러서는 아자가 크게 놀라며 진실로 이러한 일이 없었다고 하였네. 무릇 세간(世間)의 말에 이와 같은 것이 많은데, 비록 낱낱이 답한다 하더라도 말한 자는 한갓 무망(誣罔)한 데로 돌아갈 뿐이고, 듣는 자는 교식(矯飾)한다고 할 것이네. 이러한 까닭에 다시 고명(高明)을 위하여 이 정성스런 마음을 드러낼 뜻을 끊고 다만 이 마음을 품고 땅속에 들어가서 백세(百世)의 공의(公議)를 기다릴 뿐이네."

하였는데, 이에 윤증이 두 번째 답하기를,

"태중(泰仲)이 전하는 말에 갑인년488) 이후에는 문하께서 진실로 초려(草廬)와 회합(會合)하신 때가 없었다고 하므로, 그때에는 진실로 태중(泰仲)이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이른바 선인(先人)의 일은 불초(不肖)의 사사로운 마음으로는 문하(門下)께 바라지 아니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을 다하여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혼매(昏昧)한 견식(見識)에다가 민박(悶迫)한 사정(私情)에 가려져 무릇 망령되게 의혹이 생기는 것들을 어찌 모두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만약 문하께서 구의(舊義)를 미루어 생각하시고, 인정을 굽어 살피셔서 공평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헤아려서 극진하게 애린(哀憐)을 더해 주심을 입으면, 유명(幽明)이 함께 은혜를 받아서 의혹과 맺힌 것이 모두 풀어질 것입니다. 단지 문하의 한 말씀 사이에 달려 있을 뿐인데, 어찌 백세(百世)를 기다릴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송시열이 다시 회답하기를,

"요즈음 가만히 지난번의 서찰의 뜻을 자세하게 살피건대, ‘내가 앞서 한 말을 변개(變改)해서 스스로 무죄(無罪)한 지경에 이르고자 하였기 때문에 거듭 매우 엄중하게 단속하는 것 같이 하였으나, 나는 감히 이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네. 일찍이 선사(先師)에게 가르침을 받고는 안자(顔子)의 범이불교(犯而不較)489) 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마음속으로 원망과 분노를 품고서도 겉으로 겸손한 체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이었네. 사상채(謝上蔡)가 허물을 듣고는 부끄럽고도 두려워서 땀을 흘렸고490) 진소유(秦少游)가 경솔하여 이천(伊川)의 말을 듣고는 얼굴빛이 붉어 졌으니491) , 내가 비록 무상(無狀)하다 하나, 감히 처음에는 교식(矯飾)하였다가 마침내 또 반복(反覆)하지는 아니하네. 당초에 내가 최(崔)의 상소(上疏)를 이치에 어긋난다고 한 것은, 대개 한결같이 섬겨 죽음에 이르는 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스승과 제자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공자(孔子)와 안자(顔子) 같은 바가 있은 후에야 광(匡) 땅에서 난을 당하였을 때의 문답(問答)이 있을 것인데, 이제 추(醜)하고도 어긋난 체단(體段)으로 부자(父子)·군신(君臣)의 대륜(大倫)을 혼동해서 아울러 거론하였기 때문에, 나의 글에 말했던 것이네. 대저 그대의 지난번 글은 말의 뜻이 호건(豪健)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이제 혜서(惠書)를 받아 보니 10에 8, 9 감한 정도가 아니었네. 그러나 지난번 글의 뜻은 끝내 알지 못할 것이 있네. 이미 ‘폭양(暴揚)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부형(父兄)의 원수로 본 것이네. 그런데도 하자(瑕疵)를 지적한 말을 애석(愛惜)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였는데, 이미 통박하고 통각한 마음이 있다면 애석한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오늘날 통박하고 통각하다는 논의는 비록 《춘추(春秋)》·《예경(禮經)》에 이른바, ‘반드시 보복한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나, 의(義)를 좆아서 절교(絶交)를 고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네. 구양수(歐陽脩)와 범중엄(范仲淹)492) 의 정의[契]는 지극히 깊다고 이를 만하나, 범중엄의 비문(碑文)에 구양공이 만약 없는 것을 있다고 하였다면, 주 선생(朱先生)은 말하기를, ‘충선(忠宣)493) 은 마땅히 피눈물을 흘리면서 의(義)를 좆아서 절교를 고했을 것이다.’ 하였네. 오늘날 고명(高明)의 원망하고 노여워할 일이 어찌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한 것뿐이겠는가? 또 지난번 글에 이른바 김 상서(金尙書)494) 라고 한 것은 고명이 어찌 차마 이 말을 제기(提起)하는 것인가? 당시에 김 상서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한 말은 잔인한 사람이라고 한 것뿐만이 아니었으니, 대개 그 동기(同氣)가 조용히 죽을 수 없었던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선장(先丈)이 창도(倡道)한 데에서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의 재량(裁量)할 바를 알지 못해서였던 것이네. 내가 사람들에 대하여 이를 말하였는지 일찍이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혹 내가 몹시 슬퍼하는 그의 지극한 정(情)을 불쌍히 여겨 사람들에게 말하는 즈음에 잘못 선장(先丈)에게 저촉됨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목천(木川)의 일에 이르러서는 듣건대, 고명이 타우(打愚)에게 준 글이 귀원(貴院)에서 목천에 답한 글과는 전연 서로 다른 바가 있고, 또 전일에 그 말을 들은 사람을 보니,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머뭇거린다고 하니, 그 언근(言根)은 자연히 돌아갈 바가 있을 것이네. 그래서 곧 스스로 감당하는 외에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 들으니, 고명의 문하(門下)에서는 내가 말이 궁해졌다고 한다 하니, 나는 마음속으로 저윽이 웃었네. 김 상서와 목천의 일은 내가 이미 인복(引服)하였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고, 평일에 선장(先丈)에게 득죄(得罪)한 것은 오로지 윤휴(尹鑴)의 일에 있었는데, 대개 그 독(毒)을 맞은 것은 내가 가장 먼저이었네. 주자(朱子)를 배척하고 스스로 자기의 학설을 세워 장차 천하의 〈정론을〉 바꾸려는데 미쳐서는 외람되게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피행(詖行)을 막는다는 의(義)에 가탁하여 극력 이를 배척하였으니, 이것이 선장에게 여러 모로 미움을 사게 됨을 면하지 못한 것이네. 내가 선장에게는 비록 일찍이 내 불복(不服)한 적이 없었으나, 또한 사문(斯文)과 세도(世道)를 위하여 근심하고 탄식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네. 윤휴가 흉패(凶悖)하여 복법(伏法)된 뒤에 이르러서는 고명이 선장을 위하여 마땅히 유원규(庾元規)가 소준(蘇峻)에게 한 일495) 과 같이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후에 저윽이 듣건대, 고명이 오히려 타우(打愚)의 음양론(陰陽論)을 배척하고 그를 부호(扶護)하는 뜻이 오히려 있다고 하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한 가지 일은 비록 선장을 위하여 미움을 받으려고 하나, 할 수가 없네. 그 우미(愚迷)함을 용서해 주기 바라네. 대저 오늘날 두 집의 도리(道理)에 있어서 나는 십분(十分) 경책(警策)하여 거의 일반지규(一班之窺)에 있고, 고명에 있어서는 단지 전에 이른바 의(義)를 좆아서 절교(絶交)를 고한다[引義告絶]는 네 자가 진실로 바꿀 수 없는 일이네."

하였는데, 윤증이 또 다시 회답하기를,

"이른바, ‘거듭 매우 엄중하게 단속한다.’는 것은 또 본정(本情) 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전일 하서(下書)에 북인(北人)을 배척하여 조리가 없고 이치에 어긋난다고 하셨으므로, 저의 마음이 감복(感服)하였는데, 이제 도리어 다시 패(悖)자의 뜻을 풀이하시기를 북인을 위해 해명하는 것 같이 하시니, 윤증(尹拯)의 실망뿐 아니라, 듣고 보는 자 또한 문하께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말의 뜻이 호건(豪健)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고 하신 말씀은 더욱 지극히 황공합니다. 지난번의 글은 정(情)이 절박하고 말이 과격(過激)함으로 말미암아 이에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만약 위노(威怒)를 거두시고 굽어 용서하신다면 혹은 가긍하게 여기시고 밉게 여기지는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른바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한 것은 단지 저의 마음이 지극히 위축되고 절박함을 말한 것일 뿐인데, 원수로 여기는 뜻이 있다고 생각하시고 《춘추(春秋)》·《예경(禮經)》까지 끌어서 하교하시니, 몹시 놀랍습니다. ‘통박하고 통각한 마음이 이와 같다면, 애석한 마음이 어디에서 생기겠느냐?’고 하신 하교는 또 문하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신 것인 듯합니다. 평생 동안 스승을 존경해야 하는 처지에 이러한 망령된 의심이 있게 되면, 어찌 개석(慨惜)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목천(木川)의 일은 또 힘써 시교(示敎)하심을 입었으나, 당초 목원(木院)에서 이곳에 통문(通文)할 적에는 무슨 일 무슨 말이라도 말하지 아니하였고, 그때에는 도처에서 향전(鄕戰)으로 벌삭(罰削)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곧, ‘추가로 적발(摘發)하여 처벌(處罰)하는 일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답하였습니다. 그 뒤에 타우(打愚)가 방백(方伯)에게 준 글로 인하여 그 어구(語句)를 들었고, 또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문하께서 전한 바에서 나온 것임을 비로소 알았는데, 그 자세함을 알고자 하여 타우에게 거듭 물었습니다. 그 뒤에 듣건대, 문하께서 통문(通文)에 답한 글을 찾아 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곳에서 그 말이 나온 것을 부끄러워하여 덮어 두고 답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곳 사우(士友)들은 이 하교가 뜻밖에 나왔으므로, 모두 당초에 목천에 답한 글이 생각이 부족하여, 그것이 무슨 말과 무슨 일이 어떤 사람에게 나온 것을 묻지 아니하고, 적발하여 처벌하는 것이 타당하지 못함을 가볍게 말하여 드디어 문하의 의심하시는 바가 되었음을 한하였습니다. 윤휴(尹鑴)의 일에 이르러서는 문하께서 또 이를 제기(提起)하시리라고는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문하께서 병진년496) 에 불초(不肖)에게 답하신 글에, ‘이미 의혹을 풀었다’고 하지 아니하셨습니까? 하물며 그 사람이 죄로 죽은 뒤에 무엇을 다시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유양(庾亮)497) 과 〈같이 하지 못한 죄가〉 과연 선인(先人)에게 해당되는지 마침내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부호(扶護)한다’고 하신 데 이르러서는 역시 ‘귀신을 실은 수레498) [載鬼之車]’입니다. 타우(打愚)의 음양론(陰陽論)은 진실로 살피고 기억하지 못하나, 그 사람의 일은 일찍이 입에 올리지도 아니하였음을 스스로 알고 있는데, 타우의 와전(訛傳)과 문하의 지나친 의심으로써 또한 장차 죄인을 부호(扶護)한 율(律)을 면하지 못하겠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김 상서(金尙書) 운운(云云)한 것은 어찌 차마 이를 제기하느냐의 문책에 극도로 위축되어 용납할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에 송이석(宋彝錫)으로 인하여 이미 문하께서 이 말씀이 있었음을 들었는데, 요즈음 듣건대, 영계(令季) 서산(瑞山)과 문하의 여러 사람들이 도처에서 입에 올려 사설이 망극(罔極)하니, 어찌 한결같이 침묵하고만 있겠습니까? 김장(金丈)의 지극한 정(情)과 통박(痛迫)한 말은 그 누가 이를 비난하겠습니까마는, 김장이 일찍이 계사년(癸巳年)499) 에 한 번 선인(先人)을 찾아 와서 또한 당시의 일을 언급하고, 인책(引責)하여 벼슬살이하지 않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고, 그 동기(同氣)의 불행함을 슬퍼하였으니, 지극한 정(情)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 살신성인(殺身成人)하여 한 집안의 의열(義烈)이 밝게 빛났으니, 죽은 자는 진실로 원망과 후회가 없을 것이고, 살아 있는 사람인들 어찌 진실로 남을 허물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김장이 선인에게 참으로, ‘잔인한 사람[忍人]일 뿐이 아니다.’라고 하는 뜻이 있었다면, 이를 원망하여 매우 깊이 배척할 것인데, 또 어찌하여 손수 추천하는 글을 올려서 우리 임금을 속이고, 때로 존신(存訊)을 더하여 그 마음을 속였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불초(不肖)는 선비(先妣)께서 자결(自決)하셨을 때 선인께서 집 안에 계시지 아니하였던 것을 오히려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어제같이 역력합니다. 선인의 자의(諮議)를 사양하고 진정(陳情)하실 때에 신재 선생(愼齋先生)500) 께 답하는 편지의 한 절목에 이르기를, ‘그때에 모(某)가 여러 사우(士友)와 모여서 처신(處身)할 바를 꾀하였는데, 망처(亡妻)가 일의 급박함을 알고 여종[婢]을 보내어 모를 맞아 오게 하였습니다. 모가 이르자, 말하기를, 「적(賊)에게 죽는 것보다는 자결하는 것만 못하니, 한 번 보고 영결(永訣)하기를 원했다.」고 하므로, 모가 차마 볼 수 없어서 사우(士友)들의 처소로 돌아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선인이 집에 있지 아니한 곡절은 진실로 불초가 기억하는 바와 부합하니 이는 그 실적(實跡)입니다. 비록 김장(金丈)께서 살아 계시다고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이미 눈으로 보지 아니한 일을 가지고 전해 들은 말을 스스로 대답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김장이 이미 죽은 지 몇 해가 되었는데, 무단히 그 말을 끌어 전파하여 선인을 헐뜯고 비방하는 구실로 삼는다면 불초의 지극히 원통한 일이 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문하의 거룩한 덕에도 손상됨이 작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송시열이 또 답하기를,

"당초에 이 일이 발생할 때 내가 듣고도 듣지 못한 것처럼 하고 말았으면 도무지 일이 없었을 것인데, 감히 망령되게 한 글을 지어서 점점 갈등이 생기게 하여 마침내 수습하지 못하는 데 이르렀으니, 내가 일을 알지 못한 소치이네. 비록 뉘우친들 어찌 미치겠는가? 그러나 보내는 글에 이미 많은 허물하여 책망하는 바가 있고, 말뜻의 호건함이 전과 다름이 없으니, 마땅히 감수해야겠지만, 그 가운데에 지극히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간략하게 다시 받들어 질문하는 바이네. 주자(朱子)의 마음을 논한 바가 상세할 뿐만 아니라, 《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에 이르기를, ‘얼굴을 들어 새를 보다가 머리를 돌리니, 사람 응대 잘못되네[仰面貧看鳥 回頭錯應人]’라고 하였는데, 이제 온 글에 이른바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는 것과 이른바, ‘애석(愛惜)하다’고 한 것이 모두 한 마음속에 있는 물건이라고 하면, 주자의 말과 어찌하여 서로 어긋나는가? 비록 그대의 설봉(舌鋒)과 필세(筆勢)로써도 사람을 굴복시킬 수는 없을 듯하네. 대저 전후에 그대가 말 가운데 나의 본원(本源)과 언행(言行)을 배척한 것은 진실로 반성할 만하나, 그 나머지는 구차스럽고도 모순(矛盾)되어 억제하여 변환(變幻)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으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가? 잔인한 사람이란 말에 이르러서는 그대가 무단히 제기하였으므로, 마음속으로 그윽이 괴이하게 여겨 당초에 김 상서(金尙書)의 심사를 대략 진술한 것뿐인데, 이것이 과연 이 사람의 죄인가? 김 상서의 앞뒤의 견해가 다른 것은 또한 어리석은 나로서는 감히 알 바가 아니니, 물가[水濱]에 가서 물어보는 것이 좋겠네. 어찌 또한 오하아몽(吳下阿蒙)501) 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부호(扶護) 두 글자는 그대가 몹시 꺼리고 싫어하는 바이나, 또한 사실이 있네. 기억하건대, 옛날 동학사(東鶴寺)의 모임에서 선장(先丈)께서 분명히 음양(陰陽)·흑백(黑白)의 논설이 있었는데, 그 뒤에 한 가지 일만 지적한 것이지 전체를 지적한 것은 아니라고 하여 나로 하여금 이(李)에게 사과하는 일까지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부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저 윤휴(尹鑴)는 감히 주자(朱子)를 헐뜯고 업신여겼으니, 이는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여 대인(大人)을 경멸하고 성인(聖人)의 말을 모독한 자로서, 흉악한 죄를 저지를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일모일발(一毛一髮)이라도 죄역(罪逆)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매우 우견(愚見)을 선장에게 드렸다가 득죄(得罪)한 것이 몹시 깊었네. 그러나 이를 전혀 한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네. 보내 온 글에 이른바 의혹을 품었다고 한 것은 그 어떠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경신년502) 후로 타우(打愚)의 음양설(陰陽說)을 배척한 것으로 보면 비록 의혹을 풀었다고 하나, 오해(誤解)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네. 타우가 일찍이 나에게 분명히 말하였으니, 나로 하여금 좌우(左右)를 믿고 타우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바가 있네. 온 글 가운데 사(師)라는 한 글자는 지극히 사람으로 하여금 곧 땅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여도 할 수 없는 것이었네. 나로 하여금 이를 감수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북소(北疏)503) 때문이니, 내가 이를 아낌없이 배척하였던 것이네. 만약 그에게 준 글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람을 의심하고 의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 둘 뿐이네. 오로지 보내온 말에 이른바 죄인을 부호(扶護)한 율(律)이라고 운운한 것은 바로 화숙(和叔)에게 준 글에 이른바 ‘화복(禍福)’이라 한 두 글자와 서로 부합하는데, 이로써 사람을 협박하는 자료로 삼으려고 하니, 나는 본래 남에게 화(禍)를 입힐 마음이 없으나, 이른바 그 사람[其人]504) 에게 복습(服習)하여 사람마다 모두 이와 같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썼다가 다시 지웠지만 오히려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한 것에 대하여 지난번의 글에 이를 잊고 답하지 아니하였는데, 이 일은 어느 때의 일인지 기억하지 못하나, 문간 선생(文簡先生)505) 께서 일찍이 《석담일기(石潭日記)》 가운데에 휴암(休菴)506) 에 관한 한 절목[款]을 손수 지우셨으나, 글자마다 오히려 분명하게 보였으니, 이것도 마음을 둠이 있다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선비(先妣)에 대해 운운한 것은 그 성효(誠孝)하는 마음에 있어 어찌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요즈음 김사보(金士輔)로 인하여 듣건대, 그대가 어머니의 죽음이 분명하지 못한 것을 주손(疇孫)507) 의 탓이라고 한다 하니, 그대가 남을 미루어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저윽이 한탄스럽네. 내가 비록 무상(無狀)할지라도 어찌 차마 허물하여 이를 본받겠는가? 대저 보내온 글에 원망과 노여움이 한층 더하여졌으니, 의(義)를 좇아 절교(絶交)를 고하는 것은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되는데, 오히려 운운하고 있으니, 우매한 나로서는 감히 알지 못할 바이네."

하였는데, 이 뒤로는 다시 왕복하지 아니하였다. 대저 윤증이 송시열에게 감원(憾怨)을 품어 온 지 오래 되었는데, 시론(時論)이 분열함을 보자, 마침내 함부로 깃발[幟]을 세우고 박세채(朴世采)에게 글을 보내어 송시열을 욕하고 헐뜯었다. 하물며 이른바, ‘신유 의서(辛酉擬書)라는 것은 【의서(擬書)는 병신년(丙申年) 최석문(崔錫文)의 상소 가운데 자세히 있다.】 극력 죄를 얽어서 기사년508) 사람의 안률론(按律論)과 더불어 한 틀에서 나온 것과 같았으니, 윤증의 견해가 본래 이와 같았다면 수십 년 머리를 숙이고 스승으로 섬긴 것은 무슨 마음이었던가? 그의 뜻이 비록 그 아비의 묘문(墓文) 때문에 원망을 품게 되었다 하나, 그 사사로운 일로 인하여 그 사람의 과실과 죄악을 늘어 놓는 것이 과연 도리이겠는가? 송시열이 그 아비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은 오로지 윤휴의 일에 있었는데, 이를 분명히 말하고 현저하게 배척하여 그 아비의 마음을 밝히지 아니하고, 도리어 송시열의 허물을 낱낱이 들어서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내는 데 여념이 없었으니, 은밀하게 윤휴를 비호하고 송시열을 배반하는 마음을 분변하기가 어럽지 아니하다. 더욱이 송시열에게 함장(函丈)과 문인(門人)의 칭호를 오히려 폐하지 아니한 채 암암리에 박세채에게 헐뜯은 그 마음가짐이 더욱 어떠한가? 송시열의 글에 답함에 미쳐서 제(齊)나라 사람의 처첩(妻妾)을 들어서 후욕(詬辱)하기까지 하였고, 또 스스로 ‘통박(痛迫)하고 통각(痛刻)하다.’고 하였으니, 그 의(義)를 처리하는 것을 다시 논할 것이 없다. 그런데 송시열이 두 번째 글에서 답(答)을 갖추지 아니한 채 이를 부치면서 변명하지 아니하니, 윤증은 다시 송시열이 혹 전의 견해를 변경할 것을 생각하여 그 답서(答書)에 애긍(哀矜)하고도 걸련(乞憐)하는 말을 지어, ‘만약 문하께서 구의(舊義)를 미루어 생각하시고, 인정으로 굽어 살피셔서 애련(哀憐)을 더해 주시면, 유명(幽明)이 함께 은혜를 받아서 의혹과 맺힌 것이 함께 풀어질 것이니, 단지 문하의 한 말씀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또 송시열은 첫 번째 글부터 이미 ‘의(義)를 좇아 절교를 고하라.’고 말하였는데, 윤증은 말하기를, ‘절교를 고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입니까? 만약 정의(情義)가 전과 같지 않다 하여 절교(絶交)한다고 이른다면, 세간(世間)의 교제에 절교하지 아니하는 자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얼굴빛과 태도의 음양(陰陽)이 반복(反覆)하는 것을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바가 있다. 비록 왕복한 글을 가지고 보더라도 송시열의 말은 간혹 함축성(含蓄性)이 적은 듯하나, 또한 명백하고 직절(直截)한데, 윤증의 글은 의위(依違)하고 연곡(攣曲)하여 그 정상(情狀)을 스스로 가리울 수가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또한 볼 수 있다.

  • [註 457] 관학(館學) : 성균관과 사학.
  • [註 458] 형서(邢恕) : 송(宋)나라 때 사람으로, 원우(元祐) 초기에 어사(御史)에 임명되고, 여러 차례 벼슬을 옮겨 어사 중승(御史中丞)에 이르렀음. 본래 정호(程顥)에게서 수학(受學)하였는데, 성품이 교활하여 공경(公卿) 사이에 교유하며 성명(聲名)을 얻게 되자, 사마광(司馬光)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곧 사마광을 모함하고 장돈(章惇)을 붙좇았으며, 이어 장돈을 배반하고 채경(蔡京)의 심복이 되었음.
  • [註 459] 강도(江都)의 변란(變亂) : 윤선거(尹宣擧)가 17세 때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청국(淸國)의 사신을 목베자고 상소(上疏)하여 척화(斥和)의 청명(淸名)을 얻었는데, 병자 호란(丙子胡亂)에 강화(江華)에 들어가서 김익겸(金益兼)·권순장(權順長) 등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익겸·권순장 2인은 죽고 그의 처 이씨는 자결(自決)하였으나, 윤선거는 성을 빠져 나와 목숨을 부지한 일을 말함.
  • [註 460] 기해년(己亥年) : 1659 현종 즉위년.
  • [註 461] 기관(機關) :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
  • [註 462] 동조(東朝) : 대비(大妃).
  • [註 463] 삼조(三朝) : 효종·현종·숙종.
  • [註 464] 경원(慶元) : 남송(南宋) 영종(寧宗)의 연호.
  • [註 465] 위학(僞學)의 비방 : 송(宋)나라 영종(寧宗) 때 주자(朱子)가 당시의 권신(權臣) 한탁주(韓侘胄)의 간사함을 탄핵하자, 한탁주가 원한을 품고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고 배척하여 주자의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도학을 하는 무리의 등용을 금한 일을 말함. 곧 탐욕과 방종은 사람의 진정이고, 청렴 결백과 수신(修身)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하여 도학을 위학이라고 하였음.
  • [註 466] 수선(首善) : 성균관을 가리킴.
  • [註 467] 화숙(和叔) : 박세채의 자(字).
  • [註 468] 목천(木川)의 일 : 윤선거(尹宣擧)를 이산 서원(尼山書院)에 배향(配享)하는 것을 반대하는 통문(通文)이 있었던 것을 말함. 그 내용 가운데 "강도(江都)의 부노(俘奴)를 어떻게 함께 배향(配享)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있었음.
  • [註 469] 타우(打愚) : 이상(李翔)의 호.
  • [註 470] 호향(互鄕) : 풍속이 나쁜 지방.
  • [註 471] 신유년 : 1681 숙종 7년.
  • [註 472] 의서(擬書) : 윤증(尹拯)이 송시열(宋時烈)의 본원(本源)과 언행(言行)을 배척하여 "의(義)와 이(利)를 같이 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아울러 썼으니, 《대학(大學)》의 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부와 같지 않다." 하였는데, 이 서찰을 써서 박세채(朴世采)에게 보이자, 박세채가 만류하여 부치지 않았음. 이후 송시열의 손자이고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宋淳錫)이 이를 박세채에게서 훔쳐 송시열에게 전하였음.
  • [註 473] 구인(九仞) : 1인(仞)은 8척(尺). 곧 72척을 말함.
  • [註 474] 권생(權生) : 권이정을 말함.
  • [註 475] 제(齊)나라 사람의 처첩(妻妾)이 안 뜰에서 원망하는 것 : 《맹자(孟子)》 이루(離婁) 하(下)에, 제(齊)나라 사람으로 처(妻)와 첩(妾)을 데리고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날마다 나가서 술과 고기를 배부르게 먹고 돌아와서 부귀(富貴)한 사람과 교유하여 함께 먹는다고 자랑하자, 이를 의심한 처가 따라가서 살피니, 성 밖 무덤에서 제사지내는 사람에게 빌어먹고 있으므로 집으로 돌아와 첩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집안 뜰에서 남편을 원망하며 울었다 함. 곧 부귀(富貴)와 영달(榮達)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어, 남이 모르는 줄 알고 저열(低劣)하고 추잡한 짓을 하는 사람을 비유한 것임.
  • [註 476] 화숙(和叔) : 박세채(朴世采)의 자(字).
  • [註 477]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 [註 478] 병진년 : 1676 숙종 2년.
  • [註 479] 무오년 : 1678 숙종 4년.
  • [註 480] 진동(陳東) : 송(宋)나라 단양(丹陽) 사람으로, 성품이 강직하여 조금도 굽히는 바가 없었음.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당시의 권신(權臣)인 채경(蔡京)·동관(童貫) 등을 탄핵하여 죽일 것을 청하고, 황잠선(黃潛善)·왕백언(汪伯彦)을 파출(罷黜)할 것을 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참소를 받아 피살되었음.
  • [註 481] 윤곡(尹穀) : 송(宋)나라 장사(長沙) 사람으로, 염정(廉正)하다는 이름을 얻었음. 몽고병(蒙古兵)이 입구(入寇)하여 담성(潭城)을 포위하였는데, 곧 함락될 위기에 처하니, 윤곡이 처자(妻子)와 이별하고 분사(焚死)하였음.
  • [註 482]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 [註 483] 신유년 : 1681 숙종 7년.
  • [註 484] 자병(疵病) : 결점.
  • [註 485] 초려(草廬) : 이유태(李惟泰)의 호(號).
  • [註 486] 미촌(美村) : 윤선거(尹宣擧)의 호(號).
  • [註 487] 고자(顧藉) : 자중(自重)함.
  • [註 488]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 [註 489] 범이불교(犯而不較) : 상대의 잘못에 대해 그 사람의 불쾌해 하는 안색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른말로 바로잡아 주되 자신과 비교하지 않는 것을 말함.
  • [註 490] 사상채(謝上蔡)가 허물을 듣고는 부끄럽고도 두려워서 땀을 흘렸고 : 사상채(謝上蔡)가 처음 정자(程子)의 문하(門下)에 들어갔을 때 《사기(史記)》의 한 조항에 언급하게 되자, 사상채가 그 전문(全文)을 외었는데, 정자가 완물상지(翫物喪志)라는 것으로 책하니, 사상채가 등에 땀이 흘렀다 함.
  • [註 491] 진소유(秦少游)가 경솔하여 이천(伊川)의 말을 듣고는 얼굴빛이 붉어 졌으니 : 진소유(秦少游)가 지은 탕자와 기녀가 이별하는 별기사(別妓詞) 내용 가운데 하늘을 언급한 것이 있었는데, 정자(程子)가, "어떻게 하늘을 모독할 수 있는가?" 하니, 진소유가 얼굴을 붉혔다 함.
  • [註 492] 범중엄(范仲淹)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의 명신(明臣).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어 정치의 개혁을 꾀하고자 12개조를 상소하였으나, 반대파 때문에 실패하였음.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 [註 493] 충선(忠宣) : 범순인(范純仁)의 시호(諡號).
  • [註 494] 김 상서(金尙書) : 김익희(金益熙)를 가리킴.
  • [註 495] 유원규(庾元規)가 소준(蘇峻)에게 한 일 : 유원규(庾元規)가 소준(蘇峻)과 처음에는 좋은 사이였고, 도간(陶侃)과는 의심스런 사이였는데, 소준이 반(叛)하자, 도간의 힘을 빌어 소준을 섬멸하였음.
  • [註 496] 병진년 : 1676 숙종 2년.
  • [註 497] 유양(庾亮) : 동진(東晋) 때 사람. 자(字)는 원규(元規).
  • [註 498] 귀신을 실은 수레 : 《주역(周易)》 규괘(睽卦)의 ‘재귀일거(載鬼一車)’를 인용한 말로, 근거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임.
  • [註 499] 계사년(癸巳年) : 1653 효종 4년.
  • [註 500] 신재 선생(愼齋先生) : 김집(金集).
  • [註 501] 오하아몽(吳下阿蒙) : 진취(進就)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 오(吳)나라 임금 손권(孫權)이 여몽(呂蒙)에게 학문을 권장했는데, 뒤에 노숙(魯肅)이 여몽을 만나 그의 지식이 진보한 것을 보고, "그대는 오하의 아몽이 아닐세." 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연유한 말임.
  • [註 502] 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503] 북소(北疏) : 최신(崔愼)의 상소를 말함.
  • [註 504] 그 사람[其人] : 윤휴를 가리킴.
  • [註 505] 문간 선생(文簡先生) : 성혼(成渾).
  • [註 506] 휴암(休菴) : 백인걸(白仁傑)의 호.
  • [註 507] 주손(疇孫) : 송시열의 손자인 송주석(宋疇錫)을 가리킴.
  • [註 508] 기사년 : 1627 인조 7년.

원문

○甲寅/館學儒生趙正萬等上疏曰:

宋之季世, 有邢恕者, 初出於程子之門, 及時事大變, 叛攻其師, 遂使邪說橫流, 君子道消, 馴致百年之禍, 臣等未嘗不痛恨於斯。 不意今者, 邢恕之事, 復出於聖明之朝, 將致人心糜潰, 世道壞亂, 士林之憂, 有不可盡言。 尹拯之受業於奉朝賀宋時烈之門, 今至三十餘年, 拯之服事之勤, 時烈許與之厚, 實非尋常師弟之比, 而拯乃以私憾, 深蓄怨怒, 形諸書尺, 詆誣無忌, 及其事發之後, 又復連章累牘, 直投師門, 資意凌踏, 益無所不至, 此豈人理之所忍爲者哉? 蓋拯之父贈參議臣宣擧, 自經江都之變亂, 屛居鄕里, 從遊師友, 篤志爲學, 一時士流, 無不推許, 時烈亦與之相善。 同時賊鑴, 假儒者之名, 遍遊於士友間, 及改《中庸》 朱子輯註, 則時烈爲之明辨痛斥, 仍與之相絶。 逮己亥議禮之事出, 而鑴乃爲 ‘卑主貳宗之說,’ 欲售其網打之計, 如先正臣宋浚吉諸人, 皆知其心術之陰凶, 亦與之相絶, 而獨宣擧之意, 不能無參差者, 故時烈深以世道爲憂, 累爲忠告, 而宣擧終不能從焉。 時烈每歎其不嚴於邪正之辦。 而及其歿也, 拯以碣文, 托於時烈, 時烈以爲, 碑碣之文, 摭實記事, 所以傳信於後世, 又以文字之於人, 循情苟譽, 以悅其心, 亦非誠實之道, 故其所論撰, 不能一如拯之所望, 此拯憾恨之所由起也。 拯猶且內懷怨怒之心, 外執師弟之禮, 陰蓄潛藏, 未嘗形之色辭, 及至今日, 乃敢乘時猝發, 詆毁譏斥, 至於此極, 蓋非一朝一夕之故也。 向者崔愼之疏, 始斥其詆誣之說, 而大臣繼陳於前席, 殿下洞燭其狀, 前後聖敎, 不啻嚴截, 則在拯之道, 宜思自省, 惕然改圖。 而乃反愈肆悖慢, 略無顧忌, 詖辭遁說, 不一其端, 臣等就其中一二略辨之。 拯之抵時烈書曰: ‘到今妄見, 未免致疑於本源之地。 不惟氣質之病, 不能矯革, 反有以長之, 此所以僭有妄論者。’ 又曰: ‘不平者私情也, 論學者公議也。’ 又曰: ‘不但文字事而已, 門下之於鄙家, 雖一事之微細, 一言之疑似, 苟有可害於先人, 則無不暴揚, 人子之心, 安得不痛刻?’ 又曰: ‘私心痛迫, 情不能如前日云。’ 旣曰痛迫痛刻, 則其怨毒之深, 從可知矣。 乃反曰: ‘不平者私情也, 論學者公議也。’ 旣有怨毒之心, 藏於其中, 則蓋將隨處觸發, 其所爲言, 自不能公, 雖曰: ‘論學者出於公議。’ 其誰欺也? 且拯之從時烈也, 如彼其久, 而其平昔質疑之際, 何故曾無一言半辭, 以及於時烈道學之醇疵? 而至以其父身後之文字爲托, 則其尊尙敬服, 亦可謂至矣, 而獨於碣文旣出之後, 乃以不能無疑於本源言行爲言, 豈時烈之本源言行, 因其碣文而始有可疑者耶? 蓋拯書首尾上下, 一句一字, 皆從私憾中出來, 故假托論學, 自稱公議, 以爲掩人耳目之計。 噫! 自古門弟子之於先生長者, 因事論辨則固多有之, 而何嘗有擧其言行之全體, 公肆詆誣如拯者乎? 時烈平生一言一動, 皆以朱子爲準則, 工夫之篤實, 門路之正大, 有以繼先儒之正脈, 爲士林之宗匠, 而至於待人制事, 亦皆出於必誠必直, 則曷嘗有一毫機關權數, 彷彿於拯言者耶? 宣擧末梢樹立, 足以掩江都之事, 且其終未悟賊鑴之惡, 亦何傷於寧受百欺之義? 而時烈則灼見其將爲世道之大患, 不得不痛斥深排, 而宣擧以志同義合之人, 獨於此事, 意見差殊, 則嗟惜之心, 安得不時發於說話, 論撰之辭, 安得不略示其斟酌? 而反致其子之仇視, 有此罔極之構誣, 君子之於斯世, 不其難乎? 拯之第四書, 論及賊鑴, 而有曰: ‘其人罪死之後, 有何更論之事云。’ 所謂 ‘罪死之稱,’ 未聞施之於凶賊之人也。 鑴之誣辱東朝, 謀危宗社之罪, 在凶黨爲首, 則今以罪死目之, 抑獨何哉? 噫! 時烈性本剛毅, 信道自守, 其心之所不是, 義理之所不可, 則雖大利害所存, 曾莫之顧憚, 觀其平生所經歷, 亦可知矣。 惟其以世道自任, 而尤所致嚴者, 在於邪正善惡之辨, 故唯彼媢嫉醜正之徒, 時出而間起, 構毁羅織, 無所不至, 而猶不敢以學術爲疵矣。 今拯乃爲眩亂之說, 欲以衊正大純粹之學, 謂可以誣一時而欺後世, 信乎世變之無所不有也。 時烈道德學問, 固未嘗以此有所增損, 而唯是人心陷溺, 義理晦塞, 雷同和附之論, 紛然而竝起, 不但使三朝之所禮遇, 士林之所尊仰, 盡歸虛地而已, 慶元僞學之謗, 將不免復起於今日, 而其流之漫, 有不可勝言。 拯之論學一語, 必將爲後日之禍祟, 則何可不辨之早, 以絶其萌芽哉?

上答曰: "人心陷溺, 義理晦塞, 乃以平日尊慕之人, 醜詆譏斥, 一至此極, 是豈但斯文之不幸而已哉? 實國家之不幸也。 頃因相臣陳達, 旣已明辨斥絶, 而爾等居首善之地, 痛賢師之被誣, 齊籲伸辨, 辭意嚴正, 予甚嘉尙也。"

初尹拯所與朴世采書旣發, 宋時烈貽書於拯曰: "高明所與和叔書, 前月偶爾得見矣, 噫! 眞藥石也。 蓋自早歲, 妄竊有意於爲已之學, 又從師門, 得聞此事, 必須讀書以明理, 克已以祛私, 此二者, 是其實功。 非不知如此, 而氣質偏駁, 行又不力, 蓋無毫髮近似者。 理旣未明, 以利爲義, 已有未克, 物欲常行, 不知不覺, 全出於人欲者多矣, 每自點檢, 不覺愧汗沾衣。 今高明所指, 皆是實病, 而義利雙行, 王覇竝用者, 尤見其過與而太恕矣。 每奉讀以還, 如鍼箚身, 不覺有警責圖新之意, 其爲受賜多矣, 比如病人, 沈痼將死, 忽有良醫, 投以神丹妙劑, 得尋生路, 則雖未知良醫本心, 果出愛已, 而其爲惠則何可量也? 此漢果以文字之過, 得罪於先丈, 而終不能開惑, 則在高明之道, 當引義告絶, 如朱子之云, 而不此之爲, 顧乃羈縻牽連, 而常以不平之意, 蓄之方寸之間, 隨處觸發, 或不知裁, 未知君子處義之道, 果如是否乎? 且自有文字草定以來, 高明之欲使改正者, 無不奉徇, 未知所以得罪者, 在於何處耶? 至於木川事, 此高明之所深怒者, 然反覆思之, 無論其事之虛實, 其語之有無, 而蓋欲打愚勿與互鄕人相從, 此蓋出於尊尙先丈之意也。 高明所論, 正是頂門上一鍼, 平生得此於士友間, 幾矣, 以此警勵, 庶幾偶然不死, 則庶有一分桑楡之功矣。 不幸有崔愼者, 北方無知人也, 忽然露章, 無倫悖理之言, 無所不至云, 極令人惶恐愧恧, 殆無以擧顔也。 雖亟以書叱責, 然遂事勿說矣, 奈何奈何? 凡此前後所言, 若不出於肝肺, 則天厭之天厭之矣。 所欲言者, 不止此, 而垂盡之喘, 危惙已甚, 口呼不能接續, 其所究宣亦無倫脊, 惟高明憐而察之也。 人之將死, 其言也善, 凡此云云, 必不出於許僞, 竝惟諒之。" 拯答之曰: "一自權生轉達僭論之後, 常切惶悚, 及聞鄙札之轉徹, 雖惶悚彌深, 而積年囁嚅而不敢進者, 得備聽覽, 又竊自幸。 忽聞北人疏出, 則悼心失圖, 爲門下咄咄不已。 不但貽辱先人, 私心痛刻而已, 父子師友, 五十餘年, 竟至此境, 惘然不知處義之道。 不料門下, 復賜收恕, 有此辱覆, 而開示牖發, 至於此勤, 以言善自保, 以天厭自失, 以無倫悖理, 叱責北人。 噫! 門下之言及此, 而猶欲自設畦畛, 以自絶於長者, 則門下不負拯, 而拯實負門下矣。 玆因下敎之言, 一一供答, 以俟裁處。 下敎曰: ‘高明所指, 皆是實病, 雙行竝用, 尤見過與而太恕。’ 此只是大綱說耳, 其詳實在辛酉擬書, 而至今不敢呈者, 誠意淺薄之罪也。 先人之於門下, 實有至誠, 見有可疑處, 皆歸之氣質之病, 而於本源則未曾致疑, 到今妄見, 未免致疑本源之地。 不惟氣質之病, 不能矯革, 而反有以長之, 此所以僭有妄論也。 門下一身之所擔負者如何? 而千里之謬, 始於毫釐, 九仞之高, 虧於一簣, 若使後之論者, 亦有如拯妄論, 則豈非大可痛惜? 而旣已見阻, 不敢發口, 其與權生語者, 只如齊人妻妾之訕於中庭, 而輾轉得罪, 以至於此, 無非見識昏昧之罪也。 良醫本心, 非出愛己之敎, 亦不敢分疏, 此古人所以: "有未信則以爲謗己之訓也。" 下敎曰: "此漢以文字之過, 得罪先丈, 不能開惑, 高明當引義告絶云云。" 又曰: ‘顧乃羈縻率連, 而常以不平之意, 蓄之方寸之間云云。’ 告絶豈容易事耶? 范忠宣不能辦於歐陽公, 則況無狀之於門下耶? 夫以情義之不能如前者, 皆謂之絶, 則世間交際, 不絶者幾希矣。 門下之言及此, 實不知所對也。 然若以與和叔書, 爲出於不平, 則實非拯之情也。 夫不平者私情也, 論學者公議也, 此只是妄見之誤入者耳。 下敎曰: ‘自有文字草定以來, 高明之所欲改者, 無不奉徇。’ 夫上文所敎: ‘終不能開惑者。’ 是指不改其總論之事耶? 若然則又何以有無不奉徇之敎耶? 文字請改, 前後凡三度, 甲寅則不肖自請也, 丙辰則門下許以改賜也, 戊午則門下使之更呈也。 初請改也, 未蒙改惠, 且敎此事不須汲汲, 故不敢再請許改也。 又有多少往復, 而末梢只以: ‘姑依和叔所籤爲敎。’ 且有 ‘弱不敵强。’ ‘山岳遞用等’戲語。 見戲如此, 安敢有三請之意乎? 其後改得若干字, 而 ‘因有依來意竄定’ 之示, 以此自不得不止, 非以爲更無所欠也。 然不但文字事而已, 門下之於鄙家, 雖一事一言, 苟害先人, 無不暴揚, 又有私心痛迫者。 門下嘗引金尙書言, 指先人爲忍人, 如此不近之說, 尙不擇虛實, 轉以語人, 人子之心, 安得不痛刻也? 下敎曰: ‘木川事, 高明之所深怒, 而蓋欲打愚, 勿與互鄕人相從, 出於尊尙先丈之意云云。’ 當時之事, 先人前後之疏, 一一自列, 而孝宗大王, 至有未聞陳東終致尹穀之死’ 之批矣。 然其得失是非, 自有後世。 且人各有見, 若論處義當否, 而公是非之, 則雖子孫, 有不敢私憾, 此言則不然。 自甲寅至辛酉, 八年之間, 自此中及木川隣近之處, 了無所聞, 而忽自門下傳出, 意者, 以告於門下者, 陰懷疵病先人之意, 故托他人, 以播其說, 使之紛然辨詰之際, 作一場詬鬨耳。 以此誠不勝痛心, 欲請其言之所出, 作書未及上。 而聞人已有仰問者, 而門下不賜說破, 反有自當未安之敎云。’ 故不勝惶恐, 竟不敢呈, 而惠書, 有問於許璜之敎矣。 然當初致疑於門下者, 誠有由焉。 昔日門下之與和叔書, 引某人恚詆之說, 而傍書江都事四字而還抹之, 若是其人之言, 則旣書還抹者何也, 抹之而使可見者何也? 其後草廬之孫李端中言: ‘先人下世後, 門下與草廬會, 門下問曰: 「美村江都事, 何以處之?」 草廬答曰: 「設有未盡, 乃學問前事, 何可以此爲疑耶?」 門下卽然而從之云。’ 往年李君喜朝, 傳門下之言於一士友, 則以門下之問, 爲草廬之問, 以草廬之答, 爲門下之答。 此誠非外人之所知, 而其有此事問答則可知。 且聞游於門下者, 往往以此事, 爲疵病先人之口實, 或有肆言而無所顧藉者如此, 則設使其言, 出於木人, 亦承望門下之餘論耳。 其後打愚奉問, 則若以其言, 爲出於柳壽芳者云, 木人奉問則便以造言自當云, 有書於此中則以爲: ‘聞於許璜。’ 而最後泰仲奉稟則以爲: ‘聞諸草廬云。’ 夫如是則迷惑之心, 雖欲無疑, 何可得也?" 時烈再書曰: "來書不能自覩, 使兒子與孫, 讀而聽之, 至兒子奉稟, 則余曰聞之草廬一款, 兒子大警曰: ‘實無此事。’ 凡世間言語如此者多, 雖一一供答, 而言者徒歸誣罔, 而聽者以爲矯开。 以故復絶意於復爲高明, 露此悃愊, 只有抱此入地, 以俟百世之公議而已"。 拯再答曰: "泰仲所傳之言, 甲寅冬以後則門下實無與草廬會合之時, 故其時固疑泰仲之誤聞矣。 所謂先人事則不肖私心, 不能無望於門下, 故不得不罄訴心曲耳。 旣以昏昧之見識, 蔽於悶迫之私情, 凡所妄生疑惑者, 豈皆得正, 若蒙門下追惟舊義, 俯察人情, 平心舒究, 曲加哀憐, 則幽明受賜, 疑結俱釋。 只在門下一言之間耳, 尤有何待於百世之事耶?" 時烈復書曰: "比來竊詳前書之意, 若以愚變改前說, 自致於無罪之地, 故申束甚嚴者, 然愚不敢如是也。 竊嘗受敎於先師, 則以爲顔子犯而不較, 非是內懷怨怒而外爲謙遜, 實出於誠心。 謝上蔡聞過慙惶, 至於汗流, 雖以秦少游之輕佻, 聞伊川說而面色駭然, 愚雖無狀, 不敢始爲矯飾, 終又反覆也。 當初愚以崔疏爲悖者, 夫一事致死何等, 師弟須如孔、顔然後, 乃有畏匡時問答, 而今以醜差體段, 混竝於父子君臣之大倫, 故鄙書云云矣。 大抵尊之前書, 語意豪健, 令人悸怖, 玆承惠書, 不翅減得十八九也。 然前書之意, 終有所不敢知者。 旣曰: ‘無不暴揚。’ 又曰: ‘痛迫痛劾云,’ 則是視以父兄之讎也。 然而以指摘瑕疵之說, 爲出於愛惜, 旣有痛迫痛劾之心, 則愛惜之心, 何從而生乎? 今日迫刻之論, 雖與《春秋》、《禮經》所謂必報者有間, 然引義告絶則決不可已也。 歐、范之契, 可謂至深, 然於范碑, 歐公果若以無爲有, 則朱先生以爲忠宣當沬血飮泣, 引義告絶。 今日高明怨怒之事, 奚但以無爲有而已耶? 且前書所謂金尙書云, 高明何忍提起此說也? 當時金尙書, 每泣血而言者, 不但曰忍人而已, 蓋傷其同氣, 不得從容就盡, 而謂出於先丈之倡之, 故言不知裁。 愚之對人說此, 曾未記得, 豈我或哀其至情痛怛, 而說人之際, 不覺其誤觸先丈耶? 至於木川事, 聞高明與打愚書, 頓與貴院答木之文相左, 而且見前日所從聞之人, 憂恐徊徨, 則其言根, 自有所歸。 故卽便自當, 自當之外, 更有何事? 而聞高明門下謂我言窮, 心竊笑之。 金尙書及木川事, 愚旣引伏, 更無可說, 至於平日得罪於先丈者, 則全在於鐫事, 蓋中其毒者, 此漢最先矣。 及其排斥朱子, 自立己說, 將有以易天下, 則猥托闢邪拒詖之義, 而極力斥之, 此於先丈, 未免有左右佩劍者也。 愚於先丈, 雖未嘗不服, 而亦爲斯文世道, 未嘗不憂歎也。 至於鐫以兇悖伏法之後, 則意謂高明爲先丈當如庾元規之於蘇峻事, 後而竊聞高明, 猶斥打愚陰陽之論, 其扶護之意, 猶在尙復何望? 此一事則雖欲爲先丈受惡, 不可得也。 幸有以恕其愚迷也。 大抵今日兩家道理, 在我十分警策, 以庶幾一斑之窺, 在高明只前所謂引義告絶四字, 實不可易底物事。" 拯又復書曰: "所謂申束甚嚴者, 又出情外。 前日下書, 斥北人以無倫悖理, 私心感服, 今却更釋悖字之義, 似若爲北人分解者然, 非但拯之失望, 聽聞亦不能無疑於門下矣。 語意豪健, 令人悸怖之諭, 尤極惶恐。 前書緣情迫辭激, 不覺至此, 倘霽威怒, 俯賜情恕, 則或以爲可矜而不以爲可惡也。 所謂痛迫痛刻之云, 只言私心隕蹙切迫之至耳。 若謂有讎之之意, 而至引《春秋》、《禮經》爲敎, 則驚愕甚矣。 迫刻之心如此, 則愛惜之心, 何從而生之敎, 又恐門下不諒人心也。 平生尊師之地, 有此妄疑, 則寧無慨惜之心? 乎木川事, 又蒙勤示, 當初木院通文於此中也, 不言某事某言, 而其時到處鄕戰, 罰削紛然, 故卽以追加摘罰事未妥當之意, 回答矣。 其後因打愚之與方伯書, 聞其語句, 而又因人始知出於門下所傳, 欲知其詳, 申叩於打愚矣。 其後聞門下索去答通之文, 以爲: ‘此中惡其言之出, 掩置不答云。’ 此中士友, 以此敎之出於意外, 咸恨當初答木之文, 欠於思量, 不問其爲某語某事, 出於某人, 而徑言摘罰之未妥, 遂爲門下所疑也。 至於尹鑴事, 不料門下, 又以提起也。 門下於丙辰答不肖之書, 不以爲已解疑云耶? 況其人罪死之後, 有何更論? 所謂庾亮之罪, 終未知果當於先人, 而至於扶護之云, 亦是載鬼之車也。 打愚陰陽之論, 實未省記其人事, 自知未嘗掛口, 而徒以打愚之傳訛, 門下之過疑, 亦將不免扶護罪人之律, 豈非命也? 惟是金尙書云云, 何忍提起之責, 隕蹙之極, 若無所容也。 年前因宋彛錫已聞門下有此說, 而近聞令季、瑞山及門下諸人, 到處騰口, 辭說罔極, 安得一向泯默? 金丈至情痛迫之語, 人誰間然? 金丈曾於癸巳, 一訪先人, 亦及當時事, 爲言引咎不仕之太過, 而哀其同己之不幸, 至情可見矣。 噫! 殺身成仁, 一家義烈炳炳, 則死者固無所怨悔, 而生者亦豈眞有尤人之意哉? 金丈之於先人, 眞有不但曰: ‘忍人而已。’ 之意, 則是怨之深斥之甚也。又安有手登薦剡, 以欺吾君, 時加存訊, 以欺其心之理乎? 不肖猶記先妣自決之時, 先人則不在家中, 至今追思, 歷歷如昨。 先人於辭諮議陳情時, 有復於愼齋先生一款曰: ‘其時某與諸士友聚, 謀處身之所, 亡妻知事急急, 遣婢邀某。 某至則曰: 「與死於賊, 不如自決, 願一見而訣耳。」 某不忍見, 走歸士友所云云。’ 其時先人, 不在家中曲折, 實與不肖所追記者合, 此其實跡也。 雖使金丈而在, 亦未必以已不目覩之事, 身質傳聞之說, 況今於金丈已沒後幾年, 無端引播其說, 以爲疵謗先人之口實, 則不但不肖之至冤極痛, 抑恐於門下盛德, 所損非細也。" 時烈又答之曰: "當初此事之發也, 使我聽而不聞而已, 則都無事矣, 而乃敢妄作一書, 以致漸生葛藤, 終至於不可收殺, 則此漢不解事之致也。 雖悔何及? 然來敎旣有許多咎責, 而辭意之健, 無異於前, 只當甘受, 而其中極有不可曉者, 略復奉質焉。 朱子論心不翅詳矣, 而於《大學》正心章曰: ‘仰面貪看鳥, 回頭錯應人。’ 今以來敎所謂: ‘痛迫痛刻’ 與所謂: ‘愛惜云者。’ 爲一心竝有之物, 則與朱子說, 何其相戾耶? 雖以尊之談鋒筆勢, 恐無以服人也。 大抵前後貴說, 其所以斥我本源言行者, 則誠可自省, 而其餘則無非苟且矛盾, 抑勒變幻者, 何爲其然耶? 至於忍人之說, 則自尊無端提起, 心竊怪之, 而略陳當初金尙書之心事而已, 此果此漢之罪耶? 至於尙書之前後異觀, 則亦非愚之所敢知, 問諸水濱可也。 豈亦非復吳下阿蒙之意耶? 扶護二字, 此尊之所甚諱惡, 而亦有事實。 記昔鶴寺之會, 先丈分明有陰陽黑白之說, 而其後乃有指一事而不指全體之云, 使我有謝李之事, 此非扶護而何? 夫鑴也乃敢疵侮朱子, 則是不知天命而狎大人侮聖言者, 不待行凶作惡, 而一毫一髮, 無非罪逆, 故每效其愚於先丈, 而得罪甚深。 然此則全不恨矣。 來敎所謂解釋云者, 不記其如何, 而以庚申後斥打愚陰陽之說觀之, 則雖曰解疑, 而未免於誤解矣。 打愚嘗以明言於愚, 使愚信左右, 不信打愚, 有所不能矣。 來書中師之一字, 極令人直欲鑽地以入而不可得也。 使我受此則實北疏之爲也, 故吾斥之無所惜矣。 若見與渠書可知矣, 人之疑不疑, 任他而已。 惟來諭所謂扶護罪人之律云云, 正與前日所與和叔書, 所謂禍福二字相合, 而欲以此爲持人之資, 愚本無禍人之心, 無乃服習於所謂其人而謂人人皆如是耶? 旣書還抹, 而猶使人見之者, 前書忘未答矣。 此事不記何時事, 然文簡先生, 嘗於《石潭日記》, 手抹休菴一款, 而字字猶鑿鑿分明, 此亦有心而可疑者耶? 至於先妣云云, 其在誠孝, 安得不然? 然日者因金士輔聞尊以母死不明, 持疇孫竊歎, 尊之不能推恕於人, 愚雖無狀, 何忍尤而效之乎? 大抵來書怨怒, 更加一層, 引義告絶, 不宜少緩, 而猶且云云, 此愚昧之所不敢知也。" 自後不復往復。 蓋拯蓄憾於時烈久矣, 及見時論携貳, 遂肆然立幟, 移書朴世采, 詬訾時烈。 而況其所謂 ‘辛酉擬書’ 者, 【疑書詳在丙申崔錫文疏中。】 極口構罪, 與己巳人按律之論, 如脫一模, 拯之見本自如此, 則累十年屈首師事者, 是何心也? 其意雖以其父墓文爲懟, 而因其私事, 臚列其人過惡者, 是果道理耶? 時烈之不滿其父, 專在鑴事, 而不肯明言顯斥, 以白其父之心, 乃反歷擧時烈之過, 構捏無餘, 其陰護鑴而反背時烈之心, 不難辦矣。 況於時烈, 則猶不廢函丈門人之稱, 而暗地訾毁於世采者, 其心尤何如也? 及其答時烈書, 至擧齊人妻妾詬辱之, 又自以爲: ‘痛迫痛刻。’ 則其處義, 無復可論。 而時烈第二書, 不爲供答, 付之無辨, 則拯復意時烈, 或變前見, 其答書, 乃作哀矜乞憐之語, 至以爲: ‘若蒙門下追惟舊義, 俯賜哀憐, 則幽明受賜, 疑結俱釋, 只在門下一言之間。’ 且時烈自初書, 已以引義告絶爲言, 而拯則以爲: ‘告絶豈是容易事? 若以情義不如前而謂之絶, 則世間交際, 不絶者幾希。’ 其色態之陰陽反覆, 有不忍正視。 雖以往復書觀之, 時烈之言, 或以少含蓄, 而亦皆明白直截, 拯書則依違攣曲, 其情狀自不可掩, 卽此而是非邪正, 亦可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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