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4권, 숙종 1년 윤5월 9일 丙申 1/3 기사 /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경연에서 허목이 이무·조사기·오정창·이수경·이서우 등을 추천하다.
국역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관(講官) 이하진(李夏鎭)이 공자가 말한 ‘부득중행장(不得中行章)’의 주(註)를 강할 적에 ‘부설불결(不屑不潔)’을 잘못 해석하여 ‘부설(不屑) 및 불결(不潔)’이라 하였다. 이에 지사(知事) 김석주(金錫胄)가 이를 지적하여 말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오정위(吳挺緯)가 이하진(李夏鎭)의 잘못 해석한 것을 덮어 주려고 임금을 우러러 말하기를,
"두 사람의 말이 다 맞습니다."
하였다. 또 ‘군자 화이부동장(君子和而不同章)’에 이르러서 참찬(參贊) 허목(許穆)이 말하기를,
"화(和)자의 뜻이 무궁(無窮)합니다. 《중용(中庸)》에도 또한 화(和)자의 뜻을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중용(中庸)》에서 말한 화(和)는 여기서 말한 화(和)자와는 뜻이 다른데, 허목(許穆)이 배우지 못하여 잘못 끌어다 댄 것이니, 당시의 소위 유신(儒臣) 강관(講官)들이란 황무(荒蕪)하고 가소(可笑)로와서 모두가 이러한 무리들이었다. ‘무항장(無恒章)’에 이르러서 이하진(李夏鎭)과 오정위(吳挺緯) 및 강관(講官) 권유(權愈)가 인군(人君)의 정치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열심히 말하였다. 이는 임금이 자기들에게 오래 맡겨서 물리치지 말게 하자는 것이었다. 오정위가 임금을 속여서 말하기를,
"인조(仁祖) 때에 장차 호패(號牌)의 제도를 시행하려 하자, 이원익(李元翼)이 말하기를, ‘시행해서는 아니됩니다.’고 하였습니다. 인조께서 그 이유를 물으시니, 이원익이 대답하기를, ‘자손(子孫)들이 항심(恒心)이 있는 자가 나온 뒤에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오정위는 본래 헛된 수작을 잘하여 전혀 근거가 없는 허탄한 말을 하고서도 은연중 그 말을 신비롭게 여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원익(李元翼)의 말을 가탁(假托)하여 임금을 기리기를 항심(恒心)이 있는 양 하여 임금에게 아첨한 것이다. 허목(許穆)이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이원익의 말은 그럴 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라 합니다."
하였다. 허목(許穆)은 곧 이원익의 손자 사위이므로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정위(吳挺緯)가 임금을 속이는 것을 보고 대략 그렇지 아니함을 말한 것이다. 이에 오정위가 부끄러워서 더 말하지 아니하였다. 김석주(金錫胄)가 말하기를,
"한가지로 하면서도 화(和)하지 아니한다.’ 함은 대개 소인(小人)들의 정상(情狀)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오늘의 여러 신하들의 정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이어서 왕안석(王安石)과 여혜경(呂惠卿)과 채경(蔡京)의 부자(父子)가 서로 배반한 일들을 차례로 말하였다. 그 당시 권대운(權大運)과 윤휴(尹鑴) 등이 당파를 나누었기 때문에 김석주의 말이 이러하였다. 허목(許穆)이 말을 올리기를,
"이무(李袤)는 이산해(李山海)의 손자요 이경전(李慶全)의 아들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경전의 문장이 이산해보다 낫고 이무의 문장이 이경전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무를〉 문한(文翰)의 직임에 등용하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문장은 하늘과 땅의 정영(精英)한 기운이어서 창업(創業)476) 할 때에는 자연히 나오는 법인데, 수성(守成)477) 하는 임금이 이를 북돋아 기르면 하늘의 운수도 또한 열릴 것입니다. 한때 권장(勸奬)하는 것은 제왕(帝王)에게 달렸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사기(趙嗣基)는 당초에 용사(用事)하는 자들에게 미움을 사서 귀양까지 갔습니다. 그를 먼저 거두어 쓰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종일(金宗一)은 영남(嶺南)에서 명예(名譽)가 있던 사람입니다만, 정치가 어지러워진 뒤로부터는 〈벼슬길에〉 나오지 아니하고 늙도록 몸을 깨끗이 가졌다가 미처 등용되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애석합니다. 비록 특별히 증직(贈職)할 만한 공(功)은 없습니다만, 몸을 깨끗이 가져 더러운 데 물들지 않은 것으로써 표창(表彰)하시면 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하진(李夏鎭)이 말하기를,
"김종일(金宗一)은 나이 80세였으니, 이로써 추가(追加)하여 〈증직하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하니, 김석주(金錫胄)가 말하기를,
"김종일은 나이 79세입니다. 김종일은 국휼(國恤)478) 때에 취처(娶妻)하였다 하여 논박(論駁)을 받았고, 이내 등용되지 못하였습니다."
하므로, 이하진이 말하기를,
"김종일은 원래 재취(再娶)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김종일에게〉 증직(贈職)을 명하였다. 허목이 또,
"오정창(吳挺昌)과 이수경(李壽慶)은 문학(文學)이 있고 정직하며, 이서우(李瑞雨)는 문예(文藝)가 있고 권수(權脩)는 재국(才局)이 있으니, 모두 크게 쓸 만합니다."
하고 추천하니, 임금이 전조(銓曹)에 분부하도록 하였다. 이산해(李山海)는 비록 소인(小人)이긴 하나, 그의 문재(文才)는 일세에 뛰어났었다. 이경전(李慶全)도 또한 문장에 능하였으나 아직 진수(眞髓)는 얻지 못하였으며, 이무(李袤)는 대강 사조(詞藻)에 섭렵(涉獵)은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에게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씨 집안이 대대로 간사하고 음흉한 짓을 일삼았으므로, 삼대(三代) 가운데서 악한 것이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한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문장을 가지고 말하는 자는 차례로 한 등급씩 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도 허목은 이무를 끌어다가 문병(文柄)을 절취(竊取)하게 하려고 하여 말하기를 ‘이무의 문장이 가장 우수하니, 이무에게 문한(文翰)의 직임을 맡기면 하늘과 땅의 정영(精英)한 기운을 내게 될 것이라.’ 하였다. 김종일(金宗一)은 일찍 과거에 올라서 삼사(三司)를 두루 역임하였고, 일찍이 궁관(宮官)479) 으로서 심양(瀋陽)에 갔을 적에 동료(同僚) 정뇌경(鄭雷卿)과 일을 같이 하였는데, 정뇌경은 죽었는데도 김종일은 구차스럽게 모면하였으니, 사람들이 박(薄)하게 여겼다. 또 〈김종일은〉 그 뿌리가 미천하다는 말도 있어서 이 때문에 청도(淸途)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축년480) 에 상주 목사(尙州牧師)가 되어 나갔을 적에 그의 버린 첩(妾)이 공공연한 말로 소문을 퍼뜨리기를 ‘김종일이 국휼(國恤)의 장례(葬禮) 뒤에 곧 재취(再娶)하였다.’ 하여, 대간(臺諫)이 그의 파직(罷職)을 주장하였으나, 조사하여 보니 그러한 사실이 없어 그대로 유임(留任)하기를 명하였다. 그 뒤에 다시 장가들어서 두 아들을 낳았으며, 나이 쇠로(衰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도 허목은 〈김종일이〉 정치가 어지러웠던 때에 몸을 깨끗이 가졌다.’ 하여 추증(追贈)하기를 청하는 데 이르렀고, 이하진은 ‘〈김종일은〉 원래 재취하지 않았다.’ 하고 또 나이를 올려 80세라고 하였다. 허목 등이 선조(先朝)를 무함하고 임금을 속이는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이서우(李瑞雨)는 대북파(大北派)의 여얼(餘孼)로서 사람됨이 도리어 거슬리고 망령되었으며, 조사기(趙嗣基)와 이수경(李壽慶)은 간사하고 독하였고, 오정창(吳挺昌)은 음흉하였고, 권수(權脩)는 용렬하였는데도 허목에게는 다 함께 심복(心腹)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추천한 것이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김종일(金宗一)은 본래 한 용렬한 사람일 뿐이었다. 전에는 구차스럽게 면한 죄가 있었고, 뒤에는 뿌리가 미천하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나가서는 웅주(雄州)를 맡아 다스렸고, 들어와서는 시정(寺正)이 되었으며, 고향에 귀로(歸老)하여 죽었으니, 그에 있어서 또한 다행하다 하겠다. 그런데도 허목은 ‘〈김종일이〉 정치가 어지러웠던 날에 몸을 깨끗하게 가졌다.’ 하여 표창하는 은전(恩典)을 청하였다. 옛 말에 숨어 사는 자로서 세상을 피하는 것을 몸을 깨끗이 가진다.’ 하였고, 권신(權臣)이 정치를 좌우하는 것을 ‘어지러운 정치’라 하였다. 그런데 이제 〈김종일을〉 정치가 어지러운 날에 몸을 깨끗이 가졌다고 말하여 추증(追贈)하기를 청하기까지 한 것은 이는 진실로 임금을 어둡고 용렬한 것으로 여기고 그 시대를 혼탁(混濁)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종일(金宗一)이 다시 청도(淸途)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 효종(孝宗)의 초정(初政)부터였으니, 그렇다면 허목은 효종과 현종(顯宗)을 어떠한 임금으로 여겼기에 방자스럽게도 이러한 말을 하여 무함(誣陷)하고 욕되게 하였단 말인가? 〈허목이〉 말한 바, ‘중흥(中興)’이나 ‘나라의 명령을 쥐었다.’는 등의 말을 합쳐서 보면, 선조(先朝)에게 유감을 품은 뜻이니, 아! 너무나 참혹하다. 이것이 어찌 인신(人臣)으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랴? 그리고 또 그가 말한 바, ‘김종일은 증직(贈職)할 만한 공(功)이 없다.’ 한 것은 그 자신은 예론(禮論)에 공이 있었지마는 김종일은 이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그 스스로가 복제(服制)의 의논을 하나의 큰 공(功)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말이 항상 이와 같았다. 설사 복제(服制)의 의논에 잘됨과 못됨이 있었다 한들 그것이 무슨 공을 논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어찌 통탄(痛歎)할 일이 아니랴? 더욱이 허목(許穆)이 만일 김종일(金宗一)이 어진 사람이어서 증직을 할 만하다고 여겼다면, 김종일의 죽음은 아직 몇날도 되지 않았는데 허목이 전조(銓曹)를 맡은 것은 매우 오래 전부터였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었을 적에는 어찌해서 한 번도 청선(淸選)에 추천하지 않고는 그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추증(追贈)을 청하여서 마치 절의(節義)의 선비를 포장[褒揚]하는 것 같이 하였는가? 그의 간사함과 기망(欺罔)하는 정상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임금이 그가 선왕(先王)을 욕되게 하고 성총(聖聰)을 속이는 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8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476] 창업(創業) : 나라를 처음으로 엶.
- [註 477] 수성(守成) :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지켜 나아감.
- [註 478] 국휼(國恤) : 국상(國喪).
- [註 479] 궁관(宮官) : 동궁(東宮)에 딸려 있던 벼슬아치.
- [註 480]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원문
○丙申/御晝講。 講官李夏鎭講子曰不得中行章註, 誤釋不屑不潔爲不屑及不潔。 知事金錫冑言之, 特進官吳挺緯欲掩夏鎭之誤, 仰曰: "兩說皆可。" 至君子和而不同章, 參贊許穆曰: "和字義無窮。 《中庸》亦言和字之義。" 《中庸》之和, 異此和字, 而穆不學謬引也。 時所謂儒臣講官, 荒蕪可笑, 皆此類也。 至無恒章, 夏鎭、挺緯及講官權愈盛言人君政治恒久不變之意, 欲上久任渠輩而不退之也。 挺緯仍欺上曰: "仁祖朝將行號牌, 李元翼以爲不可行。 仁祖問其故, 元翼對以子孫有恒心者出而後可行。" 挺緯素善浮談, 白地爲虛辭, 隱然神其說。 託李元翼之言, 仍譽上謂有恒心以媚上。 穆曰: "臣聞元翼之言以爲, 不得人則不可行云耳。" 穆卽元翼孫壻, 詳知之, 故見挺緯欺誑, 略言其不然, 挺緯慙而止。 錫冑曰: "同而不和, 蓋言小人情狀, 而卽今群臣情狀, 亦可見也。" 仍歷言王安石、呂惠卿、蔡京父子相背之事。 時, 大運、鑴等分黨, 故錫冑之言如此。 穆進曰: "李袤乃山海之孫, 慶全之子。 人言慶全之文勝於山海, 而袤之文, 勝於慶全。 若用於文翰之任, 豈不美乎? 文章乃天地精英之氣, 創業之時, 自然生出。 至於守成之君, 培養之, 則天運亦開。 一時勸奬, 在帝王矣。" 又言: "趙嗣基當初見忤於用事者, 至於竄配, 當先爲收用。" 又曰: "金宗一嶺南有名譽之人, 而自政亂之後不出。 潔身終老, 不及用而死可惜。 雖別無可贈之功, 而以其潔身無汚染, 表章之則豈不美乎?" 夏鎭曰: "宗一年八十, 以此追加亦可。" 錫冑曰: "宗一年七十九。 宗一以國恤時娶妻被駁, 仍以不用。" 夏鎭曰: "宗一元不再娶。" 上命贈職。 穆又薦吳挺昌、李壽慶有文學正直, 李瑞雨有文藝, 權脩有才局, 俱可大用, 上許令分付銓曹。 山海雖小人, 而文才絶世; 慶全亦能文, 而未得膏腴; 袤擩染詞藻, 而又不及於父。 李家世濟奸兇, 未知三世之惡, 孰輕孰重, 而論文者以爲遞降一等。 穆欲引袤, 竊文柄乃曰: "袤文最優, 置袤文翰之任, 則可生天地精英之氣也。" 宗一早登第, 踐歷三司, 嘗以宮官入瀋, 與同僚鄭雷卿同事。 雷卿死而宗一苟免, 人薄之。 且有賤根之說, 以此見塞淸途。 己丑, 出爲尙州牧使, 其棄妾揚言: "宗一於國恤葬後, 卽爲再娶。" 臺諫論罷, 按之無實, 乃命仍任。 後娶婦生二子, 以衰老還鄕不仕。 穆乃言潔身於政亂之時, 至請追贈, 夏鎭言元不再娶, 又增年爲八十, 穆等之誣先朝、欺君上, 皆此類也。 瑞雨大北餘孽, 而爲人悖妄。 嗣基、壽慶邪毒, 挺昌陰兇, 脩庸陋, 而俱爲心腹於穆, 故薦之也。
【史臣曰: "宗一本一庸人耳。 前有苟免之罪, 後有賤根之言。 猶復出典雄州, 入爲寺正, 歸老其鄕而死, 於渠亦幸矣。 穆乃言潔身於政亂之日, 請加以表章之典。 古語有以隱者避世爲潔身; 權臣用事爲亂政。 而若謂之潔身政亂之日, 至於請贈, 則苟非以君爲昏庸, 時爲混濁, 則不敢然矣。 宗一之不得復入淸途, 自孝廟初政, 則穆以孝廟、顯廟爲何如主, 而肆然爲此語, 誣辱之哉? 與其所言中興執國命等說, 合而見之, 其逞憾先朝之意, 吁亦慘矣。 是豈人臣之所忍聞乎? 且其所謂宗一無可贈之功云者, 言渠則有功於禮論, 而宗一則不與云也。 自以服制之議, 爲一大功, 故其言每常如此。 設令服制有得失, 有何功之可論乎? 豈不痛哉? 況使穆如以宗一賢而可贈, 則宗一之死, 纔有日矣, 穆之秉銓, 其亦久矣。 於其生前, 何不一擬於淸選, 至其死後, 始請追贈, 有若褒揚節義之士耶? 其妖邪欺誑之狀, 一至於此, 而上不悟其辱先王而罔聖聰, 豈不惜哉?"】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8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숙종실록4권, 숙종 1년 윤5월 9일 丙申 1/3 기사 /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경연에서 허목이 이무·조사기·오정창·이수경·이서우 등을 추천하다.
국역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관(講官) 이하진(李夏鎭)이 공자가 말한 ‘부득중행장(不得中行章)’의 주(註)를 강할 적에 ‘부설불결(不屑不潔)’을 잘못 해석하여 ‘부설(不屑) 및 불결(不潔)’이라 하였다. 이에 지사(知事) 김석주(金錫胄)가 이를 지적하여 말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오정위(吳挺緯)가 이하진(李夏鎭)의 잘못 해석한 것을 덮어 주려고 임금을 우러러 말하기를,
"두 사람의 말이 다 맞습니다."
하였다. 또 ‘군자 화이부동장(君子和而不同章)’에 이르러서 참찬(參贊) 허목(許穆)이 말하기를,
"화(和)자의 뜻이 무궁(無窮)합니다. 《중용(中庸)》에도 또한 화(和)자의 뜻을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중용(中庸)》에서 말한 화(和)는 여기서 말한 화(和)자와는 뜻이 다른데, 허목(許穆)이 배우지 못하여 잘못 끌어다 댄 것이니, 당시의 소위 유신(儒臣) 강관(講官)들이란 황무(荒蕪)하고 가소(可笑)로와서 모두가 이러한 무리들이었다. ‘무항장(無恒章)’에 이르러서 이하진(李夏鎭)과 오정위(吳挺緯) 및 강관(講官) 권유(權愈)가 인군(人君)의 정치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열심히 말하였다. 이는 임금이 자기들에게 오래 맡겨서 물리치지 말게 하자는 것이었다. 오정위가 임금을 속여서 말하기를,
"인조(仁祖) 때에 장차 호패(號牌)의 제도를 시행하려 하자, 이원익(李元翼)이 말하기를, ‘시행해서는 아니됩니다.’고 하였습니다. 인조께서 그 이유를 물으시니, 이원익이 대답하기를, ‘자손(子孫)들이 항심(恒心)이 있는 자가 나온 뒤에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오정위는 본래 헛된 수작을 잘하여 전혀 근거가 없는 허탄한 말을 하고서도 은연중 그 말을 신비롭게 여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원익(李元翼)의 말을 가탁(假托)하여 임금을 기리기를 항심(恒心)이 있는 양 하여 임금에게 아첨한 것이다. 허목(許穆)이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이원익의 말은 그럴 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라 합니다."
하였다. 허목(許穆)은 곧 이원익의 손자 사위이므로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정위(吳挺緯)가 임금을 속이는 것을 보고 대략 그렇지 아니함을 말한 것이다. 이에 오정위가 부끄러워서 더 말하지 아니하였다. 김석주(金錫胄)가 말하기를,
"한가지로 하면서도 화(和)하지 아니한다.’ 함은 대개 소인(小人)들의 정상(情狀)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오늘의 여러 신하들의 정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이어서 왕안석(王安石)과 여혜경(呂惠卿)과 채경(蔡京)의 부자(父子)가 서로 배반한 일들을 차례로 말하였다. 그 당시 권대운(權大運)과 윤휴(尹鑴) 등이 당파를 나누었기 때문에 김석주의 말이 이러하였다. 허목(許穆)이 말을 올리기를,
"이무(李袤)는 이산해(李山海)의 손자요 이경전(李慶全)의 아들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경전의 문장이 이산해보다 낫고 이무의 문장이 이경전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무를〉 문한(文翰)의 직임에 등용하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문장은 하늘과 땅의 정영(精英)한 기운이어서 창업(創業)476) 할 때에는 자연히 나오는 법인데, 수성(守成)477) 하는 임금이 이를 북돋아 기르면 하늘의 운수도 또한 열릴 것입니다. 한때 권장(勸奬)하는 것은 제왕(帝王)에게 달렸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사기(趙嗣基)는 당초에 용사(用事)하는 자들에게 미움을 사서 귀양까지 갔습니다. 그를 먼저 거두어 쓰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종일(金宗一)은 영남(嶺南)에서 명예(名譽)가 있던 사람입니다만, 정치가 어지러워진 뒤로부터는 〈벼슬길에〉 나오지 아니하고 늙도록 몸을 깨끗이 가졌다가 미처 등용되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애석합니다. 비록 특별히 증직(贈職)할 만한 공(功)은 없습니다만, 몸을 깨끗이 가져 더러운 데 물들지 않은 것으로써 표창(表彰)하시면 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하진(李夏鎭)이 말하기를,
"김종일(金宗一)은 나이 80세였으니, 이로써 추가(追加)하여 〈증직하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하니, 김석주(金錫胄)가 말하기를,
"김종일은 나이 79세입니다. 김종일은 국휼(國恤)478) 때에 취처(娶妻)하였다 하여 논박(論駁)을 받았고, 이내 등용되지 못하였습니다."
하므로, 이하진이 말하기를,
"김종일은 원래 재취(再娶)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김종일에게〉 증직(贈職)을 명하였다. 허목이 또,
"오정창(吳挺昌)과 이수경(李壽慶)은 문학(文學)이 있고 정직하며, 이서우(李瑞雨)는 문예(文藝)가 있고 권수(權脩)는 재국(才局)이 있으니, 모두 크게 쓸 만합니다."
하고 추천하니, 임금이 전조(銓曹)에 분부하도록 하였다. 이산해(李山海)는 비록 소인(小人)이긴 하나, 그의 문재(文才)는 일세에 뛰어났었다. 이경전(李慶全)도 또한 문장에 능하였으나 아직 진수(眞髓)는 얻지 못하였으며, 이무(李袤)는 대강 사조(詞藻)에 섭렵(涉獵)은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에게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씨 집안이 대대로 간사하고 음흉한 짓을 일삼았으므로, 삼대(三代) 가운데서 악한 것이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한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문장을 가지고 말하는 자는 차례로 한 등급씩 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도 허목은 이무를 끌어다가 문병(文柄)을 절취(竊取)하게 하려고 하여 말하기를 ‘이무의 문장이 가장 우수하니, 이무에게 문한(文翰)의 직임을 맡기면 하늘과 땅의 정영(精英)한 기운을 내게 될 것이라.’ 하였다. 김종일(金宗一)은 일찍 과거에 올라서 삼사(三司)를 두루 역임하였고, 일찍이 궁관(宮官)479) 으로서 심양(瀋陽)에 갔을 적에 동료(同僚) 정뇌경(鄭雷卿)과 일을 같이 하였는데, 정뇌경은 죽었는데도 김종일은 구차스럽게 모면하였으니, 사람들이 박(薄)하게 여겼다. 또 〈김종일은〉 그 뿌리가 미천하다는 말도 있어서 이 때문에 청도(淸途)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축년480) 에 상주 목사(尙州牧師)가 되어 나갔을 적에 그의 버린 첩(妾)이 공공연한 말로 소문을 퍼뜨리기를 ‘김종일이 국휼(國恤)의 장례(葬禮) 뒤에 곧 재취(再娶)하였다.’ 하여, 대간(臺諫)이 그의 파직(罷職)을 주장하였으나, 조사하여 보니 그러한 사실이 없어 그대로 유임(留任)하기를 명하였다. 그 뒤에 다시 장가들어서 두 아들을 낳았으며, 나이 쇠로(衰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도 허목은 〈김종일이〉 정치가 어지러웠던 때에 몸을 깨끗이 가졌다.’ 하여 추증(追贈)하기를 청하는 데 이르렀고, 이하진은 ‘〈김종일은〉 원래 재취하지 않았다.’ 하고 또 나이를 올려 80세라고 하였다. 허목 등이 선조(先朝)를 무함하고 임금을 속이는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이서우(李瑞雨)는 대북파(大北派)의 여얼(餘孼)로서 사람됨이 도리어 거슬리고 망령되었으며, 조사기(趙嗣基)와 이수경(李壽慶)은 간사하고 독하였고, 오정창(吳挺昌)은 음흉하였고, 권수(權脩)는 용렬하였는데도 허목에게는 다 함께 심복(心腹)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추천한 것이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김종일(金宗一)은 본래 한 용렬한 사람일 뿐이었다. 전에는 구차스럽게 면한 죄가 있었고, 뒤에는 뿌리가 미천하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나가서는 웅주(雄州)를 맡아 다스렸고, 들어와서는 시정(寺正)이 되었으며, 고향에 귀로(歸老)하여 죽었으니, 그에 있어서 또한 다행하다 하겠다. 그런데도 허목은 ‘〈김종일이〉 정치가 어지러웠던 날에 몸을 깨끗하게 가졌다.’ 하여 표창하는 은전(恩典)을 청하였다. 옛 말에 숨어 사는 자로서 세상을 피하는 것을 몸을 깨끗이 가진다.’ 하였고, 권신(權臣)이 정치를 좌우하는 것을 ‘어지러운 정치’라 하였다. 그런데 이제 〈김종일을〉 정치가 어지러운 날에 몸을 깨끗이 가졌다고 말하여 추증(追贈)하기를 청하기까지 한 것은 이는 진실로 임금을 어둡고 용렬한 것으로 여기고 그 시대를 혼탁(混濁)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종일(金宗一)이 다시 청도(淸途)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 효종(孝宗)의 초정(初政)부터였으니, 그렇다면 허목은 효종과 현종(顯宗)을 어떠한 임금으로 여겼기에 방자스럽게도 이러한 말을 하여 무함(誣陷)하고 욕되게 하였단 말인가? 〈허목이〉 말한 바, ‘중흥(中興)’이나 ‘나라의 명령을 쥐었다.’는 등의 말을 합쳐서 보면, 선조(先朝)에게 유감을 품은 뜻이니, 아! 너무나 참혹하다. 이것이 어찌 인신(人臣)으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랴? 그리고 또 그가 말한 바, ‘김종일은 증직(贈職)할 만한 공(功)이 없다.’ 한 것은 그 자신은 예론(禮論)에 공이 있었지마는 김종일은 이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그 스스로가 복제(服制)의 의논을 하나의 큰 공(功)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말이 항상 이와 같았다. 설사 복제(服制)의 의논에 잘됨과 못됨이 있었다 한들 그것이 무슨 공을 논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어찌 통탄(痛歎)할 일이 아니랴? 더욱이 허목(許穆)이 만일 김종일(金宗一)이 어진 사람이어서 증직을 할 만하다고 여겼다면, 김종일의 죽음은 아직 몇날도 되지 않았는데 허목이 전조(銓曹)를 맡은 것은 매우 오래 전부터였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었을 적에는 어찌해서 한 번도 청선(淸選)에 추천하지 않고는 그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추증(追贈)을 청하여서 마치 절의(節義)의 선비를 포장[褒揚]하는 것 같이 하였는가? 그의 간사함과 기망(欺罔)하는 정상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임금이 그가 선왕(先王)을 욕되게 하고 성총(聖聰)을 속이는 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8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476] 창업(創業) : 나라를 처음으로 엶.
- [註 477] 수성(守成) :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지켜 나아감.
- [註 478] 국휼(國恤) : 국상(國喪).
- [註 479] 궁관(宮官) : 동궁(東宮)에 딸려 있던 벼슬아치.
- [註 480]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원문
○丙申/御晝講。 講官李夏鎭講子曰不得中行章註, 誤釋不屑不潔爲不屑及不潔。 知事金錫冑言之, 特進官吳挺緯欲掩夏鎭之誤, 仰曰: "兩說皆可。" 至君子和而不同章, 參贊許穆曰: "和字義無窮。 《中庸》亦言和字之義。" 《中庸》之和, 異此和字, 而穆不學謬引也。 時所謂儒臣講官, 荒蕪可笑, 皆此類也。 至無恒章, 夏鎭、挺緯及講官權愈盛言人君政治恒久不變之意, 欲上久任渠輩而不退之也。 挺緯仍欺上曰: "仁祖朝將行號牌, 李元翼以爲不可行。 仁祖問其故, 元翼對以子孫有恒心者出而後可行。" 挺緯素善浮談, 白地爲虛辭, 隱然神其說。 託李元翼之言, 仍譽上謂有恒心以媚上。 穆曰: "臣聞元翼之言以爲, 不得人則不可行云耳。" 穆卽元翼孫壻, 詳知之, 故見挺緯欺誑, 略言其不然, 挺緯慙而止。 錫冑曰: "同而不和, 蓋言小人情狀, 而卽今群臣情狀, 亦可見也。" 仍歷言王安石、呂惠卿、蔡京父子相背之事。 時, 大運、鑴等分黨, 故錫冑之言如此。 穆進曰: "李袤乃山海之孫, 慶全之子。 人言慶全之文勝於山海, 而袤之文, 勝於慶全。 若用於文翰之任, 豈不美乎? 文章乃天地精英之氣, 創業之時, 自然生出。 至於守成之君, 培養之, 則天運亦開。 一時勸奬, 在帝王矣。" 又言: "趙嗣基當初見忤於用事者, 至於竄配, 當先爲收用。" 又曰: "金宗一嶺南有名譽之人, 而自政亂之後不出。 潔身終老, 不及用而死可惜。 雖別無可贈之功, 而以其潔身無汚染, 表章之則豈不美乎?" 夏鎭曰: "宗一年八十, 以此追加亦可。" 錫冑曰: "宗一年七十九。 宗一以國恤時娶妻被駁, 仍以不用。" 夏鎭曰: "宗一元不再娶。" 上命贈職。 穆又薦吳挺昌、李壽慶有文學正直, 李瑞雨有文藝, 權脩有才局, 俱可大用, 上許令分付銓曹。 山海雖小人, 而文才絶世; 慶全亦能文, 而未得膏腴; 袤擩染詞藻, 而又不及於父。 李家世濟奸兇, 未知三世之惡, 孰輕孰重, 而論文者以爲遞降一等。 穆欲引袤, 竊文柄乃曰: "袤文最優, 置袤文翰之任, 則可生天地精英之氣也。" 宗一早登第, 踐歷三司, 嘗以宮官入瀋, 與同僚鄭雷卿同事。 雷卿死而宗一苟免, 人薄之。 且有賤根之說, 以此見塞淸途。 己丑, 出爲尙州牧使, 其棄妾揚言: "宗一於國恤葬後, 卽爲再娶。" 臺諫論罷, 按之無實, 乃命仍任。 後娶婦生二子, 以衰老還鄕不仕。 穆乃言潔身於政亂之時, 至請追贈, 夏鎭言元不再娶, 又增年爲八十, 穆等之誣先朝、欺君上, 皆此類也。 瑞雨大北餘孽, 而爲人悖妄。 嗣基、壽慶邪毒, 挺昌陰兇, 脩庸陋, 而俱爲心腹於穆, 故薦之也。
【史臣曰: "宗一本一庸人耳。 前有苟免之罪, 後有賤根之言。 猶復出典雄州, 入爲寺正, 歸老其鄕而死, 於渠亦幸矣。 穆乃言潔身於政亂之日, 請加以表章之典。 古語有以隱者避世爲潔身; 權臣用事爲亂政。 而若謂之潔身政亂之日, 至於請贈, 則苟非以君爲昏庸, 時爲混濁, 則不敢然矣。 宗一之不得復入淸途, 自孝廟初政, 則穆以孝廟、顯廟爲何如主, 而肆然爲此語, 誣辱之哉? 與其所言中興執國命等說, 合而見之, 其逞憾先朝之意, 吁亦慘矣。 是豈人臣之所忍聞乎? 且其所謂宗一無可贈之功云者, 言渠則有功於禮論, 而宗一則不與云也。 自以服制之議, 爲一大功, 故其言每常如此。 設令服制有得失, 有何功之可論乎? 豈不痛哉? 況使穆如以宗一賢而可贈, 則宗一之死, 纔有日矣, 穆之秉銓, 其亦久矣。 於其生前, 何不一擬於淸選, 至其死後, 始請追贈, 有若褒揚節義之士耶? 其妖邪欺誑之狀, 一至於此, 而上不悟其辱先王而罔聖聰, 豈不惜哉?"】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8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